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강 녹취록 - 제9장 부활 (4)

사도신경해설 조회 수 4797 추천 수 0 2009.06.20 15:40:30

판넨베르그 사도신경해설 37강 - 9장 예수님의 부활(4)

안녕하세요?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나누고 있습니다. 부활에 대한 거는 늘 우리가 들었던 거래서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 간단하지 않다고 하는 거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데요. 예수님의 부활 현현과 연관되는 사연들이 많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좀 이야기했을 거구요. 전반적으로 지금 우리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그걸 다시 여기에서 정리해서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부활이라고 하는 문제가 간단한 교리문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유대교의 묵시문학의 죽은 자의 부활이라든지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에게만 예수의 현현이 경험되었다고 하는 거라든지 그리고 예수의 현현에 대한 실질적인 이해가 세월이 지난 다음에 명확해 졌다고 하는 것, 그리고 사도바울의 고유한 부활의 주님에 대한 경험 이런 것들이 초기 기독교의 부활 경험을 심화 시켰다고 하는 이러한 많은 것들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한 성서 신학적이고 또 조직신학적인 그러한 관점들은 이 시간에 또 다시 반복할 필요는 없구요. 이런거는 다시 한 번 생각하고 넘어가면 좋겠습니다. 부활이라고 하는 문제는 예수님의 부활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부활에까지 연관되는 문제란 말이에요. 우리 스스로가 능력이 있어서 부활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부활의 의지해서 우리도 예수와 같은 부활에 이른다고 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러한 하나의 관점이 있구요.

또 조금 더 실질적인 문제로 이 부활은 죽음이란 문제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막연하게 혹은 나이브하게 그러려니 생각하지 말고 진지하게 생각하십시오. 우리가 죽잖아요. 죽은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날 지에 대해서 우리가 지금 실증적으로 그것을 파악할 수는 없는겁니다. 그러한 상태인거는 분명한 거예요. 오늘과 죽음이후에 어떤 세계, 어떤 생명 그런 것들이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단절되어 있으면서 다른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그것이 그냥 손에 잡히는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네 다시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부활을 생각한다고 하는 거는 이 죽음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한다는 것과 비슷합니다. 도대체 죽음이 무엇일까요? 누구나 거쳐야 될 관문인데 어느 누구도 인류역사에서 이 죽음의 문을 넘어갔다가 온 사람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의 실태가 무엇인지를 말할 수가 없습니다. 간혹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있지만 그런 것들은 별로 믿을 만한 이야기가 되지 않습니다. 어쨌든 우리가 부활을 이야기할때는 죽음의 문제가 중심에 있다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게 한편으로는 두려운 것과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더 궁극적인 생명에 들어가는 통로라는 점에서 그렇게 두려움의 대상은 아니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 영적인 상태에 가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일단 우리가 죽으면 현재까지 우리가 여기서 획득하려고 노력했던 모든 것들과 단절되기 때문에 사람은 그 단절을 견뎌내기 힘든 거거든요. 이 죽음을 넘어서서 부활 생명에 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성취하려고 했던 모든 것들과 단절에 비해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하고 아름다운 풍성한 그러한 생명에 들어간다고 하는 것이거든요. 이런 것들은 제가 말로는 이해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우리가 그 어떤 영적인 상태에 들어가서 살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이런 삶 이런 것보다 부활의 삶이 더 좋다면 지금 당장 죽는 것이 좋지 않느냐 너 죽을래 누가 나에게 물어본다면 멈칫할 거예요. 확실한 거고 그리고 그런 신앙가운데서 살고 있는데도 여전히 오늘 우리가 여기서 경험하는 모든 삶으로부터 단절이라고 하는 것은 참 실질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는겁니다. 그런 거를 더 우리의 일반적인 신앙생활에서 극복할 수 있도록 우리의 영성이 자라가야 되죠. 그러한 과정이 우리가 이렇게 판넨베르그의 사도신경 해석을 공부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오늘 141쪽입니다. 오늘 제가 이 공부를 하기 위해서 미리 한번 읽어보았는데 다른 때보다도 어려웠어요. 이거를 제가 어떻게 설명해야 될까 난감하기도 합니다. 앞에 있는 이야기도 어려운 부분들이 있기는 있었지만 요건 조금더 그런 것 같아요. 그래도 용기를 갖고 가보겠습니다. 141쪽입니다.

