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강 녹취록 - 4장 예수 그리스도를(1)

사도신경해설 조회 수 2947 추천 수 0 2009.04.05 00:43:09

판넨베르그 사도신경 해설 제19강 녹취록 - 4장 예수 그리스도를

안녕하세요. 오늘 우리는 판넨베르크 이 책의 새로운 장에 들어가게 되겠습니다. 제4장입니다. 강의 수로 따지자면 19강이 되겠고요. 예수 그리스도를 이라고 하는 그러한 챕터입니다. 첫 번째 항목에서는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이었고 두 번째 항목이 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앞에서 주로 우리가 이야기한 것은 믿는다고 할 때 믿고 있는 자기 자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 중요하다는 그러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다고 하는 그 사실이 이 세계 현실성과 어떻게 연관되느냐 하는 문제들을 자세히 다루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단순히 초월적인 하나님을 무조건 이렇게 믿는다거나 아니면 믿고 있는 자기 자신의 신앙태도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두 가지요. 이 두 가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닙니다. 두 가지를 다시 정리하면요. ① 이 세상, 역사, 세계와 상관없이 초월적인 신존재에 대한 것만 관심을 갖는 것 ② 믿고 있는 인간의 실존적 신앙경험 이런 것인데 이 두 가지에 머무는 것이 아닌 더 근본적이고 포괄적이라고 할 수 있겠죠. 또 이원론적이 아니라 일원론적이라고 할 수 있겠죠.

하나님이 창조주라고 하는 사실은 하나님을 우리 신앙과 깊이 연관시켜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그러한 신학적 토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창조된 이 세계는 완전히 따로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현실로 들어가는 것이라도 하는 거죠. 아마 이런 이야기를 단순히 신학적 교리적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별로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겠죠. 그게 아닙니다. 여기에는 기독교 신앙이 이 세계의 자연역사 이런 것하고 어떻게 부단히 연결되어야 되느냐, 기독교 신앙의 자기 해명이 이 세계 역사와 어떻게 연관해서 진행되어야 되느냐 하는 중요한 문제가 여기에 담겨 있는 거죠. 그런 문제들을 앞에서 충분히 다뤘다고 보고요. 이제는 조금 더 우리 신앙의 기독론적인 토대로 들어가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는 늘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모든 신앙의 시작이기도 하고 마지막, 처음과 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말 자체에 이미 4장이 무엇을 다뤄야 되는가 하는 윤곽들이 나와 있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요.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다고 하는 거죠. 예수와 그리스도 서로 다른 단어인데요. 예수는 고유명사고 그리스도는 보통명사인데 이게 예수라는 인격체에서 하나가 되어 버렸어요.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도 예수에게 붙어 다니는 고유명사처럼 되어 버렸다는 겁니다. 이 두 가지 문제, 예수와 그리스도. 예수는 역사적 차원을 이야기한다면 그리스도는 신앙 고백된 차원, 신앙고백의 차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라고 하는 퍼스날리티가 어떻게 역사를 초월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고, 역사를 총괄한다고, 역사를 관통한다고 할 수 있는 하나님, 메시아 그리스도로 연결되는가 하는 문제요.

보통 우리가, 보통이 아니라 정확히 이야기해서 구원이라고 하는 것이 역사 안에 딱 묶여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역사라고 한다는 것은 그냥 우리가 여기서 숨 쉬고 사는 모든 삶들을 이야기하는데요. 이런 것들이 확정된다고 해서 우리들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쉬운 말로 우리가 지금 7,80년, 8,90년 사는데 한 천년쯤 산다고 해서 우리가 완전히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100년과 천년이라고 하는 시간의 차이가 있지만 이 차이는 양적인 차이에 불과해서 양적인 것은 결국은 근본적인 것을 해결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역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러한 모든 문제들을 우리가 완전히 해결할 수 없을 뿐더러 그런 방식으로는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을 모두 다 담아낼 수는 없습니다. 예수도 그러한 역사적 한계 안에서 사셨고요.

‘예수님이 완전하게 구원을 완성하셨느냐’ 이러한 질문은 여기서 적합한 것은 아니지만 굳이 이러한 데에 연결되어 있는 많은 문제들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 그냥 수용해서 생각을 한다면, 완전히 구원을 얻으신 것은 아니지요. 십자가에 달려서 처형당하셨다고 하는 사실,그게 역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이거든요. 예수님은 결국은 죽었으니까, 생명을 잃는 것을 구원받았다고 할 수 없잖아요. 실패라고 할 수도 있겠고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것과 같은 그러한 상태이기도 한데요. 그러한 삶을 사신 거예요. 역사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 안에 머물러 계신 거죠. 그러한 예수가 어떻게 그리스도, 메시아 바로 그분이냐 하는 이 문제입니다. 이걸 푸는 것이 핵심인거죠.

