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강 녹취록 - 제10장 심판(3)

사도신경해설 조회 수 4750 추천 수 0 2009.07.20 17:30:55

안녕하세요? 오늘 우리 강의 41강입니다. 우리가 지난번에 40강으로 공부한 내용 마지막 단락에 나온 이야기가 하나님 계시다고 하는 것의 근본적인 의미에 대한 것이었어요. 물론 이 전체 우리가 지금 공부하고 있는 판넨베르크의 책 10장 전체가 바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죠. 전능하신 아버지인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다시오신다고 하는 그 내용, 해명인데요. 그 두 가지의 근본적인 의미를 판넨베르크가 우리가 지난번 본 강의, 마지막 패러그래프 첫줄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어요.

예수가 재림할 때 계시될 그것이 비밀스럽게 오늘의 현실성이 되는 것이야말로 부활한 자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있다는 진술의 핵심적 의미이다. 지난 시간에 제가 요 부분에 밑줄을 긋고 한 번 보라고 말씀드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고 하는 것하고 그가 다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올거라고 하는 이 두가지 신앙고백이 여기서 연결되고 있는거죠. 그 문장을 다시 봐야 하겠어요. 우리가 보통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고 하는 것을 자꾸만 공간적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그게 아닌 거예요. 물론 겉으로는 공간적으로 묘사되고 있긴 있습니다만 그렇게 표현한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은 그 안에 들어있습니다. 공간적인 하나님 우편이라고 하는 그 자리, 공간, 장소 이런 것들은 더 근원적인 신앙의 깊이를 말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라고 말 할수 있는 거예요. 그 도구에만 머물러 있다면 기독교 신앙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죠. 네 그런 점에서 그 두가지 명제를 잘 연결시키는 판넨베르크의 진술은 우리들에게 큰 도움이 됩니다.

예수가 재림할 때 계시될 그것이, 재림 다시오실 것을 믿는 다고 하지 않습니까?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다시 오신다고 하지 않습니까?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고 그때 진리가 드러나게 되구요. 그때 하나님이 온전히 현실로 제시될거구요. 그때 우리는 모든 것들을 얼굴과 얼굴로 맞대 보듯이 알게 될 거구요. 그게 계시의 일입니다. 그거는 종말에 일어날 것이구요. 그 종말이 바로 예수님의 재림이죠. 그 마지막때 계시때 그것이 비밀스럽게 오늘의 현실이 되는 것이야말로. 이거예요. 그렇죠. 마지막때 드러나게될 그 계시가 오늘 여기에서 비밀스럽게 현실성이 되는 것, 리얼리티가 되는 것, 참된 그것이 되는 것, 진리가 되는 것 이것이야말로  부활한 자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있다는 진술의 핵심적 의미이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는 그러한 내용이 나오면 아 이것은 우주 공간 어디에 하나님이 옥황상제처럼 앉아있고 옆에 오른쪽에 예수님이 앉아 있다고 하는 신화적 표현이 아니라 그 표현을 뛰어넘어 종말에 드러나게될 하나님의 계시가 오늘 비밀스럽게 현실성이 되는 것을 가르키는 구나 그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비밀스럽게 오늘 현실성이 된다고 하는 것 자체가 조금 이해하기 쉽지 않죠. 네. 비밀스럽다고 하는 것하고 현실성이 된다고 하는 것을 나눠서 생각할 필요가 있어요. 오늘 진도를 나가야 하기 때문에 지난 주 마지막 대목에서 본 것을 오래끌고 싶지 않습니다. 앞서 강의시간에 조금 이야기를 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모르겠어요. 확실하지 않는데 요 부분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은 지난 번 강의시간에 했는 것은 분명하구요. 그러나 이제 비밀스럽다고 하는 것하고 현실성이 된다고 하는 것을 각각 따로 떼어서 연관지어서 자세하게 설명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비밀스럽다고 하는 것은 보통 은폐라고 하는 말이예요. 그리고 우리가 아직 명명백백하게 알 수 없는 방식, 혹은 원인과 결과라고 하는 우리의 일반적인 역사 발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일어나는 어떠 역사의 움직이는 힘들을 이야기하는 거겠죠. 움직이는 방식을 이야기하는 거겠죠. 비밀스러운역사 눜까요. 이런 것들을 마술적인 사 다. 혹은 비의적인 사 다. 그런 쪽으로만 너무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세계와 역사, 우주, 지구거겠죠. 다 비밀스럽게 움직이고 있으니까요.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으니까요. 비밀스럽게 라는 이 말을 특별히 종교적인 차원에서만 이야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현실성이라는 말은 제가 누누이 설명을 했지만 근원적인 어떤 것들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것들은 그렇게 근원적인 것들은 아니예요. 쉬운 예를 들자면 부자가 되어야 세상살이가 편하다고 하는 그러한 논리는 우리의 상식이고 습관이고 삶의 방식에 불과합니다. 그게 현실성은 아닌거예요. 그거는 정반대로도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부자가 되니 삶에서 불편할 수도 있는 거거든요. 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것으로도 상대화되지 않는 어떤 근원적인 힘, 그런 것을 현실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현실성은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죠. 아직 그게 다 드러나지 않았으니까요. 그렇다면 그 말을 다시 연결시켜서 비밀스러운 것이 현실성이 된다고 하는 것, 지금 무슨 뜻인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종말에 계시될 그 것은 물론 부활 생명이죠. 영원한 생명이죠. 네. 그것이 아직은 감춰져 있으나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우리의 삶을 끌어가고 있다는 그러한 신앙고백, 그것이 바로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다고 하는 이런 진술의 핵심적 의미라고 하는 겁니다.

