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해설 52강 -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2)

안녕하세요. 오늘은 죄론에 대한 공부 두 번째에 해당되겠군요. 판넨베르크의 책 사도신경 해설의 13장,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요 대목의 두 번째 시간입니다. 죄 문제죠. 죄, 사죄입니다. 지난 첫 번째 시간에 어느 정도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방향은 잡혔다고 볼 수 있어요. 오늘 서론적으로 한 마디를 드리면서 정리를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죄문제가 한국교회에서는 뜨거운 감자라고 표현을 해야 옳을를지 아킬레스 건이라고 표현해야 옳을는지 모르지만 하여튼 문제입니다. 양쪽 극단이 나타나는 것 같아요. 하나는 죄에 편집증적으로 매달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독교 영성을 죄문제와 직결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죠. 툭하면 공격적으로 당신들은 죄인이야 라든지 아니면 자학적인 관점으로 아 나는 죄인이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구체적으로 뭐가 죄냐라고 하는 질문앞에서는 특별히 어떻게 대답을 잘 못해요. 원죄가 아니냐? 아담과 이브의 죄로 인해서 우리가 계속 숙명가운데 놓여있다고 한다든지 아니면 내가 부도덕하다 이기적이다고 뭐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대개 인제 그런 것들도 개인적인 죄의식에 머물러 있는 거지 실제로 어떤 정의로운 세계를 향한 무책임 이런데까지는 나가지는 못하고 있는거죠. 이러한 문제들이 이런 방향으로 극대화된 이러한 신앙에서는 죄문제가 심리학적인 차원에 떨어져 있습니다. 심리차원이 죄의식에 꽁꽁 묶여 있는거죠.

다른 하나의 관점은 이것에 대한 반발로 나오는 것인데 죄를 아주 유치한 교리로 생각하는 겁니다. 기독교인 치고 노골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죄문제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죠. 예배시간에 사죄의 기도를 드린다거나 또 성경에서 그러한 이야기를 읽을 때 죄를 좀 말할 수도 있고 잠간 거기에 귀를 기울일수도 있겠지만 실제적 살아가는 삶에서는 죄, 죄문제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상태를 이야기하는 거죠. 이 두가지는 서로 대립적인 상태입니다.

앞서 말한 그 쪽으로는 죄에 편집증적으로 매달리면서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가지 못할 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앙을 왜곡시키게 되는 거죠. 즉 그러한 신앙에 있는 사람들은 늘 불안한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하게되요. 지옥갈까봐 두려워서 열심히 교회에 나가고 헌금하고 봉사하고 하는 그러한 신앙형태들을 가르킵니다. 거기에는 자유, 평화, 해방, 희망 이런 것들이 사실 없는거죠. 그런 단어들은 나온다고 하더라도 실질적으로 그러한 세계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두 번째 것은 그것하고는 정반대인 거죠. 인간이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든지 나는 죄와 전혀 상관이 없다고 한다든지 그렇게 자기의지가 강한 입장에 있는 사람들의 신앙적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정리를 해야 되겠습니다. 전자의 경우를 죄숙명주의라고 한다면 후자의 경우를 죄냉소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다 사실은 문제가 있는 거예요. 두가지가 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들어가지 못하므로 벌어진 하나의 결과입니다. 서로 대립적인 것인 같지만 사실은 한통속이라고 할 수 있어요. 기독교의 영성이 생명의 깊이로 들어가지 못하고 감정이나 심리상태에 머물므로서 결국은 성서가 이야기하려고 하는 하나님과의 일치를 통해서 얻어지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경험이 거기서는 주어질 수가 없습니다. 두가지를 말씀드렸는데 첫 번째것은 동의를 하실거예요. 그러나 두 번째 문제는 그게 정확하게 전달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전달되었나요. 네 그 두 번째 문제를 보충한다는 차원에서 양자에서 벌어지는 죄에 대한 오해가 뭐냐는 것에 대해 한가지만 짚고 오늘 본문에 들어가겠습니다. 오늘 본문과도 연관되는 문제예요.

