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넨베르크 사도신경해설 제17강 - 3장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아버지를(4)

안녕하세요?

오늘 우리 판넨베르크의 사도신경해설 17강이 되겠습니다. 책 57쪽입니다. 첫 번 패러그래프부터 시작하면 되겠습니다. 우리가 지난번에 이야기한 끝마무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런 성서적 이해가 그 기본 성격상 현실성에 대한 우리의 경험에 여전히 유효한지 아닌지를 물어야만 한다.

지금 우리가 이 3장, 판넨베르크 이 책 순서에 따라 3장을 보고 있는데요. 우리 진도로는 17강입니다만 3장입니다. 이게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아버지를 이거든요. 이 두 개가 연결되어 있는 겁니다. 천지, 세상 만물과 하나님. 창조와 창조자 이 두 개의 개념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것이 도대체 말하려고 하는 핵심이 무엇이냐 그것을 지금 따라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 이해라고 하는 것은 그저 관념적인 어떤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세계 이해에서 나왔다고 하는 거예요. 이것이 판넨베르크가 앞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유대교나 기독교만이 아니라 모든 종교의 신 이해는 바로 이 세계 이해와 맞물려 있다고 하는 겁니다.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 그리고 그 성서가 말하는 세계, 그런 것들이 우리가 지금 이해하고 있는 현실상하고 어떻게 연관되느냐 하는 그런 점들이 중요하다고 하는 거죠. 여기서 지금 현실성이라고 하는 단어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거는 앞에서도 몇 번 언급된 것이라서 제가 더 길게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세계가 있잖아요. 산도 있고 강도 있고 여러 가지 우리 앞에 있는 이 세계 말입니다. 이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하는 문제인데요. 이런 것을 이해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게 현실성이라고 하는 겁니다. 정말 참된 것 있는 것 진리인 것 그런 것하고의 연관 속에서 우리가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거죠. 흔하게 인용되듯이 탈레스가 만물의 본질은 물이다라고 이야기 했잖아요. 이것은 그에게서 현실성은 물이라는 겁니다.

그러한 이해가, 나름으로의 현실성에 대한 이해가 성서의 하나님 이해도 들어있다고 하는 거죠. 과연 성서가 말하고 있는 그러한 현실성이 오늘 우리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그 현실성에 과연 부합 하냐 하는 거죠. 일반적으로는 부합하지 않는다고들 생각합니다. 일부분 적으로는 그거는 맞는 겁니다. 예를 들자면 고대의 많은 사람들이 성서에 포함해서요. 이 세계가 하늘 땅, 지하 이렇게 3층으로 되어 있다고들 생각했잖아요. 다른 고대인들 중에서는 기둥이 편편한 지구를 떠받치고 있다고 이야기 하구요. 인도 같은 데서는 다른 어떤 표상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느 나라 설화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세계를 거북의 등으로 생각한 민족도 있다면서요. 성서의 세계관이 하늘땅 지하 3층구조라고 본다면 이러한 것만 놓고 본다면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개념과 차이가 있다고 봐야죠. 그렇게 드러난 표면적인 문제만 본다면 성서는 분명 현실성이해에서 우리하고 충돌되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3층 구조의 세계관을 전제한다고 하더라도 성서기자들이 그것을 통해서 더 현실적인 어떤 것을 말하려고 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확실하게 집을 수 있다면 당연히 그렇게 되는데 그것이 오늘의 현대물리학 등의 세계이해에서 그렇게 충돌되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일단 이렇게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리고 갈 수 있습니다. 네 그 문장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우리는 이런 성서적 이해가 그 기본 성격상 현실성에 대한 우리의 경험에 여전히 유효한지 아닌지를 물어야만 한다.

이제 오늘 우리가 같이 읽어야 될 부분들을 보겠습니다. 같이 읽고 공부하겠습니다. 57쪽 다섯째 줄 새로운 패러그래프입니다.

이런 성서적 神사유에 적합한 현실성 이해는 역사적인 성격을 갖는다.

