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강 녹취록 - 제10장 심판(2)

사도신경해설 조회 수 4887 추천 수 0 2009.07.19 17:34:33

네 안녕하세요?

판넨베르크 사도신경해설 공부 마흔번째 시간입니다. 제가 갖고 있는 책으로 155쪽 마지막줄부터 시작합니다. 지난 39강에서 우리가 다룬 마지막 대목은 인자에 대한 것이었어요. 인자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는 문자적 의미인데요. 문자적 의미만 알고 있으면 충분하지 않죠. 그 인자라고 하는 말, 이 단어, 이 문자 이것이 어떤 전승사적 과정을 거쳐 왔는가 하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 깊숙이 들어가는 것은 전문적 신학자들이 할 몫이니까 일반 신자들이나 또 일반 목회자들에게는 직접 해당이 되지 않습니다. 전문가들이 해명해 놓은 것을 이해할 수는 있어야 되거든요. 이해하기 위해서는 최소한도 기초적인 방향 같은 것들, 기초적인 것들 같은 것은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인자라고 하는 게 왜 갑자기 예수님이 말을 꺼냈다거나 어떤 한 두 사람이 고 의미가 필요하겠다 싶어서 꺼낸 것은 아닙니다. 오랫동안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생활안에서 숙성된 그러한 용어예요. 특별히 묵시문학하고 많이 연구되요. 우리가 사도신경 공부를 하면서 묵시문학이라고 하는 말을 많이 했어요. 묵시 사상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고 묵시록 뭐 그렇게 이야기해도 됩니다. 아포칼립틱이라고 하는 단어예요. 이 묵시문학 이것도 유대인의 큰 사상사적 맥락안에서 이해될 수 있는겁니다. 인자가 바로 그 안에 있기 때문에 제가 묵시 문학을 거론한거예요. 묵시문학의 핵심은 이 세계를 선악 이원론으로 구분한다는 겁니다. 현재의 세상은 곧 심판 받아야될 그러한 악한 세계구요. 오게될 세계, 그거는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는 세계인거요. 이렇게 현재 있는 세계와 오게될 세계를 이원론적으로 구분했습니다. 현재있는 세계는 악이고 오게될 세계는 선입니다. 그러한 세계이해가 유치하다. 혹은 그렇게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그 생각을 바꾸어야 됩니다.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세계와, 물론 묵시문학적인 세계이해가 다르기는 하죠. 그래도 우리 입장으로만 그들의 생각들을, 잘못한 것을 매도할 수 없습니다. 고대인들이 어떻게 보면 이 세계를 더 정확하게 이해했다고 볼 수 있어요. 이러한 것들은 광범위한 공부가 필요한 내용들입니다.

한가지만 예를 들께요. 성서에도 자주 나와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 귀신들렸다하는 이야기가 있잖아요. 예수님께서 그 귀신을 내쫓아서 제 정신을 차리게 했다는 이야기들입니다. 우리들은 고대인들이야 정신과적인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정신이상적인 현상을 귀신들렸다고 이야기했을 뿐이다라고 이야기 할 수 있어요. 오늘은 모든 그러한 문제 정신과적인 질환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고대인들이 바라보는 인간이해는 다르다. 이러한 이야기들이 틀린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봐야 되요. 고대인들이 귀신을 이야기한 것은 사람의 깊이에는 인간이 도구적으로 처리할 수 없는 어떤 세력이 작용하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철학적 용어로 이야기하자면 존재론적 악의 활동이라고 하는 거죠. 고대인들이 이걸 그렇게 본 이유는 타당합니다. 인간세상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들을 보면 도저히 그 어떤 악한 영이 작용하지 않으면 그 어떤 것으로서도 해명할 수 없을 정도로 악한 일이 벌어지잖아요. 귀신들린거는 개인의 정신적인 질병이구요. 그걸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는 어떤 악한 힘으로 본거구요. 그 외에도 인간이 죽인다거나 뭐 그러한 일들도 사실은 비슷한 일들입니다. 아무리 도덕적인 훈련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착해지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근원적인 어떤 악한 세력을 보는 거죠.

