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 53강입니다. 지금 우리는 죄 문제를 계속 따라가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이 기독교신앙의 전반적인 것을 다루고 있어요. 창조부터 종말까지 전체 이야기죠. 그래서 이 사도신경만 우리가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기독교 신앙의 기본적인 틀을 다 이해하는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죄에 대한 것도 거기에 해당됩니다. 우리가 지난번에 두 번에 걸쳐서 이미 죄에 대해 이야기를 했어요. 51강, 52강을 거쳐 53강으로는 죄에 대해서는 세 번째입니다. 앞에서 한 이야기에서 어느 정도 방향이 잡혔다고 보고 거기서 핵심을 여러분은 어떤거로 생각하셨나요.

일단 최소한 이런 것만은 여러분들이 마음속에 정리가 되어야 합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죄라는 것은 인간을 죄의식 속에 빠져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지향적인 것이다라는 거죠. 인간이 죄인이라고 하는 명백한 사실, 그것을 반복해서 강조함으로서 심리적으로 자기 열패감 이런 것에 빠기게 하려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겁니다. 이런 저런 각도에서 여러번 다뤘어요. 죄인, 그리고 죄를 용서받는다고 하는 그 사죄, 이 관계에 죄라고 하는 것과 사죄, 죄와 사죄가 연관된 문제죠. 하여튼 이 문제, 이것이 요것만 따로 떨어져서만 생각하면 곤란하다고 그랬습니다. 부활 생명과 연관될 때만 이게 의미가 있는거죠. 그러한 연결, 긴장감 이런 것들을 정확하게 붙들고 나가기가 그렇게 만만치가 않습니다. 사실 그것뿐만 아니라 기독교 가르침 전체가 유기적, 주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거죠. 그 유기적 연관성, 그게 어떤때는 직접적으로 닿기도 하고 어떤 때는 간접적으로 닿기도 하고 어떤 때는 아주 굵은 줄로 닿기도 하지만 때는 가느다란 줄로 닿기도 하는데요. 그렇게 아주 세세하게 그런 연관성들을 잘 아는게 필요합니다. 어쨌든 여기 죄문제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될 분명한 사실은 이 죄와 사죄문제가 그것만 따로 떼어놓고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활, 자유, 생명 이러한 분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 것, 그것입니다.

네 한국 교회 형편에서는 이 죄가 아주 비신앙, 아주 불신앙, 비신학적으로 이해되고 있죠. 대단히 병적인 그러한 증세로까지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에 그러한 인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걸 우리가 이런 공부를 통해서 뛰어 넘어야 되죠. 오늘 53강에서 그러한 문제들을 조금더 직접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제가 갖고 있는 판넨베르크 책 207쪽입니다.

하나님과의 분리인 죄가 인간현존을 직접 죽음의 형벌로 몰아간다면 사죄개념은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말하자면 사죄는 죄를 용서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죽음을 극복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일치 가운데 있는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강화시켜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서 제가 말씀드린 그러한 내용을 체계 있게 설명한 겁니다. 사죄란 것은 우리를 좌절 불안 이런쪽으로가 아니라 생명에 대한 희망, 하나님과 일치로 인해 주어지는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강화시켜준다는 거죠. 아주 적극적인 의미입니다. 또 여기서 오해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게 잘된다. 좋다. 용서받았다 그렇게 해서 말이죠. 어떤 죄에 대한 인식 이런 것들이 아주 무의미해져 버리는 그러한 신앙도 건강한 것이 아니죠. 이렇게 우리는 극단적으로 흐를때가 많이 있습니다. 너무 죄의식 속에 꽉 찌든 신앙이 있는 반면에 아예 그런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죄론에 대한 낭만주의적인 접근 이런 것도 있는 거예요. 이것, 무책임한 거죠. 이것도 바람직한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현상이 한국교회에서는 두 방향에서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서로 다른 신앙 같은데 이런 부분에서 일치하고 있어요. 하나가 기복주의적이고 하나는 열광적인 은사주의에 기울어진 신앙입니다. 보통 이제 순복음교회의 신앙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귀신을 쫓아내고 뭐가 잘되고 구원받았고 용서받았고 그런 것들이 그냥 막 싸구려처럼 선포됩니다. 보통 값싼 은혜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거기에는 죄에 대한 기본 통찰이 전혀 없습니다. 개인적인 부분에서나 사회적인 차원에서나 전혀 그런 것이 없습니다. 만사형통입니다. 그냥 믿기만 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어 버리는 그러한 쪽으로만 있습니다. 심판이 없는 사랑만 강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거는 죄 낭만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한쪽은 지성적인 교회에서 나타나는 신앙형태입니다. 그러한 교회는 뭐 죄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전혀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죠. 해봐야 그거는 사회적인 죄, 역사 정의를 세우기 위한 투쟁, 이런 쪽으로만 나가게 되죠. 자기 자신의 실존적인 죄책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무감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쪽으로 가는 거는 죄, 사죄문제가 결국은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강화시켜준다는 말하고는 조금 다른 차원이다. 잘못한 것과는 다르게 조금 왜곡된 형태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계속 볼께요.

