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신학이란 무엇인가?

신학입문 조회 수 6337 추천 수 3 2010.09.20 10:43:26

1장

신학이란 무엇인가?

 

신학은 신(神)과 학(學)이 결합된 용어다. 영어 theology는 헬라어 데오스와 로고스의 결합이다. 하나님을 직접 경험할 수 없는 인간이 하나님에 관해서 이성적으로 해명한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불가능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불가능하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인간은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창조주이기 때문에 둘 사이에는 근본적인 단절이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의 언어가 하나님을 담아내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인간은 언어를 통해서 진리를 추구해 왔으며, 그것보다 더 나은 방법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언어로 해명하는 작업은 계속되어야한다. 이제 우리는 한 학기 동안 신학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질문할 것이다. 그리고 신학의 분과와 그것의 방법론에 대해서 말하게 될 것이다. 우선 신학적인 사유가 무엇인지, 그것이 왜 교회에 필수적인 작업인지, 오늘 한국교회가 왜 신학을 멀리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묻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겠다.

 

실용적 가치에 기울어진 오늘의 신학

오늘의 신학 교육이 당면해 있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이 시대가 요청하고 있는 ‘실용성’에 지나치게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즉 목회의 현장에서 써먹을 수 있는 것만을, 또는 그런 기준에서만 신학적 담론이 운용되고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신학대학의 커리큘럼이 이론과목보다는 실천과목에 집중되며, 이론학문이라고 하더라도 역시 현장의 쓰임새라는 관점에서 주로 접근되고 있다. 신학대학의 고급 과정에 있는 학생들 대부분이 목회상담을 전공한다는 사실이 이를 단적으로 확인시켜준다. (대구에 있는 모 종합대학교 대학원 신학과의 경우가 대표적으로 그렇다. 박사과정에 있는 학생들이 대부분 목회상담을 전공으로 한다.). 물론 신학이 실용적 가치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이 시대의 요청에 귀를 막고 고고하게 비현실적인 관념의 세계에 빠져버리거나 고담준론(高談峻論)에 머물러 있는 게 능사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어쩔 수 없이, 어쩌면 당연하게 물(物)의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구원을 목표로 하는 게 교회의 사명이며, 그리고 기본적으로 신학이 교회의 기능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실용적 가치를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그렇지만 이 시대가 요구하는 그런 실용성이라는 게 과연 참된 것(reality)인지 아닌지에 대한 충분한 반성 없이 거의 일방적으로 그것에 휩싸여버리는 것은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값싼 ‘대중추수주의’(populism)에 불과하다.

이 시대의 실용주의적 치우침 현상은 일반 대학의 커리큘럼이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살펴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철학개론 과목이 필수에서 선택으로 바뀌고 대신 영어나 컴퓨터에 연관된 과목들이 교양 필수 자리를 차지했다. 더욱이 학생들조차도 대학공부를 단순히 취업의 기회로만 생각한다는 점에서 이런 실용주의적 치우침 현상은 극으로 치닫고 있다. 대학(大學, University)은 동양의 틀에서 볼 때 ‘큰 배움’이며, 서양의 틀에서 ‘보편적 가치’인데도 불구하고 어느 사이에 하나의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신학대학도 역시 목사 자격증을 획득하기 위한 학원 기능에 충실하다는 점에서 예외가 아니다.

