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강, 십자가와 부활(3)

기독교가 뭐꼬 조회 수 2742 추천 수 0 2012.02.11 19:14:00

제13강

십자가와 부활(3)

 

 

우리는 사람들과 같이 어울려 살아야 하는 동시에 사람들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두 사태 안에 있는 것 같아요. 우리 가족부터 시작해서 교우나 직장 동료나 이웃까지,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들과 인간적인 연대성을 확실하게 유지하는 동시에 그 관계로부터 벗어나는 능력을 가질 수 있는 걸까요? 그런 태도가 필요한 것 같은데, 쉽지가 않거든요. 그런 것들을 역동적으로 잘 끌어갈 수 있는 힘이 삶의 능력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두 가지 사태 앞에서 긴장을 잘 유지할 때, 우리의 삶이 건강해지는데요. 그게 힘들죠. 왜냐하면 두 가지가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포착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게 된다는 말이에요. 사람들과의 관계나 연대성 속에 푹 빠져서 온통 그것만이 우리 삶의 모든 것인 양 살아가거나, 아니면 그걸 완전히 무시한 채 초월적으로 영적으로만 치우쳐 살아갑니다. 동료애적인 연대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근본적으로 거기에서 자유로워야 합니다. 사람들과 가까이 있으면서 멀리 있는, 즉 사람들과 밀착된 관계에서 인간적인 삶을 누리는 동시에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그러한 삶의 능력이 필요한 것 같아요. 그게 기독교 영성이라고도 할 수 있고 균형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긴장이라고도 할 수 있고요. 제가 자주 사용하는 용어로 말하자면 변증법적인 관계를 끌어가는 겁니다. 그걸 배워야 하는 건지 아니면 자기가 스스로 노력해서 되는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왜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요. 주변에 보면 사람들이 그게 잘 안되더라고요. 대개 한국 사람들은 정에 많이 약하기 때문에 인간적인 결탁, 이게 아주 강하게 작용하는 것 같아요. 그게 지역감정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가족 이기주의로 나타날 수도 있고, 개교회주의로 나타날 수도 있어요. 경상도에서는 동창회나 계모임 같은 게 많은데, 그런 데 휩싸여 버린단 말이죠. 그런 모임들이 개인과 사회 공동체를 개방적으로 만들고 역동적으로 만들기도 하지만, 부정적인 쪽으로 작용할 때도 많은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대통령 선거를 할 때도 지역적인 편차가 심했잖아요? 그에 비해서 영국이나 유럽 사회는 인간관계가 상당히 쿨(cool)한 것 같아요. 제가 어느 한 쪽이 옳다고 말하는 건 아니고요. 서로 장단점이 다 있는 것 같아요. 기독교 신앙에서도 교우들 사이에 신앙의 연대성이 굉장히 중요하더군요.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는 결국 단독자로 설 수 밖에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붙들려면 신자들과의 관계는 멀어져야 해요. 어떻게 우리가 교회 공동체나 신앙 공동체를 가깝게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그것과 떨어질 수 있을까요?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니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한마디 했습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

앞 시간에 예수님의 십자가에 이르는 몇몇 과정들을 짚었는데요. 오늘은 그 다음 단락인 손 씻는 빌라도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체포당한 뒤 예수님은 두 번의 재판을 받습니다. 하나는 종교재판이고 하나는 사법재판이에요. 여러분이 잘 아는 대로 종교재판은 산헤드린 공회에서 정식으로 받습니다. 복음서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예수님은 산헤드린 공회에 가기 전에 대제사장 관저에서도 심문을 당합니다. 산헤드린 공회에서 벌어진 종교재판에서는 거의 선문답처럼 왔다 갔다 하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었는데요. 결국 예수님을 심문한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님께 신성모독 죄를 선고했습니다. 예수님에게 신성모독적인 언사가 있었는가, 그런 행동이 있었는가 하는 것은 보기에 따라서 다를 텐데요. 그런 것까지 자세히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어쨌든 종교 지도자들의 눈에는 분명히 예수님의 가르침이 좋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게 어느 정도인지는 사실 복음서만으로 말하기는 힘들어요.

