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강 녹취록 - 4강 예수 그리스도를(4)

사도신경해설 조회 수 3089 추천 수 0 2009.04.05 00:47:55

판넨베르크의 사도신경해설 22강 - 4장 예수 그리스도를(4)

안녕하세요? 사도신경 해설 오늘 22강입니다. 지난주에 녹화를 못했습니다. 물론 바쁜 일이 있기도 했고 또 목이 좀 따끔거리면서 상태가 좋지 않아서 좀 쉬었어요. 이번 주에 들어서서 상태가 좀 더 나빠졌습니다. 목 따끔거리는 것은 좀 그거는 괜찮은 것 같은데 콧물 목소리 이런 것이 좀 변했습니다. 이번 주에도 쉬어야 되나 생각하다 너무 쉬는 것이 길게 가는 것 같아서 여러분들이 듣기에 제 목소리가 불편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강의를 해야 되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라고 하는 항목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이 항목에서 핵심문제는 제가 몇 번 말씀 드렸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머릿속에 정리하고 있으리라고 봅니다. 기독교 신앙의 기초라고 할까요. 뭐 그런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말이야 간단한 거죠. 당연한 거죠. 그렇지만 그 안에 담긴 신학적 문제들 그런 것들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을 말할 수 있는 거죠.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가 실체로 왔냐하면 그렇지 않는 거라 말 이예요. 예수님의 말씀에도 있었고 또 초기 기독교 공동체도 그렇게 기다렸던 재림, 종말 그런 것들이 임박했다고 생각했는데 오지 않았다 말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나라, 바실레이야 투데우 거기에 근거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의 예상과는 달리 실현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기에 근거했던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과 행위 그런 것들도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 이런 논리가 성립한다고 하는 말입니다. 뭐 그런 문제들은 그냥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러면 됩니다. 그게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에요. 그러나 기독교 신학은 그런 건 아니거든요. 그냥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재림한다는 것을 믿고 그냥 소박하게 신앙생활 한다고 하더라도 크게 문제가 없습니다. 기독교 공동체 안에 있으면서 세례 받고 성만찬에 참여하고 예배를 드리고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이라고 한다는 희망을 갖고 산다면 뭐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진수가 있거든요. 그것을 잘 알고 신앙생활 하는 것하고 그것을 모르고 어렴풋이 따라다니는 것과는 좀 차이가 있습니다. 제가 자주 예를 드는 바둑만 해도 그렇거든요. 그냥 동네에서 점심내기 바둑을 두는 정도의 실력만 있다고 하더라도 그냥 바둑을 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바둑과 상관없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바둑의 정수, 바둑의 깊은 세계를 들어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도 그와 비슷한 부분들이 있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나라에 근거해서 말씀을 전하고 그렇게 사셨는데 그 하나님 나라가 실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의 전한 모든 것들은 그 토대를 잃는 것이 아니냐 하는 그 문제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해야 되느냐 그런 거죠. 그런 문제들을 계속 제시하고 거기에 대한 대답들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같이 보는 책 76쪽 맨 아래 패러그래프입니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숙고의 중요성은 우리가 뒤에서 좀 더 자세하게 다루게 될 예수 부활에 대한 전승을 어떻게 판단하는가에 전적으로 달려있다. 이렇게 새로운 패러그래프가 시작합니다. 이거죠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위 이런 것들이 하나님 나라가 현실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도 좀 부실한 게 아니냐 하는 반론은 예수님이 실질적으로 부활하셨다고 한다면 큰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하는 거죠. 왜냐하면 이 부활사건이 바로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이죠.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현실이 되었다고 한다면 아직 역사 안에 그런 것들이 완전히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크게 모순되는 건 아닙니다. 시간이 천년, 2천년, 만년 이런 것들이 우리가 볼 때는 길지 모르지만 사실은 더 긴 역사에 본다고 한다면 짧은 것들이거든요. 임박했다고 하는 것, 하나님 나라가 임박했다고 한다는 사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확실하다고 한다면 현실 역사에서 좀 지체되었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위가 무효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이야기죠. 여기서 핵심은 이제 부활, 부활을 우리가 어떻게 변증할 수 있느냐? 그것에 따라서 기독교 신앙이 살아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공격당할 수 도 있고요. 그렇습니다. 혹은 아예 다른 돌파구를 찾아야 되는 그러한 상황에 직면할 지도 모릅니다.

