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지구는 아름답게 돈다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 조회 수 3706 추천 수 0 2011.01.31 11:32:22

도로테 죌레

지구는 아름답게 돈다

성서연구, 창8:20-9:17

 

하나님의 후회하심

저는 노아와 나눈 하나님의 계약에 대한 성서 이야기를 설명하면서 몇몇 중요한 대목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저의 의문점과 두려움을 밝히기 위해서, 또한 전통에 대해 귀를 기울이고 우리의 공동 신앙이해와 우리의 희망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노아는 무능력한 남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결혼했고 세 아들이 있었으며 생태계의 대재난의 시대에 살았습니다. 이 대재난은 사실 인간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작은 섬에서 핵실험이나 하여 원주민을 내어쫓고 생물의 종을 뒤바꾸는 군사당국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또한 그 대재난은 인도의 한 도시에서 화학공장이 폭발하여 그 도시의 공기를 병들게 하고 이로 인해 수일 만에 2,500명 이상의 사람이 고통스럽게 기침을 하며 죽어가게 한 대기업 콘째른도 아닙니다. 노아 당시에는 어느 누구도 소위 무제한의 자동차 속도를 통해 숲을 벙들어 죽게하는 대기오염도 야기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의 생태적 재난은 다른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큰 불행을 일으키셨습니다. 모든 샘과 하늘의 창문을 여시어 물을 쏟아 부으셨고 이로 인해 이 작은 지구는 완전히 물 속에 잠겨버리고 말았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물을 지키는 수문장 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홍수는 우주적 괴물, 즉 땅과 공중의 모든 생물을 멸종시키는 괴물의 공격으로 경험되었습니다. 인간과 동물, 식물은 모두 익사해 버립니다(창7:11)>

그러나 과연 그렇게 행하신 하나님 한분에게만 책임이 있습니까? 끊임 없이 하나님은 위로 부터 이 땅을 <지켜보십니다>. 이 땅이 죽어버린 것을 <보고계십니다>. 마틴 부버의 표현을 빌리자면, <악독함>으로 가득찬 세상을 바라보시며(창6:11), <오만 방자함>이 판치는 것을 보십니다(창6:13). 하나님은 자신의 결심, 즉 모든 피조물을 도말하려는 결심을 단독으로 그저 아무런 상황에 대한 고려도 없이 무턱대로 행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공동역사와 상호작용에서 발생한 것입니다. 생명을 보장하신 하나님과 생명에 대한 증오심에 묶여있는 인간 사이에는 더불어 존재할 관계성이 있습니다. 이 더불어 존재할 관계성을 통해 하나님은 노아와 그 가족들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대홍수 후에 노아는 방주에서 나와서, 즉 피난처에서 나와서 세상으로 돌아옵니다. 땅은 마르기 시작했고, 새와 가축과 육축도 방주에서 나와 기어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을 위해 제단을 세우고 하나님께 번제를 바쳤습니다. 아마도 살아남은 자들이 큰 잔치를 베풀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노아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는 그가 우선 포도주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이 땅에 충만하라는 사명을 가진 이들의 구원에 대한 축제를 더 이상 멋지게 상상할 수는 없습니다. 홍수는 지나갔다고 한 사람이 다른 이에게 전합니다. 땅은 다시 푸르러지고, 불꽃은 타오르고, 노아가족은 이리저리 손을 잡고 돌며 춤을 춥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향기에 취하십니다. 하나님은 깊이 생각합니다: <나는 이제 더이상 인간의 행위 때문에 이 땅을 멸망시키지 않으리라.>(창8:21). 하나님은 희생제사를 기뻐 받으시고 평화를 선포하십니다. 그는 홍수 후에 자신과 살아남은 생존자 사이에 더불어 존재할 관계성을 다시 세우십니다.

하나님은 과거에 무엇을 말했는지 뒤돌아 보았습니다: <모든 것을 쓸어버리기로 결심했다. 왜냐하면 이 땅이 인간의 악독으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창6:13). 그런대 하나님은 홍수를 일으킨 것에 대해 후회하시고, 다음과 같이 계속 말씀하시셨습니다. <더 이상 사람 때문에 이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창8:21). 하나님은 더 이상 <전에 그랬던 것 처럼 거기 살고 있는 것을 멸망시키지>(창8:21)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변한 것입니까? 이 대홍수 이야기는 후기 고대 동양문명 속에서 문서형식으로 전승되어 온, 고대인들의 구전 가운데서 상당한 유사성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들을 통해 이야기 되어온 창조설화 처럼 홍수설화도 역시 신화적 구조 속에서 세상의 기원과 위기에 대해 생각하던 인류의 문화적 산물에 속합니다. 전세계에 대충 250번 정도의 홍수전설이 전승되어 오는데 성서 속의 이 노아홍수도 그중의 하나로서 <인류 대재난의 방주형식>입니다.1 이 이야기는 최소한 높은 수준의 문명권에서 제기된 일련의 신학적 질문들과 연관을 갖습니다.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 그 분이 인간을 멸망시킨 바로 그 분일 수 있을까요? 거기에는 신들의 쟁투가 없습니까? 바벨론의 길가메쉬 서사시에서는 이 쟁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많은 신들이 이 땅 위에 무슨 일이 일어나게 할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이 신들의 회합에서 결정된 바는 인간을 멸망시키자는 것이었습니다. <대홍수를 내리자는 결정이 위대한 신들의 가슴을 불태웠습니다.>(Gilgamesch 11). 그러나 에아(Ea)라는 신은 이에 반대하여 난폭한 신 엔릴(Enlil)에게 이의를 제기합니다. 대홍수 보다는 야수나 굶주림, 혹은 흑사병 같은 형벌이 더 적합하다고 말합니다. 결국 대홍수가 나고 그 후에 신들은 저들이 저지른 일에 대해 놀라게 되고 저들은 엔릴을 멀리하게 되었으며, 여신 이스타르(Ishtar)는 후회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 홍수를 결정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녀는 약속하기를 <나는 이 날을 영원히 잊지 않으리라.>고 했습니다.2

