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강 녹취록 - 4장 예수 그리스도를(3)

사도신경해설 조회 수 2944 추천 수 0 2009.04.05 00:46:49

판넨베르크의 사도신경 해설 제21강 - 4장 예수 그리스도를(3)

안녕하세요? 오늘 21강입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라고 하는 판넨베르크의 책 4장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죠. 이 중심이라는 표현이 어색할 정도로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당연하지만 그것이 말하려고 하는 의미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거는 그렇게 간단한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이거는 이제 다른 거하고도 연관되는 문제인데 우리가 기독교 신앙의 중심을 잘 모르기도 하고 또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에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한국 기독교인들처럼 기독교 신앙에 열정을 보이는 나라가 어디에 더 있겠느냐? 이런 말이 가능합니다. 물론 열정적긴 하지요. 그것을 우리가 매도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열정이 식고 건조한 지성주의, 더 나아가서 냉소주의 이런데 빠져 있는 신앙을 우리가 좋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인간적인 약점을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 열정을 보인다고 하는 것은 필요한 거죠. 그러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 것에 너무 매몰되어서 정작 우리가 알아야 될 기독교 신앙의 중심을 놓치는 경우가 많이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 말이 무슨 뜻인가 하면 다음과 같은 거죠.

기독교 신앙에 대한 관심보다도 자기에 대한 관심이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너무 답이 기대했던 것하고 다른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그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기독교 신앙에 대한 관심과 자기에 대한 관심이 어떻게 다른 지는 제가 여기서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앞으로 강의에 한두 번 다룰 것이기 때문에요. 그러기 제가 설명을 드리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여러분들이 아실 것이니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자기, 남이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강렬하게 나타나지만 무엇을 믿고 있느냐에 따라서는, 무엇을 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인식의 결여라고 할 수 있을까요? 지나치게 감성 위주로 빠진, 그래서 이성적인 부분들이 자리를 잡지 못한 그러한 신앙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이라고 하는 4장을 공부하고 있는데 어떻게 보면 이런 것은한 두 마디 하면 끝날 수 있는 그런 이야기가 될 수도 있어요. 예수가 그리스도다. 그리고 3위일체의 아들의 위격이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셨다. 다시 오셨다 몇 가지 등등의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대충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지 않는 거거든요. 여기는 아주 미묘한 그리고 신학적으로 많은 논의가 전개된 그러한 내용들이고 그리고 이거는 앞으로도 계속 생각해야 될 그러한 문제들입니다. 신학이라고 하는 문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재림, 교회 인간구원 등등에 대한 역사적이고 이성적인 그러한 해명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신학은 아직 끝나지 않는 문제예요. 여전히 신학은 논쟁적이라고 하는 겁니다. 신학만이 아니 신학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복음, 이런 것도 여전히 투쟁적이다. 논쟁적이다. 여전히 진리에 근거해서 많은 것들을 이야기해야 된다. 그 이야기입니다.

네 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를 지난번 강의에서 역사적 예수에 대한 문제를 잠간 따라가는 것으로 정리가 되었어요. 지난번 강의는 그렇게 정리가 되었습니다. 예수, 역사적 예수 말이죠. 역사적 예수님이 선포한 종말, 임박한 종말 이런 것들의 문제가 접근하기가, 그리고 우리가 정의해내기가 까다롭다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러한 종말은 일어나지 않았잖아요. 그러니까 역사적 예수님의 이러한 가르침, 기대 이러한 것들이 실패한 것이 아니냐? 그렇다면 그런 예수에 기독교 신앙의 중심을 놓는다고 하는 것은 오히려 기독교 신앙이 위기에 빠질 수 있는 그러한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런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역사적 예수에 있는 그러한 문제들은 가능한 한 좀 줄이고 케리그마화된 그리스도, 그리고 그를 믿고 있는 실존적 우리의 삶들, 이런 것에 좀 초점을 맞추어야 하지 않느냐 그러한 요구들이 끊임없이 있었던 거죠. 기독교 신앙의 예수님을 통한 종말론적 성격을 약화시켜 보리고 하는 그런 시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영성, 기독교 신앙의 중심은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그러한 특성들, 여러 번 말씀드린 임박한 종말에 대한 선포, 이런 것들은 정말 독특한 것이거든요. 그리고 그런 것은 우리에게 아직 현실로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부정될 수 있는 요소들도 갖추고 있거든요. 그러나 그러한 것들을 기독교 신앙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 것들을 꼭 붙들고 있었다. 네 오늘 다시 텍스트를 시작하겠습니다. 72쪽입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패러그래프입니다.