『초기 기독교 형성』(트로크메, 대한기독교서회)이라는 책이 있는데요. 그 책에서 트로크메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꾸려 나가면서 유대교와 극단적으로 대립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놓고 볼 때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을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돌리는 문제는 재고해야 한다는 뜻으로 말했습니다. 어쨌든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은 신성모독 죄를 언도 받았어요. 예수님에게는 신성모독 죄로 보일만 한 부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산상수훈에서 선포된 반율법적인 명제들이나, 모세가 말한 것을 너희가 들었지만 나는 이렇게 말한다고 한 것이나 성전을 허물겠다고 한 부분들은 그들이 듣기에 속된 표현으로 눈꼴 사나왔을 겁니다. 성전을 허물고 사흘 만에 짓겠다는 말도, 복음서의 기자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비유적으로 설명한 것이라고 보았지만, 그 말을 직접 들은 제사장들은 기분이 나빴다는 거죠. 복음서의 그런 보도들이 어느 정도의 객관성이 있느냐 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입니다. 전혀 근거가 없다는 말은 아니에요. 이것은 상당히 복잡한 과정을 통해서 내려온 전승이기 때문에 우리가 한두 마디만 끊어서 기독교의 가르침으로 전하기는 힘듭니다. 따라서 전체적인 성서의 맥락과 전체적인 기독교와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하나하나 짚어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 직면하는 어려움이기도 하고요. 쉽지 않은 이야기죠? 어쨌든 예수님은 산헤드린 공회에서 신성모독자로 선언되었는데, 그 당시 산헤드린은 사형을 내릴 권한이 없었습니다. 로마의 식민지였으니까요. 그래서 로마의 총독인 빌라도에게 넘겨서 사법적으로 처리하려고 했던 겁니다.

종교적으로 신성모독이었다고 한다면, 사법적으로는 어떤 죄목이었을까요? 빌라도에게서 받은 재판이 사법적인 것인데요. 복음서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긴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 복음서가 전하는 전체적인 뉘앙스는 빌라도가 예수님을 사형 선고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와 관련된 몇 가지 에피소드가 복음서에 나오는데요. 빌라도의 아내가 예수의 재판에 너무 깊숙이 관여하지 말라고 빌라도에 말하기도 했고, 그런 생각을 민중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유월절에 죄수를 석방하는 풍습에 따라 예수를 살려주려는 시도도 했어요. 빌라도는 나중에 손을 씻으면서 자기는 이 문제에 상관이 없다는 퍼포먼스도 벌입니다. 과연 이런 것들의 실체가 뭐냐는 겁니다. 성서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과 그 실체 사이에 어떤 것들이 있거든요. 그 사이를 잘 포착해야 하는데요. 오늘은 성서개론을 강의하는 시간이 아니기 때문에 더 이상은 말하지 않겠습니다. 단지 지금 이 단락만 놓고 본다면, 복음서는 기독교가 로마 정부와 그렇게 적대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하려고 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건 결정적으로 중요한 게 아니니까, 이렇게만 하고 넘어갈게요.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은 이야기야 다들 잘 알고 있으니까요. 손 씻는 빌라도 단원의 마지막 부분에서 저는 예수님의 사형선고에 대해 말하고 싶었습니다.

예수에 대한 사형선고는 유대 종교를 대표하는 산헤드린과 로마 정치를 대표하는 총독이 함께 만든 합작품입니다. 종교적 광신과 정치적 폭력이 인류 역사에서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는지 우리는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죠. 종교인이라면 종교인답게, 정치인이라면 정치인답게 자신들의 합리적 논리에 근거해서 행동해야 할 텐데, 역사는 그렇게 흘러오지 못했어요. 게다가 이 사건에서 비열한 점은 산헤드린과 총독이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만약 산헤드린이 예수를 자신들의 종교적 권위에 도전한 인물로 판단했다면 유대의 사형법대로 돌로 때려 죽였어야 했는데 그들은 교묘하게 빌라도의 정치적 힘에 기대보려고 했던 거죠. 물론 그 당시에는 산헤드린에게 사형권한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형과 유사한 것들은 벌어졌거든요. 사람이 돌에 맞아 죽는 것처럼요. 산헤드린은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겠다는 의도로 예수님의 사형 문제를 빌라도에게 떠넘겼던 겁니다. 빌라도 역시 기왕에 자신이 사형선고를 내려야만 했다면 자신의 정치적 판단에 따라 끝까지 정치적, 사법적 정당성을 붙잡고 있어야 했는데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그는 손을 씻는 몸짓으로 자신의 불가피성을 비굴하게 합리화했던 거예요. 적절한 표현은 아니지만, 악은 그렇게 좀스럽습니다.

하여튼 빌라도가 예수에 대해 사형을 선고했는데요. 그건 역사적으로 벌어졌던 오판이었을까요, 아니면 바른 판단이었을까요? 빌라도는 상당히 직책이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로마의 지방장관으로서 유대지역에 총독으로 왔을 정도면 로마에 가서도 한 몫 할 만한 사람인데요. 그가 근거 없이 예수를 죽이라고 내주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 당시에 재판의 근거가 될 수 있는 문서들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빌라도의 재판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기는 힘듭니다. 그러나 상식적인 차원에서 그 상황을 유추해 본다면, 빌라도는 분명히 예수를 사법 처리하는 게 로마의 법 정신에 맞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물론 복음서에 보면 군중들이 예수가 아니라 바라바를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쳐서, 빌라도가 몸보신의 차원에서, 즉 정치적인 이해타산에 따라 자기의 판단을 굽혔다는 뉘앙스로 나옵니다. 빌라도가 타협을 한 거죠. 그러나 일반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총독이 그만한 걸로 쉽게 타협할 사람은 아니거든요. 아마도 그는 예수에게서 반로마적인 요소들을 분명히 발견했던 것 같아요. 그게 어느 정도였느냐 하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그런 근거가 있었기 때문에 결국 빌라도는 예수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다고 봅니다.

