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인간학적 철학과 신학

신학과 철학 조회 수 4172 추천 수 0 2009.05.16 23:33:46

11장

인간학적 철학과 신학

 

 

헤겔 이후의 철학사적 특징

 

19세기 전반기를 독일의 관념론이 지배했다고 한다면 이제 19세기 후반기는 인간학이 지배했다고 보아야 한다. 이 말은 역사를 절대정신의 변증법적 발전으로서 이해하려는 헤겔의 근본 취지와는 달리 인간학이 역사의 중심 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판넨베르크는 이 현상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 바 있다.

 

인간학으로 방향을 전환하라는 호소는 특히 좌파 헤겔주의를 가리키는 일종의 암호였다. 그런데 이런 방향 전환은 이들을 뛰어넘어 헤겔 이후의 철학적 상황에서 일반적인 특징으로 나타났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상이한 철학적 흐름의 밑바닥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이나 절대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 자체가 세계와 인간사회를 이해하는 토대로 간주된 것이다. 여기서는 인간이 하나님을 의식하는 기점이 된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의 한 사유로 축소된다는 사실도 핵심으로 작용한다.(신학과 철학, 349)

 

어쩌면 이에 대한 책임을 헤겔에게만 돌릴 필요는 없을지 모른다. 이미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에 의해서 제시되고 증명된 지동설로 인해서 우주에 대한 인간학적 접근이 가능하다는 인식이 사람들에게 심겨졌을 뿐만 아니라 뉴턴에 의한 기계적 역학도 이에 한몫 했지만, 결정적으로는 다윈이 1859<종의 기원>에서 증명한 진화론은 이런 인간학적 토대를 고착화했다. 이 진화론은 교회에서 주장하던 하나님의 창조가 아니라 인간을 자연의 산물로 증명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프로이트(1856-1939)의 정신분석, 파블로프(1849-1936)의 조건반사 이론도 역시 인간 중심의 패러다임을 조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만약 생물학적 인간론이 완벽하게 논증될 수만 있다면 정통 교회의 가르침처럼 인간을 영적인 존재로 본다거나, 따라서 다른 동물과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존재로 보는 주장은 설자리를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19세기 후반은 이런 주장이 큰 힘을 발휘했으며, 따라서 신학은 힘 한번 써보지도 못하고 이런 인간학적이고 문화적인 접근에 기울어졌다. 이 시기의 신학적 특징을 가리켜 일반적으로 자유주의 신학, 또는 문화 개신교주의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참고적으로 오늘 한국 기독교가 매우 복음주의적 외형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인간학적 토대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이 현상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표면적으로는 19세기의 인간학에 기초한 자유주의 신학을 비판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이다. 이런 현상은 오늘의 목사들이 정통 신학보다는 상담학에 의존해서 목회를 끌어간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이 상담학이라는 게 인간의 행동발달이나 기계적 심리학에 근거를 두고 있는 학문이기 때문에 19세기의 인간학적 착상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오늘의 목회가 청중을 심리적으로 치유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결과라 할 수 있지만, 그게 결코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다. 왜 이런 결과가 나타나는 것일까? 그 이유가 기본적으로는 신학이 이 세상의 인간학적 논리에 대응할만한 학문적 토대를 확보하지 못했다는 데에 있지만, 다른 한 측면으로 본다면 교회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해명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그 전달 방법론에 치우쳤다는 데에 있다.

 

바로 위에서 19세기 후반기의 서양의 역사가 인간 중심으로 방향을 잡게 된 책임을 헤겔에게 돌릴 필요가 없다고 말했지만, 상당한 부분에서는 그에게 책임이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그의 변증법적 역사관은 여전히 계몽주의의 낙관론적 역사관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의 역사가 이상향을 향해서 진보하고 있다면 여기서 인간에 대한 낙관론도 강조될 수밖에 없다. 헤겔이 거기까지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역사와 인간에 대해서 낙관적 견해를 갖는다면, 즉 역사 필연성에 떨어진다면 하나님이 개입할 여지는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다. 여기에 바로 헤겔의 낙관적 역사관과 기독교 종말론적 역사관 사이에 차이가 있다. 물론 헤겔의 역사이해가 인간에 의해서 진보된다기보다는 절대정신의 변증법적 발전이며 동시에 그것의 계시 사건이라고 보겠지만 변증법이 아무리 정립과 반립의 지양을 통한 또 하나의 새로운 정립이 세워진다 하더라도 결국은 뉴턴의 기계적 역학과 마찬가지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역사 개입은 축소되기 마련이다. 어쨌든지 헤겔이 기독교 신학의 자리를 확보한다는 생각에서 절대정신의 변증법적 역사관을 피력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하나님보다는 인간의 자리만 확대되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헤겔이야말로 철학의 토대를 인간학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두려고 했던 마지막 철학자였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여러 가지 이유에 의해서 헤겔 이후에 본격적으로 인간학적인 착상이 백가쟁명 식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판넨베르크의 설명에 의하면 이런 착상의 구체화는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흐에 의해서 처음으로 시도되었다고 한다.