첫 문장이 그렇게 되는군요. 예. 이러한 성서적 神사유라는 것이 뭘까요? 바로 앞에서 말한 것이겠죠. 고거를 더 짚고 넘어갈까요?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전능한 아버지시고 그 분이 세계를 창조했다고 하는 그러한 하나님 이해죠. 우리가 세례 문답받을때 초보적으로 공부했던 그러한 하나님에 대한 진술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그래서 사도신경에서도 그대로 나오고 이러한 겁니다. 이러한 성서적인 하나님이해에서 가장 적합한 현실성 이해. 요러한 문장들을 여러분들이 이해하기 힘든 게 이런 문제들입니다. 현실성이해는 이렇게 보면 막연하지 않습니다. 현실성이라고 하는 것은 제가 몇 번 설명을 했듯이 정말 참된 것 진리인 것 조금 신학적으로 말한다면 지금 끝나지 않는 완료되지 않는 변증법으적으로 계속 열려 있는 이러한 궁극적 사실들, 현실들 이런 것을 이야기합니다. 정확하게 우리 머릿속에 정리되어야만 이런 것들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지 않습니다. 다시요. 이 문장의 주부가 다음과 같습니다.

이런 성서적 神사유에 적합한 현실성 이해는-요게 주부예요. 문장으로 본다면요.

역사적인 성격을 갖는다. - 요문장만 따로 딱 떼어놓으면 뭐를 이야기하는지 잘 모릅니다. 여기서 역사적 성격이란 것이 무언가를 우리가 이해를 해야만 판넨베르크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따라갈 수 있거든요. 역사적 성격. 예. 그렇게 역사적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가는거에요. 가든지 오든지 움직이는 거죠.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어느 쪽을 향해서 간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거죠. 성서가 말하는 가장 근원적인 현실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그렇게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역사적이라고 하는 거죠. 이게 인제 헬라인들의 세계이해하고, 오늘 본문의 뒤에 가면 다시 나옵니다만, 히브리인들의 세계이해하고 차이점거거든요. 헬라인들은 이 세계를 공간적인 의미로 생각한다면 히브리인들은 시간적인 의미죠. 시간적이라는 것은 여기서 말하면 바로 역사적이 것을 뜻합니다. 성서의 하나님 이해를 따라갈 때 가장 밑바탕에 놓여 있어야 될 그러한 현실적인 이해, 현실에 대한 이해는 역사적인 성격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이 세상은 여기서 무시간적인 질서의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다.

역사적인 성격과 대립하는 개념이 바로 무시간적 질서입니다. 역사적 성격으로 현실성을 이해하고 있는 성서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 세상은 무시간적 질서의 형태가 결코 아니라는 거죠. 무시간적, 시간이 없는 거예요. 아마 독일어로 짤트 로제. 이렇게 되어있는 것 같습니다. 시간이 없는, 그러니까 흐름이 없는, 움직임이 없는 고정된 어떠한 질서, 헬라인들은 바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커다란 공간으로 있는 것이지 변화라고 해야 나왔다 들어갔다 형태만 바뀌고 있는 것이지 그대로다 이렇게 생각을 한 거죠. 불교의 세계관도 어쩌면 이거하고 조금 통할 수 있습니다. 윤회라고 하는 것이 돌고 도는 거잖아요. 우리가 죽으면 다른 동물 식물도 될 수 있나요. 그렇게 되고 그게 업보에 따라서 변형될 뿐이지 그냥 그 안에서 돌고 도는 거다는 그러한 생각이 무시간적 질서라는 겁니다.

여기서 말하는 무시간적 질서라는 것은 그 안에서 모든 현상의 변화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뜻이다.

이러한 입장이 구약성서에도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전도서 같은데 보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아래서 새것이 없다. 옛날 그대로다 그런 표현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한 것은 부분적으로 이러한 무시간적 어떤 질서에 대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주 부분적으로 그러한 표현들이 성서에 있지만 그리고 그것마저도 하나님의 근원적인 통치를 전제하면서 인간 삶의 제한성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지 세계에서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그러한 동일한 것의 반복이다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부분적으로 그런 흔적이 조금 보인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무시간적 진리로서의 형태로 세계를 보지 않습니다.

성서적 이해에서는 오히려 항상 거듭해서 새로운 것이 발생한다. 그것은 전에는 한 번도 있어본 적이 없는 새로운 것이며, 개체 사건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비견될 수 없는 것이다.

