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강 녹취록 - 제9장 부활 (1)

사도신경해설 조회 수 4022 추천 수 0 2009.05.21 09:45:36

판넨베르크 사도신경해설 34강 - 제9장 사흘만에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1)

안녕하세요? 우리 순서로는 34강이 되겠습니다. 우리순서로서는 34강이고 판넨베르그의 책으로는 제9장입니다. 제9장 시작부분입니다. 사흘만에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사도신경의 여러 항목중에서 가장 중요한 항목을 오늘 우리가 다루게 되겠습니다. 부활이죠. ‘부활과 승천입니다. 부활과 승천, 이 두 대목이 사실은 같은 이야기예요. 두개다 생명의 신비, 혹은 생명의 새로운 현실성, 이런 것들을 말하고 있어요.

여러 항목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활을 다루게 되겠는데 그래서 이 책의 요항목이 좀 깁니다. 우리가 요 부분은 좀 여러 번에 나누어서 해야 되겠습니다. 부활에 대한 이야기야 우리가 한 두 번들은 건 아니죠. 기독교 신자치고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알고 있다고 하면서 실제로 모르는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오히려 모른다고 하는 게 우리의 영성이 자라나고 성숙해지는데 오히려 더 바람직한 자세인 것 같애요. 교회를 좀 열심이 당분간 다닌 사람들은 기독교에 대해서 안다고 하는 생각이 너무 강한 것 같애요. 그것이 문제인데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한 방식으로 교회에서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이죠. 단순하게 교리문답 차원에서 몇 가지 기독교 정보를 주워듣고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전부인 것처럼 착각하는 거예요. 그런 방식의 신앙이 교회안에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렇게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 칭찬을 받잖아요. 그러니까 그게 모든 거다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부활도 그러한 정보의 차원에 떨어지고 있는데 우리는 필요한 부분 정보는 있기는 있어야죠. 그러나 우리는 정보 차원에서 머물지 않고 부활의 현실성안으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판넨베르그의 책이 그런 점에서 우리들에게 도움을 많이 줄 겁니다. 네 기대를 가지셔도 좋아요. 요 항목을 통해서 우리가 부활의 새로운 차원들을 많이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기대하셔도 좋아요. 다른 한편으로는 조금 어려울 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대한다는 것과 어렵다고 하는 거하고는 상반되는 개념은 아닌데 어쨌던 그러한 부분들이 다 있어요. 우리가 여기 부활에 대한 내용을 통해서 신앙의 더 깊은 세계로 들어가면서 또 한편으로는 우리가 여태까지 일반적으로 들었던 그러한 부활에 대한 가르침 그런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세계로 들어가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좀 어려울 수도 있다는 이야기죠. 네 첫 번 패러그래프 한 번 보시죠. 제가 가지고 있는 책으로 130쪽입니다.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의 부활이 말하고자하는 핵심은 기독교 역사의 단초라 할 역사적 생기(生起)이다. 첫 문장서부터 좀 어렵군요. 번역 글이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고 그 문장 자체가 신학적인 개념을 담고 있기 때문에 좀 어렵기도 합니다. 다시 읽어보겠어요. 예수의 부활이 말하고자하는 핵심은, 이때까지는 뭐 이상이 없죠, 기독교 역사의 단초라 할 역사적 생기(生起)이다. 기독교 역사의 단초라는 말은 그런대로 이해할 수 있고요 역사적 생기가 문제입니다. 생기. 날생(生), 기(起) 일어나다 그런 뜻입니다. 한자로 그렇습니다. 독일어로 에어아이그니스라고 하는건데요. 역사적 생기, 역사적인 어떠한 근원이 되는 사건, 운동, 그런 뜻입니다. 다시 읽어보겠어요. 예수의 부활이 말하고자하는 핵심은 기독교 역사의 단초라 할 역사적 생기(生起)이다. 예수의 부활은 그러니까 역사적으로 일어난 어떤 근원적인 사태와 맞물려 있는 사건이다. 거기서 부터 바로 기독교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죠.

