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 우리가 같이 공부할 사도신경의 내용은 성령론입니다. 계속되는 것인데요. 몇번에 걸쳐서 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요? 42강부터 시작이군요. 42강에서 44강 까지 했습니다. 오늘은 45강이 되겠군요. 성령론에 대한 거예요. 이 성령에 대한 공부가 어떻게 보면 가장 어렵기도 하고 또 중요하기도 합니다. 특히 한국교회에서는 더 그렇습니다. 성령이 무슨 마술적인 힘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거든요. 성령을 충만히 받았다 그런 경우는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것처럼 이렇게 이해되기 쉽죠. 우스갯소리로 한다면 목소리부터 달라지죠. 기도를 많이 해서 성령을 충만히 받았다 느껴지면 목소리마저도 바뀌고 Holy voice라고 하나요? 뭔가 거룩한 분위기를 풍기는 겁니다.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이 분명히 일반 사람들과 차이가 나는 것은 분명하겠죠. 그러나 그렇게 겉모습 이런 것의 변화하고는 좀 차원을 달리하는 거거든요. 성령에 대한 이해가 처음부터 기초부터 다시 되어야 하지 않느냐 하는 겁니다.

성령의 문제는 특히 한국교회의 유행병처럼 언급되고 있는 영성과도 깊이 연관되는 거죠. 영성공부, 모든 말에다 영성을 붙이지 않습니까? 영성이라고 하는 것이 뭔가 비의적이라고 할까요? 뭔가 성령과의 관계를 통해서 특별한 능력을 획득하는 것처럼, 혹은 다른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신기하고 기묘한 어떤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어요. 고러한 부분들이 성령, 영성과의 관계에서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런 것이 중심이 아니거든요. 제가 늘 느끼는 바입니다만 기독교 신앙의 오리엔테이션이 이러한 모든 신앙의 현장에서 중요한 것 같습니다. 신앙이 조금씩 조금씩 왜곡되거나 비본질적인데로 나가게 되는 것은 결국 신앙의 오리엔테이션, 방향설정 이런 것들이 잘못된 것이거든요. 이 기독교 신앙의 오리엔테이션이라고 하는 것,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죠. 그냥 교회가 만들어 놓은, 제공해놓은 몇 가지 틀을 따라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둑을 잘 배우려면 바둑의 정석을 잘 배워야 하는 것처럼 기독교 신앙도 신앙의 정석이라고 할 수 있는 신학을 정확히 배워야 되는 거죠. 제가 누누이 말씀드립니다만 신학이라는 것은 인간의 인식론적 작용으로 기독교 신앙을 이론적으로 해명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 더 영적인 차원에 속해 있는 거예요.

바둑을 다시 예를 들겠습니다. 정석이 먼저 있었던 것은 아니죠. 바둑이 먼저 있었죠. 바둑을 잘 두는 고수들이 바둑을 잘 배우고 또 그 도의 세계에 들어가자면 어떤 기본적인 최선의 길이 있다고 하는 것을 알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거거든요. 신학도 이론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먼저 영적인 경험이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건강한 신학은 영적인 거죠. 또 영성, 영, 성령론 이런 것도 교회생활에서 건강한 것은 당연히 신학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다시 바둑을 예를 들어서 정석을 잘 모른다고 하더라도 바둑을 잘 둘 수 있기는 있습니다. 타고날 수도 있죠. 객관적으로 잘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아주 드물고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런 사람들은 동네바둑을 넘지 못합니다. 전문적인 바둑 공부를 해야 되는데 그 밑의 단계에는 정석이 있는 거거든요. 신앙생활도 똑 같습니다. 이런 문제들이 방기된 상태로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는 상태로 그러한 한계가 있어요. 무엇을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좀 답답한거죠. 교회지도자들이 신학과 영성을 잘 모르는 걸까요? 아니면 대중들이 거기에 대해서 아예 관심이 없기 때문에 교회지도자들이 그것에 대해서 말할 최선의 기회를 잡지 못하기 때문일까요? 모르겠습니다. 이거. 어떤게 먼저 잘못된 것인지 말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기독교 신학 오리엔테이션이 전무하다. 그리고 잘못되었다 그 사실이죠.

