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해설 56강 - 제14장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3)

오늘 56강입니다. 지금까지 계속 공부를 따라 오신 분들은 눈치를 채시겠지만 오늘 56강 이게 마지막 공부, 마지막 시간입니다. 56번째 시간으로 이 책을 마치게 되겠습니다. 이게 시작한지 1년반 정도 되겠네요. 금년이 2010년이니까 2008년 9월부터 시작하여 1년이 휙 지나고 2010년 2월이되었네요. 세월이 많이 갔군요. 작년 12월에 이거를 다 마쳐야 했습니다. 12월에 바쁜 일이 있었구요. 그 다음 공부를 뭐야 해야 할까 잡히지 않아서 천천히 나가도 되겠다 생각하다가 마냥 늦추어 졌습니다. 1월에 한 번 했구요. 지금 2월에 한번. 오늘도 놓치면 2월도 넘어갈 것 같아서 다른 것 접어두고 강의를 준비했습니다. 56강입니다. 좀 짧아요. 우리가 지난 번에 두번에 걸쳐서 판넨베르크 14장을 공부한 거죠. 네 그렇습니다. 그렇게 했기 때문에 오늘은 기껏해봐야 세 쪽에 불과합니다. 세 쪽 정도요. 이 사도신경해설이 전체로 14장 까지로 되어 있어요. 나는 믿습니다로 시작했어요. 단락마다 작은 소제목을 적으면서 판넨베르크가 14장으로 나누어서 쓴 책입니다. 죽 창조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 부활 그리고 재림에 대한 희망, 성령, 교회까지 우리가 죽 살펴보았구요. 오늘 우리가 볼 내용은 14장 마지막 장의 세 번째 공부입니다.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14장 들어오면서 두번에 걸쳐서 이야기했죠. 제 이야기가 아니라 판넨베르크의 이야기를 보충하는 겁니다. 그런 방식으로 어쨌든 제가 두번에 걸쳐서 판넨베르크가 14장으로 묶어서 이야기한 그 내용 즉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를 설명했습니다. 네 그 두 가지를 연결해서 생각해 보시죠.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 이 두 가지가 사실은 서로 연결되는 거죠. 다시 산다. 이건 부활이겠구요. 영원히 산다. 영생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것은 영생은 아니죠. 이런 방식의 생명은 결국은 죽기 때문에 영생은 아닙니다. 우리가 다시 산다는 것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방식의 삶으로 복귀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런 삶은 또 죽는 거기 때문에요. 또 죽고 또 살고. 또 살다 죽고. 또 살고 이런 것의 영원한 반복을 영생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관점은 오히려 헬라사상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설명들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헬라 사상이 이야기하는 순환론적인 역사이해, 불교도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니까요. 윤회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영원한 반복, 불교가 계속 그렇게 하지는 않죠. 결국은 해탈을 한다고 하니까. 주로 그런 부분하고 기독교 신앙과 연관시킨다면 해탈이 바로 부활, 몸이 다시 사는 것, 영생, 이런 것하고도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두가지 종교를 서로 비교해서 공통점을 찾아 낸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적절하지 않습니다. 출발이 다르기 때문에 비슷한 개념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게 딱 들어맞는다 이렇게 말하기 힘든 거죠. 어쨌든 흐름, 거친 그림으로 볼때 해탈은 전혀 다른 열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부활하고도 연관된다고 볼 수 있는 거죠. 부활도 지금 같은 삶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새로운 삶으로 변화하니까요.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 이 두가지를 좀 생각해 보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상식적으로도 생각하고 또 가능하다면 전문적인 도움을 받아서 생각해보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이 깊어지고 탄탄한 토대를 갖게 될 거예요. 요걸 조금 더 생각을 해 볼까요. 제가 한 달동안 이거를 쉬었다가 다시하기 때문에 제가 텍스트 안으로 빨리 들어가지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을 좀 뜸을 들인다는 차원으로 서론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는 것을 실존적으로 좀 생각해 보라고 하는 거죠. 실존적이라는 것은 나의 삶의 실제적인 삶과 연결시켜서 생각하는 것이죠.