네 고기까지만 하구요. 그래서 하나님 우편 오른편이라고 하는 것을 시편 몇 구절에서 판넨베르크가 설명했습니다. 거기까지가 지난 주에 본거거든요. 이 하나님의 우편자리라고 하는 이말, 시편에 나와 있는 이 말을 조금더 이제 기독교적인 관점으로 설명합니다. 이게 오늘 우리가 공부하게될 158쪽 아래 세 번째 패러그래프 내용입니다.

원시 기독교에서 이 말은 예수에게 적용되었다. 이 말은 내 오른쪽에 앉으라고 하는 그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 이미 기독론적으로 재해석되는 겁니다. 다시요. 원시 기독교에서 이 말은 예수에게 적용되었다. 예수에 대한 하나님의 말걸음이라고 해석되었다. 아마도 이러한 해석은 시편 110:1 본문에서, 즉 (主) 하나님이 ‘나의 주’에게 말씀했다는 진술에서 한 거점을 발견했을 것이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시편 110:1절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하는 거죠. 토대를 발견했다고 하는 거죠. 예수가 그의 공동체에서 그러한 의미를 갖고 있는 ‘주’라고 일컬어지자 곧 시편 110편의 말씀을 그에게 연결시키는 작업이 이루어졌다(행 2:34 이하 참조) 예수에 대한 신앙이 한 지점에서 시작해서 점점 확대되죠. 확대되는 길목에 혹은 토대에 구약신앙이 놓여있습니다.

메시아 신앙이 시편을 기독교적으로 해석하게 된 출발점이었다는 것이 훨씬 개연성이 높다. 이미 유대적 기대는 이 시편을 오시는 메시아와 연계시켰다. 시편의 이러한 구조를 예수에게 적용시킬 동기가 주어졌다면, 기독교 공동체가 예수를 인자로서만이 아니라 메시아로서, 그리고 최종적 심판자로서만이 아니라 도래할 구원시대의 왕으로서 가역적인 방식으로, 거꾸로 올라가는 방식으로 기대했다는 점이 이미 전제된다. 이러한 기대는 벌써 앞서 논의된 바처럼, 십자가 명패에 새겨진, 즉 예수를 메시아로 가리키는 명문을 통해서 유발되었다. 그러나 기대되고 있는 메시아와 예수를 동일시하는 심층적 근거는 예수가 부활하여 오게 될 인자가 된 이후로 그 이외에는 그 어떤 구원자도 거처를 갖지 못함으로써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예수에게서 실행될 수 있었다는 데에 있다. 하나님 우편 자리에 대한 표상은 한걸음 더 나아가 메시야의 미래적 세계통치가 이미 하늘에서 현재적으로 이루어진 현실성으로서 이해되었다는 데 놓여 있다. 미래에 지상에서 여전히 계시되어야 할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성에서 이미 지금 현실성인 바로 그것이다. 오늘 강의 시작할 때 말씀드린 고 이야기가 다시 반복되고 있죠. 우편 자리, 그 현실성, 계시, 종말의 계시, 재림의 계시 이런 것들이 바로 현실성이 된 관점에서 초기 기독교인들이 이해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마지막 사건에 대한 유대인들의 일반적 이해와 상응한다. 종말 시에 지상에서는 하늘에서 현재 이미 준비된 그것이 -하나님의 영원성 가운데서 역시- 계시된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를 미래의 메시아적 통치자로 희망하게 된 그 생각이 발전하여 예수가 이미 현재 비밀스럽게 통치한다는 신앙고백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현재적 통치는 이 경우에 결코 미래로 치우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바로 이 지상에서 미래에 계시되어야만 하지만, 또한 하나님의 은폐 가운데서 지금 무엇이 현실성인지 관철해낼 게 틀림없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설명이죠. 깊이가 있죠. 기독교 신앙의 근원이 상당히 깊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여기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우편에 앉아있다고 하는 이 말은 오늘 현재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 통치가 작동된다고 하는 그러한 믿음을 표현한거예요. 이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인자부터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10장에 의하면 말이죠. 물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아들, 그러한 연관성이 있구요. 메시아, 인자, 하나님의 아들, 주 이러한 칭호들이 다 연결되고 있어요. 이 인자 사상은 마지막때에 세상에 와서 옳은자와 그른 자를 심판할 그 존재입니다. 구약성서에 이미 그러한 사상이 있어요. 초기 기독교회가 예수를 인자로 인식을 한 겁니다. 그 인자는 다른 것하고의 연관성 속에서 단순히 종말의 심판자로서만이 아니라 우리 현재 삶에 비밀스럽게 통지한다고 하는 거죠. 그 믿음에 까지 도달하게 된겁니다. 그 믿음을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사라고 하는 말로 표현하는 거죠.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이러한 사도신경이 나와있는 신앙고백을 적절하게 바르게 이해하려면 단순히 공간적인 차원이 아니라 오른 쪽 왼쪽이 아니라 종말에 일어나게될 하나님 계시, 즉 부활생명의 현재적 갭이 어떤 거냐 그걸 생각하게 되는 거죠. 그것이 평화일까요? 정의일까요? 사랑일까요? 일치일까요? 어떤 것일까요? 네. 한 두가지로 말할 수는 없겠지요.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이가 점점 깊어지는 이때에 종말에 계시된 그것이 오늘 어떻게 비밀스럽게 현실성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우리가 해야 되는 거죠.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고 하는 그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에게 주어진 신앙적인 숙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요.

