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세계교회의 역사

기독교를 말한다 조회 수 4319 추천 수 0 2009.05.05 18:33:44
 

4장 세계교회의 역사


이번 4장에서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성격을 해석해가면서 2천년의 세계교회사를 듬성듬성 검토해보려고 한다. 미리 세계교회사를 압축해서 정의하자면 교권과 왕권의 영합, 투쟁, 분열이다. 교회는 유럽의 헤게모니를 손에 넣기 위해 왕권과 때로는 영합하고, 때로는 갈등하고, 결국은 자기 갈 길을 가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러한 발전과 선택들이 신앙적으로, 혹은 신학적으로 정당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정치적이고 전략적인 것뿐이었는지에 대한 판단은 이 책의 범주를 벗어나기 때문에 접어두기로 한다. 다만 분명한 점은 이런 과정을 통해 한편으로는 교회가 유럽세계에서 당당히 문화사적 현실로 자리를 잡았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상당한 부분에서 기독교의 본질을 훼손시켜 왔다는 것이다. 우선 예루살렘 원시 공동체의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으로부터 시작하자.

오순절 성령강림

교회론, 성령론, 예배론 등을 언급할 때 반드시 거론되며, 기독교 신학과 교회현장에서 늘상 상수로 작용하는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예수의 부활사건이 일어난 때로 치자면 대충 오십일, 승천일로 치자면 열흘 정도 지난 오순절 절기에 예루살렘 마리아의 집 다락방에 모여있던 제자들에게 이해하기 힘든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다. 일단 성경보도를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사도행전 2:1-3). 이들에게 임한 현상은 외부적인 것과 내부적인 것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외부적인 것은 청각 현상인 바람소리와 시각 현상인 불꽃이었으며, 내부적인 것은 그들이 원래 알지 못하던 언어를 구사하게 된, 즉 방언사건이었다. 성서기자는 이 현상을 성령강림으로 설명하고 있다.

*오순절이란 말은 “오십 번째”라는 뜻으로 “7주절”이란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오순절은 지금의 태양력으로는 해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대충 잡아서, 유월절이 대개 4월 중순이니까 6월 초순 쯤 된다. 원래 오순절은 모세의 율법제정을 기념하는 절기였으며, 동시에 여름 추수를 감사하는 절기였다. 유월절과 장막절에도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이지만 오순절은 그 시기가 여행하기에 좋을 때라서 훨씬 더 많은 순례객이 모였다고 한다. 참고적으로,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이 오순절에 처음으로 성령이 임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것은 잘못이다. 이날 제자들이 특별한 영적 경험을 했다는 것이지 성령이 인간 세상에 처음으로 임했다는 뜻은 아니다. 영으로서의 하나님이라는 삼위일체론에 근거하면 성령은 세상창조 이전 부터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성령은 바로 하나님의 존재양식이다.

성령이 바람소리나 흔들리는 불꽃같은 물리적 현상 자체는 아니었을 텐데도 성서기자가 그렇게 보도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성경도 그것이 곧 바람소리이며 불꽃이라고 말하지 않고 ‘… … 같은’ 혹은 ‘… … 처럼’이라고 비유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성령이 어떤 구체적인 사물이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거기 모였던 사람들이 다만 바람 같은 소리를 들었고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을 보았을 뿐이다. 사람에게 가장 강력한 감각기관인 청각과 시각*을 통해서 그들은 영적으로 충만하게 되는 체험을 하게 된 것이다. 현대에도 간혹 현시한 성모마리아를 어린아이들이 직접 만나서 어떤 예언을 들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교회당 안에서 기도하는 중에 큰 불덩어리가 자기 가슴 속으로 파고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는 것처럼, 인간은 어떤 특별한 주변조건에 들어가게 될 때 간혹 이상한 현상을 경험하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할 것이다. 이런 현상이 정신병적으로 나타나게 되면 환청이나 환각이고, 더 심해지면 미친 사람이 된다. 실제로 이들 제자들을 보고 예루살렘에 모였던 많은 사람들이 “술에 취했구나.”(사도행전 2:13)라고 조롱하기도 했으며, 사도바울은 교회에서 이상한 말로 잡다하게 떠들며 기도하게 되면 세상 사람들이 미쳤다고 생각할지 모른다는 점을 환기시킨 적도 있다(고린도전서 14:23).

*예술은 인간의 청각과 시각작용을 통한 창조행위다. 생각해보라. 사물의 움직임, 색깔의 조화를, 붉은 저녁노을을 볼 수 없다면, 새소리와 개울물 소리, 겨울철 산사의 풍경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어떤 예술적 감동을 받을 수 있겠는가. 물론 그 두 감각이 상실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후각과 촉각만으로도 어떤 예술적 체험이 가능할 수도 있지만 청각과 시각에 비교할 수는 없다. 만약 종교경험이 예술경험과 엇비슷한 초월적, 영적 세계를 대상으로 한다면 종교에도 역시 청각과 시각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마련이다. 동양사상에서는 시각을 가장 낮은 인식의 세계로 보기는 하지만.

두 달도 채 안 되는 시기에 너무나 큰일들을 경험한 이들 제자들의 정신적 상황을 추정해보라. 자신들의 선생인 예수가 저주스러운 십자가처형을 당했고, 그 사건 앞에서 지리멸렬했던 자신들의 모습이 부끄러웠을 것이다. 그런데다가 이런 저런 소문이 나도는 가운데 죽었다고 생각한 예수가 자기들에게 다시 나타났으니 얼마나 황당했겠는가? 자신들의 모든 세계관, 인생관, 상식이 완전히 허물어지는 사건들이었다. 더군다나 부활의 예수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겨를도 없이 그는 이 세상에서 또 다시 하나님의 생명세계(하늘)로 사라져버렸다. 그들이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벅찬 사건들이며 그들의 이해범주를 뛰어넘는 현상들이었다. 그들은 이제 매우 혼란한 상태에서 이 예수 공동체를 계속 꾸려나가야 할는지 아니면 모든 것을 접어두고 제 갈 길로 가야할는지 무언가 결단을 내려야만 할 때가 되었다. 그런데 그들이 함께 모여 말씀을 나누고 기도하는 중에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강력한 능력에 휩싸이게 되었으며 혼란했던 마음들이 일거에 사라졌고 불확실했던 사실들이 확연해졌다. 그들이 집단적으로 영적인 충만감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 에너지, 이 역동성이 꺼져가던 예수의 하나님 나라운동을 거침없이 전파하는 원동력이 되었고, 이런 과정을 통해서 2천년의 장구한 기독교 역사가 돛을 올리게 되었다.