물론 지금까지 다른 길을 많이 모색해왔습니다. 강의 앞부분에서 한두 번 거론한 거예요.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이런 것하고는 상관없이 지금 여기서 실존적으로 어떻게 내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 그러한 것이 하나의 도피로, 탈출구라고 할 수 있는 거죠. 예수님의 말씀 선포와 그 선포의 핵심인 하나님 나라와는 상관없이 지금 내가 여기서 실존적으로 어떤 종교적인 경험을 하는 길을 찾을 수도 있는 겁니다.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이건 바른 길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전파한 하나님의 나라를 배수진에 놓고 나가야 된다고 하는 겁니다. 부활에 대한 전승을 우리가 어떻게 판단하느냐에 따라서 이러난 문제들이 결정된다고 하는 거죠. 읽어보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의 부활을 통해서만 십자가에 죽은 예수에 대한 믿음이 다시 가능하게 되었다고 말해야만 한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혹은 귀신들을 내쫓았기 때문에 병든자들을 고쳐주셨기 때문에 민중들의 친구가 되어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를 믿는 것은 아니라는 거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분인데요.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분이죠. 실패의 가장 적나라한 모습이죠. 그런 분을 우리가 믿는다고 한다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만 타당성이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걸 우리가 박애주의라든지 일반적인 종교성이라든지 그러한 차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어떤 유일한 사건, 그 부활, 바로 거기에 달려 있는 거죠. 그것을 우리가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 혹은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변증해 낼 수 있느냐 거기에 모든 것들이 달려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면서 아마 여러분들이 머릿속에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들이 작용할 겁니다. 좀 지성적인 사람이라고 한다면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느냐? 부활만 어떻게 기독교의 토대로 삼느냐 그것은 오히려 기독교 신앙이 막다른 골목으로 빠져드는 잘못이다. 그 부활보다는 예수님의 박애적인 그러한 사랑실천, 여기에 기독교의 신앙의 근본을 두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일단 우리는 판넨베르크의 책을 따라 가고 있으니까 이 판넨베르크의 생각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 쪽으로도 여러분들이 머릿속에 생각이 왔다고 할 거고요. 아니면 그렇지, 그렇지 부활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확증이다. 거기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옳은 이야기이기는 한데 부활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 말이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거든요. 우리가 죽었다가 지금처럼 산다 재생한다 이런 생각으로 부활에 대한 열광주의적 생각한다면 이것도 기독교 신앙의 부활이라고 하는 신앙과는 거리가 있는 거거든요. 하여튼 부활이라고 하는 점에 이 문제에 기독교 신앙의 모든 것이 달려있다고 하는 사실이 한편으로는 조금 불안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어떤 사람에게는 열광적인 차원에서 확신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이 부활문제는 4장에서 다루지 않고요. 고거는 차례를 다시 보겠습니다. 4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구요. 5장은 하나님의 외아들 우리주고 6장은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7,8장을 넘어서 9장에 이르러서야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부활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한참을 기다리셔야 되겠습니다. 그래도 판넨베르크는 부분적으로나마 오늘 강의 흐름에서 필요한 내용들을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그 사건 이후 그러니까 부활사건이후 예루살렘에서 형성된 초대 기독교 공동체에게 이미 해당되는 말이며, 뭐가 해당된다구요? 부활을 통해서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에 대한 믿음이 가능하다고 하는 이 사실, 이것은 초기 기독교고, 예루살렘에서 생겨난 초기 기독교에 해당하는 것이고 거기서부터 기독교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예수님의 사랑의 실천이 귀해서 그래서 예수를 믿는 기독교 공동체가 시작된 게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또한 그들만이 아니라 우리 후대 사람들에게도 역시 해당되는 말이다. 기독교 2천년역사에서 이것이 늘 상수로 작용했다고 하는 겁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언제나 여전히 하나님의 통치가 임박했다는 예수의 기대에 동참했다. 그러나 어쩌면 오늘날 예수는 묵시론적 열광주의자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단어가 조금 낯설 게 들리죠. 묵시론적 열광주의자. 묵시문학적 묵시사상적, 묵시록, 묵시문학 요한계시록 등등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구약 후기에 등장한 특별한 신학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pocalyptic 이라고 하는 단어에 해당되는 건데요. 여러분들이 요한 계시록을 보면 하늘이 종이짝처럼 말리고 바다에서 용이 나오고 그런 장면이 있잖습니까? 14만4천이라는 지 666이라든지 오늘 우리가 도저히 따라가기 힘든, 마치 SF영화의 장면들과 같은 것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들 묵시문학의 핵심은 이 세상이 끝장 난다 금방 끝장난다 이거는 완전히 악하고 썩었다 멸망되어야 한다. 새로운 세계가 온다. 에온이라고 합니다. 세상 오울드 에온, 뉴 에온 이게 대립적인거죠. 지금 있는 것은 모두가 멸망당하고 새로운 것으로 완전히 모든 것이 다 대체한다. 그런 것과 종말론하고는 차이가 있거든요. 종말론은 현재 삶을 무조건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이거는 새로운 세상, 새 땅이라고 할 까요. 새로운 생명에 의해서 변화되어야 할것이지. 부정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 그 당시와 바로 그전에 묵시 문학가 사상가들이 많이 있었는데요. 그러한 운동들이 많이 전개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나라에 있었던 1992년의 다미선교회같은 이들을 가리켜서 묵시문학적 열광주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이 언제까지 끝난다. 생각을 하고 있고 현재 삶을 다 부정하는 것이죠. 그래서 군중들을 이끌고 광야로 나가서 혁명들을 일으켜 보려고 했던 그러한 일종의 광신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에 많이 있었습니다. 갈릴리에도 그러한 인물들이 제법 많이 있었습니다. 예수도 그러한 묵시론적 열광주의자처럼 보였을 지도 모르죠. 하나님 나라가 임박했다고 선포하였으니까요. 왜냐하면 그의 생각이, 그렇잖아요. 예수님의 생각이 어떤 생각이요? 하나님 나라가 곧 닥쳐왔다고 하는, 그러한 생각, 그거를 기대한 거죠. 그것을 믿은 거죠. 기대했다. 믿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겠군요.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남자가 군대 갔다. 여자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남자가 언제 제대해서 나에게 올 것이다. 그러한 기대를 하는 거죠. 비슷한 표현? 예가 정확한가요? 예수님에게 하나님 나라가 곧 당도했다. 곧 열렸다 게시되었다 그런 생각이 있었거든요. 그런 생각에 의해 사신 거거든요. 그런 생각이 만약 부활 사신이 이를 분명하게 받쳐주지 않았다면 부활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오류로 판명 났을지도 모를 그 기대에 완전히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묵시문학적 열광주의자들의 모든 생각들은 다 실패로 끝나 버리고 말았거든요. 사람들을 끌고 여러 가지 운동을 일으켰지만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기대도 그렇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거죠 부활사건으로 그런 것들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말이죠. 그러니까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위와 그러한 운명, 그런 것들은 어떻게 보면 다른 혁명가들, 종교가들 그런 사람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 어떤 것 중의 하나라고 말해도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것만 갖고도 우리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을 만한 근거는 되지 못한다고 하는 거죠. 부활이 빠진, 부활 사건이 빠진, 여기서는 상당히 민감한 문제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 다시 반복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오늘 많은 지성적 기독교인들이 부활 없이도 예수를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민중 신학이라든지 역사진보를 외치는 분들에게서는 그런 경향이 강합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메시지가 중요하지 우리가 확인할 수 없는 부활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는 것은 현대 지성의 세계에서는 오히려 자기 무덤을 파는 것이 아니냐? 라고 그런 생각인거죠. 참 이문제가 어떻게 보면 뜨거운 감자일 수도 있습니다. 판넨베르크의 입장에 따르면, 그 사람의 입장만이 아니고 바울도 분명히 이야기했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그런 식으로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가능한 어떤 것쯤으로 종속적인 변수로 내려놓을 수 없다고 하는 거죠. 예수님은 그러한 하나님 나라가 임박했다고 하는 그러한 기대에 빠져있었는데 그것이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부활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오류가 될지도 모른다고 하는 그러한 상황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책을 보십시오.