우리는 예수에 대해서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역사 연구는, 예수님에 대한 역사 연구, 예수님에 대해서 알아야 되니까요. 예수에 대한 역사연구는 일종의 몇몇 완성된 예수의 전기를 더 이상 생각할 수 없게 했다. 예수의 전기를 더 이상 그려낼 수 없게 되었다. 맞는 이야기죠. 그 이전에는 복음서에서 상호 연관적으로 잘 짜인 예수에 대한 전기적 사실보도를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역사적 그러한 예수 연구, 전기적인 것은 불가능하다고 이미 신학에서 판가름 났습니다. 역사적 예수를 복원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이죠. 그러면 역사적 예수에 대한 근거가 없다는 말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에 의해 차례대로 보도된 예수활동의 공적인 사건은 그 어떤 전기적 가치도 지니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 다른 복음서에서 볼 수 있는 개개 전승 단편들은 각기의 상이한 신학적 관점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순서로 배열되어 있다. 완전히 뒤죽박죽이라고 이야기할 수 없지만 요한복음만 일단 본다고 하더라도 상당히 다르니까요. 공관복음서도 각기 예수에 관한 이야기들이 이렇게 일관성이 있게 배열되어 있지는 못하다고 하는 겁니다.

요즘 제가 마가복음 묵상에서 보고 있는 그 부분도 그렇더군요.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을 하죠. 나귀를 타고 들어가시고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사람들이 겉옷을 길에다 깐다거나 나뭇가지를 들고 흔들면서 평화의 왕이 입성하는 장면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들어간 다음에 이 마가복음에 예수님이 성전을 잠시 들어가서 다시 베다니로 나왔다고 합니다. 마태복음에 따르며 나오기 전에 예루살렘 성전을 청결하게 하는 그러한 일을 하시거든요. 마가복음은 일단 나왔다고 그 다음날 다시 그 일을 하십니다. 이게 예루살렘에 첫 번 들어갔을 때 했느냐 아니면 다음에 들어갔을 때 했느냐 이러한 차이들이 공관복음서에 나타나 들어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까요.

그렇지만 그러한 전기적인 차원에서는 조금 차이가 있기는 있지만 몇몇 본질적인 사건과 실상들은 풍부한 개연성을 포함하고 있으며, 정말 그건 가능한 일이었고 역사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예를 들자면 예수가 요한에게 세례 받은 일, 예수의 공생애 등장한 것, 그리고 그분이 선포한 복음의 특수성, 예루살렘에서 집행된 십자가 처형이 여기에 속한다. 핵심적인 그러한 사건들 말이죠. 예수를 이야기할 때 본질적인 어떤 것들은 그런 복음서를 통해서 볼 때 확실한 개연성을 갖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작은 어떤 순서상에서 그 차이들은 있고요. 그리고 또 나중에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의해서 새롭게 편집된 내용들도 있어서 예수님에 대한 전기적 사실을 그대로 복원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러나 중요한 핵심들, 그런 것들은 아주 역사적인 것으로 간주해도 좋다 그 이야기죠. 그게 십자가 사건까지 있는 거구요. 또한 추후에 해석되었다는 의미로 예수의 부활을, 즉 가장 오래된 기독교의 주장을 여기에 포함시켜서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판넨베르크가 왜 기독교의 부활을 기독교의 가장 오래된 주장이라고 했느냐 하면요. 바로 이 부활사건으로부터 다른 예수님의 사건들이 해석되어 나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보시며 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탄생이야기, 어렸을 적 이야기, 공생애 시작하는 이야기, 주욱 나가서 십자가 사건 차례 차례대로 이야기가 시작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되었다고 봐야 되겠죠. 부활 사건이 가장 처음에 기독교 공동체에 예수님에 대한 신앙의 핵심으로 자리 잡은 것, 이게 가장 오래된 것이고 이것이 초기 공동체의 가장 밑바닥에 있던 것이었어요. 다른 것은 좀 차이가 있어요. 예수님의 탄생이 어느 정도 알려진 공동체도 있었고 알려지지 못한 공동체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는 거죠. 그러나 부활사건만은 모든 기독교 공동체에 똑같이 중요한 것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런 면에서 판넨베르크가 이 부활을 가장 오래된 기독교의 주장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도 예수님의 본질과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예수님의 운명을 이야기할 때 핵심적인 그러면서 동시에 역사적인 그러한 사건으로 보아야 된다 이거죠.