이러한 해방하는 희망은 확실히 현재의 삶에서 이미 작용하고 있다. 이런 한에서 윤리적 전망은 진실한 것으로 남는다. 지금 설명이 당연하죠. 생명에 대한 희망을 알게 되면 결국 희망이 나중에 죽은 다음에 어디 간다고 하는 것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이 안에 삶에 개입해 있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그 희망을 안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하는 그러한 문제를 책임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그 이야기예요. 윤리적 전망은 진실한 것으로 남는다. 그 이야기예요.

인간의 태도 가운데서, 그리고 그 공동의 삶 가운데서 무엇이 변화하는가라는 점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왜 그런지를 설명하는 거예요. 뒤에 들어보십시오. 휴머니티의 일들은 윤리적 행위로 해결되는 게 아니다. 윤리적 목표를 명확하게 설정하지 않는 한 휴머니티가 현실적으로 성취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다행스럽게도 사실이 아니다. 이 말은 요. 다음과 같은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정치 경제 민주화가 구체적으로 어디까지 가야된다고 하는 목표 이런 것이 있어야만 휴머니티가 성취된다고 하는 말은 그거는 사실이 아니다라고 하는 거죠. 이거는 우리가 받아들이기 싫을지도 모르겠지만 사실이니까요. 군사독재하에서도 휴머니티는 가능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회에서도 휴머니티는 가능한 거예요. 그게 목표가 분명해야만 휴머니티가 성취되는 것이 아니죠. 더 나아가보겠습니다.

오히려 윤리 행위와 윤리 의식은 이런 점에서 종교적 주제의 핵심인 인간의 휴머니티를 항상 전제하고 있다. 결국은 목표에 대한 설정의 문제라기 보다도 종교적 주제로서 휴머니티를 생각해야 된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추상적인 도덕주의적 지평이 아니라 바로 이런 지평에서, 종교적 주제로서의 휴머니티라는 차원에서 죄와 사죄에 대한 기독교적 진술의 의미와 영향력이 기초되어 있다. 이런 의식은 죄와 사죄가 생명과 죽음에 대한 질문과 어떤 관련성을 맺는지 주시할 수 있을 때만 항상 늘 획득될 수 있다. 네 그 다음 패러그래프입니다.

죄의 용서에 대한 기독교 사신, 사신이라고 하는 말이 다시 나와있는데요. 제가 이 책을 번역할 때 독일어로 보드샤프트. 그걸 정확하게 우리말로 번역하기 어렵습니다. 그게 어떤 사신, 사절 국가 외교관계 사절로 나가잖아요. 그런 행위, 사람, 총체적인 의미를 담고 있어요. 기독교의 사신이라고 한다면 기독교가 전하는 복음의 내용과 행위, 이걸 다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걸 어떻게 다 우리나라 말로 한 단어로 묶어서 내기가 힘든거죠. 기독교의 복음, 복음이라고만 해도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복음은 다른 단어가 있는 거예요. 유앙겔리온, 유앙겔리움이 있습니다. 하여튼 사신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복음의 내용과 행위 총체를 가르킨다고 그렇게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죄의 용서에 대한 기독교 사신의 근원은 바로 이런 질문의 지평에 놓여 있다. 예수가 어떤 사람에게 사죄를 선언했을 때 그가 말하고자 한 바는 이 사람이 도래하는 하나님 통치의 구원에 참여하게 된다는, 그래서 죽은 자의 부활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사죄와 생명의 관계를 이해하시겠죠. 예수님이 네 죄가 사해졌다 이러한 이야기를 했을 때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굉장히 분개했어요. 그거는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건데 경거망동도 유만 부득이지 저 친구가 저럴 수가 있느냐 신성모독이다. 그렇게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신성모독을 할 생각도 없고 그거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입니다. 사죄의 근원적인 의미를 이 사람에게 선포한 것뿐이죠. 그 다음에요.

