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강- 제12장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인 (기독교적인) 교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4)

안녕하세요? 오늘 50강입니다. 판넨베르크의 책 195쪽부터 시작하면 되겠죠. 지금 우리는 판넨베르크의 책 12장에 나오는 교회에 관한 이야기를 같이 따라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이 그것이 몇번째일까요? 12장의 제목을 잠시 보겠습니다.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인 (기독교적인) 교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47강에서 부터 시작했거든요. 오늘 네번째군요. 12장을 네번이 강의로 우리가 소화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마지막 시간입니다.

교회에 대한 논의에서 핵심은 교회의 단일성, 거룩성, 보편성 그리고 사도성이 무슨 뜻이냐 하는 것을 따라가는 것이었어요. 이 네가지 요소중에 이 사도성은 사도신경에 나오지 않고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에 나오는 것이죠. 그러니까 단일성, 거룩성, 보편성을 더 충분하게 해석하는 그 과정에서 이 사도성이 포함된 거예요. 이게 다 중요한 요소들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앞에서 주욱 더듬어 왔고 지난 시간에는 그 교회의 본질들이 그냥 그 자체로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지평으로 확대되어야 된다고 하는 사실을 짚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요. 하나님의 통치죠. 그것은 곧 역사의 미래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4가지 요소들, 거룩성, 단일성, 보편성, 사도성 이러한 것들이 결국 인간과 세계 구원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미래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느냐 하는 그러한 문제들을 따라가는 거죠. 그것에 대한 설명이 어느 정도 되었으리라 보구요. 지난번에 그것을 봤구요. 오늘은 그것을 조금 더 보충을 하면서 이 네 가지 교회의 본질에 대한 요소를 정리하게 됩니다. 네 195쪽 위에서 셋째 줄 읽겠습니다.

예수와의 일치 가운데서 하나님의 미래를 기다리며 그 미래를 현재적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친교로서 교회는 새로운 인류의 시작이다. 이 인류는 하나님의 미래와 그의 사랑을 의지한 채 인간의 운명을 이미 여기서 받아들이며 모든 인간을 위해서 그 길을 제시한다. 따라서 교회는 도래하는 하나님의 나라와 연결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가 아니라 全인류의 미래인 것처럼 교회의 미래다. 그러나 교회는 지금 이미 예수의 뜻에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이들, 그리고 이러한 기다림 가운데서 살아가는 이들의 친교다. 그리스도와의 친교로서 교회의 본질적 운명은 역시 하나님-나라의-희망이라는 지평에 그 거처를 둔다. 여기까지는 앞에 있는 이야기, 특별히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요약한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교회가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와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 거죠. 이러한 이야기들을 그냥 낱말 뜻으로만 이해한다면 그렇게 어려운 거는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이야기이기도 하죠.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이야기 많이 하잖아요. 천당이라고도 이야기하구요. 그런데 여기 신학적인 차원에서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흔히 사용하고 있는 그러한 하나님 나라, 천국 천당 이런 것하고는 다른 차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국, 천당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이러한 개념들은 주로 초월적이고 내세적이고 그러한 성격들이 강하죠. 하나님의 나라의 그러한 요소들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훨씬 더 포괄적이거든요. 통시적이라고 할까요? 그렇습니다. 다시한번 그것을 정리를 해야 되겠군요.

