제11강, 십자가와 부활(1)

기독교가 뭐꼬 조회 수 3950 추천 수 0 2012.02.11 19:08:29

제11강

십자가와 부활(1)

 

 

긴말 필요 없이 십자가와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이라, 그냥 편하게 생각해 보세요. 편하게 생각하라는 말은 안이하게 생각하라는 게 아니라 선입견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 보라는 뜻입니다. 제가 신앙생활을 시작했을 때 누가 이런 식으로 가르쳐 주었다면 기독교의 신앙에 좀 더 일치하도록 자기가 경험하는 구도 안에서 생각했을 텐데요. 그렇게 가르쳐 주지 않고 너무 교리적으로만 가르쳐 줬어요. 그렇게 가르쳐 주니까 그런가 보다 한 거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우리 죄를 대신해 죽었다는 식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실제로 그것이 무슨 내용인지를 설명해야 합니다. 그것을 설명하려면 가능한 한 신학자들에게 도움을 받아야 해요. 모든 것들이 다 신학적인 내용들이니까요.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기독교의 가르침이나 도그마들을 스스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상식적으로도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지금까지 자기가 이해한 삶의 경험을 바탕에 놓고 생각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이게 되지 않으면 기독교 신앙과 자기의 삶은 평행선만 긋습니다. 그렇게 평행선만 긋게 되면 바울이 말했듯이 신앙이 말에만 머물러 있지 능력으로 나타나지 않거든요.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에 있다고 했잖아요. 여기에서 말하는 능력은 기적을 행한다거나 크고 놀라운 일들을 행한다는 뜻이기 보다도 신앙이 자기의 삶과 일치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일치되는 경험이나 신앙을 맛볼 수 없는 거죠. 기독교가 말하는 가르침과 자기의 실제적인 삶이 하나가 될 때 신앙과 삶이 일치되는 능력이 생깁니다.

능력이라는 말도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못하는 일을 크게 행한다든지, 기적을 일으킨다든지, 특별한 카리스마를 행하는 것으로 많이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자신의 삶의 세계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게 큰 능력이거든요. 사실 그게 참 어려운 겁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가르침들, 특히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려고 하는 십자가나 부활 사건 등이 많은 경우에 공중에 뜬 이야기처럼 되어 버립니다. 구구단을 외우듯이 그냥 말로는 잘하는데, 실제 십자가와 부활 사건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하는 거죠. 제가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가르치고 있는 혹은 가리키고 있는 내용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여러 번 말한 이유가 바로 그겁니다. 기독교 신앙이 시작될 때부터 그런 훈련들을 꾸준히 했어야 하는데, 대개는 그런 훈련들을 잘 받지 못했어요. 그리고 이제는 너무 굳어져 버려서 잘 안 됩니다. 잘못된 습관은 고치기가 참 힘들거든요. 어떤 경우에는 신앙생활을 오래 하지 않은 사람들이 더 잘 알아들을 때가 있어요. 그렇게 기독교 신앙이 삶과 유리된 것으로, 신앙의 정보를 알아듣는 것으로 머물러 있게 되면, 그리고 그런 상태가 축적되고 반복되면 나중에는 상당히 고치기가 힘듭니다.

 

왜 십자가인가?

십자가와 부활을 잘 생각해 보라고 한 말입니다. 예수라는 역사적인 인물이, 한 유대인 남자가 로마의 사형법인 십자가에 처형되었다고 하는 사건이 도대체 온 인류와 혹은 나 개인과 어떤 상관이 있는가 하는 거죠. 조금 다르게 질문한다면 하나님이 왜 그런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만 인류를 구원했어야 하는가 하는 겁니다.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요? 왜 십자가를 통해서만 구원했어야 했을까요? 십자가 처형이 구원의 길이라고 말하잖아요? 꼭 그래야만 했느냐는 질문입니다. 이런 질문들을 비신앙적이라고 혹은 믿음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죽었다 깨어나도 기독교 신앙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요. 그냥 광신자는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참된 신앙의 능력을 갖기는 힘듭니다. 광신자는 능력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불안해서 그런 거예요. 광신자는 신앙의 내용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없거든요. 그 대신 자기가 믿고 있다는 사실에만 관심을 갖죠.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이죠. 참된 믿음이란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을 갖는 게 아니거든요. 어떤 글에서도 썼지만, 참된 믿음이란 믿고 있는 자신마저도 신뢰하지 않는 겁니다. 믿어야 될 대상만을 신뢰하는 거죠. 그분이 어떻게 구원을 일으키는가에 대한 철저한 신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광신자라는 표현이 좀 그렇지만, 하여튼 그들은 실제적으로 신앙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어요. 하나님에 대해서 열려 있지도 않고, 자기가 믿는다는 사실에만 집착을 하니까요. 그런 신앙에는 자폐증과 비슷한 정신 병리학적인 문제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거예요. 물론 기독교 신앙이 상식에만 머물러 있는 건 아니죠. 그러나 상식을 바탕에 두고 새로운 세계로 나가는 게 기독교 신앙이거든요. 기독교인들은 세상 사람들보다 더 합리적이고 논리적이어야 합니다. 기독교에 대한 신비, 하나님에 대한 신비는 그 다음의 문제거든요. 그런데 그 중간 단계가 없는 상태, 즉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현실을 분명하게 뚫어볼 수 있는 직관이나 통찰력이 없는 상태에서는 자기가 믿고 있는 신앙을 해명할 자신이 없으니까 결국 불안해지고 광신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도대체 왜 십자가로만 구원을 받아야 하는 걸까요? 이 질문을 끝까지 해야 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이 기독교 메시지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케리그마입니다. 모든 설교는 결국 십자가와 부활로, 더 궁극적으로는 부활로 나아가야 합니다. 저도 그렇게 설교를 합니다만 여전히 십자가에 대한 질문이 제게 남아 있습니다. 바로 앞서 말한 질문들을 지금도 꾸준히 질문하고 있어요. 왜 하나님은 유대인 남자가 죽은 십자가의 사건을 인류 구원의 길이라고 말했는가? 왜 우리는 그 십자가의 사건을 구원의 길이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하나님이 정말 그렇게 생각했을까? 이런 문제들은 계시론과도 연관이 됩니다. 이러한 기독교의 교리나 가르침들은 어느 한쪽으로만 말을 하다가는 방향을 놓칠 가능성이 많아요.