 

인간학을 향한 방향 전환은 헤겔에 대한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흐의 비판적 반작용으로 발생했는데, 이것은 19세기 중엽에는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17세기에 인간본성을 사회의 토대로 생각함으로써, 그리고 철학에서는 어느 정도 데카르트를 통해서, 또한 로크에게서 연유한 경험주의 전통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거명한다면 칸트와 초기 피히테를 통해서 준비되었다. 그러나 헤겔의 사상적 체계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러한 인간을 향한 방향 전환은 새롭게 과격성을 띠게 되었다. 로크나 칸트, 혹은 피히테도 역시 하나님을 퇴위시키고 그 자리에 인간을 올려놓으려는 의도를 갖고 있지 않았다. 이 일이 칸트의 이론 철학에서 실제로 발생했다면 이런 결과는 그의 사유를 견인하는 의도와 신학적 동기에 위배되는 것이다. 이제 헤겔의 입장과 달리 하나님을 인간으로 대체해버리려는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 포이에르바흐, 슈티르너, 마르크스, 니체 같은 이들에게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351).

우리는 이제 다른 철학자들은 접어두고 허무주의적 실존주의자라 일컬어지는 니체를 핵심적으로 다루려고 한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판넨베르크가 말했듯이 니체는 헤겔 이후 반()기독교적이고 무신론적 경향을 보인 철학사에서 가장 심층적이고 수미일관된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 하나의 이유이다. 기독교의 입장에서 볼 때 니체만큼 기독교의 근본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할 뿐만 아니라 뿌리 채 흔들었던 철학자가 별로 많지 않다. “신은 죽었다. 우리가 그를 죽였다이제는 더 이상 교회가 말하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 역사의 중심에 서야만 했다. 철학의 토대를 가장 철저하게 인간학에 정초시켰던 니체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기독교가 말하는 유신론적 형이상학의 부실한 토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의 다른 구체적인 이유는 교회가 앞으로 21세기의 신학하기에서 많은 도움을 받아야 할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는 하나님이 없는 허무를 말하는 니체 철학과 맥이 닿아 있다는 점이다. 이 문제는 앞으로 우리가 하이데거의 사상을 검토하면서 차츰 밝혀지겠지만 양자 모두 있음없음을 날카롭게 대비시킴으로써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심층에 도달했다는 점에서 맥을 같이 한다. 어쨌든지 니체와 하이데거가 우리의 기본적인 하나님 인식의 토대를 허물고 있지만 그런 허무는 과정을 통해서 오히려 근본적인 것이 건설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들이 허물어내는 부분은 우리 기독교가 역사적으로 왜곡되거나 덧칠된 부분이다. 그것이 바로 잡히고 벗겨지게 되면 기독교 신학은 당연히 제 자리를 찾거나 최소한 잘못된 길을 벗어날 수는 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Friedrich Wilhelm Nietsche, 1844-1900)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목사였던 니체가 인류 역사상 가장 노골적으로 기독교를 비판한 탓인지 기독교 안에서 니체에 대한 평가는 좋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의 주장이 상당한 정도로 왜곡되거나 그의 인격에 대한 악의적 소문도 적지 않았다. 심지어는 니체가 말년에 정신병에 걸려 죽은 것이 기독교를 비판한 결과라고 주장할 정도이다. 그의 개인적인 운명이 아무리 불행했다고 하더라도, 또한 삶의 과정 자체나 인격적인 부분에서 괴이쩍은 요소가 많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한 인간 전체를 매도하는 일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는 니체의 발언을, 사실 그가 집필한 주요 저작들은 시적인 운율로 되어있기 때문에 따라잡기가 쉽지 않지만, 일단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이 말은 형식적으로 기독교를 비판하고 있지만 그 내면에는 다른 생각이 있을지 모른다는 의미이며, 또한 설령 비판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정당하다고 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것을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의미이다.