예. 성령, 영성, 연관되는 문제인데 이걸 조금 더 실질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이런 예를 들어야겠습니다. 제 느낌. 제 나름으로 성령에 대한 설명의 방식을 찾은 거죠. 그게 학문적인 것은 아닌데 그러나 또 상관이 없는 것도 아니구요. 이렇습니다. 바람. 성령이, 영이 원래 바람이란 뜻도 같이 갖고 있지 않습니까? 히브리어로 루아흐, 헬라어로 프뉴마. 이런 영, 혹은 바람이란 뜻을 갖고 있습니다. 오늘 제가 살고 있는 하양에 바람이 많이 불었어요. 저녁이 되면서 좀 잦아들었습니다. 아침에는 많이 불어서 한쪽 문을 반만 열었는데 바람이 얼마나 세게 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바람이 참 멋있더라구요. 바람이 약할때는 문을 다열어놓아도 있는지 없는지 모르고 어느 정도 바람의 세기가 있으면 그게 확 느껴지더라구요.오늘 같은 경우에는 조금만 열어두어도 이게 아주 굉장히 강하게 불었습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바람이 뭘까요? 눈에 보이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는데 그게 실체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고대인들은 그런 바람을 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없는 곳이 없으니까요. 그리고 없다가 생긱기도 하고. 정말 종잡을 수 없는 힘이었습니다. 아주 신비로운 그러나 실제로 따뜻한 바람과 찬 바람이 생명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고 우리의 숨이 나와서 살기도 하고 숨이 끊기면 죽고 하는, 이러한 생명현상하고 이 바람이 중첩되어 있는 거죠.

지금의 물리학적인 차원에서 보더라도 잘못이 아닙니다. 일단 숨을 쉬어야 살잖아요. 그게 생명의 본질이죠. 그렇다면 그게 영입니다. 우리 강의에서 앞에서도 나왔고 오늘에도 나올텐데요. 성령은 생명의 힘이거든요. 생명의 힘이에요. 그렇다면 우리가 숨을 쉬지 않으면 죽는다고 할때 그 숨이 바로 성령입니다. 생명의 힘인거죠. 그게 좀 이상하다 생각하실 분이 있을겁니다. 성령은 삼위일체의 한 영으로 인격적인 존재이고 하나님과 동격이신데 바람과 똑 같다고 한다고 한다면 하나의 사물로 떨어지는게 아니냐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네. 여기서 더 진도를 나가지 말죠. 하나님은 사물을 아니지만 사물을 통해서 행동하신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행동으로 존재한다는 것도 분명하구요. 그렇다면 이 바람이 하나님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없지만 생명이라고 하는 점에서 하나님의 한 작용이라고 할 수 있는 거죠.

네. 지난 44강에서는 성령의 문제를 일반 자연적인 생명현상하고 성령, 성서가 이야기하는 관점하고의 차이를 좀 공부했습니다. 자연과학에서 말하는 것은 생명의 내재적 근원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성경은 초월적 근원을 이야기하거든요. 이 두개가 충돌하기도 하지만 결국 생명의 힘이라고 하는 것에는 결국 연결되는 거죠. 오늘 45강에는 성서적인 해명이 자세하게 나오고 있습니다. 구약성서와 신약성서가 같이 연결되고 있죠. 앞부분에서는 구약성서가 말하는 성령, 그리고 후반부에서는 신약성서가 말하는 성령, 특히 예수의 부활과의 관계에서 초기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성령, 생명의 영, 이런 이야기입니다. 75쪽 첫 번 패러그래프입니다.

생명과 영에 대한 고대 이스라엘의 시각과 연관해서 생각해보아야 할 요점은 다음과 같다. 마지막 때 하나님의 영이 분명히 특별한 방식으로 작용한다고 보았던 이스라엘의 기대가 무엇을 뜻하는가라는 점이다. 이사야 11:2에 따르면 메시야는 영에 따라 움직이는 것만이 아니다. 오히려 영이 끊임없이 메시야에게서 부여되며, 또한 메시야에게 그 토대를 둔다. 이사야가 제2이사야, 제3이사야가 있는데요. 성경에는 이사야란 이름으로 되어 있지만 시대가 다르기 때문에 학자들이 이름을 나누어 부르고 있습니다. 성경을 너무 그렇게 학문적으로 쪼개기만 하면 어떻게 되냐 불안하게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다만 그렇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이거는 아주 분명한 사실이니까요. 어떻게 구분하는지 아시겠지요. 성서를 자세하게 읽으면 어느 시대의 용어들이 특징적으로 나타납니다. 만약에 후대에 후손들이 지금 이 시대의 편지를 읽는다고 합시다. 편지를 읽는데 거기에 핸드폰이라는 말이 나왔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편지는 20세기 전후, 고 때 쓰인 편지라는 것을 알 수 있겠죠. 19세기에는 핸드폰이라는 말을 쓸 수 없었으니까요. 성서에는 그러한 용어들이 특징적으로 나옵니다. 그런 것을 보고 학자들이 제1이사야, 제2이사야로 구분하죠.