더 읽어보겠습니다. 특별히 부활절 사건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의 역사를 형성하는 출발점이다. 그리고 이 출발점은 동시에 이 신앙고백을 유지하는 실질적 기초다. 여기서 출발점이고 기초이고 그러한 단어들이 이어지고 있어요. 모든 기독교 신앙의 원초적 출발점이면서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고 구성하는 모든 토대다 그 이야기죠. 역사적 근원과 실질적 기초는 여기서 일치하고 있다. 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근원과 기초, 이게 바로 부활 사건안에 기초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첫 번 패러그래프를 다시 한 번 더 읽어보겠습니다.

예수의 부활이 말하고자하는 핵심은 기독교 역사의 단초라 할 역사적 생기(生起)다. 특별히 부활절 사건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의 역사를 형성하는 출발점이다. 그리고 이 출발점은 동시에 이 신앙고백을 유지하는 실질적 기초다. 역사적 근원과 실질적 기초는 여기서 일치하고 있다.

그다음 패러그래프입니다. 예수가 이스라엘의 약속된 메시아, 즉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그의 사명을 확증한다는 점에서 십자가에 달린 자의 부활을 통해 이미 주장될 수 있었다. 이를 통해서 그리고 이를 통해서만 이스라엘에 의해 유기된 예수가 하나님의 독생자로, 우리와 모든 세계의 主로 증명되었다. ‘이를 통해서’라고 하는 거는 부활을 통해서라고 하는 말이죠. 이런 부활에 의해서만, 부활을 통해서만 예수님, 이스라엘에게 버림을 받은 그러한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자로, 온세계의 퀴리오스 주로서 증명되었다. 부활만이 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하고 그리고 세계의 주, 이거는 메시아라고 하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런 것으로 증명이 되었다고 하는 뜻이죠. 당연한 이야기죠.

좀 더 나아가보죠. 우선 예수의 부활로부터 언급되어야 할 요점은 예수의 인격에서 기초된 하나님의 육화*다. 부활과 육화가 연결되어 있어요. 육화는 성육신을 의미합니다. 육화는 독일어로 플라이스베르둥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플라이쉬는 육체라고 하는 거고 베르둥은 됨이라고 하는 겁니다. 육체로 되었다, 그러니까 이러한 말은 성육신, incarnation 이라는 신학용어를 독일어로 풀어주는 거죠. 고 문장을 다시 보겠어요. 우선 예수의 부활로부터 언급되어야 할 요점은 예수의 인격에서 기초된 하나님의 육화*다. 인격이라고 할 수, 우리는 보통 그 사람의 인격이 괜찮아 나빠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예수 자체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육화(肉化, Fleischwerdung)는 성육신(成肉身, Inkarnation)이라는 신학용어에 대한 독일어의 서술적 표현이다. 이는 곧 영원자존하고 무소불위하며 불가시적이고 초자연적 하나님의 본질이 인간의 몸이라는 한계 안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말하며, 여기서 역사적 예수와 하나님의 아이덴티화이가 이루어진다.

그다음, 성육신 교리는 예수의 부활이 그의 등장과 그의 인격 전체에 소급해서 무슨 의미를 갖는 지만을 설명해주고 있다. 조금 복잡하죠. 그래도 천천히 한번 읽고 따라와 보시기 바랍니다. 성육신하면 우리가 그냥 몸을 입었다 그렇게 단순하게 이야기하는데요.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그러한 단순한 뜻풀이가 아닙니다. 어떤 근거에서 나온 이야기거던요. 부활과 연관되는거예요. 성육신 교리라고 하는 게 예수의 부활이, 예수님의 공생애, 인격, 삶 이런쪽 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이런 것들을 분명하게 설명해주는 거라는 말이죠.

