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넨베르크 사도신경해설 제24강 - 5장 하나님의 외아들, 우리의 주를

안녕하세요.

오늘은 판넨베르크 책으로 보자면 제5장, ‘하나님의 외아들 우리의 주를’ 이라고 하는 항목이구요. 우리의 강의 순서에 따르면 24강이 되겠습니다. 오늘부터 한 서너 번에 걸쳐서 이 5장 ‘하나님의 외아들 우리의 주’를 공부하게 되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제목들은 너무 간단한 거라서 이야기할 게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외아들’ 우리 주 당연한 이야기잖아요. 이런 것들은 우리는 주로 설교조로 많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다. 우리의 주님이시다. 그러니 우리가 그를 믿고 구원을 받는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죠. 그런 정도로 이야기하자면 이러한 단어에 대해서는 더 길게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신앙적인 교훈을 받기 위해서는 조금 더 이야기할 수는 있습니다. 판넨베르크는 인제 이 책에서 그러한 신앙적 교훈 그러한 설교, 그런 쪽으로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겠죠.

우리가 여태까지 공부하면서 죽 검토했습니다만 우리가 세례 받을 때 공부했고 신앙 고백했던 그러한 내용들이 단순히 우리가 믿는다고 하는 그러한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 유대교와 로마의 종교, 사상, 문화 이런 것을 바탕에 두고 진리론적인 대답을 한 그러한 결과다 하는 거죠. 이 두 관계요. 이 두 가지 관계를 우리가 잘 생각을 해야 됩니다. 어떤 관계냐 하면 설교의 내용, 설교가 될 만내용, 당연히 중요한 거죠. 우리가 믿어야 될 내용, 강화하고 확신을 가져야 할 내용이라고 한, 한 부분이 있고요. 그것이 어떤 과정을 가지고 형성되어야 하느냐 하는 역사적 배경이라고 하는 면이 있는 거죠. 이 두 가지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거거든요. 우리는 주로 먼저 한 이야기에만 주로 머물러 있습니다. 일반 평신도들이야 신학하고는 상관없이 설교와 큐티 방식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마치 어떤 그 유명한 화가의 그림을 보고 감상하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 처럼요. 일반 미술 감상자들은 그런 정도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까? 렘브런트의 그림을 보면서 거기서 어떤 그 세계를 경험할 수 있겠죠. 그러나 전문가들은 그런 정도에서 머무르지는 않죠. 그 주변에서 있었던 미술사조라든지 렘브란트나 그러한 유명한 화가들의 고유한 예술적인 세계에 등등 여러 가지 복합적인 그러한 것들을 충분히 연구를 합니다. 이 두 가지가 완전히 나눠지면 안 되겠죠. 혼동되어서도 안 되지만, 분리되어서도 안 되고 서로 하나가 되면서 그림의 세계로 깊게 들어가는 그러한 것들이 미술 세계서도 있듯이 기독교 신앙에서도 그렇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라고 하는 이러한 신앙 고백에 도달하게 된 초기 신기독교 신학의 역사적 배경이 무엇이냐고 하는 거죠. 이런 것들을 우리는 거의 다 놓치거나 무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예수님을 잘 믿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하기는 해요. 하여튼 고 두 부분들을 염두에 두고 판넨베르크의 이 책안으로 좀 들어가 보겠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이 나와요.