새로운 것이 나타나는 다가오는 압박해오는 그러한 세계로 성서가 현실성을 이해한 거죠. 개체적으로는 비슷한 것들이 있기는 있어요. 우리가 자식을 낳듯이 우리의 자식도 자식을 낳잖아요. 콩을 심으면 거기서 콩이 나고 또 거기서 콩을 심으면 콩이 나고 유사한 것이 일상한 것이 반복하는 것처럼 개체에서는 보입니다. 그러나 개체 부분적으로 그러한 유사성이 나타나고 짧은 시간에서 그러한 동일한 반복이 나타나지만 큰 틀에서 보면 동일한 것의 반복이라고 할 수 없죠. 성서는 전혀 그렇지 않게 세상을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건 속에서 항상 거듭해서 일어나는 새로움과 놀라움은 전능한 하나님이라는 사유로부터 유래한다.

새로움과 놀라움, 그런 것이 어떤 역사의 사건에서도 그렇고 또 어떤 생물체의 변화에서도 그렇고 어쩌면 더 나아가서 우주 차원에서도 역시 그런데요. 이 별이 만들어지는 것이 우주의 먼지구름이라는 것이 우연한 기회에 소용돌이치면서 형성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 태양도 마찬가지이고 말이죠. 그렇게 보면 정말 새로운 것, 정말 놀랄 말한 일들이 우리들에게 계속 다가온다. 꼭 우리들이라는 말을 붙이지 않더라도 그렇게 일어난다고 말할 수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성서가 세계를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그 세상의 절대 권력이라고 할 수 있는 제국의 제왕들도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죠. 이러한 성서적 이해에서 보면 그렇습니다. 바로 그것은 전능한 하나님 이라고 하는 사유로부터 유래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전능하다라고 하는 사실에서 이 세계의 사건들은 우리 인간이 예상할 수 없는 그러한 방식으로 새로움과 놀라움을 일으키고 있다고 하는 것이죠. 옳다고 생각하시죠? 이해하시죠. 그러니까 이 판넨베르크가 요기서 제시하는 문제가 조직신학적 관점에서요. 이 세계의 일어나는 모든 새로움과 놀라움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그 전능성을 전제하는 말이라고 하는 거죠. 하나님이 무소불위하다고 하는 그러한 가르침은 그저 하나님이 대단하다 그렇게 꾸미기 위한 신학적 수사가 아니라 이 세계의 모든 사건들에서 벌어지는 놀라움과 새로움에 대한 깊은 통찰과 연관되어 있는 그러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교리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세계문제와 아주 깊숙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앞에서 모든 하나님 이해가 세계관과 연관되어 있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거든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기독교 교리라고 생각할 때 자꾸만 떼어 놓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 세계의 현실성을 가장 심층적으로 이해하는데서 나온 하나님에 대한 합리적인 논리적인 그러한 진술이 바로 기독교 교리라고 할 수 있는 거죠. 요 대목도 잘 여러분들 머릿속에 넣어 두시기 바랍니다. 세계의 놀라움과 새로움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전능성, 혹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러한 사유로부터 나온다. 나온 것이다. 그러니까 서로 연결되는 문제다라는 것이죠.

이 하나님에게는 불가능한 사물이 없으며, 이 하나님은 이것을, 즉 세계와 인간현존이라는 관점에서 매우 특별한 것을, 매우 새로운 것을 항상 거듭해서 드러낸다. 그것 앞에서 하나님의 전능성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거죠.

따라서 동일하게 유지되는 질서라는 사상은 하나님에 대한 성서의 사상과 긍극적으로 일치될 수 있다 없다. 없다? 있다? 없죠. 당연히. 성서적 하나님이해 세계 이해에서는 동일한 것이 거듭해서 드러날 수 없죠. 세계를 전혀 다르게 보는 것이죠.

하나님에 대한 성서의 사상은 구약성서의 하나님을 올림피아 종교의 신들로부터 구별한다. 헬라인들에게 신들은 오토(W.F. Otto)라고 하는 종교학자가 적절하게 언급한 것처럼 ‘존재론적 형태들’(Seinsgestalten-자인스 게슈탈튼)이었다.