이런 현상은 비단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全)지구적인 문제라 할 수 있는데, 그 밑바닥에는 ‘경제만능주의’가 뿌리를 박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40여 년 동안 지속된 이데올로기 경쟁구조가 이제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허물어지고 순전히 경제 일원론적인 경쟁구조로 전환되었다. 특히 동유럽의 현실 사회주의가 완전히 몰락한 이후 자유시장 경제를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의 독주 체제가 형성되자 모든 세계가 경제적 가치만을 최우선으로 삼게 되었다. WTO, FTA, 우루과이라운드 같은 경제 전문용어가 촌부와 아낙네들에게도 일상어처럼 받아들여지는 것을 보면 이 세계가 얼마나 철저하게 경제 중심의 일방적 구조로 흘러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더구나 경제 선진국들을 중심으로 지구의 단일 경제체제 구상이 본격화되면서 이런 경쟁구도는 우리의 현실 삶에 훨씬 가깝게 다가오고 있다. 이런 전반적인 경향을 ‘신자유주의’라고 하는데, 민족, 이데올로기, 종교 같은 차이를 넘어서서 온 세계를 자유로운 경쟁 체제 안에서 새롭게 구축하자는 말이다. 이는 나쁘게 볼 때 토끼와 거북이를 같은 조건에서 달리기 경주를 시키자는 것이며, 좋게 해석해서 지구 전체의 복지를 추구하자는 것이다. 앞으로 이런 문제들이 이런 자유경쟁 구도를 견인해나가고 있는 선진국들의 구상대로 흘러갈지, 아니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복병을 만나게 될지 우리는 전혀 예단할 수 없다. 다만 이런 시대정신은 물적 토대를 확대시킴으로써 인간의 복지를 꾀할 수 있다는 자본주의와, 그리고 자본의 횡포로 인하여 벌어진 노동의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서 무산자 계급이 주도적인 통치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공산주의에 내재하고 있는 일종의 물신주의*가 그 역량을 지속시키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결국 물적 토대의 확립이 우리 삶의 현장에서 절대적인 기준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오늘의 모든 학문이 실(實)과 용(用)의 범주 안에서만 작동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외면상 서로 상반된 이념같이 보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인간 구원을 유물론적 토대에서 확보한다는 점에서 같은 길을 걸었던 사상이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자본주의는 자유로운 시장경제를 그 방식으로 채택하는 반면에 공산주의는 상당히 통제된 국가경제를 채택했다는 것이다. 시장경제와 국가경제라는 경제 용어가 여기서 바르게 사용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경제를 시장 논리에 완전히 맡겨 두는가, 아니면 국가가 통제하는가에 따라서 그렇게 구분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역사에서 사라진 현실의 공산주의와 이란성 쌍둥이라고 볼 수 있는 자본주의가 훨씬 노골적으로 무한한 경쟁구조를 심화시켜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도 역시 인류는 물신을 섬기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런 물적 토대에 근거한 일원론적 실용주의가 과연 우리의 삶에 참된 내용을 채워주고 있는지 곰곰이 되새겨보아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서로의 입장이 좁혀질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주장들이 있기 때문에 더 이상 구구한 논의를 벌일 필요가 없다. 다만 신학적인 차원에서 이런 현상에 대해 한 마디 한다면, 신의 부재로 인한 인간의 허무주의가 발현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격동의 20세기가 끝나면서 더 이상 자신의 열정을 불사를만한 대상(이념 논쟁)이 없기 때문에 인간의 영원한 욕망 대상이었던 경제적 만족감을 추구하게 되었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현상이 아니다. 설교 조의 이야기가 될지 모르지만, 아마 이런 현상은 그렇게 길게 가지 못할 것이다. 이라크 전쟁에서 볼 수 있듯이 경제적 욕망의 충족을 위해서 대우 다양한 글로벌 이벤트를 생산해내겠지만 그것도 제한적인 일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빵’만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 문제의 해결은 인간 자체만의 힘으로는 결코 가능한 게 아니다. 이렇게 말하면 니체, 프로이트, 마르크스가 또 다시 역정을 내겠지만 인간에게 있는 ‘삶에의 의지’는 그것이 아무리 본질적이고 강렬하다고 해도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 여기서 핵심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실질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따라서 신학은 이 시대가 무엇을 요구하는가, 그들의 실용주의적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길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점보다는 하나님의 존재와 그 인식에 관해 집중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이것이 물적 토대보다 훨씬 실제적인(real) 사태이다.