우리에게 완전히 숨겨져 있는 것에 대한 이러한 표상-죽음 이후의 문제로 숨겨져 있다고 하는 거죠 - 을 우리는 우리에게 알려진 유비로서 구성할 수 있다. 유비요. analogia라고 하는 건데요. 비유적으로 설명하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읽겠습니다. 우리에게 완전히 숨겨져 있는 것에 대한 이러한 표상을 우리는 우리에게 알려진 유비로서 구성할 수 있다.

이것은 여러 상이한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 우리의 문화적 전승에서 볼 때 헬라적 불멸신앙과 성서적 부활희망이 기독교적 종말론의 역사에서 결합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경험하는 기본적 이해에서 상호간 경쟁적인 표현형식을 취하고 있다. 헬라적 불멸사상이요? 이건 영혼불멸이란 말 그대로입니다. 헬라의 플라톤에게 주로 그 사상이 있다고 보는 이 영혼불멸사상이 기독교 안에도 들어왔거든요.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는 부활 희망이 있단 말이에요. 이 두 가지가 기독교적 종말론의 역사에서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 두 가지가 서로 충돌하고 있다고 하는 말씀이에요. 이해하시겠어요? 영혼 불멸이라고 한다면 영혼은 죽지 않고 육체만 죽고 그렇다는 이야기가 아니겠어요. 영혼은 불멸하니까요? 부활사상에서는 만약 영혼이 불멸하지 않는다면 그건 부활이라고 할 수는 없는 거죠. 부활은 완전히 죽음, 모든 삶, 지금 여기서 누리고 있는 모든 것과의 단절, 해체 그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한 죽음을 거친 다음에 새로운 질적인 형식적인 하나의 생명으로 변화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까? 영혼도 역시 죽어야 되는 거죠. 엄격하게 이야기하자면 그렇습니다. 이 두 가지, 영혼불멸사상과 부활 사상이 이런점에서 충돌하고 있는데 그게 같이 기독교의 종말론 역사에서 결합되어 있어요. 그 이야기를 여기서 말하고 있어요.

19세기까지만 합리적인 것으로 인정받아온 영혼 불멸 사상과 달리 오늘날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성서적 사상은 진지하고 적절한 것으로 증명될 수 있다. 재미있는 표현이죠. 불멸사상은 19세기까지만 합리적인 것으로 인정받았다고 하는 말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제가 다루기 힘드네요. 19세기가 영혼 불멸사상이 중세기 교부시대때부터 들어와서 어느때에 기독교 교리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구요. 그게 언제 교리, 정식 교리화 되었는지는 교회역사에 나오는데 제가 지금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겠습니다. 상당히 오래되었죠. 굉장히 중요한 교리로 자리를 잡고 있죠. 지금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러한 영혼불멸을 그대로 기독교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물론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라는 말은 아니에요. 그러나 그것은 원래적인 것은 아닌거죠. 원래적인 것은 부활사상입니다. 영혼불멸이 19세기까지만 받아들여졌는데 부활은 아니라고 하는 거죠. 그것은 더 진지하게 지금도 논의되고 있다고 하는거죠.

보다 진지하다는 이유는 성서적 사유가 죽음의 한계 저편에 놓여 있는 모든 것과의 간격을 -혹은 단절을- 잠으로부터 깨어남이라는 메타포적 한계 안에서 생각한다는 데 있다. 헬라의 플라톤적인 영혼불멸사상은 합리적인 것으로 인정받지 못했는데요. 19세기에 이르러서요. 그러나 잠으로부터 깨어났다고 하는 이러한 메타포로 설명된 성서의 부활사상은 적절한 것으로, 진지한 것으로 그것이 옳다고 증명되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논의가 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하는 거죠. 잠으로부터 깨어남이라고 하는 메타포로 부활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중요한 대목이에요.

