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강 녹취록 - 4장 예수 그리스도를(5)

사도신경해설 조회 수 2834 추천 수 0 2009.04.05 00:49:01

판넨베르크의 사도신경해설 23강 - 4장 예수 그리스도를(5)

안녕하세요? 오늘 23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라고 하는, 책의 제4장 순서예요. 오늘이면 4장을 마칩니다. 우리가 몇 번에 걸쳐서 이 항목을 같이 읽고 공부했습니다. 핵심은 뭘까요?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신앙고백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초기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았는가 하는 그러한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굉장히 복잡한 흐름들 혹은 그러한 생각들이 연루되어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은 처음부터 그렇게 결정된 것인데 그것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들이 이렇게 저렇게 연결된다고 하는 것이 무슨 말이냐 이상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거기 좀 까다로운 문제예요. 예수님이 선재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칭호문제도 사실은 처음부터 이렇게 결정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이 자리를 잡으면서 붙여진 것이에요. 네 어쨌든 예수님의 정체성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바로 여기에 담겨 있는데 이것이 원래부터 그렇다고 하는 것은 분명한 겁니다. 선재적이라고 제가 설명을 드렸는데요. 그 선재적인 예수 정체성이 역사 안에서 그대로 처음부터 분명하게 들어나지 않았다고 하는 거죠. 이 선재적이라고 하는 그 말도 이 참 간단한 게 아닙니다. 이런 것들 자꾸만 시간적으로 앞에 있었다 뒤에 있었다 이런 방식으로 따라가려고 하면, 이건 도저히 그 신학적 개념안으로 들어갈 수 없고 길을 잃게 되는 것이죠. 그건 전혀 다른 차원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 메시아라고 하는 사실이 아주 점차적으로, 유대교 공동체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다 유대인들이었으니까요. 거기서부터 시작했잖아요. 그래서 유대 공동체라고 말씀드린 것이에요. 유대기독교라고 할 수 있고요 나사렛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이해가 되었고요. 그리고 그런 것들이 헬라지역, 비기독교 지역 디아스포라도 있고요. 헬라인들 쪽으로 가면 서 점점 더 그 의미가 확장 심화된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 그러한 예수님의 정체성이 유대공동체 안과 그리고 바깥으로 헬라지역까지 확장 심화되는 과정에 원래 있었던 메시아 개념들 그런 것들이 영향을 미친 겁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었던 메시아 개념 말이죠. 그리고 헬라인들에게 주(主)라고 하는 개념 이런 것들이 우리가 모든 것을 다 따라잡기 힘든 방식으로 초대기독교공동체가 역사 안에 자리 잡게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거죠. 네. 결국 역사적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이 사실이 헬라파 기독교인들하고 유대인 기독교인들에게 공통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 외는 메시아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거죠. 그런 과정들을 주욱 설명을 했습니다. 지난번강의에서 우리가 읽은 판넨베르크의 책의 마지막 문장이 이렇습니다.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예수의 이름을 가리키는 구성 요소가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한 묶음이 된 거죠. 역사적 예수, 우리와 똑같은 삶을 사신 그 예수가 모든 인류를 구원할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나가 된 겁니다.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 누구에게 지시해서 된 것이 아니고요. 누가 그것을 딱 부러지게 실험실에 실험해서 과학 이론을 증명해 내듯이 한 것도 아니고요. 역사의 과정을 통해서 그렇게 이해되고 해석되고 고백되었습니다. 판넨베르크는 그러한 문제들을 정리를 하면서 마지막으로 두 가지 문제를 명백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두 가지 문제로 정리하는 거죠. 결론이라고 할 수 있겠고 앞에 나온 이야기의 전체적인 요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가지예요. 81쪽 중간 아래 패러그래프 번호 1이라고 쓰여 있는 그곳부터 보겠습니다.

1.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특별히 예수의 구원자적 의미를 드러낸다. 그런 문장으로 시작하죠.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특별히 예수의 구원자적 의미를 드러낸다. 예수가 구원자라고 하는 의미를 드러낸다. 예수는 아주 일반적인 이름이었습니다. 여호수아 그러한 발음으로 되구요. 아주 평범한 이름이었었는데 지금씩으로 하자면 지금씩으로 하면 용섭 명철 지은 이름으로 부르듯이 그러한 이름이었어요. 그러한 이러한 이름이 인류를 구원할 그러한 의미를 갖게 되는데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붙어서 된 겁니다.