성령의 임재를 체험한 제자들이 성령의 지시에 따라 자신들이 원래 쓰던 언어인 아람어나 히브리어가 아니라 여러 다른 언어*로 말하게 되었다고 한다(사도행전 2:4). 팔레스틴 유대인들과 또한 오순절을 맞아 유럽 전 지역에서 예루살렘에 모여든 많은 디아스포라 유대인, 그리고 이방인 유대교인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각기 자기들 지역의 언어로 말하는 것을 듣고 해괴하게 생각했다. 말하자면 베드로 자신은 아람어로 말하는데, 로마에서 온 사람은 로마어로, 에집트에서 온 사람은 에집트어로, 아라비아에서 온 사람은 아라비아어로 듣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게 하나의 엄밀하고 객관적 사실일까? 아니면 그 당시의 열광적 상황 가운데서 일어났던 어떤 큰 감동이 오랜 시간 전승되면서 이렇게 각색된 것일까? 우리는 무엇이 실제로 일어났는지는 정확하게 알 도리가 없다. 모르는 것은 일단 모르는 것으로 접어놓자. 이 방언 현상의 객관적 실체를 우리가 구체적으로 밝혀낼 수는 없지만, 최소한으로나마 이렇게 말할 수는 있다. 그 당시 예루살렘에서는 예수의 제자들에 의해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강한 충격으로 선포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예루살렘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고. 그 이상 우리가 무엇을 더 말할 수 있겠는가?

*이 현상은 일반적으로 방언이라고 불리는 사건이다. 방언이라는 단어는 말 그대로 사투리, 혹은 다른 언어를 뜻한다. 초대교회 시에 이 현상은 두 가지로 나타났다. 하나는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는 대로 다른 나라의 언어로 들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린도서에서 볼 수 있는 대로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말을 하는 것이다. 전자는 듣는 자의 귀에 임한 현상이고 후자는 기도하는 자의 입에 임한 현상이다. 교파나 교회에 따라 약간씩 다르게 평가하고 있지만 상당한 경우에 방언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이를 대단한 특권으로 생각하고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뭔가 믿음이 부족한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고등학교 때 이런 일이 있었다. 부흥강사가 하는 말이 방언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 중에 그것을 받고 싶은 사람은 중강단으로 올라오라고 하면서 자기가 시키는 대로 열심히 기도하면 그 은사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그가 가르친 기도는 단순했다. 그저 ‘할렐루야’를 빨리 반복적으로 외치라는 것이다. 대충 5분 정도 통성으로 그런 기도를 하고 나니까 30% 정도의 사람들이 방언을 하게 되었다고 손을 들었지만, 나는 결국 끝까지 입이 터지지 않았다. 내 개인적인 생각에 의하면 방언은 구강구조의 문제다. 기도의 내용이 강렬하게 앞서 나가고 구강이 그걸 소화해 내지 못하게 되면 결국 혀가 꼬이게 되면서 이상한 소리가 흘러나오게 된다. 사실 이런 현상은 반드시 기독교 안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어떤 엑스타시에 접하기만 하면 가능한 종교일반의 그것이다.

어쨌든지 오순절 사건은 기독교가 예루살렘에 근거를 마련할 수 있는 힘을 제공했다. 이를 바탕으로 해서 유대, 사마리아 지역에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생기기 시작했으며, 결국 바울이 기독교 공동체에 합류함으로써 기독교회가 급속도로 확장된다. 바울은 안디옥 교회를 전진기지로 해서 소아시아와 그리스 지역의 요충지에 예수 공동체를 설립하였고, 급기야 로마에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한다. 이 오순절 사건 이후로 기독교회는 유대의 율법주의자들과 로마의 폭군들에 의해 쉴새없이 수난을 받았지만 거칠 것 없이 로마체제 안에서 확고한 기구로 자리를 잡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길지 않은 기간 안에 로마의 중심종교로 발전하게 되었다.

313년

기독교가 초기에 유대교로부터 상당한 시달림을 받은 반면에 로마로부터는 그런대로 정당하게, 아니면 최소한 무관심하게 대우받았다. 사도행전의 내용을 검토해보면 바울의 주치의라 할 누가가 로마의 고급관리에게 기독교를 소개하면서 기독교에 대해서 비교적 관용적 자세를 취하고 있는 로마 장교들을 매우 호의적으로 그리고 있다. 누가의 시각은 그렇게 틀리지 않았을 것이다. 로마정권은 기독교를 유대교의 아류 정도로 생각하고 공연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며, 또한 그때까지는 기독교가 어떤 사회적 세력을 형성하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그냥 묻어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볼 때 로마제국의 통치이념이라는 것이 자신들의 평화(팍스 로마나)를 깨뜨리지만 않는다면 그 어떤 종교나 민족습관을 용납했으며, 사실 그런 관용정신이 아니면 거대한 로마제국을 유지해나갈 수 없었다는 현실적 상황판단에서 초기의 기독교를 그냥 내버려둔 게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유대교가 기독교의 확장을 더 이상 간섭할 수 없을 시기가 되었을 때 오히려 로마는 본격적으로 기독교 박해에 발벗고나선다. 유대교의 시비야 그런대로 참아낼 수 있고 때로는 로마 지방관리의 도움으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초특급 제국의 폭력은,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 황제의 히스테리에 의한 광기는 거의 인내의 한계를 넘어섰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로마의 콜로세움* 경기장에서 프로 격투사와 승산 없는 싸움을 벌이거나 굶주린 맹수들에게 던져지기도 했고, 송진에 떡칠이 되어 화형을 당하기도 했다. 이때의 교회사는 피빛 순교사라 할만하다. 결국 기독교 공동체는 더 이상 공개적으로 종교행위를 펼쳐나갈 수 없게 되자 로마 외곽지의 지하공동묘지 카타쿰**으로 숨어들어갔다고 한다. 그 지하공동묘지에서 성찬식을 나누고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이교도 로마의 포악한 박해를 견뎌낸 이들의 순교적 인내심에 의해 기독교는 생명의 터를 굳게 다져갈 수 있었다. ‘쿼바디스 도미네’라는 영화로 잘 알려진 희대의 몽상가 로마 황제 네로는 기독교를 박해한 대표적 인물로 손꼽히며, 그 외에도 도미티안, 트라얀, 하드리안, 안토니우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이 박해대열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다. 이들로 인한 박해기간이 기원후 50년경에서 300년경까지 대충 250년간 지속된다.

*지금도 거의 그대로 뼈대가 남아있는 콜로세움은 로마의 권위와 모순을 그대로 보여준다. 현대의 첨단 토목기술이라도 그런 규모의 스타디움을 건설하려면 보통 일이 아닐 텐데 2천년 전의 건축물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로마의 힘이 어느 정도였을는지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인류역사에서 가장 강력하고 화려했던 제국의 모습이 그 건축물에 담겨있는 셈이다. 그러나 콜로세움에서 벌어진 일들을 생각하면 로마의 이율배반을 읽을 수 있다. 로마 귀족들은 고상하게 즐기는 삶에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집착했다. 연회를 베풀며 더 이상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배가 찼을 때 새털로 목구멍을 자극해서 음식물을 토해내고 또 다시 먹는 일에 탐닉했다. 귀족들의 정원이나 노천극장 같은 데서는 희비극배우들의 연극이나 시낭송이 자주 연출되었다. 이런 예술적인 일에 감동하던 바로 그 고상한 귀부인들이 콜로세움에서는 피비린내 풍기는 격투사들의 싸움과 맹수들의 발톱에 찢기는 기독교인들을 흡사 연극 관람하듯이 즐겼다고 한다. 인간의 교양은 이렇게 양면성을 갖는 것일까? 예술과 폭력이 어떻게 일치할 수 있을까? 우리는 나르시시즘과 새디즘이 동시에 한 인격체 안에서 작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콜로세움에서 본다.

