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강 녹취록 - 제10장 심판(1)

사도신경해설 조회 수 5126 추천 수 0 2009.07.13 09:50:12
판넨베르크의 사도신경 해설 제39강
10장 전능하신 아버지인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다시 오실 것을

네 안녕하세요?
오늘 우리가 같이 공부할 내용은 판넨베르크의 이 책, 사도신경해설 제10장, 전능하신 아버지인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다시 오실 것을, 그러한 제목을 갖고 있는 부분입니다. 우리 공부 순서로 보자면 39강이 되겠습니다. 일주일에 한강씩 해서 지금 39강까지 왔습니다. 7,8월 두 달하면 1년이 다 되는데요. 1년안에 이것을 마칠 것 같지는 않구요. 조금 더 진행 되겠군요. 이 사도신경이 끝난 다음에는 뭘할까 지금 생각중인데요. 조금 더 연구를 해 보겠습니다. 판넨베르크에 따른 책을 해도 좋구요. 바르트의 신학묵상, 번역되어 나온 책도 좋고요. 여러 가지 공부할 내용들이 있습니다. 더 천천히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39장이고 판넨베르크 책으로는 10장입니다. 지난 주 까지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가 마쳤죠. 오늘 부활 이후에 나오는 사도신경의 내용인데 이거죠. 예수님이 승천하셨는데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구요. 그 분이 다시 오신다고 하는 거죠. 이러한 내용들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받아들이기 힘든 것처럼 들릴지 모르겠어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고 하는 이야기, 그리고 심판자로 다시 오신다고 하는 것, 그런 것들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실에서 너무 먼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먼 이야기처럼 들리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죠.

일단은 이러한 설명들이 2천 년 전 고대인들의 세계관에 근거한 내용들이어서 그렇습니다. 그들은 하늘, 땅, 지하 3층으로 우주를 생각했고요. 그러니까 하늘은 공간적인 차원에서 생각했고요. 그리고 그게 뭔지도 몰랐겠구요. 그리고 세계를 주술적인 차원에서도 많이 보곤 했습니다. 하나님 우편이라고 하는 것들이 고대인들의 독특한 하나님 이해에서 나온 것이죠. 사실 엄밀한 의미로 말을 하면 하나님의 오른편 왼편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고대 유대인들은 오른 편이라고 하는 그러한 개념을 통해서 어떤 것을 말하려고 했던 거죠. 이런 것들을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집트나 페르시아나 이런 등등에 잘 알려진 그러한 이야기들일거예요. 어쨌든 고대인들의 어떤 세계관에 근거한 표현들이기 때문에 이러한 내용들이 우리들에게 낯설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게 하나이구요.

두 번째는 우리가 너무 현재 생각하고 있는 이 세계에 고착되어 있다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이러한 시간과 공간, 이러한 세계 역사, 물리학, 동물학적인 여러 가지 그러한 세계를 절대화하는 거죠. 실증적인 과학관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있기 때문에 하나님 우편 재림 심판 이런 표현이 낯설게 느낄 수 있습니다.

두 가지 이야기를 했는데 하나는 사도신경의 내용들이 고대인들의 근원적인 것에 대한 독특한 표상이라고 하는 거구요. 그리고 사도신경을 기록한 그들의 한계이구요. 또 하나는 우리가 지금 너무 지나치게 실증적인 자연과학적인 세계관에 몰입되어 있다고 하는 거죠. 우리들의 책임인거죠. 이 두 가지가 다 변증법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다 지양됨으로 새로운 창조적인 세계로 우리의 해석학적 지평을 넓혀줘야 되거든요. 그러자면 양쪽이 가지고 있는 그러한 문제점을 넘어서야 되죠. 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그러한 신화표상에 무조건 머물러 있으면 당연히 안 되고요. 그들이 그 방식을 통해서 말하려고 했던 내용 안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이 우선적으로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들의 실증적 자연과학관의 한계들을 알고 그 너머에 어떤 세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겠죠. 요 말이 전달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인제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부활을 넘어섰기 때문에 그 뒤의 문제들은 그렇게 어렵지 않게 따라갈 수 있습니다.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고요. 모든 것들이 부활 신앙들을 중심으로 해서 나타난 귀결이라고 할까요. 그런 차원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부활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있기만 하다면 하나님 우편, 심판, 재림 이런 것을 따라가는 데는 그렇게 어려움이 없을 겁니다.