이 이름은 이미 우리에게 역사적 예수에 대한 질문이 보여준 결과를 더욱 명료하게 해준다. 즉 예수가 하나님의 미래에 대한 자신의 사신 곧 복음 선포에 직면해서 결단하도록 인간을 강요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결정이 실행되기를 요구했다고 하는 것, 그리고 예수가 하나님의 미래에 안에서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을 통해서 확증되었다는 것, 그러나 또한 예수의 이름 가운데서 구원이, 그것은 곧 하나님과의 미래적 친교를 나누며 그의 부활에서 나타난 새로운 삶에 참여하는 것인데, 그 구원이 예수를 믿는 모든 자와 근본적으로 예수를 신뢰하는 모든 자에게 개방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아이고 문장이 너무 깁니다. 제가 번역을 할 때 독일어의 문장 구조를 바꾸지 않고 그대로 따왔기 때문에 그대로 되었네요. 이런 것들을 좀 단문으로 만들었어야 되는데 그렇게 못한 것 같습니다. 영어나 독일어 이러한 언어들은 특별히 학문적인 진술을 할 때 문장들이 길어요. 관계대명사, 접속사 등등 여러 가지 특별한 문법, 언어구조라고 할까, 문법 그런 구조를 통해서 전달하려고 하는 뜻을 포괄적으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 한국말 문장으로는 조금 어렵죠. 우리는 문장이 한 세 문장이 연될 되어도 복잡해지거든요. 그런데 그쪽 나라의 언어들은 관계대명사, 인칭대명사 등등 그러한 것들로 여러 문장들을 하나로 끌어 모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문장 설명을 좀해야 되겠네요. 제가 앞에서 첫 번째 읽은 문장은 그거는 설명한 그대로구요. 그리스도라고 하는 이름이 예수님의 구원자로서의 그러한 의미를 드러내 준다고 했고요. 이 이름은 우리에게 역사적 예수에 대하여 보여준다. 그다음에 쭉 설명한 거예요. 역사적 예수에 대한 질문, 역사적 예수가 했던 일들 그가 시도했던 일들 그가 경험했던 일들 그런 것에 대한 질문을 그리스도라고 하는 이름이 정확히 설명해 준다고 하는 겁니다. 그가, 예수가 역사, 그의 역사, 공생애 안에서 했던 일에 대한 질문이 많이 있잖습니까? 그걸 설명을 해요.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미래에 대한 자신의 복음 선포에 대해 직면해서 결단하도록 인간을 강요함으로서. 요 문장이요. 이런 뜻입니다. 예수님이 선포한 메시지의 핵심은 하나님의 미래이거든요. 가까이 왔다. 임박해 왔다. 하나님의 미래를 향해서 여러분들이 삶을 돌이켜라 회개해라 메타노이아 해라. 그렇게 하셨어요. 그러한 복음 선포 앞에 서라. 결단해라. 이렇게 사람들에게 요구하셨어요. 그렇게 함으로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결정이 실행되기를 요구했다고 하는 것, 그렇게 하나님의 미래에 돌아선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구원을 일으키신다. 구원하신다. 그게 일어난다. 그거를 선포한 거거든요. 선포 앞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구원이 임한다고 하는 확신을 가진 것이거든요.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서 밀고 들어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표현이 적절한지 모르겠어요. 하나님이 예수의 선포에 직면해서 하나님의 그 미래에 결단하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임하게 하도록 예수가 밀고 들어갔다 이러한 뜻이죠. 그리고 그게 역사적 예수가 공생애에서 행하신 일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가 하나님의 미래 안에서 죽은 자로부터 부활을 통해서 확증되었다고 하는 것. 문장이 지금 죽죽 나열되고 있어요. 지금 읽은 바로 그 이야기는 이런 뜻입니다. 예수가, 혹은 예수의 그러한 선포가 확증된, 될 수 있는 근거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미래 안에서 죽은 자로부터, 하나님의 미래 안에 예수가 있었기 때문에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셨다고 하는 겁니다. 죽은 자로부터 부활이라고 하는 이 사건이 하나님의 미래 안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죠. 여러분. 부활은 지금 당장 죽었다가 산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미래 안에서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거예요. 이런 말들을 어떻게 더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지금 미래라고 하는 말들이 반복되어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미래인거예요. 미래의 힘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요거는 뒤에 가면 비슷한 문장이 나오니까 그런 정도로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예수의 부활,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이 바로 예수의 선포가 분명했다고 하는 사실을 확증한다고 하는 것, 그다음에 또 문장이 이어져요.