‘하나님의 우편 자리’는 부활한 이가 현재적으로 거하고 있는 장소를 공간적인 의미로 진술한 것은 아니다. 우리의 공간적 기준들은 부활 현실성이 그것들과 지평을 달리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부활 현실성, 현실성이라고 하는 단어가 자꾸 나오죠. 이게 여러분들이 빨리 자신의 사유속에서 확실하게 이해해야 될 중요한 개념입니다. 이게 여러 가지 경우에 쓰여져요. 이것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부족하면 글읽기, 책읽기 강의듣기에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제가 시간 나는 대로 고러한 단어들을 설명을 했으니까요. 한꺼번에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여러 다른 경우에 반복적으로 듣게 되면 언젠가 이것에 대한 이해가 확트이게 될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한 거잖아요. 부활 현실성이 공간적이란 것과는 다르다고 하는 것을 잘 모르고 이런 것들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 우편 자리라고 하는 것도 공간적으로 이해하게 된다고 하는 거죠. 부활의 현실성, 부활의 정말 알맹이들, 이런 것들은 공간적 거하고는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거죠. 간과하지 말아라 그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16세기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즉 그리스도가 아버지의 우편으로 높임을 받았다는 공간적 이해가 개혁주의자와 루터주의자 사이에 전개된 성만찬 논쟁을 야기시키는 데까지 확대된다. 만약에 부활한 이의 육체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우편에 공간적으로(localiter) 자리한다면 결국 예수가 지상의 제단에, 성만찬 제단에 동시적으로 현재할 수는 없는 게 아니냐고 쯔빙글리는 생각했다. 루터가 이러한 논증에 포함된 하나님의 우편 자리에 대한 공간적 표상에 대해서 논란을 재기한 것은 당연하다. 쯔빙글리와 루터의 성만찬 논쟁중에 하나입니다. 루터가 성만찬을 로마가톨릭 교회의 화체설과는 다르게 임재설을 이야기하잖아요. 이것마저 쯔빙글리는 반대하는 거죠. 하나님 우편에 예수님이 계신데 어떻게 여기에 임재하냐 말이 안되는 거 아니냐 이 이야기입니다. 루터는 아 그거는 당신의 잘못이다. 하나님 우편이라는 것을 공간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한 결과가 나온 것이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부활한 이가 하나님의 권능에 참여하도록, 창조에 신적인 통치를 실행하도록 올림을 받았다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쯔빙글리와 루터의 성만찬논쟁에서 벌어졌던 하나님 우편자리라고 하는 공간적 인식의 논란이었습니다.

그리스도가 통치한다는 신앙고백의 가장 기본적인 토대는 예수가 하나님과 하나라는 암시에 있다. 이 일치는 예수가 하나님의 신성에 속한 모든 것에, 그리고 하나님의 권능에 참여한다는 것을 뜻한다. 기독교가 그리스도의 통치, 그리스도가 종말만이 아니라 현재적으로 통치한다고 하는 신앙고백적 진술을 확보해가는 과정은 매우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복잡하다고 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당연히 있는 거죠. 지금은 그게 보이지 않으니까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것이 명명백백하게 나타나지 않습니까? 그거를 말한다고 하는 것이 간단한 문제가 아니예요.

