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강, 십자가와 부활(2)

기독교가 뭐꼬 조회 수 2881 추천 수 0 2012.02.11 19:10:03

제12강

십자가와 부활(2)

 

 

십자가 사건에 대한 복음서와 서신서의 차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서도 질문할 게 참 많습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눈만 있다면, 영적인 눈, 신학적인 눈만 가질 수 있다면, 당연히 질문할 수밖에 없어요. 이런 질문은 어떨까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형당하게 된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요? 다시 말해 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을까요? 너무 쉬운 질문인가요? 여러분은 그거야 뭐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빌라도가 공모해서 죽인 거 아니냐고 말할 겁니다. 그건 여러분이 들어서 아는 이야기이지, 성서를 들여다보고 스스로 찾은 대답은 아닐 거예요. 물론 들어서 아는 지식도 필요합니다. 다만 들을 때 누구에게서 듣느냐가 중요하고, 들은 내용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전체적으로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생각할 줄 알아야 해요. 사람들은 대부분 들은 내용들을 단답식으로 암기하고 말죠. “아, 예수님이 그렇게 돌아가셨구나. 성경에 그런 구절이 있으니 당연하겠지.” 정말 당연하다고 생각하세요? 좀 살펴봅시다.

복음서에 그런 이야기들이 나오기는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계속 다투었고요.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러 갔다가 제사장이 보낸 군인과 사병들에 의해서 잡혔고, 그 제사장에게 재판도 받았습니다. 결국에는 빌라도 총독에게 사형 선고를 받고 십자가에 처형을 당했죠. 그러나 사도신경에 나오는 내용은 조금 다릅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라고 되어 있어요. 이 사도신경에는 복음서가 보도하고 있는 제사장에 대한 이야기가 없습니다. 복음서에 따르면 제사장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종교지도자들이 예수의 처형과 밀접한 연관이 있고, 거의 그들의 책임이 큰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기는데, 사도신경에는 그들의 이야기가 빠져 있어요. 왜 그럴까요? 그 다음에 서신들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에 대해 구체적인 언급이 별로 없습니다. 제가 그걸 확인하지는 못했는데요. 오늘 어떤 이야기를 할까 하다가 그냥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서 그걸 정리해서 말하는 거니까 이해해 주세요. 하여튼 서신서 어디쯤에 그런 언급이 있는지 없는지 지금 제 머리에 딱 떠오르지 않습니다. 서신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언급들이 많이 나오는데, 왜 빌라도와 책임자들에 대해서는 말이 없을까요? 왜 그럴까요? 서신을 기록할 당시에는 예수님의 처형이 제사장과 빌라도의 책임이라는 게 너무 명백하게 드러났기 때문에 더 이상 재론할 필요가 없었던 걸까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복음서가 신약 성서의 앞부분에 나오고 있지만, 복음서가 먼저 기록된 건 아니니까요. 기록된 연대로만 본다면 데살로니가전서가 가장 먼저 기록되었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서신서와 복음서가 한 무더기로 기록되었어요. 요한복음은 훨씬 후대의 이야기예요. 서신서는 기원후 40년대에서 100년 전후까지 50-60년 동안 초기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일관성을 갖기가 좀 어렵습니다. 일관성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없고요. 하여튼 복음서의 내용과 서신서의 내용은 연대기 순서로 기록된 게 아니라 들쭉날쭉하게 공동체의 형편에 따라 형성되었다는 겁니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어요.