요거는 좀 더 설명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그냥 지나가죠. 제가 자신이 없으니까. 가겠습니다. 뒤에 설명이 되니까 그냥 지나가는 거예요.

헬라인들에게 ‘질서’와 ‘세계’가 요게 중요하죠. 질서 세계 이런 것들이 유일한 로고스인 것처럼, 그런 신들 가운데서, 자인스 게슈탈튼, 존재론적 형태를 가진, 세계에 대한 원형적 질서가 그 전망을 드러냈다. 세계를 그런 관점으로 보는 거죠. 신들의 유희 정도라고 할 까요. 형태로 나타나는 여기는 새로운 것이 없습니다. 강력한 힘들은 나타나지만 그러나 근본적인 새로움이라고는 할 수 없어요. 따라서 헬라 철학에서 코스모스, 세계라고 하는 의미의 코스모스는)는 인간적 신들 없이는 생각될 수 없다. 신들이 인간과 같은, 같다기 보다도 인간적 성품을 가진 그러한 신들이 없이는 설명이 될 수 없다.

이에 반해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하나님의 전능이 만물을 변화시킨다고 생각함으로써 사건들의 결과에서 관찰될 수 있는 모든 질서는 전능한 하나님의 의지가 우연하게 자리 잡게 된 것으로만 인식될 수 있었다.

좀 까다로운 표현이죠. 여기서 지금 헬라인들의 세계이해와 유대 히브리인들의 세계이해 차이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쭉 내려온 그 흐름에서 본다고 한다면 무슨 말인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이스라엘, 구약성서의 세계이해는 동일한 것의 반복일 수 없는데 반해서 헬라인들의 코스모스 이해에서는 그것이 가능하다. 그것이 원형이다. 그러한 두 세계이해의 차이점을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우연하게 자리 잡은 것이라고 표현되어 있는데요. 그러니까 우연성이라고 하는 것은 성서에서 하나님이해에 중요한 개념입니다. 헬라인들에게는 그런 우연한 것들은 없습니다. 질서에 의해 움직이는 것들이죠.

이로 인해서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전체 현실성은 무시간적 질서로서가 아니라, 무시간적 질서... 무시간적 질서가 아니라 항상 새로운 사건의 계승으로서, 새롭다고 하는 것을 여기서 꼭 기억하세요. 예상할 수 없는 미래를 향해 항상 새롭게 전개되는 하나님의 역사행위로서 이해되었다. 무슨 일이 어떻게 될지를 모르는 거죠. 인간의 모든 계획들이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마는 거죠. 그러한 표현들은 구약성서에 많이 있잖습니까? 욥기서만 하더라도 욥이라고 하는 의인, 무죄한 자의 고난 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신정론을 다루고 있지만 그것의 그 욥기서의 또 하나의 측면은 인간의 생각을 근원적으로 뛰어 넘는 전능한 하나님에 대한 이해라고 하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말을 하다 보니 고 실마리가 좀 풀리는 것 같군요. 신정론의 문제, 무죄한 자의 고난 이 문제는 사실은 아직까지 신학계에서 완전하게 풀어내지 못한 겁니다. 어쨌든 신정론에 대해서 길게 말하지 않겠어요. 이게 바로 우연하게 일어나는 세계 이해를 근거로 한, 하나님의 전능성이라고 하는 성서의 하나님 이해와 맞물려 가는 것 같습니다. 제가 욥기서를 말하다 보니 그게 기억나서 말하는 거예요. 욥기서에는 욥의 친구들이 논쟁을 하지 않지 않습니까? 결국은 자기들의 주장에 대한 타당한 대답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말하기는 하는데 답은 아니었습니다. 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세계 모든 근원들이 도대체 무엇인지 너희들이 알기나 하고 이러한 무죄한 고난이 누구의 책임인지 이렇게 논란을 벌이고 있느냐 어리석으니 사람들이 그러한 이야기를 욥기서가 뒷부분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게 욥기서의 주제라고 할 수 있겠죠.