왜냐하면 예수가 하나님과 하나라는 인식이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이 갖는 의미를 숙고하게 된 마지막 귀결이었지만, 그것이 원시 기독교에서 당연하게 전제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 부활현현에 대한 경험은 분명한데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하나라는 사실이 원시기독교에서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고 하는 겁니다.

니케아 신조가 누가복음 1:33의 말씀대로 예수가 심판하기 위해 다시 온다는 진술을 명시적으로 거론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가 하나님과 일치됨으로써 그리스도의 통치가 끝장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된다. 따라서 그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를 통해 해체될 수 있는 어떤 중간단계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현재에 있는 이 교회처럼 아무리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더라도 잠정적인 그런 것하고는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하나님 나라와 하나라는 겁니다. 해체될 수 있는 중간 단계가 아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28에서 이러한 견해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마지막 때 만물이 아들에게 복종한 후에 아들도 역시 아버지에게 복종하게 된다.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가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언급은 마치 그리스도의 나라가 한정적으로 진행되기나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가 순차적이라는 것을 말하는 게 결코 아니다. 오히려 만물을 하나님의 통치, 즉 하나님의 나라에 복종시키는 것이 그리스도의 통치에 담긴 유일한 의미이다. 이것은 이미 지상적 예수의 사신 내용을 구성한다. 이 사신은 하나님 나라의 임박에 의해, 또한 이 임박을 위해 문을 열라는 강력한 권고와 초청에 의해 완전히 성취되었다. 그리스도 예수가 현재적으로 통치하는 분이라고 하는 이것은 예수가 하나님과 하나라는 것을 암시하기도 하고 그것을 전제하기도 하는 겁니다. 여기서 초기기독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하나이다라는 대답을 얻기까지는 상당히 많은 과정을 거치게 된거예요. 예수님이 부활했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과 하나라고 하는 것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었거든요. 이거는 시간적인 성찰을 통해서 도달하게된 신앙적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로써 그리스도의 통치가 과연 어떤 내용인지 이해된 것 같다. 그리스도의 통치는, 이것은 곧 하나님의 통치인데요- 모든 인간을, 그리고 그 인간과 더불어 전체 피조물을(롬 8:21이하) 직접적으로 하나님에게 중재하는 일을, 그리고 인간을 하나님과 아들 관계로 이끌어가는 일을 완성한다고 말이다. 여기서 이러한 하나님과의 관계는 예수의 지상적 현존에서 이미 현실적이었던 바로 그것을 말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루터가 언급한대로 그리스도의 통치는 복음의 선포를 통해서 실행된다고, 복음을 듣는 자가 믿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믿음과 세례와 성만찬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사신을 듣는 자는 예수와 연결된다. 따라서 그는 예수처럼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맺게 되며, 또한 그의 아들이 된다. 하나님의 통치가 원래적으로 목표하는 것은 통치하는 자와 통치받는 자 사이의 상대성이 고양되는 것이다. 번역한 책에는 상대성이라고 되어 있는데 정확한 번역은 아니예요. 대립성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번역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독일어에서는 게겐자쯔라고 하는데 게겐 서로 대립되는, 자쯔 문장이라고 하는 뜻도 있고 명제라는 뜻도 있어요. 게겐자쯔하면 대립성, 이런 정도가 되겠습니다. 통치자는 통치 받는 자를 이렇게 통치하잖아요. 서로 대립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사장이 직원에게 뭐라고 하면 직원은 뭐라고 사장의 말을 듣고 어떻게 해야 하고 서로 대립되는 거죠. 그 위치가 달라지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통치의 원래적인 목표는 이 게겐자쯔, 이 대립성 이것을 끌어올리는 것이다. 차이를 없앤다기 보다는 끌어올린다는 것인데 그 차이를 말하기는 쉽지 않군요.