사실은요. 우리가 사도신경이나 그 외에 여러 가지 교리문답들 신학, 이런 데서 다루고 있는 많은 문제들이 결국은 이 하나로 묶여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 내재했던 예수가 어떻게 역사 초월했던 그리스도 메시아와 하나의 본질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형태는 분명히 다르잖아요. 예수는 우리와 똑같은 역사적 형태로 사셨다 말입니다. 그런 것이 인제 동정녀 마리아에게 태어나시고 하는 그러한 교리, 형식에 들어있는 겁니다.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서 그렇게 사셨어요. 그러한 한계들, 그러한 역사를 갖고 계신분이 어떻게 메시아라고 한다면 모든 것을 뛰어넘는 분이어야 되는데요. 하나가 되느냐. 그러한 문제속에 다 들어와 있는겁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한두 마디로 아 그래 예수님은 인간이기도 하고 신이기도 하다. 주어진 대답이죠. 베레호모 베레데우스라고 하는거요. 참인간 참하나님이라고 하는 정답을 우리가 알고 있기는 한데요. 그런데 왜 그러한 대답에 이르게 되었는가 하는 과정을 우리가 충분히 공부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교리문답, 카테히즘, 이 교리문답이 담고 있는 영적깊이를 우리가 따라갈 수 없습니다. 물론 이러한 평신도들에게 이러한 것을 요구할 수 없어요. 지도자들에게만 이라도 이런 것을 충분히, 충분히 라고 하는 것이 어느 정도 일지 그거야 뭐 객관적인 기준을 딱 잡기 힘들겠죠. 석사학위를 받아야 되느냐 박사학위를 받아야 되느냐 그런 걸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요. 그래도 나름대로 그 세계를 아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도자만이라도 그러한 것을 알고 그러한 것을 바탕에 놓고 설교를 함으로서 일반 신자들에게 기독교 영성의 중심과 맞닿을 수 있는 계기를 바르게 제시해줄 수 있습니다. 핵심인거예요.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가 왜 예수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건 뭐 한두 마디로 끝날 문제가 아닙니다. 앞으로 몇 주간, 몇 번의 강의에 걸쳐서 판넨베르크 4장 공부를 하게 되면 기초를 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읽어보겠습니다. 제4장 예수 그리스도를.

사도신경의 첫 항목*은 인간현존에서 제기되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단순히 하나님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을 다룬 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군더더기 없이 언급하면서 예수가 아버지라고 일컬었던 하나님이 바로 전능자로 불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다.

사도신경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이라는 세 구조로 짜여져 있다. 따라서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첫 항목이라는 말은 하나님에 관한 부분을 뜻한다.

좀 문장이 길군요. 사도신경의 첫 항목, 이거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고 하는 거거든요. 그게 첫 항목이구요. 두 번째 항목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구요. 세 번째 항목은 성령과 교회입니다. 이러한 문제,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그 문제들을 이러한 사도신경의 첫 항목, 이것은 우리가 우리 삶의 현존에서 벌어지는 그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그냥 하나님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을 다룬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무슨 뜻인지 전달이 되시죠. 우리가 여기서 굉장히 무기력하게 살기 때문에 그리고 죽음이라고 하는 실존이 우리 앞에 놓여 있기 때문에 병들고 외롭다는 그러한 사실들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거기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서 일반적인 신에 대한 생각을 따라가는 게 아니란 거죠. 신은 전능하고 인과응보 벌도 주고 인과응보 식으로 벌도주고 복도 주고 하는 일반적인 신이해(神 理解)있잖아요. 자기편을 자기 말을 잘 듣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고 거역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고. 그러한 신이해가 구약에서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사도신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이 문제는 일반적인 신이해 그런 것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실존적인 삶을 해결하기 위한 종교적인 요청으로 하나님, 신을 따라간 그런 것이 아니다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뭐냐?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의 하나님 이해가 중요한 것이죠. 예수가 경험한, 인식한 아빠 아버지, 그 하나님을 다루는 것이라는 것, 이야기한 것이라고 하는 거죠. 아시겠죠? 이게 왜 중요한 건지, 중요하다기보다 왜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기독교 신앙은 그냥 여러 가지 종교중의 하나의 형태를 갖고 있다는 것은 아니라는 거죠. 이게 기독교의 아전인수인지는 모르겠지만 기독교는 많은 종교중의 하나라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종교학자들이 어떻게 보든지 그거는 둘째로 치고요. 우리는 인간에게서 어떤 종교심이 우러나오는 건가 그것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지만 거기에 그런 것보다 어떠한 역사에 실존했던 그 분, 그 분을 통한 하나님 이해가 중요한 거예요. 바로 예수님이고 그 분을 통한 구원이고 그분을 통한 창조와 완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기독교신앙의 핵심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을 이야기하더라도 그것은 일반적인 종교적 차원에서의 전능한, 전지한 이러한 것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이해가 핵심이라고 하는 거죠.