여기서 우리는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신학이 하나님의 존재론에 관한 질문과 대답에 그 중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실제적인 삶과의 연관성이 간과되어도 괜찮다는 말은 아니다. 흡사 사막의 수도승들처럼 이 세상의 삶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고 단지 영적인 세계만을 추구하는 것만이 참된 기독교 신앙은 아니다. 영적인 게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좀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지만, 일단 이 세상과 저 세상, 즉 차안과 피안을 이원론적으로 차단시키는 것은 바람직한 신학적 태도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나라에 처음 복음을 이식시킨 미국 선교사의 신앙에서 볼 수 있는 대로, 미국의 흑인 노예들에게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하늘나라에 갈 테니까 아무런 걱정 근심을 하지 말라고 위로하면서 그런 노예와 주인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시키는(status quo) 신앙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즉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상의 삶을 추상화시키는 것은 분명히 기독교적인 삶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힘으로 어떤 절대적인 세계를 끌어내거나 더 나아가 성취할 수 있다는 생각도 역시 기독교적인 태도는 결코 아니다. 신학은 이 두 영역을 경계로 삼고 있다. 신학은 차안적 현상과 피안적 본체, 또는 물(物)과 영, 구체성과 보편성 사이의 경계에서 참된 리얼리티를 확보하려는 작업이다. 이를 위해서 신학은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초월과 내재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관심을 집중한다. 하나님의 존재와 인간의 인식 사이에 벌어지는 변증법적 작용이 바로 신학의 자리라고 할 수 있다.

 

사유의 길, 또는 지평?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야 한다. 신학의 자리인 하나님의 존재, 또는 그의 계시와 인간 인식의 변증법적 작용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그 작용의 힘은 무엇일까?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 힘을 성령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대답은 그렇게 명확한 게 아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바로 하나님의 존재론이기 때문에 성령이 하나님과 인간을 중재하는 도구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주체로, 인간을 객체로 설정하고, 또는 그 반대로 설정한 채 그 사이에 성령이 자리 잡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결국 주객도식(Subjekt-Objekt-Schema)에 머물러 있는 입장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어떤 사물을 객체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주체와 객체를 엄밀하게 대치시킴으로써 객체의 확실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기는 하지만, 근대이후에는 더 이상 이런 주객도식의 구도는 설득력을 잃었다. 더구나 이런 사물의 구도를 근본적으로 벗어나 있는 하나님의 존재를 언급해야 하는 신학에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객체가 아니고 단지 인간의 주관적 의식 안에서만 작용할 수 있는 그 무엇이라는 말인가? 이런 식의 실존주의적 하나님 이해는 하나님을 인간학으로 끌어내릴 개연성이 있기 때문에 주객도식보다 훨씬 문제가 많을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이런 신론과 계시론에 연관된 많은 문제들을 더 이상 다룰 수 없다. 다만 우리의 주관과 객관 의식이나 그런 개념을 뛰어넘어 존재하는 하나님이 신학의 주제이기는 하지만 결국 인간이 그 하나님을 어떻게 인식해낼 수 있는가 하는 점도 여전히 신학의 중심 문제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 인식 작용은 곧 인간의 사유능력에 달려 있다. 그 사유 능력이 도대체 얼마나 확실한가 하는 점은 또 다시 논의되어야 할 문제이지만 이런 인간의 사유 활동이 없다면 신학은 무의미하다. 사람에 따라서 신학은 인간의 이성 작용이라 할 사유보다는 성서가 강조하고 있는 ‘믿음’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철학은 당연히 이성의 사유에 의존하지만 신학은 인간의 영적인 활동이라 할 신앙이라고 말이다. 교리사적인 점에서 볼 때 이성과 믿음의 관계는 교부 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 제기된 문제이기 때문에 한 두 마디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최소한 기독교 공동체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어느 누구도 믿음의 역할을 근본적으로 부정할 사람도 없으며, 그렇다고 이성의 활동을 근본적으로 부정할 사람은 없다. 일단 이렇게 정의를 내리면 될 것 같다. 기독교의 복음이 믿을 만하다는 토대를 확보하기 위해서 우리 신학자들은 이성적으로 사유해야만 한다. 다른 논리는 접어두고 이성적 존재인 인간을 창조한 하나님을 우리가 믿는다면 ‘호모 사피엔스’*인 인간의 사유활동을 부정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인간의 사유 능력이 곧 인간적 특징을 드러낸다는 말은 일단 옳다고 보아야 한다. 여기서 ‘일단’이라는 단서를 붙이는 이유는 고고학적으로 ‘호모 사피엔스’보다는 ‘호모 에렉투스’가 인간 종의 특성에서 우선적이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인간이 동물과 구분되는 첫 특성이 뇌의 발달로 인한 사유능력에 있는 것 같지만 이 뇌의 발달 자체가 직립 보행의 결과로 얻어졌다고 주장하는 고고학자들이 있다. 그들이 말하는 호모 에렉투스는 2백만년 전 인간과 침팬지의 공동 조상으로부터 최초로 분리되어 ‘직립 보행’을 성취한 인류 조상을 일컫는 용어이다. 침팬지와 인간의 공동조상이 살던 아프리카의 지리적 변화로 인해 초원 지역에서 진화를 거듭하던 이들이 어느 순간에 직립으로 보행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서 뇌의 양적 성장을 가능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보행에서 자유롭게 된 팔과 손이 도구를 생산해낼 수 있을 정도의 기술을 습득하게 되었다. 또한 직립으로 인해서 성대가 발달했다는 것도 역시 인간의 언어발달에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이런 고고학적 해명에 따라서 인간의 사유 능력이 추후적인 특성이라는 점이 확실하다고 하더라도 사유의 능력이야말로 가장 결정적인 인간 특성임에 틀림없다. 현재 인간은 이 사유의 능력을 통해서 인간 이외의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그 존재를 가능하게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유는 단지 눈앞에서 벌어지는 어떤 사건이나 현상에 대한 객관적 인식, 또는 그것에 대한 가치판단에 머무는 인간의 심리작용이 아니라, 오히려 <cogito, ergo sum>이라는 명제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존재론적 깊이를 담지하고 있는 영적인 힘이다. 그래서 사유는 인간으로 하여금 경험의 범주만이 아니라 선험적인(apriori) 세계까지 들어갈 수 있도록 안내자의 역할을 한다. 그런 사유의 특성을 가리켜 ‘사유의 길’, 또는 ‘사유의 지평’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사유는 길을 간다. 사유는 지평을 연다. 인간은 사유를 통해서 진리의 길을 가며, 진리의 지평으로 개입한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사유는 인간이 가야 할 길로 우리에게 계시되며, 이를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어떤 새로운 세계와 그 지평에 도달하게 한다. ‘사유의 길’을 가는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은 ‘길’의 메타포이다. 길의 메타포가 한 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여기서 두 가지로 간추린다면 다음과 같다.

