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넨베르그 사도신경해설 제30강

7장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묻히셨으며(2)

안녕하십니까?

오늘 우리 공부 30강입니다. 판넨베르그 책에 따르면 7장 두 번째에 해당되구요. 7장에 따르면 제목이 이렇습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묻히셨으며. 고난, 십자가 처형, 묻힘, 이 세단계입니다.

지난번 29강에서의 핵심은 예수님의 그 십자가 처형이 이미 그 프로그램으로 예정되어 있던 거를 그대로 따라갔다거나 아니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의도적으로 지셨다 거나 뭐 그러한거가 아니었다고 하는 겁니다. 복음서에 나와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고난 이러한 예고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인류의 죄를 대속한다고 하는 초기 기독교의 신앙고백의 표현이다 이렇게 말해도 되겠지요. 신앙고백에 근거해서 재진술된거다. 그렇게 보면 되겠습니다. 그게 지난 29강의 핵심이었구요.

오늘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의 실체가 뭔가 하는 것을 다루게 되겠습니다. 역사적 사건인 십자가 처형의 내막으로 들어가는 거죠. 그게 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판넨베르그의 설명을 따라가면 어느 정도 알아들을 수 있기는 있는데요. 그 내용도 나름대로 어렵기도 합니다만 2천년전에 있었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성서이외의 다른데서 자료를 얻을 수 없거든요. 거의 성서에 나와 있는 진술들만으로 십자가 사건을 재구성해야 된다고 하는 것, 요게 쉽지 않는 거죠.

여기 두 가지 관점이 서로 충돌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 복음서의 그러한 십자가에 대한 진술, 서신에 있는 것들은 서신에 예수님의 십자가 이이야기하고 복음서에 나와 있는 거하고는 차원이 다른 겁니다. 서신에 있는 것들은 이미 케리그마로 자리 잡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신학적 진술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십자가 사건을 거기서 끌어낼 수는 없거든요.

네 그래서 어쨌든 두 가지가 충돌한다고 말씀드렸는데 머냐고 하면요. 많은 사람들이 기존의 전통의 입장으로서요. 그 성서에 나와 있는 것들을 그냥 문자적 사실로만 받아들이는 게 있구요. 또 하나는 복음서에 나와 있는 그러한 그 십자가 사건을 그 심층에서 찾고자 하는거죠. 문자로 드러난 그러한 사실들을 안에 어떤 것들이 이야기되고 있는가? 고걸 찾아나가는 작업입니다. 고게 역사비평이거든요. 이 두 가지가 서로 충돌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꼭 충돌 되는거는 아니죠. 다른 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쪽이 옳다 그르다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예요. 문자의 차원에서 그냥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큰 문제는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 성서에 진술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이미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의해서 해석된 거거든요. 해석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다시 해석해야 된다는 것은 옳지만 그러나 그 역사적 비평이 깊이로 들어가지 않는다하더라도 그 해석된 사건, 진술을 바르게 이해하기만 하면 큰 문제가 없어요. 이게 이야기가 잘 전달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뭐하러 역사비평 이러한 것들을 하느냐? 큰 문제가 없으면 그냥 단순하게 말씀 그대로 믿으면 되지 않느냐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거는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큰문제가 없지만 조금더 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좀 더 실제적 진실로 접근하기 위해서 가능하면 역사비평 이런 것들이 필요한 거죠.

우리는 인제 두 번째 방식으로 접근하려고 하려고 하는 겁니다. 겉으로 진술된 그러한 이야기들을 우리가 부정하는 게 아니라요. 그 진술을 뚫고 들어가는 거죠. 초기 기독교인들이 그러한 진술을 하게 된 내막들, 그게 인제 어느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고유한 영적인 통찰을 통해서 나온 신앙적 진술이거든요. 그러한 영적인 통찰들, 그걸 우리가 잡아내고자 하는 거죠.