이에 따라서 두 번째 항목도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전망에 근거해서 진술되고 있다. 첫 항목에서 고백된 하나님은 나사렛 예수를 통해서만 접근될 수 있으며 계시될 수 있다. 바로 그거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접근될 수 있고 게시될 수 있다.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가 기도를 드리는 것이고요. 세례 받을 때도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받은 것이구요. 우리 구원도 그렇고요. 성만찬도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우리가 대하는 거죠. 그게 인제 우리가 하나님과 일치되는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결국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인 거죠. 우리 스스로 우리 안에서 영적인 에너지를 개발, 혹은 계발 시켜서 혹은 우리 내부의 도덕적 의로움 들을 더 세련되게 만들어감으로서 하나님에게 의롭다고 인정받는다거나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들에게 덧입혀진다고 하는 거죠. 우리 안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밖에가 중요한 거죠. 엑스트라노스 우리 밖에서 이루어진 어떤 사건에 우리가 집중하는 겁니다. 어떤 사건, 우리는 그것을 계시라고 하구 구원이라고 하고 메시아 사건이라고 합니다. 그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인거죠.

이럴 경우에만 두 번째 항목은 실제적으로 전체 신앙고백의 중심을 이룬다. 이것은 특별히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와 맺는 관계에서 분명해진다. 이 관계는 두 번째 항목의 모든 확장된 진술을 각인하고 있는 그것이다. 다시요. 두 번째 항목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계된 서술들을 가리킵니다. 이거하고 관계된, 예수그리스도하고 관계된 모든 진술들이 결국은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와 맺는 관계에서 분명해집니다.

칼 바르트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 두 번째 항목은 실질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의 신앙고백을 말할 때 예수의 하나님이 문제이지 그 밖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신앙고백의 앞머리에 놓여야만 했다고 말이다. 바르트의 사도신경 해설을 제가 직접 읽어보지 않았는데 판넨베르크가 그거를 인용하고 있는 겁니다. 바르트의 입장에서 본다면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앞에 나와야만 된다. 그럴 정도로 하나님과 세계구원 모든 이러한 문제에서 핵심이 예수라는 뜻이죠.

그러나 예수에 대한 신앙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 보다 논리적으로 앞서 있었고 그 기본골격을 형성했다고 하는 뜻은 아니다. 네 그렇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핵심이래서, 그게 가능하면 사도신경에서도 앞에 놓여 있어야 좋은데, 그럴 정도로 중요한데 그렇다고 해서 예수에 대한 신앙이 하나님 신앙보다 앞서 있다거나 골격을 형성했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신앙이 없이 되는 것이 아니죠. 그러나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경험 혹은 인식이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들어온 뒤로는 실질적으로는 이것이 더 하나님신앙보다 더 중요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 관계 속에 있는 것들을 지금 판넨베르크가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양자 사이에 일종의 고유한 상관**이 놓여 있다. 제 역주로 그 단어 고유한 상관이라고 하는 단어는 정확한 번역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의 특성은 역사적이고 실존적인 예수가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동일시되었다는 점에 있다. 이런 점에서 예수에 대한 신앙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일종의 상관(Wechselbezieung)관계라 할 수 있다. 이 두 신앙의 관련이 어떤 출발점에서 형성되었는지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사유과정에서 필요하다고 판넨베르크는 생각한다. 그것은 당연한 말이다.

의역으로 하긴 했는데 바꾼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바꿀 수 있는 관계. 앞뒤 이렇게 왔다 갔다 하면서 어떤 강조하는 것에 따라서 어떤 것은 앞에 나올 수 있고 어떤 게 뒤에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런 정도로 그게 긴밀하다고 하는 거죠. 창조자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이것들이 서로 백셀백지웅 상호 교환적관계라고 하는 거죠.

단순하게 순환이라고 묘사될 수 없는 이런 연관이 그 어떤 자리에서 출발하고 있다면, 이 출발점은 당연히 역사적으로, 그리고 실질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유에서 모색되어야만 할 문제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새롭게 인식하고 경험하고요. 그 과정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길이거든요. 일반적 보편적인 하나님경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경험이 중요하니까요. 예수님을 요한복음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를 통해서만 구원받는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이외에는 구원을 받을 길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한 진술도 다 예수그리스도의 하나님 인식 경험이 기독교 신앙에서 절대적이라고 하는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의 문제가 백셀벡지웅(상호교환적관계)이다. 그런 관계에 있다는 이야기죠. 이러한 문제들을 우리가 생각할 때 핵심이 되는 거는, 그러니까 예수님이 역사적으로 출현하기 전에는 유대인들을 통한 하나님 경험만이 있지 않습니까? 그 다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고유한 하나님 인식이후로 기독교는 전혀 다른 각도로 하나님과의 관계로 들어가지 않습니까? 여기서의 핵심, 요 연관에서 어떤 출발점 이런 것이 바로 역사적으로 실질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유에서 모색되어야 될 문제다. 지점의 출발점,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그러한 문제들이 여기에 있다고 하는거죠.