사도 바울이 편지를 쓸 때, 아마도 그는 복음서들 가운데 어떤 걸 알고 있었을 거고, 어떤 건 모르고 있었을 겁니다. 복음서 기자들도 복음서를 자기가 다 쓴 게 아니에요. 거기에는 이미 정형화된 이야기들이 있었고, 전승은 아니지만 자기가 전해들은 이야기도 있었어요. 그런 이야기들을 나름대로 편집의 과정을 거쳐 기록했습니다. 결국 이 말은 복음서든 서신서든 이것들은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진 공동체의 작품이라는 거예요. 이 표현은 제가 사용한 건데요. 하나님의 말씀을 작품이라고 하는 게 뭐하지만, 사람이 썼다는 차원에서 그렇게 말하는 겁니다. 복음서와 서신서는 공동체의 신앙고백이었어요. 그 신앙고백의 차원에서 복음서는 십자가 죽음의 책임에 대해 제사장과 빌라도 총독을 거론하는 반면, 서신서는 거론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관계에 대해 제가 논문을 쓴 것도 아니고 100% 확신하고 말하는 것도 아니니까 양해하고 들어주세요. 성서 신학을 전공하는 학생이 있다면 석사학위 논문으로 서신서와 복음서에 나타난 십자가 사건의 차이에 대해서 써도 가능할 것 같아요. 서로 관점이 다르니까요. 갈라디아서와 사도행전에 나타난 바울 신학의 차이도 괜찮습니다. 이런 논문들은 벌써 많이 나왔지만, 아직도 우리가 공부해야 할 거리가 많거든요.

어떻게 이런 차이가 있을까요?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을 처형한 장본인들을 명시적으로 거론하고 있는데, 왜 서신서에는 그런 언급이 없을까요? 제가 보기에는 예수님의 처형에 제사장과 빌라도가 그렇게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빌라도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에 대해 어느 정도의 책임이 있는지는 말하기가 힘들지만, 2천 년 동안 기독교인들의 입에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당하사’라고 언급될 만큼(이건 거의 저주예요) 빌라도가 책임이 있겠느냐는 질문이죠.

이런 점도 생각해야 합니다. 초기 기독교는 놀랍게도 유대 기독교와 초창기뿐 아니라 그 후로도 아주 오랫동안 나쁜 관계가 아니었어요. 그런 모습은 사도행전에도 잘 나와 있죠. 물론 사도행전도 역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쓴 건 아니에요. 그러나 그런 방향은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예루살렘 성전에 드나들었고 기도도 계속했어요. 초기 기독교의 예루살렘 공동체는 유대교로부터 독립할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유대교의 일부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인정하고 있었어요. 만약에 제사장들을 예수 처형의 장본인들로 생각했다면 그들의 행동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잖아요? 여기에는 상당히 많은 역사적인 사실들과 그 이면에 있는 것들이 엉켜 있을 겁니다. 과연 예수님의 활동과 유대교와의 관계, 유대교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려고 했던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생각들, 또 70년에 일어났던 예루살렘의 함락, 그것을 통해서 바리새 운동이 새롭게 일어나는 과정 가운데 유대 기독교가 어떻게 반응했는가 하는 것이 복음서와 서신을 기록하는데 상당히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초기 기독교와 유대교와의 관계에서 제가 말하고 싶은 건 그들의 관계가 상당히 우호적이었다는 점이에요. 반복되는 것 같은데, 제사장이 예수님을 모함하고 빌라도에게 고발한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들, 특히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중심이 된 예루살렘 공동체가 유대교와 선린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겠느냐 하는 거죠. 이걸 설명하기가 좀 힘들잖아요. 지금 제가 이런 상황의 실체적인 진실에 대해 정확하게 말할 입장은 아닙니다. 이 부분이 제 전공도 아니고, 전공을 했다고 해도 다 밝혀진 내용이 아니기 때문에 정확히 말하기는 힘들 겁니다. 다만 우리는 유추하고 예측할 수밖에 없죠. 어쨌든 변하지 않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입니다. 십자가 처형을 중심으로 해서 기독교가 유대교나 헬라의 다른 사상들과 차별화됩니다.

 