이제 판넨베르크의 책을 천천히 읽어 보겠습니다. 요 부분은 앞서 나갔던 부활에 비해서 조금 더 따라가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고 이유는 일단 부활은 우리들에게 익숙해 있는 거구요. 그리고 성서에서도 그런 것에 대한 설명이 많이 있었고요. 그러니까 판넨베르크도 그것을 어렵지 않게, 그 표현이 적절하지 않는데. 확연한 방식으로 설명을 해주고 있어요.

그런데 요부분, 하나님 우편, 심판 재림, 이런 것들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설명됩니다. 부활문제는 기독교 신앙의 틀안에서 설명되는 반면에 뒷부분, 이런 것은 종교학적인, 고고학적인, 역사비평적인 그러한 차원으로 설명이 되요. 그런 부분에 대한 신학적 전이해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낯설게 다가가지 않을까 이런 생각입니다. 그래도 우리가 일단 한번 따라가보도록 하겠습니다. 151쪽입니다.
 
주제가 밀접하게 연관되기 때문에 앞서 다룬 예수의 부활과 승천에 대한 진술에서와 같이 이번에도 신앙고백의 두 진술*을 다시 한 짝으로 해서 다루어야 하겠다. 주제가 연관된다고 하는 것은 부활을 이야기할때 부활과 승천이 결국은 변화된 새로운 생명에 대한 이해라고 하는 점에서 그 주제가 연결된다고 하는 거예요. 이번에 다루게 될 이 내용도 두 진술이 같이 엮여 있습니다. 하나님 우편과 재림, 판넨베르크는 앞서 부활과 승천을 함께 다루었듯이 이번에도 한 짝으로 다룬다고 하는 겁니다. 그렇지만 그 이유는 다르다고 하네요.

그러나 그 이유는 서로 다르다. 부활과 하나님에게로 사라졌다는(혹은 승천) 이 두 진술은 근원적으로 하나의, 그리고 동일한 사건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예수의 부활은 근원적으로 무덤으로부터 하나님에게로 자리를 옮기는 것으로서 이해되기 때문이다. 부활한 자의 현현은 하늘로부터 일어난 일로서 경험되었다. 네 지금 이거는 앞 부분에 나온 부활과 승천을 함께 나눈 이유에 대한 설명입니다. 당분간 그것이 지속되요.부활과 승천의 시간적 차이는, 두개로 다루어지고 있잖아요. 부분적으로. 원래는 동일한 건데요. 어쨌든 시간의 차이가 나잖아요. 부활 한 다음에 40일동안 있다가 승천한다고 하는 그러한 이야기들이 복음서에 있잖습니까? 그러한 이야기예요.

