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형제이신 하나님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 조회 수 3702 추천 수 0 2011.01.31 11:54:49

루이제 쇼트로프

 

골로새서의 그리스도 찬가

성서공부, 골1:15-23

 

형제이신 하나님

 

저는 저의 형제인 하나님, 즉 예수님에 대해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저는 또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나의 자매인 하나님에 대해서, 라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원래 작은 인간을 더 작게 만드는 남성적 그리고 지배적인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 형제 하나님인 예수님은 유대의 평범한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Jesus), 예수아(Jeschua)- 이는 하나님이 돕는다는 뜻입니다. 요한이나 마리아와 같은 고유한 자기 이름입니다. 이런 평범한 예수가 그리스도요,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신 분이라고(골3:1) 초대 기독교인들은 말하며 노래했습니다. 저도 똑같이 말합니다. 그는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했는데 저는 그가 옳았다고 믿습니다. 그는 생명을 획득키 위한 비현실적인 길을 가르쳤는데, 그것은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그의 얼굴을 저는 자주 대면하고 있습니다. 그의 얼굴은 긴장되고 여위어 보입니다. 그의 얼굴에서 감옥살이의 경험을 보게 됩니다. 저의 형제인 하나님만이 저를 주시할 수 있는 것 처럼 그는 저를 주시합니다: 그렇게 용기가 없느냐는듯, 그렇게 믿음이 부족하냐는듯 말입니다. 그의 얼굴은 친근하고 선입견이 없으십니다. 그는 저를 친구처럼 바라보십니다. 이런 평범한 예수는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라, 나는 네가 무언가를 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너는 모든 것이 얼마나 끔찍스러운지 이미 잘 알고 있다. 너는 전쟁 가운데서 네 생명이 끝장났으며, 인간에게는 별로 기대할 것이 없어서 아기를 갖는다는 게 멍청이 같은 짓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제 형제인 하나님은 나의 손을 이끌어 자기 뒤로 숨겨주십니다. 생명을 주시는 그의 길은 완전히 비현실적이지만 나와 같은 사람들에겐 유일한 길입니다. 그리고 그는 목표에 이르기 까지 이끌어주시는데, 그 까닭은 그분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시기 때문입니다. 그의 길은 사랑과 항거이며, 그의 길은 무력한 사람들의 길이며, 그의 길은 하나님을 희망하는 것을 뜻하며, 따라서 내일 하나님의 날이 올 것 처럼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기실 것이며,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계21:4)

하나의 새로운 하늘과 새 땅이

우리 눈 앞에 놓여있다.

저의 형제인 하나님은 평범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는 나와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무한히 크십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제 형제인 하나님은 매우 천해서 그와 함께 하기에 너무 비천하고 궁핍했던 인간운명은 없습니다. 그는 모든 가난한 <악마>들과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제 형제인 하나님은 매우 큽니다. 이 모든 세상 보다 큽니다. 하나님은 그를 왕위에 앉히셨습니다. 그의 길은 완전히 비현실적입니다. 그는 매우 특이한 말씀을 하셨는데, 예컨대 <네 왼뺨을 들이대라>고 하시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길이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부패하거나 포기되어질 수 없는 생명을 위해서 말입니다. 게쉬타포의 감옥에서, 전쟁터에서 예수님이 얼마나 자주 얻어터지셨는지 모릅니다. 그는 저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십니다. 그는 아주 가까이 그리고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그는 온세계 보다 크십니다. 그는 자기 편에 진리와 생명을 갖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의 삶 속에서 그의 진리와 생명을 단편적이나마 실현시킬 수 있다면, 이 세상은 미래를 갖게 될 것입니다; 저 한 사람만이 미래를 갖는게 아닙니다. 그리스도적 인간(Christusmenschen)과 희망적 인간(Hoffnungsmenschen)이 이땅 구석구석에 살아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죽음을 넘어선 승리가 점점 다가올 것입니다. 이따금 두 세 사람이 그의 이름으로 모이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저의 형제인 하나님은 상처받기 쉬운, 상처난 인간으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우리가 형제로서의 하나님인 그를 바라본다면 우리는 약해지고, 예민해지고, 강해지고, 행복해집니다.

바울은 그가 디모데와 함께 골로새에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편지를 썼을 때 다른 기독교인들과 함께 에베소 감옥에 갇혀있었습니다. 이 편지에서 그들은 하늘에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형제 하나님에 대한 찬송을 노래했습니다. 이 찬송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그들에 의해 지어진 것이 아니고, 바울 이전에도 그리고 이후에도 다른 기독교인들이 불렀으며, 골로새 기독교인들도 불렀던 일종의 찬양으로서, 약간 보충된 노래입니다.