 

성서 해석에 대해

이야기가 옆으로 나가더라도 이해해주세요. 지난해(2007년) 11월 초에 한국설교학회 심포지엄이 열렸습니다. 거기에 두 분의 신학대학교 교수님들이 발제 강연을 했는데요. 그 글이 <기독교 사상> 12월호에 실렸구요. 그걸 제가 다비아 <설교비평> 메뉴에 올렸습니다. 몇몇 분들이 코멘트를 달았더군요. 저도 시간이 되는 대로 조금씩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저는 류응렬 교수님이나 정인교 교수님에게 개인적인 감정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분들의 글을 읽고 제가 나름대로 반응을 하는 것으로 다비안들에게 뭔가를 말하기 위해서죠. 그 생각이 나서 지금 말하는 겁니다. 제가 보기에는 정인교 교수님보다 류응렬 교수님의 글이 훨씬 수가 높다는 생각이 들어요. 정인교 교수님은 너무 도식적으로, 교과서적으로 글을 쓰려고 노력한 흔적이 많이 보였어요. 제가 느끼기에는 글의 흐름이 자연스럽지 못하고 글을 쓰기 위해서 쓴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편 류응렬 교수님은 전반적으로 글의 흐름이 굉장히 깨끗했습니다. 좋았어요. 읽기도 편하고요. 그분들은 저의 설교에 대해서만 언급한 게 아니라 한국교계 전체에 일어났던 설교비평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주로 저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죠. 그걸 전체적으로 코멘트 하기는 뭐하고요. 단지 저에 대해 류응렬 교수님이 지적한 한 부분만 짚어 보려고 합니다. 전반적으로 저를 칭찬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고맙게 생각해요.

그분이 문제로 제기한 가장 중요한 것이 제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훼손한다는 점이었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신화라고 하느냐는 거였죠. 그런데 그분이 착각한 게 하나 있어요. 제가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한 게 아니라 그 안에 신화적인 요소가 있다고 한 겁니다. 그분이 오해하는 것은 성서에 신화적인 요소가 있다고 하면 그걸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말한 것으로 생각한다는 거예요. 이게 착각인데요. 성서해석학에 대한 이해가 좀 부족한 데서 벌어진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신화적인 방식을 통해서도 말씀하거든요. 성서 안에 신화만 있습니까? 소설도 있고, 에세이도 있고, 시도 있고, 역사도 있죠. 역사라는 것도 실증적인 역사가 아니라 당연히 해석된 역사입니다. 구약의 역사서들도 실증적인 게 아니라 신명기사가에 의해 해석된 것으로 보거든요. 그걸 신명기사관이라고 하는데, 신명기적인 입장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해석한 겁니다. 그러니까 성서에 나와 있는 역사들은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사실이 아니죠. 성서뿐 아니라 모든 역사 기술이 실증적일 수 없습니다. 그것을 쓴 사람, 거기에 참여한 사람들의 해석이 나름대로 들어가게 되니까요.