실질적으로 이런 출발점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감당해야할 박탈감에 놓여있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고유한 마지막을 의식함으로서, 고유한 마지막, 박탈감, 죽음이겠죠. 을 의식함으로써 자신에게 항상 따라오는 무한한 현실성, 운베그레스테 드리크리카이트. 영어로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Unlimited reality라고 할 수 있을까요. 무한한 현실성을. 그리고 또한 종교적 경험의 차원을 향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 출발점은, 출발점? 이 출발점이라고 하는 거,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봐야하겠네요. 고게 정확하게 이해가 되지 않으면 그 뒤로 진도 나가기가 좀 힘들 것 같습니다. 출발점은. 조금 더 몇 줄 더 올라가 있는데 나와 있는데. 이 연관, 고유한 연관 벡셀벡지웅 단순히 순환한다는 그런 차원보다 더 뛰어넘는 아주 고유한 연관, 어떤 자리에서 출발하게 된 거예요. 언제냐? 예수님의 하나님 경험이 구체적으로 언제냐 하는 거 그런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고유한 하나님 경험, 이런 것들이 역사적 실질적으로 출발점이 있을 텐데 말이죠. 이런 문제들 다 하나님의 사유 이런데서 생각이 된다고 하는 겁니다.

네 그 출발점이요. 대충 되었겠지요. 역사적으로 볼 때 이 출발점은 무한한 현실성이. 이렇게 단어. 지금 이렇게 표현된 단어 느껴지시나요. 무한한 현실성이. 이게 전달이 되어야 이 런 책들이 이해되거든요. 무한한 현실성. 제가 강의를 통해서 여러 번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아마 몇 번 강의를 들으신 분들은 어느 정도 감은 잡고 있을 겁니다. 판넨베르크의 하나님에 대한 정의도 이런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만사를 규정하는 현실성, 화이트헤드는 reality is process. 화이트헤드의 표현으로 바꾸자면 ultimate concern 이라고 할까요? 궁극적 관심, 하여튼 그러한 것들과 연관되어 있는 겁니다. 무한한 현실성, 우리는 하나님 이해가 잘 들어오지 않잖아요. 하나님에 대한 현실성, 하나님에 대한 생각들을 이러한 개념으로 넓게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다시 보겠어요.

역사적으로 볼 때 이 출발점은 무한한 현실성이 민중들의 종교에서 이미 오랫동안 신적 능력의 활동성으로 경험되었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보편적인 종교 경험에서도 이런 것들이 경험되는 겁니다. 아~ 무한한 현실성, 우리의 어떤 노력으로도 측정해낼 수 없는 무한한 현실성, 존재와 시간, 그리고 역사, 죽음, 소외, 신비 그러한 것들을 뚫고 나가는, 그러한 것들을 결정해 나가는, 그러한 것들이 은폐되어 있는, 그런 것들을 하나로 모아가는 어떤 힘을 무한한 현실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거는 일반 민중들의 종교에서도 오랫동안 심층능력의 활동성으로 경험되어 있다는 건데요. 이런 것, 여기에 출발점이 놓여있다. 좀 더 나가보겠습니다.

이 무한한 현실성은 인간과 세계가 맺고 있는 삶의 연관을 견인해가고 있는 그것을 말한다. 성령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익숙한 용어로 하자면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현실성은 유대인으로서 이스라엘의 전승에서 살았던 예수의 경우만이 아니라 또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을 믿었던 초기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경우에도 역시 전제되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 의해서 그 경험이 주어진 다음에, 이제 이렇게 전제된 신적 능력에 대한 이해가 예수를 통해서 새롭게 각인되었다. 출애굽의 그러한 경험들, 바벨론 포로 귀환의 그러한 경험들, 가나안 땅을 중심으로 한 전쟁 가운데 있는 그러한 거를 통한 경험들, 그리고 여러 예언자들, 그리고 지혜자들의 말씀을 통한, 그러한 가르침들을 통한 역사와 인간 삶의 신비에 대한 이해, 이런데서도 무한한 현실성이 경험되었는데요. 예수에 의해서 새롭게 각인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완전히 특별한 방식으로 새롭게 규정되었다는 말이다. 완전히 새롭게. 이것이 가리키는 바는 아버지인 전능자가 곧 그 하나님이라는 말이었다. 우리는 이제 사도신경에서 전제되어 있는 것처럼 하나님에 대한 사유를 아주 결정적으로 각인한, 각인. 각을 떠서 도장을 새기듯이 각인. 독일어로 프레궁, 프레긴하는 동사의 동명사, 프레궁. 결정적으로 각인한 역사적 현상을, 즉 나사렛 예수라는 그 분을, 형태***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즉 나사렛 예수라는 분, 번역으로는 형태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독일어로 게슈탈트, 이걸 번역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사람, 인물, 형태 여러가지 의미가 있는 겁니다. 나사렛 예수라고 하는 그 분 혹은 그 사건, 그 의미 그걸 통틀어서 이야기할 때 게슈탈트라고 합니다. 역주를 달아 놓았으니 참고하십시오.