**96년 여름 카타쿰에 들어가 볼 기회가 있었다. 로마가 번창할 당시에는 법률로 로마시 안에 어떤 무덤도 만들 수 없게 했으며 따라서 외곽지에, 그것도 겉으로 보면 그냥 평지처럼 보이는 지하공동묘지를 만들었다고 한다. 일단 지하 일층으로 내려가면서 양쪽으로 개인이나 가족 묘실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 층에 어느 정도 넓이로 묘실이 찬 다음에 다시 한층 더 내려가도록 되어있었다. 같은 지하묘지인데도 어떤 귀족 묘실은 다른 것에 비해 훨씬 큰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세월이 흐르면서 옆으로도 넓어졌지만 주로 밑으로 층이 깊어졌다. 그게 얼마나 깊은지, 위험해서 그런지도 모르지만, 가장 밑바닥 층은 아직도 공개되지 않고 있다. 로마 시 부근의 지질은 주로 석회암이어서 지하를 파들어가기도 비교적 수월하지만 추가적으로 어떤 안전장치를 만들지 않아도 적당한 토목공학적 구조만 갖추면 얼마든지 층수를 달리해서 지하 공간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카타쿰이 가능했던 것 같다. 시체를 옆에 두고, 경우에 따라서는 아직 완전히 부패되지 않은 것들도 많았을텐데, 그런 곳에서 집회를 가졌다는 것은, 부활에 대한 희망을 가진 이들이라서 시체를 별로 두려워하지 않은 것인지, 혹은 그럴 수밖에 없을 정도로 박해가 심했기 때문인지 잘 모르겠지만 끔찍한 일이다.

기독교 역사에서 질풍노도처럼 몰아치던 피눈물의 박해가 기원후 313년 그 유명한 콘스탄틴 대제가 선포한 밀랑칙령으로 인해서 완전히 종지부를 찍게 된다. 기독교인은 더 이상 카타쿰에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었으며, 더 이상 신앙적 이유로 사회적 불이익을 받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유럽이 종교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모든 정치, 문화, 예술, 사회적 차원에서도 기독교적인 방향으로 발전하게 된 그 기초가 바로 콘스탄틴에 의해 세워진 셈이다. 아우구스틴 대제 이후로 가장 정치력이 뛰어난 황제로 일컬어졌던 콘스탄틴은 기독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나아가서 가능한대로 로마 제국의 정치와 문화 형태를 기독교적으로 형성해나갔다. 예컨대 성직자들에게 군사적, 시민적 의무를 면제해주었으며, 기독교와 반대되는 여러 관습이나 칙령을 폐기시켰고, 기독교인 노예들을 해방시켰으며, 제국의 전신민이 주일을 지키게 했고, 당연히 교회당 건축과 성직자 생활을 국가재정으로 보장하고, 로마제국의 문양을 십자가로 바꾸었으며, 왕자들을 기독교적으로 교육시켰다. 그러나 정작 기독교의 국교화는 그가 세상을 떠난 한참 후인 391년 데오도세우스 황제 때의 일이다. 최초의 기독교 황제인 콘스탄틴을 기독교 입장에서는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로마의 대정치가였던 그는 상당한 부분에서 기독교를 음지에서 양지로 불어냈다는 점에서 큰 공이 있지만 역사의 결과는 항상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 양면성을 한번 짚어보자.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게 된 한 사건이 전해져온다. 그가 막센티우스 황제와 일전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그는 환상 중에 ‘이 승리자에 의하여’라는 라틴어 글자가 새겨져 있는 십자가 형상을 보고 종교적 충격을 받았다. 그 이후로 그는 자기 수하에 있는 모든 군대의 깃발에 이 십자가 문양을 그려 넣게 했고 군인들의 방패에도 그리스도라는 헬라어의 첫 자를 새겨 넣게 했다. 결국 312년 로마 근방의 밀비안 다리 전투에서 막센티어스 군대를 초토화시킴으로써 로마의 제 세력을 한손에 넣을 수 있게 된 이후로 그는 공식적으로 기독교에 귀의하였고 비록 말년에 이르러서야 세례를 받았지만 독실한 기독교인 황제로서 활동했다. 그는 생전에 그 유명한 제1차 니케아 종교회의(325년)를 소집해서 기독교의 핵심교리인 삼위일체론을 완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는 등 교회현장에서도 적극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의 이러한 정책으로 인해서 기독교는 그 이후 일천오백년 이상 유럽의 중심종교로 발전할 수 있었다.
콘스탄틴*이 순전히 종교적인 이유만으로 친기독교적인 정책을 세워나갔다고 보면 너무 단순하고 순진한 견해다. 그는 분명히 정치적인 수지타산을 전제했을 것이다. 콘스탄틴은 팽팽한 힘겨루기의 틈바구니에서 아직 특정세력에 들어가지 않은 기독교를 누구보다도 먼저 자기편으로 끌어들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제는 황실에도 기독교인이 생길 정도로 상당한 세력을 불린 기독교가 다른 어느 누구의 편에 들어서기 전에 자신이 선수를 친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정치적 판단이 큰 성공을 거두었다. 기독교에 호의적인 황제를 위해 충성하지 않을 기독교인들이 어디 있겠는가? 스스로 신으로 자처하던 수많은 전임 황제들과는 달리 예수를 주(퀴리오스)로 섬기겠다고 나서는 황제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을 기독교인 군사와 장교들이 어디 있겠는가? 콘스탄틴의 눈에 비친 기독교인들은 정치적으로 다루기에 아주 손쉬운 이들이었다. 예수를 주로 인정해 주면 대개의 정치적 문제들에 대해서는 눈감고 따라주는 이들이기 때문에, 그것도 거의 절대적으로 지지해주는 이들이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큰 자산이었다. 노련한 정치가 콘스탄틴의 정략과 피해의식이 강했던 기독교회의 권력지향성이 결탁하게 된 것은 아니었을는지.

*콘스탄틴(라틴 이름으로는 콘스탄티누스)이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임에는 틀림없지만 기독교적인 인품을 가진 인물이라고 볼 수는 없다. 직업 군인인 아버지와 여관 주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한 콘스탄틴은 처세술에 능했던 그의 아버지가 그 당시 네 지역으로 나뉘어 통치되던 로마제국의 한 황제가 된 다음부터 통일된 로마의 황제가 되려는 야먕을 펼쳐나간다. 군인으로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그는 결국 나머지 황제를 제거하고 명실상부한 통일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전쟁을 일으킬 때마다 기독교를 보호한다는 표면상의 이유를 달았지만 실제로는 권력욕의 실현이었다. 그는 누이의 남편인 동부지역의 황제를 누이의 간절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처형했으며, 무슨 이유에선지 장남도 체포하여 죽였다. 또한 자신의 아내도 역시 욕조에서 질식사 시킬 정도로 자신의 권력에 방해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가차 없이 처단해버렸다.