이번에 제가 서울 오프 모임에서 강의할 내용의 제목이 ‘다윗의 통곡’인데요. 언젠가 제가 설교한 내용입니다. 그걸 중심으로 풀었는데, 아주 재미있어요. 사무엘상하와 열왕기상하는 이스라엘의 역사 전체를 다루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분명히 이스라엘의 고유한 역사관이 들어있어요. 특별히 다윗 왕조를 중심으로 한 역사거든요. 역사 기술은 결국 승리자의 입장에서 쓰게 됩니다. 그래서 거기에 모든 다윗왕조가 나오는 것입니다. 다윗왕조는 메시아의 가문이도 했지만, 사울과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승리자였어요. 여러분이 성서에 나오는 사울과 다윗을 보면서, 다윗은 참 좋은 왕이고 사울은 못된 왕이라는 내용을 너무 사실적으로 받아들이면 좀 곤란합니다. 거기에는 역사를 보는 눈이 작용했기 때문이죠. 그게 틀렸다는 게 아닙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고 있으며, 오늘날의 우리는 이것을 나름대로 해석해야 하는 거죠. 성서자체가 역사해석입니다. 모든 텍스트는 해석이거든요. 이미 해석된 텍스트란 말이죠. 그런 뜻에서 본다면 성서자체도 해석된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성서를 읽는 우리도 당연히 해석을 해야겠죠. 그러한 해석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가 우리에게 드러납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류응렬 교수님은 또 다른 이야기를 할 겁니다. 그러나 성서의 신화적인 요소를 사실적인 것으로 해석하고 설교하게 되면, 고대인들의 신화적 세계관으로 우리를 끌어들이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잘못된 해석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러한 저의 판단에 대해 그분은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신화라는 말로 훼손시킨다고 한 것 같아요. 이런 관점은 설교학이나 실천신학을 전공한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데, 이것은 신학 전체에 대한 포괄적인 생각들이 부족한 데서 기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전이해가 공통으로 밑바탕에 자리 잡고 있어야 하는데, 그런 전이해가 없으면 또 다시 그 문제를 가지고 싸우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진도는 안 나가고 매번 그 자리로 다시 돌아오게 되죠.

 

십자가에 대한 열린 질문

다시 본 강의로 돌아가겠습니다. 십자가와 부활 사건으로요. 우리는 계속 이런 것에 대해서 질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굉장히 중요한 요소예요. 기독교 신앙을 심화시키고 바르게 나가게 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또 한 번 질문하겠습니다. 이것은 저 스스로를 향한 질문이기도 한데요. 도대체 왜 하나님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만 인류를 구원하는 걸까요?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유대인들은 십자가 사건을 통한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이 잘못된 걸까요? 꼭 그런 것만은 아닐 겁니다. 예수님이 부활한 걸 어떻게 증명합니까? 증명의 문제는 말한 것 같은데요. 증명할 수 없습니다. 증명할 수 없는 여기에 뭔가가 들어 있는 겁니다. 십자가와 부활이 명명백백하게 인류를 위한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없어요. 다만 우리는 그것을 변증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변증들은 얼토당토않은 것이 아니라 타당성이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지난 2천 년 동안 많은 노력들을 했습니다. 그 노력은 지금까지도 끝나지 않았고요. 오늘날에도 신학이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지난 2천 년 동안에도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는데, 아직까지도 신학자들이 자기 삶 전체를 투자하면서 핏대를 올리며 뭔가를 말하려고 한다는 것은 기독교가 말하는 가르침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기독교의 가르침이 근거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에게 계속해서 뭔가를 질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질문에 우리가 대답을 하면서 신앙적으로 소통하는 거예요. 그것이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구원의 길이라고 하는 가르침이 하나의 공식으로 끝나고 만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도그마에 머물러 있는 겁니다. 우리의 삶과는 거리가 있는 도그마 말이에요. 우리의 삶과 거리가 있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이 오늘 우리가 처한 삶의 자리에서 실질적으로 역동적으로 자리하지 못하고 그냥 믿는다고 말만 하는 어떤 것으로 머물러 버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절대 그렇지 않아요.