지금 이제 판넨베르크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독교 신앙이 담아내려고 하는 근본이 뭐냐 그것입니다.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이 사람이 신학적으로 논쟁되었던 역사적 예수, 케리그마 예수 등등 그러한 것들을 주욱 끌어들이면서 설명하고 있어요. 사실 이러한 내용들은 평신도 들이 따라가기가 쉽지는 않을 겁니다.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 믿고 구원받자고 하는 것이 아니냐? 왜 거기에 예수에 대한 케리그마 실존적 경험 또 감정 중심의 신앙 이러한 등등에 대한이야기들이 왜 필요하냐? 그러한 반론이 가능합니다. 예. 제가 강의 앞부분에서 이야기한 것이기 때문에 다시 반복할 생각이 없습니다. 지금 예수님에 대한 역사적인 내용들의 핵심이 뭔가 이야기하려고 하는데요. 여기서 말하려고 하는 역사적이라고 하는 것은 전기를 회복한다고 하는 차원은 아닌 겁니다. 고게 좀 어려운 것이죠. 전기, 복음서 기자들은 전기 작가는 아니거든요. 전기는 아니지만 확실한 역사적, 확실한 역사적 사건 이 뭐냐 하는 것이죠. 예수님에게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 뭐냐 그걸 보려고 하는 것이죠. 제가 다른 때 사용한 용어로 말하자면 예수님의 역사라고 하는 것은 실증적인 역사가 아니라 생기로서의 역사, 해석된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해석한 것처럼 한 것이 아니라 표면적인 사실의 역사를 뚫고 들어가서 모든 역사를 오히려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인 역사라고 할 수 있죠. 네 본문을 좀 더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에 관한 역사 연구의 일반적 판단에 따르면 복음서에 전승된 예수말씀의 상당한 부분이 예수와 직접 맞닿아있는 게 아니라 예수전통의 전설적 기대에 기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네. 어떤 전설적 기대, 기독교인들의 전설적 기대, 예수를 향한 전설적 기대에도 불구하고 예수출현의 전체성격에 담긴 상, 상이요. 독일어로 비스트, 상을 얻어내기 위한 그 현존적 거점들은 충분하다. 이거는 아주 중요한 문장입니다. 여기에서 많은 신학적 논란의 역사가 담겨 있는 거예요. 한쪽에서는 성서에 있는 예수에 대한 해명들을 실증적 사실들로만 이야기를 하고 있고 또 다른 한쪽에 있어서는 그런 것들을 다 2천 년 전에 있었던 전설적 세계 속에서 나온 그러한 이상, 아이디어? 이상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는 거죠. 먼저 이야기한 쪽은 좀 근본주의라고 말한다면 두 번째 이야기한쪽은 자유주의죠. 큰 틀로 거칠게 말해서는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문장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한 거죠. 양쪽의 입장하고는 다른 거죠. 복음서에, 구약은 말할 것도 없고, 복음서에 분명히 예수에 대한 전설적 기대가 담겨있습니다. 그걸 우리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초능력에 행한 어떤 기대감이 있잖아요. 종교창시자나 성자에 대한 초지성적 요구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뭐 이런 구절들이 들어 있는 거죠. 그러한 요소들이 있는 거를 우리가 분명히 인정해야 되고요. 또 어떤 구절들은 예수와 직접 연관이 없는 것들도 좀 있는 거죠. 예를 들자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이런 것들이 예수님 직접 말씀하신 것으로 보기에는 어렵거든요. 직접 관계된 것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표현된 것이죠. 그러한 요한복음에 나와 있는 I am 나는 뭐뭐이다 문장이라고 합니다. 이시딘 잣츠 그런 것들은 예수님의 입을 빌리기는 했지만 간접적으로 예수님에 대한 고백을 초기기독교인들이 거기에 진술하는 거죠. 그런 것들을 인정해야죠. 그렇지만 예수의 운명, 예수의 정체성이죠. 그런 것들이 뭐냐는 것들을 알기 위해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현존적 거점들 정말 여기 있는, 그러한 현존적 이라고 했어요. 여기에 실질적으로 있는 근거들은 충분하다는 거죠. 그게 뭐냐? 그 전체적 상이 뭐냐? 예수 운명, 그의 전체 성격을 말할 수 있는 것이 뭐냐?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즉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하나님의 통치가 가까웠다는 기대를 통해서 결정적으로 각인되었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통치가 가까웠다는 기대를 통해서 결정적으로 각인된 것, 그 것이 바로 예수 출현의 전체적 성격이라고 할 수 있는 거죠. 