다시 말씀드립니다. 내가 눈이 좀 부셔요. 앞에 불빛이 좀 강하구요. 적당하게 조명이 잘 이루어지지 않거든요. 제가 스탠드를 저쪽에 반사시켜서 하는데 그걸 좀 끄면 너무 어둡고 그렇습니다. 전문적인 녹화실이 아니라 그러한 어려운점이 있어요. 그런데다가 제가 컴퓨터 화면을 쳐다보고, 카메라도 있구요. 거기서 나오는 불빛이 있구요. 또 하나는 제가 쓴 안경이 다초점 안경인데 초점을 가까이나 멀리있는 거나 같이 볼 수 있는 안경알이에요. 이것도 불편합니다. 안경을 끼지 않는게 자유로운데 끼지 않으면 글씨가 희미하게 보여서 어쩔 수 없습니다. 눈이 부셔서 깜박이는데요. 여러분이 보실 때 불편하실까 그래서 그렇습니다.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30강 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당할 때까지 공판 문제, 재판받는 문제 이런 것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책 110쪽 아래 패러그래프입니다.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 공판과정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진 게 별로 없다. 그렇죠. 누가 지금처럼 신문기자가 따라다니면서 기록해 둔 것도 아니구요. 제자들도 그렇게 할 생각하지 않았구요. 한참 시간 지난다음 예수님의 부활의 경험, 새로운 신앙고백의 눈으로 예수님의 공생애를 다시 따라가면서 적은 건데 그래서 이 복음서도 상세하고 정확한 객관적인 진술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앞에서 제가 한 번 짚었듯이 예수님의 십자가처형에 관해서 역사가들이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거예요. 아주 작은 사건이었죠. 어쩌면 이게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날 수 있었던 그러한 사건이었습니다. 네 그게 역사적 우연성, 신앙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섭리, 이런 과정을 통해서 세기사적인 인류구원과 직결되고 있는 그러한 사건으로 확장되었는데 그 당시에는 정말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사건이라서 기록이 별로 없습니다.

예수는 로마인들에 의해 사회적 선동을 일으킬만한 자라고 의심받은 것 같다. 결국은 로마 총독에게 사형선고를 받고 죽은 거거든요. 로마총독이 이유 없이 그렇게 죽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부패하고 무능하다고 하더라도 빌라도가 워낙 그렇게 그러한 정치가가 아니라고 하지요. 로마의 지방장관급에 속하는데 상당히 고위직이구요. 유대지역에 임명을 받은 총독이라고 하면 능력이 있다는 겁니다. 문제가 많이 있는 지역이라서 그러한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는 장관을 보낸다고 해요. 빌라도가 아무리 종교지도자들이 무리들이 예수를 죽이라고 해서 그 압력만으로 예수를 죽이지 않았다고 봐야 합니다. 학자들의 전반적인 의견이기도 합니다. 빌라도가 예수에게서 문제가 있다고 하는 것을 안거죠. 복음서에서는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아무런 죄가 없다고 그런 쪽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이 그렇게 보고 싶어한 거죠. 그러한 부분이 완전히 없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빌라도에게 전혀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사도신경에서 빌라도의 책임을 명시적으로 거론하고 있죠. 빌라도가 정치적인 판단을 분명하게 했을 겁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사법적인 차원에서 재판을 해서 판사가 선고를 하듯이 그렇게 한 겁니다. 사회적 선동을 일으킬 만한자라고 예수님을 보았다고 하는거죠.

십자가 명패에서 확인되듯이 그는 선동가로서, 메시야 참칭자로서 십자가에 달렸다. 선동가, 메시아, 참칭가 그러한 죄목으로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사회를 선동했다고 하는 의혹은 예수가 메시아 칭호를 요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명시적으로 물리치고자 했다는 점에서 틀림없이 일종의 비방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에게는 그러한 사회소요 소란과 같은 그러한 죄가 해당되지 않았다고 하는 거죠. 근본적으로. 그렇게 되려면 메시아 운동의 선구자가 되어야 되는데. 민중들을 규합해서 사회전복적인 그러한 운동들을 일으켜야 되는데 예수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죠. 메시아에 대한 기대를 제자들이나 추종자들이 예수님에게 했겠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아주 물리쳤습니다. ‘당신들이 생각하는 메시아하고 나는 거리가 멀다.’ 그렇죠.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이렇게 사회 선동가 메시아 참칭자 십자가에 단것은 일종의 오해다. 일종의 음모라고 할까요. 어떤 측에 의해서 벌어진 모함이었다고 하는거죠.