이러한 공부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의 효과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 내용 자체를 공부하는 거예요. 자체, 그 내용이 말하려고 하는 심층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하나 있고요. 두 번째 효과는 부수적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어쩌면 더 본질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는 건데요. 진리의 세계에 들어가는 방법을 배우는 겁니다. 그 방법을 배우면서 동시에 이 두 가지가 같이 연결되죠. 앞에서 이야기한 그 내용자체로 들어가는 거하고 그 다음 그 내용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배운다고 하는 것, 이게 두게다 중요하거든요. 두 번째가 어쩌면 더 중요할지 모른다고 하는 이야기는 무슨 뜻인가 하면 이렇습니다. 그러한 공부를 배움으로서 우리는 스스로 이제는 다른 것을 연구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하는 거예요. 그런 점에서 이게 더 중요한 거죠. 그것이 동시에 이런 공부에서 이루어져야 됩니다. 판넨베르크가 이야기하는 이 내용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면서 동시에 들어가는 방법을 배우는 거죠. 그러면 이게 일치가 되면서 우리가 어떤 진리와의 만남이라고 하는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그러한 경험들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공부의 희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신앙도 근본적으로 보면 공부거든요. 불교 선승들이 화두를 붙들고 구도 정진하는 것도 이것도 사실은 근본적으로 공부에요. 어떤 세계로 들어가는 훈련이라고 하는 거죠. 그러니까 고걸 여러분들이 잘 생각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개신교 신자들에게 특별히 나타나는 한계라고 할 수 있는데 신앙을, 구도적인 차원, 구도, 공부 다 통하는 이야기들인데요. 이런 쪽으로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거예요. 대신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하는 그러한 확신, 그러한 감정, 그러한 뜨거움, 거기에 매달리는 거죠.

자 이제 우리 오늘 판넨베르크가 이야기하고 있는 공부의 내용 속으로 한번 들어가 보겠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올 거예요.

교회의 여러 전승 중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은 오늘날 많은 이들에 의해 받아들이기 매우 힘든 진술 중의 하나로 간주된다. 똑같은 이유에서 또 다른 어떤 이들은 이러한 신앙 고백적 표현에서 신앙의 합법화를 위한 결정적인 기준을 찾는다. 양극단이죠. 한 쪽에선 말이 되지 않아 이렇게 부정한다면 한쪽에서는 이거야 말로 우리 기독교 신앙이 다르다고 하는 사실의 증거가 아니냐? 이렇게 접근하는 거죠. 예수에 대한 양측 입장의 이런 진술이 일치하고 있는 점은 예수의 본질을 초자연적인 것으로 주장한다고 하는 것이다. 부정하는 쪽이나 그것을 기독교 신앙을 합법화 하는 증거로 삼으려고 하는 쪽이나 일치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을 초자연적인 것으로 전제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자에 속한 사람들은 말이 안된다 하는 것이고 후자에 속한 사람들은 그러기 때문에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정당성에 대한 증거다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쪽이 이 초자연적인 요소를 거절하거나 의심스럽게 생각한다면, 다른 한 쪽은 이 주장을 확신함으로써 양측이 서로 같은 것을 전제하면서 결과는 다르게 구별된다. 이런 주장, 예수의 본질을 초자연적인 것으로 전제함으로서 갈라진 이러한 주장들은 예수의 평면적 인간성을 신화론적으로 입체화시키는 것이다. 판넨베르크의 설명입니다 설명이 더 필요한 문장이기는 한데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기에 그냥 지나가겠습니다. 초자연적인 것으로 말하는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우리와 똑같이 사셨잖아요. 그런 점에서는 이것은 표면적인거거든요. 그것을 초월적인 초자연적인 삶을 넘어설 수 있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칭호속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평면적인 차원으로 신화적인 입체적인 것을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중요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신학적인 해명, 보충설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상은 예수를 우리와 같은 한 인간으로서 이해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적 모습으로 위장된 예수의 초지상적 본질이라고 하는 이러한 표상은 현대의 현실성 이해와 불일치하는 것처럼 보인다. 네 그렇죠. 신앙이 돈독한 사람들일 수록 예수에 대한 생각, 표상들이 전적으로 여기, 이런 쪽으로 기울어져 있을 겁니다. 예수님은 초지상적인, 초자연적인 그러한 분이라고 하는 생각으로 꽉 젖어 있는 거죠. 그러면 이 문제가 예수님의 본질이 초자연적이라고 하는 그러한 단어만 갖고서 옳다 그르다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는 훨씬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기 때문에 설명이 필요한 것라고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기독교 신앙에 나타나고 있는 그러한 현상들을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칭호로, 예수님에게 그러한 칭호를 붙일 때 나타나는 신앙적 현상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받아들여지기 힘든 그러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 거죠. 일단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원시 기독교의 칭호를 의심스럽게 생각하는 이들을 다음과 같이 비난하는 것은 좀 지나치다고 본다. 즉 이러한 의심은 기독교 전승에서 핵심적으로 작용한 예수의 하나님 아들됨*에 대한 이해를 완전히 놓쳐버린 것이라고 말이다.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됨이라고 하는 이 말에 대해서 조금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너무 낙인찍지 말아야 된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그 사실을 핵심적으로 잘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냐 몰아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죠. 여기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됨이라고 하는 표현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쓰는 게 아니라서 제가 역주로 그것을 설명했습니다. 제가 독일어를 억지로 제가 번역을 한건데요. 다음과 같습니다. 책 86쪽 아래쪽에 보면 역주를 이렇게 달았습니다.