묵시문학이 오늘의 세계를 악하게 보고 심판, 멸망받을 수 밖에 없다고 본 것은 잘못 본게 아닙니다. 그런 관점으로보면 오늘날에도 세계는 마찬가지거든요. 이러한 묵시문학의 핵심은 세계심판입니다. 그 심판할자가 바로 인자라는 거예요. 세계심판할 자와 예수님안에서 일치가 이루어졌습니다. 복음서안에서 그러한 일들이 벌어졌어요. 지난 주 마지막 대목에서 우리가 보았지만 예수님은 자기와 인자를 자기를 구분했는데 어떤 부분에서는 동일시하는 그러한 표현들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스스로는 인자의 심판, 그의 행위를 대상으로 보고 거기에 충실했는데 결과적으로 초기 기독교는 그 인자와 예수님을 동일시하게 된거죠. 왜 그렇게 하게 되었느냐 그 이유들도 있습니다. 아무 근거도 없이 무턱대고 광신자들처럼 예수님은 모든 것이다. 메시야이고 인자이고 퀴리오스이고. 그렇게 일방적으로 근거없이 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도 없습니다. 그럴만한 근거들을 갖고 이야기한 거예요. 기독교 교리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무지몽매하거나 아주 일방적이거나 보편적인 진리의 토대가 없다거나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금 사도신경을 공부하고 있는데 여기에 나와 있는 많은 내용들도 다 근거가 있는 것들이에요. 신자들이 그런 근거들을 모르고 무조건 도그마틱하게만 일방적으로만 교리적으로만 이해해 버리면 기독교 신앙의 내용은 형해화되는거죠. 동정녀 마리아에게 태어나시고 이런 것들을 문자적으로만 사람들에게 강요하게된다면 그러면 기독교신앙의 내적인 영적 다이나믹 이거는 말라버립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가 처녀가 아기를 낳았다고 하는 그러한 차원이 아니라 생물학적인 초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예수가 영지주의자들이 이야기하듯이 가현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구체적 역사적 실존의 인물로 우리에게 오셨다고 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게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라고 하는 사도신경의 한 대목의 실질적 내용이구요. 모든 근거를 갖고 기독교 교리가 형성되었습니다. 인자도 마찬가지고요. 그 문제를 판넨베르크는 오늘 우리가 같이 공부하게될 부분에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천천히 따라가 볼까요.

이 모든 것은 무언가 우리와 관계있는 것일까? 앞서 말한 그 모든거요. 인자와 예수의 동일시 이런 문제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은 우리와 관계가 있는 것일까? 인자 개념은 기독교 전승에서 이미 초기부터 퇴색되어 있었다. 다른 예수님 칭호에 비해서 인자라는 칭호는 주목을 받지 못했다는 거죠. 부분적으로만 자리를 잡고 있어서요. 그렇게 하게된 이유들이 많이 있는 겁니다. 다시 보겠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은 우리와 관계가 있는 것일까? 인자 개념은 기독교 전승에서 이미 초기부터 퇴색되어 있었다. 이방 기독교회는 예수의 재림을 세계 심판과 연결시켰지만, 인자에 대해서는 별 말이 없었다. 이방 기독교, 이 말은 곧 유대 기독교라고 하는 말과 관계되는 거죠. 초기기독교회가 유대 기독교 공동체와 이방 기독교 공동체와 구분이 되어 있습니다. 그게 일반 신자들은 이해가 안될거예요. 교회가 처음부터 하나이지 이방기독교회는 어떻고 헬라기독교회죠. 이방 헬라는 어떻고 유대는 어떠냐 뭐냐 도대체. 처음부터 완전하게 주님을 중심으로 하나의 교회로 시작된 것이 아니냐.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큰 착각이예요. 아주 다양한 그러한 공동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크게 나누면 이방 기독교 공동체와 유대 기독교 공동체인거죠. 이방 기독교, 예루살렘이 아니라 바깥지역으로 확장되어 갔던 기독교, 주로 바울이 중심적으로 활동했죠. 여기서 예수의 재림은 세계심판과 연결시켰지만 인자에 대해서는 별말이 없었다. 바울의 편지에도 인자에 대한 이야기는 제 기억에도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심판은 있죠. 그러나 재림과 심판과 연결되는 거는 있는데 인자와 연결되는 것은 찾아보기 힘들어요.

