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넨베르크 사도신경 해설 33강 - 제8장 지옥에 내려가시고(2)

안녕하세요? 오늘 33강입니다. 지난에 이어서 지옥에 내려가시고 라는 남은 단락이 오늘 계속 되겠습니다. 이 단락을 두 번에 나눠서 하게 되겠어요. 지난주에 보았던 부분은 예수님의 지옥행에 담긴 수난 그런 내용이었어요. 예수님의 죽음이 잠시 기절했다가 다시 깨어난다거나 하는 그러한 정도가 아니라 물론 그건 당연히 아닌 건데요. 그거는 처절했다고 하는 사실이 지옥행에 담겨있는 하나의 의미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구약 유대인들의 죽음에 대한 이해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그 것과는 좀 반대되는 이야기예요. 수난, 절망, 완전한 죽음과 대립되는 의미에서 승리의 차원이 언급될 겁니다. 무슨 말인지 전달이 되었죠? 앞에 있는 이야기는 명실상부한 완전한 파멸로서의 그러한 죽음을 지옥행 표상에 담고 있다고 한다면 후자는 반대로 승리다. 왜 그런 승리냐? 그게 중요한데요. 그리고 이것이 시대적으로 종교다원적인 우리나라 같은 상황에서는 더 소중한, 신학적으로 더 깊이 파악해야 될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리 이 이야기의 결론을 귀띔해 드린다면 이런 거죠. 예수가 오기 전에, 혹은 예수의 복음이 선포되지 않은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마저 구원의 가능성이 열려있다고 하는 사실인 겁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 복음이 들어온 지, 개신교로 말하자면 백2,3십년, 가톨릭 하더라도 2백 몇 십 년 정도인데 그 이전에 수많은 사람들이 살다죽고 살다 죽고 그래왔었죠. 우리의 조상들을 이야기합니다. 한반도 주변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 말이죠. 그런 사람들의 운명을 우리는 관심 없이 내버려두고 있잖아요. 그런데 예수의 지옥행이라는 신학적 관점으로 이런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다고 하는 거죠. 여기서 여러분들은 조금 불편하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기독교 교리가 진리냐 아니냐? 그렇게 확정되어 있는 그런 것들로 봐야지. 어떤 것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보면 이게 좀 문제가 아니냐 하는 그러한 겁니다. 이런 말이죠. 예수님의 지옥행이 실지로 있었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 중요하지 그것을 통해서 예수님의 복음이 전파되기 전 사람들에게도 구원의 가능성이 열린다고 하는 그러한 이야기를 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도대체 기독교 교리의 확실성이 보장될 수 있느냐 하는 그러한 질문입니다. 이런 것들은 사도신경공부와 전체와 연관되기도 하구요. 그 말고도 기독교 신앙 전체에 해당되는 겁니다.

이러한 부분들을 제가 사도신경 공부하면서 틈틈이 말했을 거라고 보는데요. 몇 번 들었다고 하더라도 그게 확 잡히지는 않습니다. 이 공부라고 하는 것이요. 다른 물리학이나 실증적 과학과는 달리, 신학이나 인문학 공부라는 것이요. 그렇게 약간 애매성이 있어요. 이게 어떻게 설명을 해야 될까요? 하여튼 뭐 지나가겠습니다. 나중에 조금 더 적당한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 생각이 떠오르면 말씀드릴게요. 지금 이 문제를 제가 설명할 생각을 하지 않고 강의를 시작했기 때문에 두서없이 왔다 갔다 하면 오히려 강의 진행에 지장이 있을 것 같으니까 그런 정도로 접어두도록 하겠습니다. 신학공부, 인문학 공부가 실증적 공부와는 달리 애매성이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래도 조금 이야기하고 지나갈까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사실은 실증적 학문도 마찬가지이기는 합니다. 이게 수학이나 물리학처럼 계산해서 떨어지는 값을 제공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완벽한 대답은 아니라고 하는 거죠. 그게 어느 대답을 향해서 가는 과정인거예요. 어떤 위대한 물리학자가 나왔다고 해서 물리의 세계가 온전히 다 밝혀지는 게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이전에 있었던 물리학에 근거해서 조금 한발짝 더 나가서 어떤 사실들을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지 우주 전체가 연관된, 우주까지 갈 필요도 없고, 이 태양계에 얽힌, 태양계까지 나갈 필요도 없죠. 이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물리적 현상들을 완벽하게 해명할 수는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물리적 몇 가지 이론들을 정보의 차원에서 아는 것으로서 물리학의 세계에 들어갔다고 말할 수는 없는 거죠. 물리의 세계는 더 미래의 세계고 더 보편적이고 그런 점에서 실증적, 확증성하고는 구별되는 어떤 세계하고 연관된다는 겁니다.

