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넨베르그 사도신경해설 32강 - 제8장 지옥에 내려가시고(1)

안녕하세요?

오늘 사도신경 강해 32강입니다. 오늘부터 이 책 새로운 장으로 들어가게 되겠어요. 판넨베르그의 사도신경해설, 그것에 따르면 8장입니다. 제목이 재미있습니다. ‘지옥에 내려가시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내용을 따라가다 보면 자세히 나오겠지만 사도신경안에 ‘지옥에 내려가시고 음부에 내려가시고’ 이러한 표현이 우리 말 사도신경에는 없습니다. 네 다른 나라 사도신경에는 나온다는 말인데요. 모든 나라가 똑같지는 않을 거예요. 요 문제에 대해서는 제가 정확하게 조사를 하지 않아서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나라 사도신경은 주로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처음 선교사들이 와서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 걸 보면 미국의 사도신경에서도 음부에 내려가시고 이러한 구절이 없을 거라고 생각이 되는데 또 다른 관점으로 이 구절이 우리나라말 사도신경에만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그렇다면 미국 사도신경에는 나온다고 보는데 고 문제는 제가 정확하게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어쨌든 지옥에 내려가시고 하는 구절이 사도신경에 원래 있었다고 하는 것, 고것도 좀 더 구분해야죠. 원래라고 하는 것이 언제냐는 고런 것 때문에 명확하게 이야기를 해야 되지만 일단 우리가 여기 공부를 해야 하는 대목을 따르면 요 대목이 중요합니다.

지옥에 내려가시고 라는 표현이 우리 일반적인 신앙구도에서 보면 자연적이지는 않죠. 그런게 왜 사도신경에 원래 들어갔었는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런 것들을 오늘 우리가 판넨베르그의 안내에 따라서 공부해 보려고 합니다. 책을 좀 보겠어요.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의 지옥*行에 대한 논의는 사도신경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마지막으로 추가된 요소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지옥은 음부, 하데스, 게헨나 등과 거의 같은 개념이다. 히브리어로는 아바돈, 헬라어로는 아폴레이아, 라틴어로는 페르디찌오로 표기되는 이 지옥은 구약에서 단순히 죽은 사람이 거하는 곳으로(욥 26:6, 시88:11), 랍비문헌에서는 파멸과 징벌의 장소로 이해되었다.

요 첫문장만해도 우리가 생각할 거리는 많이 있습니다. 사도신경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이 구절이 마지막으로 들어왔다는 이야기예요. 이상한 생각이 들죠? 사도신경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지 뭐 형성되는 과정이 있었다는 말이냐? 궁금할 겁니다. 사도신경이 어느 날 갑자기 로마교회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 시간을 두고 세월이 흘러가면서 확장되면서 추가되면서 완성된 것입니다. 사도신경만이 아니라 사실은 성서 전체가 그렇다고 볼 수 있어요. 성서도 그렇고 기독교 교리 가르침 모두가 그렇습니다. 안에 어떤 프로세스가 있는 거죠. 이런 말을 우리가 더 폭넓게 생각하면 기독교 교리 성서뿐만 아니라 인간 역사 전체가 프로세스가 있는거죠.

가장 실증적인 학문이라고 하는 물리학도 우리가 알고 있는 몇몇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 오랫동안의 세월이 필요했잖습니까? 신학도 마찬가지 인거죠. 그래도 두 개는 구분된다. 생각하고 싶어 하는 분들이 있을 거예요. 물리학이나 생물학은 당연히 인간의 학문이기 때문에 세월이 가면서 발전하고 그렇게 내용들이 확장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처음부터 완전한 게 아니냐 그렇게 말이죠.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야 이해가 됩니다만 원래는 그렇지 않습니다. 요런 부분에서 우리가 생각을 잘 정리해야 되는데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계시라고 할 때에 그것이 그냥 어느 날 갑자기 어떤 사람의 영감에 확 드러나는 방식, 그런 거는 아니죠. 또는 구약성서 같은데서 우리가 그러한 거를 확인할 수 있는 것 같은데요. 예를 들자면,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고 하는 거는 보통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직접 계시 이런 것을 의미합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고 그 다음에 세월이 흐른 다음 시내산에서 십계명이다, 율법 이런 것을 받았다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만 본다면 처음부터 완성되어서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처음부터 완전하다 말이죠. 고거가 실제로는 그렇지는 않습니다. 율법도 오랜 세월을 걸쳐서 완성된거예요. 십계명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40일동안 있으면서 그것을 다 완성했다고 보는 사람들은 특별하게 성서를 문자적으로 따르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아무도 없어요. 십계명도 오랜 세월을 걸쳐서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자리를 잡은 법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과정 역사 이런 것들을 우리가 염두에 두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 계시들 이런 것들을 오해할 여지가 있습니다.