홍수재앙에 반대하는 이러한 입장이 바벨론 신화에서는 여러 신들에 의해 나뉘어져 등장합니다. 그러나 성서에는 하나님 그 분에게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창조주와 수호자는 동시에 심판자요 멸망시키는 분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잠시 이 부분에 대해 좀더 논의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변하시는 분입니까? 그는 자신이 다시 파기할 계획을 세우십니까? 하나님은 영원 자존자가 아니며, 불변자가 아니고, 진실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때에 따라 이리저리 변하는 분입니까? 성서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갖고 있는 이러한 생각들을 교정하고 있습니다. 성서는 우리의 계몽주의적인 이신론을 바로 잡아줍니다. 이 이신론은 하나님을 하나의 영원한 율법으로, 하나님의 인격적인 존재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변한다는 것이 하나님을 격하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되어감(Werden) 속에서서의 존재, 즉 과정 속에 드러나는 존재자임을 뜻합니다. 과정신학은 이것을 철학적 형태로 표현합니다. 즉 하나님은 하나님을 뛰어넘는다, 라고 말입니다.

창세기 서두에서 우리는 만납니다: 한 창조주를, 저주를 쏟아붓는 분을, 추방시키는 분을, 잘못한 자녀에게 옷을 만들어 입히시는 아버지를, 재난의 신을, 모든 것을 익사시키는 분을, 그리고 이 땅의 마지막에 그 생명을 허락하시는 분을: <뿌림과 결실,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끊이지 아니하리라.>(창8:22).

하나님은 우리와 항상 상대적으로 존재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부터 절대적으로 독립된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적 특성인 후회가 가능한 분입니다. 후회하고 돌아서는 것은 유대전통에 의하면 모든 인간 삶의 핵심입니다. 후회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다고 탈무드는 말합니다. 이것을 쓴 한 랍비는 설명하기를, 이 세상이 생기기 전에 하나님은 후회를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우주가 생성되기 전에 다음과 같은 일곱 개의 사물들이 만들어졌다: 율법, 후회, 낙원, 지옥, 왕권의 왕관, 성전, 메시야 이름> 이 생각은 상자 처럼 생긴 이 세상이 인간을 위해 창조되었고, 따라서 인간을 맞아들이기 위해 준비되어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율법 안에 인간이 지켜야 할 옳은 삶의 길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율법의 길에서 벗어나는 경우에 또 하나의 삶의 가능성이 남아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되돌아서는 가능성입니다.3 하나님 역시 유대전통에 따라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즉 돌아서는 것입니다. 인간은 돌아설 능력이 있습니다. 모든 순간에 우리는 회심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의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돌아서시고 먼저 계획한 것을 후회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사람에 대해, 비록 그가 그렇게 난폭할지라도 믿어주어야 합니다. 즉 그도 회심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어주어야 합니다.

이 회심에 대한 확고한 신념은 비폭력적인 태도를 가져오는 기초입니다. 내가 비폭력적으로 행동한다면 먼저 믿어야 합니다. 죽이는 일에 고용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말입니다. -물대포로 위협하는 경찰관들, 전쟁에서 선제공격의 계획에 참여는 장군들, 후진국의 실수를 이용하는 재정책임자들- 이들을 믿어야 하는데, 그들도 회심할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현재 죽이고 살릴 수 있는 힘을 가진 독재자들 밑에서 일하고 있지만, 그들은 자유로워질 수 있고 또한 그들에게도 회심이 가능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성서의 하나님은 회심하시고 또 우리의 회심을 바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자연에 대해서는 어떠한 태도를 취하실까요? 어떤 이들은 생각하기를 <창조>는 바로 <생산>이며, 내가 생산하는 것은 내가 또한 없앨 수 있다고 합니다. 이 지구가 하나의 커다란 공장이라면 생산은 경우에 따라 중단되어질 수 있으며 창조 역시 파괴되어질 수 있습니다. 정말 모든 것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원자폭탄이 떨어질 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이 그렇게 결정했기 때문에 인간은 아무도 그것에 대해 항거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옳은 겁니까?

 

기독교 제국주의에 반대하여

제가 생각하기로는 남성적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엇보다도 우선 명령을 내리는 분으로, 권능자로, 지배자로 간주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런 신학을 기독교 제국주의(Gottimperialismus)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그 신학은 이데올로기의 영역에서 경제적, 정치적 영역의 제국주의와 동일하게 작용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을 내 팽개치는 것 말입니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입장에 있어서 기독교 제국주의의 기본개념은 지배와 권력에 대한 심취입니다. 하나님이란 저들의 신학에 있어서 <올 것이 온다>라고 말하기 위한 하나의 다른 표현방식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힘에 의해 운명지워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그 힘은 선하게 작용합니다. 이런 제국주의적 신학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미 굳어진 체제에 자신을 숙명적으로 묶는 것입니다. 마치 나쁜 날씨, 납세의무, 기술문화적 압력에 사람들이 매달려 있듯이 말입니다. 그것은 이미 정당성을 소유하고 당연히 그렇게 움직여 갑니다. 이렇듯 숙명주의는 기독교 제국주의가 제 모습을 나타내는 방향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군림하며, 자기들이 하고 싶은대로 저들 소유물을 마음대로 다루면서 주인 처럼 해동합니다. 소유와 통치는 대개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살아있음에 대한 상관성의 유일한 카테고리입니다. 우리가 소유하고 통치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우리가 확신하고 있는 바는 우리가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이러한 경직화된 신앙을 수정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소유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가 우리를 다스린다고 할 때 그것은 숙명적 초능력과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언급되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손바닥에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우리와 맺은 계약, 즉 그 계약의 근본 입장이 소유의 질서가 아니라 상호존재의 질서이며 삶을 함께 나누는 질서인데, 그 계약을 분명히 하십니다.

