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넨베르크의 사도신경 해설 제18강 - 3장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5)

판넨베르크 사도신경해설 18강이 되겠습니다. 시작하죠. 지금 우리들은 몇 주 계속해서 창조의 문제, 하나님이 전능하신분이고 천지를 창조했다는 그러한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게 보통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세상을 창조했다. 그것을 일반적으로 우리가 이야기하죠. 그거를 진화, 이런 것들과 대립되는 걸로 이해합니다. 이 창조의 문제가, 다른 교리들도 비슷한 그런 현상이 일어나기는 하는데 기독교 하나님을 오히려 일반 1세기의 자연이해와는 동떨어진 것으로 이렇게 받아들여지죠. 방금 말씀드린 대로 진화론과 창조론의 대립 이런데서 우리가 그러한 현상들을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그건 아니죠. 여러분들이 이 강의를 유심히 들었거나 판넨베르크 이 책을 읽으셨다고 한다면 이미 어떠한 느낌을 아셨겠지만 창조,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 이 문제는 바로 세계에 대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계에 대한 해석이요. 그러니까 해석을 우리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도 하잖아요. 이 이야기가 오늘 우리가 같이 공부하게 될 내용에도 들어가게 될 내용입니다. 생물학자 지질학자 물리학자 이런 사람들이 세계현상에 대해 연구하죠. 그들이 연구하고 있는 것이 우리 신학입장에서 볼 때 그렇게 기분이 나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하는 일에 우리는 박수를 쳐야 되는 거죠. 왜냐하면 그게 바로 하나님의 창조를 설명하고 있는 거니까요. 결국 그러한 일반 물리학자나 생물학자들의 그러한 연구라고 하는 것이 결국 하나님이 창조자라고 하는 사실, 그걸 좀 부정하는 거 아니냐? 그런 생각을 하시는 분이 있는데 그건 큰 착각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오히려 정반대로 우리가 믿고 있는 창조주 하나님을 일반 자연과학자들이 더 정확하게 해명하고 또 증명해 주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물론 그들이 하는 작업이 신앙과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 자체라고 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들이 신에 대해서 말을 하겠습니까? 물론 학자들에 따라서 유신론 측에 있는 과학자들은 이야기를 하겠습니다만 그런 것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에요. 그들은 자기들이 신이라고 명칭을 붙이지는 않지만 결국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분석하고 해명하다고 하는 점에서 결국 그들이 하는 작업은 신학, 신앙과 크게 어긋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인제 신학이 혹은 기독교 신앙이 그들이 하는 작업에 토대들, 신앙적 토대를 제공해야 될 필요는 있겠죠. 그들이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던 그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지금 제 설명이 어느 정도 설명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신학자나 일반 자연과학자나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 우리는 그렇게 말하고 그들은 자연이라고 말하는 그 세계를 말하는 것은 똑 같습니다. 거기에 접근하는 방식이 차이가 있는 거죠. 우리는 자연과학자들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하는 작업이 하나님의 창조, 혹은 창조자 하나님을 밝히 드러내는 작업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고요. 또 다른 한편에서는 그들이 그러한 자연과학 연구를 계속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모든 사물 공간 시간 이런 것들의 근본적인 이유들, 이거를 오늘 공부에 나오는 판넨베르크의 내용의 용어로 쓰자면 모든 자연만물의 단일성 그런 것들을 확보하지 못하는 거죠. 단일성이라고 하는 것은 전체를 꿰뚫는 기준이라고 할 수 있거든요. 정말 참된 리얼리티를 이야기하는 거죠. 그런 것이 자연과학 자체만으로는 그것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물론 인제 학자들에 따라서 지금은 아직까지 자연과학의 수준이 낮아서 그렇지 결국은 모든 것이 다 드러난다. 그렇게 주장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그게 100% 확실하게 드러나게 된다면, 그러면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 거죠. 그렇게 되면 우리는 두 손을 들고 기독교 신앙을 다 포기해야 될 겁니다.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거예요. 이 문제를 가지고 자꾸 질질 끌지 않겠습니다.

