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장: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안녕하세요. 오늘 사도신경 공부 제51강입니다. 이제 상당히 많이 우리가 공부를 해서요. 마칠때가 가까와 온 것 같습니다. 판넨베르크의 책을 본다면 200쪽까지 마쳤구요. 오늘 201쪽입니다. 전체가 223쪽까지 있죠. 이제 한 10%정도만 남아 있는 편이네요. 90%를 마쳤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부터 시작해서 주욱 지금까지 왔습니다. 오늘 부터 한 두번 정도에 걸쳐서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을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는 판넨베르크의 책으로 14장이 되는데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 그것도 두번 정도에 걸쳐서 하면 다 될 것 같습니다. 앞으로 한달, 4주정도만 하면 판넨베르크의 사도신경 해설을 다 마칠 것 같습니다.

오늘은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이러한 제목으로 시작되는, 그 제목을 담은 13장입니다. 이 죄의 문제는 한국교회에서 아킬레스 건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적당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어딘가 신앙생활에 역동적인 계기로 작동을 하면서도 또 그게 신앙을 왜곡시키는 그러한 계기로도 작용을 해요. 거의 한국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죄의 용서를 받고 구원 받는다 그런 쪽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그게 틀린 말은 아닌거예요. 오늘도 아마 그런 이야기들이 주로 나오게 될텐데요. 죄와 죽음의 관계입니다. 그게 따로 따로 놀면 곤란한 거예요. 물론 신자들이 그거를 따로 따로 생각한다는 것을 전제한 것은 아니예요. 죄가 용서 받아야 구원받는다는 것과 연결하고 있기는 있지만 그러나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별로 그들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죄가 부활 생명, 하나님의 구원과 직결되어 있다고 하는 그 관점보다도 자책감, 죄책감으로 작용될때가 더 많은 거죠. 어떤 자학적인, 심리적으로 자학적인 영성을 만들어 내는데 이 죄론이 크게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이미 니체와 프로이드 이런 사람들이 많이 지정을 했어요. 그것을 가르켜서 집단적 노이로제 현상이다라고 까지 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늘 나는 죄인이야 죄를 지었기에 어쩔 수 없어. 이런 죄 숙명주의에 빠지는 것들을 보고 집단적 노이로제 현상이라고 했는데요. 크게 잘못봤다. 무조건 기독교를 비판하려고 말하는거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상당히 일리가 있는 이야기예요. 특히 한국교회에 그러한 현상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요게 또 그러한 현상이 반대로도 나타나요. 이러한 문제들을 짧은 시간에 선명하게 설명하기에는 쉽지 않는데요. 그래도 전체적인 틀을 이해하는게 이러한 사도신경공부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 제가 설명하려고 하는 거예요. 즉 무리한 접근이지만 그래도 조금하는게 일단 여러분들에게 도움이 될 거 같습니다. 이 죄의 문제에 너무 집착을 하다가 이제는 아 그 죄가 별로 의미가 없다. 그래서 축복 이런 쪽으로만 강조를 하게 되는거예요. 사실 이 두가지가 맛물려 있습니다. 신자들을 죄문제로 몰고가는 것에 어떤 문제점들을 알고 정반대로 죄문제는 전혀 하지 않고 접근하지 않고 축복과 구원쪽으로만 말하는 신앙형태들이 크게 자리를 잡는 거거든요. 순복음교회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죄 문제가 거의 설교에 다뤄지지 않죠. 하나님의 능력만 이야기하고 있죠. 그것도 또 하나의 편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에 대한 문제가 이렇게 정리를 해야 되겠습니다. 죄책감, 죄의식으로 가는 것도 문제고 또 그런 것없이 무조건 축복이라고 하는 그런 쪽으로만 가는 것도 문제이고. 이게 기독교신앙의 굉장히 중요한 자리에 있는데 왜 그러나 하는 거를 정확히 아는 게 필요한 거죠. 죄 숙명주의에 빠지는 것도 문제고 죄 냉소주의라고 할까요. 죄폐기론에 빠지는 것도 문제이구요. 죄는 결국 생명의 문제와 연관이 되는데 초기 기독교에서 생명의 문제를 어떻게 생각했기에 이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하는 구절을 사도신경에 두게 되었는가 오늘 우리가 공부하겠습니다. 첫 패러그래프를 보겠습니다.