현실적인 조건들 밑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두번 째 창조에 관한 우리의 이야기 안에서 하나님은 생각하십니다. 그가 이 지구를 <소유>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그래서 홍수나 핵겨울을 야기하는 권능을 스스로 포기하십니다. 이 지구는 씨를 뿌리고 거두며,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그리고 낮과 밤의 리듬을 되찾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런 리듬을 멈추게 하는 지구의 주인이 아니기를 원하십니다. 저는 하나님의 이러한 희망을 지구에 귀를 기울이시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린아이였을 때 하던대로 자주 그렇게 하십니다. 즉 하나님은 귀를 땅에 대시고 그 속삭임과 짐승의 움직이는 소리를 경청하십니다. 하나님은 남자, 지배자, 명령자, 지시자만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창조를 보증하십니다. 이 지구는 리듬과 시간을 간수해야 합니다. 씨를 뿌리고 거두어 들여야 합니다. 이 땅이 아스팔트로 싸발림 당하면 안됩니다. 중독되어서도, 쓰레기로 얼룩져서도 안됩니다. 추위와 더위는 우리의 육체를 감돌아야 합니다. 우리의 시간이 냉난방된 사무실에서만 소비되어서는 안됩니다. 땅은 땅으로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비록 땅을 팔고 소작을 주고 약탈하고 파괴하는 이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윤추구 때문에 이 지구를 얼마나 손쉽게 파괴하는지를, 또한 이 지구를 얼마나 손쉽게 물질적인 것으로 만드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피식민지 국가들을 다스리는 제국주의자들 처럼 순전히 물질적인 것에 의해 우리는 지배당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은 이 땅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갖고 계십니다. 그분은 이 땅과 함께 존재하십니다. 인간에 의해 더이상 파괴당하면 안될, 그러나 이미 잘못 다루어진 이 땅의 편에 서 계십니다. 오늘 우리는 노아홍수 때보다도 더 무참하게 멸망시킬 수 있는 현대의 대홍수에 대항키 위해 이 땅과 맺으신 하나님의 계약을 확고히 해야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창조의 말씀을 읽다보면, 이 땅을 상대적인 것, 도구에 불과한 것, 소비해야할 물질로 다루지 않는 인류의 오래된 전통과의 조화에 다다르게 됩니다. 시편기자가 말하듯이 이 땅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셨기 때문에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이 땅은 거룩하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이 땅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땅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가 읽은 말씀은 우리 인간이 땅의 소유자가 될 수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이 땅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갖고 있는 다양한 신들 사이의 논쟁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스스로 자신의 계획을 후회하는 것에서 드러나 있습니다. 그는 바로 <때려 부수고>, 그리고 <파멸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생명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의지를 돌이키셨습니다.

아마도 우리는 너무나 오랫 동안 기술발전이라는 미명 아래 저주하는 하나님을 잘못 경배했습니다. 즉 그 기술발전으로 지구가 거룩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 약탈당하는 식민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 크고, 더 빠르고, 더 많은 것에 잘못 길여졌습니다. 창세기 기자 중의 한 사람인 J기자의 하나님은 생각을 바꾸고 이 땅을 더 이상 저주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생명을 파괴하여 이용하려고만 하는 서구적 기술발전의 하나님은 또다시 방향을 바꾸는 걸 배우려고 하실까요?

우리가 그분을 우리의 아버지, 우리의 주, 우리의 대장, 심판자, 왕이라고만 말한다면 우리는 너무나 편협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남성적 언어로만 말하고, 남성상만을 필요로 하고, 남성중심적으로만 생각하고 말한다면, 하나님을 축소시키는 것이며, 또한 거대한 신성에서 어떤 것을 추려내어 그것을 하나님께 적용하고 설명하려는 꼴이 되고 맙니다. 성서는 이러한 왜소화, 취사선택, <보라, 이것이 너의 하나님이라>는 조건적인 언급을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이런 면에서 가부장적 권위와 남성주의와 우상숭배는 백인들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즉 <하나님은 백인>이라는 주장 말입니다. 인종주의는 신학적 차원에서 이단사설로 손꼽히는 죄입니다. 성(性)분리주의자도 똑같습니다. 하나님이 남성 그 이상일 수 있다는 것에 두려움을 갖고 있는 사람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우리를 보호하시고 진리를 말씀하시고 용기를 주는, 우리의 어머니와 누이와 같은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걸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성분리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의 금송아지를 마들고, 금황소를 만들고, 남성주의와 여성학대의 상징을 만들어갑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말하면서 항상 <남자>를 생각합니다. 즉 그들은 성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형상이 한 인간, 아담이 아니라 두 인간, 아담과 이브를 갖고 있다는 걸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남성적 요소를 갖고 있듯이 여성적인 요소도 갖고 있습니다. 어느 교황(요한 바울)도 말하기를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듯이 최소한 우리의 어머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돌이키심, 하나님의 변화, 그리고 하나님의 발전은 하나님 안에서 그 어떤 것을 절대화하려는 어떤 특별한 문화의 위험에 대해 경종을 울립니다. 노아와 나눈 계약에서 하나님은 오직 남성의 하나님이 원하는 것 처럼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한 남성 그 이상을 뜻합니다.