예수의 공판은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유대당국이 이 일에 관여했다는 사실과, 예. 제사장들이 직접적으로 관여했잖아요. 그리고 복음서 전체로 보면 서기관 그리고 바리새인들, 심지어는 사두개인들까지 여기에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가 빌라도에게 넘겨지기 전에 유대의 고위법정에서 심문받았다는 사실은 확실히 문제가 있다. 유대의 고위법정은 산헤드린이죠. 그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이런 것들은 유대의 법치에서도 문제가 있다고 하는 거죠. 더구나 충분한 법적 근거도 없이 진행되었다고 하는 점에서 더욱 심각하다. 그들에게는 사람을 살리고 죽일 수 있는 권한도 없었고요. 심야에 재판을 벌어지기도 하구요. 복음서가 이야기하고 있는 그러한 내용들을 보면 이러한 유대인들의 재판에 문제가 있었다. 이렇게 보는 거죠. 유대당국이 그 사건에 관여하지 않았어야만 예수를 향한 잘못된 비난에 맞서 예수를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었으며, 당연히 그래야만 했을 것이다. 판넨베르그의 설명이 좀 곧 이해하기 어렵죠? 약간 까다롭죠.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보호했어야 된다고 하는 겁니다. 그들이 바르게 처신하는 경우란 말이죠. 예수님은 결코 사회소란, 메시아 참칭 이런 것이 없었기 때문에 총독에게 재판받는 일을 유대인들의 고위법정에서 보호해야 되는 거죠.

어떤 동기에서 유대당국은 이 일에 간섭해야한다고 생각했으며, 예수님의 사형 선고에 간섭해야 생각했으며, 어떤 이유에서 예수는 무고하게 총독의 재판에 회부되고 말았는가? 왜 그랬을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은 그렇게 쉬운 게 아니다. 예수님의 재판에 유대 고위당국자들이 연루되구요. 그리고 예수님에게는 이 로마 총독의 재판에 회부될만한 이유와 근거 이런 것들이 없었다고 하는 것이구요. 그런데 결과적으로 어떻게 그렇게 되어 버렸어요. 유대법정에 서구요. 로마법정에 서구요. 정말 아무런 근거없이 그렇게 되었어요. 그렇게 되려면 예수님이 반사회적인 그러한 행동을 했어야 되거든요. 그럴 일이 전혀 없었구요. 능력이 없었구요. 능력이란 표현을 예수님에게 써서 그렇습니다만 예수님의 실질적인 삶을 놓고 볼 때 그렇다는 것이죠. 쉬운일이 아니다.

