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 49강입니다. 네 시간이 많이 가는 것을 느끼겠군요. 1강을 시작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49강입니다. 지금 우리는 교회에 관한 판넨베르크의 사도신경해설을 따라 읽고 있어요. 앞에서 두 번을 했는데 기억하시겠어요? 두번의 핵심이 무엇인지 아시겠어요? 다음과 같습니다. 한번은 47강이죠. 교회의 본질, 혹은 특색 4가지에 대한 설명을 했어요. 네가지 그건 여러분들에게 설명을 드릴 필요가 없겠지요. 거룩성, 단일성, 보편성, 그리고 사도신경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 나오는 사도성입니다. 그게 첫번째 공부한 내용이었어요. 판넨베르크의 책 12장인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인 (기독교적인) 교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의 첫 번째 강의였습니다.

두번째는 성도의 교제였습니다. 네가지 앞에서 이야기한 특징과 더불어서 그것을 더 보충설명하는 하나의 관점, 신앙고백으로서 성도의 교제가 나왔다고 하는 거죠. 성도의 교제에 대한 이야기가 바로 두 번째 강의였습니다.

오늘은 세번째로 지금까지 우리가 이야기한 이 교회, 혹은 성도의 교제 이것이 갖는 새로운 차원에 대한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예요. 이러한 이야기죠. 이러한 앞에서 우리가 공부한 그러한 내용들을 그 자체로만 머물러 있으면 안된다하는거죠. 그것이 새로운 지평으로 확장되어야 하는데 그 지평이 바로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겁니다. 그게 왜 그런가 하는 가를 판넨베르크가 잘 설명을 할 테니까 우리는 그걸 따라가면 됩니다. 이 교회에 대한 것, 성도의 교제가 그 자체로만 머무르지 않고 하나님 나라 지평으로 확대되어야 된다고 하는 사실은 우리 기독교 신학의 모든 부분에서 사실은 다 해당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나라가 모든 신학의 근거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표현이 적합한 것은 아닌데 제가 적절한 개념이나 단어를 기억해낼 수 없어서 그냥 그렇게 말했을 뿐이예요. 모든 신학의 기초라는 말, 말입니다. 토대라는 말, 말이죠.

요게 좀 중요하기 때문에 좀 설명을 하고 넘어가야 될 것 같아요. 하나님의 나라가 이 교회를 넘어서는 거거든요. 온 세계 구원과 연관되어 있는 거거든요. 그게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계시 같이 통하는 이야기죠. 이 하나님의 나라가 임박했다고 하는 메시지는 예수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었죠. 그 분의 첫번 선포도 그것이었고 그 분의 가르침이 모두 거기하고 연관되구요. 그분의 행위도 사실은 거기에 연관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박해 왔으니까 회개해라 그러한 메시지 였죠. 거기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것은 개인의 심리, 마음에 제한 받는 것은 아니죠. 그리고 세속적인, 세상과 상관없는 종교적 게토 이런 부분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죠. 그냥 세계 전체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하나님의 통치인거예요. 하나님의 나라로 확장되어야 한다는 말은 교회의 이러한 특징들이 자기를 위한 것만으로 떨어져 있으면 안된다고 하는 거죠. 요런 부분들이 그냥 설명을 들으면 그렇게 인정할 수 있는데 실제 교회생활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인식되지 않습니다. 그게 신앙생활의 현실로 다가오지 않는거죠. 무슨 말인지 전달되었죠. 그냥 교회자체 운영, 여기에 머문다고 하는 겁니다. 그 안에 물론 좋은 그러한 신앙적인 용어들이 많이 있고 종교적인 경험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거기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협의로, 축소된 상태로 머물러 있는거죠. 네 그 정도로만 이야기하고 본문속으로 들어가봅시다. 본문안에서 우리가 조금 더 필요한 것들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제가 갖고 있는 책 192쪽에서 시작합니다.

