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강 - 제6장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1)

안녕하세요? 오늘은 27강입니다. 판넨베르크책으로는 제6장이 되죠. 제목이 이렇습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조금 예민한 문제이죠.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이 두 가지가 한국교회에서는 예수님의 본질을, 좀 더 정확하게 하면 예수님의 그 초월성을 확인하는 그러한 내용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었으니 당연히 일반 사람들의 출생과는 다르게 남자 없는 여자의 몸만으로서 출생했다 그러한 이야기죠. 이러한 동정녀 탄생의 문제는 뜨거운 감자처럼 다루어질 때가 많습니다.  이건 좀 난처한 거죠. 믿기 힘든 그러한 내용인데 믿지 않을 수도 없고요. 분명히 성경에 있고 사도 신경에 나와 있는데요. 그렇게 고대 문서들, 문서라기보다도 성서와 사도신경이 말하고 있으니까 아주 중요한 기독교 문서가 이런 것들을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는데 그거를 믿을 수 없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좀 곤란하지 않습니까? 그런 방식으로 하면 부활도 못 믿고 아무것도 못 믿는 것이 아닌가? 예수님의 재림도 못 믿고 그렇지 않냐? 요런 문제가 좀 까다롭습니다.

모든 것이 동일한 무게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동일한 무게라는 표현보다도 이렇게 말을 해야 되겠군요. 어떤 것이 더 우선적인지 어떤 것이 그것에 따라오는 귀결인지 그걸 좀 구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구성하고 있는 많은 요소들이 있잖아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든지 우리가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다 등등 수많은 것들이 다 기독교 교리인데요. 이러한 것들이 다 독립적으로 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 연결되어 있어요. 어떤 것에서 어떤 것이 나오고 차츰 그렇게 단계적으로 발전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부활과 동정녀 탄생, 이 두 가지 다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개입으로 인한 사건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당연히 구분되어야 한다. 그것을 어떻게 구분하냐? 그런 질문이 가능하죠? 그런 것은 신학이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고요. 그리고 그렇게 구분하기 시작하면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을 다 산산이 조각을 낼 수밖에 없지 않느냐. 그런 또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이런 문제를 제가 이 시간에 다 해명할 수는 없고요. 여태까지는 우리가 사도신경을 공부하면서 어느 정도 방향은 주어졌다고 앞으로도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될 테니까 이런 문제를 가지고 깊이 들어가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이 문제는 이렇게 정리하고 넘어가야 되겠어요. 우리가 어떤 사실을 믿되  어떤 사실은 기독교 교리를 이야기합니다. 믿되 정말 그것이 초기 기독교회가 말하려고 했었던 핵심이냐 아니냐는 고거는 구분할 줄 알아야 되겠죠. 무슨 뜻인지 전달이 되었죠? 정말 말하고 싶어 했던 것이 무엇이냐? 그거 말입니다. 그거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잖아요. 그거를 구분해내야지. 그렇지 않는 것까지 다 포함해서 무조건 믿고 따라야 된다고 주장하면 그러면 그것은 범신이지 참된 진리에 근거한 기독교 교리에 대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자면 마가복음 끝부분에 나오는데요. (막16:18) 독을 마셔도 믿는 자는 아무런 해가 없다. 이러한 구절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사실적인 진술로 믿는 사람은 없잖습니까? 그러한 방식으로 초기 기독교공동체가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했는지 그것을 찾아내어야 되는 거죠. 오늘 여기 같이 공부하게 될 단락과 연결시켜서 말씀드린다고 한다면 정말 초기 기독교회가 동정녀에게서 예수님이 출생했다고 하는 사실을 말하려고 했었느냐 하는 그러한 질문을 해야 된다고 하는 겁니다. 여기서 일단 대답을 드린다면요. 그거는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부활에 대해서는 어떤가? 그것은 확실하게 그것을 말하려고 했습니다. 이런 것을 잘 정리해서 설명할 수 있는 게 신학의 영역인데요. 오늘 우리는 강의로 27강, 그리고 사도신경의 해설이라는 판넨베르크의 책에 따르면 제6장 이 부분을 통해서 그러한 문제들을 정확하게 따라가려고 합니다. 이 대목은 별로 그렇게 길지 않더군요. 그래서 두 번에 나누어서 하겠습니다. 책을 좀 보실까요?