즉 통치 받는 자가 하나님의 주권에 참여한다는 것인데, 그리스도의 통치로 인해서 이것이 확증된다. 하나님의 통치는 자체 목표를 갖지 않는다.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다. 세계 구원이 목표죠. 통치받는 자를 통치받는 자로 끌어올리는 그러한 것이 목표죠. 그것의 목표와 의미는 통치 받는 자를 들어 올리고 자유롭게 하는 사랑 가운데 있다. 네. 제가 바로 앞에서 고양시킨다고 하는 말을 없앤다는 말하고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느냐 고것이 구분하기 쉽지 않다고 말했잖아요. 이런 생각이 언뜻 들었기 때문에 그랬어요. 우리는 통치받는 자입니다. 통치하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게겐자쯔의 이것이 고양된다고 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신처럼 되는거냐? 그렇게 말하기는 조금 힘든데요. 그런데 그 말은 틀린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하는 건데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놓여있던 모든 대립들이 없어지는 거구요. 전혀 새로운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거겠죠.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면 하나님이 왕처럼 우리 하나하나를 신하를 부리듯이 하면서 좋은 집도 주고 조금 누추한 집도 주고 여전히 통치하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에서는 통치하고 통치받는 이런 것들이 고양된 상태인거죠. 그런것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사랑에서 사랑하는 자와 사랑 받는자의 게겐자쯔는 없는 거잖아요. 이미 거기는 사랑이라고 하는 힘많이 지배하는 거죠.

그리스도의 통치는 인간세계와 그 역사 내부에서 특별한 영역이라 할 교회에 한정되지 않고 오히려 교회의 선포를 통해서 전 인류를 지향한다.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하나님 우편이라고 하는 말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론적인 통치가 오늘 현재에 비밀스럽게 작용한다고 하는 뜻인데요 그러한 그리스도의 현재적 통치가 교회에만 한정되지 않고 전체 인류를 지향한다고 하는 겁니다. 우주 보편적이라고 하는 거죠. 요 대목은 한국 교회 신자들이 정말 귀를 기울여야 될 내용입니다.

전 세계는 예수를 통해서, 그리고 그에 대한 교회의 사신을 통해서 교회가 갖는 하나님과 그의 창조세계와의 관계로 부름을 받는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나라는 교회와 동일지평에 놓일 수 없다. 그렇죠. 교회는 그리스도의 나라 자체가 아니니까요. 우리는 그것을 선포하는 공동체 이니까요. 그렇습니다. 전 세계는 하나님의 창조다. 따라서 전 세계는 세계를 창조하고 그 창조를 완성해가는 하나님에게 의존되어 있다. 그리고 만물이 하나님에 의해 질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만물은 역시 예수에 의해서도 그러하다. 예수가 하는 일은 세계가 오직 창조자의 덕분으로 유지되고 있으며, 그 창조자가 세계의 미래라는 점을 기억하게 하는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세상이 그 사실을 알고 그렇게 노력하든지 않든지 간에 만약 하나님의 창조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면 만물과 모든 인간은 그리스도의 통치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실행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 통치는 실제로 예수가 창조의 중재자요 ‘독생자’라는 진술과 일치한다. 그러나 아버지에 대한, 그리고 도래하는 그 나라의 일에 대한 예수의 전적인 헌신에 기초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통치는 오늘의 세계에서 여전히 은폐되어 있다. 은폐성을 가르키고 있죠. 아까 비밀스럽게 하는 말하고 연관되는 거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 통치의 미래가 은폐*되어 있는 것과 같다. 그 종말의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 통치가 어떻게 되는지 그것이 은폐되어 있는 것처럼 오늘의 세계에서도 그것이 은폐되어 있다.

*여기서 은폐되어 있다는(verborgen) 말은 미래에 드러나게 될 그 궁극적 진리를 우리가 아직 모른다는 뜻이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세계를 보라. 인간의 역사가 아무리 진보했다고 하더라도 이 세계는 여전히 불안하고 왜곡되어 있다는 것을. 평화와 자유와 진리가 완전히 지배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파괴와 억압과 위선이 어느 한 순간도 그 활동을 멈추지 않고 있다는 것을.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은폐성은 세계에서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있는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도 똑같이 작용하고 있다. 교회가 진리에 어긋한 역사를 그 안에 담고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사실을 전제한다면 교회가 진리를 배타적으로 독점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결론이 나오며, 따라서 마틴 루터가 ‘끊임없이 개혁되는 교회’라고 말한 것처럼 교회는 자기 개혁을 당위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판넨베르크는 기독교인이 이러한 잠정성과 은폐성 안에서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부활의 예수를 향한 신앙 가운데서 만큼은 그리스도의 통치를 명백히 인식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오직 기독교인들만이 현재 그 통치를 믿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말하는 이 기독교인들의 신앙고백은 단순히 입술로만 되뇌는 고백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리스도의 통치에 대한 고백은 그것이 실제로 기독교인의 태도를 규정하지 않는다면 불신앙적인 것이다. 그렇죠. 그리스도 통치에 대한 고백은 말에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게 뭘까요. 잘 생각해 보세요. 그리스도의 통치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의 통치가 우리의 태도를 규정하고 결정한다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어쩌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통치라고 하는 것을 말뿐인, 껍데기에 불과한 것으로 남겨둘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 아주 개인적인 것으로 남겨놓고 사회적인 통치도 닫아버리는 경우도 있는거죠. 그리스도의 통치를 우리는 뭐 그분이 우리를 평화롭게 하신다. 그분이 나를 인도 하신다. 처음 예수님을 영접했을 때 그 기쁨이 우리를 사로잡고 있다. 뭐 이런 정도로 끝나면 참 곤란할 겁니다. 그 통치가 잠간이에요. 그리스도 통치에 대한 고백은 그냥 낭만적인 것, 나이브한 것, 개인적인 것이 아닌 통전적인 생명의 사건이거든요. 우리가 그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가?  정말 그러한 통치가 실증적으로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게 아닌가 잘 생각해야 합니다. 단순하게 내가 교회를 열심히 다니면 되는게 아니냐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것하고 그리스도의 통치에 우리의 삶을 전적으로 의존하는거하고 다릅니다. 고런 부분들을 좀더 깊이 생각해 보셔야 해요. 진도 나가겠습니다.

