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해설 55강 - 14장: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2)

14장의 두 번째 강의가 되겠습니다. 이 사도신경이 창조자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예수 그리스도, 성령, 교회 등등의 이야기를 주욱 하고 마지막으로 몸이 다시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를 이야기 하고 있어요. 제가 평소에 사도신경을 암송하고 또 이걸 어떤 사람에게 설명한 적이 있었는데 이러한 구조를 이번에 사도신경을 강의하면서 새롭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뭐냐 하면 이미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앞에서 이야기를 했는데 사도신경의 마지막 부분이 다시 이 부활과 연관된다고 하는 사실이죠.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혼이 산다’ 부활과 영생으로 결론을 맺습니다. 이거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 뭐냐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겠죠. 부활과 영생이 답이라는 것이겠죠. 뻔한 말 같죠. 우리가 또 알고 있는 내용이죠. 그러나 이런 것들을 곧잘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이것이 가지고 있는 영적인 세계는 더더구나 거리가 멀게 느껴지는 거죠. 그러한 영적인 세계를 우리가 들어가 본적도 없구요. 맛을 본적이 없구요. 그냥 우리에게 하나의 공식으로만 우리들에게 남아있습니다. 이게 문제인거예요. 제가 이 사도신경을 첫 번부터 지금까지 오면서 한두 번 아니면 조금 더 여러 번 이야기를 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기독교가 뭔지 우리가 알아야 되거든요. 우리가 믿는다고 하는 그 사실보다도 무엇을 믿느냐는 거, 그러니까 무엇이냐. 그것에 대한 이해가 어떻게 보면 더 소중한 거죠. 이 이해, 인식, 앎, 이것이 다 통하는 문제인데요. 이거하고 믿음이라고 하는 거, 이 두 관계는 기독교 신앙에서 긴장관계입니다. 중요한 거죠. 분리되는 거나 똑같은 거는 아니고요. 이것이 서로 맞물려서 우리의 영적인 경지를 더 높게 끌어갈 수 있는 거예요. 그 긴장이 없습니다. 자칫하면 그저 앎, 인식, 지적인 만족으로 떨어질 수도 있구요. 자칫하면 열광적인 믿음으로만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 두가지가 변증법적으로, 긴장관계로 우리 신앙생활에서 역동화 되는 그러한 일들이 필요한 거죠.

사도신경의 마지막이 부활과 영생으로 다시 강조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상당히 중요한 거 같습니다. 제가 사도신경을 매주일 이렇게 신앙고백으로 드리면서도 고 대목, 그거야 뭐 제 기억에 남아있는 구절이기도 합니다만 그 마지막 대목이 그거로구나 하는 것을 그냥 어렴풋하게만 생각하고 있지 실질적으로 이렇게 되뇌고 그 쪽으로 들어가고 하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는 것 같습니다.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결미, 결말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번 54강에서 몇 가지들을 이야기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방향은 주어졌다고 보고요. 지난번 54강의 마지막 문장을 잠시 보면 이렇습니다.

이에 반해 영혼 불멸이라는 표상을 사실상 기본적으로 받아들인 신학적 관심은 시간의 현실성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게 됨으로써 훨씬 만족스러워졌다.

영혼 불멸이라고 하는 것은, 이게 부활사상하고는 좀 상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거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근거를 둔 사상이라고 할 수 있어요. 물론 똑같은 것은 아닌데 연결이 됩니다. 영 혹은 영혼은 이데아로부터 온거고 이 땅에서부터 몸이라고 하는 악한, 그리고 취약한 세계안에 머물러 있다고 죽으면 다시 이데아 세계로 간다는 그러한 이야기거든요. 기독교에서 영혼은 그렇게 이데아에서 왔다고 말하지 않거든요. 그것도 피조된 것이거든요. 그런 점에서 출발점자체가 일단 틀립니다. 영혼이 이데아부터 왔느냐? 아니면 그것도 피조된거냐? 그런데서부터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거죠. 그런 차이에서 본다면 영혼 불멸이라고 하는 것은 헬라적인 사상에서 가까워서 부활과 상충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영혼불멸이 기독교의 교리의 중심으로 들어오게 되었어요. 그건 말도 안 되는 것을 억지로 끌어들인 게 아니냐? 그렇게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그런 차원은 아닙니다. 제가 오늘 지난번 공부한 마지막 문장을 읽었는데 거기에서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핵심인거죠. 시간의 현실성을 심층적으로 이해해서 영혼 불멸설을 받아들이면서도 부활사상에 아무런 상충이 되지 않는 어떤 길을 신학이 찾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시간의 현실성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게 뭘까요? 그걸 오늘 공부할 부분에서 설명이 됩니다.