이것은 직접적인 앎에 대한 모든 요구를 억제하는 일종의 간격이다. 불멸성 교리는 이러한 앎을 주장했었으며, 육체적 한계 앞에서 영적인 경험을 철저하게 독립시킴으로써 이러한 요구를 해결할 수 있었다. 영혼불멸사상, 영혼은 늘 선재적이고 불멸하고 절대적이고 거룩하고 한 것이기 때문에 육체적인 앎하고는 다르다는 거죠. 영육이원론 이런 것들이 다 헬라 사상입니다. 영적인 것을 독립시켜 버린 거죠. 이원론적으로 구분해버린 거죠. 그런 것으로는 인간 죽음의 문제, 이런 것들을 죽음과 죽음이후의 그러한 삶의 문제들을 적절하게 설명할 수 없다고 하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론에서 볼 때 죽은 자의 부활이라는 사상은 그 언어의 비유적 성격에서 육체성과 영성을 확고하게 일치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보다 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지금 중요한 대목을 계속 따라갈 수 있습니다. 조금 문장들이 앞에 것하고 뒤에 것 이런 것들이 문장들의 뜻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 좀 뒤섞여 있는 것처럼 뒤죽박죽 이렇게 생각될 수 있어요. 지금 헬라의 영혼불멸사상하고 기독교의 부활사상하고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는 중입니다. 물론 이 두 가지가 기독교적 역사에서 일치되고 있기는 있지만 그러나 원래적인 것은 부활사상인데요. 이것이 오늘 현대적 Anthropology 에서도 더 적절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육과 영 이런 것들을 분리하지 않는 쪽으로 지금 인간 이해가 나가고 있잖아요. 뇌과학 이라는 것들이 있는데요. 뇌에서 영혼 작용도 그렇게 일어난다고 까지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육체는 순전히 물질적인 것이고 영혼은 무조건 순수, 영적인 것으로 구분하지 않습니까? 인간을 통전적으로 이해하고 있단 말입니다. 이런 것이 헬라의 영육이원론적인 인간 이해가 아니라 성서적인 영육일체의 이해와 맞닿은 거죠. 현재 물리학, 생물학, 인간론으로 올수록 오히려 성서의 인간이해가 더 적절하다고 하는 것이 나타나고 있는 겁니다. 일치죠.

이러한 일치 없이 우리는 인간적 삶을 더 이상 생각해 볼 수가 없다. 영육 일치 말이죠. 죽은 자의 부활이라는 사상은 죽음에 직면해 있는 인간존재가 명쾌하게 자신을 밝혀보려고 할 때 피할 수 없는 질문을, 즉 죽음의 숙명에 대한 질문을 특별한 방식으로 적절하게 제시할 수 있다. 질문이 죽음의 숙명에 대한 질문이라고 하는 군요. 이런 것을 죽은자의 부활이라고 하는 사상이 대답을 줄 수 있다고 하는거죠. 요런데서 부터 판넨베르그 신학의 특징이 나타나는 거죠. 그는 보편적인 역사신학을 하는 사람이거든요. 기독교 교리를 그냥 교리적인 차원으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전체의 현실들, 역사들, 여기에는 과학 심리학 인간학 모든 것들이 들어오게 되는데 그 안에서 해명하는 거죠. 기독교 진리의 보편성을 찾는 겁니다. 이 부활 사상이 플라톤의 이원론적인 인간 이해에 근거한 불멸사상보다 훨씬 현대 학문적인 차원에서도 설득력이 있다고 하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네 가보겠습니다.

죽음에 대한 불가피한 질문이 자신의 자명성을 획득하려고 고유한 죽음의 진정성에 직면해 있는 이들에게 죽음을 극복하는 생명의 리얼리티를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번역투이기는 한데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그러나 이 불가피한 질문은 생명의 비밀이 각기의 현재적 인식을 뛰어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게 한다. 그러한 질문을 함으로서 어떤 질문이요? 죽음에 대한 질문이죠. 질문을 함으로서 우리가 지금 여기서 살아가고 있는 이러한 생명의 자기인식 그런 것들을 생명의 비밀을 넘어선다고 하는 거죠. 요 말이, 요 말자체만 갖고 보면 이렇습니다. 죽음에 대한 불가피한 질문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생명의 비밀이 있다고 하는 것을 가르키는거죠. 지금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상당히 훨씬 더 포괄적이고 비밀 가득하고 훨씬 더 근원적이다는 말이죠. 다시 말씀드리면 지금 우리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이해, 인식 그러한 경험보다 생명의 비밀은 더 엄청나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한 것들을 죽음에 대한 질문, 다시 말씀드려요. 죽음에 대한 질문이라고 하는 것이 그러한 사실을 가리키고 있다 그런 뜻이죠. 나가보겠습니다.