또 예수의 이름 가운데서의 구원이. 그 구원은 곧 하나님과의 미래의 친교를 나누며 그 부활에 나타난 새로운 삶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미래적 친교, 종말론적 친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종말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린다고 요한계시록도 이야기하고 성서전체가 그 방향으로 나가고 있죠. 새로운 세계, 그건 부활의 세계이고 생명의 세계인데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친교가 이루어지는 때 인데, 그 이전까지는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도 하나님과 직접적인 친교를 맺을 수는 없는 거죠. 하나님을 볼 수 없다고 하는 말과도 똑 같은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보는 자는 죽는다고 하는 그러한 이야기이기도 하구요. 예수 이름 가운데 있는 구원, 그 구원은 곧 미래적 친교인데 그러한 구원이 예수를 믿는 모든 자와 예수를 신뢰하는 모든 자에게 개방되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열려져 있다고 하는 것이다. 믿는 자와 신뢰하는 자와 두 가지로 구분되어 있는데 이거는 둘 다 비슷한 것입니다. 믿는 것은 믿는 자라고 하는 믿는다는 그 말이 되겠고요. 신뢰한다고 하는 것은 어떤 믿을 만한 근거를 갖고 있는 그러한 차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긴 문장들이 이렇게 한 문장 한 문장 여러 문장이 묶여서 한 긴 복합문이 되어 있어요. 여기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스도라고 하는 이 이름이, 바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질문이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는 그러한 결과들을 분명하게 해준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한 결과들은 제가 설명한, 나열식으로 설명한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건 뭐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죠. 그리스도라고 하는 이름이, 예수의 부활이 그의 사실을 확증한다고 하는 것, 하나님의 미래적 친교가 가능한 그러한 구원이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다. 열려져 있다고 하는 것, 그것을 의미하는,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포괄적인, 그리고 실질적인 의미가 있다고 하는 겁니다. 단순한 게 아니죠.