몸이 다시 산다 우리가 어떻게 다시 이해할 수 있을까요? 경험을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부활한다. 하나님 나라에 가서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그러한 기독교적인 답을 여러분들이 모를까봐 제가 이런 질문을 드리는 것은 아니예요. 실질적으로 그게 뭐냐 하는 것을 좀 생각해 보시라 하는 거죠. 그게 어떻게 감이 좀 잡히나요? 다시 산다. 죽었다가 다시 산다는 이 이야기가 질적으로 새로운 삶으로의 변화라고 하는데 과연 그게 뭘까라고 하는 거죠. 이게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알에서 새가 된다, 그렇게 말할 수는 일단 있어요. 그러니까 연속적인 부분들이 있지만 알이 없으면 새가 안되잖아요. 그러나 알의 생명과 새의 생명은 질적으로 다른 겁니다. 그냥 알의 상태에서는 새의 상태를 상상하기 힘듭니다. 새가 된 다음에야 알과의 차이를 실질적으로 이해할 수 있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는 부활의 생명, 다시 사는 삶, 이런 것을 실증적으로 확인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몸이 다시 사는 것에 대한 믿음이 막연하다거나 추상적이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네. 그렇게 생각해 보시고요. 다시 사는 것이 영원히 사는 것이죠. 그런데 영원히 사는 것도 감이 잡히나요? 영원하다고 하는 것 말이죠. 우리가 지금 시간을 인식하고 살 수 있는 것은 유한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거든요. 만약에 다람쥐 쳇바퀴 돈다고 한다면, 쉬지 않고 계속 돈다고 한다면 그 도는 행위자체가 무의미하기도 하고요. 그걸 인식할 수가 없는 거지요. 이 설명이 적절한 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시간을 계산할 뿐만 아니라 느끼고 나이도 먹고 시간이 흐른다고 하는 것도 알고 한 이러한 삶은 시간들이 결국 끝나고 가고, 왔다고 가고. 그것은 유한하기 때문에 가능한 겁니다. 그게 실질적으로 영원한 거라고 한다면 시간을 경험하기 힘든 거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영생을 얻었을때는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이러한 시간은 다른 의미가 될 겁니다. 그게 뭔지는 우리가 무슨 수로 말할 수 있겠어요. 창조 이후에 시간과 공간이 시작된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종말 이후에 새로운 세계는 그러한 창조 질서의 세계와는 다른 거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시간과 공간의 물리학 적인 작용을 통해서 구성된 이 세계가 정말 그 이후의 세계에서는 타당하지 않게 되는 것이죠. 전혀 다르게 되는 거죠. 그런데 그게 실질적으로, 리얼하게, Concrete하게 생각을 해야 될 겁니다. 그러한 훈련이 바로 이러한 신학 공부죠. 판넨베르크의 이런 점에서 기독교 신앙 전체를 요약하고 있는 사도신경을 공부하고 있는데 큰 도움을 주고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체계적으로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줍니다. 본문을 좀 보겠습니다. 제가 한 번 읽어 보았는데요. 결론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 중요한 이야기예요. 왜 중요한지는 또 제가 서론적으로 말씀드리지 않겠고 본분으로 들어가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책의 220쪽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현재 생명이 미래 세계의 영생으로 돌입한다는 것은, 이것이 곧 죽은 자의 부활인데, 고대 기독교에서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해당되는 한 사건으로, 또한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와 세계가 끝날 때 등장하게 될 한 사건으로 기대되었다.

이 문장을 제가 설명을 해야 될까요? 오늘은 분량이 그렇게 많이 않으니까 설명을 해도 되겠군요.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현재 생명이 미래 세계의 영생으로 돌입한다는 것은, 여기까지가 주부이겠군요. 현재 우리의 죽을 생명이 미래의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뭐냐는 것을 설명하는 거죠. 이것이 곧 죽은 자의 부활인데 미래 세계의 영생으로 들어가는 거거든요. 질적인 삶의 변화이거든요. 그것은, 영생은, 혹은 부활은 이렇다 설명하는 거죠. 고대 기독교에서 모든 인간에게, 고대 기독교는 초기 기독교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교부들이 활동하던 때의 그러한 기독교요. 기독교 교리가 형성되던 초기 기독교요. 3,4세기까지를 생각하시면 되겠군요. 고대 기독교에서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해당되는 한 사건으로, 모든 인간에게, 모든 인간, 보편은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보편으로, 일반적으로 해당되는 이야기라고 하는 겁니다. 모든 인간이라고 여기서 이야기 했는데 교회를 다닌 사람과 다니지 않는 사람을 이야기하는 건가요. 그런 것과 관계없이 부활의 보편성을 말하기 위한 설명일까요? 요 문장만 보고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고대 기독교에서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해당되는 한 사건으로, 또한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와 세계가 끝날 때 등장하게 될 한 사건으로 기대되었다. 무엇이요? 영생과 부활이 그렇다고 하는 겁니다. 우주론 적인 기대였습니다.