사람들이 이 죄를 어떤 도덕주의적인 차원에서만 접근한다는 겁니다. 뭐 잘못했어. 뭐 했어. 이런 차원 말입니다. 남의 것을 도둑질했다거나 사기를 쳤다거나 남에게 피해를 주었다거나 간통을 하였다거나 예를 들자면요. 그런 방식으로 아주 도덕적인 차원에서만 접근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도덕적인 불안감이 있지 않습니까? 실질적으로 실행을 해야 하는데 하지 않든지 간에 그러한 불안감들이 있단 말이예요. 그런 쪽으로 몰아가게 되면 결국은 죄책감에 빠지게 되고요. 거기서는 생명의 깊이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뻔뻔스럽게 아 나는 실제적으로 그런 도덕적인 잘못을 하지 않았다. 내가 성실하게 정직하게 벌어서 먹고 살았다. 이런 쪽으로 생각을 하기 때문에 자기는 죄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든요. 기독교, 성서가 이야기하고 있는 죄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에서 상당히 멀어진 상태에 있는거죠.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죄라고 하는 것이 뭔지 아시죠? 하나님과의 분리를 이야기합니다. 교리적으로 말하면 그런 거예요. 실제적으로 이야기하면 결국은 자기 집중인 거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단절됨으로서 자기 집중을 하게 되는거구요. 거꾸로도 마찬가지예요. 자기에게 집중하므로, 자기스스로 생명을 완성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거거든요. 그게 바로 성서와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죄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도덕적, 심리학적인 차원이 아니라 훨씬 더 근원적인 것, 생명지향적인 것, 존재지향적인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을 생명의 근원이라고 할 때 이게 정말 얼마나 크게 분리되어 있는지를 안다면 내가 죄인이고 당연히 하나님과의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 용서를 받아야 된다고 하는 그 기독교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습니다. 네 그런 정도로 정리를 하고요. 본문을 보겠습니다. 판넨베르크 책 204쪽입니다. 세 번째 줄이예요.

사죄를 세례와 분리하거나 독립시키는 것은 사죄와 부활 희망 사이의 연관을 불확실하게 만든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죄와 사죄가 죽음과 생명에 연관된 문제라는 점이 더 이상 분명하지 않게 되었다.

네 근원적인 사태를 오늘 날 교회가 잘 모른다고 하는 겁니다. 이 죄와 사죄의 문제가 어떻게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 되었고 그것이 결국은 부활생명과 연관된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되는데 그게 없으니까 결국은 죄나 사죄 문제를 피상적으로만 접근을 하게 되는거죠. 이건 어떤 정서적으로 불안한 사람들에게는 그게 어느정도 어필할 수 있지만 건강한 사람들에게는 영적인 해답으로 제시될 수 없는 거죠. 오늘날 교회에서는 죄와 사죄가 죽음과 생명에 연관된 문제라는 점이 더 이상 분명하지 않게 되었다는 거죠. 오늘 생각있는 기독교인들이 죄 문제를 대단히 기분 나쁘게 생각하고 있는데요. 교회를 다니고 싶어도 하도 죄인 죄인하는 것 때문에 듣기 싫어서 못다닌다고 한다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거는 교회가 잘못 가르쳐셔 그렇습니다.

반면에 초대 기독교에서는 이 문제가 세례 사건과의 연관 가운데서 분명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연결되어 있는 피세례자가 자신의 고유한 삶을 포기해야만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발생한 새로운 생명에 대한 희망과 더불어 죄를 용서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을 지적했어요. 초기 기독교에서 기독교 교리가 형성되었는데 그때는 오늘과는 오늘 미쳐 보지 못한 그런 부분들을 담고 있다고 하는 거죠. 그러니까 죄, 혹은 사죄의 문제는 근원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부활과 연관되는 기독교적 종교의식인 세례와 연관되어 있는 문제라고 하는 거예요. 중요한 부분입니다. 사죄는 세례와 깊숙이 연관되어서 시작되었습니다. 세례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더불어 죽고 예수님의 부활과 더불어서 부활생명에 참여한다는 기독교적인 종교의식이잖습니까? 그런 세례를 받는다고 해서 당장 그 부활생명이 우리들에게 완성되는게 아니죠. 그러나 그 세례는 상당히 중요합니다. 하나의 약속이기도 하구요. 그리고 그러한 세례의 가르침, 신학적 의미에 우리가 들어감으로서 우리의 삶에서 그러한 생명의 세계가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확장되구요. 심화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기독교안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종교의식이 하나의 형식주의로 흐르게 되면 그것도 모양이 좀 우습지만 그러나 본질은 늘 형식안에 담긴다는 말이 있듯이 그러한 형식이 본질을 담보할 수 있는 거예요. 형식을 형식주의가 아니라 본질을 담아내는 그릇으로 잘 유지해야될 필요가 있지요. 세례가 그것입니다. 이 대목에서도 그 두가지를 잘 연관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사죄문제는 세례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하는 겁니다. 세례는 죄책감으로 빠지는 것이 아니죠. 죄를 우리가 고백하지만 그건 너는 죄인이야 잘못했어 뭐했어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세례를 받는 것이 아니죠? 오히려 부활 생명에 대한 희망을 안고 세례를 받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죄와 사죄라고 하는 기독교 교리는 이러한 희망 약속 믿음 이거하고 연관된거다 처음부터 초기 기독교회는 그렇게 시작했다. 그걸 기억하십시오.