 

도상의 존재

‘길’의 메타포는 우선 하나의 과정을 가리킨다. 길을 간다는 말은 아직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이미 목적지에 도달했으면 더 이상 길을 갈 필요 없이, 짐을 내려놓고 휴식을 취하기만 하면 된다. 아직 갈 길이 남아 있는 사람은 잠시 휴식을 취하더라도 또 다시 떠날 준비를 해야만 한다. 이처럼 사유의 길을 가는 사람은 사유를 그치지 않는다. 그렇다. 사유의 길에서는 사유하는 그 과정이 중요하다. 이 사유의 과정이 차단되면 그는 더 이상 사유의 길을 가는 사람이 아니라 중간에 포기하고 주막집에서 작부들과 농담 따먹기나 하는 신세가 된다.

신학적 사유의 길을 간다는 말도 이와 같다. 자신을 가리켜 ‘길’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따르는 기독교인들은 말 그대로 ‘도상(道上)의 존재’이지 그 끝에 도달한 존재가 아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신학적 사유를 포기하고 도그마에 사로잡히는 것을 좋은 신앙으로 간주한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구호를 확성기에 대고 외쳐대는 일부 광신자들의 태도에서 한국 기독교의 이런 독단론적인 ‘길마침’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어떤 면에서 기독교의 광신주의자들이나 근본주의자*들만이 아니라 대다수의 교회 지도자들이 이런 신학적 사유의 길을 외면하고 어떤 완성된 교리에 경도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들은 믿음과 사랑과 희생과 구원을 독단적으로 선포하는 근본주의자들과 달리 매우 수사학적이고 때로는 현대적 감수성으로 치장하고 있지만 결국 신학적 사유의 과정을 거치지 않기는 매 한가지이다. 그들이 이해하고 있는 기독교의 가르침이 이미 완성된 것인 양, 모든 진리를 완전하게 확보하고 있는 양 선포한다는 점에서 별로 다르지 않다. 하나님에 대한 진술인 신학이 더 이상 길 걷기를 포기해도 좋을 만큼 자기 완결성을 확보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런 태도가 과연 기독교 전통과 성서에 합당한 것일까?

