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54강입니다.

판넨베르크 책으로는 제14장이 되겠어요. 전체 14장이 있죠. 그러면 이제 인제 마지막 챕터가 되는 군요. 1장은 ‘나는 믿습니다’로 시작되구요. 지금 우리가 다시 시작하는 14장, 마지막장은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한 제목입니다. 그러니까 사도신경은 나는 믿습니다로 시작해서 그 뒤에 있는 것들도 다 믿는 내용이죠. 마지막으로 믿는 내용이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은 말 그대로 사도들의 믿음을 구성하고 있는 내용을 가르키는 거죠. 이거 전체는 다 ‘나는 믿습니다’입니다. 그런 형식으로 되어 있어요. 기본적으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거죠. 창조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입니다. 뒷부분에 성령과 더불어서 교회가 나오죠. 그리고 성도간의 교제도 나오고요. 이런 것들도 다 믿음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하고 또 교회를 믿는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거죠. 그거는 우리가 앞부분에서 이야기할 때 거론한 거니까 오늘 여기서 더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마지막 장이라서 제가 전체 구조를 정리한 겁니다.

믿음이에요. 무엇을 믿느냐 하면 서 그것을 차례대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창조자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것으로 시작했고요. 마지막으로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예. 마지막이 몸의 부활과 영생이라고 하는 사실은 근원적으로 의미가 있죠. 기독교의 신앙의 핵심이 부활과 영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들에게 주신 선물, 혹은 그에게서 일어난 참된 구원과 부활은 영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연결되는 문제죠. 부활이 바로 영생이구요. 부활을 통해서만 영생을 얻을 수 있고요. 그 영생은 곧 부활입니다. 이런 이야기야 우리가 늘 들었기 때문에 특별히 제가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그걸 우리가 안다는 것하고 우리가 그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거하고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제가 앞에서도 여러 번 반복해서 말씀 드렸을 거예요. 기독교 신앙의 하나의 형식을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이는 거하고 그 형식이 담고 있는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거하고는 다른 겁니다. 그 안에 들어가야만 영성이 확보되는 거죠. 영적인 삶이 거기서 가능한 거죠. 네 오늘 마지막 장, 14장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그거를 2,3주 걸리겠죠. 양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고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고해서 진도는 좀 천천히 나가야 되지 쉽습니다. 제가 녹음을 하고 있는 날짜가 봅시다. 12월 11일이거든요. 대림절 둘째 주 밤을 보내고 있습니다. 금요일 저녁입니다. 금년 안에 이거를 다 끝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데요. 그렇다면 우리가 3번 정도 우리가 할 기회가 있을 것 같습니다. 가능하면 금년 안에 다 마치고 내년부터는 다른 공부를 해야 되겠어요. 어떤 것을 해야 될지 제가 구체적으로 생각은 했는데 결정하지는 않았습니다. 나중에 따로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내용은 길지 않지만 그래도 내용 길이만 본다면 두 주 정도면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좀 이렇게 게으름 피우지 않고 죽죽 나가면 두 주 정도면 될 것 같은데 그러나 내용이 워낙 중요하기 때문에 3주 정도 좀 천천히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그 제목을 먼저 생각해 보시죠. 몸이 다시 사는 것, 말 그대로 부활입니다. 그냥 산다고 이야기하지 않고 몸이 다시 산다고 이야기했어요. 여기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거죠. 사도신조가 그렇게 몸이 다시 산다고 표현한 것은 그 당시의 여러 가지 주변 사상들과의 논쟁을 전제하는 겁니다. 오늘 공부하게 될 내용에 나오겠지만 그래도 지금 제가 제목을 설명하면서 한번 암시적으로나마 짚고 넘어가야만 되겠네요. 플라톤이 이야기하는 이원론적인 영육분리, 죽음을 통해서 인간이 몸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나는 그러한 영원한 생명하고는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몸이 다시 사는 것을 이야기한 것이예요. 이게 참 우리의 생각을 새롭게 하지 않으면 이것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몸이 다시 산다고 할 때 이게 뭐냐 하는 거죠.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몸, 이 단백질 덩어리의 몸이 다시 산다는 말이 아니겠죠. 죽으면 다 썩습니다. 불에 타면 다 타버리죠. 부활도 이렇게 불에 타거나 썩게 될 이러한 몸이라고 할 수 없겠죠. 그렇다고 해서 혼령처럼 그냥 시공간과 아무 상관없이 있는 그러한 어떤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니겠죠. 이 몸이 뭐냐는 것에 대한 성서의 설명, 혹은 성서의 세계를 우리가 세밀하게 따라가지 않으면 혼란스러워 집니다.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주변 역사, 사상, 주변의 여러 가지 세계관들과 아무 상관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고 한다면 그러면 우리가 이해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게 아니거든요. 이렇게 얽히고 저렇게 얽힌 역사의 틈바구니 속에서 아주 고유한 방식, 혹은 고유한 길을 통해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주변에 있었던 여러 가지 세력, 세계관 사상을 우리가 어느 정도 따라가지 않으면 바르게 이해할 수 없는 거죠. 이거는 그렇게 복잡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렇게 예를 들어도 되겠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지난번 참사라고 해야 되나요. 서거, 사건을 볼 때 고것만 갖고는 생각할 수 없잖아요. 부엉이 바위에서 몸을 던져 죽었다. 그거는 그의 죽음을 그냥 아주 간략하게 서술하는 겁니다. 그것을 갖고서 그의 죽음을 다 이해할 수 없는 거잖아요. 오늘 한국의 정치적인 상황들, 그 상황이라고 하는 것도 아주 복잡한 거고 말이죠. 정부 이양과 등등 여기에서 벌어지는 온갖 종류의 헤게모니 투쟁들, 한국 사회에 있었던 검찰의 문제들 말이죠. 국세청과 검찰, 정부 이런데서 벌어지는 아주 복잡한 문제들이 얽히고 설킨 것이 아니겠습니까?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아주 고결하게, 순수하게 뭐예요. 증류수처럼 아무 불순물도 들어가지 않은 그러한 내용이 아닌 거예요. 오해하지 마세요. 기독교 신앙이 부패했다. 잘못되었다. 왜곡되었다 그러한 뜻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아주 생생하게 살아있는 역사가 담겨 있다고 하는 거죠. 몸이 다시는 것이라고 하는 이 짤막한 한 절이라고 하나요. 여기에도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얼마나 많은 갈등, 혹은 그러한 투쟁이 담겨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여기에 얼마나 많은 초기 기독교인들의 진리를 향한 치열한 그 열정이 숨어 있는지 모릅니다. 한 두 사람이 천재적인 머리를 발휘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 이러한 구절을 우리가 판넨베르크의 설명에 따라서 천천히 따라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 3주정도 우리가 공부하게 될 것 같은데 참으로 귀중한 시간이 될 것 같애요. 우리 기독교 신앙의 아주 궁극적 목표가 이 부활과 영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죠. 제가 가지고 있는 책 213쪽입니다.