그리스도와의 친교와 기독교인끼리의 친교가 갖는 이러한 상호관계를 통해서 교회의 가장 내적인 본질이 규정된다. 여기서 설명을 해야 될까요? 앞에 있는 그러한 이야기들을 검토하기는 했어야 되는데 다시 여기서 또 하기는 힘들죠. 그냥 좀더 나가 보겠습니다. 그래도 간단하게 한마디만 하고 넘어가면 이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친교와 기독교인사이의 친교라는 것은 성만찬 친교안에서 하나가 된다, 일치가 된다고 하는 겁니다. 기독교인끼리 서로 만나서 놀고 서로 관심을 갖고 하는 그러한 차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원론적 사건과의 일치, 이런 연관속에 있다고 하는 거죠. 다시 읽겠습니다. 그리스도와의 친교와 기독교인끼리의 친교가 갖는 이러한 상호관계를 통해서 교회의 가장 내적인 본질이 규정된다. 이러한 특징은 물론 사적으로만, 그리고 세상과 등진 채 마음으로만 경건하다는 의미에서 오해받을 수 있다. 그 특징이 실제로 예수와의 친교인데도 중요한 대목입니다. 정신차리고 들어보십시오. 그 특징이 실제로 예수와의 친교인데도 예수의 사신과 활동에 연관된 지평이 드러나지 않고, 따라서 신자들이 나누는 그리스도와의 친교가 암시해야만할 지평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러면 이제 오해를 받는거죠. 자기들끼리만 경건한 척하고 산다고 하는 오해를 받는 거죠. 실제로 교회에 친교, 성도의 교제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친교잖아요. 그렇다면 그리스도 예수의 사신, 이건 복음선포예요. 이런 것에 연관된 일들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웃기는 일이다고 하는 거죠. 이런 문제도 늘 신자들이 이렇게 받아들입니다. 아 그래 예수의 복음선포, 활동 안다. 나는 그래서 선교한다. 복음전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틀린 말은 아니예요. 거기서 예수님의 사신과 활동에 연관된 지평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교회를 확장하는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구원행위에 연관된다고 하는 거죠. 생각해보세요. 예수님께서 축귀한다거나 병을 고친다거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를 가르치신다거나 하는 것들이 교회 공동체를 만들거나 그런 쪽에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전도왕을 뽑고 그러한 방식은 아니지않습니까? 실제적으로 인간의 삶이 전적으로 새로워지는 그러한 메시지였잖아요. 그러한 행동이었잖아요. 그게 바로 하나님 나라의 속성들인거죠.