그것은 다시금 희망을 기초하고 희망에 따라서 산다는 믿음과 사랑의 실천을 직접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네 여기서 희망, 믿음, 사랑이 연결되어 나오고 있어요. 그리스도의 통치에 대한 고백이 뭐냐? 그것이 우리 기독교인들의 삶을 규정해야 한다는 것이 뭐냐 그 이야기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건 바로 희망을 기초하고. 그리스도의 통치를 경험할때만이 우리가 희망할 수 있잖아요. 희망에 따라 산다는 믿음. 그렇죠. 종말론적인 부활 생명에 대한 희망, 그것에 따라 우리가 살겠다고 하는 그러한 믿음, 그리고 세번째로은 희망과 믿음안에서 사랑의 실천을 포함하고 있다고 하는 거죠. 희망, 믿음, 사랑의 실천을 포함하고 있다고 하는거죠. 희망, 믿음, 사랑의 실천 이런 것들이 바로 그리스도 통치가 우리 기독교인의 사람을 규정한다고 하는 뜻입니다.

은폐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통치에 대한 신앙 고백적 프락시스(실천)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 통치의 보편성에 상응하여 실행되는 모든 세계에 대한 선포가 속해있다. 개인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세계적인 차원까지 나가는거죠. 고 문장을 다시 보세요. 은폐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통치에 대한 신앙 고백적 프락시스(실천)에는. 요러한 표현도 익숙하지 않으면 익숙하지 않으면 뭐가 뭔지 모르겠다 생각할 수 있어요. 아마 사도신경 공부를 지금까지 꾸준하게 잘 따라오신 분들은 이러한 문장을 그렇게 어색하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겁니다.  은폐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통치에 대한 신앙 고백적 프락시스(실천)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 통치의 보편성에 상응하여. 그리스도 통치의 보편성, 그거는 어느 일부, 어느 한 시점만이 아니라 보편적이라고 하는 거예요. 교회안에만 아니고 교회 바깥을 포함하는 우주 전체적인 그러한 차원이라고 하는 점에서 실행되는 모든 세계에 대한 선포가 속해있다.