이 경우 당연히 부활절 사신도 역시 그것에 연관되어 일어나는 사건과 분리될 수 없다. 부활절 사건의 의미는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에 근거해서 인간에게 특별한 사명이 주어졌다는 사실에 좌우된다. 예수가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언급했는지에 대해서 내적으로 증언할 능력이 없는 한 기독교의 부활절 사신이 주장하고 있는 사건의 특이성은 기독교 사신과 대립하여 제기되었던 원래의 반대 보다 훨씬 강한 반발만 키우게 될 것이다. 요 부분은 그냥 지나갑시다. 좀 복잡하지요. 그렇지만 이 모든 특별한 문제가 벌어지는 와중에도 오직 부활절 사신만이 조금 바로 앞에서 읽은 문장의 복잡한 것을 이야기하는 것인데요. 예수가 말한 실체적 사실을 우리가 따라가기 힘든 것인데요. 어떤 것이 예수의 친언 인지 어떤 것이 사도들의 고백인지 구분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한 와중에도 말이죠. 그렇지만 이 모든 특별한 문제가 벌어지는 와중에서도 오직 부활절 사신만이 예수의 전권에 대한 문제에 대해 책임적으로 답할 수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유효하다. 네. 예수님이 자신의 십자가 사건, 십자가의 죽음을 읽으면서 내가 세상 죄를 지고 간다는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사도들의 고백인지 아닌지. 그런 것 확실하지 않을 수 있는 겁니다. 내가 부활이다 다시 살리라 하는 말씀도 예수님의 직접적인 말씀이 아닐 수도 있는 거거든요. 그런 것들은 우리가 다 완전하게 역사 비평적으로 찾아낼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오류도 있고 편집도 있고 전승에서서 붙고 떨어지게 되는 그러한 많은 일들이 거기에 있다고 하는 거죠. 그래도 그러한 아주 복잡한 와중가운데서도 이 부활절 사건, 부활절 복음 선포, 부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하는 이 증언, 이 선포, 이 설교, 이것만은 예수님의 행하신 모든 그러한 일들에 대해서 책임적으로 답할 수 있다고 하는 사실, 이거는 빼고 박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거다.