예수의 하나님 아들됨(Gottessohnschaft Jesu-고테스조온샤프트 예주)이라는 말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갖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 말을 지지하는 전통적 입장이나 회의하는 입장이 자칫 빠지기 쉬운 오류는 예수의 초월성을 이것과 연결시키려고 한다는 데에 있다. 판넨베르크는 이 신앙 고백적 표현이 오히려 예수의 인간적 현상에 대한 해석이라고 본다. 이 칭호의 전승사를 통해서 그 사실을 따라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설명이 아래에 전개되어 있다.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됨이라고 하는 이 사실, 혹은 이 개념에는 그렇게 되는 여러가지 전승사적 배경이 있다고 하는 거예요.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져서 어느 때부터 초기 기독교인들이 혹은 사도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의 초자연적 특성을 말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어요. 오히려 이 땅위에서 살았던 삶의 모습을 신학적으로, 신앙적으로, 혹은 본질을 유대의 전통적 신앙에 근거해서 표현해보려고 했었던, 해보려고 한 그러한 결과물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죠. 제 좀 말이 막혔네요. 표현들이 쉽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이런 거예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그러한 신앙고백은 그분이 이 땅위에 살면서 초자연적인 능력을 많이 행했다. 본질적으로 초자연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기에서, 이 땅에서 살아가시고 가르치고 행동하신 그 분의 특성을 말해보려고 했었던, 설명해 보려고 했었던, 혹은 해석해 보려고 했었던, 그러한 노력의 결과다. 이 이야기죠. 없는 것을 만들었다고 하는 뜻은 아니다. 여기서 핵심은 그러니까 이거죠. 하나님의 외아들이라고 하는 것을 자꾸만 초자연적인 능력이나 현상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걸 전제해놓고 그렇기 때문에 그 말이 우습다. 그 말이 안 된다. 냉소적으로 보거나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이 대단한 거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둘 다 오류에 빠지는 겁니다. 하나님의 외아들이라고 하는 말이 왜 도대체 예수님에 대한 칭호로 붙여지게 되었는지 그걸 지금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실체를 알고 믿어야 되겠죠. 이러한 문제들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뒤에 나오겠습니만 동정녀 탄생 이런 것들도 이게다 비슷한 이야기거든요. 무조건 말도 안 돼 내모는 것이나 아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냐? 신 아니냐? 이렇게 이야기하면 둘 다 잘못된 것이죠. 동정녀 탄생이라고 하는 이 초기 기독교의 신앙고백에 담겨있는 실체적 진실을 알아야 되는 거예요. 여기 하나님의 외아들 이것도 지금 그런 차원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단 오늘 여기 글을 좀 따라 가 보겠습니다. 너무 기독교 신앙 안에서 그 하나님의 외아들이라고 하는 그 말을 의심하고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뭐 기독교 신앙을 알지도 못하고 그러느냐 그렇게 너무 몰아붙이지 마라. 의심하는 것에 대해서 너무 이상한 눈으로 보지 말라고 하는 것이죠.