다른 한편으로 예수는 첫 사람의 죄를 극복하고 인간의 운명을 실현할 새로운, 두 번째 사람이라고 일컬어졌다. 바울은 이 사실을 이미 로마서 5장과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진술하고 있다. 인자의 유대적 형태에서 그 경우를 볼 수 있는 것처럼, 새로운 사람의 계시는 여기서 예수의 부활과 연결되는 것이지 세계 심판과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제 예수의 실존 가운데서 -그의 가르침과 그의 고난과 그를 통한 죽음의 극복 가운데서- 사람의 인간성이, 즉 인간으로서의 운명이 실현되었다고 하는 생각은 오늘의 기독교 신앙에서도 역시 기초다. 기본적인 것이다. 중심이다. 어느 정도로 우리 자신과 모든 다른 인간들이 우리의 생명 가운데서 참된 인간성을 이룰 수 있는가 하는 점에서, 그러한 부분에서 예수가 준거라는 사실이 이러한 기독교 신앙의 확증에 속한다. 중요한 부분이예요. 예수가 준거라고 하는 거죠. 뭐를 하는데 준거냐? 기독교인이나 그 이외의 모든 인간들이 참된 인간성, 인간됨, 인간다움, 바로 인간을 이루는, 얻는 그러한 길에서 그렇습니다. 쉽게 말하면 참된 인간이 되는 거는 예수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거죠. 그 다음에요.

이러한 준거, 기준이라는 말로 바꿀까요? Criterium이라는 말인데요. 준거로부터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불문하고 어느 누구도 제외될 수 없다. 이것은 심판하기 위해 그리스도가 재림한다는 기대에 해당되는 문제다. 그것은 현재적 생명의 한계를 뛰어넘는 미래를 지향하고 있다. 그 이유는 신 없이 행동하는 자에게 행운이 임하며, 인간의 인간성을 조롱하는 행동과 태도가 팽배하며, 그리고 무죄한 자가 고난 받는다는 사실이 이 세상에서 매우 확실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에 맞서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그리스도가 재림할 것이라는 기대는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각기의 시대정신에 베여있는 강압적 태도와 압력에 저항할 수 있게 하는 확실한 토대다. 네 요 대목이 참 중요하군요. 예수님이 바로 우리가 참된 인간이 되는 결정적 기준인거예요. 이게 우리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미래를 지향하고 있다고 하는 거예요. 미래. 현재, 대립대항 개념이죠. 과거 현재 미래 우리는 현재만 살고 있어요. 과거가 어떠했다고 하는 것을 조금 알고있기는 있죠. 그게 역사입니다. 과거로부터 현재까지의 그 과정이 역사죠. 우리는 거기서 무엇이 가장 확실한 진리인가 그것을 분석하면서 삽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에서는 그것과 조금 다른 각도로 세계를 보는 거예요. 과거의 여러 가지 일들이 결과를 맺어서 현재가 되었다고 하는 그러한 관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래의 전망에서 오늘을 보는 거죠. 우리가 미래를 이렇게 미래의 관점들이 우리들에게 중요하다고 하는 이 말의 이유가 다음과 같은 거죠.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보면 무죄한 자가 고난을 받는다고 하는 사실이 분명하잖아요. 그리고 인간성을 조롱하는 행동과 태도 이런 것들이 많잖습니까? 이러한 오늘 현재의 삶에는 인간성이 아직 결코 완성될 수 없는 거죠. 여기서 참된 생명을 획득할 수가 없는거죠.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비정상적인 일들이 끊임없이 벌어지는 거죠. 현재는 그렇습니다. 비열하고요. 교만하고 야만적이고 아주 위선적이고 그러한 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잖습니까? 이러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적 삶의 형식의 한계를 뛰어넘는 미래에 관계해서만 우리는 예수가 모든 생명을 얻는 기준이라고 하는 사실을 확증할 수 있는 거죠. 이렇게 그 미래는 이제 심판이구요. 재림주의 심판이구요. 생명의 완성이구요. 그것이 부활현상을 통해서, 그 사건을 통해서 일어났다고 믿는 거구요. 이러한 미래를 지향하는 우리 기독교 신앙에 분명하게 선다면 그러면 시대정신에 굴복하지 않을 수 있는 겁니다. 네 156쪽의 아래 패러그래프입니다.

오늘날도 역시 이런 확증의 현실적 토대를 부활절 사건이 제공한다. 이러한 확증이라고 하는 것은 뭐예요? 앞에 나왔습니다. 시대정신에 우리가 굴복하지 않고 대항할 수 있는 거죠. 이러한 토대를 우리가 확보하려면 그 토대가 부활절 사건에 있다고 하는거죠. 부활 사건이 바로 시대정신, 비열하고 무죄한 자의 고난이 있는 이 시대정신에 맞설 수 있는 토대인 겁니다.