여기서 말하는 이 문제제기는 십자가처형으로 인해서, 그러나 그것을 뛰어넘어 예수가 그 안에 살았던 임박에 대한 기대가 실망으로 뒤바뀜으로 인해서 주어진 것을 뜻한다. 이건 뒤에 말한 건, 앞 문장을 보충한 건데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으로 인해서 예수님의 공생애때 말씀하셨던 그런 모든 것들이 실패한 것이 아니냐? 그러한 실망들이 있었지 않습니까? 그런데서 벌어진 많은 것들이 있는 거죠. 실질적으로 실망을 했을 테니까 말이죠.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책임적으로 대답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언, 복음 선포 이런 거다 이야기하는 거죠.

지금 계속해서 판넨베르크가 말하려고 하는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치고 그리고 행위하신 모든 것에 근거라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임박, 이런 것이 비록 현실로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그 모든 가르침에 대한 반론이 나오게 되는데 그런 것에 대해서 책임적으로 대답할 수 있는 확실한 근거는, 기준은, 핵심은 예수님의 부활이다. 그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뭐냐 이런 것들은 뒤에 가서 나오게 될 테니까 그때까지는 질문을 좀 묻어 두시구요. 예수님의 행위와 가르침의 그 모든 것들의 근거? 그것의 토대, 근거 그것의 신뢰성 이런 것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있다 그것을 판넨베르크가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만 알고 계십시오.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을 통해 예수의 사신(使信)이 명실상부하게 공고해졌다고 하는 전제 하에서 다음과 같은 예수의 요청이 오늘의 인류에게 다시금 제기된다고 보겠다. 지금 전체안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이 공생애에서 전한 모든 말씀이 확실해졌다고 하는 그런 전제 말입니다. 다음과 같은 거죠. 즉 예수의 사신을 받아들이는가? 거절하는가라는 문제는 하나님의 임박을 수용하는가 아니면 거절하는가라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으며,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예수의 사명과 인격체에 대한 신앙고백을 제쳐두고서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네. 예수님이 공생에서 선포한 내용들, 그리고 그 행위들 이런 것들이 예수 부활을 통해서 확실한 것이 되었다고 한다면, 확실한 보장을 받았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이거를 받아들이냐 거절하느냐 하는 것은 하나님을 받아들이는가 거절하는 것하고 똑같은 이야기가 되는 거죠. 예수님의 사명, 하나님의 나라가 임박했다고 하는 그거, 그리고 그 분이 살았던 삶 자체, 인격 자체 이런 것에 대한 신앙고백 이런 것들을 제쳐두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이거는 가능하지 않다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이 일치된 거죠. 거기에 매개가 부활인거죠. 계속 가봅시다.