그리고 결국 예수 부활의 빛 가운데서 그의 죽음은 인류에게 대리적으로 완성된 속죄의 의미를 획득한다. 앞에서 이미 판넨베르그가 짚었듯이 예수의 부활이 기독교 신앙의 출발, 유지, 그리고 전체 귀결이 되거든요. 그런 관점에서 이러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부활의 빛에서만 그의 죽음, 예수님의 죽음은 인류에게 대리적으로 완성된 속죄행위를 획득한다. 예수의 대리적 속죄의미가 부활의 빛에서만 확보된다는 이야기죠. 왜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드시죠. 그런 것들이 더 천천이 설명이 될 테니까 기다려 보세요.

만약 예수가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지 못했다면 그의 죽음에 그 어떤 구원론적 의미를 부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죽음은 그의 사명을 파손시키는 것을 의미할 뿐이지 그 이외에는 별 의미가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보통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을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위한,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유일한 길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승리다. 우리 죄를 다 용서받을 수 있게 하는 그러한 길이기 때문에 위대한 승리다. 그렇게 보통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부활이 없는 십자가는 사명의 파손을 의미한다고 하는 거죠. 그거는 좀 다른 이야기죠. 여러분들은 좀 이상하게 생각할 거예요. 십자가를 조금더 실질적으로 생각해야 됩니다. 그 당시에는 아무도 그 십자가를 구원의 길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생각할 수도 없는 거구요. 이미 바울도 고린도 전서 1장에서 그걸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건 아주 미련한 것이고요. 거기에는 아무런 구원론적 근거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다 흩어지고 말았잖아요. 부활로 인해서 이제 그것이 명실상부한 구원론적 의미를 담게 되는 거죠.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에서 확대되어 있는 언급들은 실제적으로 부활절 사건에 근거하고 있다. 네. 이해하시겠죠. 예수님에 대한 모든 신앙고백, 진술들 이런 것들은 부활사건에 근거하고 있는 거예요. 그 빛에서 다른 예수님에 대한 여러 신앙고백들이, 진술들이 나오게 된 겁니다.

즉 예수가 하나님의 우편으로 들림을 받아 하나님의 권능에 참여했다는 신앙고백 및 예수가 심판하러 재림할 것이라고 하는 기대는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이라는 사실에 기인한 귀결이라고 이해되어야만 한다. 네. 부활 사건에 근거해서만 예수님의 구원론적 모든 사건들, 그의 재림에 대한 기대, 이런 모든 것들이 타당성을 가질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초기 기독교가 그러한 관점으로 예수님을 이해하고 그렇게 고백했습니다. 즉 죽은 자로부터 부활이라고 하는 사실에 기초로 두고 다른 것들이 나오게 된, 신앙고백들이 나오게 된거죠. 귀결이라고 했어요. consequence 독일어로 컨젝센스라고 하는데요. 귀결이라고 이해하는 거죠. 무슨 뜻인지 대충 이해하시겠죠. 기독교 신앙이 처음부터 딱 완성된 그러한 형태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천천히 신앙의 내용들이 추가된 거예요. 이런 것에 대해서 불안하게 생각하실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건 이해할 수 없다. 그건 뭔가 좀 부족한 것이 아닌가? 처음부터 완벽하게 예수님의 모든 삶과 그에 연관된 신앙의 내용들이 자리 잡고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니냐? 그런데 예수의 부활이라고 하는 이 사건에서 하나 하나 차츰 차츰 파생되었다고 하는 것은 좀 받아들이기 불편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고러한 문제에 대해서 제가 더 길게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그게 역사의 과정이거든요. 우리가 뭐 우리들에게 익숙한 용어로 이야기하자면 하나님의 섭리라고도 이야기 할 수 있구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예수님에 대한 초기 기독교의 이해가 깊어지는 거죠. 고정도로 하고 진도를 나가겠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부활에서 기독교 신앙의 실질적 근본들을 다루어야만 한다. 이것이 파괴되면 기독교 신앙에 연관된 모든 것이 허물어진다. 부활에 근거해서 기독교 신앙의 모든 실질적인 그러한 근본들을 다루어야 된다고 하는 이거를 놓치게 되면 그러면 그 위에 모든 것들이 다 허물어진다고 하는 거죠. 이미 바울도 우리가 죽었다 사는 예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가장 어리석은 자들이다 그런 표현을 했습니다. 간혹 어떤 기독교 신자들, 혹은 학자들은 부활 같은 것에 무게를 두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거는 고대에 있었던 신화적인 요소라고 말이죠. 다른 종교에도 있을 수 있는 그러한 표상이 예수에게 덧입혀