책 216쪽입니다. 영생, 부활, 이런 문제들을 사도신경에서 마지막으로 다루고 있는데 지금 영혼 불멸이 영생문제와 연관되니까 지금 판넨베르크가 설명하고 있습니다. 영생, 부활, 영혼불멸, 그런 것을 같이 연관해서 생각해야 되겠죠. 그런 생각의 핵심은 시간의 현실성을 심층적으로 이해하는 거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오늘 우리가 공부해야 될 부분에서 설명하는 거죠. 첫 문장 읽어보겠습니다. 오늘 여기는 제가 먼저 한번 읽어보니까 좀 까다로워요. 그래서 한 번에 할 수 있지만 두 번에 나누어서 하겠습니다.

이에 반해 영혼 불멸이라는 표상을 사실상 기본적으로 받아들인 신학적 관심은 시간의 현실성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게 됨으로써 훨씬 만족스러워졌다.

원시 기독교의 묵시문학적 시간이해에 따르면 언젠가 지상에서 계시될 미래의 그것이 하나님의 은폐에, 즉 ‘하늘’*에 이미 드러나 있다.

요 문장도 쉽게 따라가기 힘들죠. 원시 기독교의 묵시문학적 시간이해에 따르면, 조건절로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무슨 말입니까? 원시 기독교, 초기 기독교, 원래 기독교에는 묵시문학적 시간이해가 들어와 있다고 하는 거죠. 묵시 문학이 유대 기독교의 독특한 세계관인데 그것이 원시 기독교에 영향을 많이 미쳤구요. 부활도 묵시문학의 개념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어요. 원시 기독교가 알고 있는 묵시문학적 시간이해에 따르면 어떻게 된다는 거죠? 언젠가 지상에서 계시될, 나타나게 될 미래의 그것이, 미래의 그것이 뭘까요? 그건 온전한 생명이겠죠. 혹은 하나님 자체겠죠. 그것이 하나님의 은폐에, 즉 하늘에 이미 들어나 있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폐, 하나님의 숨기심 이것은 곧 하늘이라고 하는 거죠. 고대인들에게 특히 묵시문학과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그 하늘은 공간적인 차원에서의 어떤 그곳을 말한 다기보다도 하나님의 은폐를 가리키는 거예요. 하늘은 하나님의 은폐입니다. 그 방식으로 생각한 거죠. 그것에 대한 역주를 제가 달았는데요. 한 장 넘기면 그 다음에 나옵니다. 역주 부분이예요.

