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강 - 12장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인 (기독교적인) 교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안녕하세요 오늘 우리 공부 47강입니다. 어느덧 후반부로 넘어가는 군요. 판넨베르크책으로 하자면 제 12장이 되겠습니다. 새로운 장이예요. 소제목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인(기독교적인) 교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교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사도신경이 주로 삼위일체의 하나님에 대한 기초적인 교리를 담고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여기는 삼위일체라고 하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생명의 영인 성령입니다. 여기에 교회가 곁들여져요. 또 하나의 항목이라기 보다도 성령에 따라오는 항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신자들에게는 교회문제가 가장 절실하고 쉽게 다가오고 하는 문제인지 모릅니다. 하나님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나라 이러한 문제들은 뭔지 따라갈수는 있기는 있습니다만 실제 신앙생활에서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거는 신자들이 느끼기는 쉽지 않거든요. 그러나 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늘 교회안에서 활동하고요. 신앙의 모든 것이 교회의 틀안에서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습니까? 신앙도 결국 교회안에서 되고 또 교회를 위한 것이어야 되고요. 모든 것들이 그 교회와 연관해서 일어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교회하면 신자들이 잘 알기도 하고 또 친근하게 다가올 수도 있을 겁니다.

일단 이런 말로 시작해 볼까요. 예수님께서 교회를 원하셨을까요? 뭐. 심지어는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아 예수님이 교회를 세우신거 아니냐고 말이죠. 그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예수님이 직접 교회를 세우신 적은 없어요. 그런점에서는 틀린것인데 예수님이 안계시면 교회도 불가능하다고 하는 점에서 그것도 맞는다고 할 수 있겠죠. 역사적인 배경으로 본다면 예수님이 교회가 설립되는 것을 원했다 안하지 않았다 그런 것들을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예수님에게는 교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였거든요. 하나님의 나라가 곧 교회가 아니냐 이렇게 생각하면 좀 곤란합니다. 그런 문제들은 또 하나의 주제이기 때문에 오늘 여기서 길게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그 두 관계는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게 아니예요. 하나님의 나라가 훨씬 더 상위개념이라고 할 수 있겠죠. 하나님의 나라에 근거해서만 교회가 가능한거요. 이 말을 거꾸로 하면 틀립니다. 교회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능하다는 거는 말이 안되는 거죠.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바실레이야 투데우, 이것만 전하셨고 그 안에서 행동하셨죠. 교회에 대해서는 생각할 게재가 아니었습니다. 교회는 상당히 역사적으로 후대에 나온 거거든요.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더 정확한 말일겁니다. 교회는 역사안에 나타날 수도 있었고 현재는 나타난 거죠. 이렇게 나타났기도 그러나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고 하는 거죠. 교회가 이렇게 역사안에 나타났다고 하는 것은 필연이라기 보다도 우연한 일들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교회를 오늘 역사안에 있는 교회를 전제한다고 할 때는 그 역사안에 드러나는 출현과정이 아주 놀랍도록 우연한 일들에 의한 거다 말할 수 있습니다. 간략하게만 말씀드린다면요. 초기기독교의 사도들이 현재와 같이 유대교와 완전히 대립되는 그러한 차원의 교회를 생각하지 않았던거죠. 유대교 안에 머물러 있었어요. 바울을 중심으로 한 이방인 헬라, 기독교 공동체안에 천천히 등장하면서 결국 그 교회가 오늘의 교회의 모태가 된 거거든요. 거기서는 상당히 복잡한 역학관계, 이런 저런 힘들이 이렇게 저렇게 연결되고 밀리고 투쟁하고 그러한 사연들이 있습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교회는 역사안에 등장했습니다. 그 교회가 단순히 모여서 어떤 종교적인 회합을 하는 그런데로만 머물러 있지 않았던거예요. 기독교는 놀랍도록 진리론적인 토대를 이렇게 확보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사실 그런 거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 2천년까지 이렇게 계속되어 온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어요. 교회가 뭐냐? 교회가 어떠해야 되느냐? 교회정체와 교회 본질이 뭐냐에 대해서 나이브하게 생각하지 않았단 말이죠. 철저하게 신학적인 근거를 확보하려고 치열하게 투쟁하고 노력했습니다. 그게 신학의 역사에 다 나오고 있는거죠. 오늘 우리는 그러한 흔적들을 따라가게 될 겁니다. 천천히 가보죠. 네 이 책으로 138쪽입니다. 읽겠습니다.