부활과 승천의 시간적 차이는 원시 기독교 전승의 후기 국면에서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이 말도 좀 재미있죠. 부활과 승천이 시간적 차이가 나는데 부활이 있고 네 40일 있다가 승천했다고 하는 이 부분은 기독교 전승에 예수님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들, 전승요. 그것들이 초기가 아니라 후기에 속한다고 하는 겁니다. 그 말이 좀 이상하죠. 초기와 후기가 있다고 하는 것 말입니다. 분명한 사실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전기와 후기가 차이가 있는거죠. 그럴 수 밖에 없겠죠. 초기에는 잘 모르는 거죠. 열광주의적인 상태죠. 부활 현현에 대한 예수님에 대한 경험, 그런 것이 그냥 열광적인 상태로 나타나고 만다면 후기로 가면 그것이 해석되는 거죠. 차분한 상태에서 자기들의 경험이 뭐냐 대한 충분한 반성, 숙고 이런 것들을 통해서 그 경험들을 신학적인 토대에서 정리하게 되는 겁니다. 네. 우리들이 젊었을 때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가 결혼하고 살아가면서 서로에 대한 이해가 달라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처음에야 무조건 적인 몰입이잖아요. 열광적이잖습니까? 그때 경험했던 것들이 그냥 계속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결혼하고 일상적인 삶을 살다보면 서로 더 깊이 알아갈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에 대한 초기 기독교 전승도 초기와 후기가 달랐습니다. 이 부활과 승천의 시간적 차이는 후기에 나타난 거죠. 초기에는 그러한 차이가 없었던 거죠.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누가복음의 신학에서 그런 차이가 일어난 것 같다(1세기 후반 쯤). 그리고 이 차이는 부활한 자의 현현에 담겨있는 준(準)-지상적 육체성을 특별히 강조한 그 결과다. 부활했다가 40일뒤에 승천했다고 하는 이러한 후기의 전승은 예수님의 이땅위에서 육체적으로 준-이라고 되어 있는데요. 거의죠. 완전한 육체적인 몸은 아니니까요. 준 지상적으로 만났다고 하는 경험을 강조한 결과라고 하는 거죠. 그러니까 40일이라고 하는 숫자는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원천적으로 말하자면 예수의 부활은 바로 그 승천과 똑 같은 거예요. 하나님의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만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예수님과 지상에서 만났다고 하는 사실이 중요해서 그걸 강조하다 보니 한 40일쯤 후에 승천하신 것으로 이야기가 전승된 겁니다.

즉 이것은 이제부터 지상에서 일어나는 해후로 간주되었다는 말이다. 부활절 현현이 지상적 해후로서 이해되었다면 예수가 지상에서 사라졌다는 것은 부가적이고 특별한 사건으로서 파악되어야만 했다. 그렇잖아요. 예수님과 육체적으로 지상적으로 만남을 갖게 되면서 어느때인가 그러한 만남이 없어졌어요.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결국은 승천이라고 하는 말이 나올 수 밖에 없죠. 그렇게 이해할 수밖에 없는 거죠. 여기서 조금 혼란을 겪을 분들이 있을 겁니다. 아까 예수님에 대한 사건들은 실제로는 없었는데 초기 기독교인들이 다만 그렇게 생각하고 꾸민 이야기냐? 하는 그러한 생각을 할 수 있어요. 그런 건 아닙니다. 그들의 경험은 분명한 건데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설명할 수 없기에 승천이라고 하는 말로 설명을 하는거죠.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가 기독교 신앙의 근본을 이야기할 때는 무엇이 더 중심에 있고 어떤 것이 그것에 의해서 나타난 하나의 부수적인 요소냐 그것을 또 구분할 줄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그 분과의 만남이 있었다고 하는 사실이 중심에 있는 거죠. 그렇죠. 그리고 그 다음에 그 분과의 만남이 없어지게 되었는데 그게 승천이라고 그들이 이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연유로 인해서 승천 이야기가 이렇게 제시된 것이다. 여기까지 됐죠? 그게 인제 부활과 승천이 같은 주제로 다룰 수밖에 없는 이유였습니다. 그 다음은 실제로 오늘부터 공부하게 될 내용의 두 가지 주제를 같이 다루어야 된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우편 자리와 심판주로 다시 오신다는 사실의 관계에서 우리는 예수의 부활과 승천의 경우에서처럼 한 사건을 두 가지의 공통된 관점으로 다루는 식으로 접근해서는 안 되고, 부활한 자의 우주적 기능으로, 즉 인간 예수에 대한 부활절 사건의 의미가 세상과의 관계에서 확대된 것으로 다루어야 한다. 관점이 다르다고 하는 거죠. 좀 더 보겠습니다.
이 경우에 심판자로 다시 오신다는 진술과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신다는 두 진술은 상호간 결과론적인 관계를 맺는다. 이것으로 인해서 이러한 결과가 맺어지고 이런 것으로 인해서 저런 결과가 맺어진다고 하는 건데요. 서로간의 원인과 결과, 결과와 원인 그런 관계를 맺는다고 하는 겁니다.