그분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통치가 가까웠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 하나님나라와 통치가 똑 같은 이야기입니다. 가까웠다고 하는 강렬한 기대에서 사신 거죠. 처음부터 끝까지. 그렇게 사시고 그렇게 순종하고 그렇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게 예수가 누구냐고 할 때 가장 중요한 전체적인 성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종말과 더불어 임박한 심판이라는 관점에서 예수는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요청했다. 동시에 그는 지체 없이 하나님 통치의 구원에 대한 그의 사신을, 사신, 복음 선포, 사신 복음선포 잘 머리에 넣어 두십시오. 강의를 앞에서 들으신 분들은 사신, 복음선포인데요. 뛰엄 뛰엄 강의를 들으시는 분들은 그리고 이 단어를 처음 듣는 분들은 낯설 겁니다. 복음선포 보드샤프트 번역하기가 어려워서 사신으로 이렇게 한거예요. 그렇게 일반적으로 번역한 겁니다. 다시 보시겠어요. 하나님의 통치의 구원에 대한 그의 사신을 받아들이고 이로써 예수와 그 사신의 전달자를 승인한, 혹은 역으로 예수를 받아들이고, 그와 더불어 그의 사신을 승인한 이들에게 그 구원을 선포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구원을 너희가 받았다 그렇게 선포한 것이죠. 인간의 운명은 임박한 하나님의 통치 밑줄긋죠. 임박한 하나님의 통치를, 가까이 왔다. 문 앞에 왔다는 이런 말이죠. 임박한 하나님의 통치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달려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예수는 이렇게 행동할 수 있었다. 밑줄 쳐 두었다가 나중에 읽어 보십시오. 예수는 바로 거기 기초해서 행동하신 거예요. 거기에 기초해서 죄 선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의 고유한 메시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게 이제 유대인들과 충돌한 거죠. 말하자면 하나님의 통치가 무조건적이었기 때문에 예수는 이에 근거해서 구원을 선포할 수 있었다. 무조건적이라고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꼭 기억하셔야 됩니다. Unconditional 무조건적인 것. 이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그냥 조건적이지 않다는 거죠. 하나님의 통치는 그 사람이 바리새인이냐 죄인이냐 상관이 없는 거죠. 그 사람이 교인이냐 그 사람이 도덕적이냐 좀 부도덕하냐? 상관이 없는 거죠. 그 사람이 이성애자냐 동성애자냐 이런 것은 아무 상관이 없는 거죠. 더 끌고 나가게 되면 그가 기독교인이 아니냐? 그것이 상관없는 거죠. 무조건 적인 통치인거예요. 유대인들에게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그런 예수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이거는 여러분들이 조금 더 깊이 생각하셔야 되겠습니다. 예수는 바로 그것을 선포하시는데 우리는 자꾸만 조건을 달잖아요. 뭐뭐하면 어떻게 하면. 성서가 어떤 조건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건 조금 다른 의미니까요. 그럴 뿐만 아니라 그것은 더 큰 명제 밑에 있는 하부명제이니까요. 종속명제, 종속적인거죠. 고 차이를 여러분들이 구별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무조건적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유대교라고 하는 틀과 상관없이 구원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예수는 이미 인간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 명시적으로 분명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하나님은 아바 아빠라고 하시니까요. 사랑이 아주 분명하다. 뻔한 이야기 같죠. 뻔한 이야기아닙니다. 유대인들의 생각에 의하면 하나님은 이웃을 사랑하게 했지. 원수를 사랑하면 안되거든요. 내편을 만들어야 되거든요.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의 사신, 보드샤프트에 의하면 그렇지 않는 거죠. 무조건적인 그러한 사랑인거죠.