이 영생은 개개의 인간들이 죽은 다음에 즉시 발생하는 사건으로 이해되지는 않았다. 이게 조금 특성있는 표현입니다. 영생, 영원한 삶, 에드게스리벤, 이게 바로 eternal life 일텐데요. 이 영생은, 이 영생이 우리가 죽은 다음에 금방 영원한 생명, 지옥으로 들어가느냐 그렇게 생각하는데 여기서는 그거와는 다르게 생각하는 겁니다. 즉시가 아니라 최후의 심판에서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되었겠죠. 요게 조금 충돌하고 있습니다. 충돌하기도 하고 아직 끝나지 않는 기독교 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심판이, 혹은 심판이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하나님의 확인 절차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건들이 개별 사람들이 죽자마자 금방 일어나느냐? 아니면 모든 사람들에게 역사 끝날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때 일어나느냐 하는 것이죠. 이런 것에는 두가지 가능성이 다 들어있는데요. 이런 것이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는데 약간의 어려움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극복하지 못할 문제도 아닌 거예요. 그런데 그것을 자꾸만 초등학교 아이들처럼 아구가 딱 맞도록 해야만 이해를 해야만 한다면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개개인이 죽자마자 심판 받는다는 말도 옳고, 역사가 끝난 다음 모든 사람들이 죽은자까지 일어나서 한꺼번에 심판 받는다는 말도 옳은 겁니다. 서로 모순되는 이야기가 왜 옳느냐고 하는거죠. 개개인의 죽음, 삶과 이 세계의 종말의 차이가 그렇게 많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볼때는 수억, 수십억년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너무나도 까마득한 이야기 이기는 한데 그러나 하나님이라고 하는 관점에서 보면 그것도 한 순간에 불과한 거거든요. 그러니까 이러한 성서가 즉시 심판과 최후의 심판, 이런 것들을 서로 때에 따라서 다르게 이야기한다고 해서 서로 거기서 모순되는 것이 없습니다. 그 즉시 발생하는 사건으로 이해되지 않았다고 하네요.

개개인의 구원, 그리고 불행과 죄책과 죽음을 통해서 이리저리 찢겨버린 현존의 완성과 인류의 운명은 현 세계의 역사가 종말에 이를 때 발생하는 죽은 자의 보편적인 부활표상 가운데서 상호 연결된다. 우리의 삶이 여기서 정말 불안하잖아요. 상처가 많지 않습니까? 그러한 우리의 삶이 완성되는 것하고. 그리고 인류 운명 개개인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을 전체로 다 묶어서 인류라고 하잖아요. 개개인과 인류 전체요. 이 두가지 문제는 마지막때 일어나는 죽은자의 보편적 부활가운데서 서로 연결된다는 이야기죠. 바로 제가 앞서 설명한 거하고도 연관되는 이야기죠. 개개인의 심판과 그리고 종말의 모든 일들에 임하는 최후의 심판이 다 연결되어 있다고 이야기했잖아요.

이것은 죽은 자의 보편적 부활이 최후 심판과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계시와 맺는 완벽한 결합에서 드러난다. 보편적 부활이라고 하는 말을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보편적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런 것들이 부활, 심판, 하나님 나라, 계시, 결합가운데서 이해할 수 있다고 하는 거죠.