골로새는 오늘의 터어기 지역에 1세기에 있었던 작은 도시이며, 서소아시아의 서남쪽에 있는 도시였습니다. 오늘날에는 그곳이 코나스라고 불리웁니다. 그 당시에 그 도시는 로마 영토인 아시아에 속했습니다. 골로새의 적은 기독교인들은 옷감으로 짜서 먹고 살았습니다. 골로새에서는 옷감을 짜거나 물감을 들이거나 양을 칠 수 있었는데, 주로 염색업이 주종을 이루었습니다.

에베소 감옥에 있는 바울과 골로새에 있는 소수의 기독교인들은 형제인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이 망할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옳습니다. 이 세상은 역시 망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습니다. 그들은 그들 발밑에 있는 터전이 얄팍한 열음장 같이, 깨지기 쉬운 것 처럼 느꼈습니다. 그들은 굳건히 설 수 있는 발밑의 터전과 희망의 작은 자리를 허락한 형제인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며,

모든 창조의 첫번으로 나신 이입니다.

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시기 전에 벌써 계셨고 모든 세상 보다 더욱 크시며 하나님과 같은 모습을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서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바로 그가 하늘과 땅이 자리를 발견하는 큰 육체요, 원시림이요, 인간근원(Urmensch)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찢겨진 세상의 안전을 위한 어떤 형상입니다. 그리스도는 아직 하늘의 저편에 계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 발맡의 터전이기도 합니다.

그의 안에서 모든 것이 창조되었습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왕위와 주권,

권세와 폭력,

모든 것이 그를 통해서 그리고 그를 향해서 창조되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귀신들이 여기에 언급되었습니다. 이 세상의 주권자들, 왕, 카이저, 대통령과 장군들. 그리고 그들 위에 군림하는 마귀적 교만과 확장욕: 즉 마귀의 하늘과 귀신의 권세들입니다.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이 세상의 혼돈이 넘쳐 흐르고 하늘을 향한 증오의 고통이 넘쳐 흐르고, 죽음의 지옥들에 대한 고통이 넘쳐 흐릅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현실에 대한 그들의 경험은 이 세상이 선한 권세에 의해 멋지게 움직이는게 아니라, 본훼퍼가 노래했듯이 악한 권세에 의해 잡아먹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먹거리 안에도 이런 혼돈이 우리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그들이 갖고 있는 이중의 터전과 무지막지한 권세에 관계된 죽음의 세상을 그리스도가 지배합니다. 그는 그의 몸을 이 모든 것을 위해 바쳤습니다. 그는 이 주권자들의 참된 주님입니다. 이 고대인의 세상이해는 신화적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 삼층의 구조로 짜여있다는 것이 고대의 신화적 사고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밑에 하나의 세계가, 우리 머리 위에 다른 또 하나의 세계가 있습니다. 나무나 꽃 안에서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마귀와 권세들의 운동장이 모두 이 삼층구조입니다. 당신들이 어디에 속해야할지 모른다면 이 세상은 정말 완전히 위험한 권세자들의 소유가 되고 맙니다. 이 고대신화는 아직도 이 세상을 설명하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살인의 전체 숫자는 자연적으로 죽는 자들 보다 많습니다. 전제 숫자로서 죽음의 왕이, 즉 개개의 살인보다 훨씬 강력히 집합적으로 생산되는 죽음의 왕이 출현합니다. 그는 로켓을 운전하는 컴퓨터 기술자에게 명령을 내리는 장군에게 접근해서 자신들의 뜻대로 일을 처리합니다. 이렇게 사병, 장군, 관리자, 그리고 모든 무기기술자들이 각기 작은 불빛으로, 공장의 작은 톱니바퀴로, 그리고 무력한 한 사람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정말 심각한 건 죽음의 왕이 내리는 명령이 실행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대량학살이라는 이런 끔찍한 일을 우리 형제인 하나님이 처리하실 것입니다. 그는 모든 권세와 폭력을 끝장내며 그들에게서 그 힘을 빼앗고 그 마술을 풀어버리십니다. 그들은 피조물이지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는 모든 것에 앞서 있는 분이며,

그리고 만물이 그를 통해 연관됩니다.

발밑에 있는 터전이 골로새 기독교인들을 파괴했다는 건 그 지역의 지진으로 인한 위험성만을 뜻하는게 아닙니다: 기원후 61년, 그러니까 골로새서가 기록된지 몇년 후에 골로새는 지진 때문에 완전히 파괴됐습니다. 이 땅은 너무나 위험했습니다. 죽음은 그 손을 뻗쳐댔습니다. 아래 위에서 죽음의 마귀가 손을 뻗쳐 할켜댔고 인간을 포로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만물은 그를 통해 연관됩니다.

형제인 하나님은 그 징조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 지옥을 막아내십니다. <피방울이 하늘에서 떨어진다>고 그 당시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1945년 당시 드레스덴에서 시체를 불도져로 쓸어담아 피자국을 감추었습니다. 피가 하늘에서 떨어질 때 중부유럽의 재난방지부에서는 오늘에도 아주 충분할 만큼의 불도저를 이미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만물이 그를 통해 연관됩니다.