콘스탄틴 이후로 기독교와 로마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식으로 영합하는 길을 걷게 된다. 그 관계는 아주 간단하다. 황제는 세속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그것 중의 일부를 교회에 떼어 주고, 교황은 천상권의 확보를 위해, 그리고 세속권의 일부를 확보하기 위해 황제를 종교적으로 합리화시켜주는 것이다. 정치인들이야 원래 그런 야합을 속성으로 한다지만, 종교인들 역시 그런 영합에 일조했다는 것은, 그게 아니라 최소한 이용당했다 하더라도 부끄러운 일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교황들이 황제들을 이용해서 자신의 세속적 힘을 무한히 키워나갔다. 특히 6-11세기 사이에 교회의 영지가 급속도로 확대되었다. 이는 몇몇 정치적 사건들과 맞물려 황제들이 교황들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세속권력에 의해 부와 명예를 손에 넣게 된 기독교는 화려한 교회당, 세련되고 신비스러운 종교의식, 탄탄한 사변신학의 체계를 완성시켰다. 유럽 사회 안에 자신을 문화적, 역사적 실체로서 자리잡게 하는데 성공하게 된 것이다. 참으로 역사적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종교와 정치에 의해서 무시당하던 예수와 기독교가 이제는 그런 차원에서 최상의 존경을 받게 되었으니 말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질문하자.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기독교의 상황변화와 역사국면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 걸까? 기독교가 로마정권의 도움으로 크게 부상하게 되었으며, 감독들이 지방장관들과 맞상대할 수 있게 되었고, 황제들이 교황에게 정치적으로 도움을 받으려고 애쓰게 되었다는 현실을 마냥 즐거워해야만 하는 걸까? 무소불위의 힘을 갖게 된 기독교는 로마 정권에 의해 십자가 처형을 당한 갈릴리 예수의 복음과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다. 예수 당시의 로마정권에 비해 콘스탄틴 정권이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같은 이념(팍스 로마나)으로 단순히 기독교만 이용하고 있었을 뿐인데 기독교는 예수를 처형한 그 세력과 하나가 된 것이다. 변혁과 새로움의 복음이 어용종교로 탈바꿈하게 된 셈이다. 이제 로마가 이교도들을 무자비하게 징벌할 때도 교황이 축복해주고, 군주들이 아무리 방자하게 행동해도 교회의 기득권만 다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종교적으로 허용되었다. 이제 기독교는 예수님 곁에 있었던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이들이 아니라 로마의 상류층에만 관심을 갖게 되었다. 교회는 민중들로 하여금 하나님에게 충성하듯이 교황과 황제에게 충성하도록 가르쳤다. 외교적 능력이 탁월한 교황들은 유럽의 팽팽한 국제질서 가운데서 용케도 자신의 힘을 키워나갔으며 기독교는 이런 과정 속에서 지배 종교로 (제국주의적 종교) 발전해 나갈 수 있었다. 기독교와 다른 말을 하거나 다른 풍습을 따르면 종교재판에 회부한 우리 기독교의 역사를 잠시만 더듬어 보아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포스트 콘스탄틴’ 역사는 정치와 종교가 일치되어 교회의 외형적 세력을 확대시키기는 했지만 정작 복음이 담지하고 있는 혁명과 변혁의 숨통을 끊어놓았다. 중세기를 암흑기라고 일컫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변화를 용납하지 않는 시대, 반동의 시대, 피와 땀이 서려있는 갈릴리의 복음이 대리석으로 만든 로마의 교회당 속에서 형해화 되어가던 라틴신학의 시대가 ‘콘스탄틴 이후’ 천년 이상을 지속한다.

1054년

콘스탄틴은 330년 로마제국의 수도를 로마로부터 보스포러스 해협에 있는 비잔티움으로 옮겼다. 후에 이 도시는 콘스탄틴의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노플(지금은 이스탐불이라 함)이라고 불리었다. 두 바다(지중해와 흑해)와 두 대륙(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지정학적 거점도시로서 콘스탄티노플은 콘스탄틴에 의해서 기독교적 색채가 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로마의 수도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시나브로 이곳의 주교는 로마의 감독이며 주교인 교황과 맞서는 경쟁적 위치에 서게 된다.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을 양 축으로 한 기독교는 869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린 마지막 에큐메니칼 종교회의를 기점으로 그 사이가 벌어지다가, 결국 1054년에 로마의 교황과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가 서로 상대측을 파문함으로써 공식적으로 분리된다. 물론 그 이전부터도 역시 상당한 기간 동안 신학적, 정치적 반목과 대립이 적지 않았지만 그래도 명분상이나마 하나의 교회였다. 그런데 이제는 완전히 갈라서게 된 것이다. 그 분리가 지금까지 계속된다. 그리스도의 평화와 사랑을 그 본질로 하는 교회로서 너무나 큰 상처다. 그 어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간략하게 살펴보자.
11세기 중엽에 비잔틴제국의 정치적 상황이 매우 어려운 처지에 빠져들었다. 로마의 교황 레오 9세는 이런 상황을 이용하려고 했다. 그러자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 미카엘 케룰라리오스(1043-1058 재위)는 오히려 차제에 로마의 간섭을 막아내고 자신이 동방교회의 명실상부한 교황이 되려는 야망을 키워나갔다. 그는 동방교회를 서방교회로부터 완전히 분리시키려고 했다. 케룰라리오스는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서로마교회의 라틴계 교회와 수도원을 모두 폐쇄했다. 이런 사태 앞에서 로마의 교황은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양측 사이에 격렬한 투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일단 양측은 대화의 장에 나섰다. 로마교황의 대사들이 콘스탄티노플에 와서 양측 교회의 신학적 문제점들을 논의해나가기 시작했지만 실제로는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앙금만 쌓이게되었다. 급기야 케룰라리오스가 로마 교황청의 대사인 훔베르트 추기경의 글들을 소각시켜버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격분한 교황 대사들은 1054년 7월16일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성 소피아 교회의 제단에 파문장을 던져놓고 로마로 돌아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예루살렘의 대주교들은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 케룰라리오스에게 힘을 몰아주어 로마교회를 파문하기에 이른다. 로마 교황과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는 한치의 양보나 관용도 없이 서로를 적그리스도로 간주함으로써 기독교 교회가 두 쪽으로 나뉘었다. 그 비극적 역사가 일어난 해가 바로 1054년이다.