이 하나님의 나라는 인류의 사회적 운명이 성취되는 것을 말한다. 사회적 운명, 개개인의 차원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체로 연결된 인류의 운명이라고 하는 거죠. 하나님 나라는 개개인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와 연관된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죽은자의 부활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보편적인 생명사건이라고 하는 뜻이죠.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기대는 그 근원으로부터 개개인의 생명문제와 연관되어 있으며, 또한 선택받은 백성과 인류에게 약속된 구원사건의 몫에 대한 질문과 연관되어 있다. 두가지가 같이 연결된다는 것이에요. 개개인의 문제와 인류 전체의 문제인 거죠. 어느 한 쪽으로만 쏠리게 되면 곤란한 거죠. 개개인이 없는 인류가 없고 인류 빼고는 개개인을 이야기할 수 없죠. 개개인으로서만 인간 경험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두가지가 다 연결되는 거죠. 혼자 딱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거기서 인간됨이 인식되고 경험될까요? 극단적인 예를 들어서 아무도 없고 혼자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이 여기서 해당되겠군요. 거꾸로 사회적인 관점으로만 인간을 다 결정할 수는 없는 거거든요. 사회적인 연대를 갖고 있으면서도 인간 개개인으로서도 인간 특성을 유지할 수 있거든요.

개체 인간의 삶에서 활동하는 하나님의 정의로움을 어떻게 보증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은 현 생명의 부정적인 대차대조를 피안적으로 균형 잡으려는 사상이 아닌가라는 의아심을 불러일으킨다. 무슨 말이냐 하면요. 이 번역이 좀 정확하지는 않는데요. 다음과 같은 뜻입니다. 지금 부활과 영생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기독교가 말하려고 하려는 것은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받은 손해를 나중에 하늘 나라에가서 피안적 차원에서 보상받으려고 하는 거에 불과한 게 아니냐는 의심이 있는거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천당가서 잘 먹고 잘 산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면 이 땅에서 억울하게 당해도 그거뭐 만족하게 살면 되지 않으면 되지 않느냐는 겁니다. 막스가 종교는 아편이라고 했잖아요. 피안적으로 위안을 주는 것에 불과하다면 결국은 임시 조치고요. 현실이 아니라고 하는 점에서 그건 아편과 같은 거죠. 지금 판넨베르크가 그러한 대목을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죽은 자의 부활과 죽은 자의 심판은 현 역사가 끝날 때 모든 이들이 개인적으로 감당해야 할 사실이며, 또한 이것이 종말에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서막이라는 생각은 개인이 감당해야할 인간 운명의 성취를 모든 다른 개인이나 인간사회와 연결시킨다. 바로 앞서 말씀드린대로 기독교 신앙이 현재 이 땅위에서 받은 손해를 피안적으로 보상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라는 의심에 대해서 그렇지 않다. 그걸 말하는 겁니다. 죽은 자의 부활과 심판은 묶여 있는 거죠. 심판을 거쳐야만 부활 생명을 얻을 수 있고 거기서만 영생이 가능하니까요. 이런 부활 신앙 이런 것은 심판과 연관된 거예요. 개인이 감당해야 될 몫이고요. 그리고 그 다음 문장이 조금 애매한데 그래도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이것이 종말에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서막이라는 생각은, 이걸 바꿔서 말한 것이지만 부활이라고 생각하시면 되어요. 영원한 생명이라고 생각하시면 되어요. 그러한 영생이라는 신앙은, 기독교 교리는 이런 뜻이지요. 이것은 개인이 감당해야할 인간 운명의 성취를 모든 다른 개인이나 인간 사회와 연결시킨다. 부활, 영생, 심판 기독교 신앙은 개개인의 삶에서 이땅 에서의 삶의 손해 이런 것들을 피안적으로 보상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거죠. 하나님 나라의 차원에서 부활을 생각하는 거잖아요. 개개인의 문제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류 운명이 완성되는 것하고 개인의 이러한 부활에 대한 신앙, 약속 이런 것이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 겁니다. 고 문제는 그 다음 패러그래프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유물론에 근거를 둔 막시즘 혹은 막시즘류의 사상이나 정치 이념들이 본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그러한 생각들이 정당하지 않다고 하는 생각과 아울러서 그러한 세속적인 유토피아이즘이 갖는 문제들을 판넨베르크가 여기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18세기 이래로 진행된 기독교 종말론의 세속화에서는 이런 연결이 실종되었다. 뭐요?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 나라의 서막으로 영생과 부활을 연결시키는 거죠. 그거를 18세기 이래의 사회 혁명 이데올로기들이 놓쳤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완전한 세계, 하나님 나라죠. 그런 것들은 하나님 스스로 행하실 하나님 나라, 심판, 영생, 부활 이런 차원은 배제된 것이고 인간 자신이 실행하는 프로그램으로 떨어진 것이죠. 이러한 사회 혁명적인 운동들이 18세기 이후에 있었던 거죠. 평화와 정의로 실행되어야 할 완전한 사회의 목표, 즉 사람이 사람을 지배하지 않는 무계급 사회의 목표는 현 세계의 조건 하에서 인간 자신에 의해서 실현되는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근대의 이러한 미래 신앙은 미래의 완전한 사회에서 휴머니티가 미래적으로 현실화될 때 과거 세대의 개인들이 참여할 몫이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그 어떤 대답도 더 이상 줄 수 없다. 그러니까 완전한 복지가 되고 민주화가 된 사회에서 그거를 누리는 사람들은 그 시대의 사람들 뿐만이지 과거에 그거를 위해서 참여한 사람들에게는 어떤 몫이 돌아갈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답을 주지 못한다는 거죠.