예수의 사명이 십자가 처형으로 분쇄되고 그의 제자들 역시 뿔뿔이 흩어진 다음에, 여기까지가 인간의 구체적인 실증적인 역사에요. 예수의 사명이 십자가 처형으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인류를 구원하겠다고 작심한 것은 아니거든요. 십자가 처형은 분명히 예수님이 생각하셨던 하나님 나라의 실패라고 할 수 있어요. 결국 악이 승리한 사건이니까요. 제자들도 역시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된 이후로 모두가 뿔뿔히 흩어져 버렸죠. 여기까지가 인간의 실증적 역사입니다. 어떤 죽음을 불러오는 악한 세력에, 역사가 바로 여기까지입니다, 구체적으로 인간을 죽일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 수는 있어요. 고기까지요. 그 다음에 하나님은 부활사건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리시며 예수 사신이 요구하는 바를 확증했다. 즉 인간의 구원과 멸망은 하나님의 미래에 참여하느냐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따라서 예수에게 참여하느냐에 달려있다고 하는 사실을 확증했다고 하는겁니다. 뭐를 통해서요. 부활의 사건을 통해서 말입니다. 부활 이전까지의 인류의 실증적 역사만 본다면 그러면 우리는 기독교가 말하는 인간의 참된 인간성, 인간다움, 인간자체를 확보할 길이 없습니다. 그런 것은 기껏해야 교양인이 되는 거죠. 복지를 향상시킴으로서 조금 세련된 삶을 살아가는 겁니다. 그것마저도 쉽지 않는 이야기이긴 해요. 어쨌든 그런 것들은 구체적인 역사에서 우리들이 추구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계속 그속에서도 여러 가지 악순환이 일어나기도 합니다만. 어쨌든 인간의 역사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죠. 네. 기독교 신앙은 전혀 다른 관점으로 생명이 완성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게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생명의 형식을 넘어서는 미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죠. 그것이 예수의 부활을 통해서 기독교인들에게 주어졌다고 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요.

예수가 궁극적으로 요청한 것은 이제 죽은 자의 부활이라는 새로운 인간의 궁극적 현실성이 출현함으로써 신뢰할만한 주장이 되었다. 낱말과 문장이 좀 까다롭구요. 예수가 궁극적으로 요청한 것은. 주어예요. 주부예요. 문장 끄트머리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신뢰할 만한 주장이 되었다.’ 술부라고 할 수 있네요. 주부가 술부가 되어서 문장이 되었습니다. 예수가 궁극적으로 요청한 것은 신뢰할만한 주장이 되었다. 중간에 왜 그렇게 되었느냐 하는 설명이 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라는 새로운 인간의 궁극적 현실성이 출현함으로서 그렇다는 거죠. 보세요. 죽은자의 부활이 새로운 인간의 궁극적 현실성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러한 말을 들어보셨나요? 부활하면 그냥 사는 것, 새롭게 사는 것,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 그렇게 사는 것, 그게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 내용을 알아야 하는데 판넨베르크가 설명하는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가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부활이 뭐냐 이런 질문에 이렇게 대답할 수 있어요. 새로운 인간의 궁극적 현실성이다. 멋진 표현이죠. 새로운 인간, 옛 인간이 아니라 새로운 인간, 여기서 새롭다는 것은 무늬만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무늬가 아니라 실질이죠. 새로운 인간의 궁극적 현실성, 현실성이요. 참된 것, 있는 것, 리얼리티 이런 것들을 이야기합니다. 죽은자의 부활은 새로운 인간의 궁극적 현실성인데 예수의 부활이 드러났다고 하는겁니다. 예수의 부활안에서 죽은 자의 부활이라는 새로운 인간의 궁극적 현실성이 출현한 거죠. 이걸 통해서 예수의 선포가 믿을 만한 주장이 되었다고 하는겁니다. 예수가 궁극적으로 요청한 것이 무엇일까요? 예를 들어 산상수훈에 나온 대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또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을 허락하시리라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 그런 모든 요청들, 그런 것들이 신뢰할 만한 주장이 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이러한 문장을 읽으면서 여러분들은 어떠한 생각이 드나요?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이 신이시니까 모든 것들을 알고 그대로 사셨다. 그런 정도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는 않는거죠. 예수님도 하나님을 대상으로 여기고 생각을 했고요 아빠 아버지라고 불렀구요. 나름으로 관점을 가지고 있었구요. 인자에 대해서도 그렇고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도 그렇고 하나님 자체에 대해서 그러한 관점들을 갖고 계신 겁니다. 거기에 따라서 행동하신 거예요. 그게 십자가 사건까지에 이른 과정만 본다면 실패했어요. 제자들도 쓸만한 친구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죽은 자의 부활이라는 새로운 인간의 궁극적 현실성이 출현함으로서 그가 부활함으로서 그의 모든 주장이 신뢰할 만한 것이 되었다고 하는 거죠. 그 다음.

