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강 녹취록 - 제11장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5)

 

네. 안녕하세요. 46강입니다. 우리가 성령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어요. 제가 일부러 여러번으로 나누어서 한게 아닌데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아마 저의 무의식중이라고 할까요? 그기에 성령의 문제가 까다롭다는 그러한 의식이 있어서가 아닐까요? 까다롭다는 거는 그 말 그 자체로는 이해하기 힘들다고 하는 건데 네 그렇겠죠. 오해될 수도 있구요. 이런 문제들이 조금 설명하기 힘든 이유는 한편으로는 신학적으로 이해를 해야 되고요. 또 한편으로는 실제적으로 경험해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식과 경험, 이 두 가지가 맞물려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일반적으로 평신도들께서는, 제가 평신도라고 하는 말은 성직자와 대립된다 혹은 수준이 낮다 그런 뜻으로 쓴 거는 아니에요. 모든 신자는 다 똑같죠. 성직자가 따로 있고 평신도가 따로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역할이 다른 거죠. 어쨌든 이 평신도들, 신학을 전공하지 않았거나 신학을 전공했다고 하더라도 어떤 단계에 올라가지 않는 사람은 성령에 대한 신학적 행위, 별로 와 닿지 않습니다. 한국 교회는 특별히 그런 경향이 더 있고요. 주로 성령을 경험론적으로만 따라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뜨거워지는 것 말이죠. 성령이 심리적인 작용으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 오해 때문에 성령에 대한 인식이 별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고 그 경험이 왜곡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 한국 교회 현실을 제가 생각하기 때문에 이 11장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는 이 대목을 다른 주제보다도 진도를 천천히 나간 것 같습니다.

오늘 마지막 이예요. 46강입니다. 제가 가진 책으로는 2쪽입니다. 읽는 것만 한다면 15분이면 읽을 수 있을 텐데 설명이 좀 필요하니까 한 시간 동안 우리가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시간을 적어놓고 너무 길게 하지 않도록 해야겠네요. 오늘은 정리하는 부분이예요. 앞에부분도 중요하지만 오늘은 성령에 대해 정리되는 부분이기 때문에 요거를 여러분들이 잘 좀 귀담아 들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갖고 있는 책 178쪽이네요.

하나님의 미래와 영의 관계로 인해서 생명은 영 안에서 예언자적 성격을 갖는다. 이 말자체가 앞에 있는 것과 연결되는 건데요. 다시 앞으로 갈수는 없구요 진도로 나가면서 필요한 부분을 설명하도록 하겠어요. 하나님의 미래와 영의 관계라고 했는데요 그러니까 영은 하나님의 미래와 연관되어 있다. 그 미래는 생명이 완성되는 때이구요. 네 이러한 관계로 인해서 생명은 영 안에서 예언자적 성격을 갖는다. 예언자들이 한 일은 결국. 네 예언자들마다 입장들이 다르죠. 성격들이 있으니까요. 그러나 큰 틀에서 볼때 생명과 영, 이러한 관계를 깊이 내다본거죠. 예언자적 영성으로 내다본거죠. 그 예는 앞에 많이 나와 있습니다. 요엘, 이사야 등등이죠.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내용을 인용한다면 이사야가 본 환상 같은 것들입니다. 어린아이가 독사굴에 손을 넣고 사자가 풀을 뜯고 그런 것들입니다. 생명이 영을 통해서. 생명의 영이죠.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그러한 영, 그러한 것을 통해서 완성된다. 그러한 관점들이 여기에 연계되어 있는 겁니다.

영이 활동하는 곳에서는 새로운 생명과 함께 인간의 운명이 미래적으로 성취된다는 암시를 통해서 모든 것이 충만하다. 이에 따라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영이 예언과 관계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직시하고 있다. 우리말 사도신경에는 그거는 없죠. 그러니까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는 예언자 문제가 진술되어 있습니다.