사도신경은 삼위일체론적으로 구성된 고대 기독교의 신조문이다. 이 진술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사랑의 하나님이 세 형태로 병렬화되어 있다. 사도신경의 언어로 교회의 신앙을 고백한 그 당시의 피세례자와 오늘날 예배때 이 신앙고백을 갱신하는 기독교인은 이를 통해서 단순히 교회전승의 구체적인 진술을 반복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이를 믿고 따른다는 사실을 피력함으로써 삼위일체 하나님의 개개 현실성을 신앙 고백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는 그렇게 어려운 점은 없죠. 그냥 편안하게 신앙적인 상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계속할께요.

우리는 이러한 신앙고백을 통해서 우리의 운명을 그의 운명과 일치시킨다. 우리는 우리에게 어떤 특권이 있어서가 아니라 인류를 위해서 추가적으로 하나님께 신앙고백을 바치는 것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에서 그런 일이 있었으며, 또한 교회와 세례의 중재를 통해서 우리에게 적용된 것과 같다. 궁극적으로 마태의 세례 명령에 소급되어있는 (마 28:19) 신앙고백적 진술의 삼위일체론적 구성이 신앙고백의 개인적 의미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고대 기독교의 다른 구성적 신앙고백 형식과의 투쟁에서 그 신학적 정당성을 관철시킬 수 있었다.

요기까지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만 한 가지 집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이 삼위일체에 대한 복음서의 자료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마태복음 28:19절이예요.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그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네 여기 딱 끊어서 삼위일체를 말한다고 하기는 힘듭니다. 하나의 자료는 될 수 있는거예요. 마태복음의 이 구절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삼위일체, 콘스탄티노플이 이야기하고 있는 삼위일체의 하나님과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태복음의 이야기는 원형정도는 될 수 있겠죠. 아직 체계는 갖추지 못한거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각각 인식하고 경험했던 거죠. 이 세 페르조나, 인격이 어떻게 호모우시오스 본질적으로 하나이고 서로 구별되고 등등 하나되는 삼위일체 개념속에 들어오지 못한 겁니다. 그 당시에 여러가지 신앙고백들이 있었는데 이 마태복음 28:19절이 이야기하고 있는 세례명령, 고백문이 다른 것과의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는 거죠. 신학적 정당성을 관철할 수 있었다고 하는 겁니다. 고기 까지만 하죠. 고런 정도로 설명을 끝내죠.

이집트와 에티오피아 지역에서는 다섯 항목으로 구성된 신앙고백양식이 전승되었다. 이 양식은 2세기의 소아시아 신앙고백에까지 소급되며,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과 더불어 교회, 또한 세례행위와 연결된 죄의 용서나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에 대한 기독교적인 희망을 거론한다.

지역에 따라서 신앙고백의 항목이 서로 달랐다는 이야기군요. 이집트와 이디오피아, 아프리카 이디오피아는 남쪽으로 더 내려가구요. 그런 쪽의 신앙고백은 유달리 좀 달랐던 것 같습니다. 초기 기독교에서는 이집트 북쪽의 역할이 상당히 컸어요. 지중해 연안의 모든 지역이 복음이 전파되는데 중심센터, 거점이었기 때문에, 이집트가 아프리카 북쪽 가장 중요한 지역이었기때문에 당연히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리라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죠. 그러나 우리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이집트하면 이슬람교가 되었구요. 그렇지 않습니까? 기독교와 거리가 먼 것처럼 생각되었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거예요. 거기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여러 가지 항목들이 완전히 배제된 것이 아니라 사도신경안으로 자리를 잡게 된거예요. 그러니까 초기 기독교가 독특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어떤 점으로서는 단일성이라고 하는 관점이라고 할까요. 아니면 에큐메니칼정신이라고 할까요. 이런 점에서 신앙고백도 서로 공유해나가는 그러한 과정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게 참 중요했고 잘한 일 같습니다. 각각의 독특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에큐메니칼한 입장을 놓치지 않았다고 하는거죠. 특수성과 보편성이 같이 맞물려 돌아갔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다시한번 더 보겠습니다.