왜 그게 그런 방식으로 끝나지 않느냐 하면 어떻게 설명을 해야 될까요? 이 우주가 120억년이라고 한다면 그때부터 우리의 시간 공간이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원리들을 다 발견한다고 하더라도 그 이전에 무라고 하는 사실 그것의 실체를 우리는 발견해 낼 수 없는 거죠. 그것만이 지금 흘러가고 있는 시간, 그리고 자연, 역사 이런 것들이 늘 기계적으로 나가지는 않는 거거든요. 판넨베르크의 용어를 빌리자면 유일회성과 우연성 이런 것들이 이 세계자연 이런 것들의 계속 작용하는 겁니다. 작용한다기 보다도 그러한 개념으로 바라보아야만 이런 것들이, 자연 역사 이런 것들이 조금씩 해명되는 거죠. 그런 것들 일회성, 우연성 이런 것들에 작동인 이 바로 하나님으로 우리는 이해하는 거죠.

이렇게 좀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 자연과 역사가 완벽하게 기계적으로 발전해 나간다면, 그게 확실하다면 초대형 수퍼컴퓨터로, 앞으로 천년 후라고 해도 좋아요. 그때 프로그램이 확실하게 설계가 나와 갖고 앞으로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이라는 대답이 100% 완벽하게 나오게 된다면 그때는 신의 자리는 없는 거죠. 그것은 아예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이 책을 조금 더 따라가도록 하죠. 저의 두서없는 설명보다도 판넨베르크의 설명이 그 사실을 이해하는데 훨씬 더 도움이 될 겁니다. 60쪽입니다. 이렇게 시작합니다.

역사로서의 현실성에 대한 이러한 이해가 우리에게도 역시 타당하게 작용할 수 있는가? 앞서 제가 이야기한 유일회성, 우연성 그리고 불가역성 이런 것들이 다 이 세계를 역사로 이해하는 거죠. 고자리에 앉아서 돌고 도는 순환하는 그러한 세계가 아니라 가게 되죠. 가게 되면 돌아서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진화라고하는 것도 불가역성이 없습니다. 진화되어 갈 뿐이지 거꾸로 진화될 수는 없죠. 진화론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그런 기독교인들이 간혹 그런 주장을 하지 않습니까? 진화론이 맞다고 한다면 원숭이가 사람이 되는 중간쯤되는 존재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어디갔느냐? 동물원의 원숭이를 아무리 찾아봐도 조금씩 조금씩 변해서 지나 사람이 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없다고 하는 겁니다. 그건 아예 학문적이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진화론은 종에서 종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조상으로부터 흘러간다고 하는 거죠. 이게 옆으로 건너뛸 수는 없는 겁니다. 쭈욱 흘러가는 거죠. 거꾸로 흘러갈 수도 없는 거구요. 이게 역사로 세계를 이해하는 거죠. 시간적인 이해이기도 하구요. 이게 고대의 헬라 사상이 말하는 코스모스가 아니라 히브리인들이 말하는 에온이죠 그러한 시간적인 이해, 지금 이런 말들이 이렇게 실질적으로 와 닿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똑 같은 것이 반복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죠. 태양이 또 뜨고지고 밥먹고 계속 우리가 자식을 낳고 계속 그렇기 때문에 유일회적이라고 하는 것이 이게 잘 이해가 잘 안되는 겁니다. 그러한 부분들은 아주 고도의 철학, 신학, 고고학 이러한 학문적인 방법을 통해서 접근을 해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도 사실은 마찬가지이구요. 하나님이 손금 들여다보듯이 그렇게 되는 분입니까? 아니잖아요. 하나님이 전지전능하다고 보통 이야기하지만 이 세상이 하나님의 전지전능 이런 것으로 돌아가지 않잖아요. 그래도 전지전능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어떤 세계를 새로운 시각으로 볼 때만 가능한 겁니다. 역사로서의 현실성, 이 세계의 현실들을 역사로 이해하는 거죠. 여러분 이러한 것들은 자꾸만, 방금 말씀드린 건데 관념적이다. 쉬운 예기로 좀 어렵다 생각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늘 실증적이고 손에 붙잡는 것 그런 식으로 아니면 개인의 소외나 두려움, 개인의 실존적인 경험 이런 것만을 옳다고 생각하거나 그런 것만을 확실하다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그런것에만 친숙했기때문에 그것을 뛰어넘는, 메타피직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러한 차원에서 어떠한 사실들을 이해하기 시작하면 그건 굉장히 사람들에게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건 어쩔 수 없어요. 그걸 또 제가 말씀을 드리는 것은 아니에요. 그걸 자꾸만 극복을 해야 되는 거죠. 이건 우리가 위대한 신학자 철학자가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은 그런 것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물론 이 말에도 어폐가 좀 있죠. 그런 것을 모른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의 구원, 희망, 그런 것들을 붙들고 살면 기독교 신앙이죠. 우리가 뭐 기독교 신앙 중심에 깊이 들어가야만 반드시 기독교인이라고 말할 수 없죠.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경지까지 이른다고 하는, 구원의 분량을 성숙시킨다고 해야 하는, 장성해야한다는 그러한 차원에서 본다면 우리는 관념적이라고 한하더라고 그런 쪽으로 좀 나가야 됩니다.