앞으로 당분간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말할 텐데요. 이것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문제입니다. 오늘의 개인 실존에게는 물론 역사 전체를 향해서도, 오늘의 신자유주의를 향해서도 그래요. 십자가와 부활은 전체적인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도전하고 질문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신앙의 문제로 안으면서 삶을 이끌어가는 것이 바로 영성이고요. 그 과정에서 성령의 역사(役事)를 통해 우리가 반듯하고 확실한 대답들을 발견하기도 하고 경험하기도 하는 겁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그 사건에 충실하면 됩니다. 우리가 모든 걸 다할 수는 없어요. 그럼 역사가 흘러가면서 우리의 후손들이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겠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그것을 어떻게 생각했는가,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우리의 삶의 내용으로 삼을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잖아요? 단순히 주문을 외우듯이 우리의 욕구를 성취하는 어떤 도구로 사용할 수는 없잖아요. 그 문구를 다시 사용할게요. 신앙을 도구화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십자가 사건을 이용해서 구원을 받아야겠다, 만족을 얻어야겠다, 하지 말라는 거예요. 십자가와 부활 사건은 이용하고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 세계 안으로 들어간다고 표현했는데, 사실은 그 외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십자가와 부활 사건은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존재론적인 하나님의 통치 행위예요. 따라서 우리가 그 세계를 어느 정도 이해했다고 해도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그 맥락을 여러분이 잘 이해해야 해요. 우리는 우리가 짜놓은 프로그램에 안에 들어가 있으면 뭔가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하죠? 그건 큰 착각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 스스로가 하는 것으로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걸 우리는 용납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죠. 내가 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니까요. 미안합니다. 다른 이야기가 많았네요. 실제적으로 십자가와 부활 사건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말이죠.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예수님의 공생애는 대략 3년 가까이 됩니다. 그 삶은 아주 단순했어요.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길지도 않은 그 거리를, 복음서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한두 번 가고는 삶을 마쳤습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시작해 점점 남하하다가, 결국 예루살렘에 들어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이야기죠. 다른 성인들, 즉 다른 종교 창시자들에 비해서 예수님의 삶은 너무 짧았어요. 예수님과 비교해서 부처님은 천수를 다했습니다. 공자도 그렇고요. 마호메트는 몇 살까지 살았나요? 그분도 상당히 오래 살았을 겁니다. 적어도 예수님보다는 오래 살았을 거예요. 공생애가 3년이라고는 하지만, 짧게 보면 1년 반 정도거든요. 그 기간이 아주 짧았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정보를 많이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짧은 시간과 좁은 지역에 살았던 것에 비해서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는 겁니다. 다행이죠. 다른 부분들은 여러분이 다 잘 알고 있는 이야기니까 생략하겠습니다. 강의안을 참고하고요.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부분을 먼저 짚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왜 종교 지도자들에게서 미움을 샀을까요? 뭐가 문제였을까요? 복음서에는 그 이유가 뚜렷하게 나오고 있기는 합니다. 세 가지인데요. 첫째는 예수님이 반(反)율법주의자로서 율법을 잘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고, 둘째는 반성전주의자로서 예루살렘 성전을 상대화한다는 것이고, 셋째는 반도덕주의자로서 죄인들과 어울려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들이 그 당시의 세련된 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에게는 좋게 보이지 않았던 거죠. 그래서 예수님이 체포를 당하게 되는데요. 예수님이 율법을 반대하고 성전을 반대하고 도덕을 반대했다고 하지만, 사실은 반대한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온전히 하나님 나라의 통치에 자신을 던진 분이거든요.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보다 자신들이 세운 어떤 체제, 전통, 율법 등을 절대적으로 생각했던 종교지도자들과 바리새인들은 당연히 자기들을 반대하는 사람으로 예수님을 낙인찍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위기 속에서도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 하더냐?”(마 16:13)고 질문한 적이 있었고요.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서 직접적인 언질도 몇 번 했습니다. 하여튼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체포당하면 죽는다는 걸 느꼈을 거예요.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이 예루살렘과 가까운 곳에 이렀을 때 나귀새끼를 끌고 오라고 하는 사건이 나오는데요. 이런 것들이 얼마나 실제적인 역사와 부합하는지는 사실 잘 모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에 대한 일들은 누군가가 그 자리에서 일어난 사건을 기록해 놓은 것이 아니라 나중에 그것을 회상하며 말로 구전되다가 문자화 된 것이기 때문이죠. 거기에 많은 것들이 가미도 되고 빠지기도 했어요.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전혀 터무니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제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몇 가지만 짚어보겠는데요. 유월절 만찬, 겟세마네 기도, 체포당한 것, 공판, 십자가형의 집행 등이 중요합니다. 갈릴리에서 사마리아 지역을 거쳐 유대지역에 올 때까지,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귀신을 쫓아내기도 하고 비유를 들어 여러 가지 말씀도 전했거든요. 그러나 그런 것들은 다 접어두고 예수님의 마지막 생애 중에서,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과 연결된 중요한 사건들만 정리하겠습니다.

 

밥상 공동체

밥상 공동체라는 소제목을 붙였는데요. 유월절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내용이니까 길게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예수님의 유월절 만찬이 우리에게 성만찬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에서 중요한 요소입니다. 우선 여러분들에게 보내드린 제 강의안에서 한 대목만 읽겠습니다.

예수님이 지상에서 삶을 끝내야 할 바로 그 순간에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함께 나눈 유월절 만찬은 기독교 공동체의 정체성을 명증하게 드러내 주는 사건이다. 말 그대로 밥상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이다. 어떤 사람들은 둘레상 공동체라고 표현한다. 예수가 지향하는 하나님 나라는 늘 밥상 공동체적 기초에서 이해된다는 말이다. 오늘의 교회도 이런 지향성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해방의 날인 유월절이 이제는 참된 나눔과 친교가 이루어지는 축제가 되었다. 정치적 해방이 이제는 분리와 소외로부터의 해방이 되었다. 결국 우리는 예수의 최후의 만찬을 통해서 구원의 참 의미를 상징적으로 깨닫게 된다. 전통이 기독교 예배의 성찬식으로 전승되었다.