이 양식은 2세기의 소아시아 신앙고백에까지 소급되며,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과 더불어 교회, 또한 세례행위와 연결된 죄의 용서나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에 대한 기독교적인 희망을 거론한다. 후에 오늘의 사도신경 형태로 발전된 3세기 로마 공동체의 세례고백은 삼위일체에 집중하고 있지만, 이러한 신앙진술을 이디오피아나 이집트에 있었던 다섯개의 항목으로 진술된 이러한 신앙진술을 제거하지 않고 오히려 그 무언가를 본문으로 받아들였다. 그것들을 세 번째 항목인 성령에 대한 고백에 병렬시켰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근원적으로 신앙고백의 전승에서 삼위일체적인 세 주제가 핵심이며, 따라서 교회와, 그리고 세례 받을 때 얻게 되는 죄의 용서, 또한 기독교의 희망이 성령 항목에 귀속된다는 것이다.

네 대충 정리가 되었죠.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 아버지 아들 영은 앞서의 강의로 끝난 겁니다. 앞서가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 이잖아요. 기본적으로 그것으로 사실은 끝난 건데 3세기의 이런 신앙고백이 로마에서 형성된 거죠. 다른 지역, 이디오피아나 이집트에서 이야기하던 항목들을 부정하지 않고 끌어들였는데 독립된 항목으로 만들지 않고요. 성령 항목에 그것을 귀속시킨거죠. 큰 틀로는 여전히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세 항목이예요. 아버지, 아들, 영입니다. 그 이외의 것들은 영의 항목에 귀속된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 다음

교회에 대한 신앙고백이 세 번째 항목에 설정되었다는 것은 교회의 현존적 구조가 거룩한 차원에 볼 때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발현되고, 또한 믿는 자들에게 부여된 영적 영역으로서 신앙고백의 대상이 된다는 의미다.

초기 기독교회가 제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진리론적인 토대를 확보하기 위해서 그냥 주먹구구식으로 그 교리를 만든 것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체계있게 어떤 근거를 갖고 만들었다고 하는 사실을 여기서도 알 수 있는거죠. 교회를 무조건 믿을 수도 없는 거잖아요. 하나님만이 믿음의 대상인데 여기 교회가 신앙고백의 대상으로 들어오게 된 이유를 지금 설명하는 겁니다.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교회가 시작된다고 하는 관점들, 그리고 교회안에 어떤 영적인 영역이 기독교인들과 이렇게 기독교인들의 삶에서 출연한다. 혹은 나온다는 사실, 그러한 것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1564년 로마의 교리문답은 사도신경 본문에서 교회에 대한 신앙고백을 credo ecclesiam(교회를 믿는다)라고 정확하게 표명함으로써 성령'을' 믿는다는 신앙고백(credo in Spiritum Sanctrum)과는 구분했다.*