성도의 교제가 근원적으로 성자의 반열에 참여한다는 의미라면 이것은 내적으로 사죄사건과 연관된다. 왜냐하면 사죄는 기독교적으로 구원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특징적으로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틀림없이 사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사실에 뒤이은 결과이며, 또한 하나님이 지금 함께 한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우리의 완전과 구원, 그리고 생명을 얻기 위해서 요구되는 인간존재가 성취된 다음에 따라오는 결과다. 죄가 용서될 때 고려되어야할 문제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구원의 현재적 활동이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는 인간의 삶을 지향한다. 이에 반해 사도신경이 확정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몸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은 미래의 완전한 구원에 참여한다는 점에서 두드러진다. 사죄는 바로 이러한 구원을 미리 앞서 제시하는 사건이다.

네 여기까지가 첫 번 패러그래프인데요. 사죄문제에 대한 전반적인 윤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거를 조금 더 천천히 생각해 봐야 겠어요. 성도의 교제가 근원적으로 성자의 반열에 참여한다는 의미라면. 이라고 지금 문장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성도의 교제, 이것은 성자의 반열에 참여하는 것. 이것이 내적으로 사죄 사건과 연관된다고 하네요. 이 세 가지가 왜 연관되는지 이해가 되시죠? 성도의 교제, 이거는 사도신경, 우리가 암송하는 내용에 있는 구절이고. 앞에 우리가 공부했습니다. 12장에 나와 있는 건데요.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인 교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성도의 교통, 성도의 교제 이것과 성도의 반열에 참여하는 것, 그리고 내적으로 죄를 용서 받는 것, 이런 것들이 서로 연관되어 있는 거예요. 이것이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이해를 하셔야 하겠지요. 성도의 교제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그 교회에 나오는 신자들끼리 형제애를 회복한다는 그런 것만이 아닌거죠. 이미 죽어서 하나님 나라에 간 성자들과의 관계속에 들어간 거예요. 그런 것들이 와 닿지 않을 수 있어요. 그냥 교회안에서 친목회하고요. 또 누가 아프면 좀 찾아가 보기도 하고 그러한 것들이 어떻게 성자의 반열, 성자라고 하는 것은 거룩한 사람들인데 어떻게 그런 것들과 연관되느냐 그렇게 좀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우리가 확인하는 방식으로 성령의 역사가 끝나지 않는다고 하는 사실을 좀 염두에 둬야 합니다. 여기서 더 이야기를 하지 않겠어요. 그런 정도로만 하겠어요.

하여튼 그 세 가지, 성도의 교제, 성도의 반열, 사죄사건 이런 것들이 두루 두루 연관되는 겁니다. 거룩한 성자들의 반열, 결국은 그렇게 되려면, 혹은 그렇게 되었다면 당연히 우리도 거룩한 사람들이 되어야 되는 거겠죠. 거룩한 사람들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성자들의 반열에 들어갈 수 없겠지요. 성도들끼리의 교제가 우리를 성도라고 말할 수 없겠지요. 성도란 거룩한 무리들이니까요. 이 거룩하다고 하는 것은 죄와의 관계가 단절되는 게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당연히 여기에는 사죄라고 하는 게 전제되면서 동시에 결과인거죠. 두개 다라고 해야 될 겁니다. 그 뒤에서 바로 그렇게 설명하잖아요. 사죄는 기독교적으로 구원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특징적으로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사죄, 용서받는 것은 기독교적 구원을 독특한 관점으로 설명하는 거예요. 결국 그 사죄는 하나님의 구원통치에 대한 기독교적 설명이라고 할 수 있는거죠. 이런 방식으로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고 너희들은 죄인이야. 너희들은 죽어야 돼. 너희들은 간음했어. 너희들 도적질했어. 너희들 뻔뻔스러워. 이런 식으로 사람들의 영혼을 도덕주의식으로 몰아가는 것은 이거는 기독교가 말하는 사죄차원을 완전히 심리학의 차원으로 끌어내리는 겁니다.