한 상에 둘러앉아서 뭔가를 먹고 나눈다는 것은 결국 분리와 소외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아니냐는 겁니다. 교회가 밥상 공동체의 성격을 확보해야 된다는 거죠. 예수님의 마지막 유월절 만찬에서도 드러났고 2천 년 동안 기독교 교회가 성만찬을 지속했다는 점에서도 이것은 확실하게 드러났거든요. 다만 그것이 오늘 교회 안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드러나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여러분 스스로가 대답해야 하는 거겠죠. 우리가 결식하는 자들 혹은 노숙자들과 밥을 나누는 것도 그것의 일환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칫하면 그것이 하나의 행사로 끝날 수가 있거든요. 일단 내가 뭔가를 베푼다고 생각하게 되면, 그것은 밥상 공동체로서의 의미를 상실하는 겁니다. 노숙자들과 굶는 자들에게 밥을 먹이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이 사회가 더 정의로워지도록 투쟁하는 거예요. 우리 사회는 지금 계속해서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어요. 정치인들이 세금을 걷어서 올바로 쓰지 못하고 있는데도, 교회가 입도 뻥긋하지 못하면서 봉사나 하는 것으로 기독교의 밥상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확보하려고 한다면, 이 세계를 잘 모르는 것이고 그 책임을 확실하게 지지 못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남북분단은 참 심각한 문제죠. 미국에서 전투기나 헬기 같은 것들을 몇 대만 사오지 않거나 국방비의 10%만 줄이더라도, 결식자들을 위해 많은 부분을 사용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 점에서 아마 테레사 수녀가 욕을 먹는 것 같아요. 그 나라의 부조리들에 대해서는 왜 침묵 하냐는 거죠. 침묵하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그 부조리들을 합리화하는 길마저 열어 주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거예요. 거기까지는 너무 지나친 비판 같고요. 테레사 수녀는 훌륭하게 자기가 맡은 부분을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중대형교회들이 경쟁적으로 결식자들에게 밥을 나눠 주는 일이 도대체 기독교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냐는 거죠. 물론 그게 나쁜 일은 아니죠.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든다는 거예요. 밥상 공동체가 그렇게 낭만적인 문제는 아닙니다. 고대사회와는 달리 오늘날에는 모든 문제가 구조적으로 생기기 때문에, 구조적인 관점에서 투쟁하며 해결해야 합니다. 비정규직인가요?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잖아요. 얼마 전 한국 기독교의 대표기업인 이랜드에서 비정규직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 사건에서도 똑바로 보았듯이, 이랜드가 그런 일들은 쉽게 처리해버리면서도 상당한 돈을 선교비로 쓰거든요. 아마 이랜드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때문에 벌어들인 돈으로 결식자들을 많이 도왔을 거예요. 이런 점을 놓고 볼 때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뱀처럼 슬기로울 필요가 있습니다. 이 세계를 똑바로 보아야 해요.

밥상 공동체라는 말을 여러분에게 하는 것은, 이 말을 낭만적으로 즐겁게 밥 먹는 일로만 생각하지 말고, 또는 우리 교회에서도 하고는 있지만 예배 후에 식사하고 친교를 나누는 정도로만 끝나지 말고 교회 밖으로 더 나아가자는 뜻입니다.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제3세계에 사는 어린아이들이 노동으로 인해 학대당하고 있잖아요. 한국교회가 모든 일을 도맡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가능한 대로 구조적인 불평등, 다시 말해 구조적으로 밥상 공동체가 깨지는 것에도 마음을 써야 합니다. 알겠죠? 예수님의 이 밥상 공동체, 교회에서 행하는 성찬 예식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에요. 세계 전체가 진정한 코이노니아를 나누어야 합니다. 세계가 같이 나누는 거예요. 세계에서 큰 나라들을 OECD라고 할 수 있을까요? 혹은 G7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하여튼 그런 나라들이 실제로 제3세계와 같이 밥상에 둘러앉아서 먹어야 한다는 사유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기독교는 바로 그것을 지향하고 있어요. 그런데 기독교 국가라고 하는 선진국들이 기독교 정신으로 살지 않고 있는 거죠. 미국이 그런 경향이 강한데, 미국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우리나라도 기독교 신앙을 개인의 차원에서만 생각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 다음은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던 날 저녁에 행한 기도의 내용입니다. “이 잔을 나에게서 거두어주소서”(막 14:36).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왜 이런 기도를 드렸을까요? 죽음이 두려웠을까요? 그럴 리야 없겠죠. 물론 한편으로 생각하면 죽음이라는 것은 모든 것으로부터의 단절이기 때문에 두려운 대상임에 분명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으면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도 세상에 없을 거예요. 우리의 몸도 다 흙으로 돌아갈 뿐만 아니라 우리가 행한 모든 것들이 사라지게 되고,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도 다 따라서 죽게 될 테니까요. 그러면 우리가 세상에 있었는지도 모르는 그런 세계가 되겠군요. 죽음은 참 두려운 대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음 때문에 그렇게 잔을 옮겨달라고 기도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예수님의 죽음을 소크라테스와 비교해 보면, 소크라테스는 굉장히 스토아적인 생각을 가진 것 같아요. 평정심을 잃지 않고 죽음을 받아들였으니까요. 그에 비해 예수님은 다소 인간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에 대해 글을 쓴 사람들도 있는데요.