아주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천국, 천당 하나님 나라 이런 것들은 세계와 대립적인 차원에서 예수믿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어떤 비밀스런 장소처럼 받아들여지죠.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그런 건 아닌 겁니다. 앞에서도 몇번 강조되었듯이 하나님 나라는 세계 미래죠. 따라서 교회 미래이기도 하죠. 교회가 그걸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더불어서 미래로 받아들일 수 있을 뿐입니다. 네 그다음 패러그래프 보겠습니다. 지금 설명한 부분들이 그 뒤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경건이 왜곡된 구원 이기주의의 목표가 될 때 그리스도와의 친교는 훼손된다. 만약 그리스도와 관계된 교회의 친교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의 친교에서 하나님 나라의 지평이 망각된다면 세계 도피적 신비연맹에 밀착된, 즉 종교적 욕구나 성직주의적인 구원조직을 공동으로 실행해 나가기 위한 연합에 밀착된 종교성이 발전할 뿐이다. 번역이 너무 거칠죠. 신학적인 독일어를 좀 풀어서 번역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번역이 좀 어려운 문제예요. 이게 의역과 직역 보통 두 가지가 있다고 하잖아요. 의역을 해야 독자들이 알아 들을 수 있죠. 이게 기본이긴 한데 의역이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닙니다. 왜 그러냐 하면 언어라고 하는 것, 그리고 그 문장구조라고 하는 것은 특이하기 때문에, 어떤 뉘앙스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다 해체해서 그냥 뜻만 전달되는 방식으로 번역을 해 버린다면 그 뉘앙스를 놓치게 되는 거죠. 그걸 담아내기 힘듭니다. 특히 신학적인 책일수록 의역으로만 흐르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어쨌든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님 나라와 관계가 없을 때 교회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미래종교, 소종파적인 자기들 끼리만의 종교적 친교로 떨어지고 만다고 하는 거죠. 이것은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는 교회로서는 용납될 수 없는 태도입니다. 그런데 안타깝지만 한국교회는 이런 경향들이 많이 나타나죠. 일종의 방주 역할을 한다고 하는거죠. 다 들어오라고 하는 거죠. 세계 도피적이죠. 세계의 정치경제 평화 이런 것들이 어떻게 되든지 간에 이안에 들어오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식으로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거는 하나님나라와의 지평이 상실된거죠. 그 다음을 보겠습니다.

교회가 자신의 내적 문제에만 관심을 갖는 좁은 틀을 뛰어넘어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의 미래와 관계될 경우에 자신의 세계적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으며, 또한 전 인류를 위한 교회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다. 더구나 이 경우에 중요한 것은 인간이 더불어 살아야할 정치적이며 사회적인 형태에 대한 질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희망은 구약성서가 쓰여진 이래로 평화와 정의를 지향하는 문제였으며, 이로써 인간적으로 인간과 더불어 진실하게 살아가는 삶을 지향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는 역사적으로 작용하는 영역의 주변부에 머뭇거리면서 정의, 그리고 사회의 정치-사회적 질서에 대해서 무관심하면 안 된다. 오히려 교회는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가 최종적으로 성취될 인간의 미래적 운명을 위해서 현재 사회의 법질서에서 무언가 바람직한 형태를 획득할 수 있도록 진력해야만 한다.

중요한 이야기죠. 교회가 이 세계의 평화와 정의, 그리고 인간다운 삶의 형식들을 추구하는 모든 노력들을 외면해 버린다면 그거는 하나님 나라 지평을 외면하는 결과가 되는 거죠. 교회는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가 완전하게 종말에 성취될 인간의 운명에 대해서 오늘 여기에서 그 빛의 조명에 따라서 바람직한 사회제도, 경제질서가 무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모색해야 되는거죠. 이런 일들이 한국에 얼마나 부족한가 하는 거는 제가 긴말할 필요가 없죠. 교회 이기주의는 팽배합니다. 교회에 조금만 손해가 되면 그거는 목숨을 걸고 싸우려고 하죠. 서울 시청앞에서 전투하듯이 기도회를 하고 하잖습니까? 교회에 조금이라도 손해되는 일들, 예를 들자면 사학법 이러한 문제들 말이죠. 그런 것이 있을때 체면 불구 하고 투쟁합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남북 화해 평화, 노동의 문제 이러한 그리고 빈부의 양극화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거죠. 이런 것은 정말 우리 교회의 본질을 추락시키는 지름길입니다. 그래도 교회가 되죠. 왜냐하면 종교적으로도 인간이 이기적인 생각을 하기 때문에 우리 교회만 잘되면 된다는 그러한 생각을 이렇게 좀 자극시켜 주기만 하면 신자들은 얼마든지 거기서 만족하는 거죠. 그 다음이요.