예수의 부활에 대한 역사적 질문은 생명의 현실성에 대한 이러한 보편적인 관점에 근거해서만 의미를 갖게 되며, - 보편적 관점이라고 그랬어요. 생명이 뭐냐 죽음이 뭐냐 넘어서는 인간의 그러한 질문들이 뭐냐? 여기서 오늘의 생명의 비밀이 어떻게 우리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들을 뛰어 넘느냐 이러한 생각들이 보편적 관점들이거든요. 이런 것들에 근거해서만이 의미를 갖게 되는거거든요. 그러니까 무조건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이러한 방식으로는 안된다고 하는 겁니다.

이럴 경우에만 이 질문은 편견에 의한 오류에 빠지지 않게 된다. 우리가 편견에 의한 오류에 빠지는 경우가 많죠. 부활도 많이 그런겁니다. 이러한 부활신앙이, 이러한 보편적 관점에 토대를 두어야 되는 거죠. 그런 거 없이 나는 예수님때문에 삽니다. 삽니다. 부활합니다. 믿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만 머무르게 된다면 우리는 열광주의로 빠지게 되는 것이고 결국은 기독교 진리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거죠. 그러한 신앙적인 열성 자체를 제가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 기독교 신앙에서 완전히 벗어난다는 뜻으로 말한 것은 사실 없기는 합니다. 그건 다만 무책임한거죠. 유아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는거죠. 어머니 품안에 안겼던 그러한 달콤한 생각만 갖고 나이가 들어버리면 곤란하잖아요. 나이가 들면 어머니와의 관계가 새롭게 정립되지 않습니까? 우리는 부활, 역사적 관점으로 질문하고 대답을 찾아가야 된다고 하는거죠. 이런 것이 없을 때는 오류에 빠질 수 있다. 고 문장을 다시 읽겠습니다.

예수의 부활에 대한 역사적 질문은 생명의 현실성에 대한 이러한 보편적인 관점에 근거해서만 의미를 갖게 되며, 이럴 경우에만 이 질문은 편견에 의한 오류에 빠지지 않게 된다. 우리가 역사적으로 이해하려고 할 때 원시 기독교 사도들에게 선교의 근원이 되었던 그 일들이 부활의 기대에 대한 그림말을 통해서 해석되는 것 보다 훨씬 정당하게 해석될 수 있는지 아닌지를 연구해 보아야만 한다. 그림말을 통해서라고 그랬죠. 이게 메타포일 수 있구요. 그림처럼 말했다고 하는 건데 독일말로 빌트 버르트,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빌트 그림이구요. 버르트 이거는 말인데요. 빌트 버르트를 통해서 해석되는 것보다 더 정말 잘 해석될 수 있는지 연구해 보아야 한다. 우리의 지금 역사적, 그러한 보편적 관점으로 생명, 부활, 죽음 이런 생각들이 성서가 부활을 설명하려고 했었던 그림말보다 더 정확하냐? 더 정명하냐 그런 것을 질문해야지. 그런 것 없이 오늘의 요구에만 그냥 따라가는 것도 좀 문제가 되는거죠.

원시 기독교는 이 그림말을 통해서- 죽음에서 깨어난다 이런 것이 그림말이예요- 부활을 묘사해보려고 했다. 또한 이 그림말이 모든 사건들과 관련되어 있는 현실성에 대한 적절한 표현인가를 조사해보아야만 한다.

