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강 녹취록 - 제9장 부활(2)

사도신경해설 조회 수 4871 추천 수 0 2009.06.04 23:10:17

판넨베르크 사도신경해설 35강 - 제9장 사흘만에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2)


오늘은 35강입니다. 지난 34강에서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부활에 관한 두 번째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책으로 133쪽입니다. 두번째 패러그래프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바울은 분명하게 언급하기를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은 지상적 생명으로 신뢰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몸의 새로운 생명으로 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요 문장이 부활을 이야기할때 가장 핵심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통 우리는 부활이라고 하면 다시 산다 그런쪽으로 초점을 맞추었는데요. 원래 그런 생명으로 복귀되는 것이 아니라 미래적 생명으로 변화되는 거죠. 그게 우리가 부활을 이해하기가 힘든 부분이기도 하고 그 부활생명이 얼마나 역동적이냐 하는 그러한 가능성을 찾을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또 어떻게 보면 부활이라고 하는 것이 이 세상 생명의 양적인 확대로 이해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그렇게 움직이게 되는 하나의 동기가 됩니다. 앞에 말한 것은 대충이해가 되지만 마지막으로 말한 것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군요. 이런 뜻입니다. 사람들은 여기서 이런 방식으로 살아가는 삶을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것을 다 만족스럽게 생각하구요. 당연하다고 생각하구요. 그러니까 이러한 방식의 생명이 더 완벽하게 변화되어서 보통 이야기하는 최고의 복지가 보장된 그러한 생명으로만 생각하려고 하는 건데요. 변형된다고 하는 사실을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거예요. 보통 우리는 여기에서 게임을 해서 이기면 즐겁고 돈을 벌면 즐겁고 가족끼리 똘똘 뭉쳐서 재미있게 살면 행복하고 그렇잖습니까? 그러한 방식의 행복한 삶, 그것이 인제 확대되기를 바라는 거죠. 그게 계속되기를 바라는 거죠. 그런데 그런 것이 다 무너지는 새로운 생명으로 변화된다고 하는 것은 조금 두렵게 되는 거죠. 가족끼리의 친밀감이 만약에 해체된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가족 친밀감으로만 삶의 충만감을 느꼈던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거거든요. 그런점에서 새로운 생명으로의 변화라고 하는 이 사실을 좀 더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부활에 대한 성서적 이해에서 아주 핵심적으로 중요합니다. 계속 이어가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5:35-56에서 바울은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이 얻게 되는 육체적 현실성을 어떻게 생각해야만 하는가에 대해서 분명하게 질문하고 있다. 육체적 현실성이라고 이야기했어요. 현실성이라고 하는 단어는 여러번 이야기했구요. 기억해두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리얼리티고 독일어로 디레드리카이트예요. 그냥 육체라고 하면 될거지. 왜 육체적 현실성이라고 이야기했을까요? 그게 좀 차이가 있습니다. 육체라고 해도 뜻은 전달되기는 해요. 그러나 신학적인 차원에서 정확한 표현은 되지 못하죠. 육체라고 하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육체적인 것들을 그냥 말한다고 한다면, 육체적 현실성이라고 한다면 그 육체가 토대하고 있고 있는 담지하고 있는, 혹은 가야될 어떤 참된 것 그런 것들을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그에게는, 바울이죠. 바울에게는 미래적인 몸이 현재적인 몸과 다르다는 것, 즉 육체적인 몸이 아니라 바울의 표현에 따르면 일종의 '영적인 몸'을 입는 것을 의미했다(고전 15:43 이하). 부활이 영적인 몸을 입는 거죠. 변형된 몸을 가르켜서 영적인 몸이라고 했어요. 그렇다고 해서 그가 그 어떤 플라톤적인 전통에 근거한 의미로서 형체가 없는 정신적인 것을 주장하고 있지는 않다. 네. 플라톤은 영육이원론을 이야기하거든요. 영적인 것만 이데아와 맞다아 있고 육적인 것은 이 세상적인 것이죠. 영적인 것이 육체적인 것으로부터 분리되어야만 그게 구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한 플라톤적인 기본 사상에 따르면 참된 생명은 육체가 없는 관념적인 어떠한 세계를 이야기하죠.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차원으로 영적인 몸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바울의 생각에 따르면 하나님의 '영'은 모든 생명의 창조적 근원이며, 영적인 몸은 이러한 근원과 나뉘어져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지금 우리의 현존에 존재하고 있듯이- 이러한 근원과 연결되어 있어서 어떤 죽음도 이러한 생명을 더 이상 끝장낼 수 없는 생명체다. 불변하는 영적인 몸이 현재의 일시적인 육체적 몸과 갖는 관계를 바울은 극단적 변형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계속해서 부활의 핵심이, 바울이 이야기하고 있는 그 핵심이 변형사상에 있다고 하는 겁니다. 바울이 말하는 부활사상 이거하고 복음서가 말하는 부활사상하고 어떨까요? 다를까요? 같을까요? 어떨까요? 네. 고 문제는 이 판넨베르크가 이 책에서 자세하게 다루지 않지만 간접적으로 뒷부분에 가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직접적으로가 아니라 간접적으로요. 이러한 문제가 쉽지 않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분명히 증언하고 있죠. 그런데 그 증언들은 오랜 세월 전승의 과정을 거쳐서 내려온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사람들의 손을 거치면서 조금씩 조금씩 달라지게 되는 거죠. 그러나 바울의 경우에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우리가 볼 수 있듯이 그런 전승과정을 별로 많이 거치지 않는 직접적인 부활 현실성을 직접 목도한 사람의 직접 증언에 가깝습니다. 물론 그도 예수님 부활에 대한 초기교회 공동체의 전승을 전해 들었을 것이구요. 유대교의 여러 사상들, 부활의 토대가 되는 그러한 유대교의 사상들을 알고 있었을거구요. 근본적으로는 부활의 예수와의 만남이라고 하는 특별한 경험, 이런 것들이 총체적으로 연결되어서 바울의 고유한 부활사상이 나오게 된 겁니다. 그런점에서 바울의 부활사상과 복음서의 부활사상을 직접적으로 연결시키기는 좀 힘들죠. 바울에게는 예수님의 부활이 충분히 신학적으로 성찰된 과정에 있다고 한다면 복음서의 부활 사상은, 사실은 부활사상이라고 이야기할 수 없구요. 복음서는 그들에게 경험된 부활의 주님을 기억의 방식으로 공동체안에서 언급된 겁니다. 그런 것들이 바울이 말하는 것하고 전혀 다르다는 뜻은 아니구요. 관점이 다르게 기록되었다는 것을 전제하고 읽어야 되겠습니다. 네 이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오늘의 이 몸이 극단적으로 변형되어서 부활의 현실성이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0절을 판넨베르크가 이렇게 인용하고 있습니다. 극단적 변형에 대한 바울의 진술이에요.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살과 피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썩을 것은 썩지 않을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고전 15:50). 지금 현재 이러한 살과 피 그리고 결국은 썩어야 될 단백질 덩어리로서의 몸, 이런 것들은 완전히 인제 변형되어야만 되구요.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 썩지 않을 것, 이런 것들을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거죠. 그런 점이 하나 있구요.