*성서 시대의 사람들은 우주를 하늘과 땅과 지하라는 삼층 구조로 이해하고 있었다. 오늘은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성서가 말하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근본적으로 오류라고 말할 수 없다. 판넨베르크의 설명에 의하면 성서가 하나님의 은폐성을 하늘이라는 표상으로 개념화했다는 것이다. 예수가 승천했다는 것도 역시 역사적 예수가 아직은 은폐되어있지만 미래에 드러나게 될 하나님의 온전한, 그리고 비밀의 통치 영역으로 들어갔다는 뜻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부활한 자가 미래의 메시야와, 그리고 세계 심판자와 동일시됨으로써 이미 현재적인, 그러나 여전히 은폐되어 있는 세계통치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아버지 하나님의 우편으로 옮겨갔다는 논리였다. 이것은 이라고 했는데 묵시문학적 이해에 따른 하나님의 은폐에 미래의 것이 드러나 있다는 거죠. 판넨베르크가 왜 이 말을 하느냐 하면 시간의 현실성을 심층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거죠. 고거를 여러분들이 머릿속에 기억해 두십시오. 시간의 현실성에 대한 심층적 이해인거죠. 도대체 뭐냐 말장난 같다. 시간이면 시간이지 시간의 현실성이라니. 심층적 이해라니 그런 게 있냐? 그러한 생각이 가능한 거죠. 심층적이라고 하는 것은 심층적이지 않는 이해도 있다고 하는 거죠. 단선적인 그러한 시간이해 말이죠. 그냥 봄이 왔으니까 봄이 왔으니까 여름이 오고 가을오고 겨울오고 단순하게 순환 반복되는 쪽으로 시간을 이해한다거나 또는 어떤 원인이 있기 때문에 당연히 결과가 있다고 하는 원인, 결과 기승전결 소설에서 그러한 흐름이 있듯이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기계적인 흐름으로 시간을 이해할 수도 있는 거죠. 조금 더 일상적인 거로 바꾼다면 아 저 사람은 머리가 좋으니까 공부도 잘하고 공부를 잘하니까 돈 많이 벌고 출세하고 행복할 거야. 이런 것들이 단선적인 생각이라고 하는 겁니다.

묵시문학적 시간이해에 따르면 그게 아닌 거죠. 이미 현재, 여기에 미래에 드러날 그것이 와 있는 거예요. 이렇게 이야기해야 되겠군요. 더 여러분들이 실제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죽음이 이미 현재 살아있는 나에게, 실존 속에 이미 들어와 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미래가 이미 나에게 들어와 있는 거죠. 그러나 그것은 은폐 방식이기 때문에 그걸 우리가 확연하게 잡아서 어떤 거다 말할 수 없습니다. 심층적으로 이해하는 거죠. 가능한 이야기죠. 그런 관점이 필요하죠. 우리가 그냥 세상 사람들하고 똑같이 잘 먹고 잘 살자. 그냥 편안하게 살자. 그런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시간 현실성을 심층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니까요. 전혀 다른 거예요. 하나님이 누구입니까? 세계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무로부터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지금도 이 창조가 계속되고 있고요. 종말에 그것이 완성될 겁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믿는다고 한다면 우리의 어떤 경험론적으로 얻어지는 시간이해에 떨어진다고 하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이러한 독특한 시간 이해라고 한다는 것은 즉 오늘 여기 현재에 미래의 그것이 은폐 방식으로 들어와 있다고 하는 바로 이러한 시간 이해는 이런 방식으로 시간을 이해하는 것은 이게 뭐냐 하는 것을 교리적으로 설명하는 거죠. 부활한 자, 예수가 미래의 메시아와 그리고 세계 심판자와 동일시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종말에 완전하게 생명을 구현하게 될 그 메시야 그것은 곧 세계 심판자예요. 메시야와 심판자는 똑 같은 의미입니다. 동일시되었다. 동일시됨으로서 현재, 이 세계를 통치하기 위해서 그러나 은폐되어 있는 그러한 세계를 통치하기 위해서 하나님 아버지 우편으로 옮겨갔다는 그러한 의미인거죠. 똑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묵시문학적 시간 이해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초기 기독교인들의 시간이해에서 어떤 근거를, 어떤 현실성을 얻게 된 거죠. 예수가 바로 묵시문학적 심층적 시간이해의 핵심이 되었다고 하는 뜻입니다.