물리학도 그런데요. 신학이나 인문학은 오죽 크겠습니까? 그러니까 많은 평신도들이나 신학초보학생들이 신학의 세계에 들어와서 겪게 되는 큰 어려움이 바로 그거예요. 이미 그들에게는 그 하나님에 대한 상,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것, 교회, 구원 이런 것들이 정리되어 있어갖고 그것을 근거로 해서 신학적인 책들을 읽으려고 하니까 그게 맞지가 않는 겁니다 .신학자들이 쓴 책들, 신학 대가들이 쓴 책들은 전반적인 신학의 맥락들을 뚫고 들어가면서 이야기를 하고 있거든요. 그런 것에 대한 이해가 없이 일반 교회가 말하고 있는 몇몇 하나님에 대한 정보를 그냥 완료된 대답으로 알고 있는 그러한 학생들에게는 이러한 신학 책들이 따라가기 힘들다는 거죠. 그런 점에서 애매하다고 하는 겁니다. 정확한 표현이 되는 건가요? 애매성이라는 표현이 요 맥락에서 필요한 거가요? 맞는 건가요? 저는 이런 뜻으로 드린 겁니다. 그러니까 앞뒤가 딱 들어맞는 대답을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고 하는 거죠. 종말에 주어질 그러한 대답을 향해서 우리가 길을 가고 있다고 하는 것, 거기서 길을 잃을 수도 잇고 스스로 길을 간다는 사실도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하는 겁니다.

이 지옥행이라는 것도 처음부터 딱 주어져 있던 것이 아니라 몇 세기 지나면서 초기 기독교가 예수의 부활 사건들을 더 깊게 이해하는 과정에서 요청된, 거기서 나온 그들의 대답이라고 할 수 있는 거죠. 네. 설명이 좀 어렵군요. 충분하지는 않는 거 같은데 그래도 요런 정도로 정리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지옥행이라고 하는 문제가 우리 한국 사도신경에 없고 주로 우리들에게 별로 많이 언급되지 않는 것들이라서 상당히 낯설게 생각하실 분들이 있을 것 같아 조금 해명을 한 겁니다. 적당한 해명이 되는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지옥행이 두 가지 관점으로 여기서 설명되고 있는 거예요. 하나는 아까 말씀드린 대로 죽음의 파멸성, 그런 것들을 아주 적나라하게 우리들에게 알려주는 것이 바로 지옥행이다. 두 번째는 승리다. 오늘 우리들이 이야기할 것이 실제로는 더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네 이 책 125쪽 중간 파라그래프예요. 읽겠습니다.

신학사적 맥락에서 예수의 지옥행에 대한 해석이 지금까지 진술된 것과 확실히 구분되는 것이 하나 있는데, 지금까지 진술된 거라고 하는 것은 바로 앞의 첫 번째 진술이죠. 이제 그것을 설명해야겠다. 두 번째 것을 설명한다고 하는 거죠. 예수의 지옥행이 예수에게 고통이라기보다는 승리를 뜻한다는 해석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지옥행(行)은 승리행(行)으로서 그려진다. 이것은 기독교 예술의 역사에서 자주 제시되었다. 즉 지옥에서 악마를 제압하고,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이브를 지옥의 웅덩이에서 건져내신 부활의 그리스도로 말이다. 이런미술, 그림들이 많이 있었는가 보죠. 저는 많이 보지 못했는데요. 기독교 예술의 역사, 많이 나왔다고 하는 것을 보니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 그림들이 있었는가 보죠? 이와 비슷한 견해가 이미 신약성서에도 등장하고 있다. 무슨 견해요? 예수님이 지옥에서 악마를 제압하고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이브를 지옥의 구덩이에서 건져 낸다고 하는 부활의 그리스도라고 하는 견해죠. 여기서 예수가 죽은 자의 나라에 내려갔었다는 언급이 유일하게, 명백하게, 그리고 보다 밀접하게 언급되고 있다. 그 구절이 바로 베드로전서입니다. 베드로 3장 19절이하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어요. "옥에 있는 영들에게도 가셔서 선포하셨습니다. 그 영들은, 옛적에 노아가 방주를 짓고 있는 동안에, 곧 하나님께서 아직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하지 않던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유대 문헌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 언급된 '영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불순종하는 사람들의 '영혼'을 가리킨다는 사실이 같은 편지의 후반부 구절에서 암시된다. 베드로전서 4장6절에서 이르기를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다"고 한다. 베드로 전서에 두 군데나 비슷한 구절들이 있군요. 하나는 3:19절 다른 하나는 4장 6절예요.