지금 한국교회의 어떤 특징들은 그러한 부분들이 아주 취약할 겁니다. 하나님 나라,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가 외면받고 있죠. 아니 사실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설교가 드물구요. 하나님 나라, 바실레이야라고 하는 개념도 교회안에서 별로 거론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신자들이 별로 인식을 하지 못합니다. 그냥 종교 조직과 활동으로만 이해가 되고 있는 거죠. 이게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이예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에게 운명을 걸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사실은 예수님의 사신, 복음선포와 그 분의 활동은 외면한다고 하는 거죠. 그렇지 않는가요? 네 그 다음 계속하겠습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에게 속한 미래 지평이며,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기대다. 아 정말 중요한 대목이네요. 예수님의 사신과 활동이 연관된 지평, 하나님에게 속한 지평인데 도래할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대예요. 계속이요. 이로써 교회라는 말(에클레시아)의 근원적 의미가 밝혀지게 되며,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공동체가 구약 성서적 사유와 맺게 된 연관이 밝혀진다. 이 구약적 사유는 하나님의 약속을 뜻한다(고전 8:55). 에클레시아라는 원시 기독교 공동체의 특징은 교회가 이스라엘의 약속된 후계자임을 드러낸다. 교회는 스스로를 하나님의 종말론적 공동체로 인식했다. 이러한 공동체로서 교회는 궁극적인 하나님의 도래를 기대하는 것에, 도래하는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하는 것에, 그리고 하나님의 메시야인 예수와의 일치에 자신의 현존적 기초를 두고 있다. 그리스도와의 친교와 성도와의 교제로서 교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이런 지평에서만 적절하게 진술될 수 있다. 여기까지가 한 패러그래프입니다. 중요한 언급들이 많군요. 신학교에서 논술 시험, 조직신학에 관한 논술 시험을 친다면 지금 우리가 한번 읽은 이 패러그래프를 지문으로 주고 이 패러그래프를 A4 용지 다섯장의 분량만큼 해석하라. 이렇게 해도 될 것 같애요. 여기에 그렇게 중요한 것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여기만은 아니죠. 제가 여기 있는 것을 다 설명하지도 못했어요. 시간적으로도 그렇구요. 가장 큰 거는 시간적인 제약 이구요. 물론 이게 온라인 녹음이기 때문에 시간의 제약을 많이 받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거를 다시 듣는 분들에게는 너무 길게 끌면 지루할 수 있어서 어느정도 진도를 나가야 되거든요. 정말 아무 제약을 받지 않는다면 한 강좌를 이 한 패러그래프를 갖고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런지는 여러분들이 아시게죠. 이 패러그래프의 마지막 단락에서 교회의 현존적 기초를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어요. 이러한 내용들은 신학생들은 꼭 알아 두어야 될 것들인데요.

세 가지요. 중요하기 때문에 한번 더 짚어 보겠습니다. 교회는 궁극적인 하나님의 도래를 기대한다. 궁극적인 하나님의 도래를 기대한다. 그게 첫번째고 두번째는 도래하는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한다. 이런 문장도 설명을 해야 되거든요. 도래하는 하나님, 도대체 도래한다니, 온다. 오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뜻이지요. 몰트만의 책에 그러한 제목도 있습니다. 오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오신다고 하는 뜻이 무엇일까? 그러한 질문인데요. 몰트만은 그러한 질문으로 책 한권을 썼습니다. 그거를 설명하려면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한 메시아관, 그들이 어떻게 메시아를 기다리는가 그러한 것들도 충분히 이해를 해야 되고 물론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선포, 가까이 왔다고 하는 하나님 나라 선포, 이것을 더 충분히 이해를 해야 되구요. 또 2천년동안 기독교 신학이 어떻게 이해를 했는가 하는 그러한 문제도 우리가 다루어야 되겠죠. 도래하는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한다. 세 번째 하나님의 메시아인 예수와의 일치를 이룬다. 이 세가지가 교회의 현존적 기초라고 할 수 있는 거예요. 중요하죠? 요거는 신학에 조금 관심이 있는 분들은 밑줄도 치시고 머릿속에 확실하게 정리를 좀 해놓으면 좋겠어요.