죄의 용서가, 앞에 있는 이야기를 끌어오면서 새로운 챕터로 들어가고 있는 중이예요. 다시 읽겠습니다. 죄의 용서가, 이건 앞에서 한 이야기잖아요. 다시 읽겠습니다. 죄의 용서가 세례와 ‘성자의 반열에 참여하는 것’의 현재적 구원 활동을 특징적으로 해석해주고 있듯이 몸의 부활은 그것의 미래적 성취를 특징적으로 해석해주고 있다. 이 첫 문장이 바로 앞에서 공부한 13장의 죄용서, 사죄 이것하고 지금 14장의 부활과 영생, 이것을 지금 축약 적으로 설명한 거죠. 죄의 용서가, 사죄가 세례와 ‘성자의 반열에 참여하는 것’의 현재적 구원 활동을 특징적으로 해석해주고 있듯이 몸의 부활은 그것의 미래적 성취를 특징적으로 해석해주고 있다. 아 이렇게 설명하니까 우리들에게 잡히네요. 확실하게 사도신경이 말하려고 하는 핵심이 보이죠. 죄의 용서와 부활의 특징을 이야기하는 건데요. 죄의 용서는 현재적 구원활동을 이야기하는 것이고요. 그리고 몸의 부활은 미래적 구원이죠. 그걸 특징적으로 해석해 주는 거죠. 오늘 아주 우리가 핵심적인 기독교 신앙을 공부하기 시작한 겁니다. 핵심적이라고 하는 표현이 이것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에요. 부분 부분이 중요한데 판넨베르크가 이야기가 이야기하고 있는 요 대목이 우리들에게 기독교 신앙의 전체 구도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는 것 같습니다. 죄의 용서, 사죄와 몸의 부활, 그냥 부활 하면 안 돼요. 몸의 부활이죠. 여러분들이 사도신경을 같이 공동으로 고백할 때 그냥 막연하게 부활이 아니거든요. 몸의 부활,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있잖아요. 그걸 여러분들이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그 몸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져야만 우리가 몸이 다시 사는 것이 뭐냐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겠죠. 이 두 가지요. 사죄와 몸의 부활의 각 특징이 다 구원의 문제인데요. 구원이 어떻게 우리들에게 역동적으로 활동하느냐 하는 건데요. 사죄는 현재적인 구원이구요. 그리고 부활은 미래적인 구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특징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지금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세례 받은 이들, 그리고 죽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결되어있는 이들은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통해서 미래에 죽은 자가 부활을 통해서 얻게 될 새로운 생명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희망하게 된다. 이 생명은 그리스도에게서 이미 발생했으며, 세례 받은 자들에게 지금 이미 신앙과 희망의 새로운 생명에 대한 능력을 제공한다(롬 6:4 이하). 죄의 용서,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주어진 믿음, 희망, 사랑 가운데 있는 이 생명은 하나님과 일치함으로써 주어진 미래적 생명이 현재적으로 시작되는 것을 말한다. 몸의 부활에 대한 기독교적 희망은 그 생명의 실현을 추구하고 있다.