예수를 통한 지하세계의 복음 선포는 개종설교를 의미한다. 지하세계는 지옥이죠. 게헨나, 죽은 사람들이 가야될 곳. 예수님의 지옥행이 말하는 그 세계입니다. 여기서 복음을 선포했다고 하는 것은 개종설교를 의미한다고 하네요. 이거는 가톨릭이 이야기하는 연옥하고는 다른 차원이라고 하는 거죠. 연옥은 믿기는 하나 온전하게 믿지 못해서 잠시 훈련을 받는 곳이라고 한다면 지옥은 전혀 구원과 거리가 먼 사람들이 가야될 곳입니다. 거기는 훈련이나 연단이 아니라 실질적인 개종을 말한다. 이것은 이미 죽은 자들도 역시 기독교 복음을 듣는다는 것을 뜻한다. 죽어도, 예수 믿지 않고 죽어도, 거기서도 복음을 들을 수 있다고 하는 거죠. 담대한 대단한 선포예요. 어떻게 보면 기독교의 중심 신앙과도 조금 차이가 있을 수는 있어요. 죽음으로 지옥과 천당, 알곡과 쭉정이 이런 것들이 판가름 나는 걸로 우리가 알고 있지요. 그런데 여기는 쭉정이 같은 이들도 결국은 구원을 받을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육체로 살았을 때 예수나 기독교 복음을 만나지 못하고 죽어 지하세계에 가 있는 이들에게도 임박한 심판 앞에서 예수를 통한 구원이 열린다. 참 베드로전서의 이러한 고백이 놀랍죠. 그것과 연관된 사도신경이 있는 지옥행, 참 놀라운 선포들이예요. 예수와 관계없이 죽은 사람들에게도 구원의 가능성이 열린다는 거죠. 그러한 것이 원래 있었는데 기독교 주석학자들은 이미 고대 교회시대에서 주장되었던 이러한 대담무쌍한 사상을 약화시켰다. 그런 것에 대한 관점을 놓쳤다 그런 거겠죠. 그들은 거듭해서, 어떤 사람들이죠. 기독교 주석학자들이죠. 그들이 이제 고대 교회로부터 주장된 이러한 대담무쌍한, 믿지 않고 죽은 사람들에게도 복음이 선포된다고 하는 그거를 약화시켰어요. 그들이 어떻게 약화시켰느냐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거듭해서 이르기를 하데스에서의 예수 설교는, 하데스는 여기 지옥을 말합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의로운 자들만을 향했거나, 아니면 일단 육체적으로 살 때 이미 의로운 자들로 판명된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했다는 것이다. 그렇죠. 기독교 주석학자들이 이런 쪽으로 원래의 대담한 그러한 사상들을 약화시킨 거예요. 기독교 주석학자들이 말하는 이러한 내용들은 연옥의 강화, 조금 아까 제가 가톨릭의 가르침중의 하나인 연옥이라고 이야기 했는데 그런 것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판넨베르크는 그렇게 보지 않는 거죠. 그러나 베드로전서는 예수가 회심설교를 행했다는 점에서 이런 주장들을 뛰어넘는다 하겠다. 회심은 믿지 않던 사람들이 믿게 되는 거죠. 믿는 사람들이 조금 부족해서 다시 훈련받는 것하고는 전혀 다른 거거든요. 일종의 우주적 구원이해에 대한 이러한 경향은 그리스도가 아담을, 즉 인간을 지하세계로부터 해방시켰다는 사상을 완전하게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오리겐에서도 발견되며, 기독교 예술품에서 보는 대로 그리스도의 지옥행에 대한 표현에서도 거의 전제되어있다. 우주적 구원이라고 하는 거예요. 참 이 기독교의 출발이 대담했습니다. 거시적이었죠. 예수 믿는 사람들만 딱 모아서 천당을 만든다. 그런 사람들만 쏙 뽑아서 좋은 곳으로 보낸다. 편협한 사상이죠. 그렇지만 또 이것이 완전히 틀리다고 말할 수 없는 거죠. 케리그마 신앙에 근거하면 예수이름이외에는 다른 이름, 믿고 구원받을 자를 주지 않았다는 그러한 표현들이요. 예수가 유일한 메시아라고 하는 사실에 근거하면 예수 믿는 사람들만 구원받는다고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 교부들은 그걸로 끝내지 않고 이 예수님의 구원사건이 믿는 사람들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주론적으로 확대되는 차원으로 받아들인 거예요. 요 대목에서, 앞에서 제가 이야기한 신학공부의 애매성이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의 구원사건이 예수 믿는 사람들에만 해당되면 해당되는 거지. 아니면 아니고 기면 기고 하는 거지 이렇게 교부들의 사상에 의해서 이렇게 될 수도 있고 저렇게 될 수도 있다고 하는거냐 하는 그러한 질문이라는 겁니다. 만약에 이 교부들이 지옥행에 대한 사상, 생각이 없었다면 그러한 우주적 구원의 차원은 없는 게 아니냐? 그렇다면 기독교의 구원의 문제가 교부들, 신학자들이 어떻게 생각했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게 아니냐 하는거예요. 고게 좀 애매한 겁니다. 긴장감이 있는 겁니다. 교부들이 무조건 그렇게 생각했다고 해서 기독교 교리로 잡은 것이 아니예요. 많은 교부들이 한 이야기들은 이단으로 정죄되기도 했습니다.