 

*기독교 근본주의나 복음주의와 다른 또 하나의 극단적 반동으로서 기독교 상대주의, 또는 혼합주의자들이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들은 기독교의 가르침을 인간학이나 사회과학으로 대치하는 자신들의 태도를 지성적이거나 진보적인 것으로 위장하거나 착각한다. 물론 기독교 근본주의가 과거의 역사에서 보여준 맹목적, 기독교 패권적, 반지성적 행태를 반성한다는 차원에서 이런 자유주의적 경향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는 기독교는 이 시대에 공헌할 내용을 제시하지 못한다. 사유의 길을 가되 분명한 방향 감각을 유지해야만 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기독교의 교리는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땅에서 솟아나거나, 또는 어느 천재의 머릿속에서 갑자기 형성된 게 아니라 역사적 과정의 산물이다.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기독교의 핵심 교리가 확정될 때까지 수많은 신학자들이 그 논의에 참여했다. 삼위일체 교리가 완성되기까지 적지 않은 신학적 논쟁이 개입되었다. 이런 과정이 의미하는 바는 기독교 교리가 역사적 과정 속에 있으며, 그것은 지금도 유효하다는 사실이다. 기독교 교리도 역시 도상에 놓여 있다는 이 말은 기독교의 진리가 진리로서 어딘가 부족하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이 세상의 모든 사물과 가치가 잠정적이듯이 기독교 교리의 인식과 표현 형식도 역시 그런 범주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궁극적인 진리와 그것을 인식하고 진술하는 표현 형식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 그리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궁극적인 진리이지만 그가 완전한 신이며 완전한 인간이라는 이 진술 형식은 여전히 어떤 한계 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인식 능력으로는 완전한 신이며 동시에 완전히 인간이라는 개념을 파악하기 힘들다. 어떻게 역사 초월적인 존재가 역사 내재적인 존재와 동일시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더욱이 우리가 종말에 들어가게 될 생명의 세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우리는 실증적으로 말할 단계에 와 있지 않다. 어느 누가 부활의 실체적 진실이 무엇인지 세세하게 해명할 수 있는가? 우리가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삶의 형식은 단지 이 땅의 ‘시간과 공간’의 범주 안에서만 유효하기 때문에 그것을 뛰어넘는 부활에 대해서 우리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부분은 별로 많지 않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고백하고 있듯이 우리는 지금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다. 모든 세계가 완전히 자기의 모습을 드러낼 종말이 이르면 얼굴을 직접 맞대고 보듯이 실체적 진리를 완전하게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말하지만 이렇게 실증적으로 대답할 수 없다고 해서 생명과 부활의 세계가 불확실하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다만 우리는 (철학적인 방식으로 표현해서) 바로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들이기 때문에 그 세상을 초월해 있는 하나님과 그의 계시 사건을,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만 제공될 수 있는 생명의 리얼리티를 우리가 실증적으로 인식하고 설명하기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그의 세계를 진술하기 어려운 이유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 우리 경험의 역사적 제한성만이 아니라 우리 언어의 한계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문자를 통해서 무언가를 진술하지만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말이 있듯이 그것으로 어떤 진리를 완전하게 전달할 수는 없다. 사실 일상의 경험을 전달하는 데도 언어는 충분하지 않다. 예컨대 사과를 먹은 다음 그 느낌을 묘사하라고 한다면 대개의 사람들은 “달고, 시큼하고, 시원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사과의 맛이 반드시 그런 것일까? 사과는 그것을 먹는 사람의 심리적 조건에 따라서 훨씬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아무리 사과라는 과일의 일반적 맛이 있다고 하더라도 모든 사과가 똑같지는 않다. 같은 나무에 열린 사과라 하더라도 햇빛의 양과 각도, 달린 위치 등등에 따라서 아주 미세하겠지만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하나의 사물을 진술하는 데도 언어로서는 충분하지 않은데, 하물며 진리의 세계를 해명해야 할 신학에서야 두말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많은 교리와 논리가 아니라 단지 하나의 ‘화두’로 어떤 깨우침을 얻으려는 선불교의 전통은 일찍이 언어의 한계를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학습 방식을 취하게 된 것이다.