당연히 궁극적인 문제는 예수의 사신에 의존하는 자에게만 유효하다. 그렇다고 이것이 궁극적인 문제, 구원, 하나님 나라에 참여 이러 것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신에 의존하는 사람에게만 유효하게 된다는 겁니다. 논리는 이해하시겠죠? 우리가 지금 맞느냐 맞지 않느냐 하는 것은, 믿느냐 믿지 않느냐 것은 두 번째 문제고 논리는 분명하지 않습니까? 만약에 부활이 분명하지 않다고 그게 확실해진다면 지금까지 논리는 다 허물어지는 거죠. 출발점이 안 되니까 말이죠. 이걸 전제하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전제에 대한 설명을 충분하게 하지도 않고 그 다음 논리를 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냐? 이런 말도 가능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건 일단 묻어두세요. 묻어둔다고 하기보다 조금 기다리시면 됩니다. 그거는 진행되면서 나오게 되니까요.

어쨌든 이 논리는 맞는 겁니다.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개입을 통해서 인류역사, 혹은 보편사, 우주역사에서 유일회적으로 일어난 어떤 생명사건이라는 점에서, 예수가 하나님 나라와 일치했다고 하는 사실에 대한 증거이거든요. 그것에 대한 설명은 뒤에 나올 테니까요. 그게 분명하다면 그러면 이제 예수님의 복음선포와 그의 행위 이런 것들은 하나님과 동일하게 되는 거거든요. 예수님의 말씀을, 복음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하나님 신앙의 절대적인 기준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인만이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기독교 배타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그의 팔복말씀 가운데서 고난 받는 이들, 무력한 이들, 자비로운 이들, 그리고 의에 주린 자들과 목말라하는 자들을 예수에 대한 그들의 태도에 상관없이 축복했다. 가난하자, 우는 자, 목마른자에 대한 축복, 이런 말씀들에 의하면 기독교인들만 구원받는다고 하는 말은 되지 않는거죠. 예수그리스도의 사신을 온전하게 받아들인 사람만이 하나님과 일치하는 길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한데 그렇다고 이것이 기독교인만이 가능하다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이러한 상황에 처한 사람은, 자신의 고통과 무력감에 정복당하지 않는 사람은, 보다 나은 정의를 진실로 원하는 사람은, 그리고 자비심과 평화지향성으로 충만한 사람은, 팔복에 나온 이야기들에 대한 해명이에요. 이런 사람들은 실제로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을 신뢰한다. 멋진 말이죠. 이런 한에서 예수의 사신은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할 시금석이다.

요 패러그래프에서 다른 전체 강의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조금 보너스로 배울 수 있는 부분이 있는 겁니다. 기독교의 독특성 배타성과 포괄성 혹은 보편성, 이런 것들이 서로 결합될 수 있다는 겁니다. 예수만이 그리스도이고 예수를 통해서만 하나님, 생명의 근원자이신 그 분과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이 분명하면서 이걸 기독교의 배타성을 이야기하는 거죠. 독특성을 이야기하는 거죠. 예수 그리스도 이름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과 연관되는 거죠. 그러면서 동시에 우는 자, 굶주리는 자, 목마른 자, 정의를 진심으로 원하는 이러한 사람들은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하는 그러한 차원에서 예수가, 혹은 예수라고 하는 이름이 기독교의 독점으로서가 아니라 이 세상의 참된 인간 삶과 참 평안을 추구하는 그러한 차원으로까지 확대될 수 있는 거죠. 기독교의 포괄성이라고 할까요? 그런 것과 같이 연계되어 있는 거죠. 네 그다음 패러그래프입니다. 78쪽이예요.

예수가 하나님을 향한 모든 인간의 태도를 결정짓는 시금석이라는 말은 예수가 고유하게 언급한 하나님과 일치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물론 예수를 만나본 적이 없는 이들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다. 하나님과, 그리고 세상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일과 예수의 이러한 결합은 원시 기독교가 예수에게 부여한 칭호에 잘 드러나 있다. 예수는 기독교 신앙만 잘 따르는 고 사람들만 편애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보지도 못한 참 득의까지도 구원자로 자리매김된다. 그러한 뜻이죠. 그게 인제 원시 기독교가 예수님을 이해한 예수상 인거죠. 칭호에 잘 드러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원시 기독교는 예수를 유대인들이 기대한 사람의 아들(人子, Menschensohn 독일어로 맨쉔존)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세계를 심판하러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실 자이다. 원시 기독교는 예수를 마지막 때 약속된 예언자라고 생각했으며, 또한 고난 받는 하나님의 종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가 약속된 메시아이며,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하는 사실을 발견했다. 조금더 가보죠.