그 사죄에 대해서 조금 더 설명을 하잖아요. 사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사실에서 오는 결과다. 참 놀라운 아주 정확한 표현이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한다고 하는.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죄와 전혀 상관없이 사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그게 가능한 거거든요. 칭의라고도 이야기하기도 하구요. 우리가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이지 우리가 실질적으로 죄를 다 극복했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선물로 주어지는 거예요. 의도 선물이예요. 우리가 성도라고 하는 그것도 선물인거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가 여전히 죄와 연결되어 있지만 그렇지 않다고 인정을 받는 거죠.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나오게 되는 결과인거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우리가 용서받는 거죠. 그래서 용서받음으로 우리가 성도가 되는 거구요. 그러한 성도의 교제를 통해서 우리는 성도의 반열에 참여하는 거죠.

그 다음 문장도 중요해서 짚어야 되겠어요. 죄가 용서될 때 고려되어야할 문제가 뭐냐 하는 거예요. 그거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구원의 현재적 활동이다. 이거는 우리가 밑줄을 그어놓고 꼭 기억해야 될 것 같습니다. 외워 버리는 것이 좋을 것 같네요. 신학공부라고 하는 게 일단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데요. 때에 따라서는 외울 필요도 있습니다. 이해가 안될때는 일단 외워놓고 나중에 그러한 언어들이 열리면서 문장 전체가 이해될 수 있어요. 외우는 것도 무조건 외우는 건 아니고요. 모든 것을 외워야 한다는 것도 아니고요. 이해가 되지 않을때 혹은 중요한 것들은 외워두는 방식도 필요합니다. 죄가 용서된다고 하는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뭐냐 다음과 같은 거란 거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구원의 현재적 활동이다. 내안에서 이루신 것은 아니예요. 여러분 이것을 늘 기억하셔야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이루신 거예요. 구원은 거기서 이루어진 겁니다. 하나님을 본자는 오직 한 분인거예요. 부활한 분은 오직 한 분인거죠. 참된 의를 이룬 분은 오직 한 분인거죠. 예수 그리스도예요. 우리가 했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구원의 현재적 활동이다. 현재적 활동, 구원의 현재적 활동. 그러니까 너의 죄가 용서받았다 그러한 설명을 들을 수 있는거죠. 그러니까 이 선포가 현재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 패러그래프로 넘어가겠습니다.

성도의 반열에 참여한다는 것과 사죄, 그리고 미래에 대한 기독교적 희망은 상호 연관되어 있다. 이 경우에 사죄는 신앙인이 예수를 통해서 얻게 된 하나님과의 친교에 대한 소극적인 표현이다. 무슨 뜻인지 조금 가물 가물 하신가요? 이 세가지 기독교 신앙의 내용들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고 먼저 이야기했어요. 성도의 반열에 참여하는 것, 곧 우리가 성도의 반열, 혹은 성자의 반열, 이게 제가 번역이 성자, 성도가 왔다갔다한 흔적이 있는데요. 제가 하일리게 라는 독일어를 제가 때에 따라서는 성자, 때에 따라서는 성도라고 했어요. 그게 서로 비슷한 이야기이기도 한데 때에 따라서는 좀 차이가 있기도 하고요. 제가 정확하게 포착하기는 힘들었어요. 제가 그 정도 하고 넘어가죠. 성도의 반열에, 혹은 성자의 반열에 참여하는 것 하고 사죄, 그리고 미래에 대한 기독교적 희망이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 거죠. 그건 당연한 이야기죠. 죄를 용서받아야 우리는 성도, 혹은 성자 거룩한 무리에 들어가게 되는 거죠. 그럴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진 종말론적 마지막 부활 생명에 들어간다고 하는 그러한 희망에 들어가는 거죠. 이러한 세 가지가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 데에 다음과 같은 것들이 조금 부연 설명됩니다.