다른 한편 각기의 '변형'은 바로 죽어야할 현재적 육체와 맞닿아 있다. 질적으로 전혀 다른 표현이기는 한데 그것이 우리의 현재 이 몸 전체, 육체와 연결되어 있는 거죠. "썩을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어야 하고, 죽을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어야 합니다."(고전 15:53). 옷을 입듯이 이렇게 설명하고 있어요. 현재에 썩을 몸도 중요한 거죠. 죽을 몸도 중요한 거죠. 이게 결국 썩지 않을 몸, 죽지 않을 몸의 유업을 받아야 되는데 궁극적으로 절대적으로 극단적으로 변형되어야 하는데, 현재 이 썩을 몸, 이 몸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덧입혀지는 것이죠. 썩을 것이 썩지 않을 것으로 덧입혀지는 그러한 것으로 사도 바울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일시적인 것이 '영적인' 몸으로 변형하는 것은 한편으로 매우 극단적이어서 어느 것 하나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없을 정도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변형은 현재 우리의 지상적 몸과 맞닿게 되며, 연결되어 있으며, 우리의 현재적 현존과 연관되어 있다. 말하자면 현재적 몸 대신에 무언가 완전히 다른 그 무엇이 만들어져야만 한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이다. 네. 이해가 되셨죠. 이 변형이라고 할때 두가지 의미로 이해되어야 됩니다. 지금 이야기한 것을 다시 제가 정리해서 드리는 거예요. 어떤 분에게는 한 이야기를 또 하냐 생각될지 모르겠지만 금방 이해되지 않는 분들을 위해서 보충적으로 설명을 하는 겁니다. 그리고 또 그런 말들을 몇번 반복해서 들어야 우리의 생각속에 각인되는 거예요. 부활은 변형인데 이 변형이라고 하는 말은 두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하나는 그 어느것 하나도 그대로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총체적인, 아주 통전적인 그러한 변화라고 하는 거구요. 또 하나는 그렇게 변화되지만 오늘 우리가 갖고 있는 그리고 들어가 있는 죽고 썩어야 될 몸과 완전하게 모든 것이 새로워진, 변형된 영적인 몸이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 겁니다.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느냐 그건 인제 우리가 실증적으로 분석해 낼 수 없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행하시는 거죠. 오늘 우리 죽어야 될 몸에 질적으로 새로운 부활 생명이 은폐의 방식으로 개입되어 있는거죠. 고것이 무엇일까? 그런 것들을 우리가 더 천천히 생각해 봐야 되겠습니다. 요 단계에서 어려움이 있는데요. 이런 문제들을 손바닥 손금 들여다 보듯이 그렇게 말할 수 있지는 않습니다. 이거는 하나의 메타포의 방식으로, 은유의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의 나라를 직접적으로 말할 수 없고 비유를 통해서 말할수 밖에 없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야기들은 비유였어요. 포도원 주인, 씨 뿌리는 자, 그리고 밭의 비유, 밭에 묻힌 보물, 가라지와 알곡, 이런 것들은 다 하나님 나라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가르키는 메타포, 비유, 은유이거든요. 그러니까 죽어야 될 우리의 몸, 여기에 완전하게 변화된 영적인 몸, 그것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느냐 하는 것도 역시 일단 메타포의 방식으로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는거죠. 그런 쪽으로 우리의 생각을 넓혀야만 성서가 말하는 모든 구원과 하나님 나라와 종말과 창조와 그러한 모든 성서 진리의 깊이들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그러한 쪽으로 발을 딛기가 조금 힘들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늘 실증적으로만 생각하는 것에 딱 생각이 굳어져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네. 그런 정도로 하구요. 진도를 더 나가 보겠습니다.