수치의 대상인 십자가

성경말씀을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부분인데요. 고린도전서 1장 22-24절을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것도 참 재미있을 것 같아요. 텍스트 해석인데요. 앞서 말한 대로 자기가 볼 눈만 있다면 성서는 많은 이야기를 할 겁니다. 우리가 그걸 다 따라가지 못할 뿐이죠. 읽겠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유대인들은 기적을 하나님의 행위로 생각합니다. 능력을 바라보는 거죠. 유대인들은 기적적인 것, 종교적인 것, 하나님의 큰 능력을 중요하게 생각하니까요.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하거든요. 이게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부활이 더 중요하기는 하지만 십자가는 부활의 길로 가는 그 길목에서 놓칠 수 없는 부분이에요. 바울은 다른 종교와의 차이보다도 고린도교회 안에서 벌어진 문제를 풀어가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특성은 일반적인 종교와는 다릅니다. 기적에 중심이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죠. 호렙 산 바위에서 모세가 지팡이로 치니까 샘이 솟았다는 본문을 두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수를 주는 놀라운 기적을 베푸시니 얼마나 놀라운 분인가?”라고 설교를 한다면, 이것은 성경 왜곡이라기보다 그 깊이로 들어가지 못하는 어리석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적은 물론 성서에 많이 나옵니다만 징표일 뿐이에요. 표징이란 말이죠. 하나님이 중요하지 기적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기적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유대인들입니다. 하나님을 기적을 베푸는 능력이 있는 자로만 이해하는 거예요. 그러나 기독교는 십자가에 죽은 사람을 하나님이라고 믿는 겁니다.

헬라인들이 추구하는 고상한 지식도 바울은 답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제가 설교비평을 할 때 자주 반복하는 말인데요. 교양 강좌 식으로 설교를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게 헬라인들이 원하는 지혜와 비슷한 거거든요. 도덕적이고 교양적인 설교는 기독교의 케리그마가 아닙니다. 물론 기독교 공동체 안에도, 그 안에서 쓰인 서신서 안에도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가르침이 있기는 해요. 그것은 구약에서 하나님에 대한 표징으로서 기적을 말하듯이, 하나님의 통치나 하나님 임재의 한 방식으로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있어야 할 일들을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임재가 중요한 겁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합니다.

서른세 살 쯤 되는 유대인의 한 남자가 십자가에서 처형되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이게 온 인류의 구원이 될까요? 그게 과연 기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 설득력이 있었을까요? 십자가는 그들에게 어리석음이었습니다. 아주 미련하고 무능력하게 죽은 거예요. 어떻게 하나님이 십자가에 죽겠습니까? 그리고 헬라인들에게는 그 죽음이 거리끼는 거였어요. 고상한 사람들이 볼 때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겠어요? 정말 우스운 죽음일 뿐이죠. 그러나 초기 기독교인들은 그걸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라고, 구원의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이나 헬라인들에게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도저히 말 상대가 되지 않는 거예요. 예수 믿는 사람들은 무신론자에다가 정말 무식한 사람들로 보였을 뿐이거든요. 고상하지 않잖아요. 아주 초라하잖아요. 거기에서 기독교가 시작되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이 하나님이라는 것은 엄청난 혁명적인 선포예요. 이게 기독교의 시작입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요?

오늘날에도 이런 일들은 마찬가지로 일어날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실질적으로 이해하는 기독교인들이 많지 않을 걸요? 십자가는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린 사건인데, 그것을 아주 실질적으로 삶에서 경험하는 사람들이 있을까요? 십자가가 오히려 요술램프처럼 마술적인 능력이 되어버리고 자랑거리가 되어버렸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이 겉으로는 십자가를 하나님 구원 섭리의 놀라운 계획이고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말은 그럴듯한데 실질적으로 십자가를 이해하는 건 아니에요. 사람들이 아주 거리끼는 미련한 삶의 결과였던 십자가의 방식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이 세계를 구원하는가에 대해 눈을 떠야 되는 거죠.

오늘도 설교조로 끝나는 것 같네요. 시간이 다 되었군요. 오늘 강의를 들은 분들도 ‘아, 그래. 그럴 듯하구나. 내가 평소 생각하던 부분이구나.’ 하고 공감하는 시간이었기를 바랍니다. 제가 이 모든 걸 다 말할 수도 없고(이것이 말의 한계이기도 하고), 또 아무리 말을 잘한다고 하더라도 받아들이는 쪽에서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안 되더라고요. 오늘 이야기를 통해서, 십자가의 사건을 단순히 구원의 길로 암송하고 주술적인 방식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그 세계 안으로 들어가야 할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적 사건이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느꼈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질문 있으면 주세요.