잘 정리된 문장들입니다. 죄의 용서와 몸의 부활, 이게 근원적으로 뭐를 이야기하는 데에 대한 정확한 진술이죠. 생명, 미래적 생명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그러한 강력한 희망이라고 할 수 있는 거죠. 몸의 부활이라고 하는 그 신앙이 미래적인 거만이냐 그런 뜻은 아닙니다. 그게 이제 믿음 희망 사랑 가운데서 현재적으로 시작하는 거죠.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이미 시작한 거죠. 그러한 것들을 우리가 어떻게 실질적으로 이해하고 경험하느냐 하는 것이 신앙 훈련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우리가 사도신경을 1년 몇 개월 정도 지냈는데요. 어떻습니까? 이거는 기독교 신앙의 진수, 알짬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이런 방식으로 한국 교인들이 기독교 신앙을 알고 있을까요. 이런 정도로 알고 있을까요? 물론 아니겠죠. 전문적인 세계적인 조직신학자가 기독교의 총체적 관점을 갖고 기술한 것이기 때문에 그 수준은 정말 프로페셔널한 거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이거는 일반 목사들도 거의 모르는 거죠. 말하자면. 그렇다고 봐야 됩니다. 그러니 일반 신자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제가 드리는 말씀이 이거예요. 이러한 공부를 통해서 기독교 신앙의 세계가 대단히 정교하고 풍요롭다고 하는 그러한 느낌, 생각이 오시는 가하는 거죠. 일반적으로는 뭐 그런 거 우리가 세세하게 우리가 앞 필요가 있는가 그냥 열심히 믿고 자기가 믿고 있다고 하는 것에 대한 확신을 더 많이 갖게 하고요. 그리고 예수를 영접했던 것에 대한 그 기쁨들을 잃지 않도록 계속 강렬하게 여러 가지 우리의 생각들이나 감정들을 강화해 나가는 그러한 신앙형태가 일반적이지 않습니까? 그러한 신앙들은 이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수영하는 것을 비유로 들면 이런 거죠. 물속에 들어가지 않는 거예요. 그리고 수영장의 판에 걸터앉아서 물에 들어가지 않고 누가 발길을 세계해서 물방울을 멀리 보내는가 그러한 게임에 몰두하고 있는 정도라고 할 수 있겠죠. 조금 더 한다면 물속에 겨우 들어가긴 하는데 바깥에 있는 난간만 잡고 물장구만 치고 있는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걸 우리가 수영한다고 말하진 않죠. 그 어떤 깊이 속에 들어가서요. 자기가 마음대로 유영하는 정도가 되어야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기독교 신앙의 신학적 해명들, 이런 공부가 제가 보기에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네. 위층에서 피아노를 치네요. 문을 좀 닫았습니다. 공교롭게 이 시간에 피아노를 쳐서 녹음에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문을 닫았습니다. 제가 강의를 하면서 내용에 없는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저도 이렇게 공부를 하면서 아 이게 정말 우리들에게 중요한 부분이구나. 기독교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정말 중요하구나. 그런 것을 다시 이 순간에 느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 없이 어떻게 기독교의 영성의 깊이에 들어갈 수 있을까 나는 그것에 대해서는 굉장히 회의적이거든요.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기대는 이미 앞에서 예수 부활을 다룰 때 충분히 논의되었다. 부활에 대한 기독교적 희망의 의미에 대해서, 인간현존의 완전성에 대한 질문을 책임적으로 답해야할 보편적 인간의 적합성에 대해서, 이것은 죽음을 뛰어넘지 않은 차안의 지평에서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인데, 그리고 헬라적 불멸신앙의 상이성에 대해서, 헬라적 불멸신앙이 기독교 신앙과 다르다는 그러한 설명이죠. 자세하게 살펴보았기 때문에 그 문제를 여기서 재론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헬라 사상은 죽음을 초월하는 생명이 육체와 분리된 영혼의 지속적 생명이라고 표상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와 달리 여러 전승을 받아들여 형성된 기독교 신조는 몸의 부활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여러 전승을 받아들였다고 하고 있잖아요. 제가 앞에서 몇 번에 걸쳐서 말씀 드렸듯이 기독교 신앙이 주변의 여러 사상들과의 논쟁 가운데서 고유한 길을 확보했다고 하는 그러한 뜻입니다. 그러기도 하고 여기서 전승이라고 하는 것은 좀더 구체적으로 구약성서에서 내려오는 어떤 부활 사상 등등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앞에서 헬라사상이 이야기하는 그 영혼의 지속적인 생명, 이것이 말하는 핵심은 육체와 분리되었다고 하는 부분입니다. 헬라는 영육 이원론을 기본으로 깔고 있잖아요. 영육이원론 말입니다. 물론 헬라사상이 몽땅 다 그렇다고 하는 말이 아니죠. 여기서도 아리스토텔레스하고 플라톤하고 좀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헬라철학을 대변한다고 볼 때 영육이원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헬라철학의 핵심인간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영혼이 육체와 분리되어서 지속적으로 영원하게 존재한다 그렇게 주장한 거예요. 이러한 헬라철학의 영육이론적인 영생론이 기독교 신앙에 영향을 끼쳤는데요. 그런데 그대로 끼친 것은 아니고 영혼불멸이라고 하는 부분은 영향을 끼쳤다고 보는데 이원론적인, 육체와 이원론적인 성격으로 말하는 그러한 부분은 별로 그렇게 많이 영향을 끼치지 못했습니다. 이원론은 제거되어 버리고 영혼 불멸, 영생 이런 것들은 기독교안의 부활 사상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중요한 대목으로 들어왔습니다.