제2이사야는 왕에게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백성에게도 약속하기를 마지막 때 하나님의 영이 그들에게 새로운 방식으로 주어진다고 했다(사 42:1, 44:3). 두개가 좀 차이가 나는 거죠. 제1이사야에는 메시야에게 영이 임한다고 하는 메시아니즘에 근거한 성령에 대한 설명이라고 한다면 제2이사야는 일반사람들에게 영이 임한다고 하는 메시지를 선포한 거죠. 에스겔의 경우에도 비슷하다(겔 36:27). 스가랴는 마지막 밤 환상에서 하나님의 영이 모든 백성들에게 임하는 것을 보았다. 이러한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영이라고 하는 사실이 시대가 흘러가면서 더 보편적인 설명력을 얻은 것 같습니다. 바람이 병거처럼 야웨의 루아흐(영)를 전체 대지를 넘어 하늘의 네 방향으로 몰고간다. (슥 6:1-8) 다음은 요엘 선지자의 이야기입니다. 요엘 선지자는 '모든 육체'에 하나님의 영이 임한다는 사실을 마지막 때의 사건으로 확실하게 약속했다(욜 3:1 이하) 모든 육체라고 했어요. 모든 육체에 빠짐없이 하나님의 영이 임한다. 원시 기독교에서 누가는 오순절 사건을 통해서 이러한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증언한다(행 2:17 이하). 신약성서 시대에 초기 기독교죠. 그때 신앙에서는 구약성서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사건들이 그러한 공생애때와 부활 경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약성서에 근거해서 새롭게 해석된 거예요. 구약성서가 없었다면 신약공동체도 없었다고 봐야죠. 긴밀하게 엮여져 있습니다.

지금까지 인용한 이러한 제2이사야로부터 많은 소예언자에 이르기까지 거론된 성령에 대한 진술들은 다음과 같은 핵심을 갖고 있는 거죠. 이 부분입니다. 여기서 거론된 구약성서 말씀에서 하나님의 영은, 중요한 이야기예요, 생명력으로 이해되었지, 그 어떤 다른 어떤 방식으로는 결코 획득될 수 없는 인식의 원천으로 이해되지는 않았다. 이걸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구약성서가 성령을 생명의 힘으로 이해했지 아무도 모르게 자기만 성령을 통해서 어떤 것을 인식할 수 있는 원천 이런 것으로 이해하지 않았다고 하는 겁니다. 확실히 물론 지혜와 인식은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만 보증된다. 인식, 성서적 인식론은 성령의 토대하고 있습니다. 그건 분명한 거예요. 인식을 성령과 따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때 작용하는 것은 기상천외하거나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언급되는 것이 모든 생명 현상에 관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인식의 문제도 결국 생명현상에 관한 것들이라고 하는거죠. 성령은 생명의 힘이에요. 그러니까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힘의 작용이라는 점에서 우리 인식, 우리 행위 이런 것들이 생명현상에 관한 것들이라고 한다면 성령을 통해서 일어나는 거죠.

그런 점에서는 성령론적 인식이 기독교 신앙에서 중요한 겁니다. 판넨베르크가 여기서 짚었든지 그런 것을 기상천외하거나 초자연적인 자기만이 아는 아주 은밀하고 밀의적인 그러한 소종파적인 그러한 비밀전수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고 하는거죠. 왜냐하면 생명은 그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것인거죠. 이렇게 판넨베르크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각기의 각기의 생명현상에는 그것 나름대로 하나님의 영이 특별하게 표현되어 있다. 여기까지가 한 패러그래프에요.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간단합니다. 구약성서가 말하는 성령은 생명의 힘이었다. 오늘 우리 현실에서 이런 방식으로 성령을 말한다면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그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까닭은 없죠. 특별하게 열광주의로 흐른다거나 은사주의로 흐르는 사람들이외에는 웬만하면 받아들여질 겁니다. 여기서 핵심은 생명의 힘, 생명의 보편적인 차원의 어떤 것이지 어떤 특별한 사람에게만 비밀스럽게 주어지는 능력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생명을 살고 있잖습니까? 그렇다면 이미 그들에게는 성령이 있는 거라고 볼 수 있는거예요. 어느 누구도 생명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것이에요. 기본적으로 생명은 성령의 활동이니까요. 그런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는다는 것을 무조건 방언하고 입신하고 그러한 은사주의나 다른 사람의 운명을 꿰뚫어 볼 수 있는 투시력이 있다거나 안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의지의 발현이라거나 그러한 쪽으로 기독교의 성령을 이해하면 곤란한 거죠. 축소되는 거죠. 성령의 의미가 축소되는 거죠.