예수는 하나님의 미래에 대한 신뢰, 즉 하나님 통치의 도래를 향한 단호한 방향선회가 바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한 모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것을 선언할 수 있었다. 아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복음이죠. 복음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복음의 엑기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은 단 한가지라고 하는 거죠. 율법은 한 가지가 아니라 수백 수천가지였어요. 그걸 다 행할 수가 없는 건데요. 그 율법의 짐으로 유대인들은 숨을 쉬기 힘든 거죠. 그런 것들을 다 배척하고 오직 한 가지 사실만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으로 제시한 겁니다. 회개하라고 하는 거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 회개하라. 메타노이아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은 방향선회예요. 하나님을 향해서 돌아서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에게 돌아서라고 하는 말을 사람들은 자꾸만 교회 나온다. 옛날 잘못한 것 회개한다. 이런 씩으로 생각합니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근원의미를 놓치면 안되는 거죠. 하나님을 향해서 돌아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미래를 신뢰한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온다는 것을 신뢰하고 그쪽을 향해서 모든 영적인 관심을 돌리는 거죠. 그 하나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가장 핵심적인거죠.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이런데서 보면 너도 이와같이 해라 등등 말씀들이 있기 때문에 어떤 윤리적 행위 이런 것들도 요구하시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일단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러나 그것은 차원이 다른 겁니다. 이건 다른 성질의 이야기인거예요.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 하나님의 미래를 온전히 신뢰하고 그 분의 통치가 가까워 온다는 사실을 향해서 방향을 선회하는 것 그거 한가지입니다. 사죄를 통해서 우리는 그것을 경험할 수 있는 거죠. 사죄는 바로 거기에 참여했다고 하는 의미예요. 그런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이웃들을 향해서 개방하는 거죠. 자기를 여는 거죠. 선한 사마리아사람의 비유에서 핵심은 바로 그거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돈을 얼마 들여서 얼마나 했다. 아니면 제사장과 사두개인인가요. 그런 사람들이 강도만난 사람을 못본척 했다고 하는 그 이야기에서 얼마만큼 더 휴머니티가 있느냐 없느냐. 아 요 말은 정확하지 않기 때문에 삭제하고요. 그게 좀 애매해서요. 지금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미래를 향해서 영혼을 돌린 사람은 이웃을 향해서 개방적일 수 있는 겁니다. 개방적인 것이 휴머니티하고 얼마나 같으냐? 틀리냐 하는 것을 제가 지금 구분하지 않고 말하면 더 혼란스럽기 때문에 말을 거둬들인 거예요. 종교적 주제에 근거한 휴머니티를 이야기해야 되는 거죠. 예수님은 한 가지 사실만 사람들에게 선포한 거구요.

하나님의 미래를 의지하는 자는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해도 좋았다. 그를 살아있는 하나님에게서 떼어놓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모든 것은 거기서 극복되었다. 임박한 하나님 나라의 사신을 받아들이는 자는 이로써 이미 죄를 용서받은 것이다. 예수를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한 이로 믿고 받아들이는 자는 생명의 미래를 차단하는 과거의 짐으로부터 자유하다. 따라서 사죄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미래에 대한 신뢰의 결과이며, 하나님의 구원이 실현될 미래를 현재의 삶으로 끌어오는 불빛이고 미래에 실현될 구원의 여명이다. 지금 읽은 문장이 참으로 중요하네요. 밑줄치고 외워두어야 될 정도의 의미가 있는 구절입니다. 다시 읽어 볼께요. 따라서 사죄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미래에 대한 신뢰의 결과이며, 하나님의 구원이 실현될 미래를 현재의 삶으로 끌어오는 불빛이고 미래에 실현될 구원의 여명이다. 번역도 좀 잘 한 것 같군요. 이처럼 사죄는 이미 현 상황에서 전개되는 새로운 시작의 자유이며, 또한 과거를 새롭게 인식하는 자유다. 사죄를 통해서 얻게 되는 선물은 현재의 순간을 완전히 긍정할 수 있는 자유이며, 또한 성취된 미래를 확신할 수 있게 하는 자유다. 네 과거, 현재, 미래 이런 것들을 관통해서 생명과 닿을 수 있게 하는 기도교 교리중의 하나가 사죄이죠. 이 얼마나 다이나믹합니까? 얼마나 귀한 가르침이겠어요. 이런 것들이 거의 형해화되어서요. 신자들의 약점을 지적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어요. 한국 교인들의 심리를 정확하게 분석하면 병적인 요소가 많이 있을 겁니다. 특별히 죄 문제와 연관해서 그렇습니다. 그 다음 패러그래프입니다. 오늘 이 장을 다 끝냈으면 좋겠는데요. 오늘 다 마치지 않고 좀 부족하고 다 하기에는 좀 많은 것 같기도 하구요. 일단 마치는게 낳겠죠. 읽어보겠습니다.