독일어 Gestalt(게슈탈트)는 모습, 형태, 현상, 사람이라는 여러 말로 번역이 가능하다. 이것은 원래 stellen(놓다)이라는 동사에 뿌리를 둔 단어로서 사물이나 사상의 형태를 말하기도 하고, 혹은 어떤 것 자체의 구조나 체제를 의미하기도 한다. 여기서 나사렛 예수 형태(die Gestalt Jesu von Nasareth)라는 말은 역사적 예수라는 인물이 갖는 고유한 사건과 현상 전체를 총칭한다.

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여기서 나사렛은 역사적 예수를 강조하기 위해서 표현한 것이구요. 이 나사렛 예수를 통해서 이스라엘사람들에게 이미 경험된 무한한 현실성의 활동성. 다시 정리하겠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 이미 경험된 무한한 현실성이 예수 그리스도에 에 의해서 전혀 새롭게 각인되었는데 이제 그것을 살펴보고자 하는 겁니다. 대충정리가 되었죠.

다시 한 번 이 흐름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이야기할 때 우리도 그냥 일반적이고 종교적인, 보편적인 그러한 신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적 실존인물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을 이야기한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가 새롭게 인식하고 경험하셨다고 하는 거예요. 그 하나님은 그냥 뚝 갑자기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경험과 함께한, 그 역사경험의 대상이었던 바로 그분이신 거죠. 그러한 분이 무한한 현실성이라고 하는 거구요. 그렇게 표현할 수 있고요. 그러한 무한한 현실성이 개인과 그리고 개인, 민족, 인류의 삶에 활동하시는 바로 그 분 인거죠. 그들이 어떤 이름으로 불렀든지 바로 그 분은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고 또 다른 이름이 다를 수 있는데 공통된 것은 무한한 현실성이예요. 현실성, 정말 진리인 것, 정말 참된 것, 하나인 것 모든 것을 결정인 것, 그게 유한한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와 닿고 직접 경험할 수 없는 거죠. 무한한 현실성, 인간의 모든 삶을 끌어가는 동력인데 이미 이스라엘 역사에서 경험되었고 그 바로 하나님이, 그 신적현실성이 무한한 현실성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전혀 새롭게 각인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고게 이제 앞에서 이야기하는 출발점이라고 하는 거죠. 하나님에 대한 경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이 벡셀벡지웅, 경험한 관계에 있는데 그러한 출발점은 예수 그리스도다. 결국 핵심은 그거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하나님에 대한 사유의, 혹은 경험의 패러다임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하는 겁니다. 천천히 보자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재미있죠? 저는 책을 읽으면 신학의 대가이니까 이 대가의 책을 읽으면 따라가게 되어서, 제가 미처 다 생각하지 못한 부분들을 설명해 주기 때문에 재미있습니다. 재미라고 하는 것은 창조적일 때 가능한 거죠. 생각도 창조적일 때 재미가 있습니다. 창조적이라고 하는 것은 없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을 아닙니다. 새로운 것을 여는 거죠. 닫혀져 있던 것을 여는 거죠. 이미 그 자리에 있을 수도 있고. 있다 없다 말하기 힘듭니다. 진리라고 말 하는 것은 이렇게 딱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와 종말에 걸쳐 있는 거니까요. 걸쳐 있지만 아직 결정되지 않은, 그 어떤 무한한 현실성이죠. 말하자면. 그렇기 때문에 완전히 없던 것을 우리가 새롭게 아는 것은 아니에요. 이미 그것은 종말에 완성되어 있습니다. 열려져 있는 상태로 있는 거죠. 아직 결정되어 있지 않는 상태로 가 있는 거죠. 그런 세계를 우리가 조금씩 알게 되는데 우리가 미쳐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열리게 되면 재미있는 거죠. 즐겁죠. 바둑에 있어도 수가 있잖아요. 아무리 들여다봐도 문제를 풀 수 있는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고수가 딱 한마디 해주면 그 수가 보이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왜 수가 어떤 사람에게 보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보이고 보이지 않을까요? 이거는 바둑에서만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 모든 삶 역사를 포함한 모든 것들이 다 그런 거 같거든요. 그런 점에서는 우리는 평생 우리가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하는 거죠. 고수라고 하는 사람들은 사실은 자기 길을 스스로 배우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거죠. 영성가들, 신비주의자들, 신학자들 다 그렇습니다. 그러한 창조적인 세계를 열어가는 그 기쁨이라는 것은 그 무엇으로 바꿀 수 없거든요. 재미있다 그 이야기입니다.