제가 보기에 예수님의 잔을 물리쳐 달라는 호소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죽음에 대한 이해가 달랐어요. 죽음에 대한 기독교적인 이해와 철학적인 이해가 다르거든요. 헬라 철학은 영과 육을 이원론적으로 바라봅니다. 그 관점에서는 육이 악하기 때문에 죽는다는 게 축복이죠. 영은 영원하고 본질이며 이데아에 속한 거니까 죽음은 해방인 거예요.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이라고 할 수 있죠. 열반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나 기독교적인 전통에서는 영과 육이 하나거든요. 정말 온전히 죽는 겁니다. 자기의 정체성이 다 사라지는 거예요. 여기에서 영혼 불멸설이 어떻게 연관되는지 궁금할 텐데요. 그것은 또 다른 문제여서 설명하기가 힘듭니다. 어쨌든 기독교는 죽음을 심각한 문제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죽는 것을 죄의 결과로 보는 거예요. 죄는 곧 하나님과의 단절입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이 갈 수 밖에 없는 길이 죽음이죠. 단순하게 육은 죽지만 영은 산다고 하는 이원론적인 헬라 철학과는 달리 기독교는 전체적인 죽음을 생각하기 때문에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기도할 수밖에 없는 이유라고 할 수 있겠죠.

둘째로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두려워한 그 본질이 무엇이냐에 있습니다. 아무리 죽음이 두렵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이 실제로 그것 때문에 몸부림치지는 않았을 거예요.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이 예수님만 있었던 게 아니거든요. 애국자들도 십자가에서 많이 죽었습니다. 반로마 혁명을 일으킨 수백 수천의 사람들이 십자가에서 죽었어요. 십자가에 달려 죽을 때 정말 힘들어서 신음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아마 “유대 나라, 만세!”라고 고함치며 자랑스럽게 죽은 사람들도 있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엇을 두려워했던 걸까요? 아마도 죽음 자체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자기가 온전히 참여했었던, 하나가 되려고 했었던, 하나님의 온전한 뜻이라고 생각했었던 하나님의 나라가 이렇게 끝나서야 되겠느냐 하는 절망감이 아니었을까요? 생각해 보세요. 그분은 십자가 앞에서 어떤 희망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에 많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고쳤어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죠. 게다가 자신을 통해서 메시아 사건들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온전히 자신과 함께 한다는 경험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하나님에게 순종하면서 가는 이 길이 인류 구원의 길이라고 여기고 그 길을 걸어갔을 겁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죽음이었거든요. 이건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지금 제 말이 이상하게 들리나요? 잘 생각해보세요. 예수님이 ‘내가 이렇게 십자가에서 죽으면 인간들이 구원받을 것이다.’ 하고 확신했을까요? 저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에는 어느 누구도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인간을 구원하는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당연히 예수님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고요. 제가 너무 단정적으로 말해서 좀 거북스럽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렇게라도 확실하게 강조해야 여러분의 생각이 열리지 않을까 해서 하는 말이니까 이해해 주세요. 그렇다고 해서 지금 제가 틀린 말을 하는 건 아닙니다. 제가 설교비평을 하면서 가끔 비아냥거린 부분들이 있었어요. 오해의 소지가 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저를 직접 만나면, 글보다는 사람이 다르다고 말하더군요. 글의 어조는 강한데, 사람을 보면 좀 유하니까 다르다고 느끼나 봅니다. 아마도 그와 같은 제 글의 특성이 사람의 마음을 좀 흔드는 게 아닌가 하고요. 그렇다고 제가 없는 말을 하지는 않거든요. 지나가는 길에 변명 한마디 했습니다.