부활한 자가 심판자로 다시 오신다는 것이 이 진술의 근본이다. 요게 핵심이라고 하는거예요. 바로 앞서 말씀 드렸다시피 기독교 신앙은 핵심이 있고 종속적인 요소들이 있습니다. 근본이 있고 거기에 따라오는 부수적인 요소들이 있어요. 똑같은 무게를 갖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종속적이고 부수적인 것이 의미없다고 하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구분은 해야 되는 거죠. 여기에서의 핵심은 부활한자가 심판자로 오신다는 것이다. 고게 핵심인거죠. 부활한자가 심판자로 다시 오신다. 그 다음에 읽어보겠습니다.
 
이에 반해 예수가 이미 현재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창조에 관여했다는 고백은 그것에서 나온 일종의 귀결이다. 갑자기 창조이야기가 나와서 의아할 텐데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고 하는 신학적 해명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제가 보기에 그렇습니다. 사도신경 앞부분에 나와 있는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다고 하는 것하고 연결될 수도 있구요. 더 근본적으로는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다고 했잖아요. 우편이라고 하는 것은 그 장본인과 거의 동일한 권한을 갖고 있는자가 앉는 자리라고 하는거예요. 전능한 아버지시니까 전능하신 분은 창조자 이시구요. 그 분의 우편에 앉아계신다고 하는 말은 창조사건에 관여했다고 하는 것이죠.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함께 하는 것입니다. 네. 그러니까 여기서 두가지를 구분하는거예요. 어떤 것이 중요하고 어떤 것이 종속적인 가를 구분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부활한 자가 심판자로 다시 오신다고 하는 것이 핵심이고 예수님이 현재 하나님과 함께 창조에 함께 관여했다고 하는 고백은 그러한 것에서 나온 일종의 귀결이다. 하나님 우편이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귀결이다. 부활한자가 심판자로 다시온다고 하는 것은 중심에 있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고 하는 것은 앞에 나온 진술에 의한 귀결이다. 그렇게 보시면 됩니다. 그래요. 그런점에서 앞에서 부활과 승천을 동일한 주제로서 일치되지만 이 두번째 다루는 두가지 진술은 다른거죠. 선후가 따로 있는거죠. 더 나아가겠습니다.
 
양 진술의 실제적이고 전승사적 관계는, 네 요 표현도 설명이 필요한데요. 끝이 없죠. 다 설명하려면 그렇습니다. 전승사적인 관계. 이런 것. 네. 넘어가겠습니다. 대충 알만한 분들은 아실거예요. 몇번 전승에 대한 이야기를 했으니까요. 그리고 또 완전하게 모른다고 하더라도 글 읽은데 결정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한 마디만 하고 넘어 간다면요. 부활한자가 심판자로 다시 오신다고 그 사실의 근본에서 이제 하나의 귀결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서 창조사역에 참여했다고 하는 이 말이 나왔다고 하는 이 전체 과정들, 이런 것들을 다 따져보는 것이 전승사적 연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것이 전기에 있었고 어떤것이 후기에 있었고 어떤 것에 의해서 어떤 신앙들이 거기에 따라왔다. 전승사적인 연구라고 볼 수 있어요.
양 진술의 실제적이고 전승사적 관계는 사도신경 문서가 보여주고 있는 그런 차례와 일치하지 않는다. 그곳에, 사도신경문서에, 등재된 순서상의 계산은 (추측 컨데) 보도된 사건의 시간적 순번을 단순하게 따르고 있다. 예수의 지상적 삶과 죽음이라는 사건의 시간적 계산은 그의 현재적 삶에 대한 진술을 따르고 있으며, 따라서 그의 미래에 대한 진술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네 실제 일어난 사건과 사도신경이 말하는 사건의 시간배열, 이것이 차이가 있다는 거죠.