그에 따라 예수님은 로마의 사형제도인 십자가에 매달립니다. 십자가는 T자로 되어 있었다고 해요. 손바닥에 못을 박았는데, 손바닥에 대못이 박히니 찢어지겠죠. 그래서 거기에만 무게가 실리면 십자가에서 떨어지니까 엉덩이를 받쳤어요. 가장 고통스러운 정도의 무게를 감당하도록 십자가에 걸어둔다고 합니다. 보통 건장한 남자는 일주일을 걸려 있었다고 해요. 일주일 동안 손바닥에서 계속 피와 진액이 빠지면서 서서히 죽어가는 거죠. 정신이 혼미하고 왔다 갔다 하면서 가장 고통스럽게 죽는 겁니다. 사람들에게 다 드러내 놓고 집행했기 때문에 일벌백계 식으로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잔인한 사형 법이었어요. 예수님은 체력이 약했는지, 6시간 만에 돌아가셨습니다. 성서가 그렇게 보도하고 있어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한 말을 가상칠언이라고 합니다. 가상칠언 중의 하나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죠. 가상칠언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강의안을 보면 잘 나와 있을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이런 말들을 외치며 호소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처형당하는 숨 막히는 순간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장면이 복음서에 나오는데요. 바로 제비뽑기였어요. 거기에 어울릴 만한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이 일을 네 복음서가 모두 증언하고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몸부림치며 죽음과 투쟁하고 있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제비뽑기, 일종의 여흥에 빠져 있는 거죠. 정말 어울리지 않는 두 모습이 공존하고 있어요. 이게 역사가 아닌가 싶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자는 모든 것을 잃어가고 있는데, 십자가 발밑에 있는 자는 모든 것을 잃은 자의 작은 것마저 빼앗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인류의 역사가 아닐까요? 이와 비슷한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노동 현장이나 목회 현장은 물론 가족 안에도 그런 일들이 있어요. 곳곳에 있습니다. 한쪽은 갖고 있는 작은 것마저 다 빼앗기는데, 다른 한쪽은 그 상황에서도 더 차지하려고 합니다.

하여튼 왜 예수님은 그 절박한 순간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즉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다는 경험을 했던 걸까요? 왜 그랬을까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다른 데서도 한두 번 말했기 때문에 길게 하지는 않겠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도 이 잔을 물리쳐달라는 인간적인 호소를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도 예수님은 뭔가 불안했던 게 틀림없습니다. 성서는 예수님이 불안했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고 그냥 자기의 길을 간 것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우리와 똑같은 30대 초반의 한 남자가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다가 십자가의 죽음을 목전에 두었는데, 어떻게 두렵지 않겠어요? 죽음 자체에 대한 직접적인 두려움보다 자기 삶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이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모든 것을 다 던져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아무것도 이룬 게 없다는 절망 말이에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상황이라는 거죠. 얼마나 힘들겠어요? 본인이 죽는 것은 받아들인다고 해도 다른 가능성이 좀 보여야 하지 않습니까? 제자들이 미래를 이끌어간다든지, 혹은 자기가 없더라도 하나님 나라의 운동이 앞으로 나갈 수 있는 동력이 조금이라도 보여야 하는데, 그런 게 전혀 보이지 않으니 막막했던 거죠. 사실 예수님은 막막하게 돌아가셨어요. 어떤 희망도 없이요. 그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떻게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호소한 겁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다시 말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다고 하는 게 뭘까요? 그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저의 생각을 강의안에 썼습니다. 인용하겠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 같은 상황에서 구원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종교다. 화려한 교회 장식과 의식들이 문제가 아니라 오늘의 세계 안에도 여전히 이러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고 하는 점을 눈여겨보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여기에서 잘 생각하세요.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그 상황 안으로 들어간 겁니다. 누구도 원하지 않는 실패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참된 희망이 시작된다는 것을, 하나님의 행위가 거기에서 나온다는 것을 전한 거예요. 이 사실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렇지 않잖아요. 정말 그렇지 않죠. 모든 게 많이 있어야 되고 가능성이 있어야 되죠. 요즘 장관 후보 청문회를 하고 있죠? 거기에 보면 사회에서 가장 잘 나간다고 하는 사람들이 나오는데요. 모두들 그 사람들을 부러워합니다. 그것이 일반 세상이 판단하는 방식이에요. 기독교도 그런 쪽에 휩쓸릴 가능성이 많습니다. 지금까지 많이 그래왔고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을 명실상부하게 신앙의 토대로 받아들인다고 한다면 우리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우리의 삶을 풀어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상황, 그 문제와 직면해야 하는 거죠. 이게 말은 쉽지만 저도 그런 게 싫습니다. 편하게 살고 싶기도 하고, 대화가 좀 통하는 사람과 만나고 싶기도 해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쓸데없이 시간 보내지 않고 알차게 지내고 싶고, 여유가 있으면 문화생활도 하고 싶어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삶 말이에요.