나의 형제인 하나님이 손으로 붙드십니다: 마귀들을 동정하지 말라, 생명의 길을 가라, 죄를 짓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는 몸의 머리입니다 - 그리고 그는 <에클레시아>, 곧 교회 공동체입니다.

이 찬양의 노래,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을 향한 찬송은 찬양 위에 찬양으로 탑을 쌓아갑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세계보다 더 크십니다. 그는 모든 마귀와 죽음의 주권자들의 주님입니다. 그는 모든 시간에 앞서 계십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며, 창조에 개입하는 분이며, 하나님의 동료이십니다. 당신이 그 너머로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보다 크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그 원래적 시초를 상상해 볼 있는 그런 시간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이미 그곳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우주적 육체며, 원인간(Urmensch)입니다; 그의 육체는 하늘과 땅을 감싸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의 몸, 이것은 바로 공동체입니다. 더구나 골로새에 있는 공동체는 별볼 것 없는 집에서 천을 짜고 있는 여자들과 목동으로 이루어졌는데, 그런 집들은 후에 큰 지진으로 모두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그들에 대한 발자취는 하나도 남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렇게 작은 공동체가 거대한 것을 만들었습니다. 하늘과 땅을 감싸고 있는 이 고대 원인간의 몸은 가난한 사람들의 이런 작은 무리와 동일시됩니다.

거의 대부분이 남자인 제 동료 신약성서학자들이, 공동체에 대한 본문의 언급이 우주적 그리스도를 노래하는 것으로서 부수적인 요소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의를 매우 신중하게 이끌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운율적으로 볼 때 어울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노래의 기초는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울려퍼집니다. <그리고 그는 몸-즉 교회(Gemeinde)-의 머리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지워버려야 한다고들 말합니다만, 하나님이 우리의 형제라는 사실을 지워버려야만 할까요? 그는 아주 평범해서 골로새 교우들과 같이 소박한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갖는 연대성 말고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하늘의 하나님 우편에 왕관을 쓰신 그분이 바로 이들을 보증합니다. 그분은 바로 저의 형제인 하나님입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의 첨가 없이 이 찬양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노래가 아닙니다.

그는 처음이시고, 죽음으로 부터 첫째로 나신 이(Erstgeborener)입니다.

그래서 그는 만물 중에 처음이 되십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모든 눈물을 씻기실 그 새 하늘과 새 땅의 먼저 나신이요, 창조와 새창조의 먼저 나신 이입니다. 창조의 생명이 죽음의 왕에게 더 이상 끌려다니지 않는 이 새창조는 벌써 시작했다고 초기 기독교인들이 노래했습니다. 저들은 이와같이 그 어떤 이해하기 힘든 것들을 확실하게 주장했습니다: 우리가 바라고 희망하는 죽음의 부활이 벌써 시작했다고 말입니다.

세례를 통해서 우리는 죽음으로 부터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합니다(골2:13, 3:1). 이것은 상징적인 것이 아니며, 또한 그냥 지나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병자들이 죽음에서 회복된다고 우리가 말하는 것과 같이 사실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들로 부터 부활하며,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들로 부터 부활합니다: 이는 그가 우리를 그의 몸 가운데서 깨끗이 하셨다는 뜻인데,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가운데 거합니다. 살아계신 그리스도에게 두 세 사람만이라도 모이면 그리스도의 몸이 될 수 있습니다; 세 사람만 있으면 우리를 부활시키시는 그분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먼저 나신 이라고 하는 경험을 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세 사람이 이 찬양을 함께 부르면 죽음을 이길 수 있으며, 새 땅과 새 하늘을 이어주는 다리가 놓여지게됩니다. 저는 본문이 이런 것을 의미했다고 믿습니다. 거기에다가 저의 경험이 보충되고 있습니다.

제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하나의 표식이 있습니다: 우리가 부르는 이 노래가 죽음의 사실 앞에서 불려질 때입니다. 예컨대 본훼퍼의 찬양이 바로 제가 말하려는 확증입니다: <좋은 권세에 의해 모든 놀라운 일이 숨겨져 있어서 우리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에 신뢰심을 갖고 기다린다네.> 본훼퍼는 감옥에서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현재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벌써 이 노래가 더 이상 옳지 않았다는 것, 속임수였다는 것, 감상적이었다는 것, 경건한 기분에 대한 하나의 충성심이었다는 것도 역시 경험했습니다. 왜냐하면 실제적인 일이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굶주림과 핵폭탄과 환경오염의 독성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점점 확장되어가는데도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우리 세상이 악한 권세에 의해 잡아먹히는 것에도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저와 당신이 무자비한 세상에서 질식해 있는 것에도 역시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죽음의 왕을 이기기 위해서 세 사람이 손에 손을 잡고 부활하신 이의 이름으로 그리고 그들의 손으로 일할 때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합니다. 골로새 편지에서 부활의 현재성이 전혀 제한받지 않고 주장되었는데, 이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바는 희망을 갖고 있는 이들의 이러한 작음 모임이 얼마나 중요한가, 라는 점입니다. 죽은 이의 부활은 창조의 먼저 나신 이와 그리고 죽음의 먼 저 나신 이와 함께 실행됩니다. 형제인 하나님은 이 처럼 평범하고 이 처럼 위대하십니다. 이와같은 어떤 작은 이들이 바로 죽은 이로 부터의 부활인데, 이들은 현실성을 직시하는 세 사람이며, 또한 그리스도가 생명의 먼저 나신 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해 투쟁하는 세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런대 가끔 다행스럽게도 세 사람 보다 숫자가 많습니다.