뿐만 아니라 현재의 세계에서 볼 수 있는 대로 그리스도 통치의 사실적인 은폐성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공개적으로 이 통치에 근거해서 살게 하고, 또한 그런 의미에서 인간 사회의 과업에 동역하는 일을 방해하지 못한다. 중요한 표현들인데요. 그리스도의 통치가 은폐되어 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가 고정관념으로 생각했던 그 일에만 묶여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에 의존해야 된다고 하는 겁니다. 이건 또 다른 말로 하면 성령론적 삶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이게 쉽지는 않습니다. 그게 우리는 자기의 세상 경험을 기준으로 해서 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통치가 새롭게 열어가는 종말론적이고 비밀한 방식으로 현재에 개입되는 그러한 통치에 의존하기 쉽지가 않는 거예요. 이런 점에서는 우리 개인에게는 한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특별히 평신도들에게는 더 그렇고요. 평신도들이 사회에서 나름으로 전문가로 산다고 하더라도 신앙에서는 아마추어이거든요. 그리스도의 통치가 어떻다고 하는 것을 사실은 생각도 못하고 큽니다. 개인적으로는 열심히 기도를 한다고 하지만 그래서 주님의 뜻대로 산다고 하지만 그런 것들은 다 주워 들은 풍월을 따라가는 거죠. 대개 그렇지 않습니까? 교회 지도자인 목사들에게 전해들은 말들, 그런 것들을 강화시켜서 열심히 하는 것을 성령의 뜻대로 한다 그렇게 생각을 하는 거죠. 그게 좋은 신앙이다 라고 생각하는 거죠.  아니면 완전히 어긋나서 이것도 없고 저거도 없고 자기 마음대로 나가는, 그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거라고 착각할 수 있는거예요. 평신도들의 한계가 사실은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도 우리도 모르는 방식으로 평신도들에게 성령의 말걸음 그런 것들이 가능하다고, 또 실제로 일어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성령은 질서가 없이 마음대로 움직이는 그러한 것은 아니거든요. 물론 이 질서라는 것이 기계적인 질서를 말하는 것은 아니구요. 우리가 영적인 태도가 갖추어졌을때 우리를 향한 성령의 말걸음, 그 분의 찾아오심에 대해서 우리가 그에 마땅하게 반응할 수 있습니다. 이런 영적인 준비라고 하는 것은 성서를 비롯한 기독교 2천년 역사의 신앙안으로 들어가는 거죠. 많은 경우에 2천년 기독교 신앙의 역사 안으로 들어가기보다 지금 당장 여기서 내가 어떻게 신앙적으로 잘 사냐? 잘 생활하냐 그런 것에만 머물러 있는 거죠. 실존적인거죠. 실존적인 것이 역사성을 상실했을때에는 그거는 문제가 많이 생기거든요. 충분히 역사적인 태도, 신학적인, 역사는 신학이니까요. 신학하고 신앙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영성 똑같은 이야기예요. 그런 것들을 충분하게 바탕에 깔고 실존적으로 내가 관계를 맺을때 우리의 영적인 태도가 준비를 갖추는 거예요. 일반 신자들에게는 이런 이야기가 힘들어서 결국은 교회지도자들이 바른 방향을 가져야 되겠구요. 지도자들에게도 한 두 사람으로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전체 교회가 방향을 잘 잡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런점에서 교회 보편성은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개교회뿐만 아니라 노회, 총회 전체가 교회거든요. 그러니까 총회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도 그건 목회인거예요. 그런 점에서 교회 나갈 방향들을 잘 제시해주면 각 지교회들은 거기에 따라서 또 바른 방향을 찾아 나갈 수 있는 거죠. 그러한 그리스도의 통치에 근거해서 우리가 살아야 되구요. 또 교회만이 아니라 세계 전체에 있는 일반적인 그러한 일들과도 우리가 동역해야 된다. 은폐 방식으로 그리스도가 이 세계를 통치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만이 아니라 세계에서도 그리스도가 통치한다고 하는 이 사실을 우리가 전제하고 있어요.

이 경우에 그리스도 통치의 은폐성은 기독교의 복음이 조우하는 어떤 저항에서만이 아니라 기독교인이 예수의 역사에 나타난 사건의 의미를 잠정적으로만 이해하고, 따라서 이 예수 사건이 상이한 모습으로서 증거 되고, 또한 보다 나은 이해를 통해서 극복되어야만 한다는 점에서도 역시 분명하다. 바로 이처럼 그리스도의 통치에 상응하는 기독교인의 모든 행위와 노력은 항상 잠정적이며 따라서 개혁을 필요로 하게 된다. 잠정성과 개혁성을 필요로 한다. 참 중요한 말이예요. 기독교의 모든 행위가 잠정적이다. 그래서 개혁해야 된다. 마틴 루터도 교회를 말할 때 이렇게 말했죠. 에클라시아 샘퍼 레포만다. 늘 개혁되는 교회, 교회는 완전할 수 없거든요. 잠정적이구요.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 예수에게서 이미 발생한 궁극적인 현실성 가운데서 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종말에 있는 거니까요. 예수에게 이미 발생했지만 우리에게는 종말에 주어질 그 궁극적 현실성, 안에서 우리가 지금은 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죠.

우리는 최선의 경우라도 그리스도의 통치에 상응하는 잠정적인 인식과 실행에 담긴 현실성을 잠정적으로만 믿음으로써 살아간다. 예수 안에게 나타난 사건과 그 의미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아직도 부족하기 때문에, 따라서 기독교의 선포와 기독교인의 행위가 아직도 불충분하기 때문에 기독교인의 언어와 행위는 이 세계 가운데서 저항을 받는다. 네 요런 내용들을 제가 다른 기회에 말하게 되면 사람들이 의아해 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사건들을, 그 의미를 충분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그 말을 잘 이해를 못하는 거죠. 예수 그리스도 우리가 다 외우고 있지 않느냐? 사도신경에 다 나와 있고 세례 받을때 교리문답 다했고 지금도 교회가 잘 가르치고 있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부활하신 분이고 재림하실 분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는게 다된 것 아니냐 생각하시는 겁니다. 그건 큰 착각입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더더구나 기독교의 선포, 우리의 행위, 얼마나 불충만한 지는 제가 긴 설명이 필요없습니다.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를 조금만 돌아보아도 잘못한 것이 많거든요. 옛날 마녀 사냥이나 십자군 전쟁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그런 것 뿐아니라 최근에서도 그런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 기독교에서도 그런 일들이 얼마나 많이 습니다. 우리나라 기독교에서도 그런 일이 얼마나 많이 있어요? 그리고 타종교에 대한 배타적 적개심들, 그런 것들을 부츠기는 일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의 언어와 행위는 세계가운데서 저항을 받는다. 또  아직까지 확연하게 드러나지 못한 우리의 인식, 우리의 신앙 그런 것들 때문에 우리가 세계에서 저항을 받는다.