사도신경도 똑 같은 거죠. 가이샤라 빌립보로 가시던 도중에 예수님이 나는 누구냐 라는 그러한 문답에서 베드로가 그런 대답을 하죠. “주는 그리스도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그러한 최초의 가장 짧은 신앙고백을 기초로 해서 로마교회의 세례문답자들에게 준, 하나의 기준이 된 고백록, 이게 사도신경이거든요. 그 후에 세월이 흐르면서 그 안에 많은 내용들이 보충되고 때에 따라서는 또 빠지기도 하고 그렇게 되었을 겁니다. 그중에 제일 마지막으로 추가된 게 지옥행이라고 하네요.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우리말 사도신경으로 사용하는 내용은 고 추가된 내용이 없는 앞서의 조금 더 원형이라고 할 까요. 그 사도신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는 더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사도신경을 우리가 따르고 있는 거죠.

2세기로 소급되는 로마 공동체의 세례고백에서는 그리스도의 지옥행에 대한 언급이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방금 말씀드린 대로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우리말 사도신경은 2세기로 올라가는 원형의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나 분명히 4세기의 신앙 고백문에는 예수의 묻히심과 부활 사이에 음부에 내려갔었다는 암시가 확실하게 언급되었다. 2세기와 4세기의 그 어간에 지옥행이 추가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이 고백문은 이런 진술을 통해서 예수 죽음의 운명을 보다 자세하게 묘사해 보려고 했다. 이게 참 재미있는 겁니다. 예수 죽음의 운명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고 표현해보려고 했던 초기 기독교인들의 노력이 이런 지옥행을 사도신경안에 추가하게 된 동기가 된 것이죠. 이 말은 곧 예수님의 운명 예수님의 십자가 등등 케리그마라고 이야기 하죠. 가장 기본적인 그러한 것들이 세월이 가면서 더 풍부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 기독교인들은 그게 뭔지를 잘 몰랐던 거죠. 그러니까요.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복음의 씨앗만 갖고 있었던 거예요. 케리그마의 원형만 갖고 있었던 거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3일만에 하나님의 능력으로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다시 오신다고 하는 가장 기본적인 그런 것만 안고 있었었죠. 그게 세월이 가면서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그러한 의미들이 많이 활발하게 논의되고 더 풍성하게 된 겁니다 .그러한 역사가 2천년 동안 계속되어 왔어요. 지금도 여전히 예수님의 운명을 조금 더 정확하게 이해하기위한 노력들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게 신학이죠. 이러한 노력들은 종말까지 계속되어야 합니다. 무슨 말이냐? 이미 예수님에 대한 모든 구원의 내용들은 다 밝혀졌고 우리는 열심히 믿고 따르면 되지 않느냐 이러한 주장도 가능하게 됩니다. 그게 틀렸다고 말할 수 없죠. 그러나 부족한 겁니다. 우리는 아직까지도 예수님의 운명에 걸린 모든 비밀들을 다 알지 못하는 거죠. 이런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마저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누구냐? 하는 그런 질문들이 아직 끝나지 않은 거잖아요. 삼위일체 하나님을 우리가 이야기하고 그것이 가장 정확하게 하나님을 표현하는 방식이라고 이야기합니다만 그게 아주 실질적으로 어떠한 건지 우리가 얼굴을 맞대어 볼 정도로 아는 게 아닙니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어요. 삼위일체론은 교부시대에서 출발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신앙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그리고 그 관계를 가장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신학적 용어 혹은 개념이다. 말이죠. 그게 삼위일체다 말이죠. 지금까지 우리의 인식 차원에서 최선이라고 하는 거죠. 그러나 이것도 여전히 사도 바울의 표현대로 거울로 보는 것과 같습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삼위일체 하나님이 불확실하다가거나 임시적이라거나 그런 뜻은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 신앙이라는 것은 늘 불가지론에 빠져야 된다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불가지론을 갑자기 거론하는 게 이 이야기의 맥락에서 딱 떨어지는 게 아닌데 왜 갑자기 튀어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고거와의 관계를 설명하고 넘어가야 될까요? 불가지론은 우리가 이렇게 이야기하죠. 말뜻 그대로 한다면 알 수 없다. 불가지론,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는 이야기거든요 거죠. 하나님에 우리가 증명할 수 있는게 아니잖아요. 그런 것은 아예 말하지 말라는 것이잖아요. 기독교 신앙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보이지 않았지만 그걸 확증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확실한 것으로 알고 말을 해야지요.