골로새 기독교인들의 찬양은 그리스도의 위대함과 그의 죽음에 대한 문장으로 매우 엄격하게 끝을 맺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충만함이

그 거처를 얻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를 통해 만물이 용서함을 얻게 되고,

이로써 그는 평화를 만들며, 그 십자가의 보혈을 통해

땅과 하늘에 (평화)를 만들었습니다.

나사렛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로마의 위계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자로서 공공연히 십자가에 처형됐습니다. 그는 고문당하고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어떤 역사가도 의심하지 않는 예수에 대한 무언가를 언급할 수 있다면 그것은 십자가에서의 죽음입니다. 이런 죽음을 무조건 종교적으로만 승화시키는 것은 예수 앞 시대나 후대에 예수 처럼 십자가에 죽었던 모든 이들에 대한 일종의 모욕입니다. 국가사회주의 독일의 불의와 직면에서-본훼퍼 처럼-, 자본주의의 불의와 직면해서-로메로 처럼- 그리고 스탈린주의의 불의에 직면해서 죽은 이들 말입니다. 저의 오빠는 1946년 15세로 GPU 진영에서, 즉 스탈린 비밀경찰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 오빠는 제삼제국에서 히틀러 청년대 가입의 거절이 불가능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순간도 청년단원으로 남아 있은 적이 없었습니다.

골로새의 그리스도 찬양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로 부터 먼저 나신 이를 십자가에 달린 그의 죽음으로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예수의 죽음을 순전히 종교적으로만 높히려는 건 그의 죽음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며, 따라서 이는 인간이 저지른 죽음을, 즉 비참한 죽음을 무시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이런 해석은 -예수의 현실성 제거- 우리 교회에서 유감스럽게도 확실하게 실현되고 있습니다. 예컨대 모두가 하나의 십자가를 져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그 십자가를 하늘에서 만들어 모든 개인들에게 적당하도록 공급하기 때문에 일 그람이 더 무겁거나 일 센티미터 더 긴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가 모든 이들에게 딱 들어맞는 십자가를 짊어지도록 주셨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그래서 한 여자가 (거의 이런 <십자가설교>는 여성들에게 해당된다) 자기 힘에 버거운 십자가를 끌고 가야만 합니다. 이 십자가를 그리스도가 그녀의 등뒤에 올려놓았습니다! 성서 그 어디에도 이와 같은 일은 없습니다. 이것은 자기 삶의 무거운 짐 밑에서 숨가빠 하는 모든 이들에게 모욕입니다. 또한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에게도 모욕입니다. 그는 용감한 순교자였지 강압적인 십자가를 나눠주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로마 정부는 완벽한 평온과 질서를 강요했기 때문에 예수는 무자비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출신의 가난하고 힘들고 소박한 평범한 남자였지 하나님의 희생자나 속죄의 영웅이 아니었습니다. 하늘과 땅을 감싸 안으시는 형제인 하나님, 그분의 몸은 십자가에 달린 순교자의 피흘리는 몸입니다. 하나님은 눌린 여성들에게 십자가를 강요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걷어치우며 고통스러워하는이들을 당당한 영웅과 여걸들로 만드십니다. 이들은 자유롭게 자신들의 머리를 곧추 세우며 그리고 인간을 소시민화 하는 잘못된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과대망상을 허물기 위해 투쟁하고 대항하는 이들입니다. 여러분들이 인간을 왜소화 시키고 내팽개치는 예배장소에 가게 되면 이것이 진실한 하나님 예배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매일 마지막 힘을 다 바쳐 자신의 삶을 질질 끌고가는 인간들의 고통을 합리화 하는게 아니라 모든 것의 용서함, 전세계의 평화를 정당화 합니다. 이 평화의 자녀들로서 우리는 사랑의 예배를 축제로 드립니다. 코스타 리카의 한 공산주의 시인인 요르게 데브라보(Jorge Debravo, 1938-1967)가 부른 다음과 같은 노래는 진실한 예배가 무언가를 알려줍니다.