이것은 또한, 또 연결되는 거군요. 제가 다른 때도 한번 말씀드렸는지도 모르지만 기독교와 성서의 모든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은 홀로 똑 덜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다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신정론, 세계 우연성, 하나님의 전능성 이런 것들이 기독교의 대림절 신앙하고도 연관되는 거죠. 종말론하고 연관되는 거죠. 그것은 곧 하나님의 나라론과도 연관되는 겁니다. 우리는 무슨 권세에 대한 논리적인이고 합리적인 것에 대한 우리의 목숨을 거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될 수도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의 그러한 예상들을 늘 다 뛰어 넘으시니까 그런 것입니다. 결국은 우리가 계획하고 우리가 투쟁하고 얻어내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으로 우리는 구원을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일구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을 보는 거죠. 기다리는 거죠. 기다리는 겁니다. ‘아 그렇게 우리들은 뭐하는 두 손 모으고 가만히 있으면 되냐’ 그러한 생각을 할 수도 있기는 있지만 그러한 이야기를 드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시겠죠. 하나님의 이 세상을 향한 그 통치가 우리의 이상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오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네. 다시 문장을 읽어 보겠습니다.

이로 인해서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전체 현실성은 무시간적 질서로가 아니라 항상 새로운 사건의 계승으로서, 예상할 수 없는 미래를 향해 항상 새롭게 전개되는 하나님의 역사행위로서 이해되었다. 항상 거듭해서 우연하게 일어나는 새로운 사건이 이렇게 강조됨으로써 이스라엘 사상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인격성은 헬라 신들의 인격성과는 달리 결코 진부해지지 않을 수 있었다.

헬라의 신들은 인간과 같이 역사의 문제들, 풀어나간다고 할까요? 개입되어 있다고 한다면, 그래서 늘 신이 인간과 싸우고 인간이 신과 싸우고 그러한 일들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데 구약성서에서는 그런 일들은 아예 가능하지 않는 거죠. 게임이 되지 않는 거죠. 표현이 좀 그렇습니다만 예 고런 정도로 고 부분의 설명을 마치겠습니다.

여기서 순전히 우연한 사건들에 대한 통찰이 근본적인 핵심 문제라고 한다면 사건의 그 어떤 단일성도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게 아니냐는 의심이 가기도한다.

모든 게 우연한 사건의 개입, 그러한 발생이라고 한다면 단일성, 모든 것을 다 관통하는 단일성, 일치성? 그런 것들이 없는 것이 아니냐? 도대체 이 모든 것을 근거하는 핵심 그런 것도 없는 것이 아니냐?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거죠. 정확한 이 여기서 말하려는 단일성이라고 하는 것은 플라톤의 이데아의 개념에 가깝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이데아가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형상, 폼 형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변하지 않는 본질적이 거라고 하는 거죠. 모든 것들이, 이 세상과 역사 이런 것들이 우연한 것의 개입이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결국 그러한 단일성, 모든 것을 관통해내는 그러한 근원까지도 없는 것이 아니냐? 이러한 질문이 가능하다고 하는 거죠.

사실상 그 연관, 즉 지속적인 것 자체가 여기서 우연한 것이다. 단일성을 이루는 그것마저도 우연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죠. 그러나 동시에 전능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약속의 하나님이었다. 잘 보십시오. 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했으며, 역사의 부침을 통해서 구원을 이루어 나갔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서 최종적 파국 앞에서 인간을 구원하고 그 역사를 통해 구원을 관철시키는 것처럼 말이다. 그 전능의 하나님은 ‘자신의 손이 해야할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그가 한 때 행했거나 행하려했던 것을 견실하게 유지함으로써 신실하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확고부동성은 항상 거듭해서 새롭고 놀라운 방식으로 일어난다. 지금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구원통치 그런 것이 단일성인데 그것마저도 새로운 방식으로 일어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현재에도 무엇이 영속적인 것이며, 무엇이 지속되거나 머물러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을 결정적으로 예측할 수는 없다.