이러한 의심은 훨씬 적절하게 평가받아야만 한다. 그렇게 의심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의심스러워하는 생각은 예수의 초월성만 강조함으로써 거부된 전통적 방법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의 특색에 담긴 근원적인 의미를 올바르게 인식하지 못한 결과다. 제가 계속 반복해서 말씀드린 양쪽 다의 문제인 거예요. 무조건 예수님의 초월성만 강조하여 그러니까 대단하지 이건 지금 오늘 세계에서는 더 이상 용납되지 않는 그런 주장은 거부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무조건 의심하는 것은 그런 것은 근원적인 문제를 잘 모르기 때문에 오는 오류다. 이미 지적된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전통적 표상을 초자연적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경우에는 이 칭호의 동기를 알아낼 수 없다.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 칭호를 바로 예수의 인간적 현상에 대한 해석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그것은 이미 역사적으로, 그리고 석의적으로 제시된 바 있다. 성서해석, 성서주석학적으로 이미 그거는 이미 나와 있는 사실이라고 하는 거죠. 무엇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칭호는 그 분의 초월성, 초자연적인 그런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적인 현상, 우리말로 하면 인간적이라고 하면 조금 이런 신앙차원에서 다른 색깔로 보이기 때문에 적절하지는 않는데요. 그러니까 초월성이라는 말과 반대되는 뜻으로 여러분이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인간적인 현상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이러한 것이 성서 주석적으로 이미 드러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신학에 대한 깊은 공부가 없으신 분들은 처음 들어본 말이라고 생각하실 거예요. 처음 들어본 말이라고 해도 괜찮습니다. 신학이 오래된 학문이구요. 오래되었다고 해서 무조건 뛰어났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역사적 배경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는 것은 학문의 깊이를 말해주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18세기부터 벌어진 성서에 대한 역사비평이후로 신학은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이 있게 다뤄졌습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요. 성서를 역사적으로 본다고 하는 것은 그것을 하나의 일반 고대문서로 똑같이 올려놓는다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문서들을 비평할 때는 거기에 끼친 여러 가지 쓴 사람의 개인적인 여러 가지 문제들, 정치 상황적인 문제들 여러 가지가 고려대상이 되지 않습니까? 성서도 그렇게 연구되어 왔어요. 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성서 주석적 연구도 충분히 된거죠.

이러한 해석은 원시 기독교에서 그 독특한 역사를 보이고 있다. 신약성서 본문의 최종 형태로부터 시작해서 예수에게 소급되기까지 예수의 하나님 아들됨에 대한 기독교적 논증이 형성된 일련의 시기를 추론할 수 있으며, 또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양식(樣式)에서 표현되고 있는 동기들을 추론할 수 있다. 성서 주석, 현재 주어진 경전이요. 테스트를 중심으로 합니다. 물론 외경에도 있고 주변의 관계된 고문서들도 있지만 어쨌든 중요한 것은 정경으로 들어와 있는 성서 텍스트인데요. 그게 완성된 텍스트로부터 거꾸로 추적해 가는 거예요. 거꾸로. 어떤 과정을 통해서 편집되었는지 구전 된, 처음에는 다 구전되었을거에요. 서신들은 구전이 아니라 처음부터 기록된 거지만 그 것도, 그 안에도 구전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의 사건, 복음서 내용들은 다 구전이죠. 거꾸로 올라가서 그 칭호들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서 형성되었는가 하는 그러한 연구가 나온 겁니다. 이게 다 합리적으로 해명될 수 있는 거죠. 이러한 양식을 이해해가는 변화도, 이러한 양식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이 명제죠. 명제라고 하는 게 더 이해하기 좋을지 모르겠군요. 이러한 형식,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이러한 명제, 형식은 역시 단순히 자의적인 게 아니라, 그냥 막 어쩌다가 붙인 이야기가 아니라 그럴 수 밖에 없는 그러한 어떠한 사실들이 내재해 있다고 하는 거죠. 이 독특성의 고유한 의미는 이러한 해석사에서 중요한 문제다. 네 여기까지 우리가 맛을 보았어요. 