 

신구약의 내세관

“구약의 내세관과 신약의 내세관이 다른 것 같은데 간단히 설명해 주세요.”라는 질문이 올라왔습니다. 기독교 사상이나 개념들은 변화, 발전되어 왔습니다. 구약의 내세관과 신약의 내세관은 서로 대립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그것이 어떻게 발전해왔는가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뭐냐 하는 문제와 맞물려 있기도 하고, 인간의 영혼 문제와도 연관되어 있어요. 내세라고 하면 다가올 세상이라는 뜻인데요. 우선 ‘세상’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이 다가올 세상을 ‘에온’(αἰών)이라고 했습니다. 이에 반해 헬라 사람들은 세상을 ‘코스모스’(κόσμος)라고 말했습니다. 왜 이렇게 달랐을까요? 똑같이 세상인데 말이죠. 그 안에 들어 있는 개념이 달랐어요. 히브리인들은 시간적으로 생각하고 헬라인들은 공간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즉, 헬라인들은 세상을 커다란 공간 안에서 돌고 도는 새로운 것이 없는 것으로, 불로 다 태웠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으로, 영혼이 순회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것을 코스모스라고 말했고요. 히브리 사람들은 공간이 아닌 시간으로, 지나가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안에서 돌고 도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를 향해서 가고 있다는 거죠. 그게 뭐가 중요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합니다. 세계관이니까요. 세계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내세에 대한 생각도 달라지거든요. 내세는 세계가 무엇이냐에 대한 문제와도 다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내세만 딱 끊어서 생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거칠게 정리한다면 구약에서는 내세관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합니다. 신약과 같은 내세, 즉 종말론적인 내세,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과 같은 상징으로 표현된 그런 세계가 구약에는 없다는 말이에요. 죽으면 다 ‘스올’(שְׁאוֹל)이라는 어둠침침한 곳으로 간다고 생각했어요. 히브리 사람들은 죽음을, 모든 조상들이 돌아간 그 곳을 가기 위해 통과하는 순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미래의 내세라든지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구약성서에는 이렇다 할 희망이 나와 있지 않은 겁니다. 그 죽음이 구약 시대 말기쯤 묵시사상으로 연결되면서 또 다른 새로운 세계로 열리게 돼요. 그 묵시사상이 신약의 종말론으로 연결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적극적인 세계 이해로 바뀌게 됩니다.

 

만유내재신론

다음 질문을 그래도 인용합니다. “매튜 폭스는 『창조 영성 길라잡이 원복』에서 유신론이 하나님과 인간을 주객관계로 이해하게 만들기 때문에 유신론에서 만유내재신론으로 옮겨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유신론적 종교행위들이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요?”