니체가 주장하고 있는 핵심은 무엇인가? 그는 기독교 사상으로 토대가 잡힌 유럽의 모든 정신과 문화를 해체(postmodernism)하기 위해서 신과 이성을 부정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사상은 일종의 무신론이며 동시에 허무주의인데, 이 두 가지 특징은 공속적인 관계에 있다. 모든 존재와 체제의 최상에 자리를 잡고 있는 신을 부정할 수 있다면 그 신에 의해서 구성된 사회질서도 역시 해체될 수밖에 없다. 신의 죽음은 결국 허무주의로 진행되는 단초인데, 여기서 말하는 허무주의는 그렇게 부정적인 의미라기보다는 새로운 세계질서를 세우기 위한 계기를 마련한다는 점에서 긍정을 위한 부정이라고 할 수 있다.

니체가 신을 부정했다는 사실을 두 가지 관점으로 나누어 해석할 수 있다. 하나는 이미 그 당시에 기독교의 신론은 그 정당성을 상당히 상실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니체는 그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포이에르바흐가 기독교의 신관을 이론적으로 파괴한 것을 매우 명백한 역사적 사건으로 인식했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계몽주의와 칸트의 이성 비판을 통해서 하나님과 형이상학은 증명할 수 없는 대상이 되고 말았다. 신의 자리를 이론적으로 유지할 수 없었던 그 시대적 변화를 니체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미친 사람을 등장시켜서 이렇게 외친다. “하나님은 어디로 갔는가? 그는 소리쳤다. 나는 당신들에게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살해했다. 당신들과 내가!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살해한 자들이다”(Die fröhliche Wissenschaft, 1882, 125).

다른 하나의 관점은 이렇다. 그는 신이 없다고 주장한 게 아니라 우리가 그를 죽였다고 말했다. 무신론은 아예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지만 니체는 그런 입장이라기보다는 인간에 의해서 신이 폐기처분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는 곧 신에 대한 근본적인 부정이 아니라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라고 보아야 한다. 과연 18,19세기의 기독교가 쇼펜하우어, 니체, 프로이트, 마르크스 같은 사람들에게 혹독한 비판을 받아야할 만큼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보는 관점에 따라서 약간 이가 날 수는 있겠지만 위에서 잠간 언급했듯이 계몽주의, 프랑스 혁명, 진화론 같은 격변기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퇴행적인 모습을 보였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교회가 여전히 선악 이원론에 머물고, 기독교 신앙을 도덕주의와 동일시한다거나 외적인 권위주의에 안주하는 등, 성숙의 시대에 접어든 세상에 비해 정신적으로 미숙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러한 여러 요소들 중에서 니체가 집요하게 문제를 삼은 것은 교회의 도덕주의였다.

니체는 1887년 여름에 집필한 한 논문에서 기독교의 도덕은 세 가지 관점에서 허무주의로부터 인간을 지킨다고 피력했다. 첫째, 기독교 도덕은 인간에게 절대가치를 주었다. 둘째, 기독교 도덕은 세계에 완전의 성격을 부여했다. 셋째, 기독교 도덕은 인간에게 절대가치를 알게 했다. 이를 통해서 기독교 도덕은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무시하거나, ()생명의 입장을 취하거나, 깨달음에 대해서 의심하는 것을막아냈다는 것이다.(Nachgelassene Fragmente 5, 71). 사실 니체의 지적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기독교가 성숙한 세계 앞에서 도덕적 가치를 수호하는 기관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미 칸트가 신의 자리를 윤리적 실천에서만 가능하다고 본 것과 같다. 그런데 문제는 기독교 안에서 이런 도덕의 강조가 결국 인간의 금욕과 자학으로 이어졌다는 데에 있다. 신성(神性)에 대립해 있는 죄책감은 기독교적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정점에 달했다.(도덕계보학 1, 20). 또한 이것은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에게 충실하려는 전제조건으로서 자학에 대한 의지와 연결되어 있다. 니체에 따르면 바로 무신론이 이러한 종교적 노이로제’*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킨다는 것이다(도덕계보학 2, 20). 기독교인들이 도덕심과 그것의 불가능성 사이에서 일종의 노이로제 현상을 보인다는 주장은 나름의 정당성이 있다. 성적 욕망과 자학 사이에서 파괴되어가는 여성들의 삶을 다루고 있는 <좁은 문>이나 <여자의 일생> 같은 소설에서 우리는 그 당시 교회가 강요하는 도덕심과 인간의 구체적인 삶 사이에서 벌어지는 모순을 발견할 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라는 작품에서 둘째 형인 이반의 입을 통해 그 당시 러시아 정교회의 문제를 예리하게 짚어내고 있다.