중미의 어느 시인은 노래하기를 <지구는 부드럽게 돈다. compañera>라고 했습니다. 이는 바로 하나님이 말할 수 있음직한 문장입니다. 지구의 자전과 움직임이 멈추면 안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활동의 한 부분이며 우리를 위해서도 그 움직임이 필요합니다. 즉 씨를 뿌리고 거두는 것, 굶주림거나 배부름, 추위와 더위, 보호처를 찾거나 보호해주는 것, 여름과 겨을, 성장하고 부끄럼 없이 늙어가는 것, 낮과 밤, 일과 휴식, 그렇습니다. 지구는 부드럽게 움직입니다. compañera.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랑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우리 어머니는 자신을 주인이요, 소유주로 생각하는 이들과는 전혀 다른 생각을 지구에 대해 갖고 있습니다. 그 분은 지구를 소중히 여기시고, 창조 때 계획했던 그 구별(낮과 밤, 씨뿌림과 거두어 들임 등)을 기억하십니다.

<물 가운데 궁창이 생겨나며 그것은 물로 부터 나뉘어지리라.>(창1:6). 이것은 둘째 날의 사역이었으며, 셋째 날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 밑의 물은 서로 모이고 그래서 다른 곳은 보이게 되리라.>(창1:9)고 하셨습니다. 노아홍수 후에 즉시 이 나누임은 다시 활발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지구를 보시고 그 우주와 땅과 시간과 자연의 리듬을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우리가 창조에 대한 사랑을 배우게 된다면 우리는 자연정복주의를 버리고 마치 우리가 자연으로 부터 더 많은 것을 생산이나 할 수 있듯이 소유주로서 생산하거나 이 지구를 판매할 수 있는 상품이기나 한 것 처럼 다루는 일을 중지하게 될 것입니다. 마치 어느 해변이 하나님과 그 백성들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사적으로 재벌들에게 속하기나 한 것 처럼, 마치 대도시 부근의 숲이 하나님과 그 백성들이 아니라 군사훈련을 위한 장소이기나 한 것 처럼, 즉 숲이 군사무기나 되는 것 처럼 생각하는 잘못을 중지하게 될 것입니다. 이 땅을 자기들의 사적 소유로 분배하려는 것에 항거하는 행동 없이 우리는 어디서 우리의 이러한 선교대회(Kirchentag)의 주제를 활성화할 수 있으며 어디서 구체적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까? <La tierra al señor>라는 말은 농부들의 해방운동에 있어서 하나의 전투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땅은 하나님과 땅에서 일하는 이들에게 속했다는 사실을 믿고 있었던 살해당한 사람들(campesions)의 피가 바로 이 말에 담겨 있습니다.

 

인간은 어려서 부터 악한가?

여기서 저는 생각을 잠간 멈추고 성서의 역사 뿐만 아니라 전체 기독교 전승의 이해를 위해 핵심적인 문제 한 가지를 다루어 보려고 합니다. 이는 죄론입니다. 정말 우리가 유의해야할 것은 하나님께서 홍수로 인간을 파멸시킨 것 뿐만 아니라 <인간의 도모하는 것이 어려서 부터 악함이라.>(창6:5, 8:21)는 말씀과 함께 이 땅을 더 이상 저주하지 않겠다고 새로운 계약을 맺으시며 보증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다만 일시적인 기분으로 홍수를 일으키신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서 발생한 것들을 없애버리기 위해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역사적인 상태에 대한 매우 일반적인 단어들, 예컨대 무법, 악행, 죄악과 같은 단어들 때문에 그 말들의 구체성을 자칫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성서적 시각에서 볼 때 죄란 각 개인이 잘못으로 빠져드는 것이나 혹은 의도적으로 유발되는 잘못된 개개의 행위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을 뜻합니다. 죄는 한 집단이나 한 종족의 공동적 삶 속에 뿌리박고 있습니다. 죄는 일방적으로 끌고들어가는 힘입니다. 흡사 한 어린아이가 나찌시대에 태어나거나, 혹은 점점 더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고 무력과 폭력에 의해 안정을 얻는 나라에서 우리가 죄 가운데서 태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생명에 대한 경시, 그리고 군부나 경찰의 힘에 의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가 우리 시대에 점점 증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몇해 전보다 더 많은 무기를 생산하여 수출하고 있습니다.

저는 국가와 경제를 통해 폭력이 어떻게 증가하는가에 대한 한 가지 예를 지적해 보고자 합니다. 바로 얼마 전에 한 팔레스틴 저널리스트가 말했습니다. 우리 유럽인 역시 이스라엘과 팔레스틴 사이의 계속되는 갈등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 말은 다음과 같은 뜻입니다. <유럽인은 우리에게 화장품 같은 것만이 아니라 전투기 까지 팔아먹습니다. 독일은 우리에게 전자제품 만이 아니라 레오파드 탱크를 팔고싶어합니다. 유럽인들은 ‘미라지’ 전투기와 ‘레오파드’ 탱크 대신 라디오나 비디오 가게를 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라디오나 화장품을 수출하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대신 그들의 경제적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 줄 수 있는 그 무엇을 수출하려고 합니다. 이 문제는 무기를 판매하므로 쉽게 해결될 수 있는데, 지금 그렇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한편으로 ‘미라지’를 팔고, 또 다른 한편으로 ‘미라지’를 격추시킬 수 있는 로켓 미사일을 팔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더 개량발전된 전자식 ‘미라지’를 팔 뿐만 아니라 이 개량발전된 전자식 ‘미라지’를 격추시킬 수 있는 개량발전된 로켓 미사일을 판매합니다. 이러한 악순환은 계속될 뿐입니다. 비디오를 통해서는 이런 장사를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비디오는 그렇게 빨리 소비되지 않기 때문입니다.>4