메시아라고 하는 단어는 ‘기름부음 받은 자’를 의미하며, 헬라어로는 ‘크리스토스’라고 한다. 이 단어는 신앙고백문에서 볼 수 있듯이 이미 오래 전에 고유한 이름이 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구성하는 요소가 되었다. 원래 ‘메시아’란 칭호가 핵심이었다. 이 칭호는 고대 이스라엘 왕들에게 사용되었다. 왕은 확실히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 인정받았으며, 미래의 왕에 대한 희망이 이미 유대 왕정시대에 등장했는데, 그 왕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스라엘과 세계를 통치할 왕권을 평화와 정의로 실행하게 될 자다. 이런 이스라엘의 희망과 예수의 연관성 사이에는 어떤 틈이 없을 수가 없다. 그렇죠. 유대인들이 바로 있는 메시아상하고 예수 사이에 어떤 틈이 없을 수 없는 거죠. 있죠. 그냥 우리가 흔하게 이야기하기로는 이스라엘의 그것은 시오니즘이죠. 일종의 민족주의적인 메시아상이죠. 주로 정치 경제적인 새로운 세계를 끌어올 자이죠. 예수님은 그러한 민족주의적 메시아상 하고는 거리가 있다고 하는 겁니다. 틈이 있다고 하는 거죠. 더구나 예수에게 적용된 ‘메시아’라는 칭호를 그가 명시적으로 거절했으리라는 점에는 그건 타당한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원하는 그런 메시아상, 그걸 거절했다. 그건 맞는 이야기다. 마가복음 8:27-33절에 있는 건데요.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대한 전승 있잖아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하는 것 말이죠. 이 사건에서 예수님이 메시아 칭호를 거절했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전승이 마태복음에도 있고 등등 있잖아요. 이러한 것들이 다 다 전승입니다. 말 그대로 전해져 내려온 이야기이고 거기에 기독교 신앙이 전승이 작용되는 거예요. 이러한 전승의 원형을 생각해 볼 때 이 예수의 거절, 베드로를 향해서 “사탄아 물러가라,”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이것은 메시아에 대한 거절이거든요. 물론 거기에는 직접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할 때 그것을 직접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았어요. 그때 예수님은 “너에게 그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 너는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러나 곧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그런 일이 결코 일어나서 안됩니다. 베드로가 말리잖아요. 그때 사탄아 물러가라고 이야기하잖아요. 지금 그 맥락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예수의 거절은 현재의 본문이 말하고 있는 보다 훨씬 단호했을 것이다. 예수 자신은 유대백성의 민족적 희망을 수행하는 자가 되는 것을 공개적으로 사탄의 유혹이라고 간주했다. 예수는 분명코 하나님의 통치가 모든 차안의 정치적 현존형태의 임박한 종말과 다르다고 하는 입장을 견지했다. 차안 이 세상 일들이지요. 피안 저세상이구요. 차안 이 세상 정치적인 어떤 형태들, 정치경제 문화 이러한 것으로 오는 임박한 종말과는 다르다고 생각하신 거죠. 즉 예수의 생각에 따르면 유대민족은 일종의 민족적인 부흥을 고집스럽게 희망하는 대신에 하나님의 통치가 피안에서 돌입하게 될 그 미래로 돌아서야만 했다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계속 그거를 강조하는 거죠. 민족적인 부흥, 여기에 머물지 말고 하나님의 통치가 차안의 세계에 피안으로 부터 돌입하게되는 그러한 미래로 우리가, 이스라엘 사람들이 돌아서야 된다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그것이 결국 충돌하게 되는 거죠. 그 결과가 십자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가 자신에 대한 그리스도 칭호를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후에 그 칭호가 그에게 부여되었다. 이것은 잘된 일인가? 그 어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선결문제다. 로마인들에게 예수는 분명히 정치적 선동가로서 고발당해야만 했으며, 따라서 그러한 이유로 그는 처형당해야만 했다. 처형의 이유가 예수의 십자가 명패에 기록되어있다. 즉 그는 ‘유대인의 왕’이 되고자 했다는 것이다(막 15:26).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십자가의, 예수가 처형당한 명패에 새겨진 명문은 오늘날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다시 거듭해서 역사적인 사실 보도로 밝혀지고 있다. 여기에 표현된 예수와 메시아 칭호의 연결은 우리가 앞서 본대로 예수가 이 칭호를 원하지 않았다면 오류이다. 그렇잖아요? 이러한 연결은 예수에게 항상 운명적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이유들만 갖고 어떻게 예수의 제자 공동체가 메시아에 대한 예수의 생각과 어긋나게 예수를 이해했는지 확실하게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에 덧붙여 생각해야 할 점은 다음과 같다. 예수의 부활 이후에는 예수 이외에 다른 구원자를 생각할만한 그 어떤 여지도 없었다고. 메시아니즘이 예수를 따랐던 예수 공동체와 그 당시 유대인들의 메시아 사상과 그런 것들과 연관속에서 어떤 굉장히 복잡한 우여곡절을 거치신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는 그런 메시아 상을 원하지 않았고요. 그런데 십자가 명패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것이 붙어 있고 이거는 메시아라는 뜻이거든요. 정치적인 이스라엘의 왕권의 회복이라고 하는 차원에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이 주님이 원하지 않는 그 명칭이 결국은 예수에게 그대로, 예수의 본질을 구성하고 있는 칭호로 자리를 잡았을까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부활사건인거예요. 부활이후에는 예수 공동체가 그 외에는 어떤 메시아도 생각할 수 없는 거예요. 그들은 물론 유대인들의 메시아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를 추종했었죠. 그러나 부활이후에는 그것은 아니지만 다른 어떤 것이라고 그들이 다 확정 지을 수는 없었지만 그들이 명확하게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 바로 예수라고 이 분 말고는 어떤 다른 메시아도 상상할 수 없는 그러한 상황에 들어가게 된 거죠.