사죄를 통해서 자유가 확실하게 보장된다는 의미는 인간이 자기 스스로는 자유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중요한 관점입니다. 인간 스스로는 무슨 방식을 통해서로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전제하는 이야기죠. 이러한 사실은 개개인이 자유롭게 선택해서 획득한 자기 확장이 더 이상의 조치 없이도 현재적으로 자유를 실현할 수 있는 곳에서만이 아니라 인간에게 자기 해방의 과업이 이루어진 곳에서도 역시 전제된다. 복잡한 말 같은데 단순한 이야기입니다. 단순하다기 보다도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선진국이 되고 뭐 우리가 공부를 해서 지식인이 되고 이런 자유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고요. 근원적은 그러한 것들이 해결되어야만 우리가 인간들이 만들어가는 자유의 영역들이 실질적 의미를 확보할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더 읽어 보겠습니다.

해방*을 통한 자기해방, 즉 자유를 침해하는 모든 연결고리를 해체함으로써 얻게 되는 자기해방은 인간이 자기 스스로 이미 자유로울 경우에만, 그리고 자신의 자유를 실행하기 위한 외적 상황이 나빠서 그것이 방해받을 경우에만 의미심장한 요구가 될 수 있다. 그렇죠. 감옥에 가있는 사람들에게는 감옥에서 실제적으로 나오는게 자유로와 지는거구요. 실제적으로 우리안에서 자유로울 때 그러한 외부적인 자유들이 의미가 있게 되는거죠.

*해방을 통한 자기해방 (Selbstbefreiung durch Emanzipation)이라는 말은 어떤 정치, 사회적인 의미의 해방(Emanzipation)을 통해서 인간존재의 자유로운 상태라 할 자기해방(Selbstbefreiung)에 이른다는 말인데, 판넨베르크는 인간의 자기해방이라고 하는 것이 이러한 정치, 사회적인 조건이 바뀐다고 해서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사죄사건이 그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자유하지 않다면 삶의 영역이 아무리 확장된다고 하더라도 자유와 해방을 경험하지 못한다. 이 근본적인 자유는 하나님이 용서를 선포함으로써 주어진다. 오늘 우리는 현대인의 삶에서 정치, 사회적 해방의 영역이 넓어졌지만 여전히 자유하지 못한 현실을 발견한다. 이런 점에서 인간의 자유에 이르는 길이 바로 사죄라는 말은 인문학적으로도 역시 설득력이 있다.

만약 인간이 이러한 방식으로 자유 할 수 있다면, 오늘날 우리가 흔히 경험하고 있는 것처럼 자신의 모든 성향과 욕망을 모두 소진시켜버리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이 바로 자유를 확장시키는 권리라고 간주될지 모르며, 또한 자기를 확장시킬 수 있는 여러 상이한 관심들이 모두 타당한 것으로 다루어질 지도 모른다. 현대에서 사람들이 자유하고 싶어서 소비하고 집들 늘리고 많이 하잖아요. 그런 것이 정말 자유인 것처럼 왜곡될 수 있다고 하는거죠. 그러나 이런 경험이 가르쳐주고 있는 바는 다음과 같다. 서로 다른 인간들이 자기를 확장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상호간 충돌하게 될 뿐만 아니라, 이런 요청들이 기대한 만큼의 만족이 아니라 단지 대용품만을 획득하게 되며, 따라서 당연히 인간으로 하여금 생명을 진실하게 성취할 수 있는 기회를 강탈해간다고 말이다. 만약 인간이 자기를 실현하고자 하는 그 길이 오류라고 한다면 -그리고 이것이 죄라는 낱말을 가리킨다면- 그 길들은 분명히 참된 자유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 자기확장, 자기집중이 죄잖아요. 그러니까 자유에 이르게 하지 못하잖아요.