 

길은 한 걸음씩

‘길’의 메타포에서 두 번째로 우리가 생각해야 할 대목은 사유의 심화 과정에 내재해 있는 연속성이다.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속담이 여기에 해당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유의 길은 나그네의 여행길과 똑같이 단계적으로 진행될 뿐이지 비약은 없다. 대구에서 서울에 가려는 사람은 김천, 대전, 수원을 거쳐야만 한다. 대전을 거치지 않고 서울에 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물론 안동, 원주를 거치는 길도 있긴 하지만 그 길은 우회로이기 때문에 바른 길이 아니다. 우회로를 선택한다고 하더라도 역시 어떤 지역이건 거쳐야만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지 중간의 어떤 지점이 없다면 목적지도 없다. 사유의 길에 비약이 없다는 이 말을 설명하기 위해서 나는 두 가지 예를 들겠다.

하나는 내가 즐겨하는 테니스다. 아마 테니스를 배워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선수 출신이 아닌 동호인으로서 테니스 기술을 완전하게 습득하는 길은 아주 어렵다. 다른 운동에 비해서 테니스를 배우다가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많은 이유는 테니스 기술을 익히는 그 과정에서 비약이 있을 수 없다는 데에 있다. 일단 포스트록 기술을 습득한 다음에야 백스트록, 그리고 발리, 스메싱, 서비스 등의 기술로 넘어갈 수 있다. 이런 여러 기술을 배우는 길이 쉽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하루라도 빨리 게임을 즐기고 싶다는 급한 마음으로 기술 연마를 게을리 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테니스 실력이 늘지 않고, 그러다가 결국 테니스에 싫증을 낸다. 테니스를 배우는 데는 왕도가 따로 없다. 자기 능력만큼 차근차근 훈련하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테니스의 깊이에 들어갈 수 있다.

다른 하나의 예는 등산이다. 물론 산을 타는 기술도 역시 필요하기는 하겠지만 나는 여기서 등산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을 설명하려고 한다. 대개 산은 큰 봉우리 밑에 층층이 여러 작은 봉우리와 거기서 흘러내린 여러 산줄기가 여러 갈래로 얽혀 있다. 그런데 우리는 산을 오를 때 한꺼번에 정상을 볼 수는 없다. 일단 산에 들어가면 바로 앞만 눈에 보일 뿐이지 그 뒤에 무엇이 있는지 전혀 예상할 수 없다. 물론 멀리서 보면 대체적인 윤곽이 눈에 들어오겠지만 산에 직접 발을 들여놓으면 바로 앞만 보인다. 한 고개를 넘으면 그제야 그 다음 고개가 눈에 들어온다.

나는 신학적 사유도 역시 이처럼 비약*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성서와 기독교 교리의 윤곽만 눈에 들어오다가 꾸준한 신학적 사유 과정을 거치면서 훨씬 세밀한 부분까지 구체적으로 눈에 들어오게 된다. ‘종말’에 대한 주제만 해도 그렇다. 평신도들은 기독교가 말하는 종말을 단순히 이 세상이 끝나고 하나님의 심판이 있게 될 어떤 시기 정도로만 생각한다. 이런 단순한 인식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의 종말론이 주변의 역사철학과 어떤 연관성을 맺고 있는지 충분하게 밝혀내지 못하면 종말의 의미를 놓치게 된다. 왜냐하면 종말론은 곧 기독교의 역사관이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는 한 두 부분이 아니라 기독교의 가르침 전반에 걸쳐 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경험한 다음에 “나는 자존하는 자다”라는 말씀을 듣는다.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어떤 원인의 결과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을 뛰어넘는 존재라는 게 과연 무엇일까? 그런 문제를 무엇 때문에 따지는가, 그냥 믿으면 되지, 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지만, ‘있다’는 동사가 무슨 뜻인지 철학적 존재론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이 우리의 사유 속에서 충분하게 정리되어야만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진술에 접근할 수 있다.