진실된 예배

오늘 아침 우리는

사랑의 예배를 축하할 것입니다.

우리는 옥수수와 밀가루와 희망으로

성만찬의 빵을 빚어낼 것입니다.

바위 꼭대기에서,

구릉과 언덕배기에서

우리는 생명의 빵과

의(義)의 포도주를 빚어낼 것입니다.

(오지 말아야 할 그것,

그 원수는

수채구멍으로

굴러떨러질 것입니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무릎 꿇고 기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반듯이 서서 기도할 것입니다. 생명을 준비하기 위해,

반짝이는 눈을 간직하고.

(양손이 짓이겨지고

철사줄로 묶일 때

무릎이 꿇려지게 되겠지요.)

깊은 밤 우리는 제단에 나와, 한 마음으로

가슴을 부등켜 안고,

기쁨의 기도를 드리며,

자유의 입맞춤을 나눌 것입니다.

(서로 부등켜 안고

형제에게 말할 때

함께 하지 못한 이들은

외로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제사장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높은 자와 낮은 자 모두.

그리고 우리는 사랑의 빵을 나누게 될 것입니다.

따뜻한 가슴을 가진 암사슴 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모든 이들을 이 예배에 초대할 것입니다:

어린아이, 노인, 갖힌 자,

비행사와 엔지니어들,

주교들과 노동자들을 ‥‥‥

(서서 노래하며

기도할 때,

비겁하게 무릎을 꿇는 자는

이방인입니다.)1

시이저 대(對) 그리스도

골로새서를 중심으로 본 시이저 대 그리스도

골로새 그리고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는 에베소에서 기원후 1세기 어느 해 9월23일에 국가적으로 행해진 축제가 있었습니다: 그날은 카이저의 생일인데, 이것의 세계적 의미는 바로 카이저의 생이 새해를 시작하는 시점으로 선포되었다는 점입니다. 어느 누구도 아시아 지역에서 로마의 카이저가 모든 이의 주(主)라는 것을 잊으면 안되었습니다. 공식적으로 행해신 이 축제에 모든 이들이 환호를 보내야만 했습니다: 사람들이 사는 세계의 새로운 삶을 카이저가 우리에게 가져다 준다는 뜻입니다. 당국에서는 다음과 같은 엄격한 포고문을 게시했습니다.

<우리의 삶은 완성된 선(善)으로 인해 지탱되는데, 그 선은 우리 삶에 대한 완전한 (신적) 예측으로 ‥‥ 완성되노라. 그 지고한 선이 아우구스투스의 덕분으로 인간을 행복으로 충만케 했으며, 전쟁을 종식시켰고 그리고 우리와 우리 후손들이 구원자를 선물로 받게 하기 위해서 평화의 질서를 세웠노라 ‥‥> (아시아 지역의 달력법령)

지배언어, 카이저언어, 강제된 굴종선언, 돌에 새겨진 것으로서 이것은 오늘날 여행자들에게 이상하게 보입니다. 왜냐하면 이 여행자들은 이 황금의 아우수그투스 시대, 즉 소위 화려한 로마 카이저시대에 따라다니는 이 고통을 거의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억압의 고통에 대해 그 어느 다른 로마시대의 역사문서에도 나와 있지 않은 내용이 신약성서에 아주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에 처당하신 그리스도의 죽음과 바울의 구금은 로마 카이저의 억압이 불러온 고통이 무엇인가에 대한 웅변적인 증거입니다. 골로새서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바는 자신의 능력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사실을 바울이 직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편지의 끝에 그가 말하기를 <내 묶인 쇠사슬을 생각하라>(골4:18), 나를 위해 기도하라, 혼자서는 이 위기를 견뎌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다른 서신에서도 밝히고 있는 것 처럼 초대교회는 저들 각자 삶의 작은 틀이라는 관점에서 개인과 공동체 간의 긴밀한 연관성을 분명히 했습니다: 바울이 아직 방문하지 못한 골로새 기독교인들은 바울이 저들을 위해 감옥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를 믿었으며, 그를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하나로 엮어주는 신뢰의 줄로 함께 살았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몸에서 그리스도가 당한 고통의 반복과 연속을 보고 있습니다(골1:24)

억압적인 정부당국은 카이저야말로 모든 인민을 위해 평화를 가져오는 구원자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며 이 세상의 주(主)라고 주장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골로새 찬양에서 처럼 노래를 부를 때 모든 문장은 체포당하리라는 것을 전제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종교적 표현을 가진 로마제국의 절대주의적 주장이 이런 찬양에 의해 도전받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평화를 심는 분이며 모든 이의 죄를 사해주는 분이며, 이 세상에는 오직 한 하나님과 한 주님만이 있다는 기독교인들의 신앙고백은 결국 로마당국의 비위를 거스르게 되며 이로 인해 체포당할 것을 각오해야만 합니다. 또한 <odium humani gereris>-인류에 대한 증오- 때문에 사형선고를 받게 됩니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결코 정치적 목적을 시도하지 않았습니다만,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해 언급했던 모든 낱말들은 다분히 정치적이었습니다.