그렇지만 초대 교회는 사죄를 세례 때 이루어지는 유일회적인 사건으로만 한정하지 않았다. 이는 옳은 처사였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것은, 그러니까 죄에서 죽는다고 하는 건데요- 어떤 한 행위 안에서 상징적으로 선취될 수 있긴 하지만 - 물속으로 들어간다고 하는 그 의식을 통해서 상징적으로 선취될 수 있기는 하지만 - 기독교인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죽을 수밖에 없는 생명의 전체 과정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네 그렇죠. 한번 세례받을 때 사죄받는 것으로 우리가 모든 이러한 죄와 사죄문제와 일단락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결국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삶을 살아가야 되잖아요. 아직 죽기 전까지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단절이라고 하는 것을 감수해야 되는 겁니다. 그때까지는 우리는 반복해서 죄를 범할 것이고 그리고 당연히 용서를 받아야 되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살아있는 한 죄와 완전히 상관없을 수는 없다고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 말이 우리가 반사회적이고 부도덕한 일을 해도 괜찮다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가 노력하면 안 할 수 있는거예요. 건강한 시민의식 그런 훈련만 받는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죄라고 하는 것은 훨씬 더 근원적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자기 스스로 나의 생명을 완성시킬 수 있는 것처럼 살아가는 모든 삶의 태도들을 가르키고 있는 거죠. 여기서 우리는 먹어야 되고 모든 생리적인 욕구에 반응해야 되고. 사실 이런 것들이 근원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하나님과의 단절에 의해서 우리가 감수할 수밖에 없는 삶 전체 과정에서 일어나는 죄인들의 삶의 형식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죄는 세례 받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가 기독교의 구원을 이해하려고 할 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죄의 용서가 기독교적 경건성의 내용으로서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통해서 보증된 부활에 대한 희망으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부활에 대한 희망으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고 하는 이 사실이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에서 아주 핵심적인 겁니다.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오해되는 부분이 다음과 같다고 하는 거죠.

죄와 사죄문제가 부활 희망과 분리되면, 이건 곧 세례와 분리되어 버린다는 건데요. 그것은 도덕주의라는 좁은 틀에 갇혀버린 경건성의 키워드가 되어버린다. 아주 중요한 대목입니다. 다시 읽어볼께요. 죄와 사죄문제가 부활 희망과 분리되면 그것은 도덕주의라는 좁은 틀에 갇혀버린 경건성의 키워드가 되어버린다. 이 도덕주의는 율법주의와의 투쟁 가운데서 얻어진 기독교의 한 성격을 말한다. 도덕적인 상태를 유지함으로서 우리가 의로워질 수 있다고 하는 그 가르침이 바로 율법주의잖습니까? 복음주의는 기독교전체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거는 율법주의와의 투쟁가운데서 유대교로부터 새로운 신앙의 패러다임으로 나온 거예요. 율법주의와의 치열한 투쟁이 초대교회에서 있었습니다. 물론 율법주의와 적절한 타협점을 찾으려고 하는 흐름들이 있기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기독교 신앙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바울에게는 거의 이단 논쟁에 가까울 정도로 싸웠습니다. 그러한 투쟁가운데서 이상하게 율법주의와 유사한 도덕주의가 또 기독교안에 자리를 잡게 된겁니다. 그러한 기독교의 한 성격이 도덕주의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청교도주의 신앙이 바로 그러한 도덕주의 신앙이죠. 미국에서 우리나라로 건너온 선교사들이 다 이러한 도덕주의 신앙들입니다. 경건한 모습들을 갖고 있어요. 그리고 개인적으로 굉장히 성품도 좋구요. 그거는 중요한 것인데 그렇다고 그것이 기독교의 중심은 아니죠. 이러한 도덕주의, 혹은 부흥운동, 회심주의 이러한 신앙들은 결국 죄, 사죄 이런 것들이 부활 희망과의 관계속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과는 상관없는 또하나의 다른 독립된 가르침으로 받아들여지는 거죠. 이게 미묘한 차이가 있어요. 기독교가 도덕성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도덕주의로 들어가는 것은 아닌데요. 이러한 긴장, 작은 차이들을 일반 신자들이 분석해 내기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거는 성서를 읽는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는 아닌거예요. 신학이 아주 탄탄하게 밑바탕이 되어야 하구요. 그런 훈련이 필요한 거죠. 이 도덕주의는 율법주의와의 투쟁가운데서 얻어진 기독교의 한 성격을 말한다.