이와 동일한 논리가 기독교의 부활 희망에 해당된다. 즉 죽은 자의 미래적 부활로 인해서 명백해지는 사실은 지금 이미 우리의 생명을 위해서 우리의 생명 역사에 담겨 있는 비밀이 현재적이며 영원한 하나님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 문장은 제가 독일어 원서를 더 확인해야 될 것 같은데요. 확인할 필요는 없겠죠. 그렇게 해서까지 우리가 명명백백하게 다 풀 단계는 아니구요. 또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전체적으로 이해만 하면 되니까 그런 정도로 정리를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요 문장은 조금 이상한 부분이 있습니다. 기독교 부활 희망이 바로 앞서서 이야기한 전반적인 시간의 현실에 대한 심층적 이해를 말하는 거예요. 그거를 이렇게 좀 풀어서 이야기한 겁니다. 죽은자의 미래적 부활로 인해서 명백해지는 사실은, 죽은 자는 나중에 부활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미래적 부활로 인해서 명백해지는 사실은 지금 이미 우리의 생명을 위해서 우리의 생명 역사에 담겨 있는 비밀이 현재적이며 영원한, 현재적이면서도 동시에 영원한 하나님을 구성하고 있다고 표현했는데 그건 적당한 표현은 아닌 것 같은데 독일어로 뭘로 되어 있는지 제가 기억을 못하겠습니다.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는거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현재적이고 영원한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는거다 그 두 가지 속성을 기억하십시오. 현재적이며 영원한, 생명은 현재적이면서 영원하다 혹은 미래의 생명이다라는 거죠. 조금 더 보겠습니다.

시간과 영원에 대한 이러한 독특한 내적 관계로부터 요한복음의 특기할만한 단어들을 이해할 수 있다. 시간과 영원에 대한 이러한 독특한 내적 관계, 이게 뭐냐 질문이 필요하겠네요. 시간과 영원에 대한 독특한 내적관계예요. 시간은 바로 앞의 문장에 나와있는 대로 현재적인 거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구요. 영원은 말 그대로 영원한 거죠. 시간과 영원의 독특한 내적관계라고 하는게 뭘까요? 그거는 앞에서 이야기한 것과 연관되는 겁니다. 미래에 드러나게 될 그것이 오늘 은폐 방식으로 여기에 하늘에 혹은 하나님 은폐에 드러나 있다. 미래가 현재에 이미 돌입해있다. 미래라고 하면 영원에 관계된 거죠. 그것과 시간은 현재니까 이게 아주 심층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 거죠. 예수 그리스도는 이제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과 동일시되고 하나님과 동일한 권능을 갖고 오늘 여기서 통치하시는 분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러한 시간의 현실성에 대한 심층적 이해로부터 그것은 곧 시간과 영원의 긴장관계니까 요한복음의 특기할만한 단어들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아들을 믿는 자는 지금 이미 영원한 생명을 갖는다고 했다. 요한복음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나의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은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갔다.”(요 5:24). 공동번역으로 제가 한 것 같은데요. 공동번역이나 개역개정이나 같을텐데요. 제가 한 번 찾아볼까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도 나가겠습니다.

마지막 성취의 미래는 숨겨진 방식으로 이미 현재한다. 요 문장이 어쩌면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전체 내용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간의 현실성을 심층적으로 이해하는 거니까요. 미래가 이미 현재로 들어와 있는 겁니다. 요거를 그냥 낱말뜻으로 아는 거야 크게 어려움이 있겠습니까만 실질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조금 쉽지 않습니다. 낱말 뜻으로 아는 것하고 실질적으로 아는 것하고 무슨 차이가 있느냐? 차이가 많은 거죠. 이 마지막 미래, 성취 미래, 마지막 완성될 그 미래, 종말이라고 하는 것이 그게 숨겨진 방식으로 현재한다.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냥 믿으면 된다. 그것도 할 수 없는거예요. 이해가 안되는데 어떻게 믿습니까? 이런 거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공부가 필요한 거죠. 다시 그 문장을 읽습니다.