사도신경의 진술들이 몇몇 경우에 다른 순서로 자리 잡히게 되었다는 점이 이미 앞에서 분명해졌다. 왜냐하면 전승사적으로, 그리고 실질적으로 기초가 잡힌 진술들이 우선권을 갖게 되었으며, 원시 기독교의 전승사 과정에서 발전된 그것들도 역시 이런 진술을 따라야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 부활에 대한 고백은 완전히 앞머리에, 즉 그리스도론적인 언급 이전에 놓였어야했으며, 그 다음에 예수 부활과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재림에 대한 문장이 뒤따라야만 했다. 우선적으로 그리스도 칭호와 그리스도의 현재적 통치가 하나님의 관점에서 언급되어야만 할지도 모른다. 이에 관한 것은 곧 그리스도의 선재성(독생자로서의 선재성)과 성육신에 대한 진술이며, 또한 궁극적으로는 그의 대리적 수난에 대한 진술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고백은 실질(實質)적으로 완전히 부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또한 그것과 더불어 예수에 대한 모든 확대된 신학적 진술의 기초를 형성한다.

요부분이 조금 복잡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님에 대한 초기 기독교, 주로 사도들을 중심으로 한 그들의 경험과 그 경험에 근거한 초기 신앙고백들, 그런 것들이 사도신경에서는 좀 순서가 다르게 나와 있다고 하는 겁니다. 말하자면 이런 이야기죠. 원칙적으로만 보자면 사도신경이, 나는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이렇게 되어야 되는 거죠. 왜냐하면 모든 신앙이 초석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부활에 대한 경험을 통해서 예수의 공생애가 새롭게 조명되고 그리고 그의 세례 받으신 사건도 조명이 되고 그때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한다고 하는 것도 고백이 되고 거꾸로 가면서요. 예수님의 탄생자체까지도 소급되구요. 더 나아가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선재성까지 올라가게 되지 않습니까? 복음서도 마찬가지인데. 단순한 시간배열로 나오게 되는거예요. 예수님의 탄생, 세례 받으심, 공생애 이렇게 나오게 된거죠. 이거는 초대기독교의 전승사적 차원에서 보면 순서가 바뀐거다는 겁니다. 앞서 읽은 내용이 그러한 이야기를 하는거예요. 152쪽 밑에서 넷째줄 끝부분 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 부활에 대한 고백은 완전히 앞머리에, 즉 그리스도론적인 언급 이전에 놓였어야했으며, 그리스도가 누구에게 나시고 고난받으시고 하는 그러한 것보다 앞에 들어갔어야 되는거죠. 그런데 사도신경을 비롯한 복음서도 그렇게 하지 않았죠. 그 다음에 예수 부활과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다른 것들이 뒤따라야 하는거죠. 그 재림에 대한 것은 물론 사도신경에서 우리가 확인하듯이 부활뒤에 나온 것이 맞습니다.

네 153쪽 위에서 네째줄을 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고백은 실질(實質)적으로 완전히 부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또한 그것과 더불어 예수에 대한 모든 확대된 신학적 진술의 기초를 형성한다. 부활한 분, 그래서 승천하신 분, 그리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분이구요. 그리고 부활한 분과... 그 부활한 분이기 때문에 그 분은 재림하실 분으로 고백되는거죠. 뒤에서 나오겠지만 그 부활한 분은 바로 마지막에 오게될 인자와 일치되게 되는 겁니다. 네. 여하튼 여기서 재림에 대한 신앙고백은 부활과의 관계속에서 자리를 잡게 되었고 그리고 그러한 재림이 예수님에 관계된 모든 신학적 진술에 기초가 되었다. 그 말씀입니다. 더 나가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기대는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책에 번역해 놓은 것은 조금 다르죠.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기대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요 번역이 제가 너무 의역을 하는 바람에 약간 달라진 것 같습니다. 그것보다는 예수의 재림에 대한 기대는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초기 기독교 안에 그러한 재림에 대한 기대가 자리잡게 되었는데 어떻게 고백이 되었는가 하는거죠.

인류를 심판하기 위해서 세상 끝날에 하늘로부터 오게될 신적 심판자라는 표상은 그리스도 이전 시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것은 많은 종교에서 세계 끝날이라는 사상과 별로 상관 없이도 발견되는, 죽은 자의 심판이라는 표상에 근거하고 있다. 종말에 대한 기대와 죽은 자의 심판은 유대세계와 연결되어 있지만, 페르시아 종교에서도 역시 그렇다. 유대 세계에서 인자(人子)는 종말적 심판자다. 인자의 특징은 에스겔서에 이미 등장하고 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예언자를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겔 2:1 이하). 이 지칭은 여기서 단순히 ‘사람’이라는 뜻이며, 더욱이 특정한 한 사람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예언자를 그렇게 지칭함으로써 그의 인격적 실존에 속한 유일회성에 근거해서 그를 대하려는 것은 아니다. 반면에 직무의 담지자로서나 자기 백성의 일원으로서 그를 대하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를 피조물로서 대하려는 것이다. “너, 사람아”*라고 말이다.