그러한 부활보다는 역사적 예수, 그의 가르침, 그의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음 선포, 이런 것을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종의 휴머니즘으로 떨어지는 거죠. 그러한 것들이 가치가 있어요. 그걸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러한 것만으로 기독교 신앙의 토대를 세울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영웅, 호걸이었던 사람, 자기를 완전히 희생하면서 인간을 위해 살았던 어떤 혁명가, 어떤 자선가, 그런 자를 믿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생명의 전혀 새로운 차원이 그에게서 시작되었다고 하는 예수님을 믿는 거거든요. 그 중심에 부활이 있는 겁니다. 그러한 부활에 근거한 기독교 신앙의 실질적 근거를 찾는 그런 작업, 이런 것들을 놓치게 되면 기독교 신앙의 토대가 무너지는 거죠.

계속해서 읽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의 부활 사건이 다만 그 부활사건 자체로서만 근본적인 의미를 획득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부활만이 중요하고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그런 뜻이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오히려 처음부터 앞서 있었던 예수 등장과의 연관에 속한 문제이다. 부활의 빛으로 예수의 등장에 관계된 그러한 모든 것들이 실질적인 의미를 획득한다는 거지 부활만, 부활만 홀로 의미가 있다 그러한 뜻이 아닙니다. 부활사건에서 예수와 연관된 모든 사건들이 새롭게 기초가 잡히며, 예수 등장, 그리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의 전권에 대한 결정적 확신이 전대미문의 방식으로 확고해진다는 점에서 이 연관성이 완전히 새롭게 드러난다. 이 문자에서 조금 까다로운 부분이 있죠. 예수 등장, 그리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의 전권에 대한 결정적 확신, 이라고하는 말이죠. 그 예수님이, 예를 들자면, 모세는 너희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지만 나는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보도하고 있는 복음서가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자면 그런 것들이죠. 그 당시는 누구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예수님은 전권에 대한 확신이 있었던 거예요. 내가 최고다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임박, 그리고 그 임박한 하나님 나라에 참여, 그 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 통치를 선포하고 실행할 수 있었다고 하는 확신, 뭐 그런 것들이죠. 이러한 확신이 전대 미문의 방식으로 확고해진다고 하는 점에서 이 연관성이 완전히 새롭게 드러난다. 예수님의 가르침, 공생애 사건들, 그러한 모든 것들이 부활의 빛에서 실질적 의미를 갖게 되기 때문에 결국은 예수님의 그러한 모든 가르침과 행동들이 (부활의) 불빛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대충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종말의 불빛에서 그렇게 되는 것이지, 신적인 세계심판을 통한 인류사의 단절로서는 아니다. 예수의 부활은 한편으로 그 배경에 따르면 예수의 지상적 등장과 연결되어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미래적 관점에서 만물의 변화와 심판의 종말론적 기대와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전체 역사적 연관은 우선 기독교의 신앙적 방식으로, 그리고 예수 부활이라는 관점에서 시작한다. 이 연관은 이러한 사건으로 시작하고 진행된다. 좀 딱딱한 표현인데요. 제가 여기서 이것을 더 설명할 필요는 없겠죠. 제가 여러번 반복해서 한 이야기와 연상선속에 있는 겁니다. 제가 이 앞부분을 천천히 나가는 이유는 부활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선입견을 갖고 대하기 때문에 그걸 조금 허무는데 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에요. 천천히 나가지만 그러한 부활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잘 정리가 된다면 뒤로 진행이 조금 더 빠를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바로 앞서 읽은 그러한 대목들도 결국 이런 것을 말하는 거죠. 예수님의 부활이 두 가지 차원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지상적 등장, 지상에서의 공생애적 활동, 그리고 종말론적 그러한 관점 이러한 것들이죠. 역사 전체의 부활의 연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요. 132쪽입니다.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돌아가자. 이러한 사건들이 주장하는 바는 도대체 무슨 뜻인가? 죽은 자로부터 예수가 부활했다는 진술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질문을 다시 여러분의 질문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가장 단순하고 일반적인 생각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서 생명으로 되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표상은 적절하지 않다. 예수 부활의 핵심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생명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르고 새로운 생명으로 변형되었다는 것이다. 옛날 생명의로의 복귀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으로의 변형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생명이 새로운 거죠. 여전히 종말론적으로 열려있는 생명이죠. 인간이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햇던 그리고 종말이 오기까지는 완전하게 경험할 수 없는 그러한 생명인거죠. 이러한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히 예수님의 사랑을 단순히 회상한거다라든지 우리 삶의 복지를 향상시키는 일이라든지 그러한 연관성속에서 우리의 평균수명을 늘리는 것쯤으로 생각한다면 큰 오해입니다. 이미 있었던 과거의 그러한 생명으로의 복귀가 아니라 미래적 생명으로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기독교의 부활희망과 마찬가지로 원시 기독교의 부활절 사신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요소다. 가장 기본적인 것,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것 그것을 우리가 요 패러그래프에서 짚은 겁니다. 예. 이제 성서적인 근거들을 통해서 부활에 대한 공부를 좀 더 하게 됩니다. 판넨베르그의 설명이에요. 앞에서 가장 기초적이고 권위적인 부활에 대한 정리였다고 한다면 성서 본문을 통해서 그러한 내용을 확실하게 만들어가는 과정입니다.