마지막 성취의 미래는 숨겨진 방식으로 이미 현재한다. 따라서 예수와 만남으로써 지금 이미 궁극적인 최후가 결정될 수 있다. 맞는 이야기죠. 궁극적인 최후가 결정될 수 있다. 궁극적인 최후 마지막이 결정될 수 있다. 예수는 궁극적인 미래잖아요. 그는 심판자이지 않습니까? 그를 통해서 이 우주가 성취되잖아요. 마지막 다 완성되는 게 아니잖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그를 메시야로 믿지 않습니까? 그를 우리가 오늘 여기서 만난다고 하는 것은 마지막 우리가 얻게 될 궁극적인 최후를 지금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이야기죠. 그러니까 이미 바로 앞에서 읽은 요한복음 구절에 나와 있는 이야기가 옳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에 나타나 있는 이러한 진술들은 그냥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냥 신앙적인 덕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주 철저하게 묵시문학적 시간 이해, 그리고 헬라의 철학적 사유 이런 것들을 종합적으로 이해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진리의 차원에서 설명하는 거죠. 네 거기까지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죠. 예수와의 만남으로 지금 궁극적인 최후가 이 자리에서, 지금 여기서, here and now 여기서 결정될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이미 영생을 얻는 거예요. 마지막에 얻어질 그것이 이미 주어진 거예요. 그런 사람들은 이미 얻었으니까 심판을 받지 않는거죠. 그러니까 과감하게 죽음에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옳겼느니라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겁니다. 놀랍죠. 초기독교인들의 신앙적 사유가 장난이 아니죠.

그렇다고 요한이 이 최후의 결정을 미래의 일이 아닐지 모른다고 생각했다는 뜻은 아니다. 이미 여기서 다 끝나 버렸다고 생각한 거는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이게 말이 될까요? 이미 여기서 구원을 얻고 생명을 얻고 그래서 심판이 없는 그러한 마지막 것을 얻었는데 여전히 그것은 미래로 열려있다고 하는 이 긴장을 가지고 있는 거죠. 그 다음요.

이 최후의 결정은 미래적인, 그러나 숨겨진 방식으로 이미 현재한다. 최후의 결정, 최후의 심판이라고 해도 좋구요. 마지막 구원이라고 해도 좋고요. 부활의 생명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영원한 생명, 영생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부활과 영생이예요. 완전히 결정되는 것, 이 최후의 결정은 미래적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거를 끝난 문제로 보면 곤란합니다. 그러나 이미 현재합니다. 이미 현재하는 것은 숨겨진 방식으로예요. 미래적인 것은 아직 우리에게 오지 않는 건데요. 미래적인 차원은 실증적이라고 할 수 있구요. 그러나 현재적인 것은 은폐하는 방식입니다.

따라서 요한이 이해한 그리스도는 다음의 문장에서 현재와 미래를 역설적으로 상호 소통시키고 있다. 현재와 미래를 역설적으로 상호 소통시키고 있다고 하네요. 이러한 것들이 바로 시간의 현실성에 대한 심층적 이해입니다. 요한복음 5장 25절이예요. “죽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그리고 그 음성을 듣는 사람은 살 것이다.”(요 5:25). 보통 우리가 이런 것들은 막연하게 들었는데요. 이것이 바로 시간의 심층적 이해와 연관되는 구절이라고 하는 군요. 더 나가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골로새서에서도 세례받은 자가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되어있다. 바울에 따르면 이 참여는 미래의 일이며(롬 6:5, 8), 이미 현재의 일이기도 하다.(골 2:12) 미래의 일이기도 하며 현재의 일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미래의 차원에는 실증적으로 일어나게 될 것이고 현재는 은폐방식으로 일어난다.