예 고 두 문제, 삼위일체론과 같은 우리 기독교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하나님에 대한 표현도요.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볼 정도로 아주 끝난, 그리고 완료된 그러한 가르침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말하지 말아야 된다는 불가지론적인 차원에서 이 삼위일체론을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말이 좀 복잡하게 되었습니다.

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요. 지옥행을 사도신경 안에 추가함으로써 예수 죽음의 운명을 좀 더 정확하게 묘사해보려고 한 것이죠. 예수는 육체적인 차원에서만 죽임을 당한 게 아니라, 죽음이 의미하고 있는 바의 것, 말하자면 하나님과 그의 구원으로부터 배척을 당한 것이라고 말이다. 이 죽음이란 인간의 실존적 운명이 죄에 의해 상실되는 것을 가리킨다. 지금 여러분 정신을 차리고 들으셔야 합니다. 전혀 평소에 생각하지 않았던 그러한 내용들이 오늘 언급될거예요. 예수님의 지옥행은 정말 지옥행과 같은 차원의 문제라는 거죠. 죽으면 지옥에 가잖아요. 여기서 말하는 지옥이라는 것은 단순히 나쁜 놈들이 간다는 것으로부터 천당 지옥할 때 그런 차원의 지옥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옥에 대한 표상도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게 좀 복잡해요. 성서안에서도 그렇고요. 이게 어떤 일관된 흐름이 있기는 있습니다만 그걸 딱 끊어갖고 말하기는 힘든겁니다. 성서의 시대마다 그것에 대한 이해가 좀 달랐기 때문 이예요. 그런데 큰 틀에서 보면 이게 구약을 근거로 해서 나온 것인데요. 죽은 사람들이 가는 곳이라고 그런 정도로 생각하면 됩니다. 그곳은 생명이 끊어진 곳, 어두운 곳, 그렇죠.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는 곳, 이런 곳이라고 할 수 있죠. 죽었다고 하는 것은 생명을 잃었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모두가 음부, 지하세계 그쪽으로 구약성서에 뜨문뜨문 그것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지옥에 내려가셨다고 하는 것은 그러한 모든 인간이 당하여야할 그러한 죽음을 진짜로 당하셨다. 육체적으로만 죽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 죽음은 완전한 하나님과의 단절이니까 그런 거를 경험하셨다고 하는 겁니다.

바로 제가 읽은 그대로예요. 하나님의 그의 구원으로부터 배척을 당한 것이라고 말이다. 조금 이상하지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의롭게 살았고 인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분인데 보통 인간들이 당해야 될 하나님으로부터의 배척을 당했다고 하는 말이냐? 정말 모든 사람이 가야할 지옥에 갔단 말이냐?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 겁니다. 이런 문제들이 우리가 간단하게 풀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천천히 따라가면 무슨 뜻인지는 잘 들어와요. 초기 기독교도인들이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그냥 단순하게 열광주의적으로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 인류, 인류가 당해야 될 죽음, 삶, 역사 이 전체의 구도에서 예수님의 사건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경험한 거죠. 그들의 영적인 깊이는 사실 오늘 우리가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깊었다고 볼 수 있어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지옥에 갔다 그런 차원이 아니라 실질적인 죽음을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조금 더 따라가 보겠습니다.