그런데 종말론적 희망과 그것에 상응하는 예수의 태도가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준거가 됨으로써 그는 유대의 전통적 율법종교와 정반대의 길로 접어들었는데, 이 율법종교는 율법과 율법실행을 도래할, 율법자체를 따르는 것을 도래할 구원에 참여할 준거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충돌하는 거죠. 예수님이 말씀하신 종말론적인 희망과 그것에 상응하는, 그것에 따른 그것에 근거한 예수님의 태도 이런 것들이 구원의 유일한 준거, 기준 이런 것이 된거죠. 예수님 공동체와 초기 기독교에서 당연히 이러한 것들은 율법이 구원의 준거로 자리잡은 유대교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예수는 결국 유대교 고위층으로부터 정죄당하고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예수의 운명이 그렇게 되었죠. 가고 싶지 않았지만 갈 수 밖에 없는 길이었죠.

그러나 한 유대인이 예수의 부활사신이 확실하다는 사실을 증언하게 되는 경우에 이 사건은 그에게 역으로 예수에 대한 정죄가 神적으로 파기되었음을 의미했으며, 그리고 예수를 보증하고, 또한 그와 그의 사신을 지지함으로써 미래의 인간 구원과 파멸이 하나님 앞에서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좀 어려운 문장이죠. 이러한 유대교에서 예수님이 처형당했는데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설명입니다. 한 유대인이 혹은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부활이 분명하다고 하는 사실을 선언하고 인정하게 된다면 예수님은, 유대교가 죽인 그분이 부활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예수님을 죽인 유대교의 그러한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사실이 증거되는 것이고.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유대교는, 예수를 처형한 유대교 고위 성직자들은 예수가 신성모독을 저질렀다고 하는 선고를 내린 거잖아요. 그 결과 십자가 죽음까지 이르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이후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한 것이 분명하다고 한다면 예수에 대한 유대인들의 사형선고는 잘못된 거죠. 하나님으로부터 잘못된 것으로 인정받은 거죠. 그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파멸당하냐 구원받느냐 하는 그러한 문제가 예수의 복음 선포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결정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지금까지 논리적으로 큰 무리가 없죠. 자기가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는 둘째 치고 설명자체는 무리가 없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부활인거죠.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고 또한 그 하나님의 나라가, 혹은 하나님의 통치가 조건적인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이라고 하는 사실을 선포했고 그 하나님이 아바 아버지라고 하는 사실, 그 아버지의 사랑이 분명하다고 하는 사실을 선포한 예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선포한 예수를 유대교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어요. 충돌된 겁니다.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 통치 사랑 절대적인 것, 무조건 적인 것, 온통 이런 것들이 유대교로서는 용납하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예수의 선포와 예수가 일치되어 버리는 그러한 어떤 생기, 고러한 단계에 들어가게 되면 더더구나 그런 거죠. 타협의 여지가 없게 되었습니다. 내용이 그렇게 흘러가게 됩니다. 결국은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을 당했는데 기독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에 의해서 부활하게 되었다고 믿게 되었으니까요. 어쨌든 양자간에 타협이 불가능한 어떤 지점에 이르게 됩니다. 그 핵심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거죠.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부활 사실이죠. 만약에 부활이 역사적이 사실이 아니라고 증명된다면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선포는 그 동기가 아무리 순수하더라도 실패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기독교 신앙,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기독교 신앙이 참되냐 참되지 않느냐의 결정은 이 부활사건으로 모아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74쪽 둘째줄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예수의 부활을 통해서 이러한 사실을 확증했다는 전제 하에서 예수는 분명히 인간이 하나님의 통치에 일치하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한 준거로서 인정된다. 그렇죠. 지금 방금 말씀드린 그 내용입니다 부활, 예수의 부활이 확실하다고 하는 사실에 전제하에,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전제하에,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인류가 멸망받느냐 구원받느냐 하는 절대적 기준이다라고 하는 사실을 확증했다고 하는 그러한 전제에서 본다면 예수가 바로 이제 우리들의 신앙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일치하고 있는가 아닌가 이러한 문제에서 단초, 혹은 근거라고 할 수 있는거죠. 따라서 이것은 예수가 그거 말고는 아무것도 실행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미래를 위한 혹은 반대하는 결단앞에 인간이 직면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좀 말이 좀 복잡한데요.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어쨌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느냐 아니냐가 하나님 나라와 일치하느냐 아니냐는 것을 결정하는 것이라고 하는겁니다.

예수의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이라면, 역으로 예수의 사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보증되었다면, 하나님 나라의 임박에 대한 예수사신을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거절하는가라는 문제는 사실상 하나님 자신을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거절하는가라는 문제와 다르지 않다. 예수의 운명이 하나님에 의해서 결정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선포한 말씀을 받아들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가 하나님을 받아들이냐 아니냐는 문제와 일치한다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사실상 예수 사신의 일치에서만 가능하다. 인간의 태도가 실제로 예수에 의해 선포된 그러한 기준에 상응하든지, 아니면 그의 태도에서 예수사신이 명시적으로 받아들여져야만 한다는 말이다. 궁극적인 문제는, 즉 예수의 사신에 대한 신앙이 내포하고 있는 예수에 대한 신앙은 어떻게 예수가 그에 대한 신앙에 기초한 공동체의 출현과 그 확산을 통해서 모든 神인식의 준거로서 명백하게 작용하게 되었는지를 가리키는 방식에 있다.