아 한마디 더 해야 되겠군요. 이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는 배울게 없다는 생각들을 하는 게 문제인거요. 겉으로는 배운다 배운다 하지만 배울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이미 자기 머릿속에 딱 고정되어 있어서 그것과 비교해서 맞느냐 다르냐? 그런 정도만 생각하지 실제로 자기가 알려고 하는 생각이 없습니다. 이게 문제이거든요. 그런데 그게 어떻게 극복되려고 하는지 그게 어렵습니다. 그게 어려운 이유가 여태까지 그러한 방식으로만 신앙 생활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말하자면 어린아이가 울면 젖을 준다고 하는 방식으로 굳어져 있어서 그러한 방식으로 엄마하고 관계를 맺게 되는 거하고 비슷한 거죠. 어렸을 때는, 유아기 때는 그렇게 살아야 되지만 그냥 커서도 계속 그런 우는 방식으로 어머니하고 그런 관계를 해결하려고 한다면 우스운 거잖습니까? 기독교 신앙을 늘 그 진리가 나에게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 진리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생각보다도 그런 포장되어 있는 답을 갖고서 요령껏 사는 방법만 배우려고 하기 때문에 이게 반복되어서 굳어진 거죠. 이러한 분들은 아무리 옆에서 이야기를 하더라도 들리지가 않습니다.

그게 또 진도 안 나가고 잔소리 비슷하게 이야기합니다. 미안합니다. 이게 우리가 놓치는 부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러한 상황, 고정되어 있는 신앙의 형태, 이러한 것들이... 제가 어떻게 설명해야 될까요. 알면서도 거기에 머물러 있을 수도 아예 처음부터 모를 수도 있습니다. 어떻다고 하는 상황을 전혀 모를 수도 있는 거요. 답답하다고 할까요. 속된 표현으로 한다면 무식해서 용감하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앞뒤 재지 않고 자기 생각을 밀고 나가는 거구요. 또 다른 쪽에서는 무언가 불안하게 자기 쪽에서는 한계를 느끼고 있지만 그러나 그거를 놓고 나가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못하는 그러한 경우도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의 소명은, 67쪽입니다. 기독교 신앙, 즉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적 신앙을 말할 때 본질적인 요소다. 나사렛 예수의 소명... 이것은 사도신경의 진술을 숙고하는 과정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예수가 하나님과 동일한 짝을 이룬다는 가장 포괄적인 전망은 무엇보다도 셋째 항목인 성령에 관한 테마에서 심화된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예수에 대한 신앙과 짝을 이룬다는 사실은 예수에 대한 신앙에서만 진리성이 획득된다는 뜻이다. 이것은 기독교 역사가 시작한 이래로 기독교인이 줄기차게 증언한 바로 그것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적 인격체인 그분, 역사적 인격체? 역사, 생각하십시오. 지금 우리가 역사안에 있거든요. 역사의 과정에 있거든요. 역사 내재해 있거든요. 역사적 인격체인 그분 즉 씨이저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 시대의 인물이며, 70년 유대전쟁의 대 파국 이전 시대에 살던 팔레스틴 계 유대인인 그분이, 예수라고 하는 그 분이 이후 시대만이 아니라 이전 시대까지 통시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기준이라는 설명이 어떻게 가능한지 그 실질적인 진실의 무게를 감당해야만 한다. 2천 년 전 시이저 아우스도와 티베리우스 시대의 인물이었고 70년전 예루살렘이 로마에 의해서 완전히 멸망당하기 전에 살았던 구체적 역사적 실존인물, 이 예수. 그가 그 후와 그전 역사, 초월이죠. 그렇죠. 역사 내재가 아니라 역사 초월이 되는 거예요. 2천년, 그 시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전까지 다 거슬러 올라가서 모든 그러한 역사에서 하나님 인식의 기준이라고 하는 이 사실을 어떻게 설명 가능한지 이것에 대한 진실의 무게, 실질적인 진실의 무게를 우리가 감당해야만 된다고 하는 것.

이렇게 보충해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늘 듣고 있는 제기하고 있는 그러한 질문과 연관됩니다.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오기 전에 조선반도에서 살았던 많은 사람들은 구원에서 배제 되냐 아니냐? 그런 질문도 있고요. 그들도 나름대로 신을 경험했지 않습니까? 오늘 이 책 앞부분에 나오는 단어로 말하자면 무한한 현실성을 경험했지 않습니까? 그래서 정화수 떠놓고 새벽마다 어떤 것을 간절하게 기대하고 빌었지 않습니까? 그게 다 인간을 뛰어넘어 그 모든 것을 끌어가는 무한한 현실성에 대한 직간접적인 경험이거든요. 그러한 그들의 신 경험과 기독교의 하나님 경험이 어떻게 연관되느냐 하는 그러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이러한 모든 기독교 이외 다른 모든 종교의 신경험도 예수 그리스도가 기준으로 해석되어야 된다. 그렇게 이야기하는거죠. 그런데 그게 정말 타당하냐 아니냐 하는거죠. 우리 입장에서는 그거는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것의 실질적 진실의 무게, 그거를 우리가 피하지 말아야 된다는 거죠.