여기서 골로새에 있는 소시민들이 볼품 없는 집에 앉아서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충성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로마 관리들이 이런 기독교인들의 문제를 자기들이 처리하는 식으로 간단하게 넘겨버리지 않은게 이상합니다. 사실 군사적인 막강한 힘을 갖고 아시아 지역에 주둔해 있던 지방 총독은 골로새의 소시민이 갖고 있던 종교적 과대망상과 허황한 경건성을, 즉 에베소의 감옥에 있는 바울이 생각하던 그것, 그리고 벌써 여러 해 전에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은 나사렛 예수의 그것을 가소롭게 웃어 넘길 수 있었는데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의 먼저 나신 자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그 안에서 창조되었기에 ‥‥

이 세상의 권력이 로마에 있는 카이저의 손에 달려 있는 게 아니라고 그들은 노래합니다. 그 능력은 예루살렘에서 로마권력에 의해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나사렛에서 온 목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사실적으로 물어야합니다. 왜 로마 총독은 골로새 기독교인들, 감옥에 있는 바울,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그리스도를 그처럼 위험시했는지를 말입니다. 로마 관리와 로마의 주(主)는 전혀 다른 저항에 의해 끝장 났습니다. 그곳에는 로마군대에 대항해서 싸움을 벌일만한 군대가 없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로마에 있는 아우구스투스 카이저의 권좌에 올라서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랑으로 어둠의 나라과 싸워 이긴 왕이었습니다. 이것은 곧 유대백성과 그에 동조하는 이들에게서 온 평범한 사람들의 종교적 열망이었습니다.

로마의 주에게 가장 위험스러운 것은 권력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와 사실화였습니다. 그리스도의 권세는 카이저와 경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핵무기나 컴퓨터와 경쟁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권세는 정말 소박합니다: 이 세상의 가장 강력한 권력 앞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유지하는 이들의 직립보행입니다. 승전퍼레이드, 핵전쟁, 감옥, 관리, 군대 ‥‥ 이처럼 카이저 권력의 병기고는 철 위에 철로 탑을 세웁니다. 로마 카이저가 오늘과 같은 군사무기를 소유할 수 있었더라면 더 끔찍한 영향을 끼쳤을 것입니다. 그들은 말을 타고 등장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대 오늘날 히틀러의 군대들, 독일 방위대 -유감스럽게도 그들도 역시-,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군대, 이런 것들은 로마 카이저의 정신에 입각한 군대들입니다. 그들은 폭탄과 철로 만들 수 있는 안보 이외의 다른 목적을 전혀 갖고 있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권세는 로마 카이저의 감옥 안에 갇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생수와 같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들은 어느 누구도 강제하지 않고 그 견고히 다져진 철탑을 통과해 나왔습니다. 철근 콩크리트를 부수고 탱크를 녹슬게 해서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마귀들을 그의 간혹 있는 승전퍼레이드를 통해 무장해제 시켰습니다.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의 평화)는 군사와 식민지지배와 강제력 위에 세워졌으나 팍스 크리스티(Pax Christie, 그리스도의 평화)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세워졌습니다. 골로새의 찬양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그의 모든 충만하심을 그 아들 안에 머무르게 하시고 그의 아들의 십자가의 피로서 평화를 이룩하시고 그를 통하여 만물을 자기와 화해하게 하셨습니다. 땅에 있는 것이나 하늘에 있는 것이 다 아들을 통하여 자기와 화해하게 하신 것입니다.>(골1:19,20).

기독교적 신앙은 정치적 목적의도를 갖지 않았으며, 역시 정치적 결과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종교와 정치를 구분하려는 시도, 서독의 우리 교회 안에 드러나고 있는 전형적인 이 시도는 실제적으로 오늘 우리의 눈앞에 등장한 왕권과 제단의 연합을 위한 비신앙적이며 순수변증적 술책에 불과합니다. 우리 교회의 지도자들은 흡사 정부관리들 처럼 말합니다. 신약성서의 모든 문장들은 그와 다른 언어를 말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택과 평화작업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일종의 기독교신앙의 부록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심장과 같습니다. 그런 일을 우리는 정치현장의 중심부에서 만나게 됩니다: 이는 곧 희생자들을 우리 관심의 중심에 놓는 것이며, 기업가의 이익이 국가운명과 직결되어 있다는 주장에 도전하는 일입니다.