종말 이런 것도 사실 오지 않았기 때문에 관념적이거든요. 말하자면 종말론적으로 이 세계를 본다고 하는 거죠.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종말론적이지 않잖아요. 계속 예민하고 치열하게 투쟁하고 그런 건데 이런 것도 지나간다고 한다는 종말론적인 관점이라고 하는 것은 어쩌면 일상에선 별로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일 수 있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만 하면 뜬구름 잡는 이야기 일수도 있어요. 그러나 이러한 방식이 아니면 기독교 신앙의 진면목을 맛보기 힘듭니다. 근본적으로 이야기하면 이런 것들이 더 현실적인 거예요. 관념적인 것이 더 현실적인 것입니다. 추상적이 것과 관념적인 것은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같다고 말할 수도 있고요. 제가 이런 것들을 예민하게 구분해서 말씀드리기는 힘듭니다. 그런 준비도 되지 않았구요. 간단하게 말하자면 지금 우리가 보고 있고 듣고 있는 것은 지나가는 거죠. 지나가는 것은 사실은 오히려 그러니까 추상적인 거죠. 확실하지 않는 거죠. 지나가버리니까 그러한 지나가는 과정 속에서 그런 모든 사건들이 유일회성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유일회성이 더 확실한 거죠. 그게 구체적인 거죠. 화이트헤드가 말한대로 Reality is the process. 할 때 리얼리티는 프로세스라고 하는 거죠. 이게 과정이 관념적인 것 같지만 그쪽 철학의 입장에서 볼 때 이거야 말로 리얼한 거죠.

지금 우리는 천지창조, 하나님의 창조, 그 세계 이런 것들을 역사적으로 이해한다. 기독교 신앙의 세계관이다. 이 이야기죠.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라고 하는 사도신경의 한 구절이 온 세계 전체의 학문과 예술 세계에서 벌어지는 학문과 예술과 대화할 수 있는 통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점에서 아주 중요하죠. 다시 읽겠습니다.

역사로서의 현실성에 대한 이러한 이해가 우리에게도 역시 타당하게 작용할 수 있는가? 여기서 진지하게 제시된 질문들이 부수적인, 종속적인 방식으로 답변될 수는 없다. 이 질문들은 그것이 의미심장하게 생각되고 논의될 수 있는 그런 방향이 분명할 때만 설명될 수 있다. 이럴 경우에 인류 역사만이 문제가 아니라 성서적 창조신앙이란 의미에서 ‘역사’로서의 자연이 이해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역사로서의 자연, 자연을 역사로 이해하는 거죠. 그래서 판넨베르크의 신학을 역사신학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역사가 기독교 신학의 가장 포괄적인 지평이다. 이게 그의 신학의 명제이거든요. 움파르센테 호리즌. 네 자연, 우리앞에 벌어지는 모든 현상들 말이죠. 새끼 낳고 암술과 수술의 결합으로 꽃이 피고 하는 이런 자연 현상들, 이게 역사, 시간과 더불어서 지나간다 말이죠. 분명하잖아요. 그거는요. 이 말은 그게 고정되어 있지 않다고 하는 뜻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러한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아주 중요한 물리의 원리라고 하는 만유인력인가요? 그것도 만유불변의 원칙은 아닙니다. 지금 그렇게 중력이 모든 별들에 작용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죠. 자연이 내적 메커니즘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분명하죠. 그러나 그것도 역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거죠. 이러한 역사가 지나간 다음에는 새 하늘과 새 땅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된다면 그때 중력이다 뭐다 이거는 의미가 없다고 할 까요? 아니면 이미 지나간 시대라고 할까요?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이미 그런 것은 지나갔어. 어떤 세계가 우리에게 올지는 우리는 그걸 전혀 예상할 수 없습니다. 어쨌든 이러한 자연마저도 역사로 이해하는 그것이 바로 창조신앙이다. 재미있죠. 신학자들이 하는 말들이 좀 뭐 거리가 먼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은 실질을 꿰뚫고 있습니다.

오늘날 널리 행해지고 있는 인간사에 대한 이해는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역사의 실행자가 된다는 점 때문에 성서의 역사 설계와 다르다.