 

* 종교적 노이로제 현상은 한국교회의 영성에서 확연하게 드러나는 특징이다. 연세중앙교회 윤 아무개 목사의 설교는 예수천당, 불신지옥의 패러다임으로 신자들을 옥죄고 있으며, 그 이외에도 청교도 영성에 치우쳐 있는 이들의 설교도 역시 신자들의 영성을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한다는 점에서 비슷한 결과를 빚는다. 어떤 경우에는 교회를 떠날 경우에 하나님의 징벌을 받는다는 식으로 신자들을 불안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런 방식의 설교와 가르침에 반복해서 노출될 경우에 기독교인의 심리는 노이로제 현상을 나타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신학적인 주제를 풍부하게 담고 있다. 몰트만과 한스 큉이 이 책을 언급한 적이 있다. 삼형제 중에서 둘째인 이반과 셋째인 알료사(?)가 그 작품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불가지론적 무신론자인 이반은 어느 날 수도원 견습생인 동생 알료사에 대심문관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재림한 예수가 초림 때와 마찬가지로 민중들의 삶에 깊이 개입하자 러시아 정교회에서 그를 구속했다. 어느 날 밤에 최고 승정이 아무도 몰래 예수를 찾아온다. 당신의 나라는 이 땅이 아니라 하늘이니까 빨리 돌아가라고. 그렇지 않으면 내일 민중을 시켜 당신을 죽이겠노라고 한다. 인간학적 인식이 매우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있던 19세기의 기독교는 퇴행적인 종교로 간주되었던 것 같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반을 통해서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나는 그 때문에 나의 입장권을 반납하려고 서두르고 있는 거야. 내가 성실한 인간이 되기를 바란다면 이 일을 될 수 있는 한 빨리 해버리는 것이 나의 의무겠지. 그래서 나는 결국 반납하겠다는 거야. 알료사, 난 하느님을 거부하는 게 아냐. 하느님에게 나의 입장권을 공손하게 되돌려드리는 것뿐이야.”

니체는 이 문제를 <도덕계보학> 세 번째 논문에서 금욕주의와 연결해서 설명하고 있다. 즉 기독교의 금욕적 이상은 생명과 적대적이라는 말이다. 특히 현재의 삶을 부정함으로써 피안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하는 성직자들의 생각에 이런 금욕적 이상이 두드러진다. 여기서 성직자는 신자들의 죄책감을 공격함으로써 사죄의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니체는 이런 금욕적인 이상이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힘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요소가 있기는 하지만 금욕적 이상은 결국 허무주의적이라고 한다.

 

인간적인 것에 대한 증오, 더 나아가 동물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에 대한 이러한 증오는, 또한 감각에 대한 혐오와 이성에 대한 혐오, 그리고 행복과 아름다움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모든 외면, 변화, 진행, 죽음, 소원, 요구를 멀리하려는 요구, 이런 모든 것은 무에 대한 의지를 달성하고 반생명적인 의지를 달성하려는 것을 의미한다.”(도덕계보학 3, 28).

 

우선 니체의 논리는 크게 잘못이 없다. 어떤 점에서 인간의 생명 의지라 할 수 있는 열정과 욕망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기독교의 가르침이 신자들에게 자학과 금욕의 방식으로 접근되었다는 점에서 결국 허무주의적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창조론과 구원론과 종말론은 결코 인간의 삶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훨씬 역동적으로 끌어올린다는 점에서 니체의 기독교 비판은 그 당시의 역사적 교회나 그와 비슷한 교회에만 해당된다.

그가 분석한 신은 죽었다”, 또는 무에 대한 의지는 모든 근원을 허물어버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런 허무를 통해서 훨씬 긍정적인 세계를 추구한다. 하나님 대신 초인을, 불멸의 영혼 대신 영원회귀를, 선과 참 대신 권력에의 의지를 생명을 긍정하는 근거로 삼았다. 도대체 허무주의가 어떻게 생명을 긍정한다는 말인가? 이렇게 정리하면 이 문제가 해명될 것이다. 니체의 허무주의는 기성질서의 몰락을 촉진시키고 권력의지를 통해서 그것을 극복하는 적극적인 계기를 그 속에 지니고 있다고 말이다. 이런 점에서 그가 사용하는 허무는 양가(兩價)적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부정적인 의미로서 기독교의 도덕주의적 체계의 해체이며, 다른 하나는 긍정적인 의미로서 새로운 생명력의 건설이다. 이제 헤겔 이후 철저하게 인간학적 방향으로 기울어진 서양 사상사의 흐름에서 가장 극단의 길을 걸었던 니체의 질책을 판넨베르크는 이렇게 받아들인다.