네 이해가 되시죠. 이러한 표현들을 조금 더 궁극적으로 밀고 나가게 되면 하나님도 아직 결정된 분이 아니다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이상하게 들리시죠? 영원불변이라고 하는 하나님에 대한 속성이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도 아직 결정된 분이 아닌 것처럼 말할 수 있느냐? 이상하게 생각됩니다. 이게 조금 미묘한 문제인데요. 하나님이 변할 수 있다라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연히 변하지 않는 분입니다. 그러나 그 변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방식으로는 아닌 거예요. 오히려 우리가 볼 때 변하는 것처럼 통치하고 행위하시는 하나님이야말로 영원불변하다는 그 표현에 걸맞은 그러한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르트도 아마 그런 차원에서 이런 용어를 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과정중에 있는 하나님, 인베르덴데 곳트라고 했나요? 정확한 독일용어가? 확실한지는 모르겠는데요. 그러한 뜻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의 초점도 하나님이 변한다? 아니다 그런 차원이 아니라 종말까지 미래에서만 모든 것이 확실하게 드러나게 될 그 하나님에 대해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이 세계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 유한하고 잠정적일거구요. 그리고 우리 인식마저도 그러한 근본적인 한계에 있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영원불변한 그러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들이 우연한 사... 다시요. 말하다보니 잠깐 꼬였습니다. 영원불변한 하나님이 우연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자신의 통치를 열어주시는데요. 그것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한계가 있어서 마치 변한 것처럼 보인다 그 이야기죠. 다시 또 이렇게 정리하고 넘어가야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되겠네요. 하나님은 변하는 방식으로 변하지 않는 분이시다.

그러나 미래는 무엇이 존속하게 될 것인지를 증명한다. 따라서 미래는, 이 미래요. 미래의 힘이 하나님이죠. 판넨베르크 식으로 이야기해서 그렇습니다. 미래의 힘이 하나님이시죠. 미래는 무엇이 사물의 영속적인 본질인지도 역시 결정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성서의 하나님은 미래로부터 과거의 사건들로 되돌아감으로써, 또한 자신의 방식으로 이 사건들을 확고히 함으로써, 그분의 방식이에요. 우리의 기대가 아니라 그분의 방식으로 그래서 우리는 그 하나님을 인격적인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인격적인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와 똑같이 인간적 방식으로 생각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방식으로 세계를 통치하신다고 하는 뜻입니다. 그렇게 그러한 방식으로 사건들을 확고히 함으로서, 다시 말씀드리면 우연한 그러한 방식으로 이 세계의 사건들을 확고하게 함으로서 사건연관의 연속성과 일치성을 기초하게 된다. 사건연관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사물, 세계 이 모든 것들의 연관, 연속성과 일체성을 토대한다고 하는 거죠. 이 표현들이 전달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조금 보충설명이 필요한데요. 보충설명은 인제 철학적문제예요. 그런 것 까지 다 힘들고 내가 다 아는 것도 아니고요. 조금만, 한마디만 더하면 그렇습니다.

사건연관의 연속성, 제가 이 볼펜을 던지잖아요. 가다가 떨어집니다. 부딪쳐서 소리도 나요. 이게 다 사물의 연관의 연속성과 일체성이예요. 제가 던졌는데 한번은 떨어지고 한번은 안 떨어지지 않고 계속 나가거나 아니면 앞으로 나가지도 않고 관성의 법칙을 벗어나게 된다면 연속성과 일체성이 없게 되는 거예요. 가면 이거는 백발백중 그러한 연속적인 반응을 일으킵니다. 하나님이 그러한 방식으로 이 세계의 연속성과 일체성의 기초를 놓으시고요. 그런데 의지해서 우리가 지금 이 세계를 이렇게 그러한 하나님의 통치와 약속에 근거해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만약에 그 연속성이 없다면, 그러니까 우리가 땅을 걸어가고 있는데 마음대로 무너지거나 구멍이 뚫리거나 흙이 갑자기 물이 된다거나 그러면 연속성이 허물어지는 거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삽니까? 하나님은 토대들의 연속성을 유지한다고 하는 거죠. 그런데 그게 우연한 방식으로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예상 외로 벌어진 사건의 모든 방향전환에서 여전히 거듭해서, 이것은 하나님의 초기 의지가 작용하는 놀라운 방식이지만, 자신의 백성인 이스라엘과 나눈 약속으로 되돌아옴으로써 그는 엄청난 사건에 역사의 단일성을 제공했다. 우여곡절 이리 틀리고 저리 틀리고 하다가도 약속으로 돌아오시거든요 약속의 단일성이 거기서 선포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약속을 이루신다. 그게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겁니다.