기독교 신앙은 이러한 경건성으로 숨어들어감으로써, 이러한 경건성은 도덕주의를 말하는 거예요. 말도 온화하게 하고 구제도 잘하고 그러한 예수쟁이와 같은 모습이 있잖습니까? 그러한 경건성으로 숨어들어감으로서 결국 자유로워지고 용기를 얻게 되는 그 새로운 삶을 획득하기 보다는 이 경건성에 의지해서 죄책에 대한 경험을 삶의 중심주제로 삼거나 사죄를 그 목표로 삼게 된다. 정말 중요한 지역입니다. 밑줄을 그으시고 두고 두고 생각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한국 교회의 설교가 상당부분이 판넨베르크가 지적한 요 부분에 탁 걸려 있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복음주의 설교자들, 그리고 강해설교로 이름을 얻는 사람들의설교는 거의 다 이렇습니다. 이게 왜 먹히냐? 사람의 어떤 심리적인 약점들이 거기서 반응을 일으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기독교 신앙,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면 설교로서 괜찮지 않느냐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군요. 네 그런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가도 됩니다.

그러나 그런 방식이라고 한다면 여호와의 증인 이런 사람의 신앙도 다 괜찮다 인정을 해야죠. 여호와의 증인 이 사람들이 얼마나 인격적으로 고상하고 바른지 모르시죠? 정말 그렇습니다. 네. 우리는 이러한 신학적 훈련을 통해서 우리 신앙이 절대적으로 옳게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방법을 통해서만 다음과 같이 두 가지가 도전된다고 생각하는 거죠. 하나는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기독교 2천년 역사와 깊은 연대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이건 신학적 사유가 없으면 불가능한 이야기예요. 지금 청교도적인 도덕주의, 경건주의 신앙이 한국교회에는 거대한 세력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이건 신학이 없어서 그런 거거든요. 일단 그런 쪽의 흐름이 한국에 들어와서 교회를 장악했기 때문에 그게 다 인줄 알죠. 그러니까 한국 교회 신자들이 2천년 기독교 역사가 어떻게 흘러왔는지 잘 모릅니다. 그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신앙의 흐름들 있잖아요. 대표적인 청교도 설교자들이라든지 등등 있습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웨슬레도 마찬가지구요. 죤 스토트도 그렇고 말이죠. 설교와 설교자라는 책을 쓴 로이드 존스도 그렇구요. 상당히 믿음이 있는 그런 외국 청교도 경건주의 신앙하는 사람들이 한국교회 거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데 그게 아주 일부였다고 하는 것, 그리고 그 시절에 유럽사회에서 나왔던 한 일부의 흐름이었다는 것을 잘 모르고 있죠. 기독교 2천년 역사와 우리가 깊은 연대가 가능한 것이 신학적 훈련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이 첫 번째구요.

두 번째는 이럴 때야만 성숙한 기독교 신앙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성숙하다는 말을 지성적이다라든지 교양적이다 그렇게 받아들이시면 곤란합니다. 정말 생명을 살리는 그러한 신앙적 흐름에 우리가 들어간다고 하는 말이죠. 성숙하고 미숙한 것은 차이가 있잖아요. 다시 또 오해할까봐 말씀을 드립니다. 늘 어른인체 하구요. 신학적으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할 줄 알고 그런 사람이 공부도 잘 하지 못하고 생각도 깊이있고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못하면서 소박하게 신앙생활하는 사람보다 무조건 성숙하다 그런 뜻으로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성숙이란 것은 중심의 세계에 두발을 얼마나 잘 딛고 있느냐는 그러한 것이죠. 이런 신학적인 훈련을 사실은 하지 못한 사람들 중에서도 그렇게 신앙의 중심에 들어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적으로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네. 진도를 더 나가겠습니다. 그 중에서 제가 강조한 거예요. 다시 읽어봐야 되겠군요.

기독교 신앙은 이러한 경건성으로 숨어들어감으로써 결국 자유로워지고 용기를 얻게 되는 그 새로운 삶을 획득하기 보다는 이 경건성에 의지해서 죄책에 대한 경험을 삶의 중심주제로 삼거나 사죄를 그 목표로 삼게 된다.