네 이 문장에서요. 1564년에 나온 교리문답에 대한 이야기가 있어요. 이게 원서로 뢰뮈시 카티시무스. 카티이즘 이건 교리 문답을 이야기합니다. 소교리문답, 대교리문답 이러한 단어들이 있잖아요. 루터도 교리문답이 있구요. 아우스부르크 교리문답도 있구요. 지금도 각 교파마다 세례를 받을때 교리문답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카티이시즘 영어로 그렇게 이야기하구요. 독일어로 카티시무스라고 합니다. 그게 뢰뮈시, 로마라고 되어 있어요. 로마의 교리문답인데요. 제가 그것을 정확히 파악을 하지 못했어요. 원서에서 뢰미시라고 할때 그것이 사도신경이 로마교회에서 시작했으니까 단순히 그걸 이야기하는지 아니면 지금 개신교하고 갈라져 있는 로마가톨릭교회를 이야기하는지를 정확하게 이해를 못했어요. 일단 그래서 번역을 1564년 로마의 교리문답이라고 번역했어요. 그거는 더 연구가 필요한데 제 생각에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리문답인 것 같습니다. 그건 넘어가죠. 라틴어에 대한 설명은 독일어로도 번역되고 있는데 성령을 믿는다, 교회를 믿는다 그 믿는다라고 할때 그 동사에 붙는 전치사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조금 뉘앙스가 달라지거든요. 그것에 대한 설명을 제가 역자주로 달았어요.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교회를 믿는다는 문구가 사도신경안에 들어와 있지 않습니까? 그게 하나님을 믿듯이 성령을 믿듯이 믿는 것이 아니지만 그러나 믿는다고 하는 거예요. 왜 믿는가 하는 것은 바로 앞에서 설명한대로 교회구조, 교회실체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에서 발현된다고 하는 것하고, 기독교인들에게 교회 생활에서 어떤 영적인 영역이 주어진다고 하는 그러한 차원에서 볼때 믿는다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데요.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말을 구별을 해야 되거든요. 그거를 1564년에 정확하게 구별한 교리문답이 나왔다고 하는 겁니다. 그 교리문답을 가르켜서 뢰미시카테시무스라고 하는 것이죠. 역주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라틴어로 '내가 믿는다.'라는 뜻의 credo가 전치사 in을 (독일어 an에 해당됨) 수반할 때는 단순히 믿는다기보다는 그 절대적인 존재를 확신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사도신경에서 성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는 표현과 (여기에는 in이 사용된다) 교회를 믿는다는 표현은 (여기에는 in이 사용되지 않는다) 그 믿음의 층을 달리하는 것이다.

성령과 연관시켜 본다면, 1564년의 교리문답에서 구별하고 있는 것에서 예를 든다면 그것은 credo in을 붙이는 거예요. credo in .. santrum 거룩한 영을 믿는다고 할때 credo만 하지 않고 credo in을 썼어요. 그러나 교회, eclesiam이라고 할때 그거는 credo만 썼습니다. 그런 차이가 있는겁니다. 그 다음을 보겠습니다.

기독교인은 아버지, 아들 그리고 영으로서 삼위적 현실성 가운데 있는 하나님을 믿는 것과 똑같이 (credere in의 의미에서) 교회'를' 믿는 건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교회의 오류와 한계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신앙고백을 바친다. 즉 기독교인은 그리스도의 영이 활동하는 장으로서 교회에 신앙고백을 바친다.

대충 구분이 되었죠? 교회가 신앙의 대상이 된 이유와 또 그 믿는다고 할때 하나님을 믿는거하고 교회를 믿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 이야기입니다. 네. 어쨌든 교회가 인간적인 한계들을 갖고 있어도 교회를 믿는다 혹은 교회에 신앙고백을 바친다고 하는 말이 가능한 거죠. 그 다음요.

이러한 전망은 가장 오래된, 즉 2세기에 이미 착상된 술어에 잘 표현되어있다.

주어. 술어. 술어는 풀어주는 단어들이예요.

이 술어는 신조문을 교회에 대한 언급과 연결시킨 그것이다. 즉 교회의 거룩성은 세속 세계로부터 구별되는 것이며, 하나님에게 속하는 것이고 세계 가운데서 하나님의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성서에 대한 술어가 따라오는 거죠. 어떠 어떻다. 교회는 어떻다. 신학적인 술어가 따라오는 거죠. 그런 것을 통해서 교회에 신앙고백을 바치는 이유들이, 혹은 그 근거들이 확보되는 것입니다.