매튜 폭스의 저 책을 옛날에 읽었기 때문에 그가 말하는 만유내재신론에 대해 정확히 기억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그냥 상식적으로 이야기하겠습니다. 이 지적은 옳습니다. 기독교는 거칠게 말한다면 유신론과 무신론 논쟁을 뛰어넘는 하나님 이해거든요. 하나님이 곧 있다는 방식으로만 하나님의 존재를 말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없음으로써 하나님의 계심을 이야기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유신론과 무신론은 있다 없다는 식으로, 즉 매튜 폭스의 방식으로 말한다면 주객도식으로 이해하는 거란 말이죠. 이런 방식은 나와 너와의 관계로만 말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하나님은 나와 너의 존재 방식을 뛰어넘는다는 점에서 볼 때 유신론적 하나님 이해는 한계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정통 신학도 시대적으로 어떤 때는 무신론과의 논쟁에서 유신론의 입장을 지지하기는 했지만, 그게 기독교의 정통 신론은 아닙니다. 정통 신론은 삼위일체론이죠. 삼위일체론이라고 해도 그것이 무신론을 지지하는 건 물론 아닙니다. 다만 있음과 없음이라는 관계를 훨씬 뛰어넘는 하나님을 이 삼위일체가 이야기합니다. 지난주에 잠깐 말한 것과도 연관이 된다고 보는데요. 하나님의 전능만 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무능력도 말하기 때문이죠. 보통 유신론이라고 하면 하나님의 무소부재, 전지전능을 강조하거든요. 그러나 기독교의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이죠. 무능력하게 자기가 자기를 십자가에 다는 하나님이에요. 역설적입니다. 오늘 우리가 말해야 할 부분과도 연관이 되는데요. 그러한 차원에서 실증적이고 가부장적이고 유신론적인 하나님 이해는 이미 기독교 정통 신학에서 극복된 겁니다. 극복된 문제인데, 그렇지 않은 것처럼 생각해서 기독교를 실체론적 유신론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기독교 신학이 이미 많이 진행되어 온 걸 잘 모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매튜 폭스가 말하는 만유내재신론(panentheism)은 이 세계 모든 것 안에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죠. 그런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정통 기독교의 신 이해에서는 위험할 수 있어요. 기독교 신학에서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고 창조한 행위 자체가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하나님이 다 계신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주장하는 겁니다. 그러나 이 세상 자체가 하나님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 차이가 작은 것 같지만, 본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세상에 하나님이 곳곳에 임재해 있죠. 좀 더 매튜 폭스나 다른 신비주의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민들레 꽃 한 송이에도 하나님이 들어 있는 거예요. 그러나 그게 곧 하나님은 아니거든요. 물론 매튜 폭스가 만유내재신론이나 범신론도 말할 텐데요. 우리가 그걸 더 자세하게 이야기하려면 그의 책을 갖다 놓고 대조하면서 읽어야 하는데, 그건 좀 힘든 것 같습니다. 매튜 폭스가 말하는 만유내재신론은 물론 범신론과는 차이가 있어요. 아마도 신학적 입장의 차이일 텐데요. 범신론은 훨씬 더 세상 자체를 신으로 이해하는 입장이고, 매튜 폭스는 거기에서는 다소 비켜 서 있지만, 그럼에도 분명히 세상을 초월해 있는 하나님의 성격을 약화시키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역사 내재이면서 역사 초월인 특성을 놓치지 않거든요. 이 세상이 없어도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기독교 전통 신론에서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매튜 폭스는 그게 포기될 가능성이 많아요. 이 세계 자체가 신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신과 동일시될 수 있고 신의 통치가 다 들어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할 가능성이 아주 높은 거죠. 하나님의 초월성이 약화된다는 겁니다.

다음 질문은 이렇습니다. “가톨릭에서 마리아에게 기도하는 것과, 연옥의 존재 믿는 것이 기독교의 입장에서 보면 이단성이 있는 건가요?” 죽음 이후의 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실증적으로 알 수는 없으니까 그들이 연옥을 믿는다고 해서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성서도 그런 가능성에 대한 설명이 있으니까, 그들이 연옥을 믿는다는 것 때문에 그들을 이단이라고 할 수는 없는 거죠. 마리아에게 바치는 기도에 대해서 말한다면, 일반 가톨릭신자들에게는 마리아가 거의 신처럼 인식되고 있는지 모르지만, 가톨릭 정통 신학에서는 마리아가 신은 아닙니다. 마리아를 강조하는 것은 마리아 자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강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라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는 거죠. 그런 강조가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에요. 물론 가톨릭의 신앙 중에서 성모 승천 문제가 들어 있기는 합니다만, 그것은 또 다른 문제거든요. 우리가 어렴풋이 알고 있는 것처럼 가톨릭이 마리아를 신으로 섬긴다는 건 좀 거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가톨릭은 전혀 이단이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무식하거나 독단에 빠져 있는 사람입니다. 이제 본줄기로 돌아갑시다.

 