네. 내용이 세가지 였구요. 거기에 따르는 핵심적 단어도 세가지 였어요. 첫번째는 기대구요. 기대하는 것, 두번째는 선포하는 것, 세번째는 일치였어요. 네. 그러니까 이러한 세가지 교회의 현존적 기초가 바로 교회의 자기 정체성에서 중요한 요소라고 하는 거죠. 특별히 그리스도와의 친교와 성도와의 교제라는 교회의 정체성이 어떤 성격이냐는 것을 설명할때 놓쳐서는 안될 그러한 대목이라는 겁니다. 네 우리는 지금, 교회, 그리고 교회의 보충적 설명으로서 성도의 교제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지평과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 사실을 공부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 다음 패러그래프 보겠어요. 앞에 한 이야기를 부연하고 더 심층적으로 설명하는 그러한 이야기, 글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미래인 것처럼 교회의 미래다. 네 요 문장도 우리가 생각할 거리를 많이 줍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예요.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미래인 것처럼 교회의 미래입니다. 아직 우리는 하나님 나라와 일치하지 못한거죠. 교회나 세상이나 똑 같이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죠. 그 미래가 바로 하나님 이죠. 네 고정도로 하고 더 가보겠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어거스틴 이래로 그리스도의 나라와 일치하는 것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어거스틴이 교회를 하나님 나라, 그리스도의 나라와 일치하는 것으로 주장했어요. 그게 잘못이죠. 그가 그렇게 한 것은 그 시대의 어쩔 수 없는 한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 정부와 이 로마의 정치와 로마의 종교인 이 기독교가 체제와 질서를 유지함으로서 그리스도의 왕국을 실현해 나간다 이런 쪽으로 좀 생각을 한 거거든요. 그가 경솔하게 그러한 생각을 한 것은 아닐텐데요. 이 문제는 오늘 우리가 더 못할 것 같습니다. 어거스틴의 교회론 이런 식으로 해서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할 것 같은데 더 전문적인 부분이라서 오늘은 접어 두겠습니다. 다만 그런 그림만 그려 놓으시면 되어요. 그 사람의 대표적 저작, ‘하나님의 도성’이란 책에서도 그 기초가, 교회에 대한 이해가 제시되었을텐데 그것은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일치시키는 쪽으로 생각을 했다고 하는 겁니다.

이러한 자리매김은 종말과 하나님의 나라가 개시되기 전 메시야의 천년 왕국이 시작한다는 유대적-기독교적 기대와의 연결고리 가운데서 이루어졌다. 요러한 문제들은 교리사적으로 매우 복잡한데 그 핵심에 천년왕국설이 자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여러 차이가 있는 거구요. 교회에 대한 차이가 많이 나올 수 있습니다. 좀 더 가겠습니다. 복잡한 문제인데요. 자세하게 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어거스틴은 메시야 왕국을 교회의 시대와 동일시함으로써 이러한 전(前)천년설*적 표상의 모든 종말적 드라마를 제거했다. 극적인 변혁으로 오게 되는 종말론적 어떤 사건들의 기운들이 여기서 조금 빠져 버렸다고 하는 거죠. 제 말이 더 어렵게 되었나요. 전천년설이 무언가에 대한 저의 설명이 있으니 일단 그것을 읽고 돌아오겠습니다.

예수의 재림이 이루어지기 전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왕국이 천년 동안 이루어진다는 교리가 곧 천년기설, 혹은 전 천년설(Chiliasmus)인데, 이는 요한계시록 20장에 근거를 두고 있다. 전 천년설은 그리스도의 통치가 실제로 역사 가운데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예수의 재림 이후에 역사의 피안에서 이루어질 그리스도의 통치와는 구별되는 종말적 사건이다. 판넨베르크가 본문에서 설명하고 있듯이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의 왕국을 교회와 일치시킴으로써 이 천년기설적 표상을 부정했다. 참고적으로, 예수의 재림 이후에 천년왕국이 실행된다는 주장을 후 천년설이라고 한다면, 어거스틴처럼 천년기설 자체를 부정하는 주장을 무 천년설이라고 일컫는다.

천년설 이것이 어거스틴에게는 사라진 거죠. 역동적 변화, 이런 것들은 실종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런지는 대충 아시겠죠. 앞서 이야기한대로 어거스틴 시대에는 로마의 평화, 왕국이 거의 완벽했다고 할까요. 철저했기 때문에 거기서는 변혁 이런 거는 찾아 보기 힘들었습니다. 천년설이 들어갈 여지가 별로 없는 거죠. 사회가 불안하고 뭔가가 변화의 여지들이 아주 크다면 이러한 천년설이 들어올 수 있는데 그 시대는 그렇지 않았어요. 요한계시록 시대에는 그러한 표상들이 많았던 거죠. 천년기설은 사실은 그거를 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 이렇게 나누고 있는데 그건 교단에 따라서 바라보는 입장이 다르기도 합니다. 그건 이렇게 생각하시면 좋겠어요. 그건 누가 확실하게 끊어서 어떤 것이 옳다고 말하기 힘듭니다. 여기서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종말, 완전한 새로운 시작, 모든 것이 완전히 끝나기 전에 그리스도의 왕국이 천년동안 이루어지느냐 후냐? 이러한 차이거든요. 이것의 핵심은 그리시도의 왕국이 역사안에서 이루어진다고 하는 그러한 이야기죠. 그리스도 나라의 역사성에 대한 강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만요.