여기서 사죄라고 하는 것은 신앙인이 예수를 통해서 얻게된 하나님과의 친교에 대한 소극적인 표현이다. 소극적인 표현이라고 하는 말을 기억해 주세요. 적극적으로는 구원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거죠. 희망, 평화, 기쁨, 자유 이런 것들은 적극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나 사죄, 죄는 좀 어두운 문제죠. 제거해야될 부분들이죠. 기쁨과 평화 해방은 더 확장시켜야 할 내용들, 그러니까 그러한 쪽들은 포지티브하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고요. 사죄 문제는 구원, 하나님과의 친교 이러한 것에 대한 네가티브한 표현이다. 실질적으로는 똑 같은 거죠. 사죄나 자유나 같은 이야기죠. 하나님과의 관계, 이 문장을 따르자면 하나님과의 친교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같은 거죠. 그러니까 사죄도 결국은 하나님과의 친교를 이야기하는 거죠. 자유와 해방도 하나님과의 친교죠. 소극적이냐 네거티브하냐 포지티브하냐 표현을 어느쪽으로 하느냐에 따라서 사죄라고 하는 말도 되고 희망, 해방 자유 이런 말도 됩니다.

여기서 하나님과의 친교라는 것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는 희망은 이 하나님과의 친교에 기초한다. 하나님과의 친교예요. 아마 독일어로는 디 게마인샤프트 딥 고스트 이렇게 되어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하나님과의 친교가 우리의 종말론적 희망의 토대라고 하는 거예요. 종말론적 희망은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이, 부활함으로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하는 거죠. 죽음으로부터 부활해서 부활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하는 것이라고 하는 희망, 이런 것들을 하나님과의 친교에서, 친교가 토대를 이루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더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치, 친교의 일치 이런 것들이 바로 부활 생명에 대한 희망의 토대가 되는 거죠.

기독교인에게 주어질 적극적인 구원의 몫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생한, 사랑의 영에서 나온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사죄는 하나님에게서, 그리고 그로 인해 성취된 자유로운 생명에서 분리된 모든 것에서 해방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도 좋은 설명입니다. 기독교에 대한 표현이예요. 사죄란 뭐냐? 하나님으로부터, 혹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자유로운 생명에서 분리된 모든 것에서 해방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사죄문제가 간단하게 내가 세례받기 위해서 잘못했습니다. 어떻게 했습니다. 그런 정도로 말하는게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아시겠죠. 그 다음에요.

인간은 삶에 대한 자기집착 때문에 하나님과 심층적으로 분리된다. 인간은 삶에 대한 자기 집착때문에 하나님과 깊은 차원에서 분리된다. 이 분리는 죽음에 빠짐으로써 결정된다. 결국 죽는 거죠. 하나님과의 단절입니다. 자기집착입니다. 죄는 자기집착이라고 할 수 있는거죠. 자기 집중이죠. 자기에게 집중하게 되면 하나님과 일치할 수 없어요. 사람들은 자칫 오해하기를 이 신앙을 자기연민으로 일치시키거든요. 내가 사랑받고 있다고 하는 자기에 대한 집중을 하는 거예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러한 복음성가는 기독교적이 아닙니다. 그냥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보자면, 그리고 그 낱말뜻으로만 보자면 잘못된 찬송은 아니죠. 그러나 그 찬송을 부르는 사람들의 영적 정서 멘탈리티에서 본다면 그건 잘못인거죠. 결국 기독교 신앙이 그런 찬송을 통해서 자기 연민에 빠지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사실은 죄인데 신자들은 그걸 잘 모르는 거죠. 오해하는 거죠. 이 대중적인 설교자들, 혹은 그러한 부흥강사들은 신자들을 자기 집중, 혹은 자기연민에 빠지게 하는 어떤 그런 능력이 있어요. 여러가지 방식으로 그렇게 합니다. 사람들은 그러한 것을 원하죠. 자기에게 매력을 느끼고 매혹적으로 생각하고. 네 그게 다 자기연민이니까요. 아담과 이브의 죄도 사실은 자기연민이었던거죠. 그게 인간에게 원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집착때문에 하나님과 깊은 차원에서 분리된다. 이 분리는 죽음에 빠짐으로써 결정된다.