그러나 십자가 신학에 의하면 그것은 기독교의 중심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살 때 기독교인들은 자꾸 실패하고 지지리도 못나게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요?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러면 뭐냐고 묻겠죠? 십자가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느냐에 대해 누가 어떤 객관적인 기준을 제시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이게 아니고 저게 아니라는 부정의 방식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죠. 하여튼 십자가 신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잘살고 잘나가자고 하는 청부론은 기독교 근본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부러 지지리 못나게 살아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일부러 이상하게 살고 게으르게 사는 걸 기독교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예수님도 그렇게 사신 게 아니거든요. 어떤 길을 가다가 결과적으로 십자가의 길로 들어간 거예요. 처음부터 그 길로 가겠다고 작정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바로 이게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버림받는 상태를 저주받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자는 거예요. 왜냐하면 거기에서 어떤 가능성, 즉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가 가능한 어떤 일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제 말이 너무 이상적으로 혹은 교리적으로 들리나요? 그렇다면 아직 기독교의 영성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고 할 수 있어요. 버림받은 절망적인 상황을 희망의 불빛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 기독교가 세상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입니다. 제 강의안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죠.

스릴이 넘치고 고상하고 이름나는 일은 교회가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앞장서서 할 단체나 사람이 많지만, 신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처럼 절망하는 그곳에 함께 있어주는 일은 교회가 최후의 보루다. 물론 교회가 앞서 이 일을 감당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일을 이루실 것이다. 이게 바로 ‘십자가 신학’이다.

과연 이러한 곳이 어딜까요? 팔복에 나오는 가난한 자일까요? 그러나 무조건 물질적으로 궁핍하다고 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유기되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유기라는 걸 잘 생각해 보세요. 아주 진지한 문제입니다. 우리의 삶과 죽음, 이 모두가 달려 있는 거니까요. 이 말을 여러분이 조금 더 실질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보충해서 설명해야겠군요. 하나님이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절망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은 절망감, 그런 게 바로 하나님으로부터의 유기라고 할 수 있어요. 더 이상 삶에 대한 의미를 찾기 힘든 상황이죠. 이걸로는 설명이 좀 부족하겠지만, 여기에만 머물러 있을 수는 없으니까 이 정도만 하겠습니다.

 

부활과 빈 무덤

이제 부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은 후, 아리마대 요셉이 자기의 가족 무덤에 예수님을 안장했어요. 그 이후에 거기에서 벌어진 일은 길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여러분이 자세히 알고 있으니까요. 예수님은 오후 3시에 운명했다고 합니다. 여섯 시간 만에 돌아가셨다고 하는데, 아마도 체력이 좀 약했던 것 같아요. 그 날이 바로 안식일이 시작되는 금요일이었기 때문에 안장만 했지 장례절차는 밟지 못했습니다. 안식일이 지난 다음에 예수님을 따르던 여자들이 예수님의 몸에 향료를 바르려고 찾아왔다고 합니다. 최소한의 장례 절차를 밟으려고 한 거죠. 그런데 돌문이 열려져 있고 천사들이 나타났다는 이런 저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복음서마다 좀 차이는 있는데, 하여튼 그런 과정입니다.