좀 코미디 같은 이야기로 한국 교회신앙이 흘러 나오는 거죠. 사죄를 사죄 자체로 목표로 삼는 다는 거죠. 부활 희망이 핵심주제인데 나는 죄 용서 받았어 거듭났어 이 신앙에 머물러 있는 거죠. 복고적이고요. 어떻게 보면 퇴행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인물이 한국 교회에서는 신앙이 좋은 것처럼 주장되고 있잖아요. 그래서 제가 코미디 같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사죄의 의미는 그 자체로서 홀로 당연하거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어떤 확신이 든다고 하잖아요. 나 용서 받았어. 나 용서 받은 확신을 가지고 있어.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것이 확실한가요? 그 자체로서는 그렇게 당연한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용서받고 아니고를 자기의 심리적인 확신으로 알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다른 것에 연관해서 주어지는 하나의 신앙현상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활 신앙, 희망에 대한 거기서부터 나오는 신앙인들의 영적인 상태라고 할 수 있는거죠. 그 다음이요.

죄책문제*에 기울어진 기독교는 성숙한 기준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서, 즉 자신을 죄인으로 느끼지 못하고 따라서 사죄의 사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이들에게서 오해와 불신을 사게 된다. 그렇죠. 예수믿는 사람들은 매일 죄, 죄인, 딱 질색이야. 이런 말을 듣는 거죠.

판넨베르크는 죄 문제를 일종의 경건주의적, 도덕적 기준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반생명의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 죄에 대한 인식과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은 결국 죄의 결과인 죽음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생명세계, 즉 부활에 대한 희망에 근거해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뜻한다. 그런데 기독교 전통은 개인이 실존적 죄책으로부터 벗어나서 도덕적으로 우월하게 살아가는 것을 기독교의 중요한 삶의 내용이라고 가르쳤다. 이것은 곧 생명의 지평을 죄책(Schuldproblematik)의 지평으로 떨어뜨렸다는 말이 된다.

이렇게 전승된 도덕성의 당위가 - 경건주의 도덕주의식으로 내려오는 기독교안에서 언급되는 도덕성의 당위가 - 현대의 의식구조에서는 그 효능을 이미 상실했기 때문에 이러한 사람들의 숫자는 오늘날 증가하고 있다. 기독교를 우습게 보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다. 니체, 프로이드 이후로 확연하게 된 사건입니다. 도덕적 요청을 '극단적으로' 강화시킨 이러한 해석 앞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죄인으로 느끼고 용서받아야 할 필요를 절감하도록 하기 위해서 도덕적 요청과 관련된 증거를 들이밀어야만 하는가? 간단한 이야기인데요. 그러니까 이런 말이예요. 앞에서 한 말들을 보충설명하고 있는겁니다. 인간은 용서 받아야돼. 자꾸만 인간은 얼마나 못된지 악한 증거들을 신자들에게 내밀면서 이것이 복음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말할 수 있는거냐 하는 거죠.

기독교의 사신을 즉 복음선포를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너무 협소하고 진부한, 그리고 지나친 확신으로 보일 뿐이다. 이러한 해석은, 어떠한 해석이요? 도덕적이고 경건주의적인 그래서 이 죄와 사죄문제를 그 자체로 독립적인 것으로 증거하는 그러한 해석은 인간의 기본적 생명 문제에 도달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러한 해결책으로 자신을 내세우기 위해서 인위적인 문제들만 생산해낸다. 네 그렇죠. 분명한 사실입니다. 뭐 거짓말 하지 말자. 어떻게 하자. 이런 이야기들 있죠? 이런 것으로 생명문제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세상사람들보다 더 바르다 도덕적이다 그런 것들을 자꾸만 부각시키려고 노력하는 거죠. 이게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입니다. 기독교의 근본도 아니죠. 그런데 그게 그럴듯하게 지금 먹히고 있단 말이예요. 조금 우스꽝스럽다고 생각되지 않나요? 미국의 세속적인 복음주의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는거예요.

사랑의 교회가 대표적입니다. 사랑의 교회가 강남지역을 도덕적으로 재무장 시키자. 도덕성의 주도권을 회복하자 이야기하잖아요. 어린 아이들과 같은 이야기죠. 그러니까 유아들, 정서적으로 불안한 그리고 강남에서 살면서 뭔가 한쪽으로 도덕적으로 불안하지만 그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 기독교인들의 종교적, 정서적 요구에 영합하는 주장입니다. 그러한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게 되면 이 신자들은 계속해서 교회에 매달리는 방식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도덕적 주도권을 사실 가질 수도 없거든요. 그건 불가능한 이야기거든요. 다른 사람들보다 거짓말을 약간 덜 할 수도 있구요. 부동산 투기도 좀 덜 할 수 있는데 그러나 거기서 자유로운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자기가 안되는 걸 자꾸만 요구받음으로서 불안해지고 그런 것들을 해소하기 위해서 더 열정적으로 교회에 매달릴 수 있는 거죠.