물론 하나님의 통치가 도래한다는 전망에서 볼 때 교회는 사회적 삶과 개인적인 삶의 그 어떤 현재적 생명형식도 최종적으로 확정할 수는 없다. 그것보다는 이미 확정된 개개의 형태와 사물 가운데서 잠정적이고, 열려진 하나의 단계만을 추구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이 단계는 사실상 퇴보나 몰락의 위험성으로부터 위협받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다시 물어야 할 요점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희망의 지평에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할 교회의 거룩성에 대한 기준이다.

네 이 패러그래프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앞에서 현대 사회질서에서 바람직한 형태를 추구해야 한다는 교회의 하나님 나라 지평이 이땅에 영속적으로 가능한 어떤 질서들을 확보할 수 있다고 하는 뜻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 문장이 조금 길었죠.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경제, 정의, 평화, 인간다운 삶의 질서, 이런 것들을 하나님 나라 지평에서 고민하고 추구해야 되는데 이런 것들은 결국 그 다음 단계, 조금 나은 단계, 이런 것들을 우리가 찾아가고 있을 뿐이지 영원불변한 완전한 질서를 확보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죠. 이러한 차원에서 우리들은 교회의 거룩성이 뭐냐, 교회가 세계와의 관계에서 어떤 기준으로 그 거룩성을 유지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 꾸준히 질문해야 되는 거죠. 결국은 사회문제에 대한 교회의 입장도 신학적으로 물을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교회의 본질이 뭐냐에 대한 고민이죠. 거기서 부터 출발하는 거죠. 사회를 어떻게 휴머니즘, 인간다운 삶의 제도를 만들 것이냐 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 교회가 뭐냐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구요. 그 출발점으로 이제 이 세계의 정의와 평화, 이런 문제들에 대한 새로운 단계들을 말할 수 있는 거죠. 네 그렇게만 하고 본격적으로 네가지 요소에 대한 마지막 정리로 넘어가겠습니다. 앞에서 부터 계속 이야기한 줄거리를 정리하는 대목입니다. 이 12장이 말하는 교회,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인 교회, 사도적인 교회. 이런 것들이 상당히 중요한 요소인데요. 어느 정도 여러분들에게 전달되었다고 보구요. 그러니까 또 그러한 그것이 어떤 의미이고 어떻게 적용되어야 되느냐 하는 것은 계속 논의되어야 하는 문제입니다. 어쨌든 이 12장 강의에서 교회의 네가지 요소가 단순히 교리적인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지평으로 확대되고 그것은 곧 교회자체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와 세계 미래와 연관된 문제라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느꼈다면 그러면 강의의 소기의 목표를 달성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과거에 아주 명료하게 인식되었던 교회의 거룩성을 통해서 우리는 이제 하나님과 세상 사건 사이에 어떤 특징적인 관련이 있는지 알 수 있다. 거룩하다는 뜻은 '도덕적으로 하자가 없다.'기 보다는 오히려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과 구별된다는 점에서, 그리고 세상에 대해 자신의 자유를 초월적으로 고양시켰다는 점에서 거룩하다. 하나님의 사랑은 거룩한 사랑이다. 왜냐하면 그 사랑은 하나님의 자유에서 나오며, 그 사랑이 지향하고 있는 인간을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어 거룩한 하나님과 친교를 나누게 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거룩하다. 왜냐하면 교회는 현존의 세계와 구별되며, 하나님과 그의 나라의 미래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든 기독교적인 삶의 형식을 포함해서 모든 현존하는 것들이 잠정적이라는 인식은 하나님의 미래를 향한 선회, 돌아섬, 회심의 이면이다. 참 중요한 문장이군요. 다시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모든 기독교적인 삶의 형식을 포함해서 모든 현존하는 것들이 잠정적이라는 인식은 하나님의 미래를 향한 선회, 돌아섬, 회심의 이면이다. 네 그렇죠. 하나님만이 잠정성을 넘어서는 분이시니까요. 그 분을 통해서만 우리의 미래가 보장되니까요. 잠정성에 대한 인식이 하나님의 미래를 향해서 돌아서는 그러한 사건이다. 또는 믿음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 교회의 거룩성은 성서적 하나님의 거룩성이라는 특별한 관점에서 볼 때 세계로부터 구별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아 여기에 차이가 있군요. 하나님의 거룩성은 구별인데 교회의 거룩성은 그게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성서의 하나님은 그의 사랑 안에서, 그리고 세계 안으로, 세계를 위해서 오신다는 점에서 거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의 거룩성은 세상과 구별된다고 하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기독교적 사랑에서 완성된다. 하나님의 사랑, 기독교적 사랑, 네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거룩성은 모든 유한한 현실성이 잠정적이라는 인식과 연결되어 있으며, 창조적 갱신의 능력을 갖고 있다. 모든 유한한 것의 잠정성은 틀림없이 교회로 하여금 무엇보다도 고유한 행태에 관하여, 그 질서에 관하여, 그리고 그 삶에 관하여 의식하게 한다. 교회의 거룩성은 거듭해서 갱신되는 개혁을 필연적으로 요구한다. 이 개혁은 기독교 역사의 초기형태로 되돌아감으로써 그동안의 역사를 단절하자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사신, 곧 복음선포와 역사에 의해 이미 열려진 하나님이 통치할 미래를 향해서 갱신해나가는 것을 말한다. 거룩성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성과 교회 거룩상의 차이를 짚었구요. 교회는 스스로 거룩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거룩한 거죠. 세계 초월적으로 세계를 통치하고 하나님 자신의 자유를 고양시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창조자라고 하는 거죠. 그런 점에서 그는 세계와 분리로서 거룩한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여전히 이 세계의 분질인 잠정성을 가지고 있는거죠. 잠정적이죠. 한계도 많죠. 실수도 많죠. 자기를 초월적으로 할 수 있는 능력은 없죠.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는 것이죠. 그래도 우리가 교회를 거룩하다고 하는 것은 자기 스스로의 능력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기독교적 사랑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 겁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얼마나 연결되어 있느냐에 따라서 교회를 거룩하다 또는 거룩하지 않다 판단할 수 있는거죠. 이렇게 하나님의 거룩성, 하나님의 사랑, 여기에 의존하고 있는 교회라고 한다면 자기를 절대화 할 수 없는 거죠. 계속 부단하게 하나님의 거룩성을 드러내고 그리스도의 친교를 현실화 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 방향으로 자기를 갱신해 나갑니다. 그런 차원에서 교회는 거룩합니다. 그 다음이요.