이스라엘은 영의 미래적, 종말적 작용이 현재적 작용과 어떻게 다른가 하는 점을 이렇게 보았다. 마지막 때 영이 주어질 것이며, 그 영은 인간에게 토대를 두고 있다고. 즉 영은 완전히, 그리고 부족함 없이 인간에게 주어진다고. 이것 참 이해하기가 곤란하죠? 명확하게 와닿지는 않죠? 무슨 말인가요?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은 영의 미래적, 종말적 작용이, 요엘이나 여러 선지자들이 마지막때에 영이 주어진다는 그러한 것을 말하는데요. 그것이 현재적 작용과 어떻게 다른가 하는 점을 이렇게 보았다. 마지막 때 영이 주어질 것이며, 그 영은 인간에게 토대를 두고 있다고. 즉 영은 완전히, 그리고 부족함 없이 인간에게 주어진다고. 번역이 좀 시원치 않나요? 마지막 때에 주어질 그 영이 지금 인간에게 주어진다고 하는 그러한 뜻인가요? 조금 더 나가보겠습니다. 종말 시의 생명은 종말이 왔을 때의 생명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현재적 생명과는 다르다. 마지막 때에 종말에 얻게 될 생명은 지금의 생명과 다르다. 어떻게 얻을 수 있느냐? 기독교 신앙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얻게 되는거죠. 그 생명은 강력한 생명과 상관되어 있다. 인간은 현재의 생명 안에서 생명의 근원, 즉 하나님의 영과 연결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다.

앞서 구약의 예언자들이 말하는 것은 마지막 때에 주어지는 것, 지금은 인간은 죽어요. 이 말은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영과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게 죄의 결과겠죠. 그게 하나님과의 단절이겠죠. 숨을 쉬지 않는 거하고 비슷하게 되겠죠. 숨을 쉬지 않으면 얼마 있지 않아 죽는 거죠. 영과의 소통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실질적으로 죽습니다. 그건 참된 생명이라고 할 수 없는 거죠. 현재의 생명에 담겨 있는 각기의 근원은 피상적이다. 근원과 떨어져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과의 단절을 말하겠죠. 그래서 피조물로서의 인간이 영에 의해 작동될 수 있긴 하지만 영을 받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경우에도 인간이 영원하게 사는 게 아니기 때문에 영이 인간에게 내면적으로 주어졌다고 볼 수는 없다. 현재적으로는 우리가 영의 근원과 완전히 일치되어 있는 거는 아니죠. 여기가 좀 까다롭기는 하네요. 지금 우리가 죽는데 결국은 영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는 거구요. 마지막 때에 우리에게 주어질 영, 여기서 우리는 전혀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영을 생명력으로 파악하는 구약성서의 견해를 통해서 우리는 원시 기독교에서 볼 수 있는 대로 예수에게 나타난 부활의 새로운 생명 현실성* 과 영 사이에 놓여있는 밀접한 상관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 이제 판넨베르크가 앞에서 구약성서의 성령이해를 설명하고 그것이 신약공동체에 어떻게 받아들여졌는가 구체적으로 예수의 부활생명과 어떻게 연관되는가 하는 것을 설명합니다. 그런데 이 문장에서 생명현실성이라고 하는 단어가 나오잖아요. 그것을 제가 역주로 설명을 했습니다. 독일어 단어는

*생명현실성(Lebenswirklichkeit)은 말 그대로 생명의 리얼리티를 말한다. 우리가 이러한 신학책이나 용어집들을 좀 훈련이 없이 읽게 될때 진도가 잘 안나가는 이유가 이러한 용어들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게 세월이 좀 필요하죠. 네 요걸 보지요. 이렇게 제가 설명을 했습니다. *생명현실성(Lebenswirklichkeit)은 말 그대로 생명의 리얼리티를 말한다. 현재의 인간은, 이런 것도 이해하려면 현실성, 이런 것들이 전제됩니다. 가시적 현실성이 있을 거구요. 불가시적 현실성이 있구요. 그 현실성을 실체로 보느냐 운동으로 보느냐 그 차이가 있을거구요. 그 현실성을 이데아로 보느냐 아니면 뭐라고 해야 될까요? 이데아. 플라톤에 의하면 이데아가 현실성인거죠. 그쪽하고 차이가 있는게 뭐죠? 이 세상의 주류적인 어떤 것을 말하겠죠.