예수 죽음의 이러한 의미는 예수의 십자가와 죽음 사건이 언급되었을 때 이미 논의되었다. 예수는 분명히 자기 백성의 종교적 권위에 의해 버려진 자로서 죽었다. 이것은 유대인인 그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의미했다. 그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고 위임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를 버렸다고 하는 사실을 말이다. 엄청난 충격이죠. 그러니까요.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하나님이 왜 나를 버리십니까? 그러한 토로를, 절규죠. 그렇게 했잖아요. 복음서 기자들도 이미 지적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따라서 예수가 하나님의 임박을 유달리 강하게 선포했기 때문에 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임한 이 유기는 그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죠. 하나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이르렀다고 하는 사실을 예수님이 유달리 강하게 선포하셨기 때문에 그 말을 그것을 유달리 강하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 하나님,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나라 유기 버림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다는 거죠.

모든 인간의 죽음에서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가 확증된다. 이 분리는 현존상실과 죄와 인간의 자기폐쇄에 담겨있는 고유한 본질을 결정짓는 요소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의 이러한 삶에 담겨있는 고유한 본질을 결정짓는다. 그렇죠. 인간은 자기중심적으로, 자폐적으로 살아감으로써 모든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분리된다. 죽음은 이것을 폭로한다. 여러분들 밑줄 그었다가 나중에 천천해 생각을 해 보십시오. 자폐적으로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가는 인간, 그것이 곧 하나님을 거부하는 삶이거든요. 그렇게 사는 것은 결국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분리되는 거라고 하는 거죠. 가장 극단적인 분리가 죽음인거죠. 끊임없이 끊임없이 자기중심적으로 자폐적으로 살아가다가 인간은 결국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된다. 그게 죽음이 말하는 거죠. 결국은 죽으니까. 결국 모두가 다 그리로 가게 되는데요.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인간의 고유한 본질을 폭로하고 있다. 그렇죠. 그러나 어떤 사람이 과연 죽으면서 이 사실을 경험하는가? 경험하지 못하죠. 그걸 평소에도 생각하지 않습니까? 뭔지 모르면서 죽는 거죠. 그런 것이 일반적입니다.

본문을 보겠습니다. 살아남은 자의 관점에서 볼 때 늘 그렇듯이 인간의 죽음을 그렇게 진부하게 진술하는 것이 바로 충격적인 게 아닐까? 우리 생전에 죽음을 준비하는 일이 결코 이루어질 것 같지는 않다. 기독교 중세기에는 그런 준비가 실행된 적이 많이 있었는데 말이다. 기독교 중세기가 훨씬 더 생명에 대한 자세가 더 좋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확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점점 우리는 이러한 죽음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거죠. 문명이 발달할 수록 이것이 더하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문명이라고 하는 것,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문명이기, 이런 것들은 인간의 영생불사 비슷한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 자신을 착각하게 만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든 것들이 화려하기 때문에 여기서 어떻게 죽음을 생각할 수 있겠어요. 차가 빨리 달리죠. 먹을 것도 웬만큼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에게는 늘 주어지죠. 요한계시록 기자가 거기에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을 묘사한 내용들을 지금 우리 현대인들은 다 누리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죽음은 이제 먼 이야기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우리는 죽음과는 관계없는 것처럼 죽는 순간에도 아무것도 모르고 죽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대개의 사람들은 살아있는 동안에 죽음의 운명에 눈길을 주지 않는다. 우리는 병과 죽음을 삭막한 병실 안에 숨겨둔다. 그렇죠. 우리는 병실과 상관없이 사니까요. 그리고 죽는 자들에게도 인간 죽음의 어두운 심연이 고통과 의식의 혼미로 인해서 거의 숨겨져 있다. 암에 걸려서 힘들어 하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단절이라고 하는 문제, 이런 것들을 의식하지 못하는 거죠. 인간에게 임하는 죽음의 이러한 어두운 심연은 죽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제외되는 것으로서 경험되는 바로 그곳에서 의식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다만 하나님의 도래를 어떻게 알고 있는가라는 기준에 해당되는 문제이다. 하나님이 도래한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는 중에 그에 의해 제외된다는 사실을 고대 교의학은 지옥의 고통이라고 생각했다. 새로운 사실을 우리가 배웠군요. 지옥의 고통, 지옥 이런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하나님, 하나님의 통치가 임박했다고 하는 것을 사실을 확실하게 알고 있는데 바로 그 하나님으로부터 유기된다 제외된다고 하는 사실, 그게 지옥의 고통이었다고 하는 거죠. 고대 교회의 이러한 생각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리고 리얼하죠? 이렇게 좀 비유적으로 설명을 해도 될까요. 결혼을 앞둔 처녀가 있다고 합시다. 날을 손꼽아 기다려요. 금방 날짜가 와서 결혼하게 될 텐데 바로 직전에 새신랑으로부터 파혼 통지를 받았다고 해 보세요. 지옥에 떨어지는 것과 같은 경험이죠. 제가 더 설명하지 않아도 무슨 뜻인지 전달이 되었죠. 책의 역주로 달아 놓은게 게데스덴노트라는 독일언데요. 고 설명은 제가 생략하겠습니다.