교회사를 회고해 보면 교회의 거룩성이라는 징표가 불분명하고 왜곡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역사는 한편으로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자주 삭막한 방식으로 분리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가 세상 가운데서 흡사 영속적이기나 한 것처럼 교리와 체제로 자리를 잡음으로써 세상으로 하여금 그 잠정성을 기억하게 하는 일에 무책임했다는 점에서 매우 분명한 특징을 보여주었다. 무엇보다도 교회는 피의 폭력에 이르기까지 인간적인 통치 형식과 방법을 이용했다. 그리고 교회는 세계 도피적 경건성을 유지함으로써 비인간적 사태를 알게 모르게 고착시키는 일에 항상 거듭해서 타협적이었다. 교회의 거룩성은 하나님이 통치할 미래 앞에서 모든 지상적인 것의 잠정성과 연약성을 깨닫고 그 깨달음이 바로 사랑의 창조적 동인과 연결되는 곳에서 드러난다. 네. 여기 패러그래프의 내용들도 크게 어려운 건 없는데 조금 딱딱하게 번역되어 있어서 부분적으로 전달하는데 어려운 대목이 있는 것 같습니다. 교회역사에서 교회가 거룩성을, 거룩성이라고 하는 징표를 오히려 망가뜨린 적이 많이 있다. 그게 교회사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걸 두가지로 설명을 하네요. 교회와 세계를 이원론적으로 딱 분리해 버리는 것하고 또 하나는 세계 가운데서 교회가 영원하다 이렇게 이러한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접근해서 이 세계 모든 것이 잠정적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게 했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 행세를 한거죠. 그런데다가 여기 판넨베르크가 지적한 것처럼 피의 폭력적인 방식으로, 정말 폭력적인 방식으로 기독교 체제를 유지하면 이 세상의 악한 권세와 타협하는 일들이 많았죠. 이러한 것들을 보면 정말 교회가 거룩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겁니다. 이러한 자세에서 벗어나야 되겠죠. 하나님의 통치의 미래앞에서 모든 잠정성과 연약성들을 깨닫고 하나님의 창조적 사랑과 연결되어야만 교회가 거룩하다는 사실이 하나의 징표로 드러날 수 있는 겁니다. 지금 여기서 거룩성의 문제가 잠정성과 연관되어서 설명되고 있어요.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으로서 거룩하신 분이고 우리는 혹은 우리교회는 잠정적인 기구로서 하나님의 영원하고 거룩한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빛의 비추임을 당하거나 거기에 의존함으로서 거룩하다는 겁니다. 그 다음이요.