인간이 그렇게 역사의 주체로 지금 들어서고 있죠. 자연도 주체로 이해하게 되면 성서적 이해하고 다른 거죠. 성서는 그 모든 것들이 다 피조물이다. 이야기하거든요. 이런 점에서는 우리가 경쟁관계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를 통해서 우리에게 인간역사의 단일성에 대한 전망이 보이는가? 인간이 주체로 나서는 역사라고 하는 일종의 근대주의 이후로 벌어지는 그러한 역사이해죠. 인간의 주체성, 자유, 합리성, 그런 것들로, 그러한 방식으로 역사를 이해하는 게 과연 역사의 단일성을 확보할 수 있는 길이 되는가 하는 거죠.

인간이 역사 안에서 행동한다는 사실을 고대 이스라엘 역사 기록자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인간 행위에는 인간의 의도와 행동을 뛰어넘어야 파악되는 그 어떤 다른 것이 있었다. 도저히 인간의 행위 그런 것만으로 파악할 수 없는 그러한 어떠한 힘들이 역사에 개입한다고 하는 거죠. 그래서 역사에 예상하지 않았던 일들이 발생하는 거예요. 그런 일들이 어디 한 두 가지입니까? 제국들의 몰락 같은 것들을 보면 예상하지 못했던 어떠한 사건으로 인해서 일어나거든요. 작년 한참 세계경제의 파산 이런 것들도 그렇게 유수한 경제학자들이 있었지만 예상을 못했죠. 어떤 사람이 예상을 했다고 해서 나중에 주목을 받기는 합니다만 그 사람도 어떤 확실한 근거에서 말한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이야기한, 여러 가지 구구각색이 이야기한 것 중 하나가 대충 비슷하게 이야기를 한 거죠. 그 사람이 말하던 그 방식대로 역사가 흘러올 개연성은 없는 겁니다. 이러한. 그러한 인간이 계산해 내고 참여하고 하는 그러한 것을 넘어서 일어나는 어떤 힘들, 이런 것들을 성서기자들이 이야기하는 거죠.

사건의 진행이 항상 거듭해서 인간의 계획과는 다르게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이러한 다른 과정을 통해서 오히려 사건의 심연에 어떤 연관이 결합되어 있는 게 아닐까? 역사 과정은 분명히 성서의 역사 기록자들이 여기서 배경으로 작용하는 세력을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 이해될 수 있다. 성서 기자들은 인간이 행위 함으로써 역사적 사건에 참여했지만 궁극적으로 그 역사적 사건은 하나님의 행위라고 생각했다.

하 나님의 행위라고 성서기자들은 본거죠. 혁명에 참여해도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행위라고 본 것이죠. 인간이 그렇게 혁명에 참가해도 그 역사 사건이 일어날 수도 있고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겁니다. 그게 뭐냐? 뭐가 작용하느냐? 여기서 인제 성서와 일반 세속 역사가들의 관점이 달라질 수 있죠. 마르크스 같은 사람들은 뭐라고 이야기할까요? 계급투쟁이 역사다. 현상적으로 그런 부분이 있기는 있을 텐데요. 어쨌든 성서기자들은 하나님의 행위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죠. 하나님의 행위라고 할 때 이거는 간단하게 우리가 그냥 하나님을 믿자. 그분만이 한다. 단순소박한 개인의 어떤 영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의 역사에 대한 냉철한 통찰에서 그런 나온 겁니다. 하나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 세계관과 나눠지려야 나눠질 수 없습니다. 성서적인 고유한 세계이해, 시간이해, 운명에 대한 이해 이런 것들이 성서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거죠. 그런 점에서 성서를 텍스트로 해서 설교해야할 설교자들은 당연히 이 세상을 보는 눈을 가질 수 있어야 하는 거죠. 철학이나 문학이나 예술 이런 것에 대한 최소한의 소양, 이런 것들을 갖고 있어야 성서가 말하려고 하는 핵심에 들어갈 수 있는 겁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행위가 드러내는 모든 일치 혹은 단일성에는 하나님의 영속성과 신실성이 있으며, 이를 통해서만 역사적 사건들의 모든 다양성에 내재한 일종의 의미 단일성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얼마나 역사적 사건들이 다양합니까? 이루 헤아릴 수 없이 각양각색으로 일어나고 있는 거죠. 그러나 그 안에 의미 단일성, 그것의 모든 사건들, 깊이 속에는 하나의 뭐가 들어있다고 하는 겁니다. 의미라고 했는데 이건 의미라고 말할 수 있겠죠? 의미 단일성, 어쩌면 다르게 말하자면 생명단일성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있죠. 하나님이 이루신다고 하는 겁니다.