어떤 고대교회의 신조 전승은 이 언설을 훨씬 첨예화하고 있다. 이 언설은 몸의 부활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오늘 공부의 핵심은 그겁니다. 헬라사상은 몸에서부터 분리된 영생이라고 한다면 기독교의 부활 사상은 몸의 부활인거예요. 이건 아주 결정적인 차이죠. 간혹 좀 지성적인 기독교인들이나 안티기독교적인 성격이 있는 사람들이 기독교가 헬라사상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문제가 많다하는 주장을 하지 않습니까? 그러한 주장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겁니다. 기독교가 한 4,5세기에 이르기 이렇게 교리를 형성하게 되었는데 그 시대정신과 이렇게 대화한다고 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말하자면 우리가 창조론을 이야기한다면 어떤 지질학이나 유전공학, 인간론을 공부할 때도 마찬가지이겠지만요. 그러한 유전공학, 그러한 것들과 연관해서 설명을 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냥 마음대로 영적인 밀의적인 그러한 독단론에 빠져서 이야기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초기 기독교가 몇 세기에 걸쳐서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등등에 이르는 아주 중요한 교리가 형성된 그 시대에 그 주변의 시대정신과 치열하게 대화하게 논쟁했다고 하는 것은, 그리고 그들에게서 적지 않게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그건 아주 좋은 일입니다. 기독교가 그 만큼 건강하다고 하는 증거예요. 폐쇄적이지 않다고 하는 거죠. 여기서 또 하나 더 중요한 것은 헬라철학이 그 당시의 시대정신이었으니까요. 그들에게 영향을 받고 또 영향을 주기도 하고 했습니다. 유럽사상사를 보면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런 것에 대해서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으신 분들은 제가 번역한 판넨베르크의 책, 티올로기 운드 필로소피 라고 하는 것을 한 번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신학과 철학이에요. 헬라철학과 영향을 주고받고 했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헬라철학을 일반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성서적 기독교적인 신앙의 흐름에서 그 관점에서 취사선택을 했다고 하는 겁니다. 영혼불멸이라고 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어떤 부분을 해명하기 위해서 아주 좋은 시각이기 때문에 받아들였지만 몸과 분리된 이원론적인 관점은 이거는 기독교 신앙의 근본과 배치, 대립되기 때문에 거부한 거죠. 그 만큼 기독교 신앙은 아주 역동적이고 건강하고 역사 개방적이구요. 그렇다는 말씀이에요. 그러니까 기독교 신앙이 실체론적인 형이상학에 영향을 받아서 오늘 이 시대의 세계관하고는 맞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정말 어불성설입니다. 그거는 전혀 사상사적 흐름들을 알지 못하는 것이고 기독교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겁니다.