참된 자유는 사람들에게 우선 선물로서 주어지는 게 틀림없으며, 순간적인 상상의 필요성이나 자기에게서 이미 이루어진 것과는 달리 외부로부터 열려야만 한다. 이게 피조물의 한계죠. 피조물은 내부에 존재의 근거를 갖고 있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내부, 자기안에서 아무리 노력해서 찾으려고 해도 가능하지 않죠. 아 물론 선승들이나 도인 이런 사람들은 자기 내부에서 자유롭지 않느냐 말할 수 있습니다. 아 우리가 거기까지 이야기하기 힘듭니다. 과연 그들이 경험한 것들이 참된 자유냐 아니냐 하는 거는 더 논의가 필요한 거구요.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논리가 있을테니까 하도록 내버려 두고요. 우리는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인간에게는 그런 것이 가능하지 않다고 알고 있고 또 그게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영적인 상황에 대한 거대담론만이 아니라, 이미 전체 근대 모더니즘에서 다루어진 질문이다. 자유가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는 질문이다. 즉 인간이 스스로에게서 이미 자유로운지 아닌지, 혹은 그가 참된 자유에 참여하기 위해서 스스로에게서 해방되어야 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질문이다. 참된 자유에 참여하겠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이 죄의 용서를 진술할 때 고백되는 사실이다. 그렇죠. 자유의 차원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거죠. 이것은 인간이 자기 스스로에게서 자유한 게 아니라 우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참된 자유에 도달한다는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칭의론에 담겨있는 핵심 내용이다. 그런 내가 스스로 의로워 지는 것이 아니라 의롭다고 인정받는거죠. 나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가 나에게 전가되는 거죠. 이러한 종교개혁자들의 칭의론이 단순히 교리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큰 근대주의의 인간론과 깊이 연관되어 있는겁니다. 해방하는 약속의 내용으로서 종교개혁은 죄의 용서를 제시했다. 이처럼 종교개혁의 칭의론은 우선 죄의 용서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다는 약속에 대한 신뢰를 통해서 인간이 자유를 획득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이 자유는 우리 자신의 피안에서 밖에서 (extra nos)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그의 계시 가운데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참된 자기를 위해 인간을 해방시키는 자유다. 참된 자유가 바로 그렇다고 하는 거죠.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자유가 주어진다는 칭의론의 중심 테제를 통해서 인간은 스스로에게서 이미 자유하다는, 당시에 이미 활동적 경향을 보였던 근대적 자명성과 대립적인 입장에 섰다. 네 그렇죠. 인간의 자율성, 스스로의 자유가 가능한 능력 이런 것에 대해서 근대주의에서 얼마나 많이 이야기를 했습니까? 그런 것하고 종교개혁자들의 입장은 대립적이다라고 하는 거죠. 그렇다고 해서 종교개혁이 이런 상반된 이해를 통해서 근대의 자유론과 무조건 대립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칭의 신앙이 말하고자하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은 사회적으로 인가된 이념적 세력에 맞서 개인의 자유를 신장시키려는 가장 강력한 충격으로 작용했다. 이를 통해서 이 확신은 정치적 자유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역할을 감당했으며, 동시에 기독교 전통과 전투적인 교회가 무조건적으로 요청했던 권위주의에 대한 계몽주의의 전통비판에서도 역시 획기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네 큰 틀에서 근대주의 흐름과 종교개혁자들의 그 관점이 서로 어떻게 충돌되고 연관이 있는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자유에요. 자유. 기독교 전통 특별히 종교개혁자들의 관점, 가르침에 의하면 이 자유는 사죄에 의해서 주어지는 우리 바깥에서 주어지는 것이라고 본 반면에 이 자유주의적 근대주의자들은 인간 스스로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고 한 점에서 대립적인 입장에 있는거죠. 그러나 대립적인 점만 크게 강조할 것만 아니고요. 결국 그러한 방식으로 개인의 자유를 신장시키는데 크게 역할을 했다고 하는 겁니다. 아 그게 교리사적으로 좀 복잡한 문제인데요. 근대주의 자유사상가들이 말하는 그것하고 종교개혁자들이 말하는 것하고 또 로마가톨릭교회가 말하는 그러한 것들이 이렇게 저렇게 얽히고 설켜 있는 거예요. 그런 점에서 이제 일반 근대주의 자유사상가들과 종교개혁자들이 만나는 지점도 있고 갈라지는 지점도 있고 합니다. 그런 여러 가지 맥락에서 종교개혁자들이 인간 자유를 신장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거죠. 네 교회의 억압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니까요. 행위로부터 자유니까요. 믿음으로서 구원이 은총으로 주어진다고 하는 그러한 관점들을 제시해 주었으니까요. 더 이상 교황, 교회가 아니라 성경만이 신자들의 삶을 규정하는 규범으로 제시되어 있으니까요. 얼마나 많은 자유의 영역이 열려있는지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큰 역할을 했다 그 이야기죠.