그런데 여기에 바울의 생각과 다른 점이 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골로새서에 따르면 기독교인이 죽은 자의 부활에 참여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폐에서만 현재적 리얼리티가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폐, 하나님의 가리우심에서만 현재적 리얼리티가 되기 때문이다. 요런 것들이 골로새서와의 약간의 차이를 이야기한다고 하네요. 너무 전문적인거라서 따라가 봐야 하겠습니다. 골로새서 3장 3,4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가운데 나타날 것입니다.”(골 3:3, 4) 여기서 감춰져 있다. 은폐가 이야기 되었고 영광중에 나타나리라 드러남입니다. 이미 신약성서안에 은폐와 노출, 감추임과 드러남, 이런 것들의 변증법적 긴장관계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러나 이러한 언급들 사이에 실질적인 차이점이 있는지의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이제 여기서 역사적 미래와 하나님의 영원 속에 은폐된 현재가 묵시문학적으로 결탁**되는 것을 다시 한 번 짚어 보도록 하자. 여기서 시간과 영원은 현재와 미래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기서 사용된 결탁(Verschrankung)이라는 단어는 두 사물이나 현상이 교차적으로 어떤 틀을 형성하고 있다는 뜻인데, 본문 가운데서는 역사적 미래와 영원이 묵시문학적으로 결탁하고 있는 기독교 사상의 전승사를 설명하는 데 사용되었다. 기독교 사상사에 개입된 이러한 결탁은 두 가지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하나는 역사가 무시간적 영원성으로 왜곡된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영원이 역사에 의존된다는 뜻이다. 판넨베르크는 물론 후자의 해석을 정당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럴 때만 역사와 영원이 상호적으로 무언가 현실적인 것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과 영원의 이러한 결탁은 일단 다음과 같이 이해될 수도 있다. 하나님의 영원 가운데 이미 현존하는 그것은 미래에 명백하게 드러나든지 않든지 상관없다고 말이다. 이 말은 우리의 현재의 실재적 모습들은 나중에 어떻게 되든지 상관없다. 그냥 영원하게 생명에 들어갈 뿐이다. 한번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고 하는 거죠. 이러한 주장은 옳는 것은 아니예요. 어쨌든 그러한 생각이 가능한 거죠. 감춰져 있는 것이 그때 드러나게 될텐데 현재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든지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하는 겁니다.

이런 주장은 영원eternity을, 그리고 이와 더불어 하나님을 무시간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며, 따라서 시간 속에서 발생하거나 혹은 발생하지 않은 것은 영원 앞에서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이 된다.

***무시간적으로(zeitlos)라는 말은 성서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헬라적인 개념이다. 판넨베르크는 여기서 하나님의 영원을 이렇게 무시간적, 비역사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위험하게 생각한다. 하나님의 영원은 현재의 시간에 의존적이며 현재의 시간은 하나님의 영원을 선취하고 있다.

그러니까 막연하게 영원하다고 보는 것은 좀 곤란하다고 하는겁니다. 하나님을 무시간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며, 따라서 시간 속에서 발생하거나 혹은 발생하지 않은 것은 영원 앞에서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이 된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삶을 별로 의미가 없을 수도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거죠.

왜냐하면 시간적으로 여전히 미래적인 모든 것은 영원 가운데서 이미 확실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영원가운데서만 확실하기 때문에 지금 우리의 이러한 것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거죠. 이것은 바른 생각은 아닙니다. 영원이라고 하는 것은 현재에 의존적이라고 그 관점이 기독교에 있는 거거든요. 그런 것 없이 그냥 마냥 영원한 것, 현재 이러한 시간이 다 파괴되어 버리는 것, 이런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런 쪽으로의 생각이 있다고 하는 것을 지금 설명하고 있죠.

영원을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에 부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이해에 따르면 모든 개체에서 운용되는 세계과정이 영원으로부터 도래한 모든 악과 모순을 포괄한 채 하나님을 통해서 고정되거나, 아니면 전체 인간역사와 더불어 성육신이 하나님의 영원성 앞에서 무의미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모든게 하나님이라고 하는 영원한 주인에게서 해소되어 버리는 거죠. 하나님이 일종의 블랙홀처럼 이해되면 곤란하다고 하는 거죠. 영원이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러한 많은 우여곡절과 아픔, 이런 것들을 다 해체해버리고 마는 그러한 쪽으로 가게 되면 기독교적인 시간 이해에서 문제다. 그건 좀 문제가 있다고 하는 겁니다.