영은 '예언자들을 통해서 언급된' 그런 정체를 갖는다. 이 경우에 무엇보다도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이 중요하다. 이로써 다시 한 번 기독교 신앙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행한 역사와 연관된다.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이 행한 언급에서 미래적으로 계시되는 신적인 영의 현실성이 선취적으로, 즉 예수에게서 이런 일이 발생하기 오래 전에 작용했다. 예언자들이 완성된 미래에 대해서 증거하는 동안 영은 그들을 통하여 말했다. 원시 기독교가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는 사실도 역시 이에 상응한 문제들이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영 안에 실행되는 모든 기독교적인 언행은 일종의 예언적 관계에 속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영의 창조적 작용도 역시 이미 미래로부터 다가오는 모든 현재적 생명의 근원이라고 이해될 수 있을지 모른다. 영은 모든 피조물에게 그들의 미래를 제공하며, 이를 통해서 만물을 살아가게 한다.

여기까지가 한 패러그래프입니다. 그냥 이렇게 읽는 것만 들어서는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따라가기 힘들죠. 신학적인 단어들, 그러한 개념들이 섞여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신적인 현실성이든지 선취적으로 되었다느니 예언적 관계라든지 이러한 용어들이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살아가는데 사용되는 용어들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 단어들로 진술된 글들은 그냥 들어만 갖고는 이해하기 힘들겠죠. 여기서 길게는 설명하지 않겠어요. 그냥 한 두마디로만 정리를 하죠. 이거죠. 성령은 기본적으로 생명의 근원이거든요. 그건 여러번 이야기한 겁니다. 성령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그런데 그 영이 하나님의 미래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 생명은 예언자적인 성격이 있다고 하는거죠. 예언자적 성격이요. 내다보는 거죠. 점쟁이가 하는 일하고는 좀 다른 겁니다. 생명의 미래를 내다보는 거예요. 역사를 뚫어볼 줄 아는 거죠. 네. 그런 점만 여러분들이 생각해 두면 되겠습니다. 생명은 예언자적 성격을 지닌다.

예수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영은 기독교인들에게서 활동한다. 즉 자기를 믿는 자들과 함께 하겠다는 예수의 약속이 확실하다는 신뢰를 통해서 그렇다. 기독교인들에게 임하는 영의 현존은 예수에게 현현한 생명 현실성이 기독교인들에게 계시된다는 신뢰 가운데서 확실하다. 중요한 이야기를 짚은 거예요. 성령 받았어요. 이런 질문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어떤 느낌을 받으세요. 어떻게 대답할 수 있습니까?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영의 현존 경험이거든요. 영이 우리와 함께 한다고 하는 경험이거든요.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 바로 이 문장에 그 대답이 있습니다. 예수에게 현현한 생명 현실성이 우리들에게, 기독교인들에게 계시된다는 신뢰에서 확실하다. 신뢰죠. 믿음이죠. 예수님에게 일어난 생명 현실성, 부활을 통해서 선취된 생명 현실성, 그런 것들이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도 계시, 알려진다, 드러난다는 믿음이 있으면 성령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역시 신앙과 희망을 통해서 영은 이미 지금 기독교인에게 현재한다. 네 그 설명입니다. 신앙과 희망을 통해서. 무슨 신앙이고 무슨 희망인지는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되잖아요. 아시는 문제잖아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난 생명의 현실성에 대한 그러한 신앙과 또 그것이 종말에 완성된다고 하는 희망, 미래죠. 희망, 그리고 그것이 오늘 우리의 삶에 비밀한 방식으로 개입되어 있다고 하는 그러한 신앙과 희망, 그러한 것을 통해서 영은 이미 기독교인들에게 현재한다. 그러한 믿음, 그러한 희망이 있는 사람들은 영과 함께 하는 겁니다.

영이 예수와 그의 죽음을 극복하는 생명과 연결된다는 확신이다. 이는 곧 이론적 의미로서의 확신이 아니라 신뢰에 대한 확신이다. ‘신뢰에 대한 확신’ 이거는 믿을 만한 근거를 갖고 있는 것에 대한 이것을 신뢰라고 하는 겁니다. 맹목적인 믿음은 신뢰가 아니죠. 광신은 신뢰가 아니죠. 무조건적인 믿음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한다고 하는 그러한 사실에 대한 확실성으로 갖는 믿음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한 신뢰에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성령이 지금 현재한다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예수와의 일치를 통해서 영은 하나님과의 일치를 준비한다.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게 될 때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갈 4:6, 롬 8:14) 요런 부분에서는 조금 신비주의적인 색깔이 있죠.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게 될 때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기독교 신앙은 그런 신비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그거는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하는 그 차원은 신비로운 거거든요. 그러나 아무런 근거도 없는 신비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사실, 그러한 근거를 뚫고 들어가야 되는데요. 그게 신학적 영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게 간단한 것은 아니죠. 시간, 존재, 역사, 삶의 문제 등등에 대한 인식이 풍요로워져야만 이러한 신학적 진술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신비적인 그러한 내용을 가진 기독교 도그마가 어떤 근거가 있으며 그러한 근거를 통해서 기독교 신앙의 진리 안으로 우리가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을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거죠.