저는 기원전 10세기 경에 어느 한 성서기자가 오늘과 아주 흡사한 암울한 상황 속에서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창세기 2장에 묘사되어 있는 원창조는 하나의 분실된, 실패한 가능성인 것 처럼 보입니다.5 이스라엘은 별로 중앙집권적이지 못한 사회질서에서 이제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로 변화하고 있었습니다. 친척관계와 이웃지간의 연대적 형태 사이에 상호관계성이 이전에 기초되어 있었기 때문에 J기자는 벌써 인간행위에 나타나게될 파괴성을 예견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매우 짧은 시기에 <이스라엘 안에 새로운 계급이 출현했는데 관리와 군대를 가진 왕족이었습니다. 이 계급은 많은 사람들에게 전에는 한번도 없었던 더 무겁고 고된 일거리를 강요했습니다. 세금, 강제된 군복무, 노동사역‥‥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고 있던 마을들은 매우 많이 변했습니다. 상당히 많은 이들이 한 곳에 집중적으로 옮겨 살게되므로 성벽으로 둘러싸인 좁은 도시들이 등장하게 됐는데, 그 도시들에는 성과 궁전과 곡식창고 등이 특징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 기능과 윤리적 요청은 멀리 사라져버리게 되었습니다.> 전통에 의해 유지되던 사회에서 중앙집권적 권력과 강압정치와 구조적 불의로 구성되는 사회로 변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다음의 문장을 읽어야만 합니다. <인간은 도모하는 바가 어려서 부터 악함이라.> 이 문장은 개신교에서 항상 거듭해서 비관론적 인간상(像)의 견해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흡사 우리의 근본 바탕에 악의 뿌리가 놓여 있으며, 인간의 모든 내적 생명이 악에 의해 지배받고 있듯이 말입니다.

이러한 해석에서는 본 성서기자가 생각했던 바를 알아챌 수 있는 사회역사적 상황이 무시되고 있습니다. 이 악은 근본적인 것으로, 본질적인 것으로, 존재론적인 것으로, 그래서 결국 피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J기자의 신학적 인간론입니까? 인간의 도모함에 대한 문장은 성서문맥의 흐름으로 볼 때 전혀 다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정말 더 이상 멸망시키지 않으시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죄의 집중하는 힘이, 생명을 파괴하고 스스로 파괴당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기 때문입니다. 강권과 착취, 그리고 더 많은 국가와 군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 지구에 생명을 유지시키시고 노아와 새로운 계약을 세우십니다.

저는 성서적 현실주의와 인간론적 비관주의 사이에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에 대해 한 가지 예를 들어서 명확히 해보고자 합니다. 성서 현실주의란 죄의 마력에 대한 착각을 갖지 않는 것이며, 인간론적 비관주의란 하나님의 계약계명에 상반된 입장에 서서 죄로 부터의 자유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다시금 고도의 군비경쟁이 시작할 무렵에 저는 어느 개신교 지도자가 텔레비젼 방송 프로에 나와서 다음과 같은 주제로 진술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군비 강화, 혹은 군축? 교회는 어디에 서 있는가?> 그는 오랜 시간 동안 군비강화의 필요성을 역설했으며, 급기야 참다 못한 리포터에 의해 중단당했습니다. 그는 이 문제를 신학적 입장에서 선택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도모함이 어려서 부터 악하다는 성서말씀을 이 주제와 연관시키면서 답변을 찾았다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 신학적으로 똑같은 죄책의 상관관계 속으로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기를 소유했던지 그렇지 않던지 우리 모두에게 죄책이 있는 것이라고 말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여기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교회 지도자가 신학을 어떻게 전개했으며 성서를 어떻게 사용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에게 지적될 수 있는 첫번 째의 문제점은 우리와 약속하셨고 또 다시 약속하시는 그런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강압과 폭력의 시도로 부터 우리를 해방시키시는 그리스도를 말하는게 아니라 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가 낙원의 문을 다시 열었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으며, 지대한 관심은 오직 우리의 죄에 대한 연루성일 뿐입니다. 우리를 생명으로 부르시고 생명의 동반자로 부르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용서하심에 대해서는 전혀 믿지 못하고, 오히려 죄에 대해서만 그리고 죄에 사로잡힘과 우리를 내외적으로 괴롭히는 죄의 강박 만을 믿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죄는 분명치 못한 죄스러운 기분과 대중적인 무기력의 경험에서 나오는 혼합물입니다. 그들은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시작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어쩌다가 하나님의 이름이 등장할 경우일지라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은 이미 운명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를 계속 지배하고 있는 이 신학은 죽음의 신학입니다. 이 신학은 생명에 대해 관심을 갖고 계시는 하나님께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축소시켜 하나님 없는 우리가 되게 합니다. 그들의 가장 중요한 신앙의 내용은 인간의 주관적인 죄와 객관적인 무력성입니다. 그들의 가장 중요한 실천은, 무기를 소유하든 하지 않든, 무기를 수출하든 하지 않든, 혹은 무기장사를 하든 안하든 관계 없이 죄를 중심으로 때려맞추는 것입니다. 성서의 하나님은 우리의 가슴을 변화시키는 생명의 능력입니다. 인간이 어려서 부터 악하다고 할지라도, 사회를 잘못 구성하고 현실의 인식 없이 미련하게 되었고, 행동의 전망 없이 병들어 있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이 생명의 하나님은 죽음의 신학에서 볼 때 아무 것도 아닙니다. 물론 인간을 조직적으로 위선적이게 하고 대중매체를 통해 사실을 거절하게 교육시키며, 사랑의 관계를 조직적으로 소비적 상품이 되게하며, 그리고 살인명령과 방어적 완자폭탄을 선제공격하도록 조직적으로 강요하는 사회 속에 살아가는 우리 위에 죄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물론 한 개인의 행동과 결단에 앞서 이미 죄의 지배가 계획되고 적용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시되는 것은 죄의 지배에 관한 이야기가 교회 안에서 적용하고 있듯이 하나님 없이, 해방 없이 그렇게 되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과 해방을 고려한 가운데서 그렇게 생각되는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아무 것도 행할 수 없다. 우리는 정말 모든 걸 상실한 자들이다.> 빌헬름과 히틀러 밑에서 독일 개신교회는 이처럼 무기력하게 노래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오늘도 역시 나토지배 밑에서 이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무지개