무시간적이 아니라 이와는 달리 기독교는 이 시간적 역사가, 무시간적인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에게도 결정적으로 의미 있다는 신앙에 근거한다. 성육신 신앙인거죠. 하늘이 땅으로 들어오게 되는 거죠. Incarnation, 몸을 입은거죠. 구체적인 몸을 입으신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따라서 시간과 영원의 결탁은 오히려 하나님의 영원이 세계의 미래에 의존적이라는 사유를 가능하게 한다. 참 중요한 문제를 지금 지적하고 있는 거예요. 시간과 영원의 결탁을 시간이 영원으로 그냥 흡수되는 것으로만 생각하면 곤란하구요. 오히려 하나님의 영원이 이 시간, 역사 이것의 미래에 의존적이다라고 하는 거죠.

하나님의 통치가 보여줄 미래적 계시는 이러한 역사적 사건 없이 그저 무엇이 확정적인지를 드러내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과정이 중요하다고 하는 겁니다. 이 미래적 계시는, 공중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지금 시간이 가고 있잖아요. 그 마지막 때를 우리가 미래적 계시라고 하는데 오히려 영원이신 하나님이 만사를 규정하는 현실성****이었으며 지금도 그렇다는 점을 최종적으로 결정한다. 진화론을 생각을 해보세요. 생명이 지금까지 주욱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이게 어떻게 보면 미래적 계시라고 할 수 있어요. 이러한 계시의 관점이 바로 하나님이 하나님을 바르게 설명할 수 있는 토대가 되는 거죠. 하나님은 만물을 규정하는 현실성이었고 지금도 그렇다고 하는 거를 결국은 결정적으로 말하는게 아니냐는 거죠. 이해가 되죠. 더 설명드리지 않아도 되겠죠.

****만사를 규정하는 현실성(die alles bestimmende Wirklichkeit)이 하나님이라는 판넨베르크의 명제는 하나님의 계시를 보편사적 지평에서 바라보려는 그의 신학적 특성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영원성과 불변성은 만사와의 연관성 속에서만 그 의미를 획득하게 됨으로써 하나님과 그 미래는 이 세상과 무관하게 독립적인 게 아니라 의존적이라 할 수 있다. (2장 역주 참조).

따라서 하나님의 미래에 근거해서 요한복음과 골로새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믿는 자가 하나님의 은폐에서 이미 지금 영생에, 그리고 이미 지금 예수부활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현재적 생명에 담겨있는 연속성이 죽은 자가 얻게될 부활의 미래적 생명과 더불어 시간과정의 줄을 좇아가야만 한다는 게 아니라 그 미래가 이미 지금 우리의 생명에 현재하고 있는 영원한 하나님의 은폐 안에 놓여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거는 생각을 많이 해야될 대목입니다. 더 이상 요부분 설명하지 않고 넘어가겠습니다.

우리의 현재 생명에 대한 이러한 심층적 차원 안에서 생명에 대한 진리는, 즉 생명의 심판이냐 구원이냐, 하는 문제는 현재적이다. 이 진리는 우리 생명의 과정에서 분명히 결정되는 문제다. 여기서 우리는 역으로 미래의 생명이 사실상 현재 생명과 질료적으로 일치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지금 이 질료적 생명이 중요하다고 하는 거예요. 연결된다고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 미래의 내용이 현재 우리에게 숨겨져 있는 현재 생명의 심층적 차원을 성취할 그것이 되기 때문이다. 아주 중요한 내용입니다. 은폐되어 있는 생명은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이러한 삶, 역사와 시간안에 있는 이러한 삶의 차원을 갖고 있다고 하는 거죠. 그러니까 지금 우리의 삶, 여기서 이미 구원과 생명과 심판 등등 그러한 문제들이 은폐방식으로 결정된다고 하는 거죠. 그러니까 이 현재 삶이 중요한 거죠.