현재 인간은 모든 생명체들을 포함해서 아직 생명현실성을 완전하게 획득하지 못했다. 우리는 무엇이 궁극적인 생명인지 아직 모른다. 그것은 종말이 이르러야 완성될 세계다. 이게 우리가 놓여있는 운명이기도 하구요 세계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데, 삶을 누리고 있는데 이것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완성된 생명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도대체 완성된 생명이 있겠냐? 이렇게 과정, 부분적인 그것이 다 생명이 아니냐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런 입장을 취하지는 않습니다. 분명히 이게 계속 순환 반복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느 때에 이것이 끝나고 새롭게 시작한다고 봅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것은 완전한 생명인 것이죠. 이는 곧 구원의 완성을 뜻하기도 한다. 물론 부활한 예수를 믿음으로써 이러한 생명의 세계에 참여하게 된다는 희망을 갖고 있지만, 그것이 곧 생명현실성을 이미 완료해 버렸다는 뜻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는 생명지향적인 모든 인간행위에 대해서 종말론적인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다. 해야만 된다. 종말론적인 방향을. 이 말은 이런 거겠죠. 현재 생명, 이런 것이 단정적이라고 하는 뜻이고 또 하나는 단정적이지만 그것은 종말에 완성될 생명과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생명, 삶과 역사 이런 것들은 불완전하지만 동시에 완전한 생명에 의존해 있다고 하는 점에서 우주론적인 무게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죠. 뿐만 아니라 그 세계가 미래로 여전히 개방되어 있으며 현재적으로 은폐되어 있기 때문에 신학은 생명 현실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타학문과의 대화를 계속해 나가야 한다. 기독교적인 지평을 갖고 있으면서 보편적 생명현실성과의 대화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명현실성(Lebenswirklichkeit) 단어를 잘 기억해두세요. 무엇이 생명의 리얼리티인가 이 단어에 들어있습니다. 판넨베르크는 여기서 구약성서를 통해서 우리가 예수의 부활이 말하는 생명현실성과 성령과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그 부활의 생명 현실성을 희망하고 있으며, 중요한 말이죠. 예수와 연결되어 있기만 하다면 지금 당장 누구나 그 생명 현실성에 참여한다고 생각했다. 영이 모든 생명의 근원인 것처럼 새로운 생명의 근원은 죽은 자의 부활로부터 발생한다. 바울이 성령을 가리켜 예수를 부활하게 한 영이라고 언급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롬 1:4, 8:2, 11) 이 언급에는 보다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하나님의 영이 생명을 불러일으키는 원리는 생명으로 하여금 부활에 이르게 했을 뿐만 아니라 부활과의 연관 가운데 머물러 있게 한다. 현재의 지상적 생명과 달리 부활한 자의 생명은 생명의 창조적인 근원인 영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이것은 마지막 때 하나님의 영이 인간에게 머문다는 이스라엘-유대적 기대와 놀랍게 상응한다. 예수님의 부활은 생명의 창조적 근원의 영에 의해 완성되었죠. 성령이 바로 예수 부활의 영이라고 하는 바울의 말이 바로 그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이 인간에게 머문다고 하는 앞에서 보았던 구약성서 기자들의 그러한 기대와 일치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44절 이하에서 부활생명의 독특성을 묘사하기 위해서 영적인 몸(소마 프뉴마티콘)이라고 언급한 것은 의미심장하고 함축적인 형식화였지,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어설프고 애매모호한 표현방식은 결코 아니었다. 이 문장이 직역이 되어서 전달에 문제가 있군요. 영적인 몸에 대한 단어가 나오죠. 소마가 몸입니다. 헬라어로는 몸, 육 이것을 가르키는 것이 소마와 사르크스 라고 하는 단어가 있어요. 뉘앙스가 다르기는 하지만 뭐 비슷한 것이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 헬라인들이 인간의 몸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서 소마냐 사르크스냐 이렇게 다르게 불렀던 거예요. 이들은 사랑은 아가페, 필로스 에로스 이렇게 나눠서 불렀다고 하는 것도 좀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어쨌든 바울이 소마 프뉴마티콘, 영적인 몸이라고 말한 이것은 그냥 좋은 게 좋다 어렴풋하게 설교 부드럽게 하기 위해서 내 몸을 말한 것이 아니라 구약성서가 그 당시 인간이해라고 하는 명확한 토대에서 말한 신앙적 논리에 근거한 진술이라고 하는 것이죠.