이제 저는 체념과 절망과 자기연민에서 끝나지 않는 우리의 이야기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얼마나 하나님이 마음을 돌이키셨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분은 인간을 이 땅에서 없애버리려고 계획했었습니다(창6:7). 여기에는 인간 뿐만 아니라 가축과 기는 것과 하늘의 새 까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대홍수 후에 하나님은 살아남은 자들, 인류의 대표자들을 축복하십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을 축복하십니다. 동물들을 인간의 손에 맡기십니다. 그리고 인간의 생명을 보호하시는데, 말하자면 분열과 형제살인으로 부터 보호하십니다. <너희 생명인 피를 흘리게한 자에게 나는 앙갚음을 하리라. 어떤 짐승에게도 앙갚음을 하리라. 사람이 같은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에게도 앙갚음을 하리라. 사람은 하나님의 모습으로 만들어졌으니 남의 피를 흘리는 사람은 제 피도 흘리게 되리라.>(창9:5-6). 인간의 존엄성은 손상되어서는 안됩니다. 이 문장의 가장 깊은 기초는 종교적인 성격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기 때문에 인간의 피를 흘리는 것은 생명 자체에 대한, 모든 생명의 원천에 대한,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공격행위입니다.

피를 왜 이렇게도 중요하게 생각합니까? 미국의 사이러쿠스에서 있었던 한 재판에서 예수회 신부인 다니엘 베리건(Daniel Berrigan)이 피의 상징에 대해 무언가를 말하고 싶다고 요청했습니다. 베리건은 군축을 위한 비폭력운동으로 유명한 인물입니다. 그리고 여기 고발된 평화주의자들은 상징적인 운동으로 자신들의 피를 Griffis Air Force Basis 회사가 만든 전투기에 쏟아부었습니다. 베리건 신부가 말했습니다. <미국에는 법과 양심에 대한 두 가지 전형적인 견해가 있습니다. 첫번 째의 견해는 일반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바인데, 이는 역사적으로 확인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믿기를 인간은 허용된 폭력, 즉 전쟁의 구조 속에서 다른 이의 피를 흘릴 자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매우 가치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존경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런 법과 양심을 뛰어넘어 생각하려는 또 다른 견해가 있는데, 이것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기 피고인들이 이 재판에서 죄인으로 고발당한 것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피를 주면 그 행위에 있어서 범죄자로 취급받습니다. -마치 평화를 위한 보습운동이 그렇게 취급당하는 것 처럼 말입니다. 이 두 견해 중에 어떤 것 하나를 선택해야하는지에 대해 우리는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중심부에서 그 지혜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해 주는 나의 피니, 이와같이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6

그리스도는 자신의 피를 주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피를 살인무기 위에 쏟은 사람들이 이를 반복합니다. 이것으로 국가를 위해 필요하다면 타인의 피를 흘려고 된다는, 우리에게 당연히 부여된 권리에 대해 더 이상 할말을 잃게 됩니다. 우리는 피를 줄 수 있습니까? 우리는 충분한 안전성 밑에서 살인준비를 다져가고 그것을 날마다 개발시키고 확장시키는 국가의 법에 대해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까? 우리는 국가와 인간의 형상대로 우상화된 양심에 대항하며 타인의 피보다는 차라리 우리 자신의 피를 뿌릴 수 있습니까?