예수의 부활에 대한 역사적 질문이 불가피하며-역사적 질문이라는 말이 계속 반복되어 있죠. 역사적 질문 그러니까 초기 기독교에서 질문한 내용들을 오늘 여기 지금 우리의 자리에서 질문해야 되는 거죠. 역사적 질문인거예요. 생명에 대한 이해도 교부시대와 오늘 우리가 좀 다르지 않습니까? 그러면 교부시대에서는 그 당시의 역사에서 질문을 해서 대답을 얻은 것이고 오늘 우리는 또 그것을 오늘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질문해야 되는 거죠. 이러한 질문은 불가피하며 또한 그것이 가능한 지에 대해서 분명히 해야만 한다. 기독교가 출발하게 된 그 역사를 이해하려고 한다면 역사적 질문은 불가피하다. 기독교 출발이 역사적이었으니까요. 하여간 이거는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귀중한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이기도 하구요. 역사적이다는 것이요. 또한 우리가 부활한 자의 현재적 현실성을 직접 목도하는 것이 아니라 초기 기독교의 증언에 근거해서 다시 믿고 있을 뿐이기 때문에 기독교인의 입장에서도 역시 예수의 부활을 역사적으로 판단해야만 한다. 즉 이 근거가 오늘의 기독교인들 입장에서 믿을만 한 것인지 질문되어야만 한다. 여기서요. 지금 우리가 부활한 자의 현실성을 직접 목도한 것이 아니라고 했지 않습니까? 그건 사실이죠. 우리는 예수님을 직접 부활체로 경험하지 못합니다. 성서의 보도에 따르면 사도 바울의 경험이후로 그것이 끝났다고 봐야죠. 그 이후로도 예수님을 만났다고 성인들도 있고 한데 그런 것이 있기는 한데요. 그건 부활의 현실성이라고 말하기는 힘든 거죠. 뭐라고 이야기해야 될까요? 자기 혼자 환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런 것들은 사실 말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초기 기독교에서는, 공동체에서는 개인으로도 그렇고 공동체에서도 그렇고 예수 부활의 현실성을 경험했다고 하는 겁니다. 그게 오늘 우리들에게는 없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직접 우리가 목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역사적으로 판단해야만 된다고 하는 것이죠. 과연 성서와 초기 기독교인들이 보도하고 있는 예수님의 부활을 오늘 여기서, 역사는 지금 구체적인 우리의 자리이니까요. 믿을 만한 것인지 질문해야 하는 거죠. 당연한 거죠. 그 다음.

우리가 부활한 자의 현실성을 직접적으로 경험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누가복음에 보도되어 있는 예수의 승천역사에서 잘 드러나 있다. 그게 뭔가 보십시오. 예수가 사도들 앞에 나타난 얼마간의 시기가 지난 후에, 보통 40일이라고 이야기하죠. 그거는 그렇게 정확한 수치는 아니예요. 어쨌던 성서가 그 방식으로, 그 당시의 역사적 해석인데요. 그 방식으로 이야기한거예요. 부활한 자는 그의 공동체와 분리되어 재림 시에나 등장하게 된다는 말이다. 승천했으니까 떠나셨으니까. 그리고 나중에 오리라고 약속을 했으니까요. 누가복음이 그렇게 보도하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더 이상 예수님의 부활한 현실성을 직접 경험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주 초기의 원시 기독교 전승은 부활과 승천을 밀접하게 연결된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의 부활은 가장 초기 증언자들의 경우에 '하늘로', 즉 하나님의 숨겨진 영역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초기 증언자들이, 특히 바울 같은 이들이 누가와 똑같이 생각했다. 똑 같이 생각했다고 하는 것은 요 차이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초기 기독교에서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하나로 생각했는데 누가복음은 좀 구분된거로 생각한거죠. 일정한 시기에 부활한 현실성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났다가 시기가 지난다음에 승천했다고 말이죠. 거기에 바울이 동의한다고 하는겁니다. 즉 부활한 자의 현현인 일련의 사건들이 끝나게 되었다고 말이죠. 특히 바울에게 현현함으로써 끝나게 되었다고 말이다. 이제 예수는 종말 시에야 다시 오게 될 것이다. 그 중간 시기에는 부활한 자와 그 어떤 직접적인 조우가 없으며, 사도의 말씀만이 남아있게 된다. 부활에 대한 사도의 말씀만이 남게 된 것이죠.