예수에게서 현현하고 능력적으로 증명된 영이 바로 하나님의 영이기 때문에 영은 예수와 연결됨으로써 하나님과 연결된다. 영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었던 것처럼, 예수에게 참여함으로써, 그리고 예수에 관한 사신, 복음 선포, 복음내용을 중재함으로써 믿는 자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한다. 영은 따라서 예수의 사명에 걸맞은 사명을 기독교인들에게 주어 세상에 내보낸다. 그렇죠. 지금 몇 가지로 설명된 요 내용들을 잘 보면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 건지 그 답을 찾을 수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중심에 있죠. 그와의 일치인거죠. 그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 복음을 선포하고 그 복음대로 사는 그러한 삶. 이런 것들이 성령을 받은 기독교인들의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이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 것을 그냥 밤새도록 뛰고 불 받았다고 하구요. 소나무뿌리를 뽑을 정도로 기도를 한다거나 그러한 방식을 자꾸만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그거는 어떤 종교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열광주의적 현상들입니다. 아마 초기 기독교에도 그러한 현상들이 있었을 거예요. 그거는 특별한 경우에 있을 수 있는 어떠한 성령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나타날 수 있는 부분적인 현상일 수 있는데요. 부분적인 현상이기도 하고 좀 왜곡된 현상이기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우리의 생명을 사실은 풍요롭게 하지 못하잖아요. 그렇다면 그거는 성령의 활동이라고 하기는 힘들 거거든요. 성령은 기본적으로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에 우리의 허무하고 잠정적이고 이러한 삶이 어떻게 궁극적인 생명과 일치되는가? 그 관계에서 성령에 대한 이해를 잘 하셔야 됩니다.

영은 하나님의 현재적 현실성이며 예수의 하나님이 현재하는 방법이다. 이런 문장도 외워두면 좋습니다. 신학적으로 정리가 정확하게 된 문장이잖아요. 성령이 누구냐 무엇이냐 이런 질문에 여러분들이 이러한 문장으로 대답할 수 있는 거예요. “영은 하나님의 현재적 현실성이며 예수의 하나님이 현재하는 방법이다.” 전 언젠가 성령을 하나님의 존재방식, 지금 여기서의 존재방식이라고 말한적이 있어요. 바로 그 이야기하고 똑 같습니다. 하나님은 초월적이고 절대적이잖아요. 그러나 이 세계는 그렇게 초월적이거나 절대적인 방식으로 돌아가지 않잖아요. 그런데 그 하나님이 지금 여기에서 현실로 들어나는 길이 바로 영이라고 하는 거죠.

하나님의 능력과 그 나라는 다가오고 있으며, 예수의 사명 가운데서 이미 우리에게 다가왔다. 예수는 하나님을 도래하는 하나님이라고, 도래하는 나라의 하나님이라고 선포했다. 이는 하나님이 만물을 자신의 미래로 돌려놓았다는 뜻이다. 밑줄을 그으셔야 되겠군요. 예수님이 설명한 하나님에 대한 내용이 뭐다는 그러한 판넨베르크의 재해석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을 도래하는 하나님, 온다 도래하는 나라의 하나님 임박했다고 이야기했잖아요. 그렇게 선포했잖아요.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야기했잖아요. 도래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님이 만물을 자신의 미래로 돌려놓았다고 하는 거죠. 하나님의 미래에 모든 만물의 실체가 드러난다고 하는 겁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미래는 예수의 제자들에게서 이미 현재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미래는 그들 제자들에게 현재를 무한정으로 규정하는 능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려운 말이네요. 다른 글에서 판넨베르크는 하나님을 이렇게 규정한 적이 있습니다. 설명한 거죠. 개념적으로 설명한 겁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규정하는 현실성이다.’ 디 알레스 스테윈데 드리트리카이. 연관되는 문장입니다.