*서로마 정치권에 있었던 교회를 서방교회라 하고 동로마 정치권에 있었던 교회를 동방교회라 한다. 서방교회의 중심은 로마이며, 동방교회의 중심은 콘스탄티노플이다. 요즘에는 각기 로마 가톨릭교회, 그리고 정교회라 통칭된다. 그때 분리된 이래로 지금 까지 일천년 가까이 이들 두 교회는 서로 비슷한 교리와 종교형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적대적으로 지내왔다. 2차 세계대전 이후로 몇몇 대화시도가 있긴 했지만 뚜렷한 성과는 없다. 현재 로마 가톨릭교회는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칼, 그리고 그들이 식민지화 했던 중남미 등 세계 전지역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정교회는 그리스, 러시아, 그리고 지난날 소비예트연방에 속했던 몇몇 나라들을 중심으로 그런대로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로마 가톨릭과 정교회가 이렇게 분리될 수밖에 없는 그만한 절박한 사정이 실제로 있는 것일까? 그것도 거의 원수지간처럼 말이다. 우선 그들 사이에 어떤 신앙형식이나 신학의 차이가 있는지 중요한 요소들만 몇 대목 추려보자.
우선 이들 양측의 공통된 견해는 다음과 같다. 이들은 325년부터 787년 사이에 개최된 세계종교회의(공의회, Konzil)의 교리들을 받아들이고, 교회의 전통을 성경과 함께 중요하게 생각하며, 동정녀 마리아를 믿고 성화와 성유물을 경배한다. 성례련에서도 일곱 가지를 함께 받아들이며, 화체설을 믿고, 죽은 자와 산 자를 위한 미사를 드리며, 사제의 교권을 절대시하고 있다. 그 이외에도 미사형식 같은 것들이 거의 유사하다.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로마 가톨릭은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유출된다고 하지만, 정교회는 성부에게서만 유출된다고 주장한다. 로마 가톨릭은 로마의 교황이 세계적인 권위와 무오성을 갖고 있다고 하지만 정교회는 이를 반대한다. 동정녀 마리아의 무죄성을 로마 가톨릭은 인정하고 그녀의 승천설 까지 주장하지만 정교회는 부정한다. 로마 가톨릭은 사제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지만 정교회는 하급 교직자들의 경우에 한해서일지라도 결혼을 허락한다. 성만찬 문제에서 로마 가톨릭은 평신도들에게 떡만 배분하지만 정교회는 떡과 포도주를 함께 준다. 이런 차이점 중에서 특별히 신학적으로 중요한 사안은 화상(畵像)문제와 성령론이다. 교회당 안에 화상을 설치하느냐 마느냐의 논란이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의 황제, 교황, 감독, 수도사들 사이에 8-9세기 동안 가열차게 전개되어 동서방교회의 간극이 더욱 넓어지게 되었다. 결국 로마 가톨릭은 화상숭배를 거절하게 되었고 정교회는 상당부분 받아들이게 되었다.
성령이 성부에게서만 유출되는가, 아니면 성자에게서도 역시 유출되는가 하는 문제는, 즉 단출설과 복출설문제는 너무나 복잡한 신학문제이기 때문에 여기서 심층적으로 다룰 필요는 없고 그것이 동서방교회 분리에 어떤 계기를 마련했는가 하는 관점에서만 짚어보도록 하자. 기독교의 신론이 삼위일체론으로 형성되어가는 과정에서 예수의 신성과 인성문제가 해결된 다음에 대두된 현안은 삼위격인 성령을 어떤 위치에 놓는가 하는 점이었다. 325년 니케아 회의에서 처음 결정된 신조에는 “우리가 성령을 믿습니다.”라고 되어 있다가 후에 “우리는 성부에게서 나신 성령을 믿습니다.”로 변경되어 모든 교회들이 받아들이는 명제가 되었다. 589년 톨레도에서 열린 3차 세계종교회의에서는 니케아신조 라틴어판에 처음으로 ‘필리오케’(그리고 성자에게서)라는 구절을 삽입하게 되었다. 서방교회에서는 전반적으로 받아들인 반면에 동방교회에서는 적극적으로 반대함으로써 양측 교회는 이 신학적 문구를 두고 오랜 세월에 걸쳐 반목하게 되었다. 이 문제는 지금도 역시 여전하다. 참고적으로 개신교는 이 문제에 관해서 만큼은 로마 가톨릭의 입장에 서 있다.
1054년 어간의 분열역사는 여러 정치, 사회, 신학적 배경을 고려해야만 설명될 수 있지만 다층다기한 여러 정황 가운데서도 결정적으로 작동한 요인 한 가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곧 기독교의 교권화라는 것이다. 교회가 로마제국의 존재기반이라 할 힘의 논리를 받아들임으로써 신앙의 본질 보다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온갖 방법을 강구하게 되었다. 그것을 확대재생산하려다 보니까 결국 극단적 행동까지 마다하지 않게 되었다. 만약 기독교가 이러한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에 오르지 않고, 온전히 봉사하는 공동체로서, 즉 소외된 자를 위해 봉사하며 수난받는 공동체로 남아있었다면 종파분열은 상상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기독교회가 세속권력의 맛을 포기하기까지는 그 후로 5백년 가까운 세월이 필요했으며, 그걸 감당할 만한 인물이 등장하기를 기다려야만 했는데 그가 바로 마틴 루터다.

1517년

1517년 10월31일 95개 조항의 신학 명제가 기록된 일종의 대자보가 비텐베르크 성당 출입문 상단에 나붙었다. 이 대자보 내용이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발명 덕분으로 삽시간에 독일 전역에 인쇄 배포되었으며, 그 반향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갔다. 이 대자보의 작성자는 비텐베르크 성당의 사제이며 교수인 마틴 루터 박사였다. 교황청은 이 사건을 접하고 직간접으로 루터에게 압력을 가하여 이 소책자와 그가 출판한 그 이외의 반교황적 문서들을 자진 폐기처분토록 명령을 내렸지만 루터는 교황의 뜻을 따르지 않고 훨씬 더 강력하게 자신의 신학적 주장을 널리 확산시켜 나갔다. 처음에는 루터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교황은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제국의회가 열리는 보름스에서 그를 종교재판에 회부했다. 루터는 그 재판에 당당히 참석해서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 결과로 유죄가 선고되었지만 다행히 프레드릭 선제후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피신할 수 있었으며, 그는 그곳에서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등 많은 신학 문건들을 완성시켰다. 교황청의 유죄선고와 출교령 이후로 루터는 교황청과 완전히 결별하고 독자적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를 지지하던 많은 독일 사제들과 귀족들, 그리고 중산층 상공인*들의 도움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에 지배받지 않는 새로운 교회가 출현하였으니, 그 교회가 바로 프로테스탄트(개신교)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과정을 살펴보면 단순히 신학적, 혹은 교회실천적 요소만이 아니라 독일인들의 반이탈리아 정서가 상당히 강하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독일 교구의 재산이 시간이 갈수록 이탈리아 로마로 옮겨가는 것을, 그리고 교황이 거의 이탈리아계로 선택된다는 사실을 게르만 민족이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르네상스 이후 형성된 민족주의와 상공인 중산층의 확대로 인해서 루터의 종교개혁 운동이 독일 지역 안에서 탄력을 얻게 되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이제 교황청의 중앙집권적 교권에 반기를 들고 지역교회를 중심으로한 민주적 교권이 훨씬 강한 설득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다른 한편, 이러한 외부적 요인만이 아니라 교황청이 루터 사건을 대하는 태도가 지나치게 과민했다는 내부적 요인이 일개 무명의 사제요 신학교수에 의해 제기된 작은 신학적 불씨를 교회만이 아니라 유럽의 全사회, 문화, 정치에까지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될 큰 불길로 확대시킨 게 아닌가 생각된다.