이것이 증언하는 바는 예수가 죽음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니라 부활했다는 것이다. 이 증언이 믿을만 하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예수는 현재 살아있으며 활동하고 있고, 또한 특별히 그에게 발생한 부활이 선포됨으로써 현재에도 여전히 지속되는 이러한 부활사건의 현실성이 작용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증거는 언제나 예수가 그 당시에 죽음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는 보도에 기초되어 있다. 이러한 보도 없이 설교단에서 행해지는 모든 현재적 확증은, 즉 예수는 살아있다는 확증은 감동적인 과장이며 공허한 장광설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보도의 확실성에 근거해서 예수가 현재도 여전히 부활한 자로서 살아있다는 사실이 입증된다. 조금 혼란스럽죠. 이야기가 신학적으로 여러 사실들을 배경에 두고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좀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부활하셨다, 우리가 믿는다 우리가 부활한다고 하는 몇가지 명제를 구구단 외우듯이 받아들이고 말뿐인데 판넨베르그는 여러관점으로 특별히 역사적 질문으로 그것을 설명하기 때문에 혼란 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거죠. 요 패러그래프에서 이야기하려고 하는 핵심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우리가 믿습니다. 이렇게 확신하는 것만으로는 예수 부활 사건에 대한 우리의 바른 자세가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죽음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고 하는 사실, 부활했다고 하는 사실을 더 보편적인 역사의 관점에서 이야기할 수 있어야만 그 부활에 대한 신앙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고 하는거죠. 판넨베르그는 그러한 부활이 오늘의 인간학적 차원에서도 타당성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한 작업을 펼치기가 사실은 쉽지 않는거죠. 오늘의 인간론이 뭔지, 인간의 영과 육과 이러한 관계들이 어떻게 해명되고 있는지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필요한 거죠.

예수가 죽음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죽어 묻힌 다음에 곧 제자들에게 생생하게 나타났다는 보도의 신실성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는가? 이제 이 보도는 분명한 시간*에 발생했음이 틀림없는 분명한 사건을, 즉 이미 죽어 무덤에 묻혔던 예수가 현현했으며 빈 무덤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이러한 주장이 옳은지에 대한 시험은 독자적으로 그리고 배타적으로 역사 연구의 수단에 근거해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소위 한번 일어난 사건에 대한 주장을 시험할 다른 길이 없다. 그런 면에서 역사적이고 배타적이라는 말을 바로 앞에서 한 거예요. 역사안에서 한 번 일어난 사건에 대한 주장을 시험할 길이 없다. 이게 조금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처럼 들리나요. 앞에서는 역사적으로 질문하고 또 그러한 답을 찾아야 된다 그러한 근거들을 확보해야 된다 이야기를 하다가 지금은 역사에서 한번밖에 일어나지 않는 것, 반복되지 않는 것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서로 다른 이야기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역사적이라고 하는 것은 실험실에서 반복이 가능한 어떠한 것들에 한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적이라고 하는 것은 오히려 그러한 부분적으로 반복될 수 있는 것들을 뛰어넘는 역사 전체가 말하는 어떤 사실을 가리키는 거죠. 우리는 보통 역사적으로 생각한다고 할때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사실만을 생각하는 거거든요. 어쩌면 우리가 부분적으로 생각하는 그러한 모든 역사적인 사건들은 오히려 추상적일 수도 있어요. 왜냐하면 그것은 지나가다 달라지니까요. 더 나가겠습니다.

역사적 연구방법은 그와 비슷한 주장들을 시험해 보는 데서 찾아볼 수밖에 없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이러한 종류의 시험에 타당한 관점들이 역사 연구를 위한 도구적 요소로서 증명될지도 모른다.

여기 판넨베르그가 각주를 달은 대목이 있어요. 그거는 2천년전에 분명한 시간안에 일어난 어떤 분명한 사건, 부활사건에 대한 각주입니다. 빨리 읽어 보겠어요.

* 사도신경은 예수의 부활이 '사흘 만에'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러한 날자는 고린도전서 15장4절에서 예수는 '성경말씀에 따라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바울의 증거에 근거하고 있다(행 10:40 참조). 이 말씀에 대한 암시는 항상 거듭해서 예수의 부활에 관해 전승된 날자가 구약성경의 분명한 구절과 상관관계에 놓여 있다는 것을 추정하게 만든다. 우선적으로 호세아 6장2절이 이에 해당된다. "이틀 뒤에 우리를 다시 살려 주시고, 사흘 만에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실 것이니, 우리가 주 앞에서 살 것이다." 이 말은 유대세계에서 역시 죽은 자의 종말론적인 부활로 해석되었으며, 따라서 기독교의 부활절 전승에 밀접하게 적용되었다. 예수가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전승은 원시 기독교가 말씀을 증거하는 데 영향력을 끼쳤다. 이 영향력이 첫 기독교인들의 부활절 경험에서 역사적 동기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제거해버릴 필요는 없다. 여기서 말하는 역사적 동기라는 것은 '말씀'의 전망 가운데서 그렇게 읽혀야만 하는 그것이었다. 이 경우에 특별히 예수의 빈 무덤이 발견된 그 시점을 생각했다는 것이다.(판넨베르그 주)