네 기왕 말이 나왔으니 한 마디 더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바울이 기독교를 그리이스화한데 선봉장이었다고들 그렇게 비판하고 있지 않습니까? 역사적 예수가 헬라화 되고 말았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다시 역사적 예수로 돌아가자는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듣고 하지요. 그것도 웃기는 이야기죠. 제가 보기에는 그렇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예수님에게서 벌어졌던 그러한 어떤 fact들을 사람들에게 전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었거든요. 그를 통해서 일어난 하나님의 고유한 구원사건에 집중했던 겁니다. 그런 것들을 해명해 나가는 과정이 바로 교리화였거든요. 로고스라고 하는 헬라어도 받아들이고 말이죠. 이게 그러한 일종의 변증을 한 겁니다. Apologetics입니다. 그러니까 시대적인 언어를 통해서 예수에게 벌어졌던 종말론적 구원 사건을 변증했다고 하는 아주 근원적인 사태 이런 것들을 눈치 채지 못했기 때문에 역사적 예수로 돌아가자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죠. 역사적 예수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냐? 그런 질문을 하실 분 계세요? 그건 그러한 의미가 아닙니다. 이건 다른 차원을 이야기하는 거죠. 네 진도를 나가야 되겠군요.

네 몸의 부활을 아주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다고 하는 거죠. 그걸 판넨베르크가 고린도전서 15장 53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사라져버릴 지금의 이 몸이 부활하게 된다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썩을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어야 하고, 죽을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어야 합니다.”(고전 15:53)는 바울의 진술과 같은 것들이다. 놀랍죠? 이미 바울이 헬라적인, 이원론적 인간이해를 뛰어넘잖아요. 바울이 그냥 아무 의미없이 이런 말을 그냥 툭툭 던진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 있었던 모든 사상들을 섭렵하면서 기독교의 고유한 생명관, 부활관, 종말론등을 이야기하고 있는 거죠. 계속하겠습니다.

몸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변화된다는 강조는 영혼이 다른 육체로 다시 살아난다는 플라톤적 표상, 그러한 생각과 반대된다. 이것이 말하려는 바는 인간의 정체성이 육체적 실존의 유일회성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대목이예요. 우리가 지금 육체적으로 실존하고 있잖습니까? 이것이 유일회적이다. 이것이 다시 반복되는 방식이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윤회나 오히려 헬라철학적인 관점인거죠. 우리는 여기서 이땅위에서 이러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육체적 실존이 유일회적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게 핵심이죠.

따라서 ‘몸’의 질료적 정체성에 대한 신조는, 지금 육체적인 실존 이렇게 우리가 먹고 배부르고 배설하고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질료, 질료적 정체성에 대한 이러한 신조, 이러한 신앙고백은 그 당시에 유기적 질료가 이미 개인의 생존기간 동안 여러 층위에서 갱신된다는 현대적 지식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헬라 세계에서 야만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던 주장을 강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문장이 조금 설명이 필요할 것입니다. 설명을 지금하기 보다 조금 더 나가고 나가면 또 자체로서 해명이 될 수 있을테니까 그 다음에 조금 부족하면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몸이라고 하는데 있습니다. 헬라철학은 몸의 부활이 아니에요. 그냥 영혼의 영생이에요. 영혼이 그냥 이데아에서 와서 이 땅위에서 어떤 몸에서 잠시 거하다가 몸이라고 하는 감옥에 거하다고 다시 이데아로 가서 영생한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이 기독교 신앙에서는 이 헬라철학이 말하는 이 임시처소인 이 육체적인 몸의 질료가 아주 중요한 거죠. 나가 보겠습니다.