이 근대의 미래신앙에는 아마도 인류의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개인의 행복이 희생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근대의 혁명운동이 태동되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신앙적인 그러한 혁명론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거예요. 개개인들의 몫은 좀 줄어들더라도 유토피아죠. 정말 에덴 동산과 같은 사회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 최후의 목표가 된 그러한 운동들인 거죠. 결국은 모든 개인들의 삶은, 그리고 그들의 행복은 희생되어도 된다고 하는 거죠. 개인을 희생시킴으로서 사회발전을 이룬다고 하는 거죠. 그래서 공산주의가 가차없는 계급투쟁, 인정사정 보지 않고 이데올로기를 위해서 가족의 관계마저 절단해 버리는 그러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 거죠. 그들에게 개인의 행복은 사회 발전을 위해서 희생되어야 한다고 확신한 겁니다.

즉 인류가 개인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더구나 억압받지 않는 미래 사회의 인간들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닌 것처럼 말이다. 번역이 좀 명확하지가 않는 것 같아요. 이거 혁명운동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을 지적하고 있는 거거든요. 이걸 왜 판넨베르크가 이야기하고 있는가 하면요. 그러한 사회 혁명운동들이 기독교의 어떤 영생, 부활, 종말론적 신앙과 투쟁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거를 가르켜서 바로 앞에서 기독교 종말론의 세속화라고 이야기했거든요. 미래의 새로운 세계를 향한 전망인 종말론이 사회안에서 무계급 사회를 실현하는 목표로 작용하게 된거죠. 헤겔의 영향력이 큰 겁니다. 혁명운동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인류가 개인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거죠. 판넨베르크가 볼 때는 인류는 개인으로 이루어지는 거지. 개인 없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혁명운동에서는 개인은 없어도 인류가 되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리고 인류는 미래 사람들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데도 그런 것처럼 이야기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자기 생각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개인이 모여 인류를 이룬다는 생각과 반대되는 인류는 냉혹한 추상*일 뿐이다. 막시즘 혁명운동의 인간론은 추상이라고 하는 거죠. 이러한 추상은 개인을 거부함으로써 이러한 생각이 정치적 현실로 전환되는 곳에서 매우 확실하게 비인간적으로 작동한다. 개인을 가차없이 처단할 수 있는 거죠. 아마 이게 요즘 북한에서 벌어지는 비인간적인 행위들과도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북한은 패쇄적인 집단이라서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우리가 다 알지 못하잖아요. 다 알지 못하지만 알려지는 것만 보더라도 좀 문제가 많이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들에게는 개인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으니까요. 혁명완수를 위해서 그것에 방해가 되는 것들은 확실하게 제거하고 있습니다. 그게 좀 어려운 문제예요.

인류가 감당해야할 인간 운명의 실현은 인류에 포함된 모든 개인의 인간적 운명이 함께 실현될 때만 고려될 수 있다. 이게 바로 판넨베르크가 말하고 싶은 대목이죠. 인류 운명의 실현은 모든 개인들의 운명이 거기 연결되어야만 한다는 거죠. 미래를 위해서 지금 우리가 희생되어도 좋다, 전체를 위해서 개인이 희생되어야 된다 그런 방식으로는 아니다라는 거죠. 이것에 비해서 기독교의 부활신앙, 영생신앙, 심판 이런 것은 전체를 다 같이 묶어내는 가르침이기 때문에 이러한 혁명운동이나, 사실은 뭐 자본주의에도 비슷한 원칙들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세속적인 종말론을 넘어서는 거죠.