이 부활사건에는 이미 예수가 최종적 기준이며 하나님의 권위로 심판할 세계 심판자라는 사실이 놓여있다. 예수와 그의 사신, 즉 그의 복음 선포를 거절하는 자는 다음과 같은 예수의 말씀으로 심판받는다. “내가 말한 이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요 12:48) 다음 패러그래프입니다.

도래할 세계 심판자가 바로 예수라고 하는 점에서 그의 심판은 더 이상 미래만을 준비하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는 미래를 지향한다고 했잖아요. 현재적으로는 불합리하고 이상한 일들이 많이 있는 것이죠. 그 안에 머물러 있죠. 그렇기 때문에 미래의 심판을 통해서 세계를 완성하신다고 하는 그 관점에서만 우리는 예수가 참된 인간성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 것에 관한 설명을 지금까지 드린 거예요. 그러나 그 미래적인 관점이 그냥 미래로만 남아 있는 게 아니다 라는 거죠. 그렇다면 현재적으로도 미래적 통치가 일어난다는 이야기죠. 그게 다 어떻게 일어나느냐? 그걸 우리가 무엇을 보고 어떻게 알 수 있느냐하는 것을 설명하려고 하는 겁니다. 가보겠어요.

비밀스런 방식으로 이미 현재적으로 그 일이 일어난다. 생명을 완성할 심판이 일어난다는 거죠. 그러나 그 심판은 우선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개시로서, 시작한다. 그리고 죽은 자의 부활과 창조의 갱신으로서 계시된다. 여기서 계시는 열린다고 하는 거구요.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 도래와 연결된 세계 심판은 이미 비밀스럽게, 비밀가운데서 결정된 모든 것을 지금 여기에 노출시킨다. 문장이 조금 까다롭죠? 이런쪽으로 우리가 훈련을 받지 않는 상태에서는 따라가기 힘든 문장입니다. 쉽게 말하면 세계심판은 비밀스럽게 이미 현재에 드러나 있다고 하는 거예요.