각주로 달려 있습니다. 그 다음요. 144쪽 중간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판단하는 자의 전체 세계 및 자기 경험이 그의 역사적 판단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 경험이 끼치는 영향은 판단되는 사건이, 즉 다른 이들에 의해 주장된 사건이 평범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더욱 확대되기 마련이다. 어쨌든지 여러 종류의 역사가들은 현실성의 한 像에 대해서 나름대로 생각할 수 있으며, 그리고 나름대로 이런 상을 통해서 학문적 전망을 -물리학으로부터 인간론과 사회학에 이르기까지- 받아들일 수 있다. 역사적 판단의 가능성을 둘러싼 이러한 전이해가 개별적인 경우에 그것을 다루어야 할 역사가의 판단을 자주 앞서서 규정하고 한정한다. 무슨 말인가 하면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이런 전이해가 있는 거예요. 이런 거를 전제하고 어떤 물리적인 성질을 연구하는데 이러한 전이해가 모든 사람들의 판단을 미리 앞서서 결정해 버린다고 하는 겁니다. 이 전이해가 무조건 진리는 아니잖아요. 물이 아래서 위로 흐를 수는 없을까요? 이런 말이 여기 필요한 것인지는 제가 잘 모르겠는데 어쨌든 그런 거예요. 역사적으로 뭐를 판단한다고 할 때 어떤 앞에 있는 전이해들이 그 사람의 생각을 미리 결정해간다고 하는 겁니다. 그게 물리학에서도 그렇고 실제적인 사회 과학 역사에도 그렇죠.

이것은 예수의 부활에 대한 질문에서와 같이 일종의 특별한 질문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이미 원시 기독교의 경우에도 일상적 사건이 문제는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예수의 부활은 마지막의 돌입으로서, 곧 모든 인간에게 임할 하나님 통치의 종말론적 현실성의 개시로 이해되었다. 시간이 흐르고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때 원시 기독교는 예수의 부활이 우선적으로 종말론적 현실성의 단독적 개입이었다는 점을 이해하게 되었으며, 그리고 이런 경험은 묵시문학적 종말에 대한 기대의 지평을 심층적으로 변형시켰다.

역사적으로 판단하는 어떤 사람이 예수의 부활과 같은 사건을 현실적인 것이라고 실제로 주장할 수 있겠는가? 그는 그 이외의 역사적 사건에서는 동일한 형태를 찾아볼 수 없는, 그리고 현재 세계의 극단적 변형에 관계되어 있는 종말적 현실성의 개입을 고려할 수 있는가? 그는 이러한 종말적 현실성이 선취적으로 직감될 수 있게 되었으며, 또한 우리의 이 세계 중심에서 이미 충만하게 작용했다는 사실을 가능한 것으로 주장할 수 있는가? 질문이 몇개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어요. 부활을 역사적으로 판단해야 될 우리의 입장이 과연 설득력이 있을까 물론 판넨베르그는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걸 지금 질문형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고 패러그래프가 중요하니까 다시 읽겠어요.

역사적으로 판단하는 어떤 사람이 예수의 부활과 같은 사건을 현실적인 것이라고 실제로 주장할 수 있겠는가? 그는 그 이외의 역사적 사건에서는 동일한 형태를 찾아볼 수 없는, 그리고 현재 세계의 극단적 변형에 관계되어 있는 종말적 현실성의 개입을 고려할 수 있는가? 그는 이러한 종말적 현실성이 선취적으로 앞당겨져서 직감될 수 있게 되었으며, 또한 우리의 이 세계 중심에서 이미 충만하게 작용했다는 사실을 가능한 것으로 주장할 수 있는가? 무슨 뜻인지 전달이 되었죠. 극단적 세계적 변형이 종말에 일어나게 되는데 그런 것이 오늘 이 자리에 개입되어 있다고 개입했다고 선취적으로 당겨졌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거죠. 예수의 부활이 여전히 오늘 이 삶을 지배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거죠. 지금 우리의 경험들은 전혀 그렇지 않잖아요. 똑 같잖아요. 어떻게 우리가 예수의 부활, 이미 예수에게 일어난 종말론적 생명의 선취, 이런 것들을 역사적으로 판단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거죠. 말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사실은요. 그 안으로 들어가서 그런 설득력을 잡아내는게 신학자의 역할이죠. 그 다음.