그렇지만 기독교 사상이 질료적 정체성을 강조했다고해서 영혼 불멸성이라는 사상을 완전히 몰아낼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기독교 사상은 영혼 불멸성과 몸의 부활이라는 근본적으로 이질적인 이 두 표상을 상호적으로 결합했다. 이것도 오늘 강의에서 핵심에 속합니다. 표상, 포스텔롱이라는 독일용어입니다. 우리말로 번역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그래서 표상, 표상합니다. 전문용어예요. 이 두표상, 영혼불멸과 영혼부활이 이질적이예요. 왜 그런지 설명이 필요할까요? 영혼불멸이라고 하는 것은 영혼이 플라톤이 이야기하듯이 이데아에서 와서 다시 이데아로 가니까 계속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몸의 부활은 일단 죽어야 부활이 가능한거죠. 영혼까지 죽지 않으면 그러면 부활이라고 말할 수 없는 거죠. 몸과 영, 이 두가지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이질적인 건데 기독교 신앙의 고유한 시각에서 결합되었어요.

이런 사실을 우리는 죽은 자의 부활이 시간의 지평적 흐름과는 달리 배타적으로 고려되었다는 사실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제 죽은 자의 부활이 개체의 죽음 이후에 즉시 발생될 것으로 기대되는 게 아니라 모든 인간에 대한 기독교적 전승에 따라서 이 세계와 역사의 마지막에 기대되었기 때문에 개체 실존에 대한 질문은 죽음의 시점과 미래에 있을 죽은 자의 보편적 부활의 시점 사이에 놓여 있는 중간시기와 관련되었다. 그렇잖아요. 결국은 최후 심판이 오게 될 텐데 그전에 죽은 사람의 정체성은 뭐냐 이런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잖아요. 바울은 그것을 잠자는 자다. 잠잔다 이렇게 비유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게 복잡한 문제죠. 우리가 죽자마자, 개체가 죽자마자 당장 심판받고 부활이나 영원한 심판으로 가냐 아니면 최후의 마지막 때까지 잠들어 있다가 마지막 때에 다 심판의 과정을 거쳐서 부활의 생명세계로 가느냐 이러한 논란들은 아직까지 닫힌 것은 아니에요. 여전히 열려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궁극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이거는 딱 결정적으로 말하기 힘들고요. 여전히 우리가 질문해야될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영혼불멸설이라고 하는 것이 기독교안에 들어오게된 신학적 동기는 개체의 죽음과 마지막 심판사이에서 죽은자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과 연관되어 있다고 하는거죠.

이제 영혼 불멸에 대한 표상이 현재의 생명과 죽은 자의 부활이 미래에 입게 될 생명 사이에 있는 시간의 간격을 연결시키기 위해서 제시되었다. 이런 시간의 간격을 해소하기 위한 신학적 동기로 영혼불멸설이 기독교 교리안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기독교 사상에서 볼 때 완전한 인간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육체와 영혼이 하나를 이루어야만했기 때문에 육체와 분리된 영혼의 실존은 완전한 인간 실존에 해당되지 않았다. 그러나 개체의 죽음 이후에도 영혼이 지속됨으로써 주어진 이 연속성은 죽어야 할 현재의 생명과 함께 하는 미래적 생명의 인간적 정체성을 보장하기 위해서 요긴한 것처럼 보였다. 죽음과 미래의 보편적 부활 사이에 놓여있는 인간의 개인적 정체성이라는 관점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최후심판 앞에서 인간이 어떤 개인적 정체성 가운데서 책임적이어야 하는가라는 관점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가 1513년 이래로 영혼이 사멸한다는 주장을 이교도적인 것으로 정죄했으며 영혼 불멸을 옳은 도그마로 승격시켰다는 것은 이해할만하다. 네 좀 복잡한 이야기죠. 영혼이 개인이 죽은 다음에도 연속해야 된다고 하는 것은 마지막 심판에 얻게된 인간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이거는 요긴한 요소라고 하는 겁니다. 왜 그게 꼭 필요한 걸까요? 인간의 육체가 죽어 없어지는 것은 분명한데 영혼이 똑같이 몸이 썩고 불에 타듯이 죽는다고 하는 것이 바로 그 사실이니까요.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러한 생명 형식이 근원적으로 해체되는 사건 아니겠습니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마지막 심판때에 그때로부터 시작하게 될 부활 생명, 영원한 생명, 각각의 정체성 확보되기 힘들다고 하는 거죠. 모두가 흩어지게 되니 말입니다. 그 정체성, 여기서는 이게 핵심인거든요. 개인의 정체성의 확보가 필수적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기독교가 희망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 부활의 세계, 영원한 생명의 세계는 지금 우리가 여기서 살던 이러한 개체의 정체성이 어떠한 방식이더라도 유지된다고 하는 거죠. 그거죠. 네. 그땐 너도 없고 나도 없고 막 흩어져 있는, 그러니까 지금 삶의 정체성이 다 허물어져버린 그러한 세계가 아니라고하는 거죠.