하나님의 외아들 우리 주, 우리 주는 아직 정식으로 다뤄지지 않았고 외아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문제인데 아직 본격적으로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맛보기만으로도 우리는 굉장히 중요한 신학적 단서를 배운 거예요. 하나님의 외아들이라고 하는 것을 초자연적인 추월적인 그런 것으로 전제하고 이렇쿵 저렇쿵 시시비비 왈가왈부하는 것은 이거는 잘못된 거다. 근원적인 의미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 근원적인 의미를 알면 이것으로 인해서 무의미하다고 팽개치거나 이것이 기독교의 합법한 증거가 된다. 이렇게 고집을 피우지도 않을 겁니다. 그런 식으로 의미를 들어가야 하는데 그러한 학문적 연구들이 신학이죠. 많이 되어 있습니다. 이제 천천히 판넨베르크가 그러한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이 문제를 어떻게 설명하는지 따라 가겠습니다

처음부터, 처음부터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외아들이라고 하는 이 칭호가 형성되던 그 초기를 이야기하는 거죠. 그때부터 ‘아들’로서의 예수라는 특징, 특성 이것은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이라는 생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아들이라는 칭호에서 핵심적인 요소는,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예수의 선포가 다시 선포자에게 되돌아 왔다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식하고 불렀다고 하는 이러한 사실이 바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이 명제의 전제라고 하는 겁니다. 거기서 부터 시작했다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버지로 불렀는데 이게 중요한 거죠. 이 칭호가 다시 예수를 향해서 돌아온 것이죠. 아들이라고 하는 것으로 돌아와야 되겠죠. 당연한 논리죠. 물론 예수가 그렇게 한 것처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그럴듯하게 말한다고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이것은 예수의 독특성이었다. 특별하게 나타난 예수라고 하는 분의 하나님 이해인거죠. 예수는 하나님에 대한 그의 독특한 언급을 통해서 제자들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했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하나님 아버지라고 한 전통이 없다는 말인데요. 그거를 내가 지금 자신 있게 말씀드릴 준비는 못했습니다. 구약성서의 예언자나 그 누구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적이 없을까요? 여기 지금 판넨베르크의 설명에 따르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었고 아직 예수님의 독특성에 속한다고 하고 그 방식으로 제자들을 세상 사람과 구별했다고 하는데요. 이런 것을 전제한다면 아마 예수님에게서 독특한 하나님 이해로 자리 잡은 게 아버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복음서에 있는 예수의 가르침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이 가르침에서 예수는 오직 ‘아들’로서 자신의 특색을 드러낸다. 이러한 특색은 예수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선포함으로써 그의 공동체가 이에 상응해서 그를 ‘아들’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에서 가장 명백하게 설명된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인식하고 호칭했고 그래서 그를 따르는 공동체는 당연히 예수를 아들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그 사실을 알 수 있다고 하는 것이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물론 아들로서의 예수에 대한 명백한 언급이 그를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간주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성격들을 갖는다.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 아버지라고 하는 이 연관성이 연결되어 있잖아요. 아버지로 불렀기 때문에 아들이 되었잖아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외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고 관계에서 머무르지 않고, 처음에는 그랬는데 머무르지 않고 더 확장되어 간다고 하는 거죠. 말하자면 ‘하나님의 아들’ 칭호에는 변화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칭호는 이미 전통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칭호가 이미 유대의 구약성서적인 전통이었다고 합니다. 