이에 대한 암시가 "부활하다." 혹은 "죽은 자로부터 소생하다."*는 문장의 언어적 구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언어 구조에 따르면 일종의 그림말,** 일종의 메타포가 핵심이다. 그림 말이라고 하는 거는 독일어로 빌트와 보르트가 합성되어서 그림말인데요. 이것은 회화적인 언어표현 혹은 비유적인 진술을 가리키는데요. 제가 역주를 달았어요.

**그림말(Bildwort)은 그림을 뜻하는 Bild와 말을 뜻하는 Wort의 합성어로서, 회화적인 언어표현, 혹은 비유적인 진술 등을 가리킨다. 뒤에 나오는 bildhaft나, bildlich, Bildrede라는 단어도 역시 이와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여기서 핵심은 빌트예요. 역자는 'bild-'를 경우에 따라서 '그림식의'나 '유비적인'이라고 옮겼다. 판넨베르크의 설명에 따르면 성서의 부활사건은 어떤 사실적 묘사로서 가능하지 않다는 거죠. 회화적인, 유비적인, 메타포적인 방식으로만 가능하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경험을 말할때 성서기자들은 그림말, 메타포를 사용했다고 하는 거죠. 잠에서 깨어나 일어서는 것처럼 여기서 죽은 자들이 그렇게 유비적으로 다루어진다. 전대미문의, 그리고 죽음에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이것은 죽은 자에게 기대되는 미래의 일인데, 그림처럼 잠에서 깬다는 일상적 과정의 유비 analogia 로서 표상된다.

*독일어 구절은 다음과 같다. auferweckt werden von den Toten. 죽은 자로부터 소생한다는 이 표상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일상적 삶에서 경험할 수 있는 어떤 사실적 사건이라기 보다는 그것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사건이다. 예수 스스로 부활한 게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그렇게 새로운 존재로 변형되었다는 것이다.