우리의 역사(창9:1-17)는 확실히 첫번 창조기사(창1:1이하)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타락과 에덴동산으로 부터의 추방에도 불구하고, 형제살해와 대홍수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강제수용소(KZ)에서 일하던 의사나 고문을 가하던 이들에게도 역시 해당합니다. 성서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성이 인간에게 남아 있는가에 관한 논란의 흔적이 없습니다. 만약 미국 대통령이 어두움의 나라에 대해 말하면서 공산주의는 <모든 악의 근원>이기 때문에 흐믓한 심정으로 러시아에 대한 폭력명령을 내린다면, 다른 인간, 즉 공산주의자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새로운 약속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은 노와와 계약을 세우십니다. 계약이라고 하는 것은 두 상대자 사이의 자발성과 조화에 근거한 태도를 말합니다. 두 상대자, 예컨대 부부됨의 계약 안에 있는 남자와 여자는 규정된 행동을 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양자는 서로 동등하게 저들에게 계약되어진 것을 해야합니다. 계약은 마치 사랑과 존경의 모든 인간적 관계에서 성격을 얻듯이 상호적으로 주고 받는 것입니다. 계약에 대한 이러한 견해를 법률적으로 마음대로 축소시키면 안됩니다. 살아 숨쉬는 존재 사이의 관계 속에서는 중단, 위반, 무능력, 그리고 실수가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해서 계약은 위협받게 됩니다. 예컨대 한쪽 편에서 오랫 동안 병들어 있을 경우입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계약이 근본적으로 파괴되는 것은 아닙니다. 연대성과 상호성의 요소에는 세번 째의 것이 더 필요한데 이것을 형식상 하나의 의식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즉 계약은 축체 처럼 선포되어집니다. 그것은 체결됩니다. 성서 안에서 보더라도 계약은 항상 거듭 갱신됩니다. 창조역사에서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와 더불어 약속하셨습니다. 홍수 후에 하나님은 노와와 그 가족들과 더불어 현실적인 조건 밑에서 약속을 갱신하셨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오늘 역시 물어야합니다. 무엇이 우리의 새로운 약속입니까? 하나님은 히로시마 이후에 이제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바로 얼마 전에 우리는 독일패전의 날, 종전의 날, 해방의 날인 1945년5월8일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우리 나라의 역사적인 이 날을 하나님이 우리와 나누신 약속으로 이해합니다. 수많은 이들이 이 약속을 보증했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기를!>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다시는 이제 전쟁이 없기를, 다시는 이제 군비가 없기를 말입니다. 잘못하고, 벌을 받는, 용기를 상실한 파괴된 백성과 세우신 하나님의 이 계약은 평화와 중립에 대한 하나의 선물이었습니다. 다시 하나가 되는 역사적 선물이었습니다. 서독의 재무장으로 우리는 이 계약의 선물을 일단 거절하게 됐습니다. 우리는 경제적으로, 군사정치적으로 과거의 길을 다시 찾았고 과거의 구조를 다시 반복했습니다. 종전 40년 후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평화의 계약을 제공하십니다. <하나님과 화해하시오!>(고후5:20)라는 말씀은 오늘 역시 분명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동구에 있는 이웃과 화해하시오, 그리고 남쪽에 있는 이들을 껴안아 주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역사 속에서 노아와 나눈 계약을 계속 반복하십니다. 인간을 대표하는 노와에게만 하나님의 계약이 해당되는 게 아니라 이 땅에도 역시 해당됩니다. 그것은, 마틴 부버가 번역하고 있듯이 <시대적 계약>(Weltzeitbund)입니다: <이제는 결코 물이 모든 것을 멸종시킨 홍수를 내지 못하리라.>(창9:15). 그리고 이와같이 계약의 파트너들이 거명될 것입니다: 너희와 너희 후손들, 우리와 함께 하는 모든 생명체, 새, 가축, 모든 들판과 숲속의 야수들(창9:9이하)에게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생존에 자신을 의존시키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그의 무지개를 하나의 징표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 계약을 기억하게끔 하는 징표를. <구름 속에 무지개가 서 있다면 나는 이 땅위에 있는 모든 생명체와 하나님 사이의 영원한 계약을 기억하기 위해 그것을 눈여겨 보리라.>(창9:16).

이는 마치 하나님이 또 한번 원한에 대한 분노와 의혹에 의해 압도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갖고 있는듯이 보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묶이려고 한것 같습니다. 자연과의 화해를 위해, 견실성을 위해, 성실성을 위해. 하나님이 마치 자신의 어머니 속성으로 돌아서려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신실성 없이 사실상 우리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매일 아침 해가 뜨리라>고, 혹은 <밤이 오지 않는 날이 결코 없기에, 낮이 없는 날도 없으리라‥‥>고 우리는 노래합니다. 창조의 이러한 성실성 때문에, 햇빛의 빛남과 땅의 그림자 때문에 모든 땅에 거하는 것들, 짐승, 식물과 인간이 살아갑니다.

우리의 성서본문은 노아가 이 계약에 무엇으로 응답했는지에 대해 언급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노아는 방주를 만들 때 이미 순종을, 그래서 아담과 나눈 하나님의 계약을 계속 유지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유대신학적 생각은 악의 현실이나 인간의 죄됨에서 시작되는게 아니라 창조의 기적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인간의 능력으로 시작됩니다.7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을 지킬 수 있다는 가능성은 시내산에서 마지막으로 결정적으로 나오는 계약성취에서 드러납니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내리는 이 법은 너희로서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거나 미치지 못할 일은 아니다. 그것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다. ‘누가 하늘에 올라가서 그 법을 내려다 주지 않으려나? 그러면 우리가 듣고 그대로 할터인데’ 하고 말하지 말라. 바다 건너 저쪽에 있는 것도 아니다. ‘누가 이 바다를 건너 가서 그 법을 가져다 주지 않으려나? 그러면 우리가 듣고 그대로 한 터인데’ 하고 말하지도 말라. 그것은 너희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너희 입에 있고 너희 마음에 있어서 하려고만 하면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신30:11-14).