바울의 이러한 주장은 특별히 예수의 부활에만 한정되는 게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기대해야만 할 부활에도 적용된다. 우리들의 부활에도 똑같다고 하는 겁니다. 두가지 구도가 말입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이 양자는 상관관계다. 바울에 의하면 예수의 부활은 기독교인이 희망하는 부활의 기초다. 바울은 이렇게 생각했다. 모든 문제는 기독교인이 그리스도에게 이미 나타난 그 현실성에 참여해야만 한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고 말이다. 어떤 현실성이요. 부활의 현실성이죠. 여기에 핵심이 놓여 있는 거죠. 우리에게도 예수의 부활에서 볼 수 있는 극단적인 변형의 두 가지 성격들이 연결되는데 그러나 바울은 예수의 부활을 단지 신체가 다시 사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극단적 변형으로 이해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것은 우리가 고린도전서에서 예수의 부활에 대한 유일한 보도를 접했을 때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된다. 이 보도는 부활한 자를 직접 목격한 이에게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부활한 자의 현현에 대한 여타 모든 신약성서의 보도는 그것이 한 형식을 이루어 우리에게 닿기까지 많은 손을 거쳐 왔다. 그러나 바울에게서만, 그리고 부활의 현실성에 대한 그의 언급에서만 우리는 목격자의 고유한 말들을 듣는다. 바울에게 목도된 그리스도의 현현은 지금까지 고려된 모든 사실에 따르면 그것이 일종의 다시 살아난 육체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분명하다. 다시 살아난 육체가 아니라는 거죠. 그렇지 않다면 바울은 부활의 현실성에 대해서 그가 그랬던 것처럼 변형으로 말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복음서에서는 변형이라고 하는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죠. 부활 현현에 대한 목격, 경험 그것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문을 닫아 두었는데 그 자리에 부활의 주님이 현현했다거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ㅇ어느 사이에 나타났다가 또 어느 사이에 사라졌다고 하는 이야기나 등등 몇 가지 그러한 복음서의 보도들은 부활의 확실성을 이야기하려고 한 것이지 부활의 성격이 어떠냐 하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에 반해서 바울에게는 부활의 성격이 중요한 주제로 등장하는 거죠. 변형이라고 하는 성격이잖아요. 부활이 뭐냐하는 속성이라고 할까요. 그런 특징이 그에게 있습니다. 그가 경험한 하나의 현실성은 모든 지상적 생명과 완전히 다른 종류에 해당되는 것임에 틀림없다. 네. 지금까지 변형에 대한 사도바울의 설명을 들은 겁니다. 결론적으로 요 대목에서 언급되는 핵심은 그 부활현실성 이것이 모든 지상적인 생명과 전혀 다른 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칼 바르트가 이야기한 대로 그 부활 현실성은 절대타자이구요. 존재유비가 불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아까 이 변형이 두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하는데서 말씀 드렸듯이 완전히 지상적 생명과 다른 종류임에는 틀림없지만 오늘 썩어야 될 죽어야 될 몸이 아무렇지도 않게 내버려둬도 될만한, 아무런 의미가 없는 썩어 문드러질, 플라톤적 차원에서 영육이원론의 시각으로 봐도 좋을 만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쨌든 핵심은 전혀 새로운 현실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들이 여러분의 머리속에 잘 들어가시나요. 그냥 그렇게 설명을 하고 판넨베르그가 그렇게 썼으니까 그런가 보다 하는 정도예요. 아니면 새로운 생각의 세계속으로 들어가는 경험들이 있으시나요? 두번 째가 중요하거든요. 실질적으로 본인이 그렇게 인식하고 깨닫고 느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세계가 열리는 경험들이 있어야 되는 거거든요. 이 지상의 생명과 완전히 다른 종류라고 하는 것, 그렇게 변형된다고 하는 것, 그것을 여러분들이 더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결론이 도출된다. 미래에 대한 기독교의 희망과 부활절 신앙이 말하고 있는 죽은 자의 부활은 때때로 마술의 역사에 관한 고대문서에서 보도되고 있는 것처럼 죽은 자의 소생이나, 그리고 복음서 기자들이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예컨대 나인성의 과부의 청년(눅 7장)이나 나사로(요 11장) 사건에서 예수가 실행한 죽은 자의 소생과 엄밀하게 구분되어야만 한다. 당연한 이야기죠. 이 부활은 세상의 생명과 전혀 다른 종류에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에 나인성 과부의 청년, 나사로 이런 친구들은 다시 이 지상의 생명으로 돌아오는 것이기 때문에 이건 다른이야기죠.