 

*물론 인식의 비약이 없다는 말에는 약간의 해명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과학의 세계나 예술의 세계에서 어떤 영감이 갑자기 발현되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종교경험에서도 흡사 다메섹 도상의 바울처럼 갑작스러운 회심의 사건들이 종종 있다. 그러나 이런 비약은 이미 그 저간에 그럴 수밖에 없는 경험과 사유의 과정이 들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산을 오르다가 한 고개 위에 섰을 때 갑자기 새로운 시야가 들어오지만 그 새로운 시야는 그 앞 단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테니스의 과정에서도 라켓과 공이 임팩트 되는 어느 순간에 갑자기 전혀 새로운 느낌을 경험할 수 있는데, 이 때가 바로 실력이 비약되는 순간이다. 그런데 이런 비약의 경험이라는 것은 그 이전에 충분한 과정이 있었다는 것을 전제한다. 다른 한편으로 ‘비약’이라는 개념은 사유의 과정에서도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즉 사유는 결국 이런 비약을 목표로 한다는 말이다. 사유의 길에서 어느 순간이 되면 우리에게 ‘코페르니쿠스 혁명’이라 칭할만한 돈오(頓悟)의 경험이 주어진다. 이런 점에서 점진적인 과정과 비약의 순간은 일종의 변증법적인 연관을 맺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 글에서 “비약이 없다”고 말하는 이유는 신학생들과 목회자들에게 치열한 사유의 과정을 간과하는 태도가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오늘 교회 지도자들의 신학적 인식은 거의 대부분 비약의 비약을 거듭하고 있다. 흡사 산을 오르는 사람이 산 밑에 있다가 어느 루트를 잡아서 올라갔는지 아무런 흔적도 없이 갑자기 정상에 서 있는 것과 비슷하다. 테니스 라켓을 잡은 지 며칠 되지 않은 사람이 포스트록부터 스매싱까지 차근히 배운 흔적 없이 테니스 시합에 나가겠다고 나서는 사람과 비슷하다. 물론 겉으로는 그들이 하나님, 구원, 교회, 사랑, 삼위일체 등등, 기독교의 교리를 매우 진지하게 전하고, 때로는 매우 해박하게 보이는 온갖 신학이론을 전하고 있기 때문에 전문가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자세하게 들어보면 흡사 연극의 심층적 의미를 전혀 모른 채 연극 대사만 따라하는 삼류 배우같이 그 진술의 내용이 매우 공허하고 모순으로 가득 차 있는 경우가 흔하다. 특히 교회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에서는 사유의 논리가 사라지고 오직 비약만 지배하고 있다. 설교가 충분한 신학적 성찰을 거치지 않는 한 그것은 아무리 입담이 좋아서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고 하더라도 ‘선동’은 될지언정 ‘예언’은 되지 못한다.

물론 신학적 사유가 서툰 설교자들도 기독교의 리얼리티를 충분히 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아는 것과 자기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크게 다르다. 초등학생이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고 그 줄거리를 이해했다고 해서 그가 파우스트를 실체적으로 아는 것일까? 신학적 사유에서 초등학생 수준이면 아무리 성서를 읽어도 그것의 리얼리티를 잡아낼 수 없다. 어떤 사물과 사건에 대해서 정보로 아는 것과 그 실체를 아는 것과는 지구의 남극과 북극이 먼 것만큼이나 멀기 때문이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도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진리를 알고 본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이 아는 것은 모세의 율법뿐이었지 그것의 근원자이신 하나님 자체는 아니었다.

 

신학적 사유가 망각된 이유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3년, 또는 7년, 그 이상 신학공부를 했고, 지금도 매일 성서를 읽고 기도하고 있는 사람들이 성서와 기독교의 역사가 말하고 있는 그 리얼리티를 모르는 이유는, 그리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이유는, 결국 신학적 사유가 상실된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두 가지 사태가 이것에 연루되어 있다고 본다.