자기집착은 개인이 단순히 공동체와 결합함으로써 극복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죠. 단순히 교회에 내가 나온다해서 이게 극복되는게 아니예요. 오히려 나오면서 더 자기집착을 할 수 있는거죠. 요 부분은 아주 중요합니다. 실제로 신앙생활에 연관되는 문제예요.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자기집착은 개인이 단순히 공동체와 결합함으로써 극복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결합이 한편으로는 개인적인 이기주의를 집단적인 이기주의로 대체하며,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과 집단의 모순이라는 특징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모순은 어떤 개인들이 다른 이들과 구별된 자신들만의 특별한 관심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전체의 관심을 이용한다는 데에 있다. 네. 중요한 지적입니다. 자기집착은 바로 죄예요. 그것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분리되고 있습니다. 자기집착은 우리가 공동체에 들어갔다고 해서 저절로 해결되는게 아닙니다. 여기에서는 이렇게 설명하네요. 개인적인 이기주의를 집단적인 이기주의로 대체한다. 우리 교회, 우리교회 하는 것 있잖습니까? 개교회주의 있잖아요. 우리 교회를 사랑해야 된다. 교회를 위해서 뭐를 해야 된다고 하는 것 있잖습니까? 이러는 것들이 결국은 개인의 자기 집착을 집단화 한것에 불과한거죠. 그렇게 설명한 거죠. 개인적인 이기주의를 집단적인 이기주의로 대체하고 있습니다. 개교회 이기주의 개교회주의가 우리 한국교회에 강고한지는 제가 굳이 설명을 하지 않겠습니다. 신자들은 거기에 자기만족을 느끼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기독교 영성의 왜곡입니다. 아 그래도 그러한 방식으로 기쁨을 누리고 살면 되지 않겠느냐 그렇게 말할 수 있는데요. 그게 기쁨을 누릴 수 있을까요? 그것을 구분해야 합니다. 참된 기쁨이라기 보다도 열망이겠죠. 자기 열망. 그게 어느 순간에 뜨겁게 발현되기 때문에 어떤 자기 초월이라고 할까. 그게 왜곡된 방식이지만 그런 것들이 일어나는 거죠. 그래서 자기가 교회를 위해서 헌신해서 교회를 키우고 이런 것으로 어떤 초월적인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초월적인 경험을 한다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니잖아요. 마치 마약을 먹음으로서 그 순간에 자기를 완전히 초월하고 해방과 자유를 느낀다고 해서 그 마약이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아닌 것과 똑 같습니다. 그 뒷부분 좀더 나가보겠습니다.

그것은 매우 극단적인 현상으로 나타난다. 극단적으로 나타난다고 하는 이 말은요. 그러니까 우리만 구원받아. 이런 방식 말이죠. 우리 교단만, 우리 장로교회만, 우리 침례교회만, 가톨릭은 아니고 우리 개신교회만 이러한 방식으로, 배타적인 그러한 관점으로 자신들의 종교적 관심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공동체 전체를 이용하는 거죠.

그러므로 인간 공동체는 개인의 자기집착이라는 변증법에 떨어져있는 셈이다. 변증법이라고 하는 말을 악순환이라고 바꾸어도 좋아요. 정확한 지적이죠. 인간공동체는 개인의 자기집착이라는 악순환에 떨어져 있는 셈이다. 히틀러 시대도 그랬구요. 독일국민들이 열광적으로 히틀러를 지지한 이유가 바로 그 히틀러를 통해서 자기 집착을 실현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 다음에요.

이 문제는 인간이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내는 징표에 근거해서 꾸려가는 공동체에서만 극복될 수 있을지 모른다.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내는 징표에 근거해서 그게 또렷한 공동체에서만 극복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거죠.