근대의 역사이해는 이러한 성서와 기독교 전승의 역사신학 없이 고려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리에 인간의 이상(理想)이 자리 잡게 되었다. 인간이 역사를 창조하는 주체로 인식되었다. 그러한 주욱 흘러간 겁니다. 지금 그런 것 설명하고 있는데요. 조금 더 읽어볼까요. 이 인간은 개개인과 그 상황을 통해서 자기를 실현하고 있는 그런 자를 말한다. 과연 인류는 진지하게 행동하는 주체로서 간주될 수 있을가? 과연 그럴까? 인간이.

역사를 인류의 자기해방의 과정이라고 보는 표상은 신화적 성격을 갖는다. 판넨베르크의 말입니다. 역사를 인류의 자기해방이 과정이라고 보는 표상, 이 표상, 생각, 독일어로 포쉬텔롱은 인간 종(種)의 개념을 신화적으로 상승시킨다. 인간 종, 인간이라고 하는 그 종을, 무슨 뜻일까요? 조금 와 닿지 않죠? 종들은 행동하지 않는다. 오히려 개인들이 우선적이다. 인간 종을 보편화시켜서 그 종 자체가 해방과정을 가고 있다고 이렇게 보는 것은 신화적이라고 하는 거죠. 추상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라는 종 개념은 역사 가운데서 행동하는 하나님의 기능을 위탁받을 수 없다. 이 개념은 모든 인간 역사의 일치성에 토대를 형성할 수 없다. 이러한 통찰로는 하나님을 인간역사에 단일성을 제공하는 주체로서 말한다는 것이 어떻게 정당한지 밝히지 못한다. 그 인간이 주체적으로 자기 해방의 길을 가고 있다고 하는 그런 거로는 가능하지 않다는 겁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국면 가운데서 하나님에 대한 성서적 신앙이 중요하다는 질문이 오늘 우리의 현실성 이해에서도 의미심장하게 제기되며 논의될 수 있는가라는 테마가 두드러지게 되었다. 좀 까다로운 대목이죠. 이것을 설명을 해야 될는지요. 관두죠. 저도 자신이 없으니까.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아요. 전체 흐름을 우리가 알 수 있으니까요. 이 세계 역사 모든 것들을 자연을 포함해서 역사로 이렇게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성서적 이해 거거든요. 이런 점에서 볼 때 인간이 주체로서 뭔가를 한다는 거하고는 맞지 않는다 그런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이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은 18, 19세기에 자연이 꺾일 수 없는, 그리고 영원한 법칙의 불변적 제도로서 이해되었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나 있다. 이 말이 옳다면 자연사건 가운데 있는 단 한 번의 사건과 형태의 모든 시간적 변화, 모든 광휘와 소멸은 결국 비본질적이며, 항상 동일한 구조 가운데 있는 단순한 변조에 불과할지 모른다. 오늘날도 역시 자연의 ‘역사’를 말한다. 현재의 자연과학적 세계像은 또 다시 개체 사건의 우연성(우연한 일)*에 대한 관점을 통해서 규정된다. 사건의 우연성은 고전 물리학에 의해서 의식적인 배경으로 물러나 있었지만 실제로 차단되지는 않았다. 법칙은 사건들의 흐름에서 볼 수 있는 비교적 불변하는 진행형태로서 항상 우연한 현상들에서만 관찰되었다. 네. 아까 제가 창문에 붙어 있는 낙엽을 보여 드렸는데 잎사귀가 가을이 되어서 누렇게 되고 하잖아요. 계속 반복되니까 변하지 않는 그러한 자연 현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런 것들은 우연한 현상으로 관찰되었다고 하는 거죠. 자연과학에서도요. 그렇게 되어야만할 절대적인 필연성은 없었던 거죠. 필연적인 것은 아니었던 거죠. 그렇게 되었던 거죠. 우연하게 되는 거죠. 어떻게 보면 인간 출현도 그러나 자연의 흐름속에서 보면 우연한거죠. 그게 왜 우연한 거냐 지금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앞서 발생했던 것과 거의 흡사한 것이 이 사건들로부터는 발생하지 않는다. 계속 새로운 것이 오기 때문입니다. 열역학 두 번째 명제는 세계현상의 과정이 완전히 불가역적이라는 점을 새롭게 보도록 가르쳤다. 그렇다면 전체로서의 세계는 시간 가운데서 일어나는 단 한 번의 경과이며, 무척 중요한 진술이예요. 또한 그렇다면 사건현상에서 관찰된 모든 법칙성은 사건들의 외관에서만 나타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전체로서의 세계, 공룡이 있다가 없어졌어. 뭐가 있다가 없어지고 새로운 것이 나와. 그리고 지구의 지표도 단층이니까요. 그것도 계속 돌고 돌아서 히말라야 산맥이 봉기하고도 하고 바다속에 빠져 있던 것이 올라오기도 하고 바다가 산이 되기도 하고 산이 바다가 되기도 하고 이렇게 주욱 지나가는 전체 역사, 전체 세계 이런 것들을 시간적인 차원에서 단 한 번에 일어나는 사건으로 보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겉으로 드러나는 거 해가 뜨고 풀잎이나오고 이러한 법치들은 겉으로만 드러나는 것들, 겉에 나타나는 것들이죠. 속중심에는 다른 힘들이 작용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건현상에서 일어나는 동형식화**는 거북이는 거북이를 낳고 콩심은데 콩이나는 이런 것들은 특정한 시간에서 발생한 것이다. 동형식화는 동형식화가 제가 역주에 달았습니다. 독일어로 Gleichförmigkeit 자세한 설명은 역주를 보시도록 하구요. 법칙의 형식화를 통해 설명될 수 있다. 또한 이 자연법칙은 시간에 의존적이라는 점에서 타당하다. 그것이 수학공식과는 다르다는 한에서, 즉 시간에서 발생하는 사건현상에 응용될 수 있다는 한에서 말이다. 자연현상에서 이루어지는 진행 형태의 상대적 불변성은 그 자체가 우연한 사실일 뿐이다. 상대적 불변성 인거예요. 말하자면 규칙은 자연역사의 진행 가운데서 어느 시점에 당분간 걸쇠가 걸려있는 것이다. 걸쇠, 자물쇠죠. 그렇게 있는 것은 전체 역사, 세계 이러한 것중에서 고 시간에 고러한 방식으로 있는 거죠. 그리고 곧 지나가고요.