종교개혁의 씨앗이 된 95개 항목의 대자보는 원래 교황청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그래서 그것에 반하는 교회를 새롭게 건설해야겠다는 뜻으로 작성된 것이 아니다. 신학자로서 자신의 교회에 신학적 문제를 제기하고 이 문제를 공개적으로 토론해보자는 제안이었을 뿐이다. 이 작은 논제들이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독일의 민족주의와 교황청의 알레르기식 반응으로 인해서 겉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결국 종교개혁이라는 역사적 사건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루터가 제기한 논제들은 핵심적으로 두 가지 문제에 집중된다. 하나는 면죄부이며, 다른 하나는 교황무오설이다. 로마의 베드로 성당 건축비가 예상 외로 많이 들어가게 되자 교황청은 재원 마련을 위해서 면죄부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연옥에 있는 조상이나 형제들의 영혼을 위해서 면죄부를 구매하면 그 돈이 헌금함에 들어가는 순간에 그 영혼이 구원받아 천당으로 들어가게 된다고 선전했다. 루터는 이를 비성서적이고 비신학적인 주장이라고 공격했다. 교황무오설은 원래 로마 가톨릭의 본질적인 교리는 아니지만 교황권을 강화시키려는 교황들로 인해서 점차 교리화 된 내용이다. 루터는 교황이 무오하다는 주장을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교황보다도 주교회의가 더 권위있는 의결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루터, 독일 그리스도인 귀족에게, 참조).
로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의 신학적, 실천적 차이는 로마 가톨릭과 정교회 사이의 그것 보다 훨씬 분명하다. 우선 주변적인 몇 가지 사실부터 점검해보자. 가톨릭 신자들은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승천한 분으로, 무죄한 분으로, 그리고 하늘나라에서 그리스도께 세상 사람들의 기도를 전달해주는 분으로 생각하지만, 개신교 신자들은 마리아의 종교적 의미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가톨릭교회의 사제들은 예외 없이 남성독신**이지만 개신교 성직자들은 거의가 남성기혼이다. 가톨릭은 일곱 가지의 예전을 (영세, 고해, 영성체, 견진, 혼배, 서품, 종부) 실행하는데 반하여 개신교는 세례와 성찬식 두 가지만 예전으로 취급한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신부만이 미사를 집전할 수 있는데 반하여, 만인제사장직을 주장하는 개신교에서는 모든 신자들이 직접 예배를 드릴 수 있다. 1962-1965년에 열린 2차 바티칸 공회의 이후로 로마 가톨릭은 많은 점에서 전향적으로 개혁되어서 개신교와의 관계복원에 힘쓰고 있다. 예컨대 적대적으로 대하던 개신교를 ‘나누인 형제들’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라틴어로 드리던 미사를 자국어로 드릴 수 있게 된 것들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로마 카톨릭(Roman Catholic)이라는 말에서 왔다. 천주교라고도 하고 구교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카톨릭 교회가 아니라 가톨릭교회라고 한다. 그런데 본질적으로는 ‘카톨릭’, 혹은 ‘가톨릭’이라는 말은 단순히 로마 가톨릭 교회를 칭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세계교회는 카톨릭(보편적) 교회다. 정교회도 카톨릭적이고, 개신교도 역시 카톨릭적이다. 사도성, 단일성, 거룩성과 아울러 보편성(카톨리시티)은 교회의 본질이다. 이 말은 지역에 있는 개교회나 노회와 지방회로서만이 아니라 세계전체로서의 교회를 말한다. 기독교회는 처음부터 세계적, 보편적, 에큐메니칼적이었다. 예수 한분을 그리스도로 믿는다면 당연히 세계적, 글로발(지구적) 교회이어야 한다. 이 책에서는 편의상 로마 가톨릭 교회를 그저 ‘가톨릭’으로 표기하기도 했다.

**성직자의 결혼문제는 그렇게 본질적인 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절대적인 지침으로 굳어져 있다. 처음부터 사제들의 동정이 강제된 것은 아니었다. 첫 교황이라고 일컬어지는 베드로 역시 결혼한 사람이었으며, 그 후로 사제들의 결혼은 상당히 오랫 동안 당연시되었거나 최소한 허용되었다. 그런데 교황권이 강화되고 성직의 우월권이 강조되면서 차츰 독신제가 자리잡게 되었다. 가톨릭에서 성직자가 결혼하지 않는 이유는 영적으로 예수의 신부가 되었기 때문이며, 실천적으로는 가족으로 인해서 성직수행에 지장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개신교 목사들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현실에 안주하는 경우가 있는 걸 보면 그쪽의 주장에 일리는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건강한 남자가 결혼하지 않고 성적 욕구를 별 탈 없이 처리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또한 가정을 경험함으로써 보통 사람들의 생각을 더 절실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결혼이라는 제도권 안에 들어가 있는 게 훨씬 자연스러운 게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개인의 정신적, 영적 능력에 따라서 다르기는 하지만. 요즘 사제들의 결혼을 허락해야한다는 주장이 간혹 제기되기도 한다. 루터는 성직자의 독신제를 반대하여 본보기로 한 수녀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루터의 고독한 종교싸움에서 큰 도움을 주었다고 전해진다.

적지 않은 개신교 신자들 중에는 아직도 로마 가톨릭을 이단이라거나 우상숭배자들이라고 몰아붙이는 이들이 있긴 하지만 그들의 태도는 깊이 알지 못함의 소치로 일단 접어두기로 하자. 같은 기독교 형제로서 가톨릭과 개신교는 아직 요원한 듯 보일지 모르지만 결국 언젠가는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는 당위를 전제한 가운데 서로의 차이점을 인정하고 대화를 계속해 나가야 한다.
여기서는 루터가 제기한 종교개혁의 신학적 슬로건 세 가지를 가톨릭의 신학적 바탕과 견주어 설명함으로써 양 교회의 특징을 그려보고자 한다. 물론 이것이 양측 교회를 구별하는 유일한 잣대일 수 없지만, 또한 이것으로 충분하다고도 볼 수 없지만 그런대로 기본적인 변별축이 될 수는 있다.

솔라 스크립투라
-성서인가, 교회인가?-

마틴 루터는 기독교인의 신앙생활을 규정하는 잣대를 ‘오직 성서’(Sola Scriptura)로 한정한 반면에 가톨릭은 성서만이 아니라 교회도 역시 그 기준이 된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양측의 주장은 오늘도 역시 그대로 적용된다. 오직 성서인가, 아니면 성서와 교회인가. 이것이 개신교와 가톨릭의 신앙적 본질과 형태를 구별할 수 있는 첫 걸음이다.
먼저 가톨릭교회의 입장을 살펴보자. 오랜 역사를 지닌 가톨릭은 기독교 신앙생활의 규범을 경전인 성서만이 아니라 교회*까지 포함시킨다. 개신교 신자의 입장에서 보면 우상숭배요, 언어도단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게 그렇게 한 마디로 무시해도 좋은 불신앙만은 아니다. 개신교 신자들이 그렇게 절대적인 기준으로 여기고 있는 성서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생각해 보면 가톨릭의 주장도 설득력이 없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아주 간단한 질문만으로도 이 문제는 심각해진다. “기독교의 역사 속에 성서가 먼저 있었나, 아니면 교회가 먼저 있었나?” 예수 믿는 공동체가 먼저 생긴 다음에 그 안에서 복음서도 기록되었고 편지도 쓰였으며, 그런 문서들을 교회가 4세기 후반에 교회의 경전으로 결정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인정한다면 분명히 성서 보다는 교회가 우월한 권위를 갖는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또한 교회생활의 실천이라는 점에서 볼 때 성서가 모든 문제를 포괄하고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성서만으로 어떤 기준을 삼는다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한다. 예컨대 임신중절이나 배자복사, 생태파괴, 핵문제 같은 문제들은 성서에서 직접 다루어지지 않는다. 교회가 그런 실제적인 문제에 대한 어떤 기준을 제시해주는 일이 때에 따라서 필요하다.