이 경우에 나름대로 여전히 전통과 연결되어 있는 칭의 신앙의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종파투쟁을 불거지게 한 인식, 즉 하나님에 대한 '자연적인' 인식의 확신으로 대체됨으로써, 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곧 이성의 자기 확신에 속한 기초를 말하는데,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확신은 결국 인간의 단순한 투사로서 나타났으며, 또한 이로 인해서 인간에게 이미 주어진 신적 현실성에 내재한 자유의 근거가 그 토대를 상실하게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의 근거는 인간을 우선적으로 자유하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종교개혁자들이 좋은 출발점을 갖게 되는데 그 다음에 종파끼리의 싸움 투쟁, 이런 거를 불러오게 된 하나님에 대한 자연적 인식, 이런 것 등등으로 인해서 복잡해졌다. 문제가 잘 해결되지 못했다. 그 이야기입니다. 교리사적으로 좀 복잡하기 때문에 좀 넘어가도 되겠습니다.

이로써 자유의 원리는 결국 절대적인 진리 없이 임의적인 것으로서 나타나게 된다. 조금 흔들린거죠.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인간의 해방에서 종교적 토대가 제거된다면 자유는 개인의 자유의지와 더불어 붕괴될 것이며, 또한 자유가 외부적 구조로만 생각되기 때문에 이미 소유했다고 추정되는 자유와 더불어 붕괴될 것이다. 더구나 무절제한 자유방임적 방종은 틀림없이 자유의 원리를 불확실하게 만들 것이다. 이와 달리 사죄를 받음으로써 하나님을 확신하는 데서 나오는 자유의 토대는 최소한 우리의 문화환경 가운데서 자유로운 사회를 지속시키는데 요긴한 효소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요소가 아니라 효소죠. 발효시킨다는 거죠. 이 효소는 그 종교적 근원이 살아 있는 한 세속적 현상 형식을 통해서 여전히 지속적으로 작용하게 되는 그것이다. 요 패러그래프 중간서부터 좀 복잡해졌는데 그냥 넘어갑시다. 앞서 말씀드린 그런 내용들이예요. 16세기 종교개혁자들에 의해서 주어진 그러한 가르침들이 종파전쟁등등으로 얼키고 설키면서 조금 자리를 잡지 못했다고 하는 겁니다. 어쨌든 사죄,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사죄는 실질적으로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고 세속사회에서도 자유의 영역을 확장시킬 수 있는 효소로 작용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겠네요. 그거는 기독교 교리를 일방적으로 말하는 것이지, 신앙적 입장일 뿐이지 사회인문학자가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고도 생각할 수 있는거죠. 프로이트나 니체라든지 등등 이런 사람들의 정신분석, 막스 같은 사람들의 사회, 정치경제의 발전 이런데서 보면 종교를 인간의 자유와는 거리가 먼 것처럼 받아들여질 겁니다. 그거는 유럽사회에서 현상적으로 나타난 종교라는 점에서 그러한 비판을 받을 소지가 충분히 있습니다만 근본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죠.

제가 예를 들어서 설명할 필요는 없겠죠. 그래도 한가지만 말씀드릴까요? 막스가 주장한 프롤레타리아 혁명보다 더 극단적인 휴머니즘은 없잖아요. 그는 정말 가난한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위해서 역사를 분석하지 않았습니까? 대안을 제시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을 근거해서 몇백년동안 전세계가 공산주의 혁명을 경험했잖습니까? 여기서 꼭 공산주의라고 말붙이지 않아도 사회주의가 거기에 다 포함되는 겁니다. 막스가 끼친 영향은 큰거 예요. 그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게 현실 사회주의에서요. 공산주의예요. 볼세비키 혁명이후로 일어났던 그러한 현실사회주의에서 정말 휴머니즘, 휴머니티를 끌어올리는 그러한 힘으로 작용했는가 하는 그러한 질문이 가능합니다. 시작은 그렇게 했는지 모르지만 실제로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공화국, 동유럽에서 그렇지 못한 일이 많았잖아요. 물론 자본주의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건 자본 주의가 우월하다. 지금 현실사회주의가 다 망하고 명분만 몇나라에 있다고 하는 것으로 자본주의가 훨씬 더 인간의 삶을 복되고 하고 자유롭게 한다고 하는 것을 단정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노골적으로 인간의 해방, 자유, 이런 것을 기초로 내걸었던 막시즘, 소샬리즘, 커뮤니즘, 이렇게 결정적으로 그렇게 되었다고 보기는 힘든 거거든요.