기독교 신앙이 이러한 역사적 인격체에 기초되었다고 하는 사실은, 말하자면 기독교 교리나 아니면 그 교리와도 상관없는 그 어떤 것에서가 아니라 이런 특별한 인간에게 기초되었다는 사실은 다른 종교와 비교할 때 극단적이라 할 정도로 취약한 부분이다. 굉장히 중요한 부분을 지적한 거예요. 불교 같은 경우는 석가모니가 없어도 큰 문제는 아닙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는 이야기가 보통 있지 않습니까? 길을 가다가 부처를 만나면 부처 죽여라. 부처는 자기 내면에 있는 것이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부처가 없어도 그들에게는 진리는 가능한 겁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수가 없으면 아예 성립자체가 불가능 하다고 하는 거죠. 이러한 부분들을 기독교의 강점이 아니라 약점일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안전망이 구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배수진을 치고 있는 겁니다. 더 이상 갈 때가 없어요. 역사적, 여기서 역사적 예수라고 하잖아요. 역사적 나사렛 예수, 역사적 인물, 그분의 하나님 경험, 하나님 인식, 그런 것들이 기독교 자신의 정체성을 말하는데 모든 것이라고 하는 사실 이것은 그만큼 위험할 수 있다 약점으로 초래될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이런 취약성은 두 가지 점에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선 기독교 신앙이 토대를 두고 있는 예수의 등장과 그의 운명이 보여주는 모든 흡인력은 사실적이며 역사적인 리얼리티로 판단되어도 좋은지에 대한 질문이 거듭 제기된다. 그의 운명, 그의 등장 이런 것들이 정말 역사적 현실들이냐 과연 그러냐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느냐? 그런 질문이 제기되고요.

다음으로는 예수의 역사적 상황에 속한 특별성이 파악되면 될수록 어떻게 이러한 특별한 역사적 현상이, 즉 티베리우스 시대에 살던 한 팔레스틴 계 유대인이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적 조건과 더불어서, 33살까지 살았죠. 그런 조건이 있죠. 그런 조건과 더불어 20세기라는 전혀 다른 세계 안에서도 여전히 현존이해와 神이해의 열쇠로 작용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더욱 급박해진다. 그렇죠. 일단 예수 당시의 그 모든 연관된 문제들, 신약성서가 보도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등장과 운명, 연관된 초기 기독교 운동들, 이런 것들이 얼마나 역사적 현실들을 담고 있느냐 하는 데에 대한 문제제기가 가능한 거죠. 없는 이야기도 한 게 아니냐? 할 수 있는 거죠. 또 하나의 문제는 그 2천 년 전 그것이 21세기, 책에서는 20세기로 되어 있지만 21세기로 바꾸었습니다. 지금 21세기니까. 이 책이 써진 것은 20세기 후반이구요. 2천년이라고 하는 간격을 두고 있는데도 어떻게 하나님의 신이해, 무한한 현실성이 신이해의 기준이 될 수 있느냐 열쇄가 될 수 있는가 그런 질문이 더욱 급박하게 된다는 거죠. 많은 사람들이, 많다기 보다 일단의 사람들의 예수에 대한 이해가 초기 기독교안에 변질되었으니까 역사적 이해를 더 복원해야 된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요. 예수의 하나님 경험, 2천 년 전이라고 하는 한계가 있으니까 오늘 새롭게 하나님 이해가 필요하다 그러한 주장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취약성은 실질(實質)이 불가피하게 담지 해야할 양면성이라 할 수 있다. 실질, 드리트리카이. 이는 곧 기독교 신앙을 불교와 이슬람교를 포함해서 모든 타종교와 구별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이건 취약한 거지만 그러나 기독교의 독특성이 드러날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하다. 이렇게 양면성이라는 거죠. 위험한 만큼 기독교 신앙의 특별성이 나타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기독교 신앙이 역사적 생기(生起)*와 역사적 현상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한 그런 요소들 안에서 기독교 신앙이 외적으로 출현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본질적 내용이 결정되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이 역사적 생기, 단어들이 자꾸 걸리죠. 생기는 거기 역주되어 있으니까 나중에 보십시오.

독일어 Ereignis-아이그니스라는 단어는 ‘일어난 일’, ‘사건’을 뜻하지만, 신문보도 처럼 어떤 객관적 사실(Tatsache-탁사게)이나 사건(Geschehen-게쉐헨)이라기보다는 의미가 포함된, 혹은 해석된 현상이기 때문에 생기(生起)로 번역했다.