현세계의 잠정성은 인간의 공생을 위한 국가적이고 사회적인 질서와 더불어 고유한 기구로서 교회의 현존을 보장하는 유일한 근거가 된다. 하나님의 통치가 성취된 새로운 예루살렘은 어떤 특별한 종교적 기구나 성전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계 21:22). 왜냐하면 그곳에서는 하나님이 직접 함께 하심으로써 모든 생명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렇죠. 이 세상 끝나고 종말의 심판을 통해서 새로운 새 예루살렘,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될 때는 그 어떤 종교적 기구가 필요하지 않죠.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시니까요. 지금은 직접이 아니라 간접이죠. 지금은 아직은 교회가 필요해요. 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은 세상이 잠정적이라는 것을 전제하는 겁니다.

그런데 현세계에서는 인간의 삶이 신적인 결정에서 여전히 소외되어있기 때문에 인간의 운명이 하나님과 친교를 나누기 위해서 그 친교가 받아들여지는 어떤 특별한 기구를 여전히 필요로 한다. 아직은 직접적인 하나님의 통치가 아니기 때문에 어떤 기구가 필요한데 그게 바로 교회라고 하는 뜻이겠죠.

어떤 특별한 종교적 기구가 여전히 필요한 이유는 일반적인 세상의 삶에서 인간의 운명이 여전히 현실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칼 맑스의 종교비판에 대한 교회의 답변이다. 교회는 인간들로 하여금 현존재자들의 잠정성을 극복하는 인간적 운명을 기억하게 하며, 또한 고유한 진리가 소외된 현재로부터 최종적인 구원에 참여하도록 중재한다. 이럴 경우에 교회는 세상으로 하여금 그 잠정성을 진지하게 기억하게 할 수 있으며, 동시에 인간들로 하여금 예수와의 친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미래를 향해 통로를 열어두도록 할 수 있다. 교회가 그 고유한 잠정성을 기억하고 있다면 말이다.

네 칼막스의 종교비판, 종교가 민중의 아편이라고 이야기했잖습니까? 역사에 대한 이해를 하지 못하게 하구요. 교회가 절대적인 이데올로기로 작용한다고 하는 비판입니다. 그걸 우리가 아니라고 딱 말할 수 없어요. 그런 요소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여기에 존속해야될 이유에 대한 답변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겁니다. 교회는 이 세계의 모든 것들이 어떻게 하면 그 잠정성을 극복할 수 있는가 하는 그 방향을 제시해준다고 하는 점에서 그 답이 있는 거죠. 이러한 답변이 조금 기독교 자기 중심적으로 들리나요? 나이브하게 들리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는 인간들로 하여금 현존재자들의 잠정성을 극복하는 인간적 운명을 기억하게 한다. 이러한 일들을 우리가 하려면 교회가 이 세계의 고유한 잠정성, 자기의 잠정성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어야 하는거죠. 자기가 교회만 영속적이다 이런 주장을 하고 있으면 그건 세계 잠정성을 말할 자격이 없는 겁니다. 정확한 사태를 못보고 있는 겁니다. 요러한 설명은 한국 교회가 귀담아 들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귀담아 듣기는 좀 불편한 이야기죠. 교회는 뭔가 이 세상하고는 다르게 잠정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너무 확고하니까요. 교회가 잠정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의미하다고 하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합니다. 이거는 종교 비판가들의 말을 다 받아 들이는 것은 아니예요. 교회의 고유한 몫이 있는 거예요. 자리가 있는 거예요. 그건 제가 다시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현 존재들의 잠재성을 기억하게 하고 최종적인 구원에 참여할 수 있는 그러한 길을 알린다고 하는 차원에서 교회의 존재 목적, 존재 근거가 가능한거죠. 이게 참 긴장관계가 있어요. 자기의 한계, 잠정성을 인정하면서 인류전체의 운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 되니까요. 참 겸손한 자세에서 이야기를 해야지 잘 난척하고 자기가 구원을 누구에게 베풀어 줄 것인양 이야기하면 이거는 참으로 교회의 거룩성이라고 하는 신학적 토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는 어리석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이요. 지금까지는 거룩성에 대한 이야기를 했구요. 그 뒤에 사도성, 보편성, 단일성 그 이야기가 나오게 됩니다. 마지막 패러그래프군요. 천천히 보겠습니다.