어쩌면 유대 고위층이 두려워 한 점은 만약 이 문제에 간섭하지 않고 내버려둘 경우에, 어떤 문제요? 예수님이 재판받는 이러한 일에 간섭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을 경우에 예수에 대한 백성들의 인기가 유대 고위층을 오히려 선동적인 이들이라고 의심할지 모른다는 점이었을 것이다. 아 요거는 번역이 정말 시원찮군요. 표현이 잘 안되어 있습니다. 저도 요게 무슨 뜻인지 잘 모르기 때문에 요렇게 번역을 한 것 같아요. 직역을 해버린 것이죠. 저도 이 부분을 어떻게 따라가야 하는지 참 힘들었습니다. 한번 더 보겠습니다. 유대 고위층들이 두려워 한것은 자신들이 예수님의 재판에 관여하지 않고 오히려 민중들에 의해서 자기들이 공격을 받을까? 그러한 점을 염려한게 아니냐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게 무슨 뜻인가요? 조금 더 글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또한 다른 이유에서 예수와 유대전승의 옹호자들 사이에 분명한 갈등이 있었다. 복음서 전체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들이죠. 예수의 전반적 태도에서 드러난 전권요청*은, 전권요청? 하나님 나라에 철저하게 의존해서 말하고 행동했던 예수님이 주변을 향해서 전권을 요구했다는 것입니다. 아 이게 어떻게 설명을 해야 될까요? 전권을 요구했다고 하면 독단적인 인물처럼 묘사가 되는데요. 이렇게 바꿔서 생각해 보시죠. 어떤 죽을 환자가, 굉장히 심한 병에 걸려서 당장 수술을 해야 될 환자가 있습니다. 수술실로 끌고가요. 수술실 안에서 전권을 누가 행사합니까? 의사 있잖아요. 수술 집도할 의사가요. 전권, 전적인 권한을 가집니다. 예수님이 전권을 요구한거죠. 그러니까 유대당국을 향해서 고분고분하게 아니라, 표현이 정확하지 않는데, 아주 고유한 자기방식의 선언을 한 거죠. 뒤에 가면 조금 더 보충설명이 있을것 같은데요. 전권요청이라는 것은 제가 여기 각주를 달았습니다. 뒤쪽에 보면 이렇게 별표시 하나 된 걸로 각주가 나와 있습니다. 전권요청에 대한 설명이요.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임박에 근거해서 공생애 중에 바리새인이나 제사장 등 유대의 종교당국자들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전권적으로 선포했다. 심지어는 모세의 율법까지 상대적으로 평가하면서 자신의 가르침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이로 인해서 결국 유대 고위층과의 갈등 속으로 빠져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

아주 분명한 고유한 입장을 밀고 나간 거죠.

예수가 이를 통해서 율법의 권위를 거부했는데, 고유한 판단으로 율법의 권위를 거부했는데 예수의 태도를 외관적으로만 판단하고 그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 사신, 복음선포에 담겨있는 고난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던 모든 유대인들에게 틀림없이 신성모독으로 비쳤을 것이다. 예수님의 그러한 태도만을 문제 삼아서 그에게 임하게 될 고난 이런 점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어쨌든 전권요청이라고 하는 그래서 율법을 상대화하고 투쟁했던 바로 그 사실로 인해서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이러한 모든 것들이 신성모독으로 비쳤던 것이 아니냐? 그런 식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신성모독 당연히 그렇죠. 그 당시야 율법이 절대적인 하나님의 가르침으로, 말씀으로, 혹은 계시로 이해되고 있었을 때인데 그것을 상대화하니 ‘니가 그러면 하나님이란 말이냐’ 이러한 말을 들을 만도 한 거죠. 신성모독 개념은 그 당시에 매우 심각한 문제였기 때문에 율법이 언급하는 신적 권위를 훼손하는 행위는 일거에 무릎이 꿀려져야만 했다. 싹이 날 때 싹을 잘라 버려야 된다는 그러한 분위기였다고 하는 거죠.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예수가 율법에 전승된 말씀을 산상수훈의 '반명제'에서 토로한 "그러나 나는 당신들에게 말합니다."라는 주장은, 기억하시죠? 산상수훈에서 너희들은 모세의 율법에서 이렇게 저렇게 간음하지 말라 말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어떻다.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이러한 식의 표현 말이죠. 반명제라고 규정했습니다. 이런 주장은 신성모독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아마도 유대 고위법정의 중재를 수포로 돌아가게 한, 즉 성전의 영원성을 거절한 예수의 언급과 비슷하다. 이게 무슨 말인가요? 유대고위법정의 중재를 수포로 돌아가게 한 즉 성전의 영원성을 거절한 예수의 언급과 비슷하다. 이런 이야기죠. 유대 고유 법정이 나름대로 재판에 참여하지 않았습니까? 그거는 무조건 예수님을 어떻게 나쁘게 하려고 했었다고 하는 그러한 것만 이야기한 것이 아니죠? 어쨌든 가능하면 로마 법정으로부터 이렇게 사형선고 이런 것을 받지 않도록 중재를 했다고 하는 겁니다. 복음서가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고 있죠. 행간으로 우리가 조금 따라 읽을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우리가 보는 복음서에 따르면 오히려 빌라도는 예수를 석방하려고 했는데 제사장, 바리새인들에게 선동당한 민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으로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한 부분들이 겉으로 드러난 것인데요. 그러한 부분들이 어렵습니다. 차근차근 따져가기 가요. 이 유대 고위 성직자들이 그래도 예수를 로마의 법정으로부터 보호하려고 하는 노력도 있었지 않느냐? 보호한다기 보다도 여기는 중재한다고 하는 건데요. 그러한 노력이 있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복음의 행간에서 읽을 수 있다고 하는 거죠. 만약에 예수님이 유대 고위성직자들이 요구하는 것에 응하기만 해주면 ‘너가 누구냐?’ 라든지 ‘니가 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런 심문이 있잖아요. 그런 점에서 예수님이 산헤드린 공의회가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로 웬만하면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력만 한다면 이들의 노력에 의해서 빌라도 총독의 재판에서 사형을 당하지 않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거는 이미 산헤드린이 굉장히 힘이 있었거든요. 로마 총독도 그들의 생각을 쉽사리 내팽개칠 수 없었던 거예요. 어쨌든 이렇게 저렇게 설켜 갖고 결국은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을 당하게 되는거죠. 거기에 이렇게 저렇게 연루된 문제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겁니다. 그게 아까 판넨베르그가 이야기했듯이 쉬운 작업은 아니예요. 이런 저런 가능성들을 우리가 따라 가보는 거구요. 그중에서 가장 적합한 길들을 찾아보는 겁니다.