이러한 구원의 의미는 마치 어떤 다른 현상에도 똑같이 전가될 수 있는 것처럼 외부적으로 예수와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 문장 번역이 매끄럽지 못하군요. 조금 더 나가보겠습니다. 이 구원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안에 있는 구원, 혹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거나 신뢰하는 그런 것을 통해서 얻어지는 구원이요. 그에게 관계되는 것이며 그에게서 출발한다. 이거는 예수에게 집중된다고 하는 거죠.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예수에 대해서 언급한다고 해서 당연히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 내재하는, 그리고 그에 의해서 출발하는 구원의 능력은 이런 방식으로 명시적인 특성을 드러내야 하며, 거론되어야만 한다. 이런 근거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함으로써 우리의 삶이 그에게서만 의미를 획득하게 되며, 그에게서만 완전해지고 구원받는다는 것을 말한다. 여기 뭐 이상한 것 없죠? 이것은 비록 우리의 현존재가 완전해지는 것이 모든 인간의 갈망임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으로는 ‘완전해’*지거나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 사용된 ‘ganz’라는 독일어 단어는 ‘완전한’, ‘전체적인’, ‘통일된’ 등 여러 의미로 사용된다. 참된 게 완전하다는 것은 전체로서만 타당하며, 또한 그 전체가 하나로 통일된다는 점에서만 타당하다. 따라서 한 개인이 구원받거나 완전해진다는 것은 만물을 규정하는 현실성인 하나님의 전체 생명세계와 하나가 된다는 것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중요한 맥락이니까 잘 보셔야 됩니다. 앞에 제가 어떤 문장을 읽으면서 매끄럽지 못하다 그렇게 번역되었다 그렇게 한거하고도 다 그 문장이 말하려고 한거하고도 다 연관되는 거예요.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그냥 예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주어지는 차원이 아니고 또 우리가 불치병에 걸렸다가 다시 병이 낫는다고 하는 이러한 방식이 낫는 거잖아요. 그건 인제 다른 차원에서 구원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건 조금 뭐라고 할까요. 다른 생의학적인 현상이잖아요. 그러한 방식으로 우리의 삶들이 갱신되고 새로워지는 차원의 구원하고는 다르다고 하는 겁니다. 좀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외로웠으니까 외로워지지 않게 된다거나 어디가 부족했는데 채워진다거나 우리가 생각하는 삶의 완전한 모습들이 있잖습니까? 그러한 것들을 채워나가는 그러한 것으로 주어지는 구원하고는 다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거는 예수라고 하는 그 이름을 가진 그 인격체, 그거하고의 관계에서만 가능한 구원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 말은 우리가 완전해지려고 하는 갈망이 있지만 결코 독자적으로는, 우리 스스로는 그렇게 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죠.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우리의 의학기술이 많이 발달해서 우리가 병을 다 극복하고 수명도 계속 연장해서 몇 백 년 몇 천 년 살게 된다고 하더라도 거의 이 땅에서 영생, 거의 무한하게 살게 되는 상태가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는 우리가 완전하다 구원받는다 말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런 문제들은 참 앞으로도 계속해서 우리가 생각해봐야 되는 겁니다. 앞으로 의학이 과학 생물학 등등이 발달하게 되면 인간의 생명이 늘어나는 것은 분명하거든요. 그리고 지금 모든 문제라고 생각되는 것들도 극복될 수 있을 거거든요. 지금 에너지의 문제 생태적 문제 그런 걸로 많이 걱정하고 있는데 이런 것도 극복될 가능성이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론적으로만 보자면 이 안에 물이 있잖아요. 이 물통은 제가 서울에 올라갈 때 주일저녁에요. 오후에 올라갈 때 KTX를 타는데 손님들도 많고 피곤하고 해서 그날 그래서 특별열차를 지난번에 탔는데요. 특별차인가요? 일반실하고 특실, 거기서 준건데요. 한번 마시고 가져온 겁니다. 여기에 물이 있어요. 원리적으로만 보면 이 물에서도 무한한 에너지를 뽑을 수 있다고 합니다. 기술적으로 되지 않아서 그렇죠. 안돼서 그렇죠. 이 안에도 원소가 있잖아요. 원자폭탄 핵에너지 비슷한 것처럼 지금은 핵에너지를 빼낼 수 있는 기술이 우라늄인가요? 그거로만 가능한데요. 원리적으로만 본다면 모든 것이 다 원소이기 때문에 물에서도 그러한 에너지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석유나 석탄이 이러한 것들이 필요 없이 이러한 페트병에 든 물 한 병 갖고도 한 가족이 1년 동안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르죠. 꿈과 같은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앞으로 1억년 후의 우리의 후손들에는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죠. 5천 년 전 우리 조상들이 지금 우리 시대를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과학의 발전들을 본다면 인류의 미래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그러한 방식이 된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독자적으로 우리 스스로의 능력으로 완전해지거나 구원받지 못한다고 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통한 우리 기독교 신앙의 토대에서 보면 그런 거죠. 우리의 삶은, 왜 그런지는 제가 다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그거는 그런 것 죽 설명하다보면 설교 방식으로 나갈 수 있고요. 너무 이 이야기가 질질 끌게 되는 그러한 염려가 있어서 거기 까지만 하겠습니다. 다만 한마디만 거기서 보충한다면 그렇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말하는 이러한 요소들이 그렇게 독단적이지 않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통한 구원이 인간의 독자적 구원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사실이 일반적이지 않다고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거는 여기서 더 이상 설명하지 않겠어요.

우리의 삶에는 우리의 운명이 강요하는 매우 많은 것들이 아직 성취되지 않은 상태로 존재한다. 따라서 이미 시작된 여러 종류의 것들이 분쇄되며, 형태를 획득한 것들이 위기나 태만, 혹은 오판으로 인해서 사라진다. 결국 이것이 제가 긴 설명을 안한다고 했는데 이미 판넨베르크 이 책에 그런 설명이 나오고 있군요. 모든 것은, 그리고 가장 충실하게 실행된 생명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죽음 안에서 개방된 질문으로서만 남아있게 될 조각들이다. 충실하게 실행된 생명, 완전한 복지, 장수무병, 무병장수 이러한 모든 생명이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죽음이라고 하는 사실 앞에서는 도대체 살고 있다고 하는 것이 뭐냐고 하는 질문을 만드는, 그러한 질문을 할 수 밖에 없는 그러한 조각이라고 하는 그러한 구분들이라고 하는 것이죠. 그러나 예수는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우리의 삶에 내재해있는 파멸의 극단적 상황을 그가 여전히 그 안에서 살았던 하나님의 임박과, 하나님의 임박, 하나님의 가까이 오심과 중재시켰다. 하나님의 임박은, 가까이 오심은 지상적 삶이 성취되었다 해서 실현되는 게 아니며, 또한 그것이 분쇄되었다고 해서 무기력해지는 것도 아니다. 어쨌든지 우리의 현존은 이런 점에서 볼 때. 어떤 점이요? 하나님의 임박, 하나님과의 친교, 온전한 친교 이런 것들은 이 땅에서의 삶이 성취되었다고 실현되는 것도 아니고 분쇄되었다고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이런 점에서 볼 때 우리의 현존은, 여기서 이러한 삶은 우리의 존재는 현재 이렇게 있는, 현존이라고 하죠. 우리의 현존은 피안적 성취를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 피안적 성취. 우리 내부에서 나오는 것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데서부터 오는 것으로 부터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이죠. 생명이 우리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 있다. 이게 이해가 되시는가요? 이런 쪽으로 이야기하는 철학자나 생물학자 물리학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기독교인이다 아니다 상관없이 생명의 본질에 천착하다보면 우리 내부에 유기적 어떤 시스템으로는 해명할 수 없는 힘들이 작용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거든요.