그 뒤로 빈 무덤이거든요. 무덤이 비었으니까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말하는데요. 무덤이 비었다고 해서 무조건 부활이 증명되는 건 아니잖아요. 부활한 예수님이 현현했다는 내용도 여러 번 나옵니다. 한두 제자에게는 개별적으로 나타나기도 했고, 열한 제자 모두에게 나타나기도 했고, 막달라 마리아에게도 나타났다고 해요. 게다가 오백여 형제에게도 나타났다고 하고요. 오백 명에게 동시에 나타났다고 하면 상당히 중요한 일이었을 텐데, 복음서에는 그 내용이 없습니다. 그렇게 중요한 이야기가 복음서에는 왜 나오지 않는 걸까요? 바울에 따르면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에게도 나타났고 칠삭둥이로 태어난 자기에게도 나타났다고 말하는데요. 이런 말은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복음서의 말이 옳을까요, 아니면 바울의 말이 옳을까요? 왜 서로 일치하지 않는 걸까요? 복음서의 내용은 예수님이 부활하자마자 나타난 일이고, 바울이 전한 것은 훨씬 후대의 일이라서 복음서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하면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서나 서신서나 기록된 연대에는 큰 차이가 없어요. 물론 조금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거의 같다고 봐야 합니다. 복음서가 조금 먼저 기록되었고 그 내용들이 서신에 많은 영향을 미친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복음서가 먼저 기록되었기 때문에 바울의 말이 들어가지 않았다고 말하는 건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가 형성되던 지역과 바울이 편지를 쓰던 지역(공동체)이 지리적으로 차이가 있었다는 겁니다. 2천 년 전에 처음으로 기독교가 시작될 때는 정보 교환이 잘 안 되던 시대였어요. 그래서 예루살렘에 있던 사람들과 안디옥이나 갈라디아 혹은 빌립보에 있던 사람들은 긴밀한 관계를 맺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소통하기도 힘들었겠죠. 연락이 안 되다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 신앙의 내용들이 달라졌습니다. 즉, 이방인 기독교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대 기독교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멀어졌던 거죠. 그래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도 다르게 발전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하여튼 그것에 대해 제가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신약 성서학자들이 말해야 할 것 같은데, 아마 그분들도 이 부분에 대해서 더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저도 이야기하다가 생각이 나서 하는 말이에요. 복음서에 있는 부활 경험의 대상자들과 바울이 말하는 부활 경험의 대상자들이 왜 차이가 있냐는 거죠. 생각을 해보세요. 성서신학 분야의 석사학위 논문 주제로도 충분하리라 봅니다.

이런 상황은 부활이 뭐냐 하는 것과 근본적으로 맞물려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걸 부활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런 차이들을 해명할 수 없어요. 예수님이 40일 동안 지상에 있다가 승천했다고 하잖아요?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는 거예요. 승천했다면 어디로 간 걸까요? 딱 40일 동안만 이 땅에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40일이 유대인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건 다 알고 있을 거예요. 예수님도 40일 동안 광야에서 기도를 했고, 모세도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했죠. 그렇게 40이라는 숫자에 어떤 의미가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실제로 예수님이 지상에 며칠 동안 있었는지는 잘 모릅니다. 이것은 구약에 기초해서 해석된 건데요. 사실 좀 까다로운 부분입니다. 제가 어떤 면에서 자꾸 여러분을 혼란스럽게 하고 복잡하게 하는 것 같은데, 여러분이 기존에 생각하고 있는 부활의 개념을 좀 내려놓게 하려고 그러는 거예요. 여러분의 머리에 부활의 개념이 너무 확실하면 성서가 이야기하는 부활 속으로 들어가기가 어려우니까요.

우리는 일단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사실 앞에서 두 가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강의안에 나오고 다른 하나는 나오지 않습니다. 첫째로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예상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공생애 동안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서너 번 정도 언급한 걸로 나오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로 제자들은 전혀 예수님의 부활을 예상하지 못한 것처럼 복음서에 나오고 있어요. 앞뒤가 맞지 않죠? 제자들은 맹탕이었을까요? 몇 번 들었으면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하든지 아니면 무덤이 비었을 때 예수님의 부활을 생각했음직도 한데, 전혀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까요. 예수님이 직접 현현하고 나서야 그걸 알았다고 하는데요. 또 알았다고는 해도 부활에 대해 실증적으로 이해했던 게 아니었어요. 그냥 혼란스러웠던 거예요. 죽은 사람은 땅에 묻혀 썩어야 하는데, 그러리라 생각했던 선생님이 자기들 앞에 나타났으니까요. 이걸 제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벌어졌잖아요? 당연히 허깨비나 귀신을 본 것 같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보면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고 금방 공동체가 형성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부활의 경험은 상당히 산만한 체험이었어요. 논리적이지 않았거든요. 복음서도 논리적으로 말하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부활은 더 확실한 게 되죠. 만약에 부활이 꾸민 이야기라고 한다면 뭔가 그럴 듯하게 상상력을 발휘해서 합리적으로 이야기했을 겁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느 누가 부활을 믿겠어요?

그러나 복음서는 자기가 직접 본 것처럼 생생하게 합리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부활했는지도 몰라요. 그냥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과 예수님이 자기들 앞에 몇 번 나타났다고 하는 사실만 확실하게 전하고 있을 뿐이죠. 그런 것들을 확실하게 경험했다고 해서 바로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생각을 금방 할 수 있었을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 기간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확신할 수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게 뭔지 몰랐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제가 앞서 바울의 이야기를 했는데요. 바울이 오백 명과 누구누구가 부활한 예수님을 봤다고 말이죠. 그건 상당히 후대의 이야기거든요. 부활의 주님이 40일 만에 정확히 승천했다고 한다면, 지상에는 더 이상 예수님이 없어야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바울은 그 이후로도 부활한 예수님을 만났다고 후속보도를 하거든요. 그렇다면 바울이 경험한 부활의 주님은 실질적인 주님이 아니라 환청, 환각, 실존적인 깨달음이었을까요? 이미 부활 승천한 다음에 예수님을 경험했다고 한다면 시간적으로 볼 때 그게 당연하잖아요.