개인의 정체성이라고 하는 것을 여기서 뭐라고 봐야 되는가 하는 것이 또 복잡한 문제가 됩니다. 그러면 영원한 생명의 세계에 가서도 나는 누구의 남편, 누구의 아내, 누구의 자식, 이러한 가족이라든지 어느 교회 목사, 어느 교회 신자들, 이런 것들이 그대로 유지된다는 이런 것이 아니겠죠. 그건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닌 상태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우리가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보통 우리는 아이덴티티라 하는 정체성을 이런 식으로 경험하지 않습니까? 인간관계라든지 피부 색깔이라든지 성격이라든지 그가 사회적으로 한 업적이라든지 뭐 이런 것 아니겠어요. 그런 방식의 정체성이 그대로 유지된다고 한다면 그 나라는 절대적인 세계라고 하기 힘들죠. 거기는 백인이 있고 흑인이 있고 뭐 그런 등등의 우리가 여기서 사람을 구분하는 그러한 방식이 있다고 한다면 그거는 절대적인 세계라고 할 수 없는 거죠.

그러나 근본적으로 지금 여기서 유일회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 삶의 정체성은, 이거는 확보되어야 된다고 하는 겁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그렇습니다. 과연 그게 어떤 것일까 하는 것은 숨어있다고 볼 수 있겠죠. 그것의 핵심이 바로 영혼의 문제, 영혼 불멸의, 영혼이 그 정체성이니까 말이죠. 그러한 영적인 정체성 그런 것들은 우리가 개인이 죽어서 썩고 불에 살라진다고 하더라도 지속된다고 하는 사상이, 이런 붙들어야 되는 거죠. 그래서 로마가톨릭교회가 1513년에 영혼도 죽는다고 하는 주장은 이교도적인 거로 정죄했습니다. 조금더 나가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은 다음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감당해야할 인간의 개인적인 정체성과 책임성이라는 문제를 현대 인간론에 전혀 어울릴 수 없는 주장에 그 토대를 두어야하는지 아닌지는 의심스럽다. 바로 제가 지금 말씀드린 거예요. 여기서의 이 주장은 영혼이 몸으로부터 독립적이기 때문에 죽음을 뛰어넘어 지속된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주장은 현대 인간론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는 거죠. 아직까지 이런 것들이 질문이 끝난 것은 아닌거죠. 어쨌든지 이러한 주장으로 인해서 현재의 몸만이 아니라 그것의 질료인 육체*도 역시 미래의 부활에 참여하는 게 틀림없다는 사도신경의 진술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명백한 설득력을 갖는다. 우리의 현재적 ‘육체’가, 육체와 몸이 대별되죠. 몸은 보통 소마라고 하고 육체는 사르크스라고 하는데요. 그 차이는 제가 역주로 달았죠. 읽어볼까요.