나오고 움직이고 하는 그러한 어떠한 사건, 그러한 것에 근거하고 있다고 하는 점에서 또한 이러한 요소안에서 기독교 신앙이 나타나고 있다고 하는 점에서, 현상으로 나타나 있다고 하는 점에서만 아니라 본질적인 내용이 결정되었다고 하는 점에서 이거는 기독교의 한편으로는 위기와 약점일 수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독특성이 될 수 있다. 이를 통해서 기독교 사신은 많은 신화적 요소들을 수용할 수도 있었지만 또한 신화의 세계로부터 구별되었다. 2천년에 그러한 신화적 요소들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그러한 신화세계로서도 구분되었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은 끊임없이 다음과 같은 곤란한 경우에 직면하게 되었다. 어떻게 영원한 확신과 영생의 축복이 일종의 역사적 인물과 역사적 생기에 기초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그냥 무한한 그러한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고 한다면 그냥 일리가 있게 받아들일 수 있지만 구체적 역사적 인물에게 그 모든 것이 달려있다고 하는 것이 과연 그게 설득력이 있겠느냐? 그게 받아들여질 수 있겠느냐? 그러한 질문에 우리가 봉착할 수 있다고 하는거죠.

여기서 역사적 생기에 대한 인식, 역사적 어떠한 변화되는 어떠한 사건들, 회오리치면서 그것들을 끌고 나가는 어떤 힘, 이러한 것은 생기라고 할 수 있어요. 여기서 역사적 생기에 대한 인식은 최선의 경우라 하더라도 개연성에 불과한 것이며, 더구나 근대 역사연구가 시작한 이래로 분명하게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가 어쩌다가 나온게 아니냐. 개연성에 대한 연구가 있었다고 하는거죠. 궁극적인 확신. 구원영생은 궁극적 확신이잖아요. 을 우연한 역사적 사실에 토대하고 있으며,... 그리스도가 역사에 나타났다고 하는 것은 우연한 거잖아요. 필연이라고 할 수 없잖아요... 영생의 축복을 최선의 경우에 몇몇 개연성을 중재하는 역사에 기초하고 있다는 이 난점이 기독교 신앙의 기본문제라는 점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거에요. 바울이라고 하는 사람이 역사적으로 나타나지 않았다면 기독교가 가능했겠는가 하는 거죠. 예루살렘의 유대기독교하고 바울의 이방 기독교가 신학적으로 치열하게 투쟁했거든요. 그래서 결국은 이방인 기독교가 역사적으로 승리하게 되었어요. 만약에 그렇지 않고 유대기독교가 승리하게 되었다면 오늘날과 같은 기독교는 없을 것이고 복음도 지금과 다른 방법으로 전달되었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역사적 개연성, 우연성 이런 것들을 전제하고 볼 때 전제라고 하기보다 그런 현실인데요. 그런 역사인데 그런 현실인데요. 거기서 영생 영원난 축복을 말할 수 있느냐? 토대가 너무 부실하지 않느냐? 그런 질문이라는 겁니다.

어떤 방법으로도 역사적 인물인 예수와의 근본적인 관계를 소홀하지 않으려면, 소홀하게 다루지 않으려면 이런 기본적 문제를 회피해서는 안 된다. 적당하게 넘어가서는 안된다. 중요한 것을 짚고 있죠. 우리는 다 구렁이 담 넘어가듯 믿으면 된다고 하죠. 그렇지 않습니다. 이건 진리의 문제이기 때문에 백척간두라는 말이 어울리겠군요. 그런 자세로 붙들어야 됩니다.

사실은 신앙을 역사적 인식의 돌발적 사건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려는 시도가 기독교 역사에서 되풀이 되었다. 따라서 예수는 기독교와 더불어 세상에 돌입하게 된 진리를 역사적으로 끌어낸 분이라고 생각되었다. 또 다른 경우에는 오늘날에도 역시 다층적인 차원에서 주장되고 있는 것처럼, 신앙경험에서 예수의 현실성에 대한 어떤 특별한 통로가 있다고 여겨졌다.

믿기만 하면 우리 예수님이 확실하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진리의 근거다. 믿음이 중요하다. 이러한 강조들이 있는 거죠. 절대의존의 감정, 이런 것들이 다 그렇습니다. 판넨베르크는 그것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거죠. 그런 방식으로가 아니라 보편사적인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구원과 영생의, 우리만이 아니라 온 인류의 영생과 구원의 확실한 토대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변증할 수 있어야 된다고 하는 거죠. 그걸 회피하지 말아야 된다고 하는 거죠. 이게 참 어려운 질문이기도 하고 우리가 우리를 해명하는데 굉장히 난점이기도 하고 그것이 바로 기독교의 다른 종교와 구별되는 독특성 일수 있는 겁니다. 위기이면서 동시에 기회라고 할 수 있는 거죠.

네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라고 하는 사상에서 중요한 문제를 짚었습니다. 아직까지도 본격적으로 들어가지 않는 거예요. 기독교 신앙이 뭐냐? 나사렛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신앙이 하나님 신앙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근본으로 하고 있는 기독교가 회피하면 안 될 핵심이 뭐냐 그런 것들을 집고 있는 겁니다. 고맙습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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