그 다음이요. 133쪽으로 갑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라는 표상에 담긴 메타포적 구조를 주시한다면 다시 산다는 것을 그 말에 완전히 일치하는 사실적 내용으로 간주하지는 않게 될 것이다. 죽은 자가 다시 산다는 것을 완전히 非메타포적으로 언급할 수도 있긴 하다. 이런 경우에는 부활신앙의 그림말이 허락되지 않는다. 우리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현실성으로의 변화가 핵심적인 문제일 때만, 그것이 언급되어야만 할 경우에 메타포는 불가피하다. 이 문장에서 전혀 알려지지 않는 현실성으로의 변화가 중요한 거죠. 부활을 그러한 방식으로 설명하는 거예요. 우리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는 현실성, 드레크리카이트예요. 독일어로 제가 여러번 이야기했죠. 영역으로 하면 정확한 것이 없어서 reality로 합니다. 알려지지 않는 현실성으로의 변화, 메타포를 쓸 수 밖에 없었다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조금 따라가기가 약간 복잡하고 왔다갔다 하고 조금 복잡할 수 있어요. 예수님이 부활한 것을 그냥 보고 확인하고 경험했고 그래서 믿었는데 그게 무슨 알려지지 않는 현실성이니 변화니 뭐니 이런 이야기를 하냐. 신학이라는 것이 우리를 더 골치아프게 만드는 것 뿐이지 않느냐? 이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런 생각을 제가 이해하기는 합니다만 두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는 성서가 말하려고 하는 말을 먼저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어요. 우리가 원하는 것만을 골라서 고 차원에서만 우리가 따를 수 없잖아요. 신학은 그러한 우리의 상식적인 그러한 기독교 신앙에 머물지 않고 성서가 말하려고 했던 근원적인 신앙의 세계를 해명하는 작업입니다. 그건 반드시 필요한 거죠. 골치 아프고 힘들고 실용적이지 않다고 생각될 부분들이 있을지도 몰라도 그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우리는 기독교 신앙을 놓치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하더라도 교회는 움직일 수 있어요. 신자들이 뭐 기독교 신앙에 대한 본질에 대한 관삼이 얼마나 많이 있겠습니까? 그냥 좋은 사람들이 만나서 그런 일반적인 차원에서의 종교성들을 경험하고 살아가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일반 평신도들이야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평신도 지도자들이나 지성적인 세계이해를 하는 사람들은 그리고 특별히 교회 목회자들, 지도자들, 설교를 해야 되는 사람들은 성서가 말하는 그 세계안으로 들어가야되죠. 그런 것 없이 다른 방식으로 교회를 운영하게 되면 한계가 있습니다. 그게 하나예요.

또 하나는 지금 우리가 이야기, 제가 하나 둘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뭔지는 아시겠지요. 그러니까 왜 부활을 그렇게 복잡하게 말하냐 그렇게 주장하는 것에 대한 문제점, 그리고 그런 신학적인 것으로 들어가야 되는 것에 대한 당위성, 두가지에 대한 설명을 하는 겁니다. 하나는 성서가 말하는 근본으로 들어가야 된다는 거구요.

또 하나는 우리 기독교 신앙의 내용들이 어떤 신학자가 한 두번 이야기 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해석되어야 한다고 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초기 기독교가 말한 것에 끝나지 않고요. 오늘까지 계속되고 새롭게 해석되고 있거든요. 지금도 그러한 과정을 가고 있습니다. 그게 신학이라고 하는 거죠. 좀 옆으로 나가는 말이었어요.