이러한 동일화에는 물론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나라는 분리될 수 없으며, 양자는 교회가 좇아야할 미래를 특징짓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이 이야기하는 그리스도의 나라와 교회와의 일치, 여기에는 문제가 있다고 하는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주이신 그리스도의 미래는 교회의 현재를 이미 규정하고 있다. 교회의 선포에서 그리스도의 통치는 사실상 현재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통치는 인간을 하나님의 통치로 불러내고 하나님의 통치가 도래한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지상적 활동 이외의 다른 목표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선포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을 계속 유지한다. 이에 따라서 그리스도가 교회에서 현재적으로 통치한다는 사실이 보장된다. 그렇지만 역사적으로 구체적인 삶에서 행해지는 기독교인들의 친교는 그리스도의 왕국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나라는 교회보다 우월하다. 그 다음 패러그래프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세계의 미래인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의 미래도 되기 때문에 교회는 도래하는 하나님의 통치를 기대함으로써 인간 사회, 그리고 全 인간 세계와 서로 연관되어 있다. 하나님 나라의 미래와 연관해서 생각해볼 때 세계가 중요하다는 사실은 교회의 자명성을 확고히 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따라서 성자의 반열에 참여한다고 해서 세계로부터 도피하여 공동체적 세계와 단절되어있는 종교 영역으로 숨어들면 안 된다. 네. 요 패러그래프에서 앞에 나온 이야기가 반복되고 있어요. 비슷한 내용이었어요. 하나님의 나라가 세계 미래인 것과 같이 교회의 미래도 된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의 미래다. 세계의 미래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미래니까요. 하나님의 미래는 오고 있는 중이니까요. 도래하는 하나님의 통치를 기대함으로서 전체 세계와 연관되어 있다고 하는 거죠. 그러니까 이게 하나님의 나라를 중심으로, 혹은 근거로 해서 이 세계와 교회가 같은 운명, 같은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고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교회가 세계와 완전히 분리되어서 상관없이 자기만의 어떤 영적인 보금자리를 만들어가는 공동체는 아닙니다. 방주로서의 역할을 하는 거죠. 교회안으로 끌어모아서 사람들을 구원시키는 그러한 공동체는 아니죠. 왜냐하면 교회는 여전히 도래하는 하나님의 미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거를 우리가 분명하게 알게되면, 또 당연히 알아야 되는 것인데 그럴때 우리는 세계와 단단하게 결속력을 가질 수 있는 거죠. 그 속에 파묻힌다가 아니라 동시에 더불어서 함께 하나님의 미래를 기다림으로서 또 그사실을 세상에 각성시킴으로서 우리는 세상과 연대되어 있는거죠. 이러한 것들이 다 하나님의 나라의 지평이라고 하는 겁니다.

네. 요렇게 한번 정리를 하고 넘어가야 되겠어요.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것을 앞에서 제가 짚었는지 모르겠습다만 기독교인들이 자꾸만 교회와 연관시켜서 생각하거든요. 교회와 상관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교회를 넘어서는 힘이거든요. 넘어서는 현실이거든요. 그러니까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지평을 지향해야 된다고 하는 말을 늘 교회 중심적인 사고로부터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작은 거죠. 하나님 나라는 큰 거죠. 상위죠. 세계를 포함한 모든 것의 미래이시거든요. 네. 교회는 결코 세계로부터 도피하는 종교영역으로 숨어들면 안된다. 그렇게 정리되었습니다. 194쪽으로 넘어갑니다.