사건 연관의 마지막으로부터 붉은 실*로서의 이 단일성은 사건들 가운데서 가시화된다. 붉은 실, 직역을 해놓아서 그렇습니다. 로테파덴이라고 하는 독일어인데요. 실들이 막 엉클어 져 있습니다. 뒤죽박죽으로. 어떻게 흐름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헝클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붉은 실이 한 가닥이 있어요. 그게 쭉 흘러가고 있습니다. 이게 로테파덴이라고 하는 독일어 관용어인데요. 이 붉은 실을 보아야만 역사의 단일성을 알 수 있는 거죠. 어쨌든지 최후가 되면 이 마지막까지 지속된 붉은 실이 무엇인지 결정된다. 붉은 실은 역주를 달아놓았으니 참조해 보십시오. 미래가 되면 마지막 때 종말이 되면 붉은 실 오늘의 현실성 뒤죽박죽되듯이 현실이 흘러갔지만 로테파덴 이런 것이 무엇인지는 역사 안에서 우리가 부분적으로 확인할 수 있지만 마지막에 가서 확실하게 결정되는 거죠. 모든 역사적 경험에서 밝히 설명될 수 있는 이러한 확증은 여전히 훨씬 보편적으로 다음과 같이 언급될 수 있다. 마지막** 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다고 말이다. 놀랍죠. 우리는 태초에 그때 창조가 되었다고 보는데 이러한 신학적 관점을 통해서 본다면 하나님은 세상을 마지막 때 창조합니다. 그때 가서야 우리는 처음 창조와 이 마지막 창조, 정확하게 말하면 창조의 완성의 사이에 있었던 붉은 실의 실체를 알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이, 주변의 많은 사건들이, 우연하게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그렇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거기에는 하나님이 이끌어 가시는, 통치하시는 단일성과 연속성 그것이 있는 거죠. 그것을 우리가 이해하기 위해서 성서도 읽고 또 성서가 그것을 우리들에게 설명해 주기도 하고 손가락질로 가르쳐 주기도 하구요. 신학의 과정을 통해서 그것에 조금씩 가까이 가고 있는 중이죠.

마지막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다고 말이다. 왜냐하면 무엇이 과연 현재 우리 주변에 있는 사물과 존재를 고유하게 유지하고 있는지 마지막 때 결정되기 때문이다. 마지막때 결정되기 때문이다. 지금은 우리가 거울로 보는 것처럼만 희미하게 알고 있을 뿐이다. 왜 죽어야 되는지? 그리고 왜 우리가 누구를 만나는지? 오늘 우리가 인터넷 사이버공간으로 판넨베르크의 사도신경 해설을 공부하고 있는데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기 위해서는 수십억의 사건들이 우리의 생각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의 오묘한 방식으로 연루되어서 일어난 것이거든요. 10년 전에 여러분들이 각각 어디서 무엇을 하셨는지요. 그때 10년 후가 되면 정용섭 목사가 하는 다비아의 동영상을 통해서 사도신경 강해를 들을 거다. 사실을 조금이라도 수십억만 분의 1일의 가능성이라도 생각을 하셨나요? 아니거든요. 무슨 일이 앞으로 우리에게 벌어질지는 정말 예상할 수 없는, 그러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부대끼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한 모든 것들이, 막 이 세계가 카오스다라는 그런 뜻으로 말씀을 드린 것이 아닙니다. 카오스라고 해도 좋아요. 그게 하나의 방식이에요. 우리들에게 그렇게 보이고 있을 뿐이죠. 그 안에는 분명히 단일성과 연속성이 있습니다. 로드파덴이 있는 거예요. 붉은 실, 그것을 조금 더 가까이 따라갈 수 있는 사람들을 영성가, 위대한 신학자들, 성서기자들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러한 로드파덴, 줄 그런 것들이 그런 것들은 결국은 종말에 가서 결정되기 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마지막 때 세상을 창조한다. 그렇게 말할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역사의 모든 우연은 마치 신적인 창조의 ‘장소’라 할 궁극적 미래로부터 각각의 현재를 말해준다. 직역이군요. 우연성, 역사의 우연성, 앞서 말한 10년 전과 후 인터넷공간에서의 강연이 우연한 것들의 수십억만 분의 결합을 통해서, 관계를 통해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인데 이러한 우연한 우연성이라고 하는 것은 궁극적 미래,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보게 될 그 미래, 생명과 죽음과 시간과 공간 이러한 모든 것들의 비밀들이 확연하게 드러나게 될 궁극적 미래로부터 오늘 각각의 현재가 무엇인지를 알게 해준다. 그렇게 말하면 될까요? 정확한 것은 아닌데 대충 그렇게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궁극적 미래와 오늘 각각 현재를 연결해주는 것이 우연성이라고 하는 거죠.