약간 후기의 전설적 보도에 대한 신뢰성 문제는 일단 불문에 부친다 해도 이 이야기들이 이 사건을 예수의 부활에 대한 증거로서, 그리고 미래에 대한 원시 기독교의 희망으로 간주했다는 점은 확실하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 나사로이야기 이런 것들을 복음서기자들이 예수의 부활에 대한 증거, 그리고 원시기독교의 종말론적 희망 이런 거로 이야기했다고 하는 것은 확실하긴 한겁니다. 그걸 부활을 말하기 위한 소재로 사용한거죠. 물론 거기에는 후기에, 여기에 표현되어 있죠. 전설적 보도가 물론 있기는 있어요. 그런 흔적들이죠. 그렇다고 하더라도 복음서 기자들이 그것을 하나의 소재로 삼아서 예수의 부활, 그리스도교 공동체 종말론적 미래에 대한 희망 이런 거로 간주했다고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도 인제 그건 다른거죠. 예수와 부활과 이들이 소생했다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다른 의미였다. 바로 판넨베르그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기적적인 구원자로서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는 나사로 이야기와 나인성의 청년 사건에서는 이미 죽은 사람이 일시적인 생명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핵심이다. 이 사건에서 복음서 기자들은 생명으로 돌아간 자가 나중에 다시 죽으리라는 사실을 어느 한 순간도 의심하지 않았다. 복음서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나인성 과부의 아들, 나사로 그들이 전혀 죽지않으리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고 죽으리라고 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죠.