확히 말해서 이는 하나님의 미래가 숨겨진 방식으로 모든 사물을 영원히 현재화하는 그 불빛에서 제시되는 것과 같으며, 또한 그 미래가 스스로 현재적으로 드러나는 것과 같다 하겠다. 이런 의미에서 육체적 부활을 강조하는 것은 사실상 완전히 말 그대로 받아들여져야만 한다. 몸의 부활이죠. 아주 사실적으로 받아들여져야 된다고 하는 겁니다. 이러한 단백질 덩어리라는데요. 그 표현이 적당한지 모르겠는데요. 몸이라고 할 때 단순히 단백질로 된 그것만을 가르키는 것은 아니거든요. 구체적인 질료를 가지고 있는 우리 몸을 가리키고 있는 겁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부활생명이 은폐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몸으로 부활한다고 할 때 어떤 귀신, 혼령이 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거죠.

즉 그것은 실제로 그 육체이며, 우리의 현재적 생명의 전적인 연장(延長)이다. 계속됨이다. 이렇게 길게 늘여 뜨리는 거죠. 부활은 바로 우리 현재 삶의 연장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걸 오해하지 마세요. 똑같이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 식구들 모이고 색깔 어떻고 그런 차원으로의 연장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차원이 아니라 우리가 그 심층적 차원을 다 이해하거나 파악하거나 묘사해 낼 수 없는 방식으로 현재 우리의 인격들이 연장된다고 하는 거죠. 연장이라고 하는 표현은 약간 말하다 보니까 적절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연장말고 다른 단어는 없나요? 어쨌든 여기서 말하려고 핵심은 우리의 현재적인 진료적 삶 자체가 부활에서도 중요하다고 하는 겁니다.

이 연장은 하나님의 심판에 처해질 인간의 운명과 달리 그 심판을 통과되거나, 혹은 하나님의 영원성과 주권에 참여함으로써 영생을 얻거나 들림받을 그것이다. 그러나 죽을 우리의 생명이 이렇게 변화한다는 것이 고정불변한 무시간적 영원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굉장히 먹을 것이 많고 집도 멋있고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대한의 복지가 완벽하게 구비된 그러한 세상에서 영원무궁히 잘 먹고 잘산다는 그러한 것을 말하는게 아니라고 하는 거죠.

사도신경은 오히려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희망에 덧붙여 영생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 영생은 기독교의 부활절에 관한 신조형성에서 전해진 것으로서 죽음으로부터 부활한 자가 기대하는 그것이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이 점에서 미래 세계의 생명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또한 영생이 하나님의 미래와 상호 관련되어 있다고 본다. 동시에 이 영생에서는 현재적 생명과는 다른 종류의 무엇이 암시되고 있다. 앞에서 제가 연장이라고 하는 말이 적당하지 않다고 요런 거하고 연관되는 겁니다. 영생에서는 현재 생명과 다른 것이 언급되고 있는 겁니다. 우리의 현재적 질료의 삶이 그러한 부활생명에서 결정적 의미를 갖기는 하지만 그러나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생명과는 다른 종류의 어떤 것을 이야기하는 거죠. 거기서 영생이라는 말이 가능한 겁니다.

미래 세계의 생명, 미래 세계, 기독교인들이 기다리고 있는 영생과 부활의 세계입니다. 미래세계의 생명은, 영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러한 생명은 지금과 동일한 시간상에서 현재적 생명을 다시 공급받는 것 그건 아니다. 끝없는 연속, 계속되는 순환 반복하는 그러한 것은 아니다. 생명의 역동성을 우리가 현재 갖고 있는 생명의 심층적 차원에서 키워나감으로써 확대될 수 있다. 미래 세계의 생명은 확대될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그걸 만들어 낼수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닌거예요. 주어지는 거예요. 생명의 역동성을 우리가 현재 갖고 있는 생명의 심층적 차원, 이런 것을 이해하려고 하면 생명의 심층적 차원이 뭐냐 하는 것들을 알아야 되는 거겠죠. 이거는 시간의 현실성에 대한 심층적 차원하고도 맞물려 돌아가는 겁니다.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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