일련의 지상 세계를 해체하고 끝장낼 하나님의 미래적 통치에 대한 고대 이스라엘의 기대는 정의와 인간다움이 지배해야할 미래적 평화왕국에 대한 희망 가운데서 형성되었다. 지금 제가 읽기 시작한 이 패러그래프가 좀 깁니다. 요거하고 그 다음 패러그래프도 좀 긴데요. 우리가 오늘 요 패러그래프만 볼 수 있겠군요. 하나님의 미래를 기다리는 기독교 공동체가 하나님의 미래가 곧 세계 미래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 세계로부터 도피하면 안되고 연결되어야 된다고 하는 말을 앞에서 했잖아요. 그것이 어떻게 유대의 신앙과 연결되어 있는가 하는 것을 이제 설명하는 거예요. 가보겠습니다.

따라서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는 다니엘서(단 7:13)에서 보면 고대 근동에서처럼 지상 세계의 본질을 성격화하는 짐승형상 대신에 인간형상을 통해서 상징화되었다. 교회는 이제 마지막 때의 공동체로서 사람들의 모임이다. 여기서 말하는 이 사람들은 이미 지금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미래를 기대함으로써 하나 된 이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도 하나님-나라의-희망이라는 지평에 속한다. 왜냐하면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미래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 아마 독일어로 운베딩테 이렇게 되어 있을텐데요. 운베딩테 Unconditional한 무조건적인 신뢰야말로 최종적인 구원에 들어갈 첫, 유일한, 그리고 포괄적인 조건이라고 선포했다는 사실을 통해서 교회의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이 통치할 미래를 무조건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된 인간들의 친교라 할 교회는/ 하나님과 그 나라의 미래에 대한 희망에 의해 이미 각인되었다는 점에서 이스라엘-유대 공동체의 역사를 계승한다. 네 여기도 참 중요한 진술이군요. 역시 신학적인 대가들의 글이라고 하는 것은 깊이가 있고 좀 화려해요. 단순하지 않죠. 상투적인 그러한 말을 하지 않죠. 그리고 글 전체 흐름을 유연하게 끌고 가고 있어요. 이 문장, 제 책에는 밑줄을 그어놓고 몇 번 본 것 같은데요. 이게 이스라엘, 유대교와 기독교의 공동토대, 그러면서 기독교의 다른 점, 특성들 이런 것들을 두루 두루 표현해 주고 있잖아요.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이 통치할 미래를 무조건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된 인간들의 친교라 할 교회 이게 주부예요. 교회란 무엇인가 할때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는 거죠. 예수님을 통해서 이제는 하나님의 미래를 아주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용기를 얻게된 사람들의 친교, 멋지죠. 참 멋진 표현이예요. 하나님의 미래. 그 통치의 미래를 무조건적으로, 절대적으로 통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된 사람들의 친교가 바로 교회인거죠. 그 교회는 그 미래에 대한 희망에 의해서 딱 각인되었다고 하는 것, 거기에 완전히 그런 희망에 의해서 특징화 되었다. 그렇게 구성되었다. 그렇게 방향이 잡혔다는 점에서 이스라엘 유대 공동체 역사를 계승합니다. 그들, 유대이스라엘 공동체도 역시 앞서 다니엘서 7:13절에서 이야기했듯이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를 기대하고 있거든요. 그러한 역사를 기독교가 계승합니다. 그런 점에서 유대교와 기독교는 공동운명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요.

오직 예수를 통한 이러한 희망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일하고 완전하게 만족시킬 수 있는 토대가 된다. 이로써 이스라엘 민족공동체의 한계가 돌파되었다. 그렇죠. 여기서 역사를 우리가 계승합니다. 그들의 유산을 우리가 계승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의 미래를 우리가 획득할 수 있기 때문에 이제 이스라엘 공동체와 같은 유산을 가졌으나 다른 부분이 나오는 거죠. 그러니까 이스라엘 유대 공동체와 우리 기독교의 공동의 토대와 다른 점이 여기서 분명하게 설명된 겁니다.