기독교인들도 역시 이 심판대 앞에 서야하며, 그리고 명목상 기독교인이 아닌 이들도 하나님의 통치와 그 새로운 생명의 불빛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여기도 중요한 대목입니다. 구원이 교회에만 있느냐 없느냐는 이야기잖아요. 쓸데없는 이야기들입니다. 심판, 구원, 하나님의 통치 이런 것들은 교회안에 들어와 있느냐 명목적으로 기독교인이냐 아니냐 그런 기준으로 달라지는게 아닙니다. 우주론적으로 온 세계에 빛으로 임한거죠. 그 심판대 앞에 모두가 다 기독교인들은 그걸 미화해갖고 금방 구원받는다 그렇게 될 수 없다고 하는겁니다. 오히려 거꾸로 될 수 있는 겁니다. 판넨베르크가 계속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비록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는 많은 이들이 예수에게 계시된 인간의 운명과 더불어 자신에게 다가온 진리 앞에서 결국 예수와 분리되어 버리는 중에서도 말이다. (마 25:31-44 참조) 아마 이 구절은 마지막 심판시에 양과 염소가 오른쪽과 왼쪽에 나뉘어진다는 이야기요. 전혀 주님을 위해서 한 일이 없었던 것 같은 사람이 양처럼 오른편으로 분류되고 구원받고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일했다고 하는 사람이 오히려 염소쪽에 분류되는 비유 이야기예요. 구원에서 배제된 사람은 억울한 거지요. 왜 그렇게 되냐? 주님을 위해서 일했는데 왜 그러느냐구요. 반대로 주님을 위해서 한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구원받는 사람들은 또 그게 놀라운 거죠. 아무것도 한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심판자는 모든 일들이 바로 나를 위해 한 것이다. 배고플 때 먹을 거를 주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다고 하는거죠. 네 이렇게 명목적으로만 기독교인인 사람들이 예수와 분류되는 일이 벌어지지만 그런 가운데 기독교인이 아닌 이들도 하나님의 구원의 빛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심판이 현재적으로 우리들에게 은폐방식으로 임하고 있다고 하는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의 심판자가 기독교 신앙이 지금도 역시 의존하고 있는 예수 말고는 결코 다른 이일 수 없다는 기독교적 확신의 근거는 여전하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이제 모든 영원에 돌입하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은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갔다.”(요 5:24) 이미 그렇게 심판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하나도 그런 심판이 일어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는 분도 있겠군요. 비밀한 방식이에요. 비밀이에요. 네. 비밀. 은폐죠. 그렇게 심판이 미래에 결정될 그것이 현재 안에 들어올 수 있다. 이게 말장난처럼 실질적으로 그렇지 않는데 교언영색으로 그럴 듯하게 말만하는 게 아니냐? 그렇게 전달될 수 있겠군요. 대다수는 그렇지 않고 이 말들이 의미하는 신앙적 영적 아주 실제적인 의미를 알고 계실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들을 딱 정확하게 구분해서 각자 각자 여러분들에게 설명하기는 힘들어요. 그거는 저절로 깨우쳐 져야되는 거거든요. 어느 순간에 될 수도 있구요. 하나님의 심판이 비밀 가운데서 현재에 도래해 있다 하는 말부터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숙고를 통해서 우리는 이미 원시 기독교 전승사와 비슷한 과정에 접어든 셈이다. 이 전승사는 세계 심판자요 하나님 나라의 최종적 왕으로서 예수가 재림한다는 기대로부터 예수 재림의 미래적 사건이 비밀스럽게 이미 현재적으로 드러나게 된 현실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확신에까지 다다르게 됨으로써 이런 숙고를 관철시켰다. 이 전승사라는 말은 기독교 신앙이 처음부터 완벽하게 구성되어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어떤 과정을 거쳐서 점점 심화되고 확대되고 그렇게 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 역사가 있는거예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음으로서 그 다음에 퀴리오스로 고백했다고 한다거나 그 다음에 쭉쭉 나가는 길이 있는 겁니다. 오늘 지금 읽은 이 문장에서 보면 예수와 인자의 일치, 심판자, 재림자라고 하는 믿음을 갖고 있는 기독교 공동체가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미래사건만 아니라 오늘 현재에 비밀스럽게 들어왔다. 개입해있다. 그렇게 확신하게 된거죠. 현재로 드러나 현실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확신에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미래에 완성될 구원생명이 현재에 이미 비밀학적으로 현실성이 되었다. 그거죠. 지금 여기서 이미 예수님을 믿은 자는 이미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다. 죽지않아도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다. 미래적 생명이 오늘 우리의 삶에서 현실성이 되었다. 그렇게 전승의 과정이 있었다고 하는 겁니다.

예수가 재림할 때 계시될 그것이 비밀스럽게 오늘의 현실성이 되는 것이야말로 부활한 자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있다는 진술의 핵심적 의미이다. 중요한 문장이죠.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지금 초대교회에서 일어난 전승사를 따라가면서 그것의 핵심적인 내용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는 중이예요. 이렇습니다. 예수가 재림할 때 계시될 그것이 비밀스럽게 오늘의 현실성이 되었다는 것이야말로 부활한자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있다는 진술의 핵심적 의미이다. 지금 두 가지가 짜맞추어졌어요. 탁 아구가 맞게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부활한자가 하나님 우편에 앉아있다고 하는 사도신경의 한 구절, 이 진술, 이 신앙 이런 것의 핵심적 의미가 바로 예수의 재림때 계시될 오늘 여기에 비밀스런 방식으로 현실성이 되었다고 하는 거죠. 그러한 뜻과 하나라고 하는 거죠.