* 여기서 말하는 교회는 실질적으로 모든 사제의 수장인 교황을 가리킨다 하겠다. 교황은 가톨릭교회의 하이어라키 제도에 의해서 당연히 교회의 머리가 된다. 따라서 가톨릭 신자들은 성서의 가르침만이 아니라 교황이 내린 칙령까지도 같은 권위로 받아들인다. 그들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했을 때 예수님이 그에게 베드로(반석이라는 뜻)라는 이름을 주시고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으며 이어서 천국의 열쇠를 주시겠다면서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신 말씀에(마태복음 16:13-20) 근거해서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이야말로 교회의 반석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교황제의 신학적 정당성 여부에 대해서 일일이 시비를 걸 필요는 없다. 가톨릭의 독특한 교회체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기만 하면 별 문제는 없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개신교회는 아무리 교회가 하나님 말씀을 전승시켜왔으며 종교회의가 성경을 결정했다고 하더라도 이미 정경화가 이루어진 이후에는 그 성경만이 유일한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두 근거에서 이렇게 말한다. 첫째, 교회와 종교회의는 교회역사를 통해서 적지 않은 오류를 행했기 때문에 교회를 신앙생활의 절대적 규범으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이다. 지동설을 종교재판에 회부한 사건은 이에 대한 하나의 좋은 예다. 둘째, 말씀의 원래성이 그 근거다. 종교회의가 성경을 정경화 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에, 즉 이미 있었던 복음서와 서신들을 종교회의를 통해서 결정한 것뿐이기 때문에 모든 교회질서는 역시 성경말씀 보다 하위에 놓여야 한다는 말이다.
개신교와 가톨릭의 이러한 입장 차이를 단적으로 표현하면 ‘성경의 절대화 대(對) 교황의 절대화’다. 개신교 신자들은 성경만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해서 그것에 매달리며, 가톨릭 신자들은 교황에게 그러한 태도를 취한다고 말할 수 있다. 어떤 이는 이를 이렇게 표현했다. 개신교 신자들에게는 성경이 우상이고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교황이 우상이라고. 각각 종이와 사람을 우상으로 섬긴다고. 문자로서의 성경만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도 문제가 있으며 제도적인 교황(교회)을 절대적인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무엇도 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성경과 교회질서가 미래로 열려진 하나님 나라에 종속적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솔라 피데
-믿음인가, 행위인가?-

기독교는 사도 바울 이래로 의로움의 문제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 이유는 인간행위가 근본적으로 악*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악한 인간, 그 본질에 의해서 끊임 없이 죄를 행하는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곧 의로워지는 데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전통은 신약성서만이 아니라 구약성서도 말하고 있는 바다. 사실상 아무리 이상적인 사회였다고 하더라도 악으로부터 벗어난 사회가 없었다는 점에서 이러한 시각은 어느 정도 보편적인 설득력을 갖는다.

*서양적 사유와는 달리 동양적 사유에서는 악과 의가 대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양극이 조화를 이룬다. 불교가 인간의 죄 문제를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이유도 아마 이런 동양적 사유에 기인하는 게 아닌가 한다.

문제는 인간이 어떻게 의로워질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바울과 어거스틴의 전통에 서 있는 루터는 인간의 의로움이 ‘오직 믿음’(Sola Fide)에 있다고 주장했다. 소위 ‘이신칭의’(以信稱義)였다. 루터는 어거스틴 수도사로서 온갖 종교적 수행과 금욕을 통해서 의를 이루어보고자 했지만 그것으로는 그 어떤 종교적 만족과 평화를 이룰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오직 믿음 뿐임을 확인했다. 반면에 가톨릭에서는 그것만으로는 충분조건이 될 수 없고 인간의 행위가 포함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목회 임상적 차원에서 이 문제를 생각해보자. 개신교회에서는 신자들에게 ‘믿음만’을 강조한다. 믿음만 있다면 무슨 문제든지 다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런지 신자들 입에서는 늘 “믿음이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박집사님은 참 믿음이 좋아”라는 말이 붙어다닌다. 가장 많이 드리는 기도도 역시 “주님, 굳센 믿음을 주시옵소서”다. 개신교 신자들의 이런 모습만 보면 예수의 가장 모범적인 제자가 된 것 같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별로 다른 게 하나도 없다. 소위 믿음은 좋은데 행위가 없다는 말이 여기에 해당된다. 예수의 비유로 말하자면 나무는 좋은 것 같은데 그에 어울리는 열매가 없다.
반면에 가톨릭 신자들은 개신교 신자들처럼 ‘믿음, 믿음!’ 하지는 않고, 오히려 종교적, 윤리적 행위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일반적으로 가톨릭교회에서 사회봉사를 많이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이런 가르침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이런 인간의 행위가 인간을 참되게 변화시키는 것일까라는 점을 생각하면 선듯 수긍하기도 힘들다. 겉으로는 그럴듯하게 윤리적으로 실천하면서도 속으로 교만하고 위선적인 삶이 얼마나 많은가? 기독교가 기껏해야 도덕적 가치에 머물러있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따라서 개신교의 입장에서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어린 자녀들이 부모들에게 인정받는 길이 부모가 기대하는 것만큼 선하고 의로워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라고 말이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에게 의롭다고 인정받는 길은, 비록 윤리적 행실은 그렇게 나타낼만한 것이 없어도 속중심이 열려있고 겸손한 자세를 갖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하다고. 소위 탕자의 비유*로 일컬어지는 예수의 가르침에서 볼 수 있는 것 처럼 윤리적인 큰 아들 보다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것 같은 작은 아들이 훨씬 하나님 나라에 어울리는 모습이라고.

*탕자의 비유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유산을 미리 물려받아 먼 나라로 가서 방탕하게 살다가 전 재산을 말아먹었다. 흉년이 들어 먹을 것조차 구하기 힘들게 되자 그는 돼지 치는 일을 하면서 그 먹이로 끼니를 때웠다. 그는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 아버지의 품꾼이 될 작정을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아버지는 죽었던 아들을 다시 찾은 심정으로 잔치를 베풀었다. 밭에서 열심히 일을 하다 돌아온 큰 아들은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불평을 한다. 아버지의 마지막 말을 들어보자.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누가복음 15:11-32). 이 비유를 통해서 볼 때 큰 아들의 윤리적 근거가 존재론적인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하며, 반면에 작은 아들의 비윤리적 행위가 하나님 나라에서 배척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문제는 인간변화의 기초를 어디에 두는가에 달려 있다. 존재인가, 아니면 행위인가. 사실 존재와 행위는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의 사실을 두 가지 현상으로 표현한 것뿐이다. 인간이 존재론적으로 새로워지지 않으면, 바울의 표현을 빌리자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않으면 그 모든 행위가, 그 모든 선행이, 자기를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고린도 전서 13:3) 아무 유익이 없고 무가치하다. 또한 아무리 자신의 믿음과 의로워졌음을 확신해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야고보 2:17)고 볼 수 있다. 결국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개신교의 믿음강조와 가톨릭의 행위강조가 조화롭게 균형을 이룰 때 인간의 의로움이 빛을 발한다고.