바로 이 점이 모든 죽은 자의 보편적 부활이라는 고전적 기독교 교리에서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놀랍죠. 모든 자의 부활이라는 기독교 교리에 모든 인류 개개인을 포함한 전체가 다 연루된다고 하는 생각이 담겨 있다고 하는 겁니다. 제가 번역을 했지만 평소에 놓쳤던 부분인데 지금 읽으면서 다시 한 번 더 새롭게 깨닫습니다. 기독교 교리라는 것이 장난이 아니라는 거죠. 확실히 알 수 있는 거죠. 최근에 나온 혁명운동, 민주화 운동, 예를 들자면. 그러한 어떤 이데올로기 그런 것보다 훨씬 더 건강하고 훨씬 더 근원적인 관점에서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겁니다. 요 부분을 여러분도 기억을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죽은자의 보편적 부활이라고 하는 기독교 교리에는 엄청난 인류 역사에 대한 비전이 들어있다고 하는 겁니다. 개개인과 인류 전체를 하나로 묶어서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겁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부활은 하나님 통치의 개시와 동시에 발생한다. 즉 죽은 자의 보편적 부활과 최후심판 없이, 또한 모든 개인의 참여 없이는 하나님 나라도, 인류의 실현도 없다는 말이다. 이러한 기독교적 기준은 인류가 정치적 목표를 설정함으로써 실현된다는 잘못된 이념을 막아내는 데 적절하며 불가결한 요소다. 참 중요한 부분을 지적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정치적 목표가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교리를 표현하고 있는데 교리라고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아서 다른 단어를 생각하고 싶은데 딱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냥 이렇게 거칠게 표현하겠습니다. 정치적 목표가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선언, 종교적 계시 종교적 명제들이 앞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기준이 휴머니티의 이름으로 관행화된 예언의 비인간적 성격을 노출시킴으로써 발생한다. 막시즘,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이 여기에 계속되는 문제예요. 이 공산주의는 휴머니즘을 밑바탕에 깔고 있는 거거든요. 그러한 이름으로 관행화된 비인간적 성격을 노출시킨다. 왜 비인간적이냐는 것은 제가 앞서 말씀드렸습니다. 혁명 목표를 달성하기위해서는 개인은 희생되어도 된다는 생각이 거기에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것이 굉장히 고상한 휴머니즘으로 실천되거든요. 그런 것들을 정확하게 포착할 수 있어야지만 기독교 신앙의 부활과 심판 이런 것들이 정치적 목표를 넘어서서 혹은 정치적 문제점들을 교정해 내는데 근원적인 근원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평화와 정의 가운데 도래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념으로부터 항상 거듭해서 정치적, 사회적 삶의 갱신이라는 충격들이 도출된다. 앞에서는 희생된 개인들의 문제를 부활과 연관해서 설명했고요. 이제는 기독교 신앙이 그러한 개인의 운명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도 그건 이야기한건데요. 그것은 하나의 적용부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생각으로부터 정치적 삶의 갱신이 나오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희망이 뜻하는 핵심도 역시 인류의 사회적 운명이 실현된다는 사실이다. 예수의 사명 가운데서 임박한 하나님의 현재적 통치와 다가올 하나님 나라의 메시야인 예수에 대한 기독교적 신앙은 하나님 나라의 미래를 지향하고 있는 교회의 자명성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작용 없이는 거할 자리가 거의 없다. 사회적 작용. 개인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까지 확장되는 거죠. 개인이 중요하지만 동시에 인류 운명이 똑같이 중요한 것이거든요. 개인과 인류, 부분과 전체, 이러한 보편적 부활, 하나님 나라의 서막, 심판이라고 하는 기독교 교리안에 들어있는 내용인거죠.