 

니체가 무신론으로 돌아섰다는 것은 그가 프로테스탄트의 참회적 경향을 혐오했다는 사실을 가리키는데, 이 사실을 직시해야만 니체가 자신의 지적인 의심의 날카로움을 단 한 번도 근대 무신론을 증명하는 작업이나 또는 그 사회적 조건들을 향해서 시도하지 않았다는 불가사의한 현상이 이해될 것이다. 그가 그렇게 자랑해마지 않았던 정직의 덕은 그에게 사실상 매우 일방적으로, 또한 부분적으로 추구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바로 앞서 암시되었던 것처럼 설명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니체가 기독교에 대해서 비방했던 그 거울이 비록 깨진 것이라 해도 감사해야만 한다. 기독교는 기독교의 종교적 경건이 그릇된 방향으로 발전했다는 충고에 대해서 눈감으면 안 된다. (신학과 철학, 385)

 

하이데거와 실존철학

 

하이데거를 직접 다루기 전에 분석철학과 더불어 현대철학의 두 조류로 일컬어지는 실존철학일반에 대한 검토가 필요한 것 같다. 하이데거의 철학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루돌프 불트만의 신학을 실존주의 신학이라고 부르는 데서 알 수 있듯이 하이데거가 결국 실존철학의 범주 안에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일반적 견해가 과연 정당한지에 대해서도 약간의 성찰이 필요할 것이다.

앞장에서 헤겔을 다룰 때 제시된 관념론에서는 idea가 모든 것을 규정하는 절대세계로 작용했지만 실존철학에서는 인간이 그런 절대세계로부터 밖으로 나와서 자신의 개별적인 존재 근거를 확보한다. 그게 곧 실존(實存)이다. 이런 실존에 근거한 철학이라고 하더라도 모든 실존철학자들의 생각은 각양각색이다. 유신론적 실존철학이 가능하고 무신론적 실존철학이 가능하다. 키에르케고르는 신 앞에서 단독자로 서는 인간의 종교적 실존을 강조한다. 불안과 절망에서 비약해서 신에 대한 절대적 귀의와 신앙에 의해서 유지되는 종교적 실존이 최고 단계라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실존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자유로운 선택과 결단에 의해서 자기 운명을 스스로 책임지며 살아가는 행동적 실존이며, 인류의 해방과 책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사회적 실존이다. 이런 점에서 사르트르에게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실존은 본질에 앞서기 때문에 사회 속으로의 앙가주망이 바로 인간에게서 가장 중요한 삶의 태도이다.

도대체 실존철학이 말하려는 핵심이 무엇인가? 한문으로 실존(實存)실제로 있다는 뜻이다. 라틴어가 의미하는 것과는 뉘앙스를 달리한다. ‘실존’(exsistentia)이라는 단어의 뿌리인 라틴어 동사 existereex(...으로부터)sistere(존립하다)의 합성어이다. 무엇으로부터 나와서 실제로 존립한다는 뜻이다. 이런 라틴어의 의미를 살리려면 실존이 아니라 탈존이라고 이름 짓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어쨌든지 실존의 어원적 의미는 밖으로 나와서 존립한다이다. 실존철학자들은 인간이 어떤 정치적, 종교적 권위나 이념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존재 근거를 명백하게 의식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 같다. 그 이전에 인간은 어떤 절대적인 힘에 숙명적으로 의존해서만 존재할 수밖에 없었지만 실존주의에 의해서 인간의 독립적인 존재 근거가 확보된 셈이다. 흡사 페미니스트들이 남성 중심의 패러다임을 극복하고 여성을 밖으로 존립하게 한것과 비슷하다. 과연 인간이 자기에게 밀려드는 운명을 헤치고 고유하게 실존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은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인간이 서야할 자리를, 특히 개체로서의 인간이 서야할 자리를 또렷하게 확보했다는 점에서 나름의 업적이 있다 하겠다. 예컨대 고독, 불안, 모순, 두려움 같은 경험들은 그 어느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인간 실존에 깃들어 있는 고유한 영역들이다. 이런 것들을 용감하게 직면함으로써 인간은 인간이 될 수 있다. 기독교적인 입장에서도 이런 부분은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아브라함, 이삭, 모세, 이사야 등등, 성서의 많은 인물들은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로서 실존했다는 점에서 실존철학과 기독교 신앙이 맞닿아 있는 부분이 적지 않다.