그들의 일시적인 재생은 예수의 부활에서 이미 나타난, 그리고 미래에 대한 기독교적 희망이 적용되는 그러한 현실성에 대한 징표에 불과하다. 징표, 심벌이죠. 그 자체가 아니라 변형된 생명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가리키는 징표에 불과하다. 이에 반해서 예수부활을 말하는 경우에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생명이, 즉 영원하고 어떤 죽음으로도 한정되지 않는 생명이 핵심이다. 어떤 경우에도 그 생명은, 예수의 부활생명은 우리에게 알려진 생명체의 생명형식과 근본적으로 구별되어야만 하는 그것이다. 중요한 문제가 여기서 설명되었죠. 여러분들이 부활이 변형이다. 새로운 생명으로 질적인 변화다. 이런 말을 듣기는 했지만 듣는 거하고 실질적으로 그 세계안으로 깊이 들어가는 거하고는 차이가 있습니다. 자꾸만 들어가도록 해야되겠죠. 그러기 위해서 여러다른 시각으로 그런 문제들을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알려진 생명형식과 근본적으로 구분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나라에서는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 아니고 먹고 마시는 것하고는 다른 그런 생명이니까 오늘 우리의 지상에서 경험하는 생명하고는 전혀 다르죠. 그런 생명이 어떠십니까? 원하세요? 원하지 않으세요? 대개 사람들은 원하지 않을걸요. 그러한 정말 오늘 지상적인 것과 전혀 다른 것을 원하지 않을 걸요. 원한다고 하더라도 기껏해봐야 지금 지상적인 방식으로 느끼는 즐거움 이런 것들이 배가되는 것, 수십배 확대되는 그러한 차원이지 이런 것하고는 전혀 질적으로 차원을 다르게 하는 그것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이 별로 호기심을 느끼지 않을 겁니다. 심지어 하나님 나라에서도 상급의 차이가 있어야만 이 땅에서 지금 충성하며 살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나라에 가서, 부활 생명의 세계인데, 영원한 생명인데 거기서도 누구는 좋은 자리 낮은 자리 이런 차이가 주어진다면 그거는 바로 이 세상의 생명형식이 연장되는 것에 불과한 거죠. 이러한 문제를 기독교인들이 극복해야 됩니다.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욕망을 충족함으로 느끼는 행복, 그걸 또 하나님 나라 부활 생명에 가서도 누리자고 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러한 것들이 완전히 해체되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그러한 생명 통치 세계로 변형된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즉 오늘 우리가 살아가면서도 그 부활 생명을 변형된 부활생명을 우리 삶에서 선취적으로 경험하기 위해서는 오늘의생명, 이 구도, 이 메카니즘을 이런 것들을 끊임없이 초월해야죠. 그게 쉽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쉽지 않기 때문에라도 우리에게는 그게 필요합니다. 그게 신앙이죠. 그러면 세상에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세상활동도 하지 않고 그렇게 뜬구름 잡듯이 살라는 말이냐? 하는 것은 아니죠. 네 계속하겠습니다 145쪽 맨아래 패러그래프입니다.