여기서 사유된 생명은 모든 생명의 신적 근원과 연결되었으며, 따라서 죽음이 일어나지 않게 되고, 무상하지 않게 되며 죽지 않게 된다. (고전 15:52 이하) 바울이 한 이야기들입니다. 첫 사람인 아담이 산 영이 되었다는 말과 같이 두 번째의 마지막 사람인 아담은 '살아있는 혼'(lebendige Seele)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 생명을 일으키는 영이다.(고전 15:45) 부활의 현실성과 성령은 서로 불가분리로 연관되어 있다. 네 여기까지가 긴 패러그래프죠. 좀 복잡합니다. 설명하지 않겠어요. 대체적으로 판넨베르크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감을 잡았기 때문에 깊이 들어가지 않고 나가겠습니다. 예수 부활이 말하는, 혹은 그 안에 담겨있는 생명현실성과 구약성서 기자들이 이야기하는 생명의 영인 성령과 뗄레야 뗄 수 없을 그러한 관계에 있다고 하는 거죠. 네 그런 정도로만 정리되었으면 일단은 큰 방향에서 이 내용을 잘 따라가는 것이기 때문에 고 정도로만 정리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이라는 것은 새롭고, 무상하지 않은 생명의 세계를 말한다. 이것이 예수에게서 이미 발생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은 그를 통해서 인간에게 현재한다. 그러므로 바울이 함축적인 의미에서 언급한 영에 대한 신학적 진술은 그리스도와 연결되며, 또한 기독론적으로 구성된다. 예수의 부활을 통해서 우리가 부활생명에 들어간다고 하는 거죠. 기독론적인 관점으로 예수의 부활과 성령이 확장되는 것이죠. 예수가 부활하셨어요. 그는 생명의 영이 하신 일입니다. 생명의 영은 마지막 사람에게 주어진다고 했어요.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우리가 생명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죠.

이러한 점들이 요한의 경우에도 매우 비슷하다(요 14:26, 16:31 이하). 부활한 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그리고 예수에게서 이미 발생한 새로운 생명 현실성과의 상관에서만 하나님의 영은 적절하게 언급될 수 있다. 그렇죠. 예수에게만 부활, 무상한 것과 허무한 것과 죽음까지도 넘어서는 부활이 그에게서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 일어나게 하는 힘이 바로 성령이었군요. 그 힘이 바로 성령이었구요. 그 성령이 바로 구약성서 기자들이 말하는 마지막때에 인간에게 주어질 영이었거든요.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만 우리는 영을 정확하게 알 수 있다고 하는 논리가 성립됩니다.

그러나 역으로 그리스도와 영은 서로 짝을 이루고 있다. 어떤 방식으로든지 부활한 자와 생명연관을 맺고 있는 곳에 영이 존재한다. 그리고 예수의 부활에 대한 사신을 믿는, 사신은 독일어로 보드샤프트거든요. 우리말로 하면 사신이라고 하면 정확하게 딱 맞아 떨어지지 않는데 적당한 용어가 없어서 그렇게 불렀습니다. 복음선포, 복음사건을 총칭하는 겁니다. 사신을 믿는 모든 이는 특별한 방식으로 죽음을 뛰어넘는 미래적 부활을 믿는 자에게 그 부활을 보증해주는 영을 이미 받은 셈이다. 왜냐하면 영이 예수를 이미 부활시켰기 때문이다. 그 중간에 몇가지 바울의 해석이 있기는 있는데 결론적인 것은 바로 예수를 믿은 자는 이미 영을 받은 거다. 왜냐하면 영이 예수를 이미 부활시켰기 때문이다.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살고 계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신 자기의 영으로 여러분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입니다." (롬 8:11) 판넨베르크 신학을 따라가다보면 바울 신학이 대단하다는 것을 볼 수 있어요. 그냥 하는 이야기가 하나도 없어요. 이 세계를 뚫어보고 구약성서 선상에 분명하게 선 신학자의 차원높은 말씀들입니다.