조금 표현자체가 번역이기도 하고 내용도 조금 까다로웠어요. 여러분들이 읽기만 해갖고는 조금 힘들죠. 내용은 어떻게 보면 간단한 겁니다. 깊이는 있지만 명료한 거죠.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라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기독교 신앙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기준이다라고 하는 건데요. 여기서 마지막 문장에서 요 패러그래프의 마지막 문장에서 판넨베르크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이러한 것이 설명된 것을 전제하고 예수가 어떻게 모든 신에 대한 보편적 예들 있잖아요. 그것의 준거, 핵심이냐고 하는 것입니다. 보세요. 불교에서도 그들이 신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지만 종교적이잖아요. 다른 이슬람교나 유대교나 등등. 그 외에도 좀 거리가 먼 다른 종교들에서도 신 인식 절대자에 대한 인식, 여기서 예수가 바로 중심, core고 하는 것을 믿느냐 하는 거죠. 이러한 것에 대해서 판넨베르크가 그러한 질문을 그 다음 패러그래프에서 제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예수의 신뢰, 그리고 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자인 예수 자신에 대한 신뢰는 근대적 의식, 현대인들의 의식이요. 모더니즘 이라고 하죠. 이성중심적이고 합리적인 근거에서 살아가고 있는, 근대적 의식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여전히 명명백백한 가능성인가? 현대적 의식에서 예수님을 정말 우리가 믿는가? 하나님이 보내신 자로 우리가 믿을 수 있는 하는 거죠. 세계종말의 임박에 대한 기대와 하나님의 통치영역에서 일어날 창조의 우주적 변형이 임박했다는 기대는, 예수님이 하신 기대잖아요. 우주적 변형이 임했다고 하는 기대말이죠. 그런 기대들은 자연과학의 확실한 결과들을 지향하는 세계인식과 일치하지 않는 게 아닐까? 이러한 자연과학적 사실주의 혹은 실증적 역사주의, 이런 데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은 예수가 말한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 우주적 변형에 대한 그런 희망, 이런 희망들을 조금 가볍게 볼 수 있는 거죠.

우리가 그들에게 어떤 대답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의 그 기대*는 이미 세계의 종말이 예수 시대가 지난 후에도 발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통해서 부정되는 것은 아닌가? 종말의 지연, 이런 쪽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임박한 종말은 부정되는 것이 아닌가 그러한 질문이죠.

이 구절은 하나님 나라의 급박한 도래에 대한 예수의 기대(Erwartung Jesu) 및 예상을 말한다. 이에 터해서 원시 기독교 공동체는 자신들의 시대 안에 실제적으로 하나님 나라가, 즉 예수의 재림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믿은 것 같은 태도를 곳곳에서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지 않았으며 예수의 재림도 실행되지 않았다. 대신에 교회가 역사에 등장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예수의 기대는 오류인가? 판넨베르크는 곤혹스러운 이 문제를 적당한 말재주로 넘어가지 않고 정면으로 돌파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아래의 내용이다.