예수님이 처음부터 내가 이 길로 가게 되면 십자가에 달려 죽을 거라고 생각했을까요? 나중에야 누가 보더라도 예수님의 임박한 죽음을 느꼈지만 말이에요. 예수님이 처음부터 그 길을 간 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는다면, 자기가 그 동안 한 일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는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건 자신이 기대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결과였거든요. 그러니 이 잔을 옮겨달라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거죠. 십자가의 죽음은 완전히 실패니까요. 전달이 되나요? 이렇게만 말하면 오해가 생길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어쨌든 이 부분을 그렇게 생각해 보세요. 마지막에 예수님은 그 생각에 머물지 않고 아버지의 원대로 해달라는 기도를 했습니다. 결국은 순종한 거죠. 거기에 핵심이 있어요. 예수님은 일부러 십자가를 진 게 아니라, 순종한 겁니다. 예수님에게는 자신이 꼭 십자가에 죽어야 한다는 확신이 없었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라면 가야 한다고 생각한 거예요. 제가 기독교 신앙은 믿고 있는 자기 자신도 신뢰하지 않는 거라고, 하나님만 신뢰하는 거라고 말했는데, 이것과 모두 연관되는 것입니다. 제가 굳이 예수님을 인간적인 차원에서 설명하자면 이래요. 예수님은 개인적으로도 ‘이건 아닌 것 같아요. 이렇게 하면 모든 게 끝장나는 거예요.’라고 생각했고, 그 어디에서도 구원의 조짐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민중들도 믿을 만한 대상이 아니었죠. 5천명이 넘게 따라다녔지만 순식간에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 돌을 던졌거든요. 이것이 민중신학의 한계입니다. 민중신학은 민중을 지나치게 이상화해요. 그렇다고 엘리트주의가 이상적이라는 것도 아닙니다. 포퓰리즘이든 엘리트주의든 간에 그것을 절대화하면 바른 신앙이 아니고, 현실적으로도 옳지 않아요.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조차 믿을 수 없고 아무런 희망도 없는 막막한 상태에서 힘들게 투쟁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이스라엘의 종교는 변할 조짐이 전혀 보이지 않았던 거죠. 자기를 따르던 사람들이 흩어졌어요. 아무도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자기 가족들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런 상태에서 자기에게 돌아온 것은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절망이죠. 피하고 싶죠. 다른 길이 없냐고 하나님께 묻고 싶은 거죠. 그러나 다른 길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라는 기도로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받아들였습니다. 순종이죠. 확신하지 못하는 순종, 거기에 긴장이 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죽은 다음에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하세요? 부활할 거라고 생각하세요? 부활이 뭔지 아나요? 기독교 신앙은 모든 것을 확인해서 믿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타당한 근거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증적인 것은 아니거든요.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에 근거한 확실성을 갖고 있을 뿐이죠. 이게 애매하기도 하고 역동적이기도 하고 유기적이기도 하고 다소 변증법적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렇게 살았어요. 십자가의 처형으로 다 끝날 것 같은 막막함 속에서 말이죠. 그러나 다른 길이 눈에 보이지 않고 그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그러한 깨달음 속에서 예수님은 돌아가셨습니다.

그 다음에 제 강의안에서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는 대목이 나오는데요. 이것은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비폭력에서 자주 인용되는 이야기인데요. 과연 기독교 윤리가 비폭력을 절대화하는가 하는 것도 논의가 많이 필요합니다. 비폭력을 그 바탕에 깔고는 있지만, 이 세계가 그걸 많이 악용하고 있거든요. 그렇다면 똑같이 폭력을 사용해야 할까요? 그것이 기독교의 신앙은 아니겠지만 반(反)폭력, 즉 폭력에 반대하기 위한 소극적인 폭력은 가능하지 않겠는가 하는 거죠. 지금은 기독교 윤리를 말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접겠습니다. 어쨌든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이 사건은 마지막 순간에 벌어졌던 에피소드입니다. 없어도 되는 거죠. 없어도 되는 건데 거기에 들어왔습니다. 예수님을 설명하는 데는 이것이 없어도 지장이 없는데 들어왔어요. 칼로 체포당한 예수를 따르는 기독교가 칼의 역사를 심심치 않게 자행해 왔다는 것은 참으로 비극적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정통 교회는 조금만 자신과 다른 이야기를 해도 종교재판에 처했죠. 점성술사들, 수사들, 자유주의 과학자들, 인문주의자들, 집시들, 혹은 마녀들이라는 사람들에게도 박해를 가했습니다. 칼에 의해서 체포당한 예수님을 따르는 기독교가 다시 칼로 폭력을 행사한 전력이 있다는 것에 대해 우리 기독교가 부끄럽게 생각하고 회개하면서 진정한 하나님의 평화를 위해 나가야겠죠. 지금 이렇게 이야기하면 설교조가 되는데요. 삶이 그렇지 않으니까 그게 어려운 거죠. 칼, 칼을 준비해야 하나요? 하지 말아야 하나요? 시간이 5분 남았네요. 급한 질문만 있으면 문자로 주세요.