결국 무엇을 이야기하는 거냐? 인간의 자유와 해방이라는 것이 외부적인 조건이 충족되는 것으로 완전히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거죠. 그것은 기독교적인 관점에서는 다른데서 주어지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자유, 해방으로 들어가는 것이 바로 사죄인 것이죠. 하나님의 미래를 향해서 우리의 영혼의 방향을 돌리는 거죠. 이러한 기독교적인 개념하고 정치 사회적인 그러한 개념들을 같은 선에 올려놓고 단순비교하기는 힘듭니다. 그러나 그 안에 들어있는 내용들을 같이 우리가 연결해서 생각하면 비교 못할 것도 없습니다. 결국은 인간의 자유 해방 이런 문제들 아니겠습니까? 네 역주는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제가 설명한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이제 마지막 한 패러그래프 남았군요.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하는 이 책의 제13장의 마지막 패러그래프입니다.

사죄에 대한 기독교의 신앙고백을 옳게 해석했다면 이것은 곧 참된 자유에 대한 보증이며, 또한 이로써 확보된 인간의 휴머니티에 대한 신뢰다. 밑줄치고 몇 번 반복해서 읽어야 하고 또 거의 외워두어야 될 만큼 중요한 문장입니다. 이 문장만 정확하게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기독교 죄론, 그리고 인간론, 자유론 뭐 이러한 등등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거죠.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사죄에 대한 기독교의 신앙고백을 옳게 해석했다면 이것은 곧 참된 자유에 대한 보증이며, 또한 이로써 확보된 인간의 휴머니티에 대한 신뢰다.

이것은 신앙에 터한 자유가 인간에게서 물러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인간 자신을 향하게 됨으로써 가능하다. 용서받음으로서 자유가 우리로부터 떠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유가 우리에게 주어진다고 하는 거죠. 물론 어떤 죄에 대한 고백은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틈을 의미한다. 그렇죠. 자기의 죄성에 대한 깊은 통찰, 틈이 있죠. 이것은 확실히 이 의미의 한 측면일 뿐이다. 자기부정, 죄에 대한 깊은 통찰도 자기부정이니까 그게 없는게 아니죠. 그러나 그것은 사죄론의 한 측면이다. 죄의 고백은 자기 자신을 뛰어넘어 그것에 대해 책임질 준비가 되어있다는 표현이며 자기 자신에 대한 고백이다. 이렇게 본다면 기독교의 죄의식*은 자기 부정이거나 反생명적인 표현이라기보다는 반대로 자기 왜곡 앞에서 생명을 긍정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기독교 죄의식이 결국은 생명에 대한 긍정이라고 봐야 한다는 거죠. 죄의식, 역주를 달았습니다. 죄의식, 이게 강의 제가 시작하면서 말한 죄가 심리적으로 인간의 삶을 파괴할 염려가 많이 있는 대목이거든요. 보겠습니다. 역주요.