아리우스와 아다니우스의 논쟁같은 것에서 우리가 볼 수 있듯이 아리우스도 상당히 영향력이 큰 신학자였거든요. 그가 이야기한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과 하나님의 본질이 이질이라고 하는 게 그게 나쁜 뜻으로 한 게 아닌 거거든요. 다시 우리가 삼위일체론으로 너무 깊이 들어가지 말고요.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이 하나님과 다르다고 그러한 사실은 하나님의 절대성을 강조하기 위한 차원에서 나온 것이지. 예수 그리스도를 상대화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거든요. 어쨌든 좋은, 나름대로 타당하다고 생각되는 주장을 한건데 결국은 이질론이 거부되고 호모우시오스(homoousios),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과 하나님의 본질이 동일하다. 동질론이 신학 교부들에 의해서 기독교의 전통으로 신학으로 자리를 잡게 된 거였거든요. 아 그런 것들을 보면 아 결국은 기독교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이 신학자들의 싸운 결과에 불과하냐 그런 질문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두고 두고들 생각을 해 보시죠. 기독교 교리 만이 아니라 성서 자체가 그런 과정을 통해서 기록된 거예요. 이런 것들 모두가 인간의 인식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냐 그렇게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인식이 물론 여기서 중요하게 작용하지만 더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계시가 있다고 말하거든요. 계시론적인 인식론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고게 긴장이 있는 거죠. 하나님의 계시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그것을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면 그것은 또 묻히게 되고 나중에 드러날 수 있구요. 우리가 올바로 인식해야 하는데 과연 인간이 어떻게 올바르게 인식하냐 이런 것에서도 서로 입장의 차이를 보일 수가 있을 수 있어요. 성령에 근거한 인식론이 기독교의 기초인데요. 네 고런 정도까지 하죠.

다음 패러그래프 보겠습니다. 예수의 지옥행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어떤 해석이요? 우주론적 구원이해라고 하는거죠. 지옥에 까지 가서 사람들을 구원한다고 하는 사실에 근거하면 구원은 일부에만 해당된다는 것이 아니라 우주 전체에 해당되는 거거든요. 이러한 해석을 예수 수난의 진술로 이해한 첫 번째 사람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그것이 지옥행의 두 가지 관점이었어요. 하나는 예수 수난, 정말 이거는 철저한 죽음, 예수가 당한 철저한 수난이라고 하는 차원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었고 다른 한쪽은 승리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주적 구원의 승리라는 이러한 해석을 수난의 진술로 이해한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받아들여 졌을까 이런 질문을 판넨베르크가 제시하고 있어요.