재미있죠. 그러고 놀라실 분들이 있을 겁니다. 아 그런 뜻이 있었어? 하고 말이죠. 하나님 우편 하면 우리는 무조건 머릿속에 옥황상제가 임금처럼 앉아있고 오른쪽에 왕자를 두 번째 서열되는 사람 앉히듯이 그냥 그림으로 생각했잖아요 그런 그림이 가지고 있는 핵심적 의미가 있는겁니다. 그걸 아는게 중요한 거죠. 요 부분을 여러분들이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것들이 여러분들에게 차곡 차곡 쌓여야지만, 축적되어야만 기독교 신앙의 깊이로 들어갈 수 있어요. 기독교 신앙도 그냥 한 두 번에 깨우치는 것은 아닙니다. 될 수가 없어요. 한 발 한발만 앞서 나갈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들을 알지 못하면 그러면 이제 부활과 하나님 나라 이런 것들을 따라가기가 힘든 거에요. 자기가 들어간 것만큼 전체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기독교 신앙의 깊이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도 이런 공부는 빼놓을 수 없이 중요합니다.

이거는 뭐 이런 신학공부만이 아니라 철학, 다른 생물학 모든 공부에서도 똑같은 거예요. 제가 즐겨하는 테니스도 마찬가지입니다. 갑자기 테니스 라켓을 들고 한 한달동안 재미있게 열심히 치고 자기 운동신경이 있다고 해서 게임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포스트로크를 정확하게 칠 줄 모르는 상태에서 게임을 할 수 없는거죠. 기초가 되어 있어야 되는 거죠. 모든 배움이 다 그런 겁니다. 하나님 우편에 앉아 이 진술, 핵심적 의미가 무엇인지 우리가 배웠습니다. 종말에, 미래에, 재림때 게시될 그것이 비밀스럽게 오늘의 현실성이 되었다고 하는 거죠.

이 진술은 시편 110:1의 말씀과 상응한다. “야웨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를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않아 있어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근본적으로 이렇게 이해될 수 있다. 시편 기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예루살렘 왕에게 전한 말씀으로 말이다. 여기서 야웨는 왕에게 세계통치를 약속하는데, 이는 시편 2:8 이하의 말씀과 흡사하다. 하나님 자신이 원수를 그의 발아래 무릎 꿇게 한다. 왕에게 약속된 권력은 특별히 하나님의 우편에 앉도록 초청되는 것을 뜻했다. 고대 오리엔트에서 통치자의 우편 자리는 통치자의 권한에 이은 차열이었으며, 통치자의 이름으로 권한을 실행하는 자에게 주어졌다. 하나님이 예루살렘 왕에게 “내 오른쪽에 앉으라.”고 말한다는 것은 왕이 하나님의 고유한 세계통치를 실행할 때 그를 강력하게 만들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네. 하나님 우편이라고 하는 그것에 대한 구약성서적 배경을 설명했습니다. 이러한 것을 배경에 놓고 초기 기독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세계심판을 설명한거죠. 예수님이 인자로서 세계를 심판할자로 오게 될텐데 그가 이루게될 그 미래의 마지막 생명, 혹은 구원, 혹은 통치 그런 것들이 비밀스런 방식으로 오늘 우리 역사안에 재림이 현실성이 되었다. 네 그렇게 이해를 하게 된거죠. 그러한 믿음으로 앞으로 나아가게 된거죠. 그러한 전승이 이 신앙고백에 담겨져 있는거죠. 그렇게 기독교 신앙이 역사의 과정을 통해서 이리 꿰맞춰지고 저리 꿰맞춰지고 했다면 그러면 별로 옳다고 하는 근거가 좀 부족한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전승에 관한 과정에서 여러 가지 다른 이야기들도 많이 있었구요. 그러한 논쟁의 과정을 통해서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건데 그런 것으로 기독교리의 절대성을 확보할 수 있었을까 하는 그러한 염려입니다. 네 그러한 문제들은 요 대목만 아니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계속 나올만한 것들입니다. 우리의 공부가 단순히 교리를 암송하거나 그것을 우리에게 적용시키는 차원이 아니라 그 교리가 형성된 그 당시의 자리로 돌아가서 역사적 흐름을 쫓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자칫하면 기독교 교리를 그 가르침을 상대화시킬 염려가 없잖아 있습니다. 그거는 노파심이에요. 기독교는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진리의 길로 들어선 겁니다. 그걸 계시라고도 이야기 하구요. 성령의 인도하심이라고도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계시와 성령의 인도가 기계적으로 툭탁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역사안에서 살아움직이면서 생존해 왔다고 하는 사실이 중요한 거죠. 네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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