그래서 그의 공동체는 그의 재림을 기대했다. 따라서 예수는 이제 유대인들이 기대한 최종적 인물과 동일한 자로, 그리고 예수가 그의 오심을 언급한 사람의 아들과, 또한 그가 마지못해 자신의 운명을 통해서 불가분리 연결된 메시아와 동일한 자로 여겨졌다. 그렇게 고백되었다 하는 겁니다. 복잡하죠? 아 그냥 예수를 메시아로 믿으면 되지? 뭐 그렇게 유대인들의 메시아 상과 예수님의 거절과 그의 운명에 들어온 메시아 상과 이렇게 복잡한 이야기들이 많으냐?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게 우리 기독교가 걸어온 발자취입니다. 지금 미국에 가 있는 한국의 교포들이 자기 선조들이 어떻게 해서 미국으로 건너 왔는지에 대한 형편 그런 것을 잘 모른다면 자기들의 교포정체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수밖에 없는 거잖아요. 우리가 조금 복잡하지만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예수를 따르는 기독교의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이 길이 최선이고 어쩌면 유일한 길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이제 그의 공동체는 예수에게서 참된 메시아를 인식할 수 있었다. 메시아에 대한 기대는 세계 안에서 무언가 현존적으로 실행해서 성취해야겠다는 희망으로부터 벗어나서, 이 땅에서 내가 뭔가를 이루어서 만들어서 개발하고 개척하고 개량하고 진보시켜서 뭔가를 만들어야겠다는 희망으로부터 벗어나서 예수를 통한 인간의 죽음을, 예수를 통해 인간이 죽음을 극복하는 피안적 사죄를 경험하게 되었다는 특징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유대인들의 메시아니즘은 이 땅에서 경제 정치적인 그러한 현실적 문제들을 만들어 내는데 있다고 한다면 예수님은 근본적으로 죽음으로부터의 생명이라고 하는 그러한 세계로 하나님과 구원문제에 차원을 올려놓은 거죠. 예수님을 믿는 공동체가 그것을 인식하게 된 것이죠. 그래서 그 분을 메시아로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메시아, 즉 그리스도로서 예수의 본질적 특색이 갖는 정당성은 그 어떤 다른 구원자를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기 때문에 구원에 대한 인간의 모든 기대가 예수에게 위탁될 수 있었다는 점에 있다. 왜냐하면 구원에 대한 기대의 참된 동기가 그에게서 실행되었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 필요 없는 거예요. 메시아가 필요 없는 거예요. 메시아가 필요 없어. 그에게서 다 실행된 거예요. 이 경우에 예수가 메시아 칭호를 거절했다고 해서 그것을 피할 수 있었을까? 이 질문은 정당하다. 그러나 유대백성이 메시아 사건에서 기대한 구원자는 비록 그것이 다른 방식으로 생각된 메시아 희망이었을지라도 사실상은 예수였다. 그들이 충분하게 몰랐지만 결국은 그 메시아가 예수였다. 유대인들이 생각한 메시아 사명을 예수가 거절함으로써 파생된 위험스런 오해가 메시아 칭호의 표징에서 극복된 후에, 역으로 메시아 칭호는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한 예수에게 위임됨으로써 그 의미가 바뀔 수 있었다. 메시아가 메시아니즘이 예수님으로 인해서 새로운 차원으로, 헤겔식으로 표현하자면 지양, 고양을 뜻한 것이겠죠.