성서적 전승에 따르면 신적인 영역에 속하는 모든 것,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어 그에게 묶여있는 모든 것은 거룩하다. 이 경우에 거룩성이 세계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세계 중심에서 교회가 하나님과 그의 오심을 '거룩하게' 한다는 의미인데, 이것은 기독교의 성육신 신앙에 해당하는 문제다.

니케아 신조와 4세기의 다른 헬라 신조양식에서 특별하게 진술된 교회의 일치(Einheit)는 교회의 거룩성과 서로 연관된다.

지금 판넨베르크가 교회의 본질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중이예요. 바로 앞에서 거룩성을 이야기하고 단일성을 이야기하고. 네 가지 있잖아요. 거룩성, 단일성, 보편성, 사도성. 그걸 지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이 다 교회에 대한 술어예요. 교회에 신앙고백을 바치는 근거들이 이 술어들을 통해서 확보되는 거죠. 이 거룩성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앞의 설명에 따르면 세계와 완전히 분리되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세계 중심에서 하나님과 그의 오심을 거룩하게 한다는 의미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거룩하다. 스스로 거룩한 게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오심을 거룩하게 한다는 점에서 거룩하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겁니다. 그게 단일성하고 연관되고 있어요. 다시 그 패러그래프 읽겠습니다.

니케아 신조와 4세기의 다른 헬라 신조양식에서 특별하게 진술된 교회의 일치(Einheit)는 교회의 거룩성과 서로 연관된다. 하나의 교회 안에서 이루어질 모든 기독교인의 일치는 자신이 이룰 수 있다고 기대해볼만한 목표가 아니다.

재미있는 표현이죠. 교회 스스로 그런 것들은 일치는 불가능하다. 우리가 한번 해볼까 목표를 삼아볼까 해볼까 기대해봐도 되나? 그런 목표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거는 스스로는 불가능한 문제인 거죠. 우리가 거룩하지 않는데 거룩한 공동체만이 가능한 단일성을 이룰 수 있겠어요. 좀 더 봐요.

이 목표를 현실화하려다보면 아직 확정되지 않은 미래의 기독교로 하여금 어딘가 상처를 받게 한다.

아마 요 문장은 로마가톨릭교회의 한계를 집는 것 같습니다. 로마가톨릭교회가 스스로 절대적이라고 생각해서요. 교회의 미래를 차단하는 일을 한거 아니겠습니까? 마틴 루터가 하는 말을 용납할 수가 없는거죠. 단일성, 일치를 스스로 이루어 볼려고 하다가 잃게 되는거죠. 미래 기독교에로 하여금 어딘가 상처를 받게 한다. 모든 기독교인이 일치하지 않는 한 교회는 하나님 말씀의 완전한 의미를 결코 실현하지 못한다. 한 하나님과 한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로서 그 교회의 거룩성은 절대적으로 일치를 요구한다. 이런 점에서 교회에 대한 신조의 언급 방식이 기독교의 종파적 분리와 대립적이었다는 사실은 현실적 교회조직에 대해 노골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는 것을 가리킨다.

요 문장이 조금 미묘해요. 고 문장을 한번 짚고 넘어갈까요? 교회에 대한 신조의 언급방식, 교회를 어떻게 신앙적으로 신학적으로 진술하는가 하는 그 방식이 기독교 종파적 분리와 대립적이었다는 사실, 그러니까 로마가톨릭과 개신교의 분리, 이런 것하고 대립적이었다고 하는 것, 그걸 어떻게 진술하는가에 따라서 종파적 특징이 달라진다 그런 뜻인가요? 요 문장만 갖고서는 정확하지 않는데요. 제가 원래 생각했던 것하고 이 문장이 차이가 나서요. 제가 생각을 하다가 멈칫했습니다. 그냥 문장만으로 여러분에게 전달되었을까요? 다시 한번 읽어 볼까요?