*하나님의 나라는 사회적 지평을 거부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개인이 사라진 어떤 이상화된 사회만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 판넨베르크는 개인이 무시된 인류를 추상(Abstraktion)일 뿐이라고 경고한다. 즉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희망을 견지하고 있는 개개인들이 사회적 변혁을 이루는 것이지 개인이 무시된 사회적 이념이 구원의 세계를 이루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히틀러의 제삼제국은 물론이거니와 개인보다는 사회적 지평을 훨씬 강화시키고 있는 공산주의적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통치가 도래한다는 자신의 사신을 예수가 개인에게 제시했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개혁으로서 접근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무의미한 게 아니다. 이러한 진술에서 우리는 판넨베르크가 보수적인 신학자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민중 신학이나 또 해방신학, 여성신학 이런데서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개혁을 근원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지금 우리가 여기서 확인하고 있듯이 판넨베르크는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가 개인에게 해당되는 거라고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관계는 세계종말의 임박에 대한 기대를 시간적인 조건에서만 생각한 결과는 아니다. 개인이 되고 그다음에 사회가 된다는 시간의 절차상의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죠. 예수가 정치적으로 각인된 메시야 칭호를 거절했다는 것은 정치적 변화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곧장 접근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반대로 하나님 나라의 임박과 현재를 규정해나가는 능력에 대한 종교적 신뢰가 사회적으로 작용해야한다는, 항존적이고 의미심장한 암시를 담고 있다. 예수님께서 메시아 칭호를 거절하셨잖아요. 그게 뭐냐?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 그러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네요. 오히려 반대로 본인 스스로 메시아라는 인식이 있었지 않냐?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했고 생명의 떡이라고 이야기 것 등등 예수님이 자기 정체성에 대한 분명한 진술이 있지 않냐? 그런데 왜 메시아 칭호를 거절했다고 하느냐. 네 가이사랴 빌립보 도상에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고백을 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의 고난, 그런 것들을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된다고 말리지 않습니까? 그때 예수님께서 사탄이라고 이야기했거든요. 고난, 죽음, 메시아하고는 연관이 없는거예요. 이스라엘의 메시아로서 자기 정체성을 이해한 것은 아닙니다. 거절한 겁니다. 그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공생애때 있었던 사건을 놓고 본다면 하나님 나라가 그러한 정치 경제적인 변혁을 통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종교적인 차원에서 시작해서 그것이 사회적으로 밀고 들어간다는 그러한 뜻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실현과 죽은 자의 보편적 부활이 연결됨으로써 종말론적 희망에 영감받아 실행되는 사회의 모든 정치적 갱신은 하나님 나라의 평화질서를 오직 우회적인 유비로서만 실현할 수 있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직접적으로 어떤 정치적인 프로그램을 실현함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실현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런 것들은 다 우회적인 유비일 뿐이라고 하는거죠. 그러면 하나님 나라는 공중에 떠 있는 거냐? 그거는 아닙니다. 그게 긴장감이 있는 거예요. 하나님 나라가 임박했다고 하는 사실에 우리가 우리 삶을 던질 때에 그것이 종교적인 경우예요. 그 당시에 그러한 깨우침들이, 회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요. 그러한 인식들, 종교적 경험들이 인류 운명과 연관해서 사회적인 차원으로 변혁적 힘으로 작용할 수 있는 거죠.

이 평화질서가 현실적으로 발생하는 그 수준은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질서가 그 구성원들에게 그들의 개인적 운명을 어느 정도로나 현실화시킬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여기서 이 운명은 개인들이 주관적으로 느끼고 있는 모든 필요성으로부터 해방 받는 것과 일치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한 사회를 판단할 수 있는 휴머니티의 등급은 그 휴머니티가 인류의 과거, 그리고 그들이 속한 국가의 과거와 불편부당하게 맺어진 관계 속에서 측정된다. 그리고 개인의 생명도 역시 현 사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개인의 심층적 차원이 포함되어 있는 역사에 연루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러한 해방, 휴머니즘 이런 것들이 객관적인 기준들이 있어 갖고요. 거기서 그런 것들이 확인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라는 뜻이죠.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를 어느 정도까지 정치적으로 실현해야 그것이 가능하냐 하는 것을 이렇게 딱 끊어서 객관적인 기준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런 거죠. 우리들에게 심층적인 차원이 있기 때문에 전체적인 것으로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의 어떤 민주적인 질서들을 북한에게서도 똑같이 요구해서 하나님 나라의 실현 이런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말할 수 있는 거죠. 거기서 끝나는데요. 마지막 문장에 가까왔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오는 세대나 마찬가지로 인류의 과거 세대를 포괄하기 때문이며, 또한 하나님의 통치가 도래한다는 희망은 마지막 세대의 구원만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사가 담지하고 있는 모든 시대의 변용(變容)**을 철저하게 지향하기 때문이다. 이 변형이라고 하는 것이 독일어 페어클레롱 알러 에포켄으로 되어 있습니다. 시대라고 제가 번역했는데. 변형이 뭘까요? 제가 역주를 달기는 했는데 그 역주가 도움이 되실까요? 책에 있으니까 보시기로 하구요. 그냥 간단하게만 이렇게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냥 말 그대로 변화되는 것, 단순하게 변화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밝히 드러나게 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모든 시대가 환하게 모든 시대에 있었던 일들이 환하게 드러나는 어떤 것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여튼 이 문장에서요.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할 것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어떤 한 시대만이 아니라 전체 시대와 연관되어 있는거예요. 전체 시대를 포괄하는 거죠. 원시 시대 살았던 어떤 사람들의 경험도 포괄하는 거죠. 그리고 앞으로 미래에 살게될 사람들오 마찬가지구요. 어느 특정 시대에 주어졌던 삶의 가치들만 최고로 하나님 나라의 실증이다라고 말 할 수 없는 거죠. 각각 모든 시대는 하나님 나라의 빛을 받아서 새로운 생명의 세계로 들어가야 되는 거죠. 거기에 참여해야 되는 거죠. 그걸 변용이라고 하는 겁니다.