*Leib(헬라어- 소마)와 Fleisch(헬라어- 싸르크스)라는 단어는 우리말로 구분하기가 쉽지 않아 일단 각각 ‘몸’과 ‘육체’로 표기했다. 소마(Leib)는 영혼(Seele)과 구별되는 의미로서의 인간 구성 요소라고 한다면, 싸르크스(Fleisch)는 다른 동물들도 소유하고 있는 물질로서의 인간 구성 요소를 뜻한다. 또한 싸르크스가 인간으로 하여금 세상의 유혹에 넘어갈 수 있게 하는 본능적이고 육체적인 성격을 말한다면, 소마는 하나님을 긍정하거나 혹은 반대하기로 결정하는 인격적 성격을 말한다. 원래 몸의 목적은 하나님에게 희생제사를 드리며 자기를 하나님이 통치하게 하는 것이다. 바울이 ‘소마’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갈 6:17, 고전 9:27) 그는 우선적으로 시-공간의 차원에 있는 인간의 외적인 현상방식을 생각했다. (참고, TRE 20권, 640 쪽 이하). 요한은 예수를 하나님의 육체 입으심(Fleischwerdung Gottes, 요 1:14)이라고 했으며, 판넨베르크의 설명에 의하면 싸르크스는 소마의 질료다.

좀 복잡한 설명이죠. 제가 트레(TRE)라고 하는 640쪽되는 독일어사전을 참조했습니다.

우리의 현재적 ‘육체’가 미래의 부활 현실성과 일치하는가 하는 문제는 시간의 선적 흐름에 묶여있는 한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에 반해 영혼 불멸이라는 표상을 사실상 기본적으로 받아들인 신학적 관심은 시간의 현실성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게 됨으로써 훨씬 만족스러워졌다. 시간을 선적으로만 보면 우리의 육체와 부활과의 일치 이런 것들은 생각하기 힘들다는 거죠. 그런 거는 안 되는 거구요. 영혼불멸이라고 하는 이러한 표상을 통해서 기독교는 시간의 현실성을 좀 더 깊이 있게 이해하게 된 거예요. 시간의 현실성, 리얼리티예요. 이거를 심층적으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아 그게 어떤 가를 설명하려면 또 시간도 필요하고 저도 또 공부를 해야될 것 같은데 너무 이야기하면 소화가 잘 안될 것 같고요.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두 가지 문제였습니다. 하나는 몸의 부활, 그렇죠. 하나는 몸은 부활한다는 것, 그게 중요했구요. 하나는 영혼불멸이 기독교 부활 사상 안에 들어왔다. 그래서 시간의 현실성은 더 깊이 있게 이해하게 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몸의 부활, 영혼불멸 두 가지가 이질적인 것 같지만 그러나 시간을 더 심층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그러한 관점에서 이것은 기독교 신앙에서 같이 결합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고맙습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9.12.19 23:02:40
*.120.170.243

사티아 님,

한해가 저물어갑니다.

다른 일로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으로 바쁘실 텐데

사도신경 녹취를 푸시느나, 너무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작년 9월부터니까

벌써 일년 반이 다 되어갑니다.

이번 주간에는 제가 바빠서 강의녹음을 못했습니다.

금년 안에 다 마치려고 했는데, 어떨지 모르겠네요.

기쁜 성탄을 맞으십시오.

profile

[레벨:26]사띠아

2009.12.20 01:47:50
*.161.40.104

녹취는 바쁜 일상이 영원속으로 녹아 들어

한 모금 감로수가 되어 저를 적시는 시간입니다.

귀하고 참 귀하다.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이 척박한 인도땅에서 이렇게 귀한 기독교의 정수를

값없이 배우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은

저의 생애에 다시 없는 고귀한 선물입니다.


보내주신 책 잘 받았습니다.

인도에서 기독교의 본질에 천착하며

진정한 영성을 추구해 가는 이들과 돌려 읽겠습니다. 


다시한번 감사드리며

기쁜 성탄 되십시오.

[레벨:18]눈꽃

2010.01.12 14:01:46
*.187.19.193

 

사티아 선교사님!
듣기보다 읽기에 강한 눈꽃!
녹취록을 대할때마다 늘  감사한 마음 만땅입니다
정목사님의 <사도신경 강해>가 없었다면 사도신경의 그 깊이와 넒이를
이렇게 알 수 있었을까 생각하니 아~ 나는 축복받은사람이구나
축복이 이런거구나 ~~~

 

"이 겨울에 제대로 된 이불하나없이 기침을 달고 사는
담벼락에 주끼하우스(천막집) 짓고 사는 가족들에게
솜이불 하나씩 안겨드릴 생각을 하니
벌써 가슴이 뛰는 군요."라고 하셨던
사티아님의 말씀이 찐한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델리 거리의 천사로
거리 거리를 누비는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주안에서 오늘도 행복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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