*양심적 불안(Gewissensnot)이라고 해서 예수가 양심적으로 가책을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근본적으로 옳고 그른지에 대해서 혼란스럽게, 혹은 두렵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는 하나님의 임박에 기초해서 행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의 율법에 의해서 처형당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곧 하나님으로부터 유기 당한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뒷부분에서도 양심(Gewissen)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 양심은 단순히 자신의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문제를 말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판단하는 인간의 의식을 뜻한다.

본문을 좀 더 따라가겠습니다. 지옥에 대한 표상은 세계 심판에 관한 많은 像들에 그려진 각각의 경우들 중에서 분명히 환상적이다. 지옥표상은 분명 환상적인거죠. 그걸 누가 증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까요. 여기서 지옥의 고통에 대한 상들을 언급할 가치가 있는가하는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게 틀림없다. 왜냐하면 결정적인 요인, 즉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일치에서 제외된다는 사실이 지옥 웅덩이라는 전통적 상들에서는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거 참 재미있는 표현이네요. 무슨 말인가요?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왜냐하면 결정적인 요인, 즉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일치에서 제외된다는 사실, 이게 지옥경험인데요. 이러한 사실이 지옥 웅덩이라는 전통적 상들에서는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조금 제가 읽으면서 생각을 다르게 했거든요. 아무래도 다시 패러그래프 시작되는 부분부터 읽어봐야 되겠습니다.

지옥에 대한 표상은 세계 심판에 관한 많은 像들에 그려진 각각의 경우들 중에서 분명히 환상적이다. 여기서 지옥의 고통에 대한 상들을 언급할 가치가 있는가라는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결정적인 요인, 즉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일치에서 제외된다는 사실이 지옥 웅덩이라는 전통적 상들에서는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뒤로 조금 더 나아간 다음에 설명하겠어요. 지옥 표상의 이러한 특징은 신학이 무엇을 고수했는가라는 점에서, 혹은 전율에 관한 무성한 환상에서 무엇을 해방시켜야했는가라는 점에서 유일무이하다. 복잡한 이야기가 지금 전개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일치에서 제외된다고 하는 사실이 어떤 지옥에 대한 전통, 상인지 그림들에서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것들은 이야기할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예요. 아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조금 더 따라가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임박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의 임박에서 제외되었다는 것, 바로 이것이 사실상 지옥일지 모른다. 앞에서 한 이야기를 조금 부연해서 설명한 거죠. 그러니까 지옥이 뭐냐 이러한 세세한, 구체적인 그러한 것들은 지옥문제에서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임박, 하나님의 가까이 오심, 여기에서 제외되었다고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지옥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마틴 루터가 한 이말, 예수님이 지옥에 계시다면 나는 지옥을 택하겠다는 이 말은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지옥은 얼마나 고통스러우냐 아니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제외 되었느냐 아니냐 그 차원에서 봐야 하는 거죠. 지옥은 무조건 무서운 곳, 구더기가 끓는 곳, 계속 목마른 곳 이런 방식으로만 생각을 한다면 이거는 원래 성서가 이야기하려고 하는 지옥표상으로부터 한참이나 멀어지는 거죠. 임박한 하나님으로부터 제외되었다고 하는 그 인식이 바로, 인식에 의한 고통이 바로 지옥이다라고 하는거죠.