요새 잠깐 보니까 사랑의 교회가 몇천억을 들여서 교회당을 새롭게 짓기 시작했다고 하네요. 약속 헌금도 받고 하는데 모자란 헌금을 받는데 예정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약정되었다고 합니다. 전체 액수가 얼마인지 모르겠습니다. 한 3천억 정도되는 것 같은데요. 기존 건물과 땅이 있으니까 그 값빼고 천 몇백억이 모자라는데 그것을 교우들에게 약정헌금을 받았는데 훨씬 상회하는 금액을 받았다고 합니다. 옥한흠 목사님도 원로목사님이 찬성하신다고 하구요. 조금 저는 찜찜한 느낌이 드네요. 제자훈련을 한 옥한흠목사님의 그러한 목회 방향이 이 시대 지금 3천억 땅값과 건축, 빚 합해서요. 그러한 교회당 건물을 지을때인가? 제자가 된다고 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 무슨 상관이 있나 납득하기 힘든 그러한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모르겠어요. 앞으로 그렇게 건물을 짓고 조금 더 나쁜적으로 보면 오늘날 대형 마트가 동네 수퍼의 생존권을 다 끊어 놓는것처럼 사랑의 교회가 인근 각처에 있는 작은교회들의 생존권마저 위협하지 않겠나 그런 생각마저 듭니다. 그것에 대해서 뭐 더 이야기할 필요가 없겠죠. 그쪽에 계신 목사님들과 당회원들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을테니까요. 이야기가 더 그런쪽으로 나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도덕성의 주도권을 회복하자는 캐치프레이즈로 특새란 운동을 일으키고 그러한 교회의 정체성을 제시하고 있는 사랑의 교회가 지금 과연 교회 건축문제에 매달릴 때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네. 요기서 한 마디 하고 지나가야 되겠군요. 인위적인 문제들만 생산해 낸다고 하는 요 구절말입니다. 그러니까 신자들이 어떤 도덕주의적이고 경건주의적인 그러한 목표 설정앞에서 불안함을 느끼고 열광적으로 거기에 집착하게 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게 또 조금 반대현상으로 나타나요. 이만하면 괜찮지. 도덕적인 자만심이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보다 더 좀 그래도 낫지라고 하는 자기를 나타내는 겁니다. 사람은 교묘해서요. 무의식적으로도 그러한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렇게해서는 생명의 중심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껍질들인거예요. 사실은요. 그렇게 해서라도 그게 어떤 열광주의적인 큰 힘을 얻게 되면 사람들은 저기에 뭐가 있는가 보다 이렇게 따라가 주고 있는 겁니다.

기독교의 도덕주의, 그리고 죄와 용서를 둘러싼 기독교의 경건주의적인 경향은 니이체에 의해서 反생명적인 것이라고 비판받을 것이다. 신학책을 읽으려면 니이체가 한 말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는 거예요. 책읽기가 쉽지 않는거예요. 요거가 무슨 뜻인가를 설명하려면 또 시간이 많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왜 기독교 경건주의가 반생명적인 것인가? 하는 그러한 질문인거죠. 이러한 질문은 신대원 학기말 시험 논술제목으로 안성맞춤이거든요. 기독교의 도덕적 경건주의가 어떻게 기독교가 정말 가야될 그 생명과는 반대되는 그러한 것이냐에 대해서 자신의 생각을 논하시오. 그렇게 논술제목을 낼 수 있습니다. 더 생각을 해보세요. 진도를 나가겠습니다.

죄를 용서한다는 기독교의 사신이 적극적인 의미에서 생명과 어떤 관계를 견지하고 있는가라는 문제는 생명의 前도덕적** 기초 문제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인식하는 데 달려있다. 역주를 좀 보겠습니다. 금방 니이체가 반생명적인거라고 말한 것과 경건주의 경향, 이런 것과 연관지어서 도움이 될까싶어서 한번 짚고 넘어 가겠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기독교 사신이 생명의 전도덕적 기초와 연관되어 있다고 하는 거죠. 생명의 전도덕적이라고 하는 거요. vormoralisch 독일어 부사입니다. 도덕에 앞서 있다고 하는 겁니다. 역주를 보면 이렇습니다.