하이데거는 이런 실존철학자들과 어떤 점에서 상통하고 어떤 점에서 구별되는가? 그가 인간 실존을 언급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실존이 자신의 철학적 토대이기 때문이 아니라 존재의 드러남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현존재(Dasein)인 인간의 존재론적 특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끌어들이는 것뿐이다. 그렇지만 그의 철학적 체계에서 실존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본인이 끊임없이 존재망각의 현실 속에서 기초존재론으로 돌아가고 있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그의 철학이 인간적 착상으로부터 자유로운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학적 착상에 놓여 있다고 한다면 결국 실존은 그의 철학을 특징짓는 요소라 할 수 있다. 하이데거의 존재가 기독교의 신론과 연결되는지에 대해서 우리가 확언하기 어렵듯이 하이데거의 철학을 실존철학이라고 해야 옳은지 아니면 존재철학, 또는 본인이 주장하듯이 현상학적 존재론이라고 불러야 옳은지 단정하기 어렵다. 이 문제와 연결해서 다음과 같은 판넨베르크의 조언을 참고하기로 하자.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이라는 저서는 자기의 의도와는 달리 철학적 인간학으로 수용되었으며, 이런 점에서 아주 독특한 효과를 거두었다. 하이데거 자신이 이 책에서 한번도 현존재의 완전한 존재론를 핵심문제로 삼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현존재의 완전한 존재론이 철학적 인간학에 대한 존재론적인 자리매김으로서 불가결할지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그의 현존재 분석은 현존재의 특수한 존재 양식을 끌어내는 것만을 목표로 했다. 이로써 존재 일반의 의미가 분명하게 해석되지 않은 채 말이다. 이것은 출판되지 않은 이 책 제2권에서 다루어져야만 했던 부분이다. 그러나 존재를 존재자의 가능성에 대한 조건으로 반성하는 데서 존재와 시간초월적으로다루는 작업은 뒷날 하이데거에 의해서 이러한 과업에 별로 적절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되어 포기되었다. 바로 이러한 사실은 <존재와 시간>에서 다루어진 작업이 이 책을 철학적 인간학으로 오해하게 만드는 데 공동의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승인하는 게 아니었을까?(신학과 철학, 391).

 

현존재에 대한 실존론적 분석

 

이제 현존재에 대한 하이데거의 실존론적 분석을 하인리히 오트의 저서 <사유와 존재>를 중심으로 좀더 자세하게 다루려고 한다. 우선 존재자와 존재의 관계로부터 시작하자.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이 세계 안에서 우리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존재자들뿐이다. 나무, 시냇물, , 고양이, 코스모스 같은 존재자들은 우리의 주변 세계이며, 그것들을 우리가 직접 경험하고 있다. 우리가 처해 있는 사태는 바로 이런 것이다. 존재가 모든 존재자들의 근원이지만 그 존재는 우리가 직접 만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존재 자체보다는 존재자의 존재에 대해서 질문해야만 할 것이다. 어떤 존재자들의 존재를 질문해야만 할 것인가? 하이데거에 의하면 존재질문이 가능한 존재자의 존재에 대해서 질문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 존재자가 바로 인간이다. 인간은 다른 존재자들과 달리 존재질문이 가능한 존재자이기 때문에 현존재(Dasein)라고 말할 수 있다. “본질적으로 존재를 묻는 존재자는 인간이다. 인간의 존재양태는 질문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질문하면서 존재한다. 즉 질문할 능력이 있을 때 인간은 존재한다.”(사유와 존재, 59).

존재질문이 가능한 유일한 존재자인 인간은 현존재로서 실존이라는 존재를 갖고 있다. 즉 현존재의 존재는 곧 실존이다. 여기서의 핵심은 다음과 같은 명제이다. “현존재는 존재자이고, ‘실존은 이 존재자의 특수한 존재양태이다.” 이 명제 자체는 우리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다른 생명체나 사물은 존재질문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실존이 없으며, 따라서 현존재의 존재양태가 곧 실존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현존재에게 본질적인 미리 자기됨이 실존이라는 말은 도대체 무엇일까? 여기서 Sich-voraus자기를 전제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자기 자신을 명확하게 의식하고 사유하는 것이 곧 실존이라는 말이 될 것이다. 인간은 물론 죽음, 불안, 부조리, 두려움 같은 것을 통해서 자기를 확인한다는 점에서 이것이 곧 인간의 미리 자기됨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하이데거는 존재를 새로운 지평에서 언급하기로 작정했지만 그것의 출발은 어쩔 수 없이 현존재인 인간과 그 현존재의 존재인 실존에 대한 질문인 셈이다.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을 통해서 존재의 의미를 물을 수 있다. 여기에 미묘한 긴장이 있는 것 같다. 하이데거가 지속적으로 질문하려는 대상은 존재이지만 그것에 이르는 길은 결국 현존재라고 일컬어지는 인간과 그의 실존이라는 점에서 실존철학이라는 오해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하이데거의 경우에도 인간의 실존에 대한 분석이 없다면 존재질문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어쨌든지 그는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을 가리켜 기초 존재론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존재론들이 이 기초 존재론에 의존하고 있다. 학문들은 근본적으로 현존재의 존재방식이다. 그러한 학문들은 현존재의 실존론적 구조 속에서 예시되어 있다. 예컨대 역사학은 역사가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데, 이 역사와 역사인식은 현존재의 실존론적 구조 속에 예시되어 있다. 역사와 역사인식은 현존재 자체가 현존재의 구조에 따라 한 역사적 존재자라는 점에서 역사와 역사 인식의 가능성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