더 이상 특별한 이스라엘의 전통이 아니라 예수가 선포했던 것처럼, 그리고 예수에 의해서 사랑의 영으로 현재하는 것처럼 도래하는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희망만이 교회에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따라서 교회는 모든 나라에서 모여든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다. 이 교회는 기독교 역사에서 자주, 그리고 운명적인 귀결로서 이스라엘의 선택과 대립적인 것으로 이해되었다. 마치 이스라엘이 끝장나버리기나 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히 말하기를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았다고 했다(롬 11:1). 기독교회는 이스라엘과 대립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 교회는 오히려 감람나무인 이스라엘에게 접붙임을 당했다(롬 11:17 이하).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선민 역사는 전체 인류에게 확장되었다. 여기까지예요. 오늘 우리가 여기까지만 보면 되겠습니다. 뒷부분, 어려운 이야기가 나오나요?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설명한 겁니다. 공동의 토대가 있는 것은 분명한 거예요. 어떤 점에서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린다고 하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러한 기대는 이스라엘 유대공동체로부터 기독교가 계승한 거예요. 아마 예수님이 선포한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도 예수님이 유대인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러한 역사를 계승하지만 이제 예수를 통한 임박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만이 하나님과의 완벽하게 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우리는 이스라엘의 신앙안에 머물 필요가 없게 되었다하는 거죠. 돌파하는 거죠. 넘어서는 거죠.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하고 완전히 다르다, 대립적이다 이렇게 말할수는 없어요. 유대인들에게만 한정된 그러한 하나님의 기대가 이제는 모든 인류에 대한 기대로 확장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네 오늘 우리는 교회의 본질, 특히 성도의 교제라고 하는 대목이 단지 교회안에서만의 경건한 모임의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차원이라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이런 것은 한번 듣고 말면 또 흐지부지 될 가능성이 있어요. 뭐 그래도 괜찮습니다. 또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들을 수 있을테니까요. 이러한 공부들이 조금씩 쌓이면 우리의 신학적 영성이 더 풍요로워 질겁니다. 그렇게 되어야 판넨베르크의 이러한 책들을 쉽게 읽을 수 있는 거죠. 저도 이렇게 강의를 하느라고 다시 읽고 말하면서 많이 공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공부라고 하는 것이 한번 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네요. 그거는 여러번 확인한 바입니다만 그렇습니다. 제가 번역하고 여러번 읽고 한 책인데도 이번에 다시 보면서 새롭게 공부를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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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 <번역> 해방의 해 2011-01-31 3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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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 신학입문 1장 신학이란 무엇인가? 2010-09-20 6340
172 사도신경해설 56강(종강) 녹취록 - 제14장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3) file [3] 2010-02-28 5750
171 사도신경해설 55강 녹취록 - 제14장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2) file 2010-02-01 4511
170 사도신경해설 54강 녹취록 - 제14장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1) file [3] 2009-12-19 5965
169 사도신경해설 53강 녹취록 - 제13장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3) file 2009-12-14 4970
168 사도신경해설 52강 녹취록 - 13.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2) file 2009-11-28 4391
167 사도신경해설 51강 녹취록 - 제13장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1) file 2009-11-15 4911
166 사도신경해설 50강 녹취록- 제12장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인 교회와(4) file 2009-10-19 4840
» 사도신경해설 49강 녹취록- 제12장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인 교회와(3) file 2009-10-19 4255
164 사도신경해설 48강 녹취록- 제12장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인 교회와(2) file 2009-10-03 4642
163 사도신경해설 47강 녹취록- 제12장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인 교회와(1) file 2009-09-30 4178
162 사도신경해설 46강 녹취록 - 제11장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5) file 2009-09-11 4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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