*독일어 원문은 이렇다. “Du einzelner Mensch”. 참고적으로 에스겔 2:1의 말씀은 이렇다. “사람아, 일어서라, 내가 너에게 할 말이 있다.” 즉 인자라는 단어는 사람과 거의 똑같은 뜻인데, 유대의 묵시문학적 해석과 기독교의 종말론적 해석을 통해서 종말에 오게될 세계 심판자로서 개념화되었으며, 기독교 공동체는 이 인자를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시하게 되었다. 판넨베르크는 이런 동일화 과정에 초대 교회의 전승사가 개재해 있다는 점을 아래에서 설명한다.

다니엘이 심야 환상 중에 ‘인자’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았을 때(단 7:13), 여기서 주로 다루어지는 것은 역사의 종말에 등장할 하나님 나라의 인간적 성격에 대한 상징이다. 이에 앞서 언급된 짐승모습이 뒤이어 등장하는 세상나라를 상징화하고 있는 것과 같다. 에녹 묵시문학**에서는 마지막 때 하나님의 나라를 불러올 이러한 ‘사람’이나 인자가 그야말로 구체적으로 인간적인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에녹문서, 묵시문학이요. 앞의 9장의 역주가 있다고 했는데 우리가 앞에서 공부할때 확인했나요? 잠간 볼까요? 에녹은 에녹서라고 합니다. 죽지않고 하늘나라로 갔다는 에녹이야기인데요. 136쪽에 있군요.

* 묵시문학 문헌인 에녹서는 야렛의 아들이 기록한 여러 위경들 중의 하나다. 거기에는 창세기 5:18-24에서 볼 수 있는 대로 에녹이 하늘로 옮겨져서 하늘나라의 비밀들과 하늘에서 미리 예정된 인간사의 과정을 보았다는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다. 신약성서 기자들도 이 에녹서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참고적으로, 묵시문학 문헌들은 주로 기원전 2세기 어간에 유대인들에 의해 형성된 일종의 문학 장르다. 악한 옛 시대(과거의 에온)는 곧 멸망하고 선한 새 시대(새로운 에온)가 곧 도래할 것이라는 강한 기대가 여기에 자리하고 있다. 신약성서에서는 요한계시록이 대표적이다.

 에녹 묵시문학**에서는 마지막 때 하나님의 나라를 불러올 이러한 ‘사람’이나 인자가 그야말로 구체적으로 인간적인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인자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마지막 때의 심판이다. 예. 인자 마지막 때 심판, 일치되고 있어요. 예수님에 대해서 인자라는 칭호가 많이 붙었죠. 그게 예수님 스스로 내가 인자다 스스로 말씀하신 것인지 혹은 인자의 사건에 대해서 예수님이 설명하시고 그대로 살았기 때문에 제자들이 예수님을 인자와 일치하는 분으로 생각했는지 이러한 문제들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 두가지는 별로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닌데 말씀드리다 보니 서로 다른 것처럼, 서로 다른 주제처럼 이야기가 나왔군요. 그렇지 않습니다. 요 대목에서 제가 말씀드리려고 했던 것은 이겁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해, 혹은 경험, 그런 고백들, 예수님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꼭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나온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미세한 차이도 있고 어떤 계시 사건의 깊이도 있습니다. 고러한 부분들을 우리가 잘 살펴야 되는거죠. 예수님에 대한 칭호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인자라고 하는 이것만이 아니라요. 메시아, 그리스도 이거는 서로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니 똑 같다고 하더라도요. 다윗의 아들이라든지 퀴리오스라든지 정말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모든 칭호들이 초기 기독교인들의 하나님 경험에서 나온 것인데 그런 것들이 각 지역마다 시기적으로 구별됩니다. 네. 인자의 중요한 기능은 마지막때 심판이다. 그런 결론이 쉽게 나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을 인자로 고백하게 되면 마지막때 심판자로 오게 되리라는 것은 당연히 따라오는 거거든요. 네 더 보겠습니다. 154쪽 네째줄입니다.