여기서 지옥의 '장소'에 대한 질문은 일종의 부적절한, 그리고 우리에게 낡아빠진 사고방식이다. 오늘의 자연경험에 근거한 세계의 시-공간적 좌표에서 하늘이나 지옥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는 물론 양심의 경험에 대한 회화적 묘사만이 문제는 아니다. 하나님의 임박에 대한 기대에 가득 차 있는 사람이 그로부터 제외되었다고 하는 사실로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어요. 우리가 받는 그런 양심적 고통, 그런 것들이 있는데 그런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는 거죠. 루터가 십자가에 달린 자의 양심적 불안을, 양심적 불안이라고 할때 아까 제가 역주를 달은 것 같지만 설명을 하지 않았다는 것과 연관되는 건데요. 도덕적으로 잘못해서 양심적으로 불안하다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임박한 하나님 나라로부터 제외된다고 하는 사실앞에서 받는 그러한 충격을 의미하는 거죠. 루터가 십자가에 달린 자의 양심적 불안을 그의 지옥행에 대한 전승과 연결시켰다고 해서 이것이 우리의 현재적 삶에서 이루어지는 양심 경험이 지옥표상에 상응하는 유일한 실재일지 모른다는 것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대개의 사람들은 예수에게 특징적으로 드러난 하나님의 임박에 대한 각기의 경험에서 살아가지 않기 때문에 지옥에 대한 경험도 역시 그들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놀라운 지적입니다. 정확한 통찰이죠. 그러니까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임박을 별로 절실하게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기 때문에 지옥에 대한 고통도 사실 없는 거예요. 그것으로부터 제외된다고 하는 사실이 정말 참된 고통인데요. 그런 게 없죠. 기껏 해봐야 사람들의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신화적이죠. 환상적이죠. 끓는 물에 계속 들어가 있다거나 꺼지지 않는 불길 속에 들어가 있다거나 그런 방식으로 지옥 표상을 생각하는 그러한 두려움, 이런 것은 정말 환상적인 유치한 그림이거든요. 그러니까 실질적으로 성서가 말하고 있는 지옥의 고통을 잘 생각하지 않고 사는 거죠. 하나님 앞에서 영적으로 날카로운 영성을 갖고 있지 않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으로부터의 제외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사실은 모르는 거예요.

이런 종류의 양심적 불안이라고 하는 말이 우리 일상에서 조금 통할 수 있기는 합니다. 정의로움에 대한 투명한 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서 큰 고통을 받거든요. 구약의 예언자들이 다 그렇게 살았습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어쩔 수 없다 이런 식으로 자기 안일만을 생각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사회가 부도덕해진다고 해도 별로 상심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어요. 그러나 예언자들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인간의 역사와 삶에 대해서 생각하기 때문에 사회적 불의, 타락, 특별히 귀족들과 왕권들과 사회적 상류층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저질러지는 반사회적 비인간적 행위들에 대해서 크게 분노하고 마음 아파했죠. 하나님에 대한 기다림과 지옥경험이 이것하고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그 문장을 읽겠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그 이유는 지옥에 대한 경험이라는 것도 하나님의 임박에 대한 인식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예수에게 특징적으로 드러난 하나님의 임박에 대한 각각의 경험에서 살아가지 않기 때문에 지옥에 대한 경험도 역시 그들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그 이유는 지옥에 대한 경험이라는 것도 하나님 임박에 대한 인식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오늘 좋은 거를, 정말 중요한 것을 배웠습니다. 지옥 경험도 하나님인식을 전제한다. 이 경험을 단순히 무시해버림으로써 피해갈 수 없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또 하나의 개념은 죽은 자들에 대한 심판이다. 지옥과 심판, 심판문제는 뒷부분에서 한참 뒤에 나오게 되겠습니다. 이 문제는 뒤에서 다시 언급하게 될 것이다.