**前도덕적(vormoralisch)이라는 말은 생명문제가 도덕적인 차원 이전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는 바로 위의 역주에서 설명되고 있듯이 기독교 신앙을 도덕주의가 아니라 종말론적 부활희망에 둔다는 뜻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구원은 도덕적인 기준으로 선포되지 않는다. 도덕은 목적이라기보다는 결과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구원이 율법의 실행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대망하는 자들에게 열린다는 예수의 가르침에서도 알 수 있다.

분명한 사실이잖아요. 복음서만 꼼꼼히 잘 읽는다고 하더라도 이런 문제는 진작에 해결되는 건데요. 참 그런데도 이러한 기독교 신앙의 사태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거를 보면 우리가 복음서를 진지하게 읽지 않는다. 그냥 스쳐 지나간다. 자기가 필요한 것만 취사선택한다고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성서를 도구적으로 이용하고 있을 뿐이죠. 이 구원의 문제는 도덕적이냐 아니냐하고는 상관이 없다고 하는 것이란 말이예요. 물론 경건주의 도덕주의를 구별하는 사람들도 그렇다고 이해할때가 있어요. 하면서도 여전히 우리가 여전히 도덕적인 주도권 이런 것들을 이야기한다 말입니다.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 이런 사람들에게 너희들 그런 것 그만두고 좀 도덕적으로 살고 기도해라 이런 이야기 안하셨잖아요. 그냥 어떤 형편에 있던지 그냥 내버려 두고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돌아서라 그런 이야기만 했단 말입니다. 하나님과 일치로 돌아서라고 하는 거죠. 종말론적 부활 희망과 연관되는 문제입니다. 요 맥락을 우리가 알아채야 되거든요. 도덕성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결과죠. 부활에 대한 종말론적 희망을 갖고 사는 사람들은 당연히 거기서 어떤 열매를 맺게 되죠. 그건 하나의 consequence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귀결인 거죠. 그게 그게 아니냐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게 그게 아닙니다. 천양지차입니다. 그게 중요해서 제가 다시하면 여기서 열을 내서 강의했습니다.

생명에 대한 기본적인 질문은 죽음의 불가피성에 의해서 제기되었다. 이 불가피성은 모든 인간의 업적과 사상이 죽음의 형벌에 직면함으로써 무의미해질 수밖에 없는 그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죄와 죄책에 대한 기독교적 진술의 심층적 내용은 죽음의 운명을 배경으로 해서 증명되고 있다. 죽음과 삶의 문제죠. 근원적인 문제요.

왜냐하면 이 내용은 우리의 현존이 죽음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자기집착의 결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그게 죄인거죠. 자기집착인 거죠. 그게 죽음으로 귀결되는 거죠.

우리가 우리 자신을 풍요롭게 함으로써 현존적 실현을 추구하고 있지만 결국 모든 것은 마지막에 봉착하며, 모든 것이 마지막에 봉착하게 되죠. 선행도 마지막에 봉착하게 되죠. 또한 우리 자신은 공허하게 되고 불만스러워진다. 죄는 생명을 추구하고 있는 생명의 원천을 혼란케 하는 것이며 오류에 빠져들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혼란은 각각의 인간이 이웃과 하나님과 분리된 자아를 확장시킴으로써 생명을 성취하려고 애쓴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하나님이 생명의 근원이며 생명력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는 생명을 성취하려고 애쓰는 노력을 분쇄시킨다.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는 아무리 생명을 얻으려고 노력해봐도 결국 그것이 다 파괴되는 거죠.

이것의 직접적인 결과는 모든 인간의 현존이 죽음의 형벌로 귀착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죄는 인간 현존의 구성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근본적인 요소로 나타난다. 이제 죄가 어떤 거냐 하는 것이 조금 더 윤곽이 잡히셨죠? 아주 구성적인 요소예요. 그것 빼고는 인간을 설명할 수 없는거예요. 이거는 죽음에 이르는 길이니까요. 하나님과의 분리이구요. 자기집착이구요. 결국 거기서는 생명에 이를 수 있는 길이 없구요. 모든 그러한 노력들은 다 죽음의 형벌로 떨어져 버리고 말죠. 이게 우리가 놓여있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기껏 해봐야 도덕적으로 살아서 모범적으로 하자. 이런 것으로 어떤 생명을 얻을 것으로 이야기한다고 하는 것은 결국 이것은 율법적인 신앙인거죠. 결국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거죠.