피안적인 성취. 다른데서 오는 힘을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는 거죠. 이것은 우리의 삶이 이 세상으로부터 저 세상으로 도피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 존재의 완전성에 대한 신뢰로부터 발생하는 이 생명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이 옳다.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을 완전하게 한다고 하는 그러한 신뢰에서 발생하는 이 생명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옳다. 무슨 말인지는 정확하게 전달되었죠? 우리 안에서 스스로 우리의 생명을 완성시킬 수 없고 그것은 피안적인 성취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 삶을 부정하고 저 세상으로 도피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죠. 오늘 여기에서 하나님이 우리 생명을 완전하게 한다는 그러한 희망, 그러한 신뢰, 그러한데서 거기서 발생하는 생명, 그러한 삶으로 살아가는 것이 옳다고 하는 거죠. 이 완전성은. 무슨 완전성이요? 우리의 존재의 완전성에 대한 신뢰인데 하나님이 우리들의 생명을 완전하게 한다는데 대한 신뢰라고 했잖아요. 우리의 완전성, 우리 존재의 완전성은 우리 생명의 현재적 리얼리티 가운데서 명료하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존재의 완전성이 지금 여기서 잘 먹고 잘사니까 아 이것이 완전한 생명이다라고 하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거죠. 그걸 알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죠.

오늘 김수환 추기경의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땅속으로 들어갔어요. 장례 절차 전체 를 지상파 방송사 세군데서 다 실황중계를 했습니다. 로마가톨릭의 힘이 느껴지는 부분이에요. 개신교에서는 그러한 존경을 받는 존경을 받는 성직자가 없잖아요. 기독교인의 숫자는 훨씬 많은데도, 지금은 많이 비슷해졌습니다만 그래도 많겠죠. 우리에게는 이러한 김수환 추기경에 버금할만한 그러한 성직자가 없습니다. 한경직 목사님, 오래전에 돌아가셨는데요. 그분이 돌아가셨을 때도 이러한 범국민적인 추모를 받지 못한 것 같아요. 훌륭하신 분, 어려운 시기에 운명하셔서 거국적인 관심을 받는 것 같습니다. 좋은 일이죠. 현상이죠. 그분이 땅에 묻히는 장면이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다 그렇게 가야 할 텐대요. 이 땅에서의 삶이라는 것이 다 그렇게 다 그런 것으로 끝나잖아요. 이 땅에서 우리가 아무리 높은 지위나 완벽한 삶의 형태를 이루었다고 하더라도 그런 것들로, 지금 여기서 말하는 존재의 완전성으로 확인해 볼 수 없습니다. 그러한 방식으로 완전성은 가능하지 않는 것이죠. 이런 것은, 오늘 책 그대로 좀 읽어보면요. 계속됩니다.

단편적인 것을 통해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자에게 오직 단편적으로만 지시되고 있으며, 부분을 통해서 전체를 내다 볼 수 있는 사람들에게 단편적으로 이 완전성이 지시되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느끼는 평화 이런 것들 있잖아요. 그러한 순간들이 있잖아요. 그런 것도 부분인거예요. 그런 것을 통해서 전체를 내다볼 수 있는 사람이 있잖아요. 하나님과의 평화, 아 그게 얼마나 지극한 평화인지를 조금은 우리가 내다 볼 수 있잖습니까? 그것도 전체가 아니라 단편적으로 지시될 수 있는거죠. 그 완전성이라고 하는 것 말입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의 미래에 대한 예수사신 즉 복음선포를 통해서, 그리고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약속되고 보증되어 있다. 우리 존재의 완전성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 나라, 그게 우리의 완전한 존재인데요. 거기서 이루게 될 우리의 존재 완전성인데요. 하나님 나라를 잘 먹고 잘사는 곳이라 생각하면 착각이죠. 이건 기초적인 말씀인데요. 여기서 우리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극대화 하는 방식으로는 그건 우리가 우리 존재의 완전성을 착각할 수 길입니다. 예수의 복음선포를 통해서 죽은 자의 부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약속되고 보증되어 있다. 이 완전성이. 다른 차원의 문제다.