예수가 육체적으로 죽임을 당했을 때 자신의 양심(Gewissen)에서 지옥의 현실성을 경험했다는 것은 예수의 운명이 지닌 특별한 부분에 속한다. 4세기 때 지옥행이 사도신경에 추가 되었는데 그게 무슨 의미냐 지금 설명하고 있는 중입니다. 예수님이 유대인으로부터 죽임을 당했을 때, 이거는 정확한 역사적 사실이었어요. 고거는 겉으로 드러난 거라서 누구에게나 보이는 건데 그게 기독교가 몇 세기 흘러가면서 그 신학적 의미들을 풀어낸 겁니다. 그것을 설명하는 중이예요. 그분이 육체적으로 죽임을 당했을 때 양심에서, 자신의 양심에서, 양심이 독일어로 게리스텐하이트, 독일어는 비센이라고 하는 동사에서 나온 거거든요. 영어로는 Know 안다는 거예요. 비센, 이는 앞에 게리, 진리 완료형 비슷하게 단어가 바뀐 것 같아요. 비센 과거는 ?? 과거완료는 게비센 알게 되는 것, 알게 되는 것, 앎은 당하는 것 그런 억지로 번역하면 그렇습니다. 양심은 하여튼 뭔가를 아는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그것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 옳은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 그런데서 부터 시작되는거거든요. 모르면 양심이라고는 것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신생아들에게는 양심이라는 것은 의미가 없는거죠. 하나님의 임박을 너무나도 명확하고 강렬하게 알고 있었는데 거기서로부터 제외되어서 죽었다하는 사실. 이게 지옥행의 문제인데요. 결국 요 문장에서 판넨베르그는 이렇게 설명을 한 거죠.

그 문장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가 육체적으로 죽임을 당했을 때 자신의 양심(Gewissen)에서 지옥의 현실성을 경험했다는 것은 예수의 운명이 지닌 특별한 부분에 속한다. 양심, 즉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인간의 의식과 지옥경험의 상관성은 인간경험에서 모두 같은 방식으로 등장하는 현상은 아니다. 당연히 그렇죠. 그걸 정확하게 정말 하나님과 하나님나라를 인식하는 사람에게만 바르게 경험되는 거죠. 이 상관성은 인간의 일상적 경험에서 곧바로 드러나지 않고, 오히려 예수 죽음에 담긴 특별한 경험의 상황을 성격화한다. 성격지운다.

지옥에 내려가시고를 제가 두 번에 나눠서 설명을 하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려고 그래요. 책으로 세 쪽 밖에 되지 않는데 조금 짧게 했습니다. 이게 조금 낯설기도 하구요. 새로운 내용들이 나오기도 해서 진도를 천천히 나간 거예요. 어떻습니까? 재밌죠.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거의 생각하지 않았던 그러한 내용이에요. 이게 우리들에게 중요합니다. 중요한 건데 우리가 별로 생각하지 않는 거죠. 판넨베르그를 통해서 우리가 좋은 공부를 했습니다. 두 가지로 좀 정리를 할께요.

한 가지는 판넨베르그가 쓰고 있는 문장을 그대로 읽어도 되겠군요. 지옥의 고통이 무어냐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이것은 그냥 육체적으로 고통을 많이 당하는, 환상적인 그러한 벌을 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곧 임박한다고 하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그것에서 제외된다고 하는 사실 앞에서 겪는 아픔이죠. 하나님으로부터의 유기, 이거죠.

두 번째는 이 지옥에 대한 경험은 바로 하나님의 임박에 대한 인식 이거를 전제로 한다. 따지고 보면 두 개가 아니라 결국은 하나네요. 그래도 조금 구분해서 생각해 보려고 한 겁니다.

첫 번째로 드린 말씀은 지옥에 대한 표상 환상으로 떨어뜨리지 말자는 이야기구요. 두 번째는 지옥의 경험이라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임박했다고 하는 사실, 이것에 대한 인식을 전제한다. 고맙습니다. 여기서 오늘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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