우선 예수의 공동체는 부활한 자의 현현을 하나님의 미래가 시작된 것으로서, 또한 하나님 나라의 서막으로서 경험했다. 공동체는 부활한 자의 현현을 무엇으로 생각했느냐 하면 하나님의 미래가 시작되었다. 하나님의 서막이다. 이렇게 경험한거죠. 왜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그 근거가 얼마나 타당한가? 그런 것들을 잘 논증해 나갈 수 있는 것이 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의 진행도 역시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현재가 이와 같은 한 인간에게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가르쳤다. 도래하는 하나님은 예수를 통해서 인간 세상으로 왔다. 구체적인 단 한 번의 역사 속으로 왔다. 그러니까 제2의 예수는 불가능한 거죠. 그리스도는 오직 예수에게만 가능한 거죠. 다중 그리스도론이라고 하는 말도 간혹 경솔하게 하는데 그거는 말로 할 수 있기는 있겠지만 기독교적인 관점은 아닌 거죠.

그러나 그는 진행되는 역사 속에 있는 자신의 공동체를 공허하게 내버려두거나 고립시키지 않았다. 예수의 하나님은 우리가 영을 경험함으로써 교회에 현재한다. 영은 하나님의 현재적 현실성이니까요. 우리가 성령을 경험함으로서 하나님이 이 교회에 현재하는 거죠.

창조자는 영과 더불어 이미 그가 허락한 생명의 숨결을 통해서 피조물에게 현재한다. 그런데 현존하는 것들의 미래적 완성에 대한 영감이 몰아적으로 경험됨으로써 신적인 영이 피조물 가운데 현재하게 되었다. 어려운 문장이죠. 그 문장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현존하는 것들의 미래적 완성에 대한 영감이 몰아적으로 경험됨으로써, 몰아? 자기가 없어지는 경험이죠. 신적인 영이 피조물가운데 현재하게 되었다. 조금 더 나가보겠습니다.

이는 곧 예언자적 영감이 보여주고 있는 분명한 확신이며 또한 약속된 미래의 현재화를 위한 예수의 생애와 활동 가운데서 집중화된 것이다. 예수님의 축귀사건이라든지 치유사건, 그런 가운데 미래가 현재 나타난 거죠. 선취적으로 현실이 된거죠.

이러한 중에 하나님의 영은 과거의 역사를 중재함으로써 기독교 공동체에 현재한다. 이 역사는 곧 예수의 역사이며, 우리로 하여금 다가오는 하나님의 영에 의해 충만해짐으로써 그 선포가 한 때 그 사건이 되었던 하나님의 현존에 참여하게 한다. 영의 현재가 미래적인 것에 대한 직접적인 영감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의 과거를 통해서 기독교 공동체에 중재되었기 때문에 영은 공동체의 중심에서 믿음과 희망을 통해서 부여된다. 잘 보세요. 중요한 대목입니다. 영의 현재, 이게 번역투라서 잘 전달이 되지 않는데요. 영이 지금 여기 있다고 하는 것, 영의 현재라고 한 거요. 그것이 미래적인 것에 대한 직접적인 영감을 통해서가 아니라, 미래적인 것은 생명이 완전히 완성되는 그러한 때를 이야기하잖아요. 새하늘과 새땅, 새 예루살렘 그런 것들입니다. 영생을 이야기하기도 하구요. 절대적 생명을 이야기하는데요. 그것에 대한 직접적인 영감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거를 환상적으로 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과거를 통해서, 그건 역사죠. 기독교 공동체에 중재되었기 때문에, 예수의 사건들, 그에게서 일어난 일들, 그런 것들이 기독교 공동체안에 고유하게 담지되어 있다고 하는 뜻입니다. 들어있다고 하는 거죠. 성찬, 세례 그런 것들이 그러한 내용들이에요. 기독교 공동체에 그런 것들이 중재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미래에 드러나게 될 그 완전하고 절대적인 생명을 직접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다. 간접적으로 기독교 공동체안에 들어있는 그러한 것들을 통해서 혹은 그런 것들 때문에 우리 신앙생활 안에서요. 믿음의 희망을 통해서 영이 주어진다고 하는 거죠. 이건 교회론적인 차원에서 중요한 내용입니다. 교회공동체에 필연적인, 혹은 필수적인 기능들을 이야기하는 거죠. 역할들, 역할 기능들 보다 더 근원적인 거겠죠. 기독교 공동체안에 담지된, 중재된 그런 내용들을 통해서 우리가 믿음과 희망에서 영을 받는다고 하는 거죠. 영이 현재하게 된다. 영을 받는다. 영이 현재한다 그런 겁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 공동체 생활은 정말 중요한 겁니다. 그런 걸 내버려두고 혼자 기도 많이한다고 해서 성령이 현재하는 거는 아니죠. 예수에게 일어난 사건에 대한 교회공동체의 역사적 회상, 기억 이런 것들이 중요합니다. 이런 일들을 가장 바람직하게 하는, 바람직하고 바르게 하는 역할, 이게 신학인거죠. 성서 텍스트를 바르게 해석해야 하니까 신학이 아니면 이거는 불가능한 겁니다. 신학이 아니면 역사해석은 불가능한 거거든요. 역사의 어떤 일들이 어떻게 중재되어 내려왔는지는 신학이 없이는 어떻게 알 수 있겠어요.