여기에 그 어떤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리얼리티가 특이하다고 하는 거죠. 우리가 부활을 자꾸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으로 생각하는 한, 우리는 결코 성서가 말하는 부활의 실체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이와 관련된 문제들은 너무나도 엄청나기 때문에, 제가 딱딱 끊어서 말하지 못하고 산만하게 왔다 갔다 하면서 말하고 있는데요. 부활이 단순하게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게 아니라, 우주론적으로 한번 밖에 없었고 한번 밖에 없는 사건(유일회성의 사건)이기 때문에, 어떤 것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그런 거라는 말입니다. 그런 사건을 우리가 자꾸 설명하려고 하니까 모순에 빠지고 한계에 이를 수밖에 없는 거예요. 부활은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말을 해야 한다면 설명할 수 없다는 걸 말해야 하죠. 이 말이 좀 우습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제가 역설적으로 표현한 겁니다. 궁극적인 것은 실증적으로 말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 그것이 신학의 기초입니다. 왜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활을 예측하지 못했을까요? 그만큼 부활은 제자들을 비롯한 그 누구에게도 예측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생명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이 문제를 생각하려면 구약의 묵시 문학과 연관해서 예수의 부활 사건을 이해해야 하는데요. 그렇게 부활은 전체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둘째로 부활 현현은 왜 믿는 사람들에게만 경험되었을까요? 왜 믿는 사람들에게만 부활이 나타났던 걸까요? 여기에 부활의 독특성이 있습니다. 부활은 마술도 아니고 과학도 아니고 기적도 아니라는 겁니다. 기적은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잖아요. 모세가 열 가지 재앙을 바로 앞에서 행했을 때, 나일 강이 피로 변한 것은 히브리 사람들만 본 게 아니라 거기 모였던 모든 사람들이 다 볼 수 있었잖아요. 일반적으로 다 그렇죠. 그런데 왜 부활만은 예수님과 관계있는 사람들에게만 인식되었을까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바로 여기에 부활의 핵심이 있는데요. 부활은 예수님과의 특별한 관계 속에서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새로운 생명의 세계인 겁니다.

이런 말로 그 사태를 정확하게 전달한 건 아닌데요. 다시 한번 전체 그림을 말하겠습니다. 이런 거예요.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실험실에서 우리가 반복해서 증명해낼 수 있는 생물학적이고 물리학적인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구약에서 말하고 있는 묵시문학적 성격의 새로운 세계를 향한 기다림이었거든요. 전혀 다른 세계, 이 세계가 아니라 저 세계 말입니다. 장소만 다른 세계가 아니라 질적으로 다른 생명을 말합니다. 그것은 이 땅의 그 어떤 것으로도 비슷하게 말할 수 없는 거예요. 그렇다면 너무 허황된 거 아닌가, 이 세상에서도 확인할 수 없는 거라니, 그건 말장난이 아닌가, 그런 걸 어떻게 진리라고 할 수 있는가 하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말에 주눅 들지 마세요. 바로 거기에 기독교 신앙의 특성이 있어요. 부활은 근거가 확실한 겁니다. 가능한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리고 거기에서 모험이 필요하죠. 우리는 거기에 우리의 모든 걸 다 걸었습니다. 그것은 종말에 가서야 다 드러나요. 그때까지 우리는 이 세상 안에서 진리의 투쟁을 하는 겁니다. 이 세상이 끝날 때 우리가 참여하게 될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생명으로 예수님이 변화되었다고 하는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부활에 대해서는 우리가 더 이상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은 허무맹랑하고, 이 세계의 물리학이나 생물학에 비해서 근거가 훨씬 부족한 게 아닙니다. 아시겠어요? 전달이 되는지 모르겠네요. 부활의 두 가지 관점에 대해 제가 일단 질문의 형태로 말했지만, 대충 대답이 되었을 겁니다. 자연과학과 부활의 관계를 보충한다는 뜻으로 저의 강의안을 그대로 인용하겠습니다.