로마 카이저와 미국에 있는 그 후계자들의 안보논리는 오늘날 사실 그대로 우주적 차원에 도달했습니다. 소위 말하는 별들의 전쟁입니다: 우주적 안보우산, 군수산업의 대기업화가 그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우주적 몸이 갖는 부드러운 권세는 카이저와 카이저 추종자들을 항상 배격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예언자 예레미야의 말을 빌려 천사로 부터 온 말씀 가운데서 로마의 안보논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습니다:

사람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고 말할 그때에 갑자기 그에게 멸망이 덮칠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아기 밴 여인에게 진통이 오는 것과 같아서 그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살전5:3).

그리스도의 평온

저는 대단히 큰 격앙에 빠지기도 하지만, 역시 커다란 평온과 만나기도 합니다. 그것은 제가 기도할 때 보호하는 덮게 처럼 제 위에 임합니다. 저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생각하려고 시도합니다. 항상 고통을 져야만 하는 내 형제들의 얼굴을 생각하게 됩니다. 인종구별이 있는 한, 전쟁이 있는 한, 굶주림과 실종된 이들이 있는 한 내 형제 그리스도는 고통을 지게됩니다. 저는 정말 슬프기도 하고 비분강개하기도 합니다만 역시 저에게는 평온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에 머물지 않으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죽음의 권세는 한번도 승리하지 못하고 항상 자기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역시 골로새의 소시민들에게서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저는 죽음에 봉사하지 않고 생명에 봉사하는 걸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일상생활을 통해 만나게 되는 속임수와 잔인함에 빠지지 않을 결심입니다. 내 형제인 하나님이 주시는 이 평온이 나를 채우면 채울수록, 저의 격앙에서, 더 정확히 말해서 막강한 권력에 대한 도전의 불투명한 전망으로 부터 더 확실하게 빠져 나올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실행하는 반(反)권세는 세상의 막강한 권력과 똑같은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폭력과 안보논리의 차원에 들어가는게 결코 아닙니다. 제가 기도하지 않거나 그리스도의 평온이 그냥 스쳐지나가면 저의 격앙은 기절초풍할 분노로만 남게 됩니다. 이런 매우 비현실적인 예수의 길을 따르는 일은 가능합니다. 저는 이 안보논리에 사로잡히 않겠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중무장한 권력들이 최소한 우리를 무시하지 않게하기 위해서라도 도전적이어야 하겠습니다.

골로새서에는 정말 아주 특별하고 빛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헬라사람이나 유대사람이나, 할례자나 무할례자나 미개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의 구별이 없고, 오직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가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골3:11). 기독교의 세례고백문이 모든 인간의 동등함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례받을 때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이들, 남자와 여자, 주인과 노예가 똑같음을 확신합니다. 머리의 생각만으로나 아니면 피안적인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이는 곧 기독교인과 교회의 일상생활을 말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똑같습니다. 그가 속한 성(性)이 무엇인가에 따라 한 인간이 규정될 수는 없습니다. 여자와 남자는 아무 제한 없이 동일합니다. 노예와 주인도 평등합니다. 골로새서 안에서 이 신앙고백은 반복되고 현실화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그리스도 안에 헬라인이나 유대인이 없고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 노예와 자유자가 따로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세례신앙고백문의 내용 중에서 특별한 것은 스구디아인에 대한 언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스구디아인은 소위 변방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사는 이 땅의 변두리, 즉 오늘날 러시아 지역에 살았습니다. 그들은 후에 흉노족이 흉악한 모습을 가졌던 것 처럼 살벌한 주변환경 가운데서 말을 타고 사는 포악한 민족의 전형으로 비쳤습니다. 그들은 문명화된 인간이 아니라 짐승 처럼 괴성이나 지르며 살았습니다. 그들에 대한 기분 나쁜 소문이 많았는데, 일례로 자기들이 싸워 이긴 사람들의 두개골로 피를 받아 마신다고도 했습니다. 스구디아인들은 헬라인이나 로마제국의 교양인들에게 적대적인 개념의 총칭으로 통했습니다. 침략을 일삼는 이 짐승 같은 흡혈귀들을 막아내기 위해 성을 쌓아야 했습니다. 중국의 만리장성 처럼, 우주적 방어우산 처럼 말입니다.

바울과 골로새의 소시민들이 그리스도의 평온을 민감하고 주시할만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용감하게 말합니다: 스구디안인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라고 말입니다. 기독교적인 세례신앙고백이 지향하고 있는 이런 변혁의 새로운 전망으로 인해 두려움과 증오로 설계된 군사방어계획은 허물어집니다.

당신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했다, 당신들은 성령을 받았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프로테스탄트에는 종교적으로 자신을 낮추어 말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우리는 천한 자들이며, 우리는 죄에 물든 남녀들이며,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빈손으로 서 있다고 말입니다. 이런 말들은 우리의 입술을 통해 자주 언급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말하도록 해야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어둠의 폭력에서 해방시키시며, 그리스도는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내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이다, 삶의 주인공들이며 사랑할 능력이 있고 그리스도의 평온과 자유로 충만하며, 우리는 골로새인과 터어키인, 여자, 노예, 자유인, 남자, 스구디아인, 소련인들이 모두 동등과 평화 안에서 상호 협조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창조를 위해 싸울 능력이 있고, 우리를 슬픔과 체념이 엄습할 때 이런 것들을 물리쳐 달라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릴 것이라고 말입니다.