여기서 말하는 이 징표는 모든 인간적 횡포가 제거된 그것을 말한다. 참된 교회일치, 성만찬 공동체 이런 것들 아니겠어요. 그런 것들이 진리를 드러내는 징표잖아요. 이러한 징표에 근거해서 공동체를 꾸려나가기가 사실은 쉽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인간적인 생각들, 쉽게 말해서는 인간적인 생각들이요. 자기성찰이 빠진 그러한 생각들이요. 자기연민을 사랑이라는 말로 포장하는 그러한 어떤 인간의 본성들 말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작용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걸 자기도 판단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그러니까 인간 사회에서의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요원하다고 말할 수 있어요. 그러한 진리를 드러내는 징표에 근거해서 꾸리는 공동체가 그렇게 많지 않는거죠. 뒤뚱뒤뚱대는 거죠.

따라서 이 하나님의 진리에서 개인과 공동체의 대립이 극복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분명히 교회역사는 인간 실존의 현재적 조건들을 통해서, 그리고 자기집착과 죽음의 형벌을 통해서 주어진 틀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자기집착으로 인해 죽음의 형벌이 주어졌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죄의 용서와 하나님과의 일치 가운데서 누리는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은 불가분리로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이 양자는 신자들을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도록 중재한다. 양자가 뭐예요? 이 문장에서 연관되어 있는게 뭐예요. 바로 문장에서요. 다시 보겠습니다. 죄용서요, 사죄요. 사죄와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은 불가불리다하는 거죠. 이러한 두가지 신앙의 요소는 기독교인들을 예수그리스도와 연결하도록 끌어준다고 하는 겁니다. 두가지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그리고 왜 중요한지는 기억하십시요. 사죄와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 이 두 가지가 연결되어 있다. 더 줄여서 말하자면 사죄와 희망이 연결되어 있다. 이게 왜 그런지는 더 설명하지 않아도 알겠죠. 그 다음 보겠습니다.

이것이. 이것이라고 하는 것은요. 바로 앞에서 이야기한 두 가지 신앙적 요소가 결합되어 있고 또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기독교 신자들이 일치하도록 중재한다고 하는 그것이 기독교회에서 베풀고 있는 세례의 의미다. 세례가 뭐냐에 대한 핵심적인 의미를 우리가 여기서 배울 수 있군요. 사죄와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결, 이러한 구조 이런 것들이 바로 세례가 말하는 세례의 의미다 하는 거죠. 이제 판넨베르크는 이 문장부터 사죄문제를 세례와 연관해서 설명합니다. 보겠습니다.

사죄는 고대 기독교에서 세례집례와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성도의 교제와 죄의 용서는 매우 구체적인 제도로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세례가 집례되는 경우에 피세례자는 그리스도, 정확히 말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결됨으로써 자신의 죄된 본래적 삶에서는 죽고 그리스도가 죽은 자로부터 부활함으로써 발생한 새로운 삶으로 돌아서게 된다(롬 6:3 이하). 사도신경은 죄의 용서와 부활의 희망에 대한 언급을 통해서 피세례자가 세례문을 진술함으로써 얻게 될 세례사건의 의미와 능력을 진술하고 있다. 전체 신조에 담긴 실제적인 동인, 끌어가는 힘이 여기서 주제화 된다. 중심이 된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되겠네요. 사죄와 세례가 명시적으로 상호 연결되어 있는 고대교회의 다른 고백문에서도 역시 이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나 있다. 이처럼 많은 헬라계 세례 신조는 381년의 니케아-콘스탄티노풀 신조 처럼 '사죄를 위한 세례'에 대해서 언급한다. 지금 우리는 계속해서 사죄와 세례의 관계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이 경우에 세례의 유일회성이 강조된다는 것은 사죄가 유일회적이라는 초기 기독교적 이해와 맞물려 있다. 세례가 베풀어짐으로써 죄의 짐이 결정적으로 해소된다는 주장은 세례가 가능한대로 인생의 마지막으로 자주 연기되는 악습을 초래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늦추어야만 죄가 용서받을 수 없을 정도로 반복될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슨 뜻인지 전달이 되었죠. 세례가 유일회적인거예요. 그렇다면 곧 사죄도 유일회적이라고 하는 거죠. 별거 아닌 것같이 여러분에게 들리실텐데요. 초기 기독교인들에게는 이게 아주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례를 받음으로서 사죄의 능력안에 들어가는 게 아니겠어요. 그래서 성도가 되는 것이고 성도의 반열에 참여하는 것이구요.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진 새로운 생명에 대한 희망을 안게 되는 거란 말입니다. 그렇게 중요한 문제였어요. 한번 용서를 받으면 이미 이렇게 성도가 되고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인데 그런데 실제적으로 살아가다 보니까 세례 받은 이후에도 또 죄를 짓게 된단 말이예요. 그 죄라고 하는 것은 사소한 게 아니라 이 사죄선고가 거의 무효화될 지 모를 그러한 잘못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크게 반사회적인 그러한 악행을 행할 수 있잖아요. 그러면 또 다시 사죄를 받으려면 또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세례는 유일회적인거니까 세례를 못받지 않습니까. 그러면 멸망할지 모른다고 하는 두려움이 있었던 거죠. 그래서 가능하면 죽음에 임박할 때까지 세례를 받지 않고 남겨두고 죽기 직전에 더 이상 큰 범죄를 저지를 여유가 없는 그러한 나이가 들 때 쯤 세례를 받게 되는 그러한 잘못된 습관들이 초기 기독교에서 일시적으로나마 일어났던 거죠. 제가 알고 있기로는 기독교를 로마의 합법적으로 받아들인 로마의 합법적인 종교가 되게한 콘스탄티누스 이 사람도 이 세례를 늦게 받았다고 해요. 우리가 지금 볼때는 조금 이상하기는 한데 그들은 그것이 굉장히 심각했습니다. 조금더 보겠습니다.