하나는 실제로 우리에게 신학 공부가 턱없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신학대학교에서 학점을 이수하기 위해서 근근히 공부할 뿐이지 마음먹고 신학의 세계에 들어가는 학생들은 드물다. 고어, 성서신학, 역사신학, 조직신학 등등, 여러 분과의 공부를 충실하게 공부하지 않는다. 신학생들이 공부보다는 교회활동에 훨씬 많은 시간과 생각을 쏟고 있다는 이 현실은 본인 자신과 한국교회의 미래를 보더라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그렇지 않아도 신학공부의 여건이 유럽과 북아메리카 학생들에 비해서 한국의 신학생들에게 훨씬 열악한 상태인데다가 그것에 대한 정열도 없으니 어찌어찌 해서 겨우 신학의 과정을 거치더라도 어른의 손에 이끌려야만 걸음마를 할 수 있는 어린애처럼 스스로는 전혀 신학적으로 사유할 줄 모르고 목사가 된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다른 하나는, 이게 실제로 훨씬 본질적인 문제인데, 신학생들과 목회자들이 스스로 신학적 사유의 세계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흡사 물에 들어가지 않고 수영을 가르치려는 사람과 비슷하다. 그는 수영 교본을 통해서 이론은 어느 정도 알지만 물에 대한 실제적인 경험은 전혀 없다. 우리 목회자들이 그렇지 않은가? 그들은 단순히 기독교에 대한 정보를 많이 확보하고 그것을 요령껏 전달하는 것을 신학공부라고 생각한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서 전체의 이야기를 꿰고 앉아서 이 세상의 일들과 적절하게 연결시키는 게 바로 설교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한다. 예컨대 “하나님은 존재하는가?”에 대해서, 구원이 무엇인가, 종말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기를 포기한 채, 그리고 그 사유 안에 들어가기를 두려워하면서 다른 사람이 말한 것을 모아서 편집하는 것으로 신학과 설교의 소임을 다 한 것으로 생각한다.

신학적 사유의 세계에 들어간다는 것은 신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하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철학을 가리켜 존재에 대해서, 또는 주체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이라고 하듯이 신학에서도 스스로 생각할 줄 안다는 게 중요하다. 이게 간단하고 당연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어렵다. 왜냐하면 이를 위해서는 생각하는 방식도 알아야 하지만 그 생각과 그 대상이 자기 안에서 일치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인식과 존재의 일치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죽음’이 무엇인지 우리가 생각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자기 삶에서 일치되는 경우는 드물다. 죽음은 늘 피상적인 어떤 관념으로만 너울거릴 뿐이지 실체로는 와 닿지 않는다. 그래서 철학적으로 살기 힘든 것처럼 신학적으로 목회를 하고, 설교를 하고, 그렇게 살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교회 지도자들이 될 사람들은 그 길을 가야만 한다.

이미 오래 전에 데이빗 소로우(1817-1862)는 ‘월든’에서 이렇게 말했다. 철학 선생은 많은 데 철학자는 드물다고 말이다. 그의 말에는 일리가 있다. 음악을 일종의 정보로 가르치는 음악 선생은 많지만 음악의 세계에 들어가서 사는 음악가는 드문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신학과 성서의 정보를 조리 있게 이해하고 가르치는 선생과 목사는 많지만, 신학과 성서의 세계에 들어가서 사는 사람은 드물다. 참된 신학자가 되어야만 참된 목회자도 될 수 있다. 신학자가 아니면서 목회를 하는 사람은 싸구려 약장사가 되든지 아니면 자기 정체성의 혼란으로 인한 불안에 사로잡힐 것이다. 명실상부한 신학자이며 목회자가 되기를 원하는 신학생이라면 이 신학공부의 초보에서부터 신학적 사유의 길을 혼자서 갈 수 있도록 치열한 노력을 기울어야만 한다. 리차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에 나오는 “높이 나는 갈매기가 멀리 본다”는 아포리즘은 오늘 우리 신학의 세계에도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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