양측의 표상*은 예수님의 지옥행에 대한 두 가지 표상이 있었다고 하는 것을 제가 아까 누누이 말씀드린 거구요. 그걸 제가 역주에 달았습니다. 여러분들이 보시기 바라니다. 읽어 볼까요? 별표시 있는 부분입니다.

*이것은 예수의 지옥행에 대한 두 가지 표상을 가리킨다. 하나는 예수를 승리자로 그리고, 다른 하나는 수난자로 그린다. 판넨베르크는 이 두 전승이 배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예수 죽음에 대한 해석 안에서 연관된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다. 예수의 지옥행은 성서에 근거한 보편적 개념이 아니라, 5세기 초의 아크빌레이아 신조에 등장하는 구절에서 유래한 개념이다. 앞서 판넨베르크는 4세기의 신앙고백에 그 암시가 들어있다고 지적했다. 요거는 교회에서 학자들에 따라서 연도 세기가 약간 차이가 나는데요. 어쨌든 이 개념은 세계구원을 선포하는 기독교가 그 구원의 보편성을 확대시킬 수 있는 신학적 의미를 담보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의 기독교인들이 불편하게 생각할 거리낌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판넨베르크는 주장한다. 우리말 사도신경에는 예수의 지옥행에 대한 구절이 생략되어 있다.

양측에 의해서 승리자, 수난자, 서로 배타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들은 일종의 상호적 관계를 갖는다. 양자는 예수 죽음에 대한 두 가지 상호적 해석이다. 그 안에서 양자가 연관되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유기된 그의 죽음을 통해서 정말 수난이고 철저한 죽음이예요. 예수는 그와 연결되어 있는 모든 이들을 위해서 죽음이 의미하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유기를 견뎌냈기 때문이다. 예수 죽음의 대리적 의미는 죽음을 극복했다는 표상으로 표현된다. 대리적의미라고 하는 것은 모든 이들을 대신해서 죽음을 의미하는 하나님의 유기, 버리심을 견뎌냈다고 하는 것이죠. 이러한 두 가지가 서로 연결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수난과 승리가 결국은 연결된다. 예수 죽음의 해석이라는 차원에서요. 죽음을 받아들이지만 결국은 죽음을 극복한 것이니까 승리죠. 이러한 승리의 의미는 예수의 십자가를 부활의 빛에서만 유지하게 했으며, 그렇죠. 부활의 빛이 없으면 정말 죽음, 명실상부한 죽음으로 끝나서 수난의 의미만 있을 테니까요.

그래서 기독교는 예수의 십자가를 승리의 불빛, 즉 부활에서만 유지하게 했으며 또한 십자가의 의미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옥행을 부활한 자의 몫으로 돌린다는 것은 함축적이었다. 십자가에 달린 자, 혹은 특히 부활한 자가 지옥에 갔는지 아닌지에 대한 양자택일의 문제는 오늘날 이러한 상(像)들을 사물적인 것으로 판단하려는 극단적인 생각에 빠져들고 말았다. 아 요거는 번역이 좀 너무 직역이 되어서 잘 전달이 안 되는 군요. 고거는 또 종교개혁시대의 논쟁을 알아야 되기 때문에 조금 까다롭습니다. 교리사적의 이 문제는 구 개혁주의 교의학, 요거는 칼빈신학이죠. 과 구 루터교 교의학 사이에서 전개된 첨예한 논쟁점이기도 하다. 논쟁점이 뭔지는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연구 조사를 해서 말씀드렸으면 좋겠는데 모르겠네요. 잊어버리지 않으면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전체 문맥에서 보면 그렇게 어려운 문제는 아니에요. 고렇게 하고요. 넘어가겠습니다.