이런 점에서 교회에 대한 신조의 언급 방식이 기독교의 종파적 분리와 대립적이었다는 사실은 현실적 교회조직에 대해 노골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는 것을 가리킨다. 로마가톨리교회, 개신교, 동방정교회와 대립적이었다는 사실

그렇다면 그걸 반대했다고 하는 것일텐데요. 이 문장이 여기서 조금 그래서 뒤틀리는 것 같습니다. 제가 원서를 다시 볼 여유는 없네요. 좀 읽어가다보면 설명이 될 것 같습니다.

이것은 현실적 교회조직에 대해 노골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참된 교회가 불가시적이어야 한다거나 신자들의 가슴 속에서만 살아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기구적인 형식에서 실질적인 형태를 얻는다는 것은 육신을 입은 하나님의 공동체로서 기독교 교회의 본질에 속한다. 이러한 형태화를 위해서 기독교는 역사과정에서 적극적으로 투쟁했다. 교회는 교회와 그 친교 가운데서 활동하는 신적인 사랑의 본질이 기독교인의 분열 때문에, 혹은 기독교적 삶의 자세가 도착됨으로써 사람들에게 희미해져버린 때 보다는 그 본질이 명백했던 시기에 설득력을 갖게 되었다. 기독교 신조가 실제적인 기독교의 분열에 맞서 교회의 일치를 강조했다는 것은 현재의 교회 기구에서 신앙적 교회가 충분한 모습을 갖추지 못했으며, 따라서 모든 기독교 종파로 하여금 보다 분명하고 적절한 친교를 인식할 수 있도록 도와줄 필요가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교회가 현재 거대한 에큐메니칼 운동의 목표를 갖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앞에서 조금 문장이 명확하지 않다고 제가 조심스럽게 이야기한 대목이 지금 뒤로 읽어본 글을 통해서 어느정도 해명이 된 것 같습니다. 이런 거죠. 교회를 어떻게 신앙적인 진술로 표명할 것이냐? 말이 좀 더 어렵게 되는군요. 제가 왜 이렇게 말을 어렵게 하는지 모르겠어요. 다시요. 교회가 무엇이냐 하는 그러한 문제제기는 종파분리·대립 이런 것들을 극복해려고 할때 현안이 되었다. 그렇게 이야기하면 되겠습니다. 조금 더 쉽게 간단하게 표현을 해야 되겠는데요. 교회가 분리되고 시끄러워지고 그럴때 도대체 교회가 뭐냐 그 본질에 대한 질문이 중요했다고 하는거죠. 그렇게 넘어가겠습니다. 지금 두가지를 이야기했죠. 거룩성과 단일성이예요. 나뉘어지지 않는거예요. 교회 스스로 단일할 수 없고 거룩성이라고하는 교회 본질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성에 연결되어 있는 교회 공동체의 거룩성에 근거해서만 우리는 참된 친교의 단일성을 확보할 수 있는거예요. 거룩성과 단일성, 세번째는 보편성이예요.

교회 일치에는 교회의 보편성, 즉 카톨리시티가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카톨리시티라는 그리스어는 유니버살리티*를 의미한다. 교회의 유니버살리티를 프로테스탄트 교회도 역시 고백할 수 있어야만 한다. 교회는 사회에서 사회의 다른 조직과 구별되어 끊임없이 개체적이고 특별한 기구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또한 그들 조직체와 더불어 인류의 한 부분임을 주장한다. 실제로 특별하게 꾸려진 교회 조직에서 중요한 점은 그 생명 영역의 다원성 가운데서 전체 인간의 운명과 위기에 대해서 개방적이라는 사실이다. 교회의 유니버살리티, 보편성 이것은는 현재의 교회로 하여금 교회다움의 협소한 틀과 국가, 종족, 계급의 틀을 뛰어넘어 인류 전체를 바라보도록, 또한 전체 인류의 평화와 정의를 위해 살아가도록 압박한다. 고대 교회의 신조 교리교육은 가톨릭적이고 유니버셜한 교회개념을 4세기에 받아들였다. 이 개념은 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뿌리가 깊다. 유감스럽게도 16세기의 프로테스탄트 신조문에서 교회에 대한 술어는 사도적인 전통과 니케아적인 전통의 신조를 올바르게 번역하지 않고 '기독교적인 교회'라는 특징으로 대체되어야만 했다.