자연과학을 신봉하는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의 이 부활교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려고 들 것이다. 과학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그러나 과학만이 진리를 드러낸다고 단정할 수 없는 게 아닐까. 부활은 하나님이 이루게 될 종말사건이며 종말희망이며 종말적인 신뢰인데, 이것을 과학적으로 논증하라는 주장은 과학의 자기 한계를 넘는 발언이 아닐까 모르겠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이론이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같은 현대 물리학을 끌어들일 필요도 없이 최소한의 직관만으로도 이건 분명하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과학이 시간의 실체도 아직 풀어내지 못하고 있는 마당에 종말론적 진리까지 과학적 증거로 재단한다는 것은 과학만능주의적 발상이 아닐는지. 좀 더 실제적인 문제를 제기하자면, 자연과학이 인간과 우주의 미래를 위해서 지금까지 무엇을 감당했으며 앞으로 감당할 몫이 과연 무엇일까라는 것이다.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했을 뿐이지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하고, 많은 것을 생산하긴 했지만 자연의 조화를 깨뜨리고, 우주를 여행할 가능성을 열었지만 자기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 유럽의 중세기 때처럼 신학적 도그마가 자연과학을 규정해버리는 행위를 종교적 독단이라고 한다면, 역으로 오늘의 과학이 신학적 진리를 자신들의 틀 안에 가두려는 태도도 역시 자연과학적 교만이다.

이런 말은 자연과학자들이 동의할 수도 있고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의 태도에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고요. 제 말씀은 기독교의 가르침에는 진리에 이르는 고유한 길이 있다고 하는 건데, 그게 전달이 되는지 모르겠네요. 다른 것도 연관됩니다만 부활은 이 땅에 있는 생명 형식과는 질적으로 다른, 그러기에 우주 역사에서 한번밖에 일어나지 않았고 궁극적으로 일어나야 할 생명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그렇게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보편적 생명에 대한 기독론적 해석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예수에게 일어난 사건에서 진리를 파악하고 그 안에서 살아갑니다. 하나님 나라도 종말에 완성되지만 이미 성취되었다고 신학적으로 이해하잖아요. 자연과학자들은 그것을 형이상학이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사실 이 세상에 완벽하게 실증적인 것이 얼마나 있을까요? 지금 앞에 있는 이 책상도 없어지고 다른 것으로 변해버릴 텐데요. 그렇다고 해서 자연과학의 세계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은 아니에요. 그 길이 다르다는 겁니다. 실험과 데이터를 통해서 진리에 도달하려는 자연과학과 신적 계시의 차원으로 진리에 도달하려는 기독교 신학은 배타적인 게 아니에요. 자칫하면 배타적으로 되지만, 얼마든지 연결될 수도 있습니다. 다른 것은 제쳐두고 제가 여기서 강조하려고 했던 것이 바로 이겁니다. 기독교가 이 세계와 이 세계 안에서 벌어지는 하나님의 계시를 바라보는 독특한 눈을 배우자는 거예요. 시각적 영성을 배우자는 말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부활을 질적으로 새롭게 변화된 생명 사건으로 인식하는 동시에 자연과학과도 배치되지 않는 독특한 관점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제가 중간에 설교조로 많이 이야기했는데 마무리는 설교조가 아니라서 다행입니다. 제 강의안을 읽는 것으로 이 대목을 정리하겠습니다. 들으시고 질문을 주세요.

위의 신학적 대답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이들은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묻고 싶을 것이다. 예수 믿으면 구원받고 영생을 받는 것 아니냐, 부활해서 예수님과 더불어 천국에서 잘 먹고 잘살고 멋지게 지내는 것 아니냐?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대답은 이와 같다. 아무리 부활의 세계에 대한 희망이 강렬하다고 하더라도 부활한 다음에 우리가 어떻게 살게 될 것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라는 요구는 신앙적인 게 못된다. 하나님이 종말에 이루게 될 그 생명의 세계를 우리가 어떤 그림으로 구체화시킬 수는 없다. 생각해보라. 지금 우리가 최상으로 상상할 수 있는 세계라고 해봐야 이 지상적 삶의 확대이며 그것의 연속에 불과한 것인데, 그것이 곧 하나님 나라가 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런 삶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이 하나님이 온전하게 통치하게 될 세계를 우리 인간의 상상력 안에 끌어당겨 고정시키기 보다는 하나님의 자유에 맡기는 것이 훨씬 신앙적인 태도다. 초대교회는 이렇게 열려져 있는 미래와 종말에 대한 희망에 근거해서 저주스러운 십자가에 달린 자를 하나님으로 믿었고, 결국 그런 믿음으로 유대종교와 로마정치와 헬라문화의 틈바구니에서 독자적인 정신세계를 완성시켜 나갈 수 있었다.