따라서 만약 예수를 여전히 확신하고자 한다면 그가 바로 하나님과 일치된 분이고 그를 믿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과 일치된다는 것을 확신하려고 한다면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려고 한다면 이러한 열광적 임박에 대한 기대와의 연결고리를 포기하고 예수의 주장을, 그의 메시지 선포를, 그의 사신을 구체화하려고 시도하지도 말아야만 하는가? 그래서 앞에서 나온 이야기를 조금 더 하자면 절대의존의 감정에 머물러야 되는가? 케리그마의 영성에 머물러야 되어야 하는가? 실존적 신앙경험에만 머무는 것이 오히려 낫지 않는가? 가능한 것이 아닌가? 이러한 질문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사실 그러한 시도들을 많이 했거든요. 이게 지금 풀기 힘들기 때문에요. 이게 자칫하면 이 역사적 예수의 문제 그 예수가 선포한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 우주적 변형에 대한 그러한 신앙과 기대들 이러한 것들이 현대적 의식하고 상응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자칫하면 이러한 신앙의 독특성 때문에 기독교 신앙 자체가 근본적으로 부정될 위험성이 있다고 하는 거죠. 옳은 지적입니다. 방금 말씀드린 대로 다른 도피로들을 많이 찾은 거거든요. 판넨베르크는 그렇지 말아야 된다고 하는 겁니다. 이런 것이 비록 현대의식의 걸림돌로 작용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포기하면 기독교 신앙자체가 무너진다고 하는 거죠. 기독교 신앙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억지로 붙들고 있는 것은 아녜요. 오히려 반대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서라고 한다면 이러한 예수의 임박한 하나님 나라와의 선포에 대한 고리와 조금 느슨하게 하면서 다른 쪽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지금도 얼마나 많이 그렇고 있어요. 예수 믿으면 우리 마음이 평안해지고 온갖 근심걱정도 없어지고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다 그러한 주장들이 있잖아요. 심지어 웃으면 복이 와요 정도의 차원에서 기독교 신앙을 변증하려고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잖습니까? 실제로 지성적인 교회에서도 그런 설교가 많이 선포됩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경험이 많이 있을 거예요. 웃음이 우리들에게 주는 정신적 혜택 그런 것들을 주욱 많이 나열해요. 웃으면 뭐가 없어지고 뭐가 생기고. 자꾸. 웃음. 기독교 신앙은 우리들에게 웃음을 준다. 이런 식으로 기독교 신앙을 일종의 정신적 스트레스를 카타르시스 하는 도구로 이용할 수 있는 거죠. 또는 처세술, 방법론으로 이야기할 수도 있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오히려 현대인들에게 어필할 수 있어요. 판넨베르크는 그게 아니라고 하는 거죠. 비록 걸림돌이라고 하더라도 그게 그게 불안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놓치지 말아야 된다.

거기에는 이제 두 가지 요소가 들어가 있군요. 그게 인제 기독교의 아이덴티티이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구요. 본질이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구요. 그것이 보편타당한 진리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이 두 가지 문제예요. 정체성, 기독교의 아주 고유한 정체성, 이게 때에 따라서는 세상에서 걸림돌이기도해요. 위기일 수도 있어요. 그러나 그것이 아주 고유하고 독특하지만 보편적인 진리의 성격을 확실하게 갖고 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걸 푸는 게 아마 신학이겠죠. 기독교의 독특한 정체성을 보편적 진리이해와 하나로 묶어서 해명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다음 좀 나가보죠. 판넨베르크는 이 문제를 풀어보려고 합니다.

이 문제를 우리는 두 가지 각도에서 접근해야한다고 봐요.

첫째로 예수 사신의 고유한 핵심을 현존적 세계 변형인 하나님의 통치가 임박했다는 그의 기대로부터 분리해낼 수 있을지 모른다는 것은 일종의 착각이라는 시각이다. 분리해 내려고 했거든요. 많은 경우에서요. 그것은 그렇게 하면 안된다. 착각이다. 그걸 분리하면서도 기독교 신앙이 가능할 것처럼 말한다고 하는 것은 착각이다.