바로 이 믿음과 희망을 통해서. 왜냐하면 기독교 공동체가 되돌아보아야 할 예수의 역사 가운데서 이미 발생한 하나님의 미래가 지금 우리와 함께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은 다가오는,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이미 도래한 하나님의 현재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영의 현재는 믿는 자의 믿음과 희망 가운데서 만이 아니라 믿음과 희망으로 살아가는 사랑* 가운데서 충만해지고 완전해진다. 네 사랑에서 충만해진다고 하죠.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이야기하는 믿음, 소망, 사랑 그 이야기인데요. 이 세 가지 구도가 그냥 그러려니 그런 설교조의 신앙적 독단이 아니라 신학적인 토대가 확실한 겁니다. 영의 현재라고 하는 것은 믿음과 희망 가운데서 만이 아니라 믿음과 희망가운데서 살아가는 사랑안에서 완전해진다. 고 문장을 제가 원서를 직접 들여다봐야 되겠네요. 믿음과 희망가운데가 아니라 이런 것이 아니라 제가 책을 읽으면서 계속 토씨하나를 붙였잖아요. 제가 확실하게 분간을 못하겠네요. 지금 제가 그거를 찾기 힘드네요. 제 느낌으로는 만을 넣는 것이 더 맞는 것 같은데요. 그러나 안 그러나 믿음, 희망, 사랑 세가지 구도를 이야기하면서 성령의 현재를 참여하고 있다. 그런 정도만 아시면 되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가운데서 으뜸은 사랑입니다."(고전 13:13)라고 증거하고 있으며, 요한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요일 4:8)이라고 증거하고 있듯이 성령은 바로 사랑으로 현재한다. 믿음과 희망은 아직 잠정적인 세계 안에서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실존을 하나님께 내맡기는 신뢰의 태도라고 한다면, 사랑은 하나님과 현재적으로 일치하는 경험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곧 삼위일체론적인 면에서 성령으로서의 하나님이 오늘날 사랑으로 우리에게 현존한다는 뜻이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뛰어넘는 믿음의 용기를 움켜잡는다면, 그리고 모든 것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것을 희망하도록 견인된다면 사랑은 예수 이래로 기독교 안에서 발견된 것과 같은 창조적 사랑이다. 즉 그것은 니체가 자기 스스로 기독교적인 사랑의 특성을 진술했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한 채 매우 아름답게 서술한 용서하는 덕이다. 사랑은 사랑받는 자의 특권에 의존되지 않는 방식으로 창조적이다. 참 놀랍고 아름답게 쓴 문자이네요. 이런 것은 잘 밑줄 쳐놓았다가 인용할 수도 있는 그러한 문장이네요.