원시 기독교가 회심설교로 행한 선교설교의 像에서 지옥에 대한 예수의 승리를 묘사하고 있는 베드로전서의 사상은 예수의 십자가에서 발생한 대리의 우주적 영향력을, 그리고 이로써 중재된 구원의 보편성을 주장하고 있다. 이런 것들이 지옥행의 승리자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죠.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자주 제기되었다. 구원의 보편성을 지옥행의 승리상이 확보하고 있는데 여기서 다음과 같은 질문들과 이러한 주장들이 연결된다고 하는 거죠. 읽어보겠습니다. 우선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언제 계시되었는지, 예수 안에서만 실행될 수 있는 구원이 인간에게 언제 드러났는지. 그렇다면 예수 등장 이전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지, 그리고 기독교 복음을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지?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기는 들었지만 복음 선포를 책임진 기독교인의 잘못으로 인해서 그 진리를 경험해보지 못한 이들은 어떻게 되는가? 이 모든 사람들은 완전한 멸망에 빠지고 마는가? 그들은 예수를 통해 인류에게 열려진 하나님의 임박 앞에서 영원히 제외되고 마는가? 이러한 질문들이 실질적인 교회 안에서 제기될 수 있는 문제들입니다. 앞에서 고교회 개혁교회와 루터교회 사이에 논의된 논쟁점이 바로 이러한 것하고 연관되는 것 같습니다. 칼빈은 이중예정을 이야기하잖아요. 이중예정, 구원받을 자와 멸망 받을 자가 완벽하게 이중적으로 예정되어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지옥 갈 사람이 이미 결정되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데서는 구원의 우주적 지평은 조금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가 되는 거죠. 이 것에 반해서 루터는 그런 것을 여는 거죠. 그런 구원의 보편성이 가능한 거죠. 네. 이러한 질문들은 지금도 교회현장에서 자주 거론될 만한 그러한 일들입니다. 목회적인 차원에서도 질문이 가능한 거구요.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믿지 않고 돌아가셨는데 그의 운명은 어떻게 되느냐? 이런 질문들도 많이 있잖아요. 네 계속 읽어보겠습니다.

이 절박한 질문들에 대해서 기독교 신앙은 답변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질문들은 신앙고백에서 언급된 그리스도의 지옥행에 대한 이 고백양식이 얼마나 중요한가라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 그 당시 기독교 공동체가 이 양식을 신앙고백에 포함시킴으로써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려고 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결국 이 양식, 형식이요. 이 양식은 신약성서의 근원과 더불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의미한다. 이게 핵심이군요. 밑줄 쳐야 되겠습니다. 읽겠습니다. 즉 인류를 위해 예수에게서 발생한 일은 예수와 또한 그에 관한 사신, 복음선포와 결코 접촉해본 적이 없는 인간들, 혹은 예수와 그의 역사의 진리성을 결코 한 번도 실제적으로 깨닫지 못한 인간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놀라운 선포죠. 구원의 가능성을 교회 밖으로까지 열어놓는 거죠. 예수 믿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것은 이 진술이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전제하고 읽으셔야 합니다. 다른 차원의 문제인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우주론적 차원들, 이걸 이야기하는 거죠. 그게 너무 엄청나기 때문에 지옥에 가 있는 사람들에게까지도 그러한 구원의 빛이 비친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건을 본거예요. 얼마나 놀랍습니까? 요런 점에서는 바로 앞서 이야기한 대로 칼빈의 이중예정론은 조금 한계가 있다고 볼 수 있겠죠. 물론 칼빈의 이중예정론이라고 하는 것이 기계적으로 이중의 방식으로 예정되어 있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것 보다는 하나님의 구원 은총의 우선성, 혹은 그것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지옥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영향력을 미친다고 하는 사실까지는 이루기 힘들거든요. 이러한 어떤 사람들은 참 받아들이기 힘든 관점이지만 이미 교부시대부터 자리하고 있었던 기독교의 구원의 우주적 차원을 담고 있다고 하는 점에서, 특별히 보편적 진리가 요구되는 20세기 기독교회가 감당해야 되는 선교적 사명, 혹은 선교적 실천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조금더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이러한 사람들의 생명은, 이 생명은 그들에게도 숨겨져 있는 것인데, 역시 예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와 연결될 수 있다. 멸망받은 사람들에게도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또 그들 스스로 모르는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와 연결될 수 있다. 따라서 이는 곧 예수가 그의 팔복 말씀에서 언급한 이들에게 해당되는 게 틀림없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란 팔복 말씀이요. 거기에 나와 있는 사람들은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복이 있다고 이야기하지는 않거든요. 뭐냐 주욱 이야기하고 있거든요. 이들은 예수와의 만남과 전혀 상관없이, 오직 그들이 처한 상황이나 상태 때문에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런 희망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다. 이 하나님의 임박과 그의 나라가 예수에 의해 선포되었다. 예수를 결코 알지 못하던 이들도 역시 그들이나 우리가 탐지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가 파악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렇게 보면 되겠죠. 우리의 인식을 뛰어 넘어서 인류와 인류역사를 통해서 예수와 그리고 하나님과 관계된다. 오늘 참 우리가 굉장히 중요하면서도 혁명적이고 기독교 신앙의 정통적인 구원의 우주적 보편성 이런 것들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것에 비해서 우리가 너무 지금 구원론을 배타적으로 이해하고 있잖아요. 하나님 구원의 배타성이라고 하는 점에서는 그걸 말한다면 좋은데 하나님의 배타성이라고 하는 것은 판넨베르크 글에서 읽은 대로 우리가 이렇게 탐구해서, 우리가 어떻게 연구해서 할 수 있는 방식을 뛰어넘는 그러한 하나님의 명실상부한 초월성을 이야기하는 거거든요. 지금 한국 교회에서 말하는 구원의 배타성은 교회안에만, 우리 보수주의자들만, 믿음이 정말 좋은 사람들만, 이런 식으로 그거를 생각한다 말입니다. 그것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인류와 인류 역사를 통해서 예수 그리고 하나님과 관계된다. 마치 햇빛이 착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에게나 고루 고루 비추듯이 하나님의 은총이 아무런 차별도 두지 않고 골고루 미치듯이요.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의 차이라고 하는 것은 햇살이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하는 사실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추기는 비춰, 그런데 그걸 아는 사람이 있고 모르는 사람들이 있어요. 복음도 그렇다고 볼수 있는 거죠. 우리는 하나님의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계시가 온 인류에게 골고루 미친다. 그 영향력을 확실하게 미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고 그런 점에서 볼 때 복음인거고 그 복음을 알고 있는 사람이고 그 이외의 사람들은 그것을 다만 모르고 있을 뿐이에요. 그러나 그 영향은 다 미친다는 거죠.