이에 근거해서 우리의 현재 생명이 처한 상황, 경험, 기회는 이 완전함의 부분으로서 존재하고 경험될 수 있다. 이것은 자기 자신에게서는 그 토대를 가질 수 없는 것들이다. 이 부분적인 것들 우리가 여기서 경험하고 있는데 그 부분적인 것만 우리가 여기서 경험하고 알고 있을 뿐이지 그 부분을 확대한다고 해서 전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전체는 여전히 우리들에게 약속되어 있는 거지요. 그건 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네 이것이 판넨베르크가 얘기한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신앙고백을 다룰 때 명백히 해야 할 첫 번째 문제였습니다.

그다음 두 번째예요. 책 83쪽 중간 패러그래프입니다.

2.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은 여러분 책에는 그리스도인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인’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人) 이러한 것으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이신 입니다. 우리말로는 조금 오해될 가능성이 있겠군요. 다시 읽겠습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은 우리의 삶이 예수에게서 ‘구원’받고, 완전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신뢰의 토대를 예수에게 둔다는 것만을 뜻하는 게 아니다. 그건 하나의 문제구요 그게 바로 첫 번째로 제시한 그 문제입니다. 그건 아주 분명한 거죠. 그러나 그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게 두 번째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은 이를 뛰어넘어 기독교 신앙이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와 희망들과 결합한다는 것을 뜻한다. 네 좀. 어렵지만 중요한 문제가 제시되고 있습니다. 다시 그 문장을 읽겠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은 이를 뛰어넘어. 무엇을 뛰어넘어요? 1번에 이야기한 것을 뛰어넘어. 그리스도 예수에게만 완전한 삶에 대한 토대를 둔다고 하는 것을 뛰어 넘어, 바탕에 두고 그런 것을 뛰어넘어 그런 것에 머물지 않고 뛰어넘어 기독교 신앙이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와 희망들과 결합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 그리스도라고 하는 헬라어가 원래 이스라엘의 메시아 개념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은 당연히 이스라엘의 역사, 그들의 희망 그거하고 깊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련을 맺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이러한 희망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희망들은 우리가 앞서 살펴본 대로 예수를 통해서 변화되었는데, 어떻게 변화 되었어요? 그들의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주의적인 그러한 시오니즘에 근거한 그러한 메시아니즘으로부터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고 그 나라의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회심하고 돌아서는 자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임한다고 하는 차원으로 들어가는 건데요. 이 변화의 핵심이 가까이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돌아선다고 하는 이것은 그가 유대인이냐 아니냐 상관없었고 그가 바리새인이냐 일반인이냐 상관없었고 그가 의로운 사람이냐 세리냐 상관없었던 것입니다. 앞서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메시아니즘에서는 그것이 매우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의롭고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만 하나님에게 인정받는 그러한 사람들, 그러한 차원의 메시아니즘이라고 한다면 그런 것이 다 허물어지는 거죠. 해체되는 거죠. 그러한 조건과 아무런 상관없이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돌아서는 것이죠. 이건 패러다임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죠. 누구나 가능한, 앞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각에서는 약속받은 의롭다고 인정받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것이었다. 다른 것이죠. 이렇게 변화되었어요. 메시아적 희망들을 갖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예수가 이러한 희망*들을 물리쳤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희망들이 예수현상과 결합되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희망들이 결구 예수 현상과 결합되었기 때문이다. 이 말이 신학적인 것이라서 여러분들이 조금 낯설게 생각이 되겠는데요. 그렇게 어려운 이야기도 아니고 새삼스런 이야기도 아닙니다. 앞에서 이야기된 것들이거든요. 변화라고 하는 것은 제가 설명을 드렸는데요. 그렇게 된 것은 예수님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희망을 배척하고 물리치고 대립하고 그렇게 되기 때문만이 아니라 뭐 그런 부분도 있죠. 안식일에 대한 새로운 이해라든지 앞선 자 뒤진 자라든지 그가 세리와 죄인과 먹고 마신다고 하던지 드러난 일들로 볼 때 그렇게 이스라엘 사람들의 희망과 대립적인 부분들이 있지만 그런 것만이 아니라 그런 면도 있지만 그 이스라엘 사람들의 희망이 예수에게 나타난 일들, 사건, 그의 가르침과 그의 행위와 그에게 일어난 모든 하나님의 구원 통치들 그런 것들하고 결합되었기 때문 인거죠. 제가 설명을 잘 했나요? 결합되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희망이 예수를 통해서 달라진 거죠. 달라지게 된 거죠.