이 칭호는 메시야 칭호와 거의 같은 의미였다. 시편 2편에 부분적으로 그 흔적을 보이고 있는 유대 왕의 즉위식에서 야웨는 (기름부음 받은) 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너는 내 아들이니, 오늘 내가 너를 증거한다(시 2:7). 여기서 왕의 육체적 뿌리가 야웨와 연결되어 있다고는 생각되지는 않았다. 당연하죠. 왕이 육체적으로 하나님하고 연결되었다고 누가 생각했겠습니까? 다른 의미가 있는 거죠. 메시아적인 구원자, 그런 책임 그런 것도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에서는 그렇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中및 新제국의 에집트에서는 왕들이 神 레(Re)의 육체적 아들들로 인정되었다. 실질적으로 그래요. 육체적인 관계라고 생각했네요. 그런데 시편 2편에서는 분명하게 양자삼기가 언급되고 있다. 이집트의 신의 아들과 유대의 신의 아들의 개념의 차이점이 뭐냐 설명하고 있는 중입니다. 설명하는 이유는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칭호가 거기에 연관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야웨의 ‘아들’로서 왕은 야웨의 위임으로 세계통치를 받아들인다(시 2:8, 110:1). 하나님 야웨의 위임을 받아서 그런 정도로 이집트에서는 실제적 육체적 아들로 인정되었다. 그런 차이가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 그러니까 기독교는 이집트의 신의 아들이라고 하는 개념이 아니라 유대교에서 언급된 아들, 이것이 온 거죠. 이러한 생각은 원시 기독교에서 예수에게 적용되었다. 바울은 로마서 1장3절 이하에서 이미 예수에게 적용된 이러한 고백양식을 인용한다. 이미 있는 것을 인용한다. 참고로 복음서와 서신, 이런 것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구요. 그 당시에 많은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적 양식들이 있었습니다. 이걸 복음서 기자나 서신서 기자들이 서로 인용하기도 하고 변형하기도 하고 그렇게 하면서 초기 기독교 문헌들이 작성되었어요. 그러한 내용에 보면 직접 기자가, 복음서 기자나 아니면 서신서 기자가 쓴 내용도 있고 다른데 이미 알고 있었던 내용을 갖다가 인용한데도 있었고 그렇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이부분에서 이미 예수에게 있는 이런 고백양식,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그걸 인용 하는거죠. 말하자면 예수는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로 인해서 ‘능력적인 하나님의 아들’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렇게 바울이 예수의 본질을 신학적으로 특성화 했습니다. 여기서 부활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격을 갖게 되는 시점으로, 또한 양자삼기의 시점으로 작용한다.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 들여졌으니까요. 양자 삼음이 되었으니까요.

다른 한편으로 후기 전통에서 이 시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자격을 갖게 되는 시점은 예수의 세례로 소급되었다. 바울에 인용한 전통에 의하면 부활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그러한 자격을 얻게 되는 시점이 되는데 또 다른 전통이 초기 기독교안에 있었어요. 그것은 바로 예수가 세례를 받을때 이미 자격을 얻게 된다고 하는 그러한 전통입니다. 마가복음 1장11절에 따르면 예수가 세례받을 때 시편 2:7 말씀이 하늘에서 그에게 들려온 것으로 보도되고 있습니다. 그게, 그 내용이 바로 아들에 대한 것이죠. 여기서 예수는 메시야의 공식적 활동을 이미 시작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예수의 동정녀 탄생에 대한 이야기에서 우리는 이러한 발전이 계속되는 상황과 마주치게 된다. 즉 이 이야기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근원을 예수의 탄생에까지 소급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자꾸만 소급이 되죠. 올라가죠.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되심이라고 하는 것이 부활로부터 시작해서, 바울의 문서에서 볼 수 있는 이야기죠. 부활, 조금 더 가서 세례, 공생애 시작할때 세례로 가구요. 조금더 가서는 탄생에까지 올라가는 어떤 시기의 변화가 초기 기독교 안에 있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연구되어 있는거죠. 그러니까 앞서에 지적한 것처럼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초자연적인 그러한 사건으로 보고 가타부타 말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하는 거죠. 그것은 오히려 예수의 지상에서의 일들, 현상들 그런 것에 대한 신앙적 해석인거죠. 말이 되나요? 정확하게 전달을 했을까요? 