사랑은 사랑받는 자의 특권에 의존하지 않는 방식으로 창조적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무엇을 사랑할는지 스스로 창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사랑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를 향한 창조적 사랑이다. 도움을 필요로 한 이 사람은 아직 사마리아인의 이웃은 아니었지만 그의 도움을 통해서 이웃이 된 것이다(눅 10:36 이하). 그러니까 창조적인 거죠. 도움을 받을 만한 사람은 아니었어요. 이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러나 도움을 통해서 이웃이 된 거죠. 창조적이라고 하는 겁니다. 사랑은 창조적인 거다. 사랑받는 자가 어떠냐? 그런 것에 상관없이 스스로 창조적으로 활동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깊이 되새겨야될 실제 삶에서 경험되어야 될 우리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은 사랑하는 자의 행동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그 사랑 안에서 사랑하는 자는 자신을 초월하는 경험을 한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주체에 의해서 되는 게 아니예요. 오히려 사랑이 더 큰 힘이죠. 오히려 그것을 초월하는 거죠.

사랑은 이러한 몰아적 경향을 영적 생명의 다른 형식, 그리고 일종의 인식을 통한 감동, 예술가적 영감과 공유한다. 사랑의 탁월성은 이 경우에 사랑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을 초월해서 영원한 하나님의 본질에 참여하도록 고양시킨다는 데 있다. 자신을 초월한다는 말을 기억하십시오. 자기 초월이 아니면 하나님의 본질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자기초월이죠. 하나님과의 일치는 결국은 자기 초월이죠. 이게 안되는 이유가 자기 사랑, 자기 집중에 우리가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자는 신적인 사랑의 창조적 다이나믹에 참여한다. 창조적 사랑으로서 하나님은 그에 의해 완성된 세계라 할 이미 창조된 세계의 미래를 향하며 또한 현재한다. 그러나 신적인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에서 발생한 것처럼 하나님의 미래가 도래할 것이라는 사실에서만이 아니라 이미 도래했다는 사실에서도 충만하게 된다. 따라서 사랑의 사건은 하나님이 오셨다는 과거이며 동시에 오실 것이라는 미래이고, 또한 과거와 미래에서 도출되는 생동적인 현재다. 네. 판넨베르크가 신학자이지만 참 문장을 아름답게 쓰네요. 오늘 제가 공부, 이 대목이 결론이고 중요하다고 말씀드렸는데 그런 탓인지 아름다고 핵심적인 문장들이 여럿 나왔습니다. 지금 이 문장 저도 외워보고 싶어요. 가능하면 독일어로 외워볼까요. 제가 암기력이 많이 떨어지는데 그건 어쩔 수 없죠. 그래도 요런 것은 다 외워둘 만한 그러한 문장입니다. 사랑의 사건, 하나님이 오셨다는 과거이며 동시에 오실 것이라는 미래이고 또한 과거와 미래에서 도출되는 생동적인 현재이다.

사랑은 사랑이신 하나님 스스로 영의 활동에 현재한다는 사실을 뜻한다. 왜 그런지 아시겠죠. 사랑은 사랑이신 하나님 스스로 영의 활동에 현재한다는 사실을 뜻한다. 영의 활동, 생명의 근원인 영의 활동이요. 하나님과의 일치를 통해서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되잖아요. 자기를 초월하는 거죠. 그래야만 하나님과의 일치가 가능하죠. 자기 초월은 사랑의 능력이거든요. 상대방이 어떠냐에 상관없이 사랑을 통해서 모든 이들을 이웃되게 하는 그러한 능력입니다. 이거는 자기 초월이 아니면 가능하지 않죠. 네 신학이 어느 순간에 놀라운 설교와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네요. 그렇죠. 살아있는 설교는, 다시 말씀드려야 되겠네요. 살아있는 신학은 설교죠. 그리고 살아있는 설교는 신학적이어야 되죠. 이게 왜 그런지 아시죠. 그건 근본, 본질을 꿰뚫고 있고 거기에 맞닿아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신학이나 설교나 거기에 닿아 있어야 그것은 아름다울 수 있고요. 감동적일 수 있고요. 생명지향적일 수 있는 거죠. 영의 활동이죠.