그 중재노력이 수포로 돌아가 버리고 만 거죠. 예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권을 요구했고 성전의 영웅성을 거절하고, 상대화하고 자신의 선포 이런 것들을 고수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거죠. 네 재미있죠?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님이 그냥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그렇게 죽었다. 거기에 이스라엘 제사장들하고 로마총독이 관여해서 종교와 정치가 합작해서 예수를 죽였다. 단순하게 우리가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 단순한 결과가 잘못된 것이 아니예요. 옳은 이야기인데요. 그리고 초기 기독교회가 도달한 정답이구요. 다만 이제 우리는 거기에 얽힌 여러 가지 속사연들을 찾아보는 중입니다. 유대 산헤드린, 제사장,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포악하거나 야비한 사람들이 아니구요. 건전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구요. 그리고 가능하면 예수를 로마법정에서 지켜낼 수도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중재해보려고 할 노력도 한 것입니다. 판넨베르그가 그렇게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더구나 유대 당국이 돌을 던져 예수를 처형한 것이 아니라 그를 로마의 오판**에 내던져 판결을 받게 했다는 것은, 이거는 의심스러운 일이지만, 예수가 죽을만한 죄가 있다는 로마의 확신에 기초하고 있든지, 아니면 유대 당국이 예수 추종자들의 분노를 피해보려 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가능하다. 이것도 추정이죠. 사실은. 예수님이 돌에 맞아 죽지 않고 스테판은 돌에 맞아 죽었죠. 로마법인 십자가에 처형당했다고 하는 사실에 근거해서 판넨베르그가 이러한 개연성을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두 가지죠. 예수가 죽을만한 죄가 있다는 로마의 확신, 다시오. 예수가 죽을만한 죄가 있다는 로마 총독의 확신, 로마법정의 확신, 이거를 알았기 때문에 유대종교 지도자들이 결국 예수를 끝까지 보호하지 못했다 그거 하나구요. 또 하나는 유대당국이 예수 추종자들의 분노를 피해보려고 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가능하다. 예수님을 돌로 쳐 죽게 했다면 예수 추종자들에게 반발이 있을게 아니예요. 그걸 피해 보려고 결국 로마쪽으로 공을 넘겼다 이렇게 보는거죠.