 

예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해

“이 세상에 살아 계실 때 예수님의 신성은 제한을 받았나요?”라는 질문이 올라왔습니다. 신성과 인성의 문제인데요. 이런 것들은 자로 재듯이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설명하려면 먼저 신성이 무엇인지를 정리해야 하거든요. 보통 우리는 초능력, 역사초월, 창조의 능력을 신성이라고 합니다. 전혀 변하지 않는 불변, 영원한 생명 등을 신성이라고 하죠. 신성을 그런 것들로만 생각한다면, 지상의 예수님은 신성에서 철저히 제약을 받았습니다. 제약을 받은 정도가 아니라 그냥 온전한 인간이었죠. 신성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 신성은 유대교적인 신성이라고 할 수 있어요. 기독교에서는 자기를 제한시키는 차원의 신성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초능력자가 아니라 무능력한 자로서 자기의 신성을 낮춘다는 거죠. 십자가에 달린 게 바로 무능력의 표현이거든요. 목마르다고 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신성이 땅으로 낮아진 겁니다. ‘케노시스’(κένωσις) 라고 하죠. 그것을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새로운 하나님 이해로 받아들입니다. 예수님이 당했던 모든 인간적인 한계들이 신성이에요. 신성과 인성은 칼로 딱 잘라서 나눌 수 있는 게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하나가 된 겁니다. 우리는 신성을, 인성을 뛰어 넘는 어떤 것으로 생각하는데요. 기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적인 한계와 일치되도록 자기를 낮추신 하나님이라는 거죠. 이것이 삼위일체론의 단초에요. 이것은 굉장히 역동적인 하나님 이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패러다임을 바꿔야만 해요. 하나님이라고 하면 자꾸 창조나 종말과 같은 큰 것들만 생각하는데, 우리의 한계 안에 들어와 있는 예수님을 생각하는 하나님 이해도 필요합니다. 신성이 무엇인지는 우리가 다 몰라요. 다만 우리가 아는 한계 안에서 개념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중이죠. 종말에 가면 그 모든 실체가 드러나게 될 겁니다. 지금은 그 과정 중에 있어요.

성부와 성자가 하나죠. 양측이 서로 의존적입니다. 지금 이런 질문들은 삼위일체론의 핵심인데요. 하나님은 자존자, 단독자로서 성부 하나님입니다. 단독자이면서 동시에 인간 예수에게 철저하게 의존하고 있어요. 기독교적인 하나님 이해에서는 하나님 스스로만 하나님이 아닌 거예요. 그러니까 앞서 말한 것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신성과 인성을 칼로 잘라 내듯이 할 수 없다는 말이요. 우리는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한 것만큼만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계시가 온전히 예수를 통해 드러났다고 우리는 믿고 있는 거죠. 초월이면서 동시에 내재하는 겁니다. 이걸 말장난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더 할 말은 없죠. 이걸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학적 사유가 필요합니다. 제가 자꾸 신학적 사유, 개념, 언어, 사건, 세계에 대해 말하잖아요? 궁극적인 것들은 그런 방식이 아니면 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물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니라 그 사물을 창조한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 있거든요. 하여튼 한 학기 동안 제가 여러분에게 가르쳐 드릴 게 많지는 않습니다. 평신도지만 우리가 어떻게 신학적인 사유를 할 수 있는가, 그걸 가르치는 게 핵심이거든요. 제가 많은 말을 하지만, 사실 책을 읽으면 다 나오는 말들이에요. 그러나 혼자서 책을 보면 그게 잘 들어오지 않아요. 그런 점에서 신학적 사유는 직접 강의를 듣는 게 굉장히 유익합니다. 글만 읽어서는 한계가 있거든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면서 여러분이 신학적인 사유를 할 수 있게 하려는 거예요.

두 번째 질문은 밥상 공동체를 위해서 투쟁하는 삶과 하나님의 배타적 구원과는 어떤 상관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밥상 공동체에서 투쟁하는 것과 하나님의 배타적 구원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예요. 물론 멀리 보면 연결될 수 있겠죠. 하나님의 배타적 구원이라는 말은 구원 자체가 배타적이라는 건데요. 구원은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떤 삶의 문제들을 개선해가면서 이루어가는 게 아니라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밥상 공동체를 이룰 필요가 없지 않은가 하는 질문인가 본데요. 하나님만이 온전히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간다는 전제에서 볼 때, 우리는 그 하나님 나라에 청지기로서 참여합니다. 이런 설명으로 대답이 될 수 있을까요? 거기에도 긴장이 있습니다. 우리가 세계 정의나 평화로운 밥상 공동체를 이룬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그대로 이루어지는 건 아니거든요. 그렇게 되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우리가 참여하는 거죠. 그런 전제하에, 예수님이 이 땅에 있을 때 우리에게 행했던 일들을 우리가 처한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해 실천하자는 겁니다. 이건 윤리적인 차원이죠. 하나님의 배타적 구원은 하나님의 행위라는 관점에서 말하는 것이고, 밥상 공동체는 우리 기독교인들, 즉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임한다는 사실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마땅히 감당해야할 윤리적 실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서 상위 개념은 배타적인 하나님의 구원이죠.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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