솔라 그라티아
-은총인가, 업적인가?-

마지막으로 다루게 될 문제는 구원의 주체에 관한 것이다. 루터에 의하면 ‘오직 은총’(Sola Gratia)만이 구원의 주체이지만, 가톨릭의 가르침에 의하면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업적’이 함께 작용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말하자면 구원이 이루어지는 데 인간이 감당해야 할 몫은 전혀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총만이 작용한다는 가르침이 개신교의 입장인 반면에, 인간이 감당해야 할 몫이 분명히 있다는 가르침이 가톨릭의 입장이다. 이런 차이는 말장난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면 무언가 해석학적 바탕에 근거한 것일까?
이 문제는 근본적으로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와 연관된다. 개신교는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했으며 근본적으로 무능하기 때문에 구원사건에 아무런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능력을 철저하게 부정하는 시각이다. 반면에 토마스 아퀴나스의 자연신학이 이를 대변하고 있는 것처럼 가톨릭은 인간이 하나님의 계시를 깨달을 수 있는 자연적 인식능력을 갖고 있으며 여기에 근거해서 구원사건에도 협력할 수 있다고 본다. 말하자면 개신교의 입장을 계시 일원론이라고 한다면 가톨릭의 입장은 계시와 이성의 연합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질문해보자. 인간은 그 어떤 가능성을 갖고 있는가? 인간은 구원사건에 일조할 수 있는가? 좀더 구체적으로, 인간이 이 땅 위에 완전한 복지사회를 만들어나갈 수 있는가? 개신교적 입장에서 보면 인간에게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으며, 가톨릭의 입장에서는 가능성이 상당히 있다.
양측의 주장이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역사는 지금까지 복지사회를 위한 프로그램을 계획하고 실천해왔지만 그것이 궁극적으로 인간 행복을 위해 기여해 왔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미국이나 일본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지구상의 최고 복지국가인 스위스나 오스트리아, 북유럽의 여러 나라들도 역시 완벽한 구원의 질서와 비젼을 제시해주고 있지는 못하다.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고 인간이 무엇을 이룰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고 해서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물체 중에서 유일하게 세계를 인식하고 있는 인간을 완전히 무력한 존재로 간주해 버린다면 그것도 역시 책임적인 자세는 되지 못한다. 아무리 인간의 역사가 시행착오를 거듭했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인식하고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인간은 구원문제*에서도 어떤 역할을 감당할 수 있으며,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

*1999년 10월31일 로마 가톨릭 측의 에드워드 카시디 추기경(교황청 교회일치위위원장)과 루터교 세계연명 크리스티안 크라우저 감독은 독일 남부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열린 예배에서 “기독교의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 아닌 ‘신의 사랑’에 의해서만 정당화 될 수 있다고 믿는다.”는 공동선언문에 서명했다. 이 공동선언문은 각기의 전통을 수호하면서도 서로의 신앙적 지평을 넓힘으로써 일치의 틀을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루터교회는 아우구스부르크 신조와 소교리문답서만을, 로마 가톨릭은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정만을 신앙적 기초로 주장했다. 이제 이 공동선언으로 인해서 지난 500년간의 종교적 갈등이 완전히 해소될 수 있을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 초보는 이룬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자세한 내용을 알기 원하는 이는 <기독교사상, 2천년 1월호, 217쪽 이하>를 볼 것.

요약하자면, 결국 개신교회는 신자 개개인의 실존적 신앙결단과 그 경험에 무게를 두고 있는 반면에 가톨릭교회는 교회질서와 신자의 모범적 삶에 그 무게를 둔다 하겠다. 이런 신학적 오리엔테이션에 근거해서 개신교회는 신자들의 존재론적 신앙훈련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가톨릭은 종교의식과 사회적 봉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48년

기독교가 1054년과 1517년에 대분열을 거친 다음, 특히 프로테스탄트는 루터와 칼빈, 낙스, 웨슬리 등에 의해서 여러 교파로 분열되었다. 기독교의 세 종파, 즉 가톨릭, 정교회, 프로테스탄트 사이의 연합운동은 별로 이렇다 할 성과를 보이지 못했다. 다만 사분오열되어 있던 프로테스탄트는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약칭 WCC)라는 조직으로 연합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해나갔다. 19세기 이래로 세계 선교현장에서 요청된 에큐메니칼 정신의 성과물이라 할 수 있는데, WCC의 창립총회가 바로 암스텔담에서 1948년에 개최되었다. 그 이후 지금까지 8차 총회를 거치는 동안 신학과 프락시스에서 세계 교회를 견인해 나갔다. 이 협의회에는 각국의 교단이 독립적으로 회원교단으로 참가할 수 있으며, 현재 본부는 스위스의 제네바에 있다. 참고적으로 총회 개최 연도와 장소는 다음과 같다. 1차: 암스텔담(네델란드, 1948년), 2차: 에반스톤(미국, 1954년), 3차: 뉴 델리(인도, 1961년), 4차: 웁살라(스웨덴, 1968년), 5차: 나이로비(케냐, 1975년), 6차: 벵쿠버(캐나다, 1983년), 7차: 캔버라(호주, 1991년), 8차: 하라레(짐바브웨, 1998년), 9차: 포르토 알레그레(브라질, 2006년). 언젠가 때가 되면 통일된 우리 나라*에서도 이 협의회의 총회가 열릴 것으로 기대한다.

*한국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KNCC(Korea National Council of Churches), 즉 한국 교회협의회라는 조직으로 연합운동을 전개했다. WCC와는 비의존적으로 연대해왔다고 볼 수 있다. 현재 이 협의회는 8개 회원교단으로 꾸려져있다. 기장, 예장(통합), 기감, 성공회, 복음교회, 구세군, 순복음교회, 정교회.

종교개혁 이후로 교권과 왕권의 억압 밑에 있던 세계가 그것으로부터 독립되어나가는 큰 변혁의 시대에 돌입한다. 계몽주의, 합리주의, 경험론 등으로 불려지는 사상사적 특징들은 인간의 자율성을 제고하는 경향을 보이는 가운데 거대한 근대주의라는 흐름을 주조했다. 이제 교회는 황제와 더불어 공동으로 행사하던 세계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어 세계사의 종속변수로 떨어지게 되었다. 이런 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은총에 근거해서 살아가고 있는 기독교인이 실망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만약 기독교가 세계창조의 하나님을 믿고 있으며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도래를 대망하고 있다면 어떤 어려운 상황에 놓인다고 하더라도 위축될 필요는 하나도 없다. 자신이 믿고 희망하는 바를 정직하게 선포하고 실행하면 충분하다. 특히 인간중심의 근대주의가 어쩔 수 없는 한계에 빠져들었고, 그렇다고 해서 근대이후의 어떤 확실한 대안도 아직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이 세계 앞에서 기독교는 여전히 봉사와 선교로 참여할 수 있는 자리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십자가형을 당하고 부활한, 그리고 세계 심판주로 올 예수 그리스도에 근거해서 진리와 자유와 희망에 대해 말하고 그렇게 살아가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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