어떤 경우에는 최소한 부분적일지라도 그 저항이 분명히 옳을 때도 있다. 그렇죠. 예를 들자면 지동설이 나타났을때 기독교가 말이 안된다고 배척을 했잖습니까? 진화론 문제도 마찬가지이구요. 이건 다 사회가 교회를 향한 저항이거든요. 그런데 그 저항이 옳다고 하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통치는 교회 안에서도 역시 명백하지 않으며, 기독교인의 인식이나 행동에서, 또한 교회의 행태에서도 역시 그렇다. 아직은 은폐다. 아직은 잠정적이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공동체는 신앙적 이해와 태도에서 이미 교회일치를 위협적으로 파괴시키고 있는 모순을 안고 있는 셈이다. 확연히 드러나지 않았으니까 서로 분열될 수밖에 없는 모순을 안고 있는 것이죠. 그리스도의 통치는 현존적 시각에서 볼 때 교회 안에서도 역시 아직은 명백하지 못하지만, 그건 분명하지만 예수에게 -그러나 아직 우리에게는 아닌- 이미 발생한 사건을 토대로 해서 그에게 신앙고백을 드리는 그런 신앙에서만은 명백하다.

네 그리스도의 통치가 교회안에서나 밖에서나 어디서나 실증적으로 명백한 것은 아니지만요. 그거는 앞으로 드러나야 될 과정을 가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예수에게 발생한 사건을 토대로 해서 우리가 알잖아요. 예수님에게 일어난 공생애, 십자가와 부활 이러한 사건들을 토대로 그에게 신앙고백을 드리는 그런 신앙에서만은 명백하다. 실증적인 것은 아니지만 신앙적인 것에서는 명백하다고 하는 말인데요. 보통 우리는 실증적인 것만 명백하다고 생각하잖아요. 신앙적인 것으로서 더 명백할 수 있다고 하는 사실, 안으로 드러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영성입니다. 이거는 말이 안되는 것을 무조건 믿어도 된다고 하는 그런 차원은 아닌거예요. 신앙적 인식론이죠. 과학적인, 실증적인 인식론과 신앙적인 기독교적인 인식론이 어떤 것이 옳으냐 이것은 서로 대립되는 것만은 무조건 아닙니다만 대립되는 경우도 많이 있구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사건을 잘 이해하고 해석하고 거기에 희망을 걸고 그리스도의 통치가 종말만이 아니라 현재에 비밀한 방식으로 일어나고 있다고 하는 사실에 대한 그러한 신앙고백을 바르게 갖고 있다면 우리의 신앙적 인식론도 명백한 사실이라고 하는 거죠. 고맙습니다. 마치겠습니다.


profile

[레벨:26]사띠아

2009.07.20 17:36:08
*.160.132.218

저 높은 우주에 천국을 만들고 주 믿는 자를 오라네
주 언제 오실지 아무도 모르나 날마다 점점 가까와 오죠
열 아홉 여덟 일곱 여섯 다섯 넷 구원받기 늦지 않아요
셋 둘 구름타고 다시 오실날 날마다 점점 가까와 오죠

 

 

이 찬송을 배우고 익히는 우리 한국교회가

어떻게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해석으로 들어올 수 있을까요.

멀고도 너무나 멀고도 먼 이야기

그래도 가야 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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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9.07.20 20:02:29
*.139.165.36

사탸 님,

수고 많았습니다.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의 의미가 참으로 놀랍지요?

사도신경이 오늘 현대인의 세계관과는 맞지 않는 신화적 세계관이므로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신앙고백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답니다.

좀 딱해 보이더군요.

우리는 지금 이 두 사이에 끼어 있어요.

한쪽은 기독교 신앙의 전통을 문자로만 받아들이는 근본주의자들과

그것을 냉소적으로 평가하는 해체론자들 사이 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진리이겠지요.

누가 진리의 영에게 의존하고 있는가 하는 걱 말이죠.

수고 많았습니다.

[레벨:12]harris

2009.07.21 22:27:17
*.151.112.164

사티아 선교사님,감사합니다.

찬찬히 강의를 씹어가며 소화할 수 있게 도와주셔서 ,,,,

율법과 율법주의를 잘 구분해 주신 정목사님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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