바울이 부활 생명에 대한 진술 방식의 표상을 과연 어디서 획득했는가라는 질문을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해본다면 부활한 예수가 그에게 나타났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재미있는 표현이죠. 바울이 그냥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만으로도 바울이 부활이 질적인 변화라는 사상, 표상을 얻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하는거죠. 그러한 부활 현현, 만나는 것만으로만 이야야기한다면 복음서의 보도 이상을 나갈 수 없습니다. 바울은 특이한 이력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부활의 현실들을 이렇게 질적인 변형, 새로운 생명 형식으로의 변형, 이런쪽으로 생각할 수 있었던 거죠. 계속하겠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이미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기대가, 그것은 모든 인간에게 일어날, 그러나 정의로운 사람에게만 일어날 사건인데, 묵시 사상적인 차원에서 그런거예요. 정의로운 사람에게 일어날 죽은자로부터의 부활에 대한 기대가 형성된 고대의 유대 전통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만 한다. 네. 기독교 신앙도 그런점에서 허공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예요. 예수님도 허공에서 뚝 떨어진 분이 아니예요. 유대교라고 하는 분명한 토대에서 시작된 겁니다. 고 점을 유의해야 한다는 거죠. 이 전통은 무엇보다도 소위 묵시문학 문서에서 발견된다. 이런 전통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죠. 바로 앞에서 말한 겁니다. 정의로운 사람들에게 죽은자로부터 부활에 대한 기대가 일어난다고 하는 겁니다. 이 묵시문학은 아포칼립틱스라고 하는 이 묵시 문학은 페르시아 시대의 유대세계에서, 바벨론 포로 귀환 이후에, 그리고 특히 무엇보다도 기원전 마지막 2세기 어간에 기원하고 있다. 이러한 묵시문학의 작품들의 발단은 구약성서 이사야 24-26장, 다니엘서가 대표적이다. 에스겔서도 있고요. 틈틈이 있습니다. 요엘서 등에도 있구요. 요기 판넨베르그는 요 두군데를 대표적으로 봅니다. 이사야 24-26장, 다니엘서예요. 부분적으로 이에 해당되는 고대문서가 적지 않다. 그런데 다른 문서들은, 예컨대 상이한 묵시문학 작품집이라 할 에녹書* 에녹, 죽지않고 하늘 나라 같다고 하는 에녹서 같은 것들은 더 이상 구약성서의 경전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에녹서에 대한 역주를 제가 좀 달았습니다. 에녹서, 위경이죠.

묵시문학 문헌인 에녹서는 야렛의 아들이 기록한 여러 위경들 중의 하나다. 거기에는 창세기 5:18-24에서 볼 수 있는 대로 에녹이 하늘로 옮겨져서 하늘나라의 비밀들과 하늘에서 미리 예정된 인간사의 과정을 보았다는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다. 신약성서 기자들도 이 에녹서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참고적으로, 묵시문학 문헌들은 주로 기원전 2세기 어간에 유대인들에 의해 형성된 일종의 문학 장르다. 악한 옛 시대(과거의 에온)는 곧 멸망하고 선한 새 시대(새로운 에온)가 곧 도래할 것이라는 강한 기대가 여기에 자리하고 있다. 신약성서에서는 요한계시록이 대표적이다.

이 묵시문학이 부활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쳤구요. 기독교 종말론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묵시문학, 묵시사상과 종말론의 차이 한가지를 든다면 묵시사상은 이원론적이예요. 선악의 대립이죠. 그러나 종말론은 선악의 대립은 아닙니다. 물론 종말론에도 악이 심판받는다고 하는 사상이 근본적으로 있습니다만 세상이 악하기 때문에 심판한다기 보다도 오히려 구원하기 위해서 심판한다고 봐야죠. 이것에 반해서 묵시사상은 이 세상은 총체적으로 악하다고 보거든요. 모두 멸망시켜야 된다고 하거든요. 두가지 이러한 차이, 두 사상의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새하늘과 새 땅, 부활의 생명세계 이런 것들이 사람의 노력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점에서 이 세계를 바라보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네 계속하죠.