영은 부활한 예수에 대한 사신, 복음선포를 통해서, 그리고 이 사신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기독교인들과 함께 한다. 부활한 자에 대한 사신을 받아들이는 자는, 그리고 예수에게서 이미 발생한 현실성이 예수와 연결된 모든 이에게서처럼 자신에게도 역시 주어지리라는 것을 믿는 자는 이 사신과 함께 이미 성령을 받았다. 그는 새로운 생명을 이미 확신한다. 그는 그의 확신 가운데서 더 이상 죽음의 운명에 떨어지지 않고 이미 그 고유한 죽음으로부터 벗어난 셈이다. 그는,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 그리스도인들이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현실성을 믿는 사람들이죠. 그 외의 모든 인간적 현존의 보편적인 죽음이 몰고오는 파괴성으로부터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한다. 참 놀라운 일이군요. 이게 바로 자유의 영이고 해방의 영이 주는 부활경험, 생명경험, 구원경험이라고 할 수 있겠죠.

죽음은 그야말로 모든 것을 의문에 빠뜨린다. 인간 생명의 모든 준거와 가치들은 죽음의 파괴성에 직면해서 무화(無化)된다는 말이다. 무화, 없어진다. 모든 것이 의문스러워지는 것이죠. 답이 없는 거죠. 죽음 앞에서 그렇습니다. 오직 죽음을 극복하는 생명에 대한 희망만이 이러한 무화로부터 자유롭다. 생명의 연약성에 직면해서도 특별히 기독교적인 즐거움이 가능한 근거가 바로 이 안에 있다. 이는 흡사 기독교가 자신이 서야할 고유한 자리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태도를 하나님이 행하시는 사랑의 작용에 내맡길 수 있도록 토대가 잡힌 특별한 가능성과 같다. 여기 제가 더 이상 설명을 붙이는 것은 사족에 가깝겠죠. 지금 판넨베르크의 이 진술들은 깊은 신학적 영성을 담고 있으면서 또 우리의 영혼을 자극하는 설교와 같습니다.

따라서 영은 미래에 주어질 구원의 첫 선물이며(롬 8:23), 새로운 생명에 대한 즐거운 예감, 즉 미래적인 것에 대한 희망과 신실한 신뢰 가운데서 선취(先取)적으로 살아 움직이게 하는 일종의 즐거운 예감이다. 성령 충만한 사람들의 행복한 삶의 모습들이 이렇게 그려져 있군요. 즐거운 예감이라고 되어 있어요. 죽음을 넘어서는 참된 생명이 우리들에게 오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안다고 한다면 마치 신랑이 올때를 기다리는 신부처럼 즐거운 예감을 하면서 살겠죠.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영은 죽음의 파괴성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의 현존 가운데 이미 임재한다. 네 그렇습니다. 다시 읽겠습니다. 영은 죽음의 파괴성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의 현존 가운데 이미 임재한다. 말이 그대로 받아들여지나요? 또 그러한 인식, 그런 경험이 우리들에게 주어져 있나요? 그것이 물론 그게 다 그러리라고 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즐거운 예감, 신뢰가운데 살고 있죠. 그런데 그것이 심리적이고 감정적인 그러한 차원이 아니라 우리의 온전한 인식에서 이해되고 동의가 되고 받아들여져야 되거든요. 그러한 과정이 바로 신학공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판넨베르크가 4쪽에 걸쳐서 구약성서가 이야기하는 마지막 때에 주어지리라고 하는 영과 예수 부활에서 본 생명의 현실성의 관계를 우리가 먼저 알아야 되고요. 그 예수에게 일어난 부활의 생명의 현실성이 바로 구약이 예언한 영의 활동이었다고 하는 겁니다. 그게 결국 그 성령에 의해서 부활한 예수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을 줄 수 있는 근원이 된 거죠. 우리는 우주론적인 역사에서 오직 한번밖에 일어나지 않는 성령의 부활사건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참여함으로, 혹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는 이미 마지막 때에 주어진 영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제가 이해하는 바로는 그런 정도의 구조로 설명할 수 있는데요. 이게 얼마나 정확하게 전달되었는지요? 설명이 더 필요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단시일에 모든 것을 다 끝장낼 수는 없으니까요. 우리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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