어쨌든 예수의 공판, 판결, 형집행에 담긴 고유하고 심층적인 동기는 이러한 갈등에서 모색되어야만 한다. 여러 가지 아주 복잡한 갈등이죠. 예수님의 전권행사, 유대인과의 그것으로 인한 충돌, 로마 법정이 본 예수의 실정법 위반에 대한 확신 뭐 이러한 것들, 복잡한 사연들이 여기 연결되어 있어서 결국은 유대지도자들이 예수를 보호하지 못하고 로마 총독에게 넘기게 되었다. 그렇게 보는거죠. 한 가지 빠뜨린 것은 바로 앞에 나와 있는 것. 그들이 예수 추종자들의 분노를 피해보기 위해서 돌로 쳐 죽인 것이 아니라 로마법정에 넘겼다 그런 이야기들입니다. 이 동기에서 예수는 자신의 태도 전반의 성격이 갖는 결과로 인해 유대 당국과 적대적 관계에 빠졌다. 부분적으로 타협을 해 갖고는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니죠. 근본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이 동기는 정확하게 신성모독이었다. 신성모독이 핵심. 잠간만 연필로 긋구요. 눈이 아주 부시네요. 아 녹화하는 환경을 어떻게 좀 바꾸어야 하는데. 이 아주 피곤하네요. 눈이 부셔서요. 어떻게 할까요. 연구를 더 해 보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유대당국의 대리자들이 예수를 비난하고 그 공판에 협력했을 때, 그들은 개인적인 혐오감에 근거해서 처신했다가 보다는 오히려 이스라엘 전승과 유대백성의 대표자로서 처신한 것이다. 신학적인 논쟁에 근거했다고 볼 수 있겠군요. 이스라엘의 고유한 전승, 그리고 유대전체를 대표해서 예수의 전권요청과 충돌함으로서 벌어진 결과가 예수의 죽음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들은 이렇게 처신함으로써 백성의 참된 선택과 소명이라는 명분에 머무르지 않고 더 적극적인 데까지 나아가게 되었다. 즉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하고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그들의 합법성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예수 부활을 통해서 자신을 알리려 했다는 사실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가요? 이들이 더 적극적인 데 까지 나가게 되었다. 여기서 이들은 유대인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제자들, 추종자, 공동체 이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것 같죠. 그리고 앞에도 유대당국자들을 대표하는, 대리하는 사람들이 나와서 막 혼란스럽습니다. 번역한 사람도 혼란스러우니 읽는 사람은 오죽하겠습니까?

다시 한 번 그 문장을 보겠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들은 이렇게 처신함으로써 백성의 참된 선택과 소명이라는 명분에 머무르지 않고 더 적극적인 데까지 나아가게 되었다. 뭐냐? 즉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하고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그들의 합법성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예수 부활을 통해서 자신을 알리려 했다는 사실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이들은 바로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겠죠. 제가 바로 앞서의 설명이 조금 잘못 된 것 같죠. 앞으로 좀 나가보겠습니다. 이 문장을 읽으면서 머리에 정리되는 거는 이런 거죠. 이들이 예수를 신성모독이라는 그러한 근거에서 로마 법정에 맞아 죽게 했는데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부활문제까지 시비를 걸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이거는 하나님에 관계되는 문제되기 때문에요. 예수 공동체가 하나님께서 예수 부활을 통해서 자기를 계시하셨다. 주장하잖아요. 그걸 어떻게 용납할 수 있겠어요.

사실 하나님의 통치가 임박했다는 예수의 선포는 이러한 하나님의 조치로 인해서 등장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조치, 계시. 부활절 이전의 모호한 상황 가운데서 예수가 율법에 대한 충분한 존경의 자세를 갖추지 않은 탓에 전통적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신성모독으로 비칠 수 있었다. 신성모독이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의 핵심이 되겠죠. 번역의 문제도 좀 있고 내용도 좀 까다롭게 해서 다른 설명이 필요한데 더 나가지 않겠습니다.