교회의 사도적 사명, 이런 단어를 듣더라도 여러분들이 이게 어떤 뜻인지 여러분들이 어떤 느낌이 오셔야 될텐데요. 사도적 사명 그러니까 땅끝까지 증인이 되라. 선교사 파송해야 되겠다. 모이면 기도하고 흩어지면 전도하자 이런쪽으로만 생각이 난다면 그러면 그게 잘못되었다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너무 단순한 겁니다. 단순한게 나쁜 것이 아니죠. 믿음은 어린아이와 같은 거니까요. 그러나 그런 단순한 것을 절대화해버리게 되면 거기서 독선이 생기게 되거든요. 이건 참, 속되게 말해서 미안합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여기에 해당되는 거죠. 교회의 사도적 사명, 이거는 하나님 나라 지평하고 연관되는 겁니다. 그 앞에 사도적인 것을 이야기했는데 다시 한번 돌아가서 봐 볼까요? 그럴 필요는 없겠죠. 하나님 나라 지평이라고 했는데 인류 전체 구원을 이야기하는 거구요. 보편적 구원의 현실들을 담아 내야 되는 거죠. 유니버셜, 우주적인 하나님의 구원, 혹은 생명사건의 차원에서 교회의 사도적 사명을 생각해야 되는 겁니다. 교회의 확장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선포를 말해야 되는 거죠. 네가 보겠습니다.

교회의 사도적 사명 그리고 단일성과 보편성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미 열려져있는 하나님 통치의 구원론적 미래에서 실질적인 기초를 획득한다. 지속적이며 사도적인 교회의 사명을 기초하고 있는 사도의 선교적 과제는 전인류의 구원론적 미래가 예수의 역사에서, 그리고 특별히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에서 이미 발생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사명은 모든 인간을 지향한다. 모든 인류를 지향한다. 모든 사람을 지향한다. 그러니까 부활은 어떤 특정한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개입에 의해서 일어난 종말론적 생명 사건이니까요. 우리가 그것을 선포하는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보편성은 교회의 고유한 형태를 위한 준거이기도 하다. 보편성은 교회의 보편성이예요. 교회가 일부의 사람만이 아니라 보편적이다. 모든 세계다. 모든 전체를 향한다 이런 것들이 교회를 교회되게 핵심 근거라는 거죠. 이 경우에 교회는 참된 가톨릭적인 형태로서 이미 성취된 게 아니라 여전히 보편적 운명*을 완전히 실현하기 위한 도상에 있을 뿐이다. 참된 가톨릭적인 형태라는 말이 잘 전달이 되지 않을 수도 있는데요. 오해가 될 수 있겠는데요. 로마 가톨릭교회를 꼭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구요. 그러한 의미도 여기에 담겨 있는 것 같기도 한데 가톨릭적이라고 하는 것이 보편적이라고 하는 뜻이예요. 그러니까 교회가 보편적 형태로 성취된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 있다. 어떤 과정이요? 보편적 운명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에 있다. 보편적 운명이요. 보편적 운명이라고 하는 것을 제가 역주로 달았습니다.