역사의 신비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이 몇 년도인가 하는 생각이요. 지금이 2008년인가요? 갑자기 글을 쓰고 하다 보니, 아니 시간에 많이 쫓겨서 그런지, 뭐에 집중하다 보면 시간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이 있어요. 독서삼매에 빠지는 것과 비슷한 경우인지는 모르겠지만, 책을 보거나 성서를 보거나 공부 준비를 할 때뿐 아니라, 길을 가다가도 그런 경험을 자주 하거든요. 노을이 지는 것을 볼 때, 어떤 향기를 맡을 때, 어린아이의 목소리를 들을 때, 갑자기 정신이 드는 거예요. 도대체 이 장면이 뭔가 하는 거죠. 여러분도 그런 경험을 할 때가 있을 겁니다. 문득 깜짝 놀라는 거죠. 정신이 퍼뜩 드는 거예요. 각성이라고 할까요? 내가 그 장면을 객관적으로 내려다보는 겁니다. 내가 길을 가는 것도 한 장면이잖아요. 영화의 한 장면으로 생각해 보세요. 어떤 사람들이 길을 가고 있어요.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도 있고 행인들도 있습니다. 바람에 날려서 먼지가 날아다니기도 하고 종이가 날리기도 하고요. 그런 순간순간이 계속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 안에 내가 들어가 있는 거죠. 내가 그렇게 영화의 한 장면 속에 들어가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상한 이야기가 아니에요. 가능성이 있는 일이잖아요. 우리는 그런 걸 평소에는 놓치고 사는데요. 우리가 예민하게 영적으로 깨어 있는 그 상태가 바로 우리가 어떤 근원에 닿아 있는 겁니다.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듯이 말이에요. 제 경험이 꼭 그렇다는 게 아니라 그런 느낌이 아주 특이하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아마 시인들도 그런 경험을 할 거예요. 어떤 순간에 영원을 경험하는 거죠. 황지우 시인의 시집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의 제호로 잡힌 바로 그 시에 이런 묘사가 나와요. 주막집에서 소주 한 잔 부어놓고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나, 먼 훗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는 나를 보게 될 거라고 하는 말이요. 그렇게 자기의 노년을 미리 그려 보는 거예요. 20년 후에 자기 모습을 보니, 모든 걸 내려놓고 주막집에서 소주 한 잔 부어놓고는, 소주가 줄어드는 거만 바라보고 멍하니 앉아 있는 자신의 모습이 떠오르는 겁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추할지도 모르겠지만 모든 짐에서 벗어나 그냥 어떤 순간에 들어가 있는 자신을 내다보는 거죠. 그러한 경험 말이에요. 이게 잘 전달이 될지 모르겠는데, 저는 그렇게 느끼기 때문에 이야기하는 겁니다.

대통령이 되어서 취임식을 하고 있든, 길가에 좌판을 벌여놓고 과일을 팔고 있든, 그 순간은 다 똑같거든요. 대통령 취임만 위대하고 의미가 있으며, 좌판을 벌여놓고 과일을 파는 게 초라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전혀 아니거든요. 모든 것들이 이 세계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장면들입니다. 그런 게 무지 많아요. 하나하나가 우주와 같은 무게를 안고 있는 거예요. 그것을 우리가 깨어 있는 영성으로 포착해야 하는 겁니다. 그게 예술가들의 영감일 수도 있고, 시인들의 영감, 철학자들의 각성, 종교인들의 깨우침일 수도 있죠. 무슨 말인가 하면요.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요. 좀 전에 문득 정신이 차려지면서 지금이 언젠가 2008년인가? 아니면 2108년인가? 아니면 더 거꾸로 돌아가서 1008년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책상 앞에서 컴퓨터도 치고 성경도 읽고 내일 저녁에 포항에 가서 공부할 것도 준비하고 있었어요. 아직 다 마치지 못했습니다. 반도 채 못했는데, 내일 오전에 해야겠어요. 포항에서 공부하는 게 벌써 두 달 정도 지났군요. 처음에는 쉽게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요즘은 좀 부담스러워요. 동영상 강의도 해야 되고 다른 글들도 써야 하다 보니 그래요. 하지만 조금 힘들어도 하다 보면 재미있거든요. 이런 공부들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하다보면 도움이 많이 됩니다. 그런 점에서 대학교 공부도 필요하고, 박사 학위 코스도 필요해요. 그 과정이 대단한 건 아닌데 일단 거기에 들어가면 뭔가를 해야 되거든요. 그런 과정을 통해서도 얻는 게 많습니다. 저도 무리해서 이것저것 하고 있는데 그래도 할 때는 좋아요. 재미있으니까요.