그 다음이요. 113쪽 첫 번째 시작하는데 입니다. 그 패러그래프만 하면 되겠습니다. 판넨베르그가 요 대목에서 말하려고 하는 핵심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에 얽힌 여러 가지 복잡한 신학적인 그러한 유대인과 기독교 공동체와 얽힌 충돌들을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이면서요. 또 다른 한편으로는 또 다르게 시작되는 패러그래프에서 나오게 되듯이 예수 십자가의 처형문제를 유대인이라고 하는 민족에게 일임하는 것은 잘못이다. 인류전체를 대표하는 민족으로서 이들을 예수 처형에 참여하게 된 거지. 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종족이 영원히 예수 십자가 처형에 대한 책임을 져야 된다고 하는 그러한 주장은 잘못된거다 하는 겁니다. 보겠습니다.

그 당시 유대 지도층이 어느 정도의 무게로 예수의 공판에 관여했는지에 대한 질문은 유대인 모두에게 하나님 살해라는 짐을 지움으로서 불거진 유대인을 향한 기독교인의 적대감으로 인해서 거의 2천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공정하게 논의되고 있지 못한 상태다. 유대인 그놈들은 완전히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한 놈들이야. 잘못됐어. 2천년동안 고정관념으로 되어 있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이 유대지도층들이 예수의 로마법정에서의 이 공판에 어느 정도 어느 관점에서 참여했는지 분간하기 힘들다고 하는 거죠. 선입관을 갖고 있으면 눈에 잘 보이게 되는 겁니다. 앞에 잠간 나왔듯이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가능한대로 로마법정에서 구해내려고 하는 그런 노력도 없었을까요? 꼭 있다 없다고 지금 말씀 드리는 것은 아니구요. 어쨌든 충돌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요. 예수님의 전권요청과 유대인들의 율법중심의 신앙적 패러다임 두 개가 충돌하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도 유대인들이, 유대인고위층들이 예수님의 법 공판에 무조건적으로 나쁘게, 처음부터 끝까지 그렇게 했느냐 하는 것은 질문의 여지가 있는거죠.

이게 다음 문제하고 연결됩니다. 초기 기독교공동체가 유대교로부터 분리하려고 하지 않았거든요. 사도행전에서 우리가 흔적을 발견할 수 있구요. 초기기독교사의 연구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들은 유대교안에 머물려고 했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입관처럼 유대 고위층들이 예수를 완전히 몰아붙이는 그런 쪽으로만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면 초기 기독교가 유대교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리가 없거든요. 그들의 전통을 그대로 받을 리가 없었거든요. 그리고 유대인들의 경전에는 구약성서를 그대로 받아들일 리가 없거든요. 여기에는 아주 미묘한 긴장들이 있는 겁니다. 유대교와 예수님의 말씀이 충돌하기는 하되 그거는 분명하지만 그게 어느 정도 심각하고 적대적이었는가 하는 거는 그거는 다른 차원에서 논의되어야 한다고 하는 거죠.

어쨌든 여기서 핵심은 유대인들에게 너무 무조건 빨간 딱지 붙이지 말자. 레드컴플렉스처럼 공산주의 좌파 이러면 그렇게 어떤 쪽에서 몰아붙이듯이 유대인들을 향해서 예수 십자가 처형의 모든 책임을 져라 이렇게 말할 수 없다는 겁니다. 유대인을 향한 기독교의 적대감이라는 끔찍스러운 역사는 우선 이방인 교회가 유대인들을 예수공판에 참여한 인류의 대표자로서 인식한 게 아니라 다른 인간들과는 구별하여 예수 죽음의 책임을 그들에게만 돌렸다는 오류에 기인했다. 적대감의 역사. 제가 긴 설명을 않겠습니다. 문학에서도 나오고 정치에서도 나오고 2차세계대전중에 유대인들을 향했던 유럽인들의 증오심, 특별히 히틀러를 중심으로 해서 벌어진 유대인 학살문제, 아우슈비츠의 독가스실, 인류 최대의 저주스런 행위들 이런 것들과 연관되어 있거든요. 여기에는 히틀러라고 하는 어떤 도착적 성격 소유자가 저지른 병적행위라기 보다도 당시 유럽인들이 유대인들에게 가졌던 일반적인 정서가 표출된 그러한 역사적 사건이라고 봐야 옳습니다. 2천년동안 쌓이고 쌓인 거죠.