이 경우에 우선적으로 개인적인 과오가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전체 인간의 과오에 담겨있는 우리 현존의 도착된 방향설정이 문제다. 좀 더 어려운, 복잡한 문제인데요. 인류 과오, 아담의 죄 이런 것도 연관되고 등등 그렇습니다. 그냥 넘어가죠.

이 전체적인 과오, 인류의 전체적인 과오는 이런 저런 잘못된 태도, 그리고 구체적인 죄책에서 온전히 드러나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도덕적 관점들은 이러한 구체적인 과오를 외면하고 있으며, 또한 인간의 본성을 선하다고 추정하기 때문에 이러한 과오를 근본적으로 피할 수 있는 것으로 판단한다. 사람을 이렇게 도덕적으로 바꾸어 놓으면 뭐가 된다 그렇게 생각을 하는거죠. 굉장히 낭만적인 생각이죠. 그러한 잘못된 것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이 경우에 이러한 과오를 피하는 것이 개인에게 강요되고 있는지 아닌지, 혹은 사회적 태도의 변화를 통해서 추구되고 있는지 아닌지의 문제는 부차적인 것이 된다. 개인윤리나 사회윤리나 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가 되는 거죠. 근원적인 것은 아닌거죠. 개인들은 이러한 사회적 태도의 부정적 결과로부터 벗어나 있다. 기독교적 전망에서 볼 때 분명하게 잘못된 이러한 태도와 죄책들은 특별히 강조되지도 않고 경시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인간 삶에서 극복되어야 할 전체상황에 대한 표현으로 간주된다. 이 전체상황이라는 것은 사회구조의 변화를 통해서 근원적으로 변화되기에는 인간존재의 구성 속에 너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그것이다. 뒷부분에 있는 설명은 어떤 해방신학적인 혹은 정치신학적인 관점의 한계를 지적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사회구조를 이렇게 좀 인간답게 바꾸어나가게 되면 인간을 정말 구원받을 존재처럼 바꿀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기에는 인류전체가 여태까지 걸어왔던 길, 오류의 길, 자기집중의 길이 너무 심각한 거죠. 너무 근원적인 것이죠. 다른 것으로는 사회구조적 변화로서는 인간변화가 불가능하다 그러한 이야기죠. 저는 거기에 동의합니다. 사회구조를 개혁시키고 복지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기독교가 추구해야될 하나님 나라의 차원으로 말하는 것은 근원적인 오류다. 우리나라 민중신학이 그런 입장들을 많이 보이고 있지 않습니까? 민중메시아니즘에까지 이르게 되는데요. 민중이 역사를 하나님나라로 바꾸어 낼 수 있다. 그 동력이 그들에게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천부당만부당한 이야기죠. 민중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이 사회를 바꾸어 나가는 것은 마땅히 필요한 일이나 거기서 인간의 근원적 변화가 가능할 것으로 말하는 것은 너무 나이브한 낭만적인 낙관적인 인간이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주 실질적으로 역사에서 드러나는 거죠.

조금 선정적인 예를 들어도 될까요? 여의도 순복음교회 다니는 분들 다 싸그리 잡아서 하는 이야기는 아니니 오해하지 마십시오. 한국 교회를 기복주의적인대로 몰아가는 그 교회의 중심들은 다 민중이죠. 말하자면요. 조용기목사님이 스스로 자기교회는 민중적인 교회다. 여러번 말씀을 하셨는데요. 네. 오히려 세뇌당할 수 있구요. 쉽게 선동당할 수 있는 사람들이 민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대강 사업이라든지 또 세종시 이렇게 저렇게 여러 가지 복잡하고 말이죠. 등등 이런 것들을 추진하고 있는 이명박 정권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다 민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민중들의 어떤 정치적 경제적 권리를 찾으려고 하는 진보적 정당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지성인들이고 그렇단 말이예요. 이게 이율배반적인 거죠. 제가 쓸데없이 이야기가 옆으로 많이 나온 것 같습니다. 이 죄의 문제가 오늘 여기 판넨베르크의 설명에 따르면 결코 도덕적인 차원에서 우리가 경건성을 유지해야하는 그러한 문제하고는 근본적으로 차원을 달리하는 거다. 그 이야기입니다. 그 새로운 차원은 죽음과 생명의 문제인거죠. 이거는 Vormoralisch 전도덕적인 차원의 문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벌어진 케리그마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일으키신 구원 행위와 구원약속에 대한 우리의 신뢰와 거기에 참여와 희망을 통해서 앞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이라고 하는 이러한 차원에서 죄와 사죄문제를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죠.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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