‘사람’이나 인자가 마지막 때 하나님이 계신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나타날 심판자다. 유대인들의 이러한 기대는 심판하기 위해 예수가 다시 올 것이라는 기대를 통해서 원시 기독교 공동체에 의해 예수와 동일시되었다. 예수의 사라짐이 어떻게 미래의 세계 심판자라는 형태와, 그리고 인자라는 형태와 연관되는 것일까? 이를 견인한 동인들 가운데서 무언가가 드러날 수 있을 것인가? 이렇게 판넨베르크가 질문하는 겁니다. 그것을 설명하려고 하는 거죠. 어떻게, 그리고 왜 예수의 승천이 세계 심판자와 연결되구요. 그리고 또 인자라는 것과 연관되는 것일까? 그것을 설명합니다. 길게 설명해요. 그 다음에 나오는 패러그래프가 한쪽을 훨씬 넘어가는데요. 그걸 읽어볼까요.

예수 스스로 앞서 활동했던 세례요한처럼 모든 개연성을 열어두고 인자가 곧 심판할 것이라고 말했다. 복음서에 전승된 인자에 대한 예수의 언급은 서로 다른 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재미있죠. 인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그것도 똑같지 않고 그것을 연구조사하면 서로 다른 그룹을 이룬다고 하는 겁니다.

이 그룹에는 물론 인자를 미래의 세계 심판자로 암시하는 권위 있는 말씀들 중의 일부가 포함되어 있다. 어떤 말씀들 가운데서 예수는 인자를 자기와 다른 인격체로 구별하고 있다. 인자가 자기가 아니라 다른 분으로 생각하는 것, 구분하는 겁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 사람을 시인할 것이다.”(눅 12:8, 참조- 눅 9:6, 막 8:38). 부활절 이후 공동체는 이 말씀을 다르게 구성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들이 예수와 도래할 인자를 하나로 보았기 때문이다. 고게 두가지 충돌하는 거예요. 예수는 자기를 인자와 구별해서 이야기했는데 초기 기독교는 그것을 하나로 보았다는 겁니다.

마태에 의해 인용된 말씀은 다음과 같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 사람을 시인할 것이다.”(마 10:32). 누가복음과의 표현에서 차이가 나는 것은 양 문장의 중간에 예수의 나(Ich), 나 에고라는 단어다. 이것이 바로 원시 기독교 공동체가 예수와 인자를 일치시킨 단서다. 예수는 구별했지만 원시 기독교가 일치시킴으로서 이 나라고 하는 인칭 대명사가 이 문장안에 들어간 겁니다.

역사적 예수는 마태복음이 인자에 대해서 진술하는 것과는 다르게 말했겠지만, 역사적 예수는 실제적 예수요. 마태복음은 다르게 말했지만, 인자를 구별하는 방식으로 말했지만, 즉 인자를 자기와 구별하였겠지만, 도래할 인자의 심판을 통해 자신의 고유한 사신과 태도를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요거요. 예수님이 인자와 자기를 구분하기는 했지만 도리어 인자의 심판을 통해서 그것을 설명함으로서, 그것을 엄중한 사태를 말함으로서 예수님의 독특한 복음, 그러한 사신이라고 하죠. 복음선포, 그러한 메시지, 그런 거를 확실하게 보여주었다고 하는거죠. 전달이 되었죠.

부활절 이후로 기독교 공동체는 지상적 인간인 예수와 미래에 하늘로부터 도래할 세계 심판자 사이에 놓여있는 간과될 수 없는 차이를 포기했다. 하나로 보았다고 하는 거죠. 거기에는 차이가 있는데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거죠. 그걸 버린거죠. 하나로 본거죠. 더 보겠습니다.