과거의 사건을 비판적으로 보도하는 역사가는 이러한 것들을 실제로 고려하면 왜 안 되는가? 계속해서 질문 형식의 문장이 반복되고 있어요. 앞의 패러그래프도 그렇구요. 지금 달리 시작하는 패러그래프도 그렇구요. 부활을 역사적으로 질문하고 판단해야될 신학자들이 서있는 자리에 대한 질문입니다.

다시요. 과거의 사건을 비판적으로 보도하는 역사가는 이러한 것들을 실제로 고려하면 왜 안 되는가? 모든 사물의 마지막과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사상이 또 하나의 다른 차원에서 진지한 것이라고 확증되었다면, 그 사상이 현실성에 대한 역사가의 의식으로 작용해서는 왜 안 된다는 말인가? 왜 그것이 안된다는 선입견속에서만 역사를 판단해야할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거죠. 그런 질문이죠. 물리학적인, 생물학적인, 사회학적인, 심리학적인 일들의 경우에서 그러한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학문에서도 새로운 발상을 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전에는 아닌 것으로 일들이, 흔한 것은 아니에요 다른 어떠한 힘들을 찾아내잖아요. 숨겨져 있었지만 어떤 학자들에 의해서 현실성들이 드러나지 않습니까? 이러한 다른 종말론적 현실성이, 우리가 그것에 대해서 메타포에서만 언급할 수 있으며 그것이 우리에게 그 고유성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비밀로 남아있을 경우일지라도, 다 드러나지 않는 비밀로 남아 있을지라도 선취적으로-계속 반복되는 단어예요. anticipation, anticipacion 선취적으로 감지될 수 있었다는 점을 진지하게 숙고할만한 사실로 주장해서는 왜 안 되는가? 그 본질상 이미 충만하고 완전하게 관철될 수 있는 그것만이 발생할 수 있다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 실험실에서 반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들만 그런 것들만 역사에서 일어날 수 있다고 그걸 누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가 하는거죠. 예수님의 부활은 실험실에서의 반복이 아닌 역사에서 일회적으로 일어난 그리고 종말에 모든일에게 보편적으로 발생할, 죽은자로부터의 부활, 그거거든요. 그러한 것이 왜 일어날 수 없다고 단정하는가 하는 말이죠. 역사적으로 판단할때 그런 단정이 무조건 옳다는 근거가 뭔가하는 거죠. 이미 우리의 일상적 현실성은 현실성에 대한 비밀이 벗겨진 상(像) 보다는 훨씬 다층적인 것으로 인정되고 있지 않은가? 네. 참 뛰어난 개신교의 조직신학자의 아주 명쾌한 그러한 신학 해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논리가 정확하구요. 그러면서도 동시에 실증적 학문의 한계를 뛰어넘는 신학적 연구의 방향을 정확히 짚어 주고 있는거죠.

마지막 문장을 보시겠어요? 이미 우리의 일상적 현실성은 현실성에 대한 비밀이 벗겨진 상(像) 보다는 훨씬 다층적인 것으로 인정되고 있지 않은가? 그런 마당에 실험실에서 반복가능한 그런 사실밖에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이 역사를 단정하는가 그런 질문이죠. 마지막 문장은 이해하시겠죠.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리얼리티 현실성이라고 하는 것도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깊다는 이야기예요. 더 다층적이다 우리가 그 어떤 것으로로 완전하게 대답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유기적이고 더 포괄적이다 라고 하는 것이죠. 그것에 대한 예를 제가 더 드릴 필요도 없겠죠. 연필 한 자루만 하더라도 그렇고 내가 누구를 만난다는 것도 그렇고 내가 숨을 쉬고 있는 것도 그렇고 모든 것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비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건 너무나도 곡절과 우연과 사연들이 거기에 들어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일상에서 벌어지는 현실성들을 다 안다 말할 수 없는거죠. 고맙습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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