 

세계내존재와 신학적 객관성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을 위한 첫 걸음으로서 우리는 이제 현존재의 세계내존재구조를 검토하게 될 것이다. 오트에 의하면 여기서 나오는 결과들은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는 인간에 대한 신학적 사유에서 본질적으로 중요하다. 현존재의 세계내존재는 그 이외의 모든 관계 방식들보다 본원적이고 우선적인 것이다. 예컨대 현존재의 실존론적 토대가 불안이라고 보더라도 그것도 역시 세계내존재라는 사실보다는 지엽적 차원이라는 말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세계내존재는 이 지구라는 세계의 공간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보다 본질적인 실존론적 차원을 의미한다. 이 현존재의 세계내존재에 대한 설명을 위해서 인식문제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왜냐하면 인식이야말로 현존재의 세계내존재가 갖고 있는 특수한 양태이기 때문이다.

이 대목의 핵심을 일단 정리한다면, 하이데거는 주관주의적 인식론, 더 정확히 말해서 주-객 도식(Subjekt-Objekt-Schema)를 극복하고 인간의 인식행위를 세계내존재로서의 현존재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존재양태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인식한다고 할 때 인식하는 주체인 내가 있고 인식당하는 객체인 어떤 대상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미 데카르트가 코기토 에르고 숨명제에서 밝히고 있듯이 사유하는 주체에 모든 존재론적 토대를 놓는 방식이 바로 이런 주객도식이라 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이런 사유방식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문제를 제기한다. 인식하는 주체가 어떻게 그 구체의 내면적 영역으로부터 나와서 다른 외면적 영역 속으로 들어가며, 인식이 어떻게 하나의 대상을 가질 수 있으며, 대상 자체가 어떻게 사유되어 결국에는 주체가 그 대상을 인식하면서도 다른 영역 속으로 뛰어들지 않아도 될 수 있다는 것일까? 여기서 하이데거가 문제로 삼는 것은 사유의 과정에서 주체가 어떻게 자기 자신과 객체 사이를 마음대로 넘나들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예를 들어 설명해보자. 우리가 한 마리의 토끼를 본다고 하자. 토끼를 인식하는 나라는 주체는 토끼라는 대상의 모양이나 촉감을 통해서 그것을 토끼라고 인식한다. 이런 현상은 우리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것이니까 매우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며, 그 토끼를 보고 사랑스럽다고 느끼든지, 아니면 토끼를 의학실험용으로 쓰는 게 좋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렇게 주체와 객체가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어서 내가 객체를 인식한다고 보는 게 우리의 일반적 생각이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이런 인식 과정에 대한 배후 질문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토끼라는 대상을 하나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현존재의 존재양식에 대해서 질문한다는 것이다. 즉 현존재가 주체로서 객체를 인식하는 방식에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결국 자연과학을 발전시키고 이 세상을 양적으로 변화시킬 수는 있겠지만 그런 방식으로는 결코 현존재에 대한 실존론적 분석이 가능하지 않게 된다. 그것보다는 대상을 인식하는 그 현존재의 존재양식이 곧 세계내존재라는 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것에 대해서 질문해야만 존재가 드러나게 될 것이다. 결국 하이데거의 작업은 질문의 지평을 현존재의 인식 방법론이 아니라 그 인식의 존재양식으로 돌려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오트는 이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니까 주관이 어떻게 객관에 도달하느냐, 하는 질문으로서의 인식문제는 표면에 머물고 만다. 그 까닭은 그것이 영혼세계이 두 가지를 거짓되게 고립시켜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이고, 도대체 주관성과 객관성 같은 것을 사유할 수 있도록 비로소 만들어 주는 저 진짜로 관계되어 있음을 아직 전혀 주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65).