바로 이것이 책임을 그들에게만 돌렸다는 오류에 기인한다. 매우 비기독교적인 마음으로 유대인들에게 책임을 돌림으로써 비유대적 인간들이 죄책에서 벗어나고자했다. ‘우리는 거기에 책임이 없어.’ 이런 방식으로 말이죠. 이로 인해서 바울이 여전히 중요하게 생각했던 하나님의 선민인 유대인과 여전히 바울은 유대인들을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중요하게 생각했잖아요. 그렇게 율법이 아니라 복음공동체에 온전하게 천착했던 바울도 유대인들을 심사숙고 한거예요. 그러한 하나님의 선민들과 기독교인들과의 연대성이 파괴되었다. 결국은. 초기 기독교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결국은 2천년동안 오류로 인해서 파괴되었다. 예수의 십자가에 근거해서 유대백성들과의 연대성을 파괴해버림으로써 유대인을 향한 기독교의 적대감을 결정적으로 사전 준비한 셈이다. 결국은 복음서안에 유대인들을 향한 증오심의 단초가 담겨있기는 합니다. 결국은 모든 책임이 그들에게 돌아가고 있으니까요.

사도신경은 조금 다르죠. 로마 총독에게 책임을 묻고 있죠. 이게 아주 서로 다른, 다르다기 보다도, 근본적으로 다르다기 보다도 관점의 차이에서 나온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적대감은 하나님이 예수의 십자가로 인해서 자신의 이스라엘 백성을 최종적으로 유기했으며, 버렸으며 아브라함의 선택을 그들에게서 빼앗아서 새로운 이스라엘인 교회에게 위임했다는 비성서적 이해에서 드러났다. 우리가 참이스라엘이다. 이런 방식 말이죠. 2천년동안 그런게 쌓이고 쌓여서 결국은 유대인의 증오라고 하는 기독교인들의 비성서적, 비기독교적 생각, 판단을 갖게 된 겁니다.

기독교인과 유대인의 관계를 이처럼 오랫동안 짓누르고 있던 이러한 주장은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개최된 세계교회협의회(WCC: World Council of Church) 제1차 총회에서 다음과 같은 권고안이 채택됨으로써 교정되기에 이르렀다. 이렇습니다. 기독교회는 "십자가 처형 사건의 책임을 오늘날 유대인들에게 부과하면 안 된다. 그 책임은 인류 전체에게 해당되는 것이지 한 종족이나 한 사회의 문제가 아니다." 거의 2천년 만에 유대인들의 지위, 뭐라고 하나요? 2천년동안 이어져 내려온 거니까 멍에라고 하나요. 2천년동안의 멍에를 회의를 통해서 벗긴겁니다.

비슷한 의미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선언문(1960-64동안의 가톨릭 회의)은 유대민족과 교회와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했다. 즉 유대인은 '하나님에 의해 비난받고 쫓겨난 이들'이라는 주장을 반대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민족이 아니다. 그러게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도 생각을 모았습니다. 신교나 가톨릭이나 2천년동안의 유대인들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일단 공식적으로 정리한 거죠. 쌀 때문인지 아니면 진정한 신학적 검토에서 나온 것인지? 서로 영향을 미치지 않았겠습니까? 오늘날 실제로 유대인들을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거는 또 다른 문제인 것 같아요. 심지어는 유대교를 이단, 이렇게 뭐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을 기독교인화해야 한다고 마지막이 온다고 하던가요? 종말이 그때에야 온다고 한다던가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기도 하니까요. 이런 문제들이 세계교회협의회와 바티칸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해결되었다고 하더라도 모든 우리의 정서, 신앙, 실제 교회생활에서까지 다 정리되었다고 보기 힘들겠죠. 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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