간혹 강의 준비를 하다가 문득 지금이 언제인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갈라디아서가 기원후 50-60년대에 기록되었어요.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율법과 복음 사이에, 유대 기독교와 이방 기독교 사이에 첨예하게 논란이 되었던 토라와 할례 문제를 적극적으로 대항했습니다. 바울이 왕따를 당하는 형태였어요. 조금만 타협하면 예루살렘교회로부터 인정도 받고 서로 좋았을 텐데 바울은 왜 그렇게 유별나게 대립을 했을까요? 그 쪽으로 들어가다 보니 갑자기 2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 것 같더라고요. 바울이 살아 있을 때는 어떤 생각이었을까? 주변 환경, 소위 말해 그가 처한 객관적인 삶의 자리도 그렇지만, 바울이 혼자 경험했던 신앙의 깊이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느 정도는 우리가 알고 있지만, 정말 실질적인 그의 신앙 체험이라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그런 생각들을 하다 보니, 갑자기 2천 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더군요. 그리고 또 2천 년 후가 올 텐데요. 2천 년 후에 우리의 후손들은 오늘 우리가 살았던 이 시대를 돌아보겠죠. 모든 순간이 연결되어 있어요. 그걸 우리는 보통 역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역사 속에 우리가 지금 살고 있거든요. 여러분도 그렇게 살고 있고요. 흔히 하는 말로 리얼한 연극의 한 장면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장면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게 과연 무엇일까, 이것의 진면목이 무엇일까 하는 겁니다. 얼마나 중요한 문제입니까? 대개 우리는 이것을 다 놓치고 살거든요. 다른 데 우리의 신경이나 영성을 다 빼앗기기 때문이죠. 다른 게 뭔지 알죠? 이런 상황은 일반 사람은 물론이고 목사마저 그럴 때가 많습니다. 목사로서 본질적인 것보다는 다른 것에 힘들을 다 빼앗기는 거예요. 규모 있는 교회가 되면 교회를 관리해야 하고, 그 안에서 기계처럼 돌아가야 하죠. 그래서 참된 영성을 경험하기가 쉽지 않은 것 같아요. 하여튼 2천 년 전인 기원후 50년대에 갈라디아서를 썼던 사도 바울과 그 삶의 자리, 그리고 2천 년이 지나 우리가 다시 갈라디아서를 공부하고 있어요. 우리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겠죠. 역사가 이렇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과연 역사가 무엇일까요? 어제 서울 오프 모임에서도 잠깐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요. 생각할수록 신기해서 말하는 거예요. 제가 아까 모든 역사에 한 장면 한 장면이 다 있다고 했잖아요? 나중에 최후의 심판이 오게 되면 그 모든 장면들이 재생(replay)될 수 있을까요? 얼마나 많이 찍어두어야 그게 가능할까요? 어느 것도 하나님 앞에 숨길 게 없게 되는데 어떤 방식으로 우리의 삶이 평가되고 숨긴 것이 드러나게 될까요? 여러분, 연극을 생각해 보세요.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생각해도 좋아요. 이 연극은 셰익스피어가 희곡의 대본을 그렇게 썼기 때문에 그 방향으로 가는 겁니다. 만일 셰익스피어가 대본을 다르게 썼다면 다른 방향으로 가겠죠. 여러 가지 가능성 중에 셰익스피어가 하나를 선택한 거예요. 작가의 머릿속에는 수백 가지의 가능성이 있었을 겁니다. 햄릿의 운명을 죽느냐 사느냐의 방식이 아니라 좀 더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방식으로 만들 수도 있었겠죠. 그 가능성 중에 하나가 결정되어서 역사로 내려온 거예요. 그렇다면 가능성에 그친 것과 역사에 나타난 것의 차이는 뭘까요? 그걸 헬라 철학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잠재태와 현실태로 구분할 수 있는데요. 모든 것들은 다 가능했던 겁니다. 제가 우리 집사람이 아니라 다른 여자와 결혼할 가능성도 많았거든요. 아, 이건 비밀입니다. 그 뿐 아니라 우리에게는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는데 그중에 어떻게 하나가 선택되어서 우리의 운명이 흘러가고 있는 거예요. 그게 뭘까요? 수많은 가능성들이 있었는데 다른 것들은 그냥 가능성으로만 남고 역사가 되지 못한 것과 실제로 역사가 된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정말 그 차이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말장난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나 제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이것이 저만의 생각이 아니라 많은 철학자들의 생각이고 성서 신학자들의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 이런 맥락 속에서 이루어져요. 이런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지금 우리가 명백하다고 생각하는 이 현실과 역사가 그렇게 명백한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옛 스승들의 말에도 있듯이 삶을 대몽(大夢)이라고 하잖아요. 큰 꿈이라는 말이죠. 꿈은 깨봐야 그게 꿈인지 아닌지 알 수 있듯이, 우리가 이것을 현실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것이 어쩌면 현실이 아닐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것 이면의 다른 것들이 더 현실일 수 있으니까요. 현실로 드러난 역사 말고 가능성으로 남아있었던 것들이 더 참된 것일 수 있다는 말이에요. 바로 숨어있는 것들이죠.