오트에 의하면 세계내존재라는 개념을 통해서 뚜렷해지는 것은 실존론적 분석론이 근본적으로 선험적성격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하이데거의 철학 자체를 선험적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가 자신의 철학방법론으로 채택하고 있는 현상학이 그런 선험적 엄밀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도 역시 그렇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은 이 세상에 드러나서 작용하고 있는 사태와 원리들이지만 하이데거는 그런 것들의 배후에서 작용하는 존재에 대해서 질문한다는 점에서 선험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기존의 주객도식에 의한 인식론과 하이데거가 말하는 세계내존재로서의 인식론 사이에 결정적으로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 주객도식에 의하면 인식하는 주체인 인간은 어떤 사실을 포착하는 과정에서 절대적인 주체가 됨으로써 결국 이 세계는 도구적 대상으로 떨어지게 되겠지만, 현존재의 인식행위가 세계내존재에 근거한다는 하이데거의 인식론에 의하면 존재의 자유가 훨씬 적극적으로 확보됨으로써 세계는 결코 도구적인 대상으로 추락하지 않게 될 것이다.

세계내존재로서의 현존재에 대한 하이데거의 실존론적 분석이 신학과 맺는 연관성을 오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여기서의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과 세계를 인식하는 작업이라 할 신학도 주관객관을 정적(靜的)으로 고립시켜 대립시키는 데서 출발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주관과 객관이 이분법적으로 고립되어 있지 않다는 말이다. 즉 하나님을 인식하는 라는 주체가 구분되어 있고, 인식되는 하나님이 또 하나의 영역으로 구분되어 있다는 식으로 주관과 객관을 고립시킨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인식의 차원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물론 기독교 신학이 제시하고 있는 하나님은 인간의 인식 작용과 전혀 상관없이 존재하는 분이지만 그의 그 존재성도 역시 철저하게 고립된 상태는 아니다. 오트에 의하면 인간이 하나님을 인식하기 전에 이미 만남이라는 사건이 먼저 있었다고 한다. 그것이 곧 세계내존재인 현존재가 인식할 수 있는 선험적 사건으로서의 인식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인식의 주관주의를 극복하고 그것의 지평을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이라 할 수 있는 세계내존재의 차원에서 제기되는 문제로 방향을 돌려놓았다. 그의 철학적 착상에 근거해서 우리는 신학과 설교의 주관주의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한국 교회에서 매우 강력한 현상으로 작용하고 있는 기독교인 개개인의 신앙적 경험을 절대화하는 그 오류를 우리가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을 대상으로 인식함으로써 그 하나님을 인식하는 인간의 인식작용과 더 나아가 그것에 근거한 인간의 결단을 기독교 신앙의 본질로 삼는다는 것은 흡사 인간이 자연을 대상으로 삼아 자연과학을 발전시켰지만 그것으로 인해 인간의 실존론적 차원이 전혀 밝혀지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과의 참된 만남을 위해서 거의 무의미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세계내존재라는 말을 우리의 용어로 바꾼다면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인식마저도 우리의 주관주의적 능력이라기보다는 그런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의 창조 행위 안에 들어있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즉 우리의 주관적 사유보다는 하나님의 계시가 우선하기 때문에 우리는 전혀 새롭게 열리게 되는 미래를 향해서 인식론적 태도를 열어놓는 반면에, 이전의 모든 인식론적 구조와 원리의 잠정성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위에서 인간학적 착상을 니체와 하이데거에 한정해서 검토했지만 그들을 전후로 해서 더 많은 철학자들과 그 사조를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앞 시대로는 포이에르바흐, 마르크스가, 뒤 시대로는 쉘러, 게엘렌, 플레스너 같은 철학적 인간론, 또한 베르그송, 알렉산더, 화이트헤드 같은 이들의 자연철학이 우리가 짚어야 할 것들이다. 이런 것들은 판넨베르크의 <신학과 철학>을 참고하는 것으로 대신하겠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인간학과 자연과학을 포기한 채 신학을 전개할 수 없다는 사실과 아울러 그런 주장 앞에서 신학의 고유한 특성을 놓쳐서도 안 된다는 사실이다. 신학이 도그마의 독단론에 빠지지 않으면서 동시에 인간학과 자연과학이라는 이 세상의 홍수에 떠밀려 내려가지 않는 자신의 고유한 길을 확보해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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