누가 말합니까: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노라고. 이는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이며, 생명으로 부름받은 것에 귀를 틀어막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 면에서 이 말씀을 듣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나에게 우리 백성에 대해 거의 모든 두려움을 갖게 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은 오늘날 이야기하고 경험할 수 있는 무신론적 이야기입니다. 어느 정도 불안정한 지식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무능력 속으로 기어들어가며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갖지 않으려고 합니다. ‘전쟁이란 항상 있어온 거야’라고 말한다면 이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하는 것입니다. 이는 흡사 우리 눈 앞에 빛나고 있는 무지개를 외면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화살을 쏘고 번개를 내려칠 전쟁무기인 활(Kriegsbogen)을 갖고 계신 분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분은 이 활을 내버리시고 전쟁의 도구를 평화의 상징으로 사용하십니다. 무지개(Regensbogen)는 이제 더 이상 황폐화 되지 않는 땅과 맺으신 하나님의 평화의 징표입니다. 그러므로 히로시마에 떨어진 그 구름은 없어지지 않았으며, 잊혀지면 안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가능하며 생산될 수 있는 무지개는 평화를 기억나게 합니다. 독인 안에서 우리는, 무지개의 징표 안에서 노력하는 것이지 핵무기의 징표 안에서 활동하지 않는 우리는 여전히 소수입니다. 그래도 우리의 생각에 동조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으며 이것에 대한 이유와 근거를 갖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대다수는 정의와 비군사력에 근거한 평화를 일구어내기 위한 하나님의 계약 안에 거하지 않습니다. 아직도 우리는 전쟁 가운데서 살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들에 대항해서, 땅에 대항해서, 역시 우리 자신에 거스려서 살고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무지개를 보게될 때에 우리가 행하고 있는 전쟁을 생각하고, 전쟁이 매일 값으로 치루는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그리고 죽음의 힘에 대항하는 이 계약을 생각하십시요. 하나님이 벌써 그가 약속한 것을 상기하기 위한 징표로서 무지개를 필요로 한다면 우리는 정말 어떻게 해야할른지요! 우리는 징표, 상징, 기억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전체적인 전통을 필요로 하며, 그것을 도난당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저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하나의 차이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 무지개가 예비되어 있는지 아닌지,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고 있는지 아닌지, 낡은 땅과 나눈 하나님의 계약을 기억하고 있는지 아닌지 - 혹은 우리가 <붉은 색: 기다림, 푸른 색: 건넘> 처럼 오직 명령으로서의 상징만으로 인식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말입니다. 우리는 모든 다양한 색갈들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무지개가, 하나님의 후회하셨다는 징표와 하나님이 신실하시다는 징표를 필요로 합니다.

무지개는 물과 공기로 만들어졌습니다. 그것은 하늘로 부터 땅에 닿아 있습니다. 그것은 독일역사에서 볼 때 토마스 뮨쩌에 의해 농민전쟁을 일으켰던 농민들이 자신들의 표식으로서 취했던 해방의 상징이었습니다. 땅과 나눈 하나님의 계약! 이 땅은 하나님의 것! 이 천한 남자들은 부당하게 그리고 절망적으로 억압 밑에 굴복당하지 않았습니다. 이 전쟁의 깃발 밑에서 농민들은 1525년 프랑켄하우젠의 전투에 나섰습니다. 한 무지개가 떠오르자 그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징표로 삼았고, 그리고 내달렸습니다. 형편 없는 무장으로 전술도 없이 그들을 죽이는 살육자들을 향해. 그들 중에 오천명이 그 전쟁에서 죽었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노아를 생각했고 활을 꺽어 땅과 우리 사이에, 그리고 가난한 이들과 우리 사이에 평화를 만드시는 하나님의 계약을 생각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직도 우리가 원자폭탄을 무지개로 바꾸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살인마적인 세계, 그것의 포악함, 죽음의 질서에 대한 하나님의 고통은 오늘 노아홍수 시대 보다 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통이 없으신 하나님은 위로하지 못하실지 모릅니다. 그런 분은 우리를 역시 무지개의 징표 안에 있는 게약으로 초대하지 않으실지 모릅니다. 오늘 하나님은 다시 자신의 계약을 제공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지구는 부드럽게 돈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들과의 평화를, 이 땅과의 평화를, 너희 자신과의 평화를 만들라고 하십니다.

1. Claus Westermann, Genesis 1-11, Neukirchen 1974, S.537.

2) Vgl. ebenda, S.538.

3) A. Cohen, Everymen’s Talmud, New York 1975, S.104.

4) Jamil Hamad, in: Frankfurter Rundschau, Nr.5, 1985,1.7.

5) Vgl. Frank Crüsemann, Autonomie und Sünde, in: W. Schottroff/ W. Stregmann, Traditionen der Befreiung, Bd.1, München 1980, S.70ff.

6) Daniel Berrigan, Steadfastness of the Saint. A Journal of Peace and War in Central and North America. Maryknoll 1985.

7) Abraham Heschel, Between God and Man, S.196.

 

죄의 고백과 사죄

 

모든 시대는 자기 나름의 죄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의 죄는 용기상실입니다.

우리는 쓸데 없이 싸움질을 했으며,

우리는 우리가 퍼싱미사일을 막아낼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모든 시대는 자기 나름의 죄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의 죄는 고독입니다.

우리는 죽음의 무기를 더 이상 막아내지 못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어느 누구도 그 길 너머에서 신뢰하지 못합니다.

모든 시대는 자기 나름의 죄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의 죄는 낙심입니다.

우리는 이제 겨우 입술에만 희망을 걸어두고 있습니다.

우리의 가슴은 비어 있습니다.

모든 시대는 자기 나름의 죄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의 죄는 너무 단견에 매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아이와 손자들을 위한 싸움이,

우리의 아이들과 손자들과의 손잡은 싸움이 계속한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공기가 모두 빠져날아가 버려서, 더 이상 편안히 숨쉴 수 없습니다.

모든 시대는 자기 나름의 죄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의 죄는 두려움입니다.

우리는 위에서 내려 누르는 억압에 복종합니다.

자율성, 자기확신과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우리에게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

그는 아이와 손자를 살아있게 하시는 하나님이

당신들의 죄를 벌써 오래 전에 용서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당신의 용기상실로 부터 믿음이,

고독으로 부터 사랑이,

낙심으로 부터 희망이 싹트게 했습니다.

긴 호흡, 이것이 당신에게 주어진 성령입니다;

하나님의 신뢰가 성령과 함께 우리 가슴에서 넘쳐나며,

우리를 일으켜 세웁니다.

<하나님이 가까이 계심을 너희가 보거든,

일어나 너희 주께 영광을 돌리라. 왜냐하면 너희를 향한 용서가 가까이 임함이라.>

너는 믿음을 갖고 있다,

너는 사랑할 능력이 있다,

희망에 대한 너의 능력은 너의 친구까지도 불붙이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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