어쨌든 그 아들 됨이 점점 시기적으로 소급해 올라갑니다. 그게 세례까지 올라갔어요. 누가는 1장35절에서 예수는 하나님 이외에 그 어떤 인간적 아버지가 없다고. 세례까지 갔다가 부활에서 세례, 탄생까지 올라가죠. 탄생에 대한 이야기가 누가복음 1:35절 이하 이야기인데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칭호를 자세하게 설명한다. 그래서 동정녀 마리아라는 그러한 전승이 들어오게 되는 거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주장의 근원이 계속적으로 예수에 관한 초기 이야기로 소급되고 있는 이러한 전통이 말하려고 하는 핵심은 다음과 같다. 결론이군요. 결론이라기보다 요 단락에서 핵심이군요. 예수는 이미 하나님에게서 그 권능을 위탁받았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도록 위탁받은 자라고 말이다. 핵심이죠. 외아들이라고 하는 말이 담고 있는, 특히 그 자격이 소급되고 있다고 하는 이러한 근원에서 볼 때 하나님에게서 그 권능을 위탁받았고 아까 왕도, 이스라엘왕도 위탁 받은 거잖아요. 하나님의 통치를 위탁받았잖아요. 하나님의 통치를 위탁받은자, 바로 여기에 놓여 있는거죠. 이러한 것은 초기 기독교가 그런데 관심을 갖고 예수에 대한 칭호를 확대해가는 겁니다. 이러한 관심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가리킨다 하겠다. 예수의 부활은 부활 이전에 발설한 예수의 말을 확증했으며, 그 말을 추가적으로, 또한 소급해서 합법화 했다는 것을 말이다. 결국 부활이 예수님의 모든 것을 해명하는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키워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부활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경험을 통해서 초기 기독교인들이 그 이전에 행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로구나 확신하게 되었고 그 말을 점점 소급해서, 앞으로 올라가서 예수님의 모든 것에 대한, 그리고 그의 모든 말씀에 대한 합법성을 찾게 된 것이죠.

재미있습니까? 은혜를 받고 싶은데 그러한 생각만 한다면 이러한 공부는 조금 드라이(dry)할 수 있겠죠. 오히려 은혜를 떨어뜨릴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강조하고 믿고 하면 되지 거기에 따른 기독교인들의 여러가지 해석들이 필요하겠느냐. 그러나 우리도 딱딱한 음식도 먹어야 되거든요. 그래야만 오늘 이 시대에도 우리 기독교 복음을 바르게 변증할 수 있습니다. 오늘 사람들이 기독교가 잘못 오해해서 말할 수 있는 초자연적 그런 것들에 신앙의 초점을 두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 거거든요. 그들을 두려워서라기보다도 진리가 바로 그 원래 사실들을 근거로 두고 말해야 되니까요. 당연히 우리는 초기 기독교 안에서 벌어진 신앙운동의 중심으로 치고 들어가야 되는 겁니다. 그런 것 없이 늘 변죽만 울리고 있다고 한다면 마치 건강하지 못한 사람을 끌어 모을 수는 있을 겁니다. 마치 노인들에게 비싼 건강보조식품을 팔기 위해서 아첨을 떨기만 하면 그런 분들을 데려올 수 있는 것처럼, 그리고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이 사이비 이단들에게 쉽게 빠진 것처럼, 기독교 신앙도 일부의 사람들을 우리가 그렇게 끌어들일 수 있는 건강하게 이 세상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방식으로는 안 되거든요. 기독교 중심을 우리는 끊임없이 이야기해야 되겠죠. 네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칭호의 말하려고 하는 핵심이 뭐냐 그런 것들을 판넨베르크가 어떻게 정리하는지 보겠습니다. 88쪽 중간 패러그래프부터 시작하는 지점이예요.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근원적으로 예수가 육체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점을 특별한 방식으로 말하려는 것은 아니었으며, 이런 것은 오히려 이집트의 파라오에게나 해당되는 것이었죠. 아니었으며 또한 예수를 일종의 신적인, 초인간적인 존재로 그려내려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 이야기한 것들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린 유대의 왕은 확실히 한 인간이었다. 유대적 전승 영역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예수의 기능만을, 즉 하나님의 세계통치를 실현하기 위한 그의 개입을 특징적으로 말한 것뿐이지 그의 본성(Natur) 나투어 영어로 내츄어를 말한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의 위임, 세계 통치를 위한 그러한 위임,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개입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었지 그의 본성이 초월적이었다 그것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었다고 하는거죠.