따라서 고대 기독교에서 성령은 하나님의 현실성과 일치됨으로써 아버지와 아들과 하나 된 자로 인식될 수 있었다. 네 그러니까 성령도 처음부터 딱 어떻다 이렇게 시작된 것은 아니구요. 초대기 독교안에서 오랫동안 신앙경험과 사유, 이런 과정을 통해서 깊이 있게 이해되고 경험된 결과로서 제시된 겁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하나된자로 인식될 수 있었어요. 그게 사도신경에 나오는 겁니다. 성령을 그렇게 믿은 거죠. 그렇게 믿게된 과정이 있는거예요. 그 과정이 뭐냐? 그러면 한번 설명을 해봐라. 여러분들이 성령에 대한 공부를 성실하게 하셨다면 어느 정도는 할 수 있을 겁니다. 생명의 문제이고 미래의 문제이구요.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사건과 관계속에서 일어난 것이구요. 오늘 지금 보는 문맥에서 본다면 사랑의 능력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활한 자에 의해 유출되는, 그리고 기독교의 사신에 의해 중재된 영에서 바로 그 하나님은 현재한다. 예수는 그 하나님을 도래할 나라의 아버지라고 선포했으며, 그 하나님은 예수의 이러한 증거를 통해서 '아들'로서 현재하게 되었다. 따라서 니케아 신조가 언급하고 있는 영에 대한 내용을 확대 해석한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영이 아버지와 아들과 더불어 하나의 본질을 이루고 있으며, 더불어 기도를 받고 경외를 받는다고 했다. 아버지, 아들, 영의 세 형태는 신적인 사랑 가운데서 불가분리로 연결되어 있다. 도래하는 하나님의 미래는 사랑의 영을 통해서 현재한다. 이 영은 예수의 활동과 역사를 통한 신적 본질의 완성으로서 사람들과 친근하며 그 곁에 머물러 있다.

네. 이 마지막 두 문장도 멋지군요. 도래하는 하나님의 미래는 사랑의 영을 통해서 현재한다. 도래하는 하나님의 미래, 얼마나 황홀하겠어요. 영생이라고 하나님이 실질적으로 실체적으로 총체적으로 드러나는 그러한 때, 그러한 사건들이니까요. 복음서의 비유를 통해서 본다면 혼인잔치와 같은 때이니까요. 우리의 모든 상상력을 뛰어넘는 생명의 세계이니까요. 그게 오고 있는데 사랑의 영을 통해서 이미 현재한다. 놀랍죠. 사랑의 영에 우리가 사로잡힌다면 어떻게 될까요? 몰아적 경지죠. 앞에 나왔죠. 몰아적, 자기를 초월하는 그러한 경험있잖아요. 여기서 또 오해하지 마십시오. 광신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예요. 그 차이가 쉽지 않습니다. 뭐 그러한 초교파 광신자들, 열광적으로 박수치고 그렇게 하면서 자기를 자학하면서 어떤 몰아적 경험을 하잖아요. 마약을 먹는 사람들에게도 그런 일들은 가능하구요. 어떤 열광적인 콘서트도 그러한 것들을 가능하게 하죠. 그러한 것들하고는 다른 거예요. 우리의 이성적 인식이 바르게 작동되면서도 자기를 초월하는 그러한 영적 경험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게 하나님 미래의 현재예요. 그렇게 살면 우리의 영혼이 기쁨과 자유로 뿌듯하겠습니까? 마지막 문장이 그렇게 이야기하잖요. ‘이 영은 예수의 활동과 역사를 통한 신적 본질의 완성으로서, 그냥이 아니라 예수의 활동과 역사를 통한 건데, 사람들과 친근하며 지금 이 자리에 있다.’ 그 사실을 리얼하게 생생하게 호흡하듯이 경험하고 인식하고 사는 그러한 삶이 기독교 영성안에 들어있는 삶이라고 할 수 있겠죠. 신비주의자들, 에카르트 같은 그런 사람들이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겠죠. 그러한 신비주의만이 아니라 많은 목회자들에게서도 그러한 일들이 가능하고요. 일반 신자들에게도 가능하구요. 그렇습니다. 예수의 활동과 역사를 통한 신적본질의 완성으로 성령은 우리들과 친근하고 우리곁에 함께 하신다. 그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경험들이 여러분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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