데스몬트 투투(Desmond Tutu) 주교가 쓴 글에서 짤막한 감동적인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가끔 학생들이 졸업시험에서 대답할 수 없어서 억지로 쓴 대답이 어떻게 보면 불경하지만 대단히 소중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경우가 있다는 걸 그들을 알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한 학생이 신학졸업시험에서 ‘예수님이 세례받으려고 세례요한에게 왔을 때 요한은 예수님에게 무슨 말을 했겠는가?’라는 문제를 받아든 소년은 확실한 대답을 찾아낼 수 없어서, 그저 행운을 바라는 마음으로 이렇게 답안지에 썼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에게 말했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생각하시오. 그리고 그렇게 어울리도록 사시오!’ 그렇습니. 우리 모두가 왕과 왕비라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 사랑받은 자들인 우리는 그것에 어울리도록 살아야 합니다.>2

 

1. H. Assmann u. F.J. Hinkelammert u.a., Die Götzen der Unterdrückung und befreiende Gott, Münster 1984, S. 189-190.

2. Desmond Tutu, Gott segne Afrika, Reinbek 1984, S.120-121.

 

중보기도

 

그리스도 우리의 형제여,

저는 제가 겪어야 할 전쟁의 도래에 대해 절망합니다.

당신은 믿음이 산을 옮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여 자비를 베풀어주옵소서.

생명의 말씀이신 그리스도여,

저는 벙어리가 되어

두려움과 경악에 차서 몸이 굳어졌습니다.

당신은 말씀하시기를 골방으로 도망하지 말고

지붕 위로 올라가서 소리치라고 하셨습니다.

주여, 자비를 베풀어주옵소서.

세상권세 보다 더 강하신 그리스도여,

이 세상의 권력을 가진 남자들이 저의 일상생활에서

용기를 빼앗아가기 때문에 저는 놀라 몸이 굳어졌습니다.

당신은 우리가 권력자들의 폭력에서 우리의 친교를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여. 자비를 베풀어주옵소서.

그리스도는 나 자신보다 나에게 더 가까이 계신 분

저는 매우 절망적이어서 오직 나만을 위해 기도할 수 있을 뿐인데

다른 일을 위해 기도할 없는데

당신은 나를 나의 자매와 형제 안에서 눈여겨 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여, 자비를 베풀어주옵소서.

하나님 우리의 어머니시여,

우리의 자녀들은 고난 속에서 불행에 지쳐있습니다.

그들은 너무 많은 경쟁심과 너무 적은 어린이의 행복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어린이 편에 계시며 우리에게 지금 하나님의 능력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여, 자비를 베풀어주옵소서.

하나님 우리의 아버지시여,

젊은이들은 우리에게서 아무 자리도 발견하지 못합니다.

공부할 자리도 없고 미래의 일터도 없습니다.

당신은 말씀하시기를 꼴찌가 첫째가 되며

지금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허락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주여, 자비를 베풀어주옵소서.

하나님 우리의 어머니시여,

적음 연금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늙은이들은 경제적인 빈궁 속에서 비참하게 살아가며 때로는 고독합니다.

당신은 말씀하시기를 늦게된 자가 먼저되며

지금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주여, 자비를 베풀어주옵소서.

하나님 우리의 아버지시여,

실업자들은 자기 스스로에게 회의적이며 관료주의 밑에서 신음하고 좌절합니다.

당신은 말씀하시기를 꼴지가 첫째가 되며

지금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주여, 자비를 베풀어주옵소서.

하나님 우리의 어머니시여,

이 세상에 굶주리는이들의 신음이 하늘 까지 소리칩니다.

당신은 말씀하시기를 꼴찌가 첫째가 되며

지금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당신은 가난한 이들과 우리에게 하나의 새로운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주여, 자비를 베풀어주옵소서.

하나님 우리의 아버지시여,

산업발전에만 관심이 있지 모든 백성의 유익에는 관심이 없는 정부를 우리는 두려워합니다.

당신은 말씀하시기를 원수를 사랑하고

그들이 회개할 수 있도록 믿어주고 용기를 주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주여 자비를 베풀어주옵소서.

주여 우리에게 믿음과 능력을, 용기와 인내를, 강인함과 환상을, 지혜와 총명함을, 사랑과 당신의 거룩한 영을 허락해 주옵소서.

우리는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정의와 평화를 위해 살기 원합니다.

당신이 우리의 가슴 속에 넣어주신 당신의 능력으로 싸우려 합니다.

주여 자비를 베풀어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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