**판넨베르크의 신학적 착상이 근본적으로 종말론적이며 미래적 존재론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간을 일종의 線적인 의미로 해석해서 단순히 종말의 우선권을 강조하려는 것은 아니다. 물론 모든 것이 종말에 온전하게 드러나게 되겠지만, 여기에는 곧 종말이 이르기 전역사인 모든 시대의 변용(Verklarung aller Epochen)이 전제된다. 말하자면 현재는 당연히 종말론적으로 규정되어야하지만 미래도 역시 현재와의 연결 속에서 그 현실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결국 판넨베르크 신학의 중심개념인 “역사로서의 계시”로 돌아가게 된다. 역사는 전체(Ganzheit)로서, 하나

다음 문장입니다. 그게 어떻게 일어나냐 하는 거죠.

하나님의 권능이 빛을 발하는 신적 심판의 불을 통해.

이게 판넨베르크 책의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56강까지 마쳤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이 판넨베르크 책을 번역하고 몇 번 읽기도 한 사람으로서 다 알고 있었던 것 같은 데 다시 읽고 강의하면서 새롭게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러한 신학적 고수의 책은 한 번 읽고 책장에 내버려둘께 아니라 반복해서 읽어야 된다는 것을 다시한 번 더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강의 하는 동안 때에 따라서는 시간에 쫓겨서 힘들다 느낄 때가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즐거웠습니다. 여러분들에게 그런 시간들이었기 바랍니다. 그동안 경청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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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6]사띠아

2010.02.28 13:30:19
*.163.106.114

목사님.

저도 지난 1년 반 동안 사도신경해설 강의가 있어 행복했습니다.

다시 읽어 나가면서 녹취할때 깨달았던 것을 다시 기억하며

깨닫지 못했던 것들 다시 깨달으면서 

한 걸음 한 걸음 기독교 신앙속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 세계가 제대로 형성이 되어

제 삶이 풍요로와 지고 나아가

인도 젊은이들에게 펼쳐 나갈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다시 한번 목사님의 노고에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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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10.03.01 22:17:09
*.120.170.243

사땨 선교사님,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우리 한번 분위기 좋은 곳에서 멋진 저녁을 먹어봅시다.

와인을 곁들여서요.

제가 그렇게 대접할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저는 지난 며칠 정신 없이 보냈습니다.

토요일에는 구미와 경주를 돌아서 하양에 왔구요,

주일에는 서울에,

오늘은 부산에 다녀왔습니다.

벌써 3월이 시작되었습니다.

복된 계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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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9]유니스

2010.03.01 22:52:58
*.217.40.75

드디어 긴 여정의 끝에 다다르셨군요.

정 목사님과 사땨 선교사님, 두 분 너무 수고하셨습니다.

제가 이런 답글을 달아서 여기까지 따라온 줄 아시겠지만

아.....아.....아직 입니다...ㅡㅡ;

요리를 마치셨으니 단단한 음식을 잘 먹어가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두 분께 대접을 해드리고 싶습니다.

그 날이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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