인자가 유대적 표상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예수는 부활을 통해서 천상적 모습을 갖게 되었다. 신적인 모습을 갖게 되었다. 하나님과 같은 차원에 도래하게 되었다. 미래에 대한 기독교의 희망은 그에 의해 선포된, 신적인 모습을 갖춘 예수에 의해 선포된 하나님 통치의 완성을 위해 부활한 자의 재림을 지향하게 되었다. 이 경우에 본의 아니게도, 뜻하지 않게도 부활한 자의 기능이 마지막 심판에서 기대된 인자와 매우 광범위하게 융합됨으로써 기독교 공동체는 예수를 기대된 인자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네 요문장에서 본의 아니게도 그렇게 되었다고 하네요. 제가 원서를 확인해 보지 못했는데요. 이거는 본의 아니게도는 보통 우리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어요. 여기서는 그렇게 부정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전승사적인 맥락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측하고 준비했던 것이 아니라 의외의 방식으로 그러한 깊은 인식에 도달했다고 하는거죠. 인자와 예수의 일치는 저들이 생각하지 못했지만 부활한자, 신적인 모습을 갖게 된자 그러한 쪽으로 신앙이 확대되면서 결국 마지막때 오게될 인자와 하나라는 인식까지 도달하게 된 겁니다.

아마 제자 중의 몇몇은 이미 부활 현현에서 즉시로 예수를 인자로 간주했을 것이다. 이 부활 현현이 하늘로부터 발생한 사건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하늘, 신적인 모습, 하나님 우편 이런 것들이 결국 마지막 종말의 인자에 대한 표상들이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결국 하늘로부터 발생한 예수의 현현은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올 게 틀림없는 인자 상과 매우 가깝게 연결되어서 예수와 인자 사이에 그 어떤 틈도 개입할 수 없게 되었으며, 더구나 세상심판을 하나님 통치의 궁극적 건설과 구분하지 않게 되었다. 예수 자신이 자기의 사신을 인자 개념과 연결시켰다. 자기를 인자라고 하지 않았죠. 인자를 증거했죠. 마치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듯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선포한 메시지를 인자의 경험과 연결시켰을 것이 분명합니다. 내가 인자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인자개념에 본인의 메시지를 일치시켰습니다. 그러한 확신을 하고 있었던 거죠.

이 인자의 판단이 틀림없을 것이라고 그는 기대했다. 예수는 기대했다. 부활절 이후 이제는 인자의 미래적 기능이 예수출현과 상응한다고 생각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양자가 동일시되었다. 네. 조금 복잡한 내용들이었습니다. 승천하신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고 하는 사실과 그가 마지막때 심판하러 다시 오신다고 하는 이 두사실이 예수의 부활에 대한 신앙고백에 근거해서 전승사적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여기서 인자 대목이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죠. 부활은 곧 신적인 차원으로 돌입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만약 옳다고 한다면 그것은 당연히 이 세계를 심판할 인자임에 틀림없다는 그러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겁니다.

네. 노파심으로 앞서 강의 중에 드린 말씀이지만 다시 말씀드리겠어요. 이렇게 강의를 하면서 염려스러운 것이 그렇게 사도신경을 갈갈이 찢어서 분석하다보면 그게 남는 것이 뭐냐? 그것이 우리의 신앙에 실질적으로 뭐가 도움이 되겠냐? 이것도 의심하고 저것도 의심하고 이게 중심이고 저게 종속적인 건지 그런 것에만 생각이 머물지 신앙의 깊이로 들어가는데 오히려 방해거리가 아니냐 생각될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고만 일단 말씀드려야 되겠네요. 우리가 이렇게 사도신경의 내용들을 자세하게 역사적으로 살피는 이유는 우리 신앙의 근원을 찾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일어났던 어떤 예수에 대한 경험과 그것에 근거한 모든 신앙고백들이 어떤 사람이 기도하다가 번쩍 좋은 생각이 나서 만든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저들의 신앙 현장안에서 일어난 놀라운 해석학적 결과라고 할 수 있어요. 바로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와 만나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그런 방식으로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거죠. 우리는 그것을 바로 이해하려고 하는 준비를 하는 겁니다. 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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