이 하나님은 바로 예수가 선포한 바로 그 분이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이 의미하는 바는 그들에게 구원 아니면 심판이 임한다고 하는 것이다. 왜 갑자기 심판이라고 하는 말이 나왔을까요? 우주론적인 구원에 대해서 죽 해가다가 지금 구원과 심판의 양자택일과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그것은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 그런 것에 따라서 구원이냐 심판이냐가 달라진다고 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정확한 뜻인지는 제가 확신할 수는 없어요. 조금더 나가보겠어요.

물론 그들이 구원받는다고 확실하게 보장할 수는 없다. 예 그렇군요. 예수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구원받는다고 확실하게 보장할 수 없다. 명시적으로 예수와 일치해 있는 이에게만 구원은 보증된다. 이거는 양보될 수 없는 기독교 신앙의 절대 명제이니까요. 예수님과 명시적으로 실질적으로 세례를 통해서 입으로 정정당당하게 고백하는 방식으로 일치한 이들에게만 구원은 보증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 일치에서 예수와 더불어 죽음을 극복한다는 희망이 보증되어 있다. 그러나 모든 나머지 사람들 역시, 그들이 심판을 받아야 될 사람들인데 그들에게도 역시, 예수 이전에 이미 죽은 이들 그러한 사람들에게도 역시 그에게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타난 구원에 참여할 수 있다. 분명히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구원 신앙의 이러한 보편주의에서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멸망 받아야 될 그 사람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계시가 임한다고 하는 이러한 이게 보편주의잖아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에게 임한 하나님의 그러한 죽음의 나라를 극복한다는 기독교의 신앙고백과 예수 그리스도의 지옥행에 대한 기독교적 신앙고백의 의미를 아는 이는 오늘날 사도신경의 이 항목이 그렇게도 많은 이들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가 되었다는 것을, 또한 이로 인해 이 항목이 그렇게도 자주 거부되었다는 사실을 유감스럽게 여길 수밖에 없다.