이러한 작품들의 어떤 내용들은 그 해석과 편집이라는 점에서 오늘날 여전히 논쟁거리인데, 이것들은 예수 시대의 바리새파 운동에 의해서 논란이 분분했다. 특별히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에 대한 기대와 연관된 부분에서 특히 심했다.

네 지금 우리는 바울의 부활사상을 공부하고 있는 중인데요. 처음에는 변형사상의 의미들을 몇가지 살펴보았구요. 그 다음에는 바울의 부활표상이 어떠한 사상적 배경을 두고 있느냐? 어디서 왔느냐 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것은 곧 유대교의 묵시사상이라고 하는 거죠. 그 이야기가 조금더 지속됩니다.

미래에 이루어질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묵시론적 기대는 신적인 세계 심판이라는 표상에서 볼 때. 표상. 번역하기가 쉽지 않아서 그냥 썼어요. 일반적으로 쓰는 용어라서요. 포쉬델롱이라고 하는 독일어예요. 신학이나 철학이나 다 표상으로 이야기합니다. 앞에 둔다는 그러한 독일어의 뜻인데 생각, 사상 이렇게 말해도 됩니다. 그러나 표상이 사상하고는 의미는 다르거든요. 표상. 나가겠습니다. 다시 처음부터요.

미래에 이루어질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묵시론적 기대는 신적인 세계 심판이라는 표상에서 볼 때. 이와 유사한 페르시아 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옆에서 영향을 받고 영향을 받고 그러한 사상적 흐름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부활사상이 유대교의 묵시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묵시사상은 또 페르시아의 비슷한 상황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는 거죠. 이 페르시아는 바벨론이후로 근동아시아를 지배하던 제국이잖아요. 제국의 특성들이 있습니다. 자기들의 사상을 인근 식민국가에 이식하는 거예요. 정치, 사상, 문화, 종교 여러가지 면에서 그렇습니다. 본인들이 이식하지 않으려고. 제국의 속성이 이식하는 거구요. 지금 미국이 하는 것하고도 비슷합니다. 그리고 식민지 국가들은 자연적으로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지요. 여러가지 면에서 그렇습니다. 그렇게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앞에서 여러분들이 조금 불편해 할지 모르겠군요. 아. 성서가 말하는 모든 것들은 고유한 그러한 가르침이고 하나님의 계시인데 뭐 묵시사상, 또 더 나아가서 페르시아 사상, 창세기 앞부분에 있는 창조론에 대한 이야기들은 바벨론의 마루둑 신화인가요 거기에 영향을 받은 거거든요. 그렇게 이교도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면 도대체 이거 무슨 하나님의 계시냐? 말씀이냐 이렇게 불편하게 생각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제가 여기서 구구절절이 다 설명하기 힘들겠군요. 앞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왔을거구요. 일단 그냥 그렇게만 조언을 드릴께요. 불편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미 신약성서가 형성되고 그 뒤로 기독교 신학이 자리를 잡는 과정에서도 주변의 철학사상의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교부들이 철학자들이었습니다. 그당시의 지배적인 신플라토니즘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도 받구요. 그것이 한번 영향받고 끝난 것이 아니라 계속 영향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조심을 해야 될 것은 영향 받았다고 해서 근본가지고 있던 뿌리들을 송두리채 포기하고 그쪽으로 갔다는 것은 아닙니다. 일종의 혼합주의가 되었다고 하는 것도 아니예요. 성서의 고유한 그 세계들이 주변의 사상을 통해서 더 확대 심화되었다고 하는 말이죠. 그런 의미에요. 그래서 영향을 받았다고 크게 불편하게 생각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또 사실은 유대인들 밖의 세계 사람들까지 하나님의 통치아래 있는 게 아니겠어요. 그런 사상은 구약성서가 이야기합니다. 주변에 있던 여러나라들도 여전히 하나님의 통치안에 있었던 거든요.  그러니까 그들에게도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계시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창조자로 믿는다고 한다면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부정해서도 안되죠. 여기 묵시문학이 페르시아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바벨론, 페르시아, 그 다음에 헬라, 로마 이러한 사상들의 영향을 받았죠. 그래서 성서의 정신이 흐릿해진 것이 아니라 더 또렸해진 거죠. 