가톨릭 보편적이라고 하는 이 말이 구체적인 로마가톨릭교회를 암시하기 때문에 16세기 프로테스탄트에서는 가톨릭이라는 말을 빼고 기독교적인 이라는 말을 바꾼거죠. 유감스럽다. 판넨베르크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런 형식의 신조는 오늘날에도 역시 여러 예배에서 사용된다. 실질적으로 교회는 오늘날 자신의 자명성을 획득하기 위한 준거로서 최소한 기독교인들만의 에큐메니칼 일치를 뛰어넘어 고대교회 당시의 기독교인들과 같은 기준에서 인류 전체를 유니버살하게 조망해야만 한다. 이러한 유니버살한 조망은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다.

네 여기서 보편성이 설명되었죠. 첫번째는 거룩성, 두번째는 단일성, 세번째는 보편성입니다. 그런데 이 세가지가 각각 나눠지는 것이 아니죠. 거룩성은 이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뿌리를 내린다고 하는 점에서 나오는 것이죠. 그 거룩성이 단일성, 일치 이것하고 연관됩니다. 거룩한 교회가 이렇게 전제될때 거기서 우리는 교회의 분리를 뛰어넘어 단일성을 추구할 수 있는거죠. 참된 친교가 가능한 거죠. 거룩성과 단일성입니다. 이러한 단일성, 교회 일치는 곧 보편성과 연관됩니다. 이것이 교회 세번째 특질이요. 본질이거든요. 보편성이요. 교회가 자기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 우주전체 운명과 연관되어 있다고 하는거죠. 이렇게 판넨베르크가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교회의 보편성에서 중요한 특징이 하나 더 있어요. 그거는 개교회로서만이 아니라 전체 교회로서의 차원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샘터교회라고 하는 구체적인 교회도 분명히 교회죠. 그러나 그러한 개별교회, 실제로 신자들이 모이고 성찬예식을 하고 선교하고 예배드리고 등등하는 그러한 교회만이 교회가 아니라 그걸 전체로 묶는 교회, 노회나 지방회나 총회나 여기에는 신자들이 따로 있는 게 아니죠. 개교회의 전체 모임이니까요. 그러나 이것도 교회다. 그것이 교회 보편성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입니다. 마지막 네번째가 남았군요. 사도성이죠. 읽어보겠습니다.

보편성(Allgemeinheit), 카톨리시티(Katholizit?t), 유니버살리티(Universalit?t)는 기독교회의 보편적 본질을 뜻하는 일군의 개념이다. 기독교회는 한 개체 교회가 독립적으로 온전한 교회일 뿐만 아니라 전체로서 한 교회를 구성하며, 더 나아가 세계와의 우주론적인 지평을 잃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한국 개신교회가 극단적으로 분파적 특성을 보이고 있다는 것은, 또한 세상과 이원론적 입장을 견지한다는 것은 교회의 본질을 크게 훼손시키고 있는 셈이다.

니케아 신조에서 네 번째로 거론된 교회에 대한 술어와 준거라는 점에서 볼 때 기독교회는 오직 카톨릭적이고 유니버살한 교회이어야만 사도적인 교회라 할 수 있다. 사도성이죠.

그러나 사도신경에서는 이 문제가 구체적으로는 명시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도의 사명이 모든 인간의 한 하나님인 그분의 이름으로 이미 전체 인류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 하나님에게 들림 받은 이는 사도들을 파송한 부활한 분이다. 따라서 교회의 유니버살리티-보편성과 사도적 사명의 신실성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인류 전체를 지향한다고 하는 점에서 보편성이죠. 사도적 사명이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는 것이니까 이 두가지가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당연한 말이죠.