세례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세례가 베풀어질 때 피세례자가 실존적으로 확실하게 회심해야 한다는 사실을 진지하고 심층적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거듭해서 죄를 범한 자가 '두 번째로 참회할' 가능성에 대한 주장은 3세기 이래로 실행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곧 예외 규정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니까 세례를 받은 다음에도 죄를 범하면 또 한번 참회해도 된다 그래도 괜찮다고 하는 것이 3세기 이래로 실행되었다고 하네요. 그렇다면 그전에는 그렇게 못했다고 하는 말이 되네요. 그러니까 그 당시는 세례와 참회, 참회를 통한 사죄가 아주 엄격하게 진행되었다고 하는거죠. 그 세례를 받는다고 하는 것은, 즉 기독교인이 된다는 정말 그 뒤로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또 사죄를 받을 정도로 악한 일을 하지 않겠다고 하는 아주 철저한 결단, 인식을 전제한다는 거죠. 두번째 참회 가능성이 3세기 이래로 주장되었다고 하네요. 그러나 이것은 곧 예외규정으로 취급되었다. 특별한 경우만 그렇게 되는거지 일반적으로 또 회개하고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는 그러한 것이겠죠.

더구나 중세기 초 이래로 집행된 유아세례의 관습과 수도사들의 양심에 대한 연구가 시민교육에 끼친 영향으로 인해서 다음과 같은 결과를 낳았다. 네 요 문장에서 유아세례가 하나 있구요. 또 수도사들의 양심에 대한 연구가 시민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끼쳤는지는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그건 따로 공부가 좀 필요한데 준비가 되지 않았고요. 상식적으로는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양심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들에게 있다고 하는거죠. 그러니까 겉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용서를 구하고 용서받았고 구원받았습니다. 이러한 세례 고백문을 말할때 정말 그걸 양심적으로 했냐 안했냐 하는 그러한 논의가 좀 있지 않았을까 그러한 생각이 드네요. 그러니까 세례받고도 또 죄를 지어서 사죄해야 될 경우라고 한다면 그것은 첫번째 세례 받을때에는 정말 양심적으로 바르게 용서를 구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거죠. 나중에 한 사죄가 정말 양심에서 나온 사죄로 인정받을 수 있는 거죠. 그렇다면 세례받은 다음에 행한 죄와 용서, 이러한 문제들도 저절로 해결될 수 있는거죠.