이에 상응해서 마지막 때 세계와 하나님의 의지는 세계, 그리고 하나님과 더불어 계시된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 능력과 주권으로 여전히 도래하고 있는 그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오고 있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은, 그것은 곧 미래적 성격을 말하는데, 매우 분명한 특색을 드러내 준다고 할 수 있다. 오고 있는 하나님, 콤몬 데곳트, 몰트만의 책 제목 비슷하기도 하지요. 즉 궁극적이고 결정적인 미래가, 즉 세계의 종말론적 미래가 그것이다. 그리고 예수가 비유로 이 사실을 적시해주고 있듯이 이러한 궁극적인 미래의 불빛 가운데서만, 그리고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임한다는 소식의 불빛 가운데서만 진리와 모든 사건의 본질이 드러난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우리가 이러한 사실들을 배울 수 있죠. 신랑이 오기를 기다리는 열 명의 처녀들이라든지. 그러한 비유들이 다 하나님의 나라의 은폐성과 미래적 성격을 이야기하는 것이거든요. 궁극적 미래의 불빛과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임한다는, 이건 아주 영광스럽게 임한다는 뜻입니다. 영광,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말들을 많이 하잖아요. 그거는 오직 그 하나님만이 온전하게 주인이 되는 어떤 상태를 이야기합니다. 그런 불빛에서만 진리의 모든 사건들이 드러난다. 그 이전에는 모든 것이 다 잠정적인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된다는 말이냐 그런 질문이 가능하죠.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렇다면 결국 우리는 불가지론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죠. 증명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냥 입 다물고 될 대로 되라 사는 것이 편하지. 지금 어떤 방법이 있느냐? 이런 하나님을 믿고 산다는 것이 도대체 어떤 거냐? 그러한 질문이 가능합니다. 네 그것에 대한 대답을 제가 이 시간에 드리기는 힘듭니다. 한두 마디로 끊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고요. 다만 이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불빛을, 빛을 내가 조명 받고 있다고 하는 사실에 근거해서 혹은 거기에 감격해서 또는 거기에 푹 젖어서 오늘 우리에게 오는, 그리고 오늘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현실의 삶들을 충실하게 사는 거죠. 여기서 두 가지가 관건입니다. 종말적인 하나님 나라의 빛이 뭐냐 하는 거고. 그건 신학적인 통찰을 통해서 우리가 얻어야 되는 것이고요. 그리고 오늘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현실의 삶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 두 가지가 기독교의 영성에서 건강하게 이렇게 어울린다고 할까요? 공명한다고 할까? 그러한 삶을 우리가 살아야 되는 거죠. 양극단으로 떨어지게 되면 그건 어딘가 건강하지 못한 증거겠죠. 만약 우리가 미래로부터 오는 그 불빛만 기다린다고 한다면 기다림의 영성이 기본적으로 필요합니다만 그기에 머물러 있게 된다면 우리는 창조와 종말 완성사이에 있는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을 통해서 벌어지는 하나님의 계속적인 창조를 외면하는 거죠. 그렇다고 해서 오늘 이 삶에서만 치우치게 된다면 로데파덴이라고 하는 그 붉은 실을 놓치게 되고 그게 인제 미래로부터 오는 참된 궁극적인 완성된 생명의 선인데요. 그걸 놓치게 되고 헝클어진 실타래만 붙들고 있을 수 있는 거죠.

네. 마지막 문장만 다시 한 번 더 읽고 오늘 공부는 정리하겠습니다.

예수가 비유로 이 사실을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듯이 이러한 궁극적인 미래의 불빛 가운데서만, 그리고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임한다는 소식의 불빛 가운데서만 진리와 모든 사건의 본질이 드러난다.

고맙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다음시간에 만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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