이것이 헬라적 표상영역에서는 달랐다. 여기서 유대적인 것이 아니라 헬라적인 영역에서는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인간 예수에게서 ‘일어난’, 그러나 그와는 구별된 초인간적-신적 본질(Wesen)로 특징화 되었다. 이러한 신적 본질이 뜻하는 바는 인간적 형태를 취하기 위해서 육체 가운데로 ‘보냄’을 받았다는 것이다. 헬라지역에 들어와서 이게 약간 다른 뜻으로 해석되는 거죠. 따라서 이미 바울은 로마서 8장3절과 갈라디아서 4장4절을 통해서 이를 밝히고 있다. 사도신경 역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표현을 의심 없이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다. 선재적인, 즉 예수의 지상적 탄생 이전에 하나님의 영원성 가운데서 이미 존재하고 있는 하나님의 본질로서 말이다. 이 본질은 예수 탄생에서 인간적 형태를, 그리고 인간적 본질을 취한 그것이다. 한 패러그래프만 더 읽어보겠습니다.

이게 헬라지역쪽으로 복음이 전파되면서 이 유대적인 전통에서 이해되었던 그런 것들이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는 거죠. 유대적인 차원에서는 예수의 인간적 현상들, 그런데 한정해서 이해가 되었는데 헬라지역에 오면서 이것이 더 본질적인 차원으로 변형이라고는 이해할 수는 없고 새롭게 해석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선재성이라고 하는 사상을 받아들이기에 앞서 우리는 우선 예수가. 네 거기는 나중에 하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헬라지역에서의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개념들이 어떻게 새로운 차원으로 해석되느냐 하는 문제를 끌고 가기 때문에 여기까지 오늘 정리를 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요 뒷부분에서 말하려고 하는 내용도 일단은 제가 보기에는 정확하게 전달이 되었다고 봐요. 그 다음에 핵심은 그거죠. 유대의 전승에서 유대교 세계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들은, 아들, 초월적인 그러한 차원을 말하려고 하는 것 아니었다고 하는 것, 예수의 본질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였구요. 그런데 이 헬라지역에 오면서 조금 다르게, 표현이 정확하지 않습니다. 다른 것은 아닌데, 심화 확대되었다고 볼 수 있겠죠. 그래서 이렇게 되는 거죠. 앞서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성격이 처음에는 부활로부터 시작해서 소급되었다고 했잖아요. 부활사건으로 인해서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되었는데 조금 더 소급되어가요. 세례 받을 때부터 이미 하늘로부터 그러한 소리가 들려왔다고 하게됩니다. 그러한 예수 부활에 대한 경험, 거기서 부터 예수의 앞서의 말까지 다 그러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위를 갖게 되는 거죠. 더 소급되서 예수님의 탄생에까지 가서 인간적인 아버지가 필요없는 그러한 존재로 이해가 되었구요. 거기까지가 인제 유대적 세계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정확하지 않는데요. 헬라지역으로 복음이 오면서 더 소급되는 거예요.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됨이라고 하는 것이 차근 차근 올라가다가 더 소급되어서 이제는 선재적인거예요. 역사 이전까지 가게 되는 거예요. 요한복음같은데는 최초에 로고스로서 예수님이 세계 창조의 주체가 되었다고 하는 기록도 있는데요. 그러한 말씀도 있는데 그것도 요한복음이 헬라철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거죠. 선재성인 거죠. 선재성, 그런데 이게 어떤 쪽으로 더 전개되고 있는지 이런 것들은 다음시간에 같이 더 읽고 공부해야 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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