유야세례에 관해서는 그게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자료를 찾아보지 않아서 정확하게 말씀드리기가 힘드네요. 중세기초에 이러한 일들이 있었다고 하는데요. 로마에 기독교가 오랫동안 자리를 잡으면서 한 사람, 영혼의 교육적인 차원, 영적인 돌봄의 차원에서 유아세례가 집행된 거 같습니다. 두가지 관점으로 세례를 준거죠. 하나는 부모들의 신앙이구요. 하나는 아이가 직접 신앙고백을 하지 않지만 이 어른들의 신앙고백을 통해서 성령이 그 아이에게 역사한다는 그러한 관점이 있었겠죠. 이거는 제가 100% 확실하게 말씀드린 것이 아니고 상식적인 차원에서 말씀드린 겁니다. 이러한 두루두루 여러가지 일들이 중간중간에 개입됨으로서 세례와 사죄문제가 더 확장되고 새롭게 이해되는 거로 보면 되겠습니다. 다음과 같은 결과를 낳았다고 하네요. 뭐냐. 이렇습니다.

즉 죄는 세례를 받음으로 해결되었으며, 또한 정기적인 비밀 참회 제도와 연관되어 실행된 거듭된 참회와 그 용서가 결국 신앙생활의 일반적 현상이 되어버렸다. 아마 이게 로마가톨릭교회가 행하는 신부들앞에 가서 고해성사하는 것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일단 죄는 세례를 받음으로서 해결되었어요. 일단 그것으로 끝났습니다. 더이상 세례 받은 다음에는 세례받을때와 같은 사죄, 그러한 것은 필요없는 거예요. 대신 정기적으로 사제앞에 가서, 신부앞에 가서 다른 사람없이 비밀스럽게 고해성사를 하고 거기서 또 용서를 받고 하는 그러한 신앙생활이 자리를 잡게 된겁니다. 그러니까 로마가톨릭교회도 그렇고 우리도 마찬가지고요. 이러한 종교적인 관습들이 자리된 데에는 여러가지 요인들이 많이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을 우리가 충분히 헤아려야지만 그 제도가 정말 옳은지 아닌지를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거예요. 사제들앞에 가서 고해성사하는 것은 우리들은 무조건 나쁘다. 사죄에 대해 구하는 것은 하나님에게만 해야 하는데 어떻게 사제들에게 가서 하느냐? 그러한 문제제기가 일리가 있기는 있지만 그러나 나름대로 그 역사안에서 그 필요성이 나왔다고 하는 이걸 어느 정도 우리가 좀 인정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한 신앙생활의 일반적 현상이 고해성사라고 하는 현상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종교개혁과 경건주의는 여전히 이러한 중세기의 참회 중심적인 신앙 활동을 뜻한다. 특히 이 경건주의는 오늘날까지 프로테스탄트 신앙의 전형으로 각인되어 있다. 로마가톨릭교회의 참회신앙, 이런 것들이 종교개혁신앙안에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고 하는거죠. 특별히 경건주의, Pietism이라고 하는 이 경건주의에서 그러한 전통을 통해서, 프로테스탄트 신앙의 아주 대표적인 것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게 잘못된거다. 그걸 판넨베르크가 이야기하려고 하는 겁니다. 잘못되었다고 하는 그런 말도 100% 완전히 부정적인 거다 그런 뜻으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방향, 어떤 성격 그런 것들이 잘못되었다고 하는거죠. 죄, 참회, 우리가 용서를 구하고 용서받고 하는 반복적으로 되는 이런 것들이 우리가 하나님에게 사죄의 기도를 드릴 필요가 없다고 하는 말로 이해되면 또 곤란한거예요. 판넨베르크가 다음에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 습관적으로 용서를 구하고 또 용서를 받았다고 하는 자기 다짐을 하고 그러한 죄 중심, 사죄중심, 참회중심의 경건성으로 빠져드는 그런 것을 문제 삼는 것이지. 우리가 주님앞에 신앙생활에서 용서를 구하고 하는 이러한 것 자체를 문제삼는 것은 아닙니다.

네 고맙습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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