예수가 자신의 고유한 출현을 통해서 임할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서 언급한 것은 그 통치의 임박한 미래에 앞서서 던져진 불빛일 뿐이다. 다시 그 문장을 보겠습니다. 예수가 자신의 고유한 출현을 통해서 임할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서 언급한 것은 그 통치의 임박한 미래에 앞서서 던져진 불빛일 뿐이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예수의 사신은 하나님의 강압적 미래가 매우 긴박하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전제하고 있다. 즉 예수의 경우에 하나님의 사랑은 가까운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하기 위해서 주어진 자신의 특별한 사명에서 명백해졌다. 왜냐하면 이러한 선포는 하나님의 통치에 의한 구원에 참여하기 위해서 허락된 하나님의 배려이기 때문이며, 특히 예수가 약속한 무조건적인 용서를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예수사신의 모든 내용이 담고 있는 궁극적 기초는 하나님의 통치가 임박했다고 하는 그의 현실적 기대에 놓여 있기 때문에 그 임박에 대한, 하나님 나라 임박에 대한 기대지평이 떨어져나가게 된다면 그가 스스로 보여주려 한 그 어떤 말이나 생각도 아무 의미가 없게 된다. 그렇죠. 예수는 아주 뛰어난 휴머니스트였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면 이건 휴머니즘이 소중한 것같이 이야기하기는 하지만 임박한 하나님의 종말이라고 하는 관점에서 상대화되어야 되는, 그러한 가치들이 선봉에 나서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되는 거죠. 예수님의 모든 말과 모든 행위들은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 우주적 변형이라고 하는 그러한 종말론적인 기대와 희망과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 거죠. 신앙은 더 이상 예수가 아니라 예수 이름에 전가된 자기가 만든 외형적 상과만 관계를 가지는. 그렇잖아요. 사람들이 자꾸만 그런 이야기들을 하잖아요. 이건 조금 보수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나 진보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나 비슷한 경우가 되겠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사랑을 전하자. 사랑을 기독교 신앙의 근거인 것처럼 말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도덕적 실천일수도 있고요. 사회적인 차원에서 보면 사회변혁을 향한 투쟁일수도 있고요. 그러한 하나의 오늘 여기 본문에 나와 있듯이 예수 이름에 전가된 예수 자체가 아니라 예수 이름에 전가된, 자기가 만든 외형적 像과만 관계를 갖게 된다. 그게 인제 첫 번째 관점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통치가 임박했다는 예수의 기대가 좌초되었다는 주장은 더 많은 논증이 없는 한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는 시각이다. 즉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좀 거리를 두고 다른 쪽으로도 신앙의 토대를 확보해야 된다는 이 주장의 밑바닥에는 예수가 선포한 그 종말론적인 하나님 통치에 대한 기대가 실패했다고 하는 그러한 생각이거든요. 그거는 설득력이 없다. 그거를 논증하려면 더 많은 증거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 즉 예수의 부활에 대한 사신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면, 임박에 대한 예수의 기대는 아직 세상에서 완전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그의 고유한 인격체에서는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에게서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잘 여러분들이 요 맥락에서 읽으셔야 됩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최종적 구원이거나 아니면 최소한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서 유대적 기대가 희망한 영원한 삶의 최종적 구원에 이르는 입구다. 죽은 자로부터 부활 말이죠. 비록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하게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예수에게서는 이루어진 것으로 봐야 하는 거죠. 부활이 확실하다는 것이죠. 그 부활이야말로 하나님나라의 실천이다. 이 사건이 예수에게서 발생했다면 최소한 그의 인격체에서 이미 완성된 것이다. 신적인 권능에 대한 그의 요구는 어떤 임의적인 기적을 통해서 강화되는 게 아니라 그에 의해 임박한 것으로 기대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낼 구원 현실성이 성취됨으로써 강화된다. 이러한 성취는 확실히 그에게서만 발생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성취는 다른 약속이나 기대와 구별된다.

반면에 우리가 예수의 부활 사신을 사실로 받아들여도 된다면, 그가 하나님 통치의 임박에 대해서 착각했다고 더 이상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현실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것때문에 예수의 그 하나님 임박한 통치에 대한 기대가 실패했다고 볼 수 없다. 이미 그의 부활로서 그것이 일어났기 때문에 라고 하는 거죠. 신학적 용어로 선취되었기 때문에 라고 하는 거죠. 그리고 예수에게서 발생한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은 바울이 말했던 대로 우리의 이 세상이 얼마나 오래 존속하는가에 대한 질문과는 전혀 상관없이 이러한 동일한 사건이 예수를 믿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발생할 수 있으며 그렇게 되리라는 사실을 보증한다. 2천년동안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완전하게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가, 혹은 하나님 나라가 일어난다고 하는 사실에 대한 기대가 잘못 되었다고 하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고 하는 말입니다. 그건 예수의 부활,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에 근거한 문제죠.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을 완전히 폐기처분할 수 있다면, 그러면 그들의 주장은 설득력을 갖는거죠. 결국 기독교 신앙이 옳으냐 그르냐? 문제의 핵심은 예수의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에 있습니다. 바울도 그런 차원에서 말했고요. 네. 어떻습니까? 지금까지의 여기까지의 설명이 말이죠. 그렇게 되면 이건 완전히, 어떻게 되면 부활이라고 하는 배수진을 치고 진리투쟁을 하는 거거든요. 여러분들은 조금 불안하겠어요. 부활은 그렇게 확실하지 않는 건데 그것을 기독교 신앙의 토대로 삼게 된다면 그건 참 불안하다. 그렇지 않다고 하는 그 맥락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신학이구요. 영성이기도 하구요. 부활 문제는 뒤에 또 나오게 될 거예요. 사도신경에 들어 있으니까요. 그게 몇 장에 있습니까? 9장에 보면, 지금 우리가 4장하고 있는 데 9장까지는 길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틈틈이 고러한 내용이 각장에 나올 테니까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지금 여러분들은 기독교 신앙의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온 거예요. 막다른 골목이라기보다는, 피할 수 없는 외나무다리군요. 거기 들어와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다음시간에 또 만나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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