교회의 사도적 성격은 역사적으로 많은 세대의 기독교인들이 믿었던 바와 같이 교회가 사도시대의 형편과 사고방식을 가능한대로 변함없이 유지한다는 데 달려 있는 건 아니다. 변화는 역사발전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교회가 전체인류를 지향하는 사도적 사명에 묶여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계속 수행해 나간다는 것이 결정적인 요소다. 이 사명은 선교를 이방인 선교사들이 수행해야 할 특별한 과업이라고 미루어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생명에 대한 교회의 진술에서 수행되어야만 할 그것이다. 이럴 경우 인류에 대한 기독교적 사명에서 '세계'만이 아니라 교회의 변화를 위한 일종의 역동성이 발생한다. 이처럼 교회의 정체성과 변화는 사도적 사명을 수행하는 과업과 상호 연결되어있다.

네 오늘 여기까지만 보겠어요. 중요한 대목을 우리가 본겁니다. 사도신경이 왜 삼위일체 하나님만 고백한다는 원칙임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믿음의 대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가에 대한 설명이 나온 거예요. 앞부분은 그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믿는 이유, 그걸 술어라고 이야기했죠. 설명하는 거니까요. 그것을 네가지로 이야기한 겁니다. 네가지예요. 차례대로 보면 거룩성, 단일성, 보편성, 사도성이예요. 각각은 우리가 설명을 했으니까요. 그런데 이 사도성은 이 사도신경에 구체적으로 나오지는 않아요. 이거는 로마교회의 세례고백문을 두고 이야기한 거예요. 제가 사도신경 그 부분을 읽어보겠습니다. 성령을 믿사오며 그 다음 부분요. 거룩한 공회와, 이건 교회죠.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니다. 그렇게 되어 있죠. 그런데 여기에 거룩한 공회를 믿는다고 하는 표현만 되어 있고 그 네가지 특성, 이런 것들은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은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를 배경으로 놓고 설명하는 거예요.

네 아. 요 부분에서 조금 제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이야기한 것 같네요. 그거는 이 네가지 특징이 구체적으로 나왔는가에 대한 것은 제가 설명을 못한 것 같습니다. 이게 본문에 나와 있어요. 니케아 신조와 4세기의 다른 신조들에서 나오는 교회의 일치, 그렇게는 되어 있는데 그걸 제가 머리속에 확실하게 개념을 정리하고서 말씀을 드리지 못했기 때문에 혹시 제가 설명한 부분에 혼란한 부분이 있었지 않을까 그게 염려되어서 이렇게 말씀드린거예요. 그걸 일일이 어떻게 다 확인하겠어요. 그건 그냥두고요. 이 네가지 였습니다. 거룩성, 단일성, 보편성, 사도성이예요. 여러분들이 이 네가지만 잘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교회가 어떠해야 되느냐 그리고 오늘 교회는 여기에 얼마나 충실하냐 하는 것을 잘 분간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러한 것들을 또 문자적으로만 이해를 해서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초대 교부시대 모든 조직과 행태들을 우리가 무조건 고수해야 된다. 그렇게 받아들이시면 좀 곤란한거죠. 그건 판넨베르크도 이미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변화 발전은 어쩔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네가지 특징들을 담아내려고 했었던 이러한 교부시대의 신학적 노력, 그거는 놓치지 말아야 된다고 하는거죠. 그 사도에 대한 이야기에서 제가 순간적으로 혼란을 겪었던 문장을 다시한번 봐야 되겠군요.

니케아 신조에서 네 번째로 거론된 교회에 대한 술어와 준거라는 점에서 볼 때 기독교회는 오직 카톨릭적이고 유니버살한 교회이어야만 사도적인 교회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도신경에서는 이 문제가 구체적으로는 명시되지 않았다.

그렇죠. 사도적인 거만 명시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다른 것까지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거는 니케아 콘스탄티노플의 그러한 신앙고백에 의해서 된거죠. 고맙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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