부활을 기대하는 유대의 신앙이 외부의 영향으로 인해서 이교도화되었다는 것이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유대 전승에서 유래한 질문에 답하는 것이, 말하자면 개개인들에게 성취되는 하나님의 의로움이 핵심이다. 하나님의 의로움은 인간의 삶에서 증명되어야 한다. 이런 삶과의 상응이 개개인의 삶에서 일어나지 않고 -그것은 개개인에게서 성취되는 게 틀림없는데- 일종의 피안적 보상을 요청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초대교회 당시에 죽은 자의 부활은 바울에게처럼 어디서나 구원의 현실성으로 이해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는 명예를 얻어야 할 이들과, 그리고 심판이나 영원한 징벌을 받아야 할 이들이 통과해야할 문이라고 이해되고 있었다. 이 경우에 부활에 대한 기대는 이미 변형 사상과 확고하게 연결되었다. 특별히 부활한 의인의 변형은 하늘의 천사와 별을 소유하는 것과 같은 막강한 권세를 획득하기 위해서 이루어진다고 해석된다. 우리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의 경우를 본 것처럼 변형에 대한 특별한 강조는 물론 초기 기독교 시대의 묵시문학 작품 가운데서, 말하자면 바울과 동시대인들에게서 정확하게 반영되었다.

인제 좀 명확해 진것 같죠. 주변에 있었던 다른 사상들과의 관계속에서 그 쪽에서 희미했던 어떤 것들이 이런 성서, 바울과 서신들 이런 세계, 초기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명확한 현실성을 띠게 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그쪽에서는 막연했던 것들이 아주 구체화되고 아주 현실적인 그러한 주제로 확대되고 심화된 겁니다. 그게 바로 유대교의 특징이기도 하고 그것의 전통에 이은 기독교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주변을 향해서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되 그 관게를 통해서 얻어진 어떤 생각들이 그 성서 전통안에서 오히려 더 확고한 색깔을 띄게 된다고 하는 겁니다. 반면에 페르시아에 있었던 그러한 사상들은 희미해 지는 거죠. 조금 영감을 다른데 주었다가 점점 그것들은 혼합적인 성격으로 떨어져 버려서 특성들이 결국은 약화되서 역사에서 실종되는 반면에 이 기독교 신앙에서는, 묵시문학과 연관성속에서 드리는 말씀이예요. 그 모든 것들이 개방적이고 유연하게 관계를 맺되 훨씬 더 그 사상들이 깊어지는 어떠한 특징을 갖게 되는 겁니다. 뭐라고 할까요. 변증법적인 역사에 굳건하게 섰다고 하는 거죠. 정말 그야말로 역사적인 종교로서의 모범적인 특징들이 거기서 나타나는 겁니다. 다시 정리하면 주변의 여러사상에 자신감있게 자기자신을 열고 대화를 하고 영향을 받고 끼치되 싱크리티즘, 혼합주의로 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본인들의 신앙적 본질이 더 깊어지고 오히려 주변에서 받은 그 영감들이 그 성서와 기독교 전통안에서 특별한 의미들을 확보하게 된거죠. 그러한 역사적 전통을 기독교가 갖고 있는 겁니다. 참 놀랍죠. 그리고 그러한 전통은  지금도 반복되어야 되는 거구요. 갱신이면서 자기의 정체성이 더 활발하게 살아나는 그러한 역사 변증법적인 그러한 흐름에 들어있는 거죠.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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