** 동형식화(同形式化, Gleichförmigkeit)는 세계현상에서 어떤 형식이 일정 시간 동안 같은 형식으로 유지되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인간은 인간종이라는 형식으로서 동일하며 잠자리는 그런 류로서 동일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그 이외에도 여러 물리학적 규칙들도 이에 해당한다. 일정한 시간과정을 통해서 이런 동일형식화가 이루어지는데, 이런 형식들은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점에서 결국은 시간에 의존적이라 할 수 있다. 판넨베르크는 9장에서도 이 개념을 자연과학 개념에 담겨있는 폐쇄적이고 기술주의적 속성의 한계를 비판하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자연과학이 이 세계현상을 시간적 한계 안에서는 설명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근원과 최종적 형태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기술로 규격화시킴으로써 세계의 개방적이며 종말론적 성격을 가로막는다는 것이다. 기존의 자연과학적 법칙성이 이 세계의 미래와 그 진리를 온전히 담지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에 대한 지적이다.

이 규칙에서 사건은 이후부터 불확실하게 지속된다. 그리고 현상에 대한 각각의 등급과 더불어 이러한 새로운 진행형식들, 새로운 자연법칙의 형식화에 대한 사실들이 출현하게 되는데, 이런 자연법칙들은 오직 생물학적인 차원에서만 쓸모 있는 물리법칙 같은 것들이다. 넘어가죠. 좀 까다롭네요. 그래도 핵심이 전달이 되었죠? 시간이 50분 가까이 흘렀군요. 오늘 이 책의 제3장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아버지를 이것을 마치겠습니다. 두 쪽만 남았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시간을 많이 끈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의미 없는 시간이 아니었죠. 기독교 교리중에서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진술이 세계전체 문제와 연관된다고 하는 그 사실만 우리가 어렴풋이 감을 잡았으면 공부로서 소기의 목적은 충분히 감당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해된 자연의 단일성은 더 이상 그 사건들을 지배하는 법칙을 통해서만 규정되지 않는다. 생물학에서도 멘델의 법칙 이런 것들로 다 지배하지 않는 거죠. 법칙은 곧 사건의 분명한 동형식화를 보여준다. 기계적인 것만 보여주죠. 늘 거듭해서 유사한 것들이 반복된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그 차이가 너무나 미미해서 인간이 자연을 인식할 때에 별로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동일한 형식으로 발생하지는 않는다. 너무 차이가 미미하기 때문에 의미가 없다고 생각될 수는 있지만 그래도 똑 같은 것은 그대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부모에게 유전적인 기질을 받는다고 해서 똑같은 것은 아니잖아요.