다시 돌아와서요. 전혀 알려지지 않은 현실설으로의 변화, 이런 것을 말할때 메타포를 사용할 수 밖에 없다고 하는 거죠. 이런 점에서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도 다 메타포입니다. 그것은 물론 부활하고는 차이가 있죠. 예수님의 비유는 우리가 완전히 모르는, 알려지지 않는 현실성이라기보다도, 알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죠. 그러나 하나님나라에 대한 비유도 우리가 자동차를 그냥 만들어서 운전할 줄 아는 방식의 아는 것과는 다른거예요. 그건 여전히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는 어떤 현실들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이구.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는 곧 하나님에 대한 비유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본적이 없구요. 그리고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좀 이해를 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그것을 뛰어넘는 그러한 분이기 때문에 이 부활에 대한 설명이 알려지지 않는 현실성으로의 변화하고 연결해서 생각해도 틀린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현실성을 우리는 사실 알지 못한다. 부활의 현실성은 우리가 다 알지 못한다는 말이예요. 이것은 분명히 우리의 일상적 삶에서 반복되는 현실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부활을 경험한 그들에게서 부활은, 그것을 설명한 서신들의 부활에 대한 경험들은 우리 일상적인 삶에서 반복되는 것이 아니죠. 그러한 어려움앞에 우리가 놓여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기독교 신앙은 실증적인 작업은 아닌거에요. 이 세상을 좀 살기좋게 만들어가는 그러한 작업은 아닙니다. 서로 허무한 마음을 나누어서 동질감을 얻고 살고자 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그런 것은 다 부수적인거죠. 우리에게 완전하게 알려지지 않는 현실성으로의 변화, 이것에 우리의 모든 삶을 걸어두는 그러한 삶의 태도를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 거죠. 이게 한 편으로는 좀 답답하기도 하구요. 다른 한편으로는 아주 역동적이기기도 하구 그렇습니다. 답답하다고 하는 것은 이것이 딱 손에 잡힐 수 있을 정도로의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는다 이거는 아주 손에 잡히는 거예요. 그러한 것은 아닌거예요. 부활의 현실성이라고 하는 거는요. 이것이 우리들이 역동적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경험하는 그 어떤 것도 우리의 삶을 충만하게 하지 못하는데 반해서 이것은 여전히 종말론적 생명으로 열려있다고 하는 점에서 역동적인 것이죠. 이 세계로 들어가기만 하면 역동적일 수 있습니다. 그게 안되면 답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신자들은 그 역동성안으로 별로 들어가지 못할 겁니다. 좀 답답함을 갖고 사는데 그 답답함을 견디지 못해서 기독교 신앙을 실증적으로 만들어 버리고 마는 거죠. 복권, 아니면 보험 비슷한 거로 만들어 버리고 마는 거죠.

그런 대다수의 신앙인들이 그러한 기독교로 들어가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러면 누가 부활의 놀라운 현실성안으로 들어갈 수 있느냐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건 정말 말이 안되는 가르침이 아니냐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아주 고도의 신학적 훈련을 받은 사람에게만 가능하다면 그거는 참된 인간 구원의 종교라고 말하기 힘들겠죠. 그건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개개인들이 이러한 고도의 신학적 영성을 통해서 부활의 심층으로 들어갈 수는 없지만 공동체 전체는 그러한 중심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 공동체안에는 그러한 고도의 신학적 훈련을, 그러한 영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으니까요. 그들이 어떤 세계를 계속 열어가고 있으니까요. 이건 마치 높은 산을 등반하는 그 팀의 리더들이 있고 그 뒤를 따라가는 사람들이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뒤를 따라 가는 사람들은 어디 루트를 통해서 어디로 가는지는 잘 몰라도 앞 사람만 따라가면 결국 같이 등반에 성공할 수 있거든요. 기독교 공동체가 그런 점에서 중요합니다. 2천년 기독교 역사에 있는 기독교적 영성을 공동체 생활, 활동을 통해서 거기에 참여하는 거죠. 다시 말씀드립니다마는 이런 점에서 교회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거기에 세례가 있고 성만찬이 있고 설교가 있고 말씀 봉독이 있고 찬양이 있고 그러한 예배공동체로 자리를 잡은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한 예배, 예전중심의 그러한 예배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는 현실성로의 변화라고 하는 그 기독교 신앙의 중심을 근거로 해서 만들어진 신앙 형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설명이 되었나요? 설명하기가 쉽지 않네요. 그러니까 우리가 개개인으로서는 그렇게 놀라운 신앙적 영성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공동체에 연결되어 있으므로 우리가 신앙의 세계에 접촉될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개개인의 영성은 좋아지지 않는 것은 아니냐 또 그렇게 끝까지 물고 늘어지면서 질문할 수 있겠어요. 오늘은 그런데까지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그것만 조금 보충하는 차원에서 두가지만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좀 무지한 신자들에게도 공동체와의 연계속에서 이러한 신앙적 깊이가 전달 될 수 있습니다. 두번째는 개개인들의 영적 훈련은 끊임없이 필요로 합니다. 이렇게 공동체가 굴러가는 거죠. 오늘 그러면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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