여기서 보편적 운명(die universale Bestimmung)이라는 말은 교회가 최종적으로 이루어야 할 상태를 뜻한다. 교회는 여전히 도상의 존재이지 스스로 완전한 어떤 형태이거나 존재일 수 없기 때문에 보편적 결정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Bestimmung을 '운명'이라고 번역했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다. 그 이외에도 규정, 정의, 결정, 숙명, 예정된 목적, 지정이라는 뜻도 있다. 말하자면 그것이 되어야할 그 무엇을 가리킨다 하겠다.

 

역주에 달은 것을 제가 읽었어요. 그러니까 교회가 아직 보편적 어떤 실제에 가 있는 게 아니고 그 쪽을 향해서 도상에 있다고 하는 거죠. 계속 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형태는 이런 운명의 표현일 수 있으며, 따라서 스스로 이미 가톨릭적일 수도 있다. 교회는 이러한 형태를 제시함으로써 무엇보다도 기독교인의 일치에서 상호간 가톨릭적이어야 한다는 운명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기독교가 분리되어 있는 한 교회의 다원성 가운데 있는 교회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일치에 적합하도록, 그리고 하나 되게 하는 사랑의 영에 적합하도록 인류 공동의 운명을 실현할 수 없으며, 더 나아가 심각한 왜곡 현상만 보일 뿐이다.

네 교파 분리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로마가톨릭교회하고 개신교, 정교회, 우리 대한민국은 너무나도 많이 분리되어 있으니까 참 얼 그를 수 없을 정도인데요. 그러한 분리한 상태에서 보편성 이야기하는 것, 웃기는 이야기, 사도적 사명 이야기하는 것 웃기는 이야기, 세계 보편적 구원을 말하면서 자기 끼리는 서로 적대감 속에 빠져 있는데 어떻게 자기 모순에 빠져 있는 거죠. 웃기는 이야기라고 하는 거죠. 왜곡이죠. 그 다음에요.

교회는 하나의 보편적인 교회로서만 자신의 거룩성을, 또한 모든 사람의 한 하나님이며 主인 분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보증할 수 있다. 교회는 이 거룩성에 대한 숙고를 통해서만 완전한 일치로 돌아갈 수 있다. 하나님이 통치할 미래와 한 主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미래에 맞서있는, 그리고 교회의 자명성을 위한 모든 귀결들과 신적 사랑을 드러내주는 영과의 연대에 대립해있는 교회 질서와 교리의 잠정성**을 인식하고 있을 경우에만 기독교 공동체 사이의 차이들은 그 분리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 복잡한 이야기가 되네요. 교회의 질서와 교리형태의 잠정성, 그거를 역주로 제가 정리를 했어요. 교회 질서와 교리형태의 잠정성, 교회 자체도 잠정적이라는 건데요.

교회질서와 교리형태의 잠정성(die Vorl?ufigkeit kirchlicher Ordnung und Lehrgestaltung)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기독교가 분리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단초가 된다. 실제로 많은 경우에 기독교의 가시적 형태들이 영구불변의, 천상의 존재론적 가치를 갖는 것으로 주장되었다. 그런 주장들이 충돌하여 기독교가 분열되었으며, 지금도 그런 악순환이 계속된다. 세상만 잠정적인 게 아니라 교회마저도 그렇다는 점을 인정하고 교회의 일치성, 사도성, 거룩성, 보편성을 회복해나가는 일이 교회 갱신의 첫 걸음이다.

각각 로마가톨릭교회, 거기대로 우리는 우리대로 우리가 알고 있는 교리, 그리고 교회제도 이런 것들이 잠정적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을때만 완전히 분리되는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거죠. 그 다음에요.