*전통적으로 기독교의 죄의식(S?ndenbewußtsein-진덴베부스자인)은 일종의 숙명주의와 강하게 연결된다. 인간이 어쩔 수 없이 죄(원죄, 혹은 유전죄)에 묶여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인간의 모든 행위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거나 억압하고 있는 이러한 죄 이해는 교리사적인 면에서 볼 때 콘스탄틴 이후로 교황과 로마 황제가 유럽을 지배하던 중세기에 민중들을 반개혁적이거나 반혁명적으로 길들이는 데 매우 유용한 도그마로 발전된 것으로 보인다. "너희들은 태어날 때부터 어쩔 수 없는 죄인이다. 그러니 황제나 교황이나 귀족들의 잘못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큰 소리 치지 마라." 이런 식이었다. 이런 점에서 맑스나 니이체 등이 기독교를 반동적이라고, 혹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빠져있다고 비판할 여지가 있다하겠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프로이트가 이야기했겠죠. 판넨베르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기독교의 죄론(사죄)이 일종의 도덕주의이거나 죄책에 의한 부자유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생명과 자유, 그리고 해방 지향적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죄의식은 통렬해야 됩니다. 앞서 지적했듯이 그건 낭만적으로 생각하면 안되는 거예요. 거의 자기 부정에까지 이르러야 되죠.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이라고 하는 것에까지 도달해야 됩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의 죄 고백, 그것을 통한 사죄경험이라는 것은 생명에 대한 긍정이다. 그렇죠. 분명히 죄의 고백은 자유의 행위이다. 왜냐하면 참된 자유는 책임적인 자유이기 때문이다. 한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책임적인 존재가 됨으로써 자신과 일체가 된다. 따라서 자유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러나 어떤 생명계**에 대해서, 그리고 그에게 발생하거나 간과되는 모든 것에 대해서 책임질 준비가 되어있는가라는 기준에서 측정된다. 중요한 대목을 마지막 부분에서 다루어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죄가 자유인데 그것은 방임이 아니라 책임까지 연결되는 거죠. 요렇게 머릿속에 정리하십시오. 죄, 사죄, 자유, 책임이 되는 거죠. 죄에 대한 통렬한 인식, 그 다음에 고백으로 우리가 사죄를 얻고 사죄는 곧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희망인데 결국 거기서 참된 자유가 주어지는 것이고 그 자유를 경험한 사람은 결국은 그것은 곧 책임, 생명계, 자기자신 모든 이웃들을 향한 책임까지 수반한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생명계(Lebenskreis)는 함께 생명의 유기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주변 환경 일체를, 말하자면 인간사회, 국가, 인간 종, 자연에 이르는 모든 생명권을 뜻한다. 기독교의 죄고백이 바로 이런 생명계에 대한 책임의식이라고 하는 판넨베르크의 지적은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 붕괴되는 오늘날, 그리고 유기적 세계관이 다시 요청되는 오늘날 교회가 새겨들어야 할 신학적 가르침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고립된 개체로서가 아니라 사회와 인류의 구성원이라는 점에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생명계 안에 있는 과오에 대한 죄책을 다른 이들에게서 찾는 것만이 아니라 그 죄책과 책임감을 스스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획득한다. 이 안에서 그는 자기의 생명 영역과 일치하며, 또한 자신을 향한 개혁의 과업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분명히 죄의 고백은 용서를 통해서 극복되어야할 부자유를 가리키는 것이 결코 아니다. 부자유는 오히려 자기의 죄와 공동책임을 배제하고 거절하는 데서 나타난다. 네 참 중요한 대목입니다. 책임지지 않으려고 하는 거죠. 부자유한 거죠. 자유는 책임에까지 나가는 것인데요. 자기의 죄에 대한 분명한 인식은, 이것이 자기 자신을 극단적으로 의심하는 경우가 아닌한 용서에 대한 확신에서 가능할 뿐이며, 자기 자신도 용서하고 또 이웃도 용서하겠죠. 또한 이 인식은 죄의 용서로 인해 드러날 그 자유가 무엇인지 매우 분명하게 깨닫게 한다. 네. 여러 가지 단어들이 이렇게 엉키면서 기독교의 진리를 확 드러내고 있는 문장들입니다. 한번 딱 읽고 무슨 뜻인지 금방 알아채리기는 좀 힘들겠죠. 네 이런 책들은 몇 번에 걸쳐서 반복해서 꼼꼼하게 생각하면서 읽어야 될 겁니다. 그리고 마음이 안정되었을 때 읽어야 되요. 그냥 심심하니까 읽어보자 이런 방식으로는 이런 방식으로는 안될 것 같네요. 물론 심심하다는 말도 목표 의식이 없기 때문에 영적으로 이렇게 부드러워져서 이 말들이 잘 들어올 수 있는 계기가 되기는 합니다. 어쨌든 우리의 마음이 어디에 붕 뜨지 않고 잘 가라앉아 있을 때 읽어야만 들어올 수 있는 내용이죠.

네 우리가 3번에 걸쳐서 이 판넨베르크의 책 13장,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대목을 공부했습니다. 한국 교회를 배경에 놓고 볼 때 아주 중요한 대목이었어요. 요걸 제가 설명을 얼마나 정확히, 설득력있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조금 전달이 되었다면 이 죄 문제가 한국교회에서 얼마나 왜곡되었는지를 눈치채셨을 겁니다. 여러분들 기독교 교리에 대해서 자신감을 가져도 좋아요. 그렇게 우스운 게 아니거든요. 그냥 쉽게 어떤 필요성에 의해서 툭 튀어나온 것이 아닌거든요. 깊은 영적인 통찰, 역사에 대한 이해, 수많은 시행착오, 마치 자연과학이 주욱 어려운 과정을 통해서 이렇게 발전해왔듯이 기독교 교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인 과학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제가 정확하게 표현한 것 같군요. 신학은 혹은 신앙은 Spiritual Science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 몰라서 그렇지 알기만 한다면 우리는 현대 그 어떤 시대정신의 도전앞에서도 그렇게 크게 겁먹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죄와 사죄는 자유와 책임이다. 이게 13장에 대한 공부를 마치고 제가 여러분들에게 드리는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겠습니다. 수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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