여기서 말하는 희망은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정치적 메시야 상을 말한다. 즉 이스라엘의 메시야적 희망(messianische Hoffnung)이다. 비록 이런 희망들이 예수에 의해 거절되었지만 결국에는 예수에게 메시야 칭호가 부여되었고, 원시 기독교는 이 연관성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따라서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기독교의 기독론적인 구원론은 유대인들의 메시야적 희망 가운데서만 그 의미가 충만해질 수 있다.

여기서 메시야 표상의 내용은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이해가 예수의 사신 곧 복음 선포를 통해서 변화된 것 보다 훨씬 심층적으로 바뀌었다. 메시아 표상, 메시아에 대한 이해 이런 것하고 하나님에 대한 이해, 이 두 가지 변화가 이스라엘에게 있었는데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바뀐 것보다도 메시아의 표상에 대해 바뀐 것이 훨씬 심층적이었다고 하는 겁니다. 그렇지만 일종의 연속성이, 즉 예수에 대한 그리스도 칭호의 위임을 의미심장한 것으로 드러내 보인, 그리고 실제로도 가능하게 한, 한 연관이 있다. 잔존한다. 번역이 직역이래서 의미가 잘 전달도지 않는군요. 메시아 표상과 하나님이해에 이런 것들이 변화가, 변화의 깊이가 다르기는 했지만 메시아에 대한 표상이 더 심층화 되었지만 그러나 그 사이에 연속성이 있다. 완전히 두 사이가 연결되지 못한 그러한 상황으로 빠진 것은 아니다고 하는 거죠.

그리스도 칭호가 예수에게 부여되어 새로운 의미를 획득했음에도 불구하고 원시 기독교는 그리스도 칭호에서 유대의 메시아 희망이 예수를 통해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연관된 거죠. 연관이 남아있는 거죠. 달라지긴 달라졌는데 그러나 유대교적인 메시아 희망이 예수를 통해서 실현될 수 있다고 이렇게 초기 기독교인들이 생각한 거죠. 그러니까 초기 기독교와 유대인들 사이에는 연속성과 불연속성과 이런 것들이 같이 병행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현재 있는 유대교에 있어서는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데 초기 기독교인들에게는 그랬습니다. 그러한 생각, 희망을 안고 초기 기독교회가 점차적으로 자리를 잡게 되고 유대교와 점점 거리가 멀어지게 되면서 기독교라고 하는 종교가 역사안에 등장하게 되는 거죠. 천천히 그러한 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유대의 메시아 희망이라는 불빛에서만 예수 현상에 내재한 구원의미가 완성된다고 생각할 수 있었으며 또한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이러한 기대연관이 아니고서는 아마도 역사적인 예수현상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에 대한 본질적인 요소들이 결코 드러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유대적 희망과 연결되는 것이 없었다면 예수에게 일어난 모든 사건과 현상들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들이 드러나지 않았을지 모른다고 하는 겁니다. 유대교적 뿌리가 없었다면 예수 사건은 불가능했을 수도 있다고 하는 거죠. 유대교적인 그러한 역사, 희망 그러한 메시아적 불빛에서만 예수의 그리스도 현상,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이 본질적인 문제가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한 점에서 초기 기독교가 유대인들의 성경인 구약을 그대로 자기들도 정경으로 받아들인 것은 당연한 것이며 아주 잘한 일입니다. 간혹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기독교 공동체가 유대교 경전을 좀 빼고, 빼야 되지 않느냐 그러한 주장들이 심심치 않게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정통 기독교는 그러한 주장들을 배척했습니다. 그 이유가 다 바로 이런데 있었기 때문이죠. 유대교의 메시아적 희망이라고 하는 불빛이 아니었다고 한다면 그것과 완전히 대립되어서 시작했다고 한다면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가장 핵심적인 문제가 자리를 잡지 못했을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물론 지금 유대인들은 유대교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지 않습니다. 그건 우리가 다 인정하는 거고 또 그걸 부정할 수 없는 거죠. 그래도, 그들이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초기 기독교가 그들과 같은 자리에서 시작했다고 하는 사실, 그리고 그러한 역사적 사실만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메시아적 불빛, 그러한 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었다고 하는 사실, 이걸 우리가 그냥 간과해도 좋을만한 것은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건 핵심이니까요.