하나님의 은폐성

제가 하나님의 은폐성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했어요. 계시는 노출이면서 동시에 은폐라고요. 숨어있는 것과 노출되는 것의 차이가 칼로 두부를 자르듯 명백하지는 않습니다. 거기에는 어떤 무언가가, 무슨 이유가 숨어 있어요. 그런데 참 신기한 게 있는데요. 전에 제가 한번 예로 든 적이 있습니다. 하이데거가 말했듯이 왜 존재하는 것들은 세상에 있고 역사로 드러났는데, 무(없음)는 왜 숨어 있는가 하는 거예요. 무(無)는 드러나지 않거든요. 신학자나 성서 기자, 혹은 시인이나 예술가도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도 이런 인식이 없으면 그림을 그릴 수가 없어요. 그걸 생각해야만 창조 행위가 가능해요. 숨어 있는 걸 의식하고 드러나게 해야 창조이지, 이미 드러난 것만 말한다면 그게 어떻게 창조겠어요? 하나님은 드러나지 않은 것과 드러난 것 전체를 통해서 우리에게 뭔가를 말하거든요. 도대체 그런 것들과 기독교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겁니다. 우리가 이런 쪽으로 하나님과 기독교 신앙을 하나하나 접목시키고 실질적으로 삶 속에서 이런 것들을 반성하게(reflect) 되면 우리의 신앙이 깊어지는데요. 이것을 영성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일반적으로 신비주의자들은 이런 생각들을 깊이 있게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일반 성도들이 전문적인 신비주의자나 영성가나 신학자처럼은 되지 못하더라도 그런 방향으로 따라가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런 게 바탕이 되어야만 우리의 삶이 실질적으로 성령과 동행할 수 있거든요. 하나님의 나라가 말이 아니라 능력에 있다고 했는데, 삶의 능력을 거기에서 받을 수 있기 때문이죠. 우리의 중심이 밑으로 내려갈수록 우리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중심이 위로 떠버리면 조금만 옆에서 건드려도 넘어지는 거죠. 우리가 영적으로 된다는 것은 삶의 중심을 가장 밑바닥에 둔다는 겁니다. 가장 밑바닥이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해요. 존재 바탕이라고도 할 수 있죠. 일반 성도들도 이런 훈련을 조금씩 해나가면서 삶의 신비를 더 들여다본다면, 성서 텍스트에 더 가까이 갈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그렇다고 확신합니다.

인문학적 성서 읽기가 바로 그겁니다. 지금 우리가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개인적으로 이러한 역사의 신비를 경험하는 것 외에 또 필요한 게 있다면, 그것은 역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고민한 사람들이 쓴 책들을 읽는 겁니다. 그 사람들이 모두 그런 경험을 했기 때문이죠. 제가 자주 예를 들듯이 바둑을 잘 두기 위해서는 동네 바둑에 머물지 않고 바둑 전문가들이 쓴 책을 보거나 그들이 둔 바둑을 복기하면서 공부해야 하는 것처럼, 역사의 신비를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먼저 그것을 공부한 사람들의 책을 읽어야 하는 거예요. 개인적으로 누구나 열린 마음으로 공부하면 일자무식이라도 역사의 신비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성서가 있는데, 사실은 성서가 가장 영적인 책이에요. 우리는 역사 안에서 살아가고 있고, 역사의 신비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이 이해하게 되는데요. 다음 시간에 만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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