오늘 제가 강의해야 될 마지막 한 패러그래프가 남았습니다. 다음주에서는 4장을 끝마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 한 패러그래프 천천히 읽고 마쳐야 하겠군요.

원시 기독교에 의해 예수에게 붙여진 또 다른 칭호인 사람의 아들, 다윗의 아들, 主 등과 비교할 때 메시아 칭호의 특별한 점은, 타이틀이라고 하는 것 이해하시겠죠. 여러분들도 이것이 낯설 지 모르겠습니다. 예수에게 칭호가 있다니? 칭호가 있다는 것은 알겠지만 그것이 서로 다르다니 똑같지 않느냐? 똑같지 않습니다. 그 칭호와 예수가 맞닿게 된 데는 전역사가 있습니다. 여러 가지 다른 칭호와 비교할 때 메시아 칭호의 특별한 점은 메시아 개념이 예수의 의미를 다층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하는 점입니다. 그렇죠. 가이사 이런 것들은 조금 부분적이라고 한다면 메시아는 다층적이라고 하는 겁니다. 메시아 칭호는 하나님의 통치인 최후 심판을 위해서 재림할 예수가 미래에 갖게 될 기능의 특징을 가리켰다. 따라서 이 칭호는 부활한 主의 현재적 현실성과 관련되었다. 이 부활한 주는 비밀스러운 하나님의 시각에서 이미 현재적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분이다. 심판이 오늘의 현실과 연관되는 문제이니까요. 심판자로서 종말에 오는 그 분이라고 한다면 오늘의 우리의 삶에 개입되는 거죠. 십자가상의 명문은 계속해서 예수의 고난을 이미 그의 메시아 됨과 연결했으며, 또한 지상적 예수를 이미 메시아로서 파악할 수 있게 했다. 메시아 칭호로서 구원의 중재와 하나님 아들의 자격이라고 하는 요소들도 역시 연관되었다. 이것들은 헬레니즘 식으로 각인된 세계에서. 유대적인 세계로부터 시작되었지만 복음이 이제 헬레니즘 세계로 퍼지잖아요. 그러한 세계에서는 원시 교회가 이방인들에게 선교할 때 예수의 의미를 선포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따라서 그리스도 칭호는 널리 변형되어서, 결국 인간 예수와, 그의 등장, 그리고 그의 운명을 완전히 의미심장하게 하는데 포괄적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칭호가 예컨대 바울과 같은 원시 기독교의 유대인 선교사들에게 예수 사신의 전체적인 총괄개념으로 적용될 수 있었다고 하는 사실은 당연했으며, 더구나 그들 선교사들이 유대 전통을 뛰어넘어 이방인을 지향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렇죠. 모든 이들의 구원자로서의 자리, 그런 것이 크리스투스인데 메시아라고 하는 말의 번역이잖아요. 이것이 바로 예수의 복음 선포를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이 사신을 전해들은 이방인들은. 무슨 사신이요? 예수의 복음사신이고 복음전포이고 또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라고 하는 복음이죠. 이런 것을 전해들은 이방인들은 사실 ‘그리스도’라는 단어의 특색이 나타내고 있는 칭호적 의미를 태생적 유대인들 보다는 다소간 불충분하게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겠죠. 유대인들의 메시아니즘은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에 비해서 훨씬 더 강렬했을 테니까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들에게, 헬라지역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는 예수의 이름을 가리키는 구성 요소가 되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사실은 부활 경험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타이틀, 성격에 대한 규정 이런 것들이 한꺼번에 확 된 것이 아니라 부활경험으로부터 다시 천천히, 천천히 또 구약성서도 근거로 하고 이방 헬라에의 배경에서도 작용하면서 확장된 거죠. 메시아 그리스도라고 하는 이 개념이 예수의 아이덴티티를 결정하는 구성요소가 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네 마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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