자연사건을 완전한 동형식화로 생각하려는 것은 일종의 추상이다. 우리는 그것을 구체적인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데요 그게 오히려 추상이라고 하는 거죠. 자연사건 이런 것들을 똑같은 형식, 완전한 동형식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추상이다. 그 사이에 미미하지만 차이가 있다. 그리고 지나가는거다. 똑 같은 것은 전혀 없다. 세상에서 똑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물론 여기서 작용하는 것은 일종의 매우 실용적인 추상이다. 이 추상은 인간에게 놀라울 정도로 사건을 능가하는 능력을 획득하고 사용하도록 했다. 그러니까 자연과학이 발달하는 거죠. 똑같은 것들이 실험실에서 실험을 통해서 똑같은 결과를 이루어 냈을 때 자연과학적 원리, 또는 진리로 인정받잖아요. 그런 차원에서 우리가 자연과학을 발전시켜왔습니다. 동형식화, 동일한 형식의 반복이라는 점에서요.

그렇지만 모든 사건의 유일회적이며 불가역적인 경과는 이러한 유일회성에서 하나의 법칙으로 구성될 수 없다. 자연과학도 여전히 변한다, 변할 수밖에 없다는 거죠. 왜냐하면 반복성이라는 것이 법칙을 파악하는 문제에 속하기 때문이다. 유일회적이고 불가역적 경우가, 이 두 단어는 제가 책을 읽기전에 여러분들에게 드린 거예요. 두 단어를 여러분들의 머리속에 넣어두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경과로서의 유일회적인 전체 진행이 통일성을 갖는다면, 이제 동형식화로부터 구별되는 연관의 종류가 문제다. 더 이상 법칙을 통해서 제시되지 않는 이러한 연관의 특징을 찾기 위해서 자연의 역사가 언급될 수 있다. 여기에 당연히 궁극적인 난점이 파생된다. 우리는 역사를 역사의식과의 관련 가운데서만 깨닫게 된다. 모든 과거로부터 개개의 현재를 볼 수 있게 하는 특별하게 역사적인 연관이 우리의 역사의식에서 성립된다.

여러분들이 책도 좀 보시면서 귀도 들으셔야겠네요. 이건 정말 까다로운 이야기네요, 역사연관은 개개의 잠정적인 종국으로부터 과거를 향한 이러한 역망 뒤돌아봄 없이는 전혀 가능하지 않다. 역사적 사건에 담겨있는 각기의 최소 단일성은 이미 앞서 발생한 사건의 수용이라고 하는 고유한 방식을 통해서 규정된다. 자연이 의식적이지 않는데 우리가 어떻게 자연의 역사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가? 이것은 우리가 코스모스 안에 있는 사건의 전체 경과를, 경과, 지나가는 과정을 인간과 연관시킬 때만 가능하다. 인간 역시 자연에 속한다. 인간으로부터 되돌아보고, 또한 인간을 향해서 달음박질함으로써 자연의 역사(史)는 그 상을 드러낸다. 여기서 의식적인 역사연관이 일종의 단순한 허구 그 이상이라면 이러한 연관의 단일성을 기초하는 일이 인간에게는 가능하지 않다. 오히려 인류역사의 연관을 생각할 때 보다 훨씬 힘들 것이다.

무슨 말인지요? 오늘은 대체적인 흐름은 좀 따라가겠는데 여기는 어떤 까다로운 인식론이 포함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것들을 통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힘든 그러한 내용들이네요. 자연 안에서의 인간, 자연은 인식이 없는데 어떻게 그것의 실체들을, 그것에 대해 인간이 말할 수 있는가? 그런 거 결국 인간의 인식을 통해서 자연의 실체 이런 것들도 드러나게 될텐데 그러한 연관성들, 지금 이야기하는 거죠. 인간도 자연의 일부 자연 속에 들어가 있는 거잖아요. 인간만이 인식을 한다말이죠. 인간의 자연 안에서 갖고 있는 독보적인 역할이 분명 있기는 있는겁니다.