이럴 경우에만 점차 확대되는 교회간의 상호 승인과 공동 작업의 과정이 자유로워지며, 획일화가 아닌 기독교인의 새로운 일치를 성취하기 위해 필요한 유일한 현실적 과정이 자유로워진다. 이러한 상호간의 승인이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신조를 파괴하지 않고도 가능하려면 다음과 같은 경우이어야 한다. 즉 이 승인, 승인은 서로 다른 가톨릭과 개신교가 승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이 기독교의 과거와 순교적 교회에 대해서 포괄적으로 진실할 경우에, 그리고 신앙적 인식과 생활태도의 다층적 형태들이 진리의 단일성으로부터 이해되고 정당화될 수 있는 경우에 말이다. 이러한 표현이 대충은 들어오죠. 쏙 들어오지는 않죠. 설명이 필요없을거라고 봅니다. 그래도 한 마디만 하면요. 지금 거룩성, 단일성, 보편성 사도성 이 모든 것들이 결국은 교회의 분리라고 하는 것에서 허물어질 수 있는 거거든요. 어떻게 상호간에 승인들이, 인정하는 거죠. 서로에게 참된 하나님의 교회로서 상대방을 승인하는 것들이 기본적인, 그리고 본질적인 기독교 진리의 훼손이 없으면서도 가능하려면 기독교가 지나온 어떤 길을 걸어왔느냐 하는 과거, 그리고 무슨 일로 순교를 했느냐 하는 그러한 것들, 이러한 것들이 이게 다 비슷한 이야기인데요. 이런 것들을 포괄적으로 진실하게 대해야만, 그걸 직시해야만 된다는 거죠. 그리고 우리의 신앙 생활하는 모든 형태들 이런 것들이 진리의 단일성에서 이해되고 변증되고 할 경우에만 가능하다고 하는 겁니다. 네 거의 마지막 문장에 다달았습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다층적 형태들은 하나의 희망과 하나의 신앙을 여전히 잠정적으로 다르게 인식하고 형태화하는 그것이다. 기독교인은 성자의 반열에, 그리고 한 하나님의 구원론적 진리에 공동으로 참여함으로써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사실의 차이를 뛰어넘어 이런 희망과 신앙에 묶여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

네 여기까지 입니다. 교회에 관한 사도신경의 한 항목을 우리가 판넨베르크의 책에 따라서 네번에 나누어서 공부했습니다. 거룩성, 단일성, 보편성, 사도성 이런 것들의 실질적 의미가 무엇인가? 그리고 성도의 교제가 왜 거기에 포함되어 있는가 하는 것을 다루었구요. 그것이 그 자체로서 만이 아니라 즉 교회 본질을 규정하는 근거인데 자체 안에 묶여 있는 것으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네 그것들이 오늘 우리가 공부한 내용에 따르면 교회의 일치, 실제적인 로마가톨릭교회, 개신교회, 동방정교회, 서로 분리된 교파들의 일치에 까지 신학적 정당성을 제공해 준다는 거죠.

네. 제 생각에 한국교회에서 시급하게 회복되어야 할 신앙적, 신학적 주제가 교회론이 아닌가 싶습니다. 여기에 대한 상당히 많은 오해가 있잖아요. 영속불변할 거로 교회를 안다거나 스스로 거룩한 존재,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여긴다거나 하나님나라의 지평과는 상관없이 자기들만의 비밀스러운 종교단체로 남는다거나 하는 많은 요소들이 있습니다. 이걸 어떻게 창조와 종말의 하나님이신 그분의 구원통치의 그 통치의 역사로 여는, 열린 그러한 교회 본질을 회복할 수 있을까 이게 오늘 우리 한국교회의 굉장히 시급한 문제죠. 작은 문제들은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교회 성장이데올로기라든지 교회 이기주의, 개교회 주의, 거기서 벌어지는 여러가지 교회 세습이라든지 등등등등. 교회가 일종의 친교집단이 된다든가 아니면 일종의 처세술, 아니면 도덕성 강좌, 모임 이런 정도로 떨어지는 일들이 많이 있잖아요.

하나님 나라 지평을 향해 열린 교회 공동체 이게 바로 제가 이 12장을 공부하면서 한국교회에 필요하다고 생각한 교회에 대한 정의입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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