 

예수의 부활 인식에 대해

예수님이 자신의 부활을 미리 알고 있었을까, 하는 질문이 올라왔습니다. 그것도 어려운 질문입니다. 몰랐을 가능성이 높죠. 알았더라도 부활의 사실과 일치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명백히 알고 있었다면 그렇게 불안해할 이유가 하나도 없잖아요? 지금 우리는 부활만 가지고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기독교 세계 전체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확실하지만 실증적이지 않은 것, 그게 기독교 신앙이거든요.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두 가지 중에 하나만 원해요. 실증적으로 하든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든지 말이에요. 현실, 즉 리얼리티가 차원에 따라 다른데요. 우리는 습관적으로 지금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식대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을 확실하다고 보는데, 기독교는 그게 아니라 전적으로 새로운 확실한 것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그것을 기다리고 있어요. 신랑이 올 때를 기다리는 신부처럼요. 아마 그 세계가 오면 여러분은 깜짝 놀랄 겁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세상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우리는 그 새로운 것에 대한 불안 때문에 여태까지 익숙했던 것을 연장시키려고 해요. 이 세상은 하나님 나라나 새 하늘과 새 땅이 아니라 헌 나라죠. 헌 나라요. 그 헌 나라에 익숙하기 때문에 그쪽으로만 가는 거예요. 부활은 우리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생명의 변화이고, 기독교 신앙은 바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저도 잘 안 되지만 그러한 신앙의 세계로 들어가면 정말 눈이 반짝반짝할 거예요. 정말 그때는 깨어 있을 겁니다. 전적으로 새로운 것, 바르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토탈리 알리’(Totaliter Aliter), 절대타자예요. 전적인 새로움이죠. 거기에 기독교 신앙의 모든 것이 걸려 있습니다. 지상낙원은 아니에요. 지상에서 노동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은 이 세상의 사회과학이 하는 겁니다. 그렇다고 이런 걸 무시한다는 건 아니에요. 실증적인 세계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전혀 다른 쪽으로 변화 되는 것입니다. 그게 어떤 건지는 지금 우리가 도저히 알 수 없어요. 그러나 그게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랍고 큰 설렘과 기다림인지요! 우리가 기독교 신앙이 말하는 그러한 영적인 신앙에 들어가게 되면, 늘 기쁘게 평화로운 하나님의 통치 속에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

고맙습니다. 전적인 새로움. 오늘은 그것을 기억하고 가세요. 오늘 밤에 자기 전에 전적인 새로움을 꼭 생각하세요. 부활의 능력은 예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죠. 어떻게 예수님이 내가 부활하겠다고 해서 부활할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은 무덤에서 죽음과 싸워 살아난 게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킨 거예요. 수동태, 깨움을 받은 거죠. 하나님의 개입입니다.

다음 질문은 이렇습니다. “부활한 예수님의 몸은 왜 없어졌나요?” 부활은 실증적인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으로 새로운 생명 사건인데요. 그것에 대한 신학적인 전이해가 없으면 이런 질문에 대답하기가 힘듭니다. 어쨌든지 왜 몸이 없어졌냐는 거죠? 누가 대신 대답해주겠어요?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좀 어렵군요. 뭐라고 해야 할까요? 이 질문을 주신 김혜란 씨가 좋은 학생이네요. 선생이 대답을 못해서 쩔쩔매게 만드니까요. 우리가 알 수 없는 일이라고 넘어가도 되겠지만, 오늘은 시간이 충분하지 않으니 제가 기억해두었다가 다음 시간에 대답하겠습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201 기독교가 뭐꼬 제15강, 기독교의 역사 [1] 2012-02-17 3065
200 기독교가 뭐꼬 제14강, 십자가와 부활(4) 2012-02-11 2633
» 기독교가 뭐꼬 제13강, 십자가와 부활(3) 2012-02-11 2742
198 기독교가 뭐꼬 제12강, 십자가와 부활(2) 2012-02-11 2871
197 기독교가 뭐꼬 제11강, 십자가와 부활(1) 2012-02-11 3936
196 기독교가 뭐꼬 제10강, 죽음에 대해서 2012-02-11 3362
195 기독교가 뭐꼬 제9강, 청교도 신학에 대해서 [2] 2012-02-11 3293
194 기독교가 뭐꼬 제8강, 칭의와 구원 [4] 2012-02-11 3604
193 기독교가 뭐꼬 제7강, 영성과 신학 2012-02-11 2859
192 기독교가 뭐꼬 제6강, 역사적 예수(3) [1] 2012-02-11 3132
191 신학입문 13장 21세기 한국교회와 신학 2011-11-16 3411
190 기독교해석학 10장 정치신학적 해석학 2011-08-06 3950
189 기독교를 말한다 5장, 구약성서와 히브리즘 [2] 2011-07-24 4777
188 기독교가 뭐꼬 제5강, 역사적 예수(2) [2] 2011-05-03 4686
187 기독교가 뭐꼬 제4강, 역사적 예수(1) 2011-05-03 4926
186 기독교가 뭐꼬 제3강, 인문학적 성서읽기 [2] 2011-05-03 4729
185 기독교가 뭐꼬 제02강, 초대교회의 배경 2011-05-03 5127
184 기독교가 뭐꼬 제1강, 강의안내 [3] 2011-05-03 4955
183 기독교가 뭐꼬 머리말 2011-05-03 4880
182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 역자후기 2011-01-31 6283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