자연은 그 역사 단일성을 자기 자신 안에 소유하고 있지 않다. 인간에게 역망해 봄으로써만 인식된다. 그렇죠. 인간이 자연을 그렇게 분석하니까요. 그렇다고 자연이 인간에 의해서 그 근원이 파악되는 것도 아니다. 이로써 역사의 하나님, 성서의 하나님이 바로 자연사건의 역사적 단일성까지도 기초하는 분이 아닌가라는 그런 질문이 근본적으로 제기된다. 이게 요청된다고 하는 거죠. 인간을 통해서 자연이 그 실체를 드러내야 되는데 인간이 아무리 그런 것을 한다고 하더라도 근원이 파악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이야말로 자연사건의 역사적 단일성, 단일성 하면 이게 참 우리가 일상에서 잘 경험, 쓰이지 않는 단어이기 때문에 말이죠. 참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역사적 단일성, 역사를 끌고가는 하나의 심층의 힘을 이야기할 수 있겠죠. 로데파덴 붉은실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냐 아니냐 그게 요충된다고 하는거죠. 오늘의 역사, 자연과학 흐름에서 볼때도 그렇죠.

이런 점에서 볼 때 아마 바로 오늘날 자연을 이해하고 있는 그런 조건 하에서 성서의 전능한 하나님이 하늘과 땅, 즉 잘 알려진 (자연법칙의 발견을 통해서 밝혀진) 주변과 아직 알려지지 않은 사건현상에 있는 심연의 창조자로서 새롭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사건현상의 유일회적인 진행을 완전하게 규정하는 우연성의 배경에서는 현존적 자연법칙의 연관들이 등장한다. 다시요. 사건현상의 유일회적인 진행을 완전하게 규정하는 우연성의 배경, 우연성을 배경으로 놓고 볼 때, 오늘 현존, 여기에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자연법칙의 이렇게 저렇게 연관되어 있는 것들이 드러날 수 있다. 이 연관은 존립을 위한 신적 의지의 표현이며, 그리고 이러한 세계 가운데서 우리로 하여금 현존할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신실성에 대한 표현이다. 이 경우에 그 연관이 역사연관이기 때문에 자연의 단일성도 역시 그 연관에서 추론된다. 이것은 종말론적 미래의 하나님을 역망-뒤돌아봄으로서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이 단일성이 이미 잠정적으로 배후를 향해서만, 즉 인간으로부터만 밝혀진다고하는 사실은, 그리고 그것은 곧 사건의 법칙을 알고 있는 자가 바로 인간이라는 것을 뜻한다는 사실은, 창조 역시 인간역사에서처럼 전체적으로 그 창조의 의미연관에서 각각의 마지막에 의해 구성된다는 것을, 그리고 이로써 그 본질의 완성인 궁극적, 마지막에 대한 질문을 야기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하겠다.

요게 마지막 문장입니다. 복잡하게 이야기를 많이 드렸잖아요. 다 잊어버려도 됩니다. 그래도 뭔가는 남는 게 있겠죠. 마지막 읽은 그 문장으로 본다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전체 역사가 하나에요. 전체 사건의 하나죠. 거기에 단일성이 있는 거예요. 그 단일성이 곧 하나님이락 할 수 있는 거죠. 우리는 지금 그쪽을 향해 가고 있고, 혹은 그것이 우리들에게 오고 있다고 볼 수 있고요. 그러한 세계에서 우리가 살 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의 최종적인 단일성의 실체는 종말에 와서 드러난다고 하는 거죠. 그때 가서야 무엇이 어떻게 연관되어서 어떻게 되어서 어떤 것이라고 하는 명명백백한 실체가 드러난다. 구성된다고 이야기는 했는데, 구성된다고 하는 것은, 구성된다. 혹은 그런 차원에서 종말론이 중요하다 그러한 이야기입니다.

바울이 말했듯이 지금은 거울을 보는 것처럼 희미하지만 마지막 때가 되면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서 본다.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어떻습니까? 이러한 신학이 물리학과 생물학과 대화가 가능할까요? 가능하리라고 봅니다.

이것으로 오늘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아버지를, 이라고 하는 제3장을 마치겠습니다. 다음 부터는 조금 더 친근한 이야기로 들어갈 것 같습니다. 세계관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 앞부분요. 조금 우리 교회안에서 익숙하지 않는 일반 과학 인문학 철학 이런 쪽에 있는 거였었는데요. 4장부터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거든요. 본격적으로 우리의 구원론 신앙 이런 것들을 다루게 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오늘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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