판넨베르크가 이렇게 8장을 끝내고 있습니다. 어떤 뜻인지는 전달이 되었다고 봅니다. 마지막 정리한 부분은 우리들에게는 이러한 반성이 근처, 그림자도 가지 못했어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배타성 이런 것들이 너무 문자적으로, 이기적으로, 종교 제국주의적인 방식으로 선포되고 있어서 이런 말을 입 벙끗하기도 힘들고요. 사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통치가 축소되고 있는 거죠. 여기서 여러분들이 오해는 하지 않을 거로 봅니다. 그렇게 죽음이후에도 구원의 가능성이 열려있다면 지금 우리가 굳이 힘들게 예수 믿을 필요가 있느냐 나중에도 얼마든지 되는 게 아니냐?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선교할 필요도 없지 않느냐 그런 질문 말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가 어떤 사실을 이야기하는지 잘 몰라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그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이 세상을 편리하게 살기 위해서 예수를 믿지 않은 것이 더 좋을걸! 이라고 하는 말을 할 수가 없는 거죠.

바이올린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전공을 하구요. 거기서 놀라운 예술적 감동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 이거 바이올린 몰라도 인생 행복할 수 있었을 텐데 괜히 배웠군. 그런 이야기하지 않겠죠.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값진 진주와 같아서 몰랐을 때는 뭐 어쩔 수 없겠지만 안 다음에는 이거 없어도 그냥 재미있게 살 수 있었을 텐데 그런 말을 할 수가 없는 거죠. 그런 말을 한다는 거는 진주, 값, 비싼 보석이 뭔지를 모르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네 오늘 우리는 지난주에 걸쳐서 두 번 지옥에 내려가시고를 보았습니다. 이게 두 가지 관점으로 초기 기독교 안에서 받아들여졌다는 거예요. 하나는 수난자로서의 예수, 하나님으로부터 유기되었다고 하는 철저한 절망, 죽음에 대한 경험이라고 한다면 다른 하나는 승리자인 예수의 모습이 그려진 겁니다. 그 승리는 궁극적인 승리죠. 지옥문을 부시고 거기에 있던 인류를 대표하는 아담과 이브를 구원해 낸다는 그러한 승리니까요. 네. 예수 그리스도는 편협하게 몇몇 자기를 따르는 사람만이 아니라 온 인류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임할 수 있는 그러한 유일한 구원의 담지자로서 지옥에 내려가셨다 이것이 바로 사도신경에 나온 예수님의 지옥행이 말하고 있는 핵심입니다. 이 문제를 더 깊이 생각해 보시죠. 고맙습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161 사도신경해설 45강 녹취록 - 제11장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4) file 2009-09-10 3985
160 사도신경해설 44강 녹취록 - 제11장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3) file [1] 2009-08-27 3899
159 사도신경해설 43강 녹취록 - 제11장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2) file 2009-08-07 7338
158 사도신경해설 42강 녹취록 - 제11장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1) file [2] 2009-08-03 5160
157 사도신경해설 41강 녹취록 - 제10장 심판(3) file [3] 2009-07-20 4749
156 사도신경해설 40강 녹취록 - 제10장 심판(2) file 2009-07-19 4884
155 사도신경해설 39강 녹취록 - 제10장 심판(1) file 2009-07-13 5111
154 사도신경해설 38강 녹취록 - 제9장 부활 (5) file 2009-07-01 5359
153 사도신경해설 37강 녹취록 - 제9장 부활 (4) file 2009-06-20 4793
152 사도신경해설 36강 녹취록 - 제9장 부활(3) file 2009-06-20 4726
151 사도신경해설 35강 녹취록 - 제9장 부활(2) file 2009-06-04 4860
150 신학과 철학 12장 신학과 철학의 미래 2009-05-25 4984
149 사도신경해설 34강 녹취록 - 제9장 부활 (1) file 2009-05-21 4019
148 신학과 철학 11장 인간학적 철학과 신학 2009-05-16 4170
» 사도신경해설 33강 녹취록 - 8장 지옥에 내려 가시고(2) file 2009-05-15 3751
146 사도신경해설 32강 녹취록- 8장 지옥에 내려가시고(1) file 2009-05-07 5110
145 사도신경해설 31강 녹취록 7장 본디오 빌라도에게..(3) [3] 2009-05-06 3847
144 기독교를 말한다 4장 세계교회의 역사 2009-05-05 4314
143 신학과 철학 10장 헤겔철학과 신학 2009-05-05 6217
142 사도신경해설 30강 녹취록 - 7장 본디오 빌라도에게..(2) file 2009-04-29 3631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