따라서 이러한 관점에서도 역시 기독교회는 이스라엘의 신앙이 보여준 역사를 상속받아야 하며, 그리고 예수 현상과 예수 역사의 의미가 충만하게 유지되기를 확실히 원한다면 이러한 유산을 의식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오늘 여기 판넨베르크가 ‘예수 그리스도를’이라고 하는 항목을 정리하면서 두 가지 문제를 확실하게 했습니다. 하나는 우리라고 하는 존재, 우리의 완전성, 우리가 완전해져야 하잖아요. 우리의 생명도 지금 완전을 향해서 나가고 있죠. 나가고 있다기 보다도 완전을 원하고 있죠. 완전을 향한 희망을 걸고 있죠. 누구나 다 그렇지 않습니까? 잠시 여기서 이렇게 70년 80년 살다가 가는데 이것을 우리는 완전이라고 말할 수 없잖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생명을 좀 더 연장시킨다고 해서 완전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고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그러한 신앙 안에 들어있는 핵심적인 요소는 우리 존재의 완전성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임박을 선포함으로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 하나님의 미래를 향해서 돌아서라고 요구했고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을 통해서 이것을 확증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 근거하고 있다.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우리 존재의 완전성이 하나님의 나라의 미래를 선포한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다고 하는 겁니다.

두 번째는 그것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이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와 희망, 이러한 것하고 결합되어 있다고 하는 겁니다. 첫 번째 것은 기독교 신앙의 배타적 정체성이라고 한다면 두 번째 것은 유대교와의 유기적 연대성, 혹은 보편성,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역사적 인물이었던 예수에게 그리스도라고 하는 칭호가 결합됨으로서 우리는 생명의 완전성에 대한 새로운 세계를 맛보았고 그리고 또한 그러한 것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유대교의 희망과 끊임없이 연대해야 한다고 하는 그 가르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141 신학과 철학 9장 초기 관념론과 신학 2009-04-25 4188
140 기독교를 말한다 3장 십자가와 부활사건 2009-04-25 4406
139 기독교를 말한다 2장 역사적 예수 2009-04-25 4354
138 기독교를 말한다 제1장 초대교회의 토양 2009-04-25 4065
137 기독교를 말한다 머리말과 차례 2009-04-25 3944
136 신학과 철학 8장 칸트 철학과 신학 2009-04-18 4321
135 사도신경해설 29강 녹취록 - 7장 본디오 빌라도에게..(1) file 2009-04-11 3886
134 신학과 철학 7장 철학의 신학적 착상과 그 영향 [2] 2009-04-10 4520
133 사도신경해설 28강 녹취록 -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2) file 2009-04-05 3922
132 사도신경해설 27강 녹취록 -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1) file [3] 2009-04-05 3656
131 사도신경해설 26강 녹취록 - 5장 하나님의 외아들...(3) file 2009-04-05 3084
130 사도신경해설 25강 녹취록 - 5장 하나님의 외아들...(2) file 2009-04-05 2930
129 사도신경해설 24강 녹취록 - 5장 하나님의 외아들...(1) file 2009-04-05 3422
» 사도신경해설 23강 녹취록 - 4장 예수 그리스도를(5) file 2009-04-05 2834
127 사도신경해설 22강 녹취록 - 4강 예수 그리스도를(4) file 2009-04-05 3091
126 사도신경해설 21강 녹취록 - 4장 예수 그리스도를(3) file 2009-04-05 2946
125 사도신경해설 20강 녹취록 - 4장 예수 그리스도를(2) file 2009-04-05 2979
124 사도신경해설 19강 녹취록 - 4장 예수 그리스도를(1) file 2009-04-05 2946
123 사도신경해설 18강 녹취록 - 3장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5) file 2009-04-05 2909
122 사도신경해설 17강 녹취록 - 3장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4) file 2009-04-05 3088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