3세기의 로마 교회는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는 세례고백 양식을 여전히 사용하고 있었다.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는 한 문장이죠. 이러한 세례고백양식, 세례를 받을 때 고백하는 고백문, 양식을 여전히 사용하고 있었다. ‘여전히’라고 하는 것은 그게 인제 변한다고 하는 거죠. 3세기 까지는 그것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뒤로는 조금 달라집니다. 달라진 사연도 있는 거거든요. 우리는 지금 이것이 왜 달라지는지는 별로 생각하지 않고요. 그전에 이렇게 한 문장으로 있었다는 것도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재미있죠. 다음을 조금 더 보겠습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사도신경에는 하나님에게 연관된다는 것과 (성령으로 잉태하사) 하나님의 역사라고 하는 것의 강조이죠. 성령으로 잉태하사 그런 부분이 있고요. 사람에게 연관된다는 구절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이런 것이 서로 구별되어 있습니다. 3세기 로마교회의 세례고백양식에서는 하나로 되어 있었는데 지금 우리는 나누어진 사도신경을 갖고 있습니다. 이 표현양식의 두 구조, 성령으로 잉태하사라고 하는 거, 하나님과 연관된다고 하는 거고요.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이것은 인간에게 연관된다고 하는 것이죠. 마리아가 중요하니까요? 두 부분이, 이러한 표현양식의 두 구조. 이것은 원래 하나로 묶여 있었다. 하나였다.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이렇게 되어 있었던 것이 성령으로 잉태하사 그 다음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이렇게 나눠진 것입니다.

이런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로 있다가 둘로 나누어졌다는 사실은 두말 할 것 없이 분명하다. 즉 예수의 실존이, 그의 예수됨이, 바로 그 됨, existence 실존이 하나님으로부터, 즉 성령에 기초했으며, 그리고 그는 동시에 바로 인간적 방법으로 마리아에게서 출생했다는 의미이다. 이것으로 이미 오늘 우리가 6장,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라고 하는 이 사도신경의 이 단락을 다 공부한 거나 마찬가지 입니다. 가장 핵심인 것을 우리가 지금 짚으면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의 출생은 하나님과 연결되고 동시에 인간적 방법으로 진행되었다. 이거죠. 초기기독교인들이 말하려고 했던 핵심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문제가 한 두 마디로 끝나고 다 해결될 만큼 간단하지 않다는 거죠. 그걸 이제 판넨베르크의 설명을 통해서 우리가 천천히 따라가는 겁니다.

여기서 명백한 사실은 1세기의 교회에서 동정녀 출생이 영지주의자들의 생각과는 반대로. 잘 들으셔야 되요. 예수의 참된 인간성을 징표하는 것으로서 인정되었다는 점이다. 동정녀라고 하는 이 표현은 어떤 초자연적인 출생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참된 인간성, 인성 베레호모라고 하는 거죠. 베레 데우스 참된 하나님 베레호모 참된 인간. 이 참된 인간적 실존을 말하려고 하는 핵심용어였다고 하는 거죠. 1세기에서요. 동정녀 마리아라는 거죠. 우리가 알고 있었던 것하고는 정반대죠. 우리는 그것이 오히려 인간적 한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초월성, 그러니까 예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하는데 처음 시작이 그렇지 않다고 하는 거죠. 그걸 우리가 잘못알고 있는 거죠. 그러면서 잘못알고 있는 것을 기초로 해서 봐라. 예수님이 동정녀에게서 태어났으니 정말 그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냐? 그렇게 강조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것 입니다. 좀 예상외죠? 그런데 이게 영지주의자들의 생각과 반대되는 거였다고 하는 거죠. 그게 중요합니다. 일반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의 참된 인간성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그러거든요. 이렇게 본다면, 영지주의, 노시스티즘 gnostisism 영어는 g 발음을 잘 하지 않는데요. 노스티스즘이라고 하는데요. 해도 될 것 같은데. 그러한 영지주의자들이요 영지주의자에 대한 설명은 제가 이 시간 설명하지 않습니다. 간단하게 말한 다면요. 헬라철학의 태두라고 할 수 있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근거해서 이 세상을 이원론적으로 보려고 하는 그러한 초기 기독교의 전반적인 세계이해의 한 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기독교에도 큰 영향을 끼쳤고요. 그러한 영향들이 성서안에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들이 교회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상당한 세력을 확보했습니다. 그들에 의해서 가현설이 기독교안에서, 물론 그것이 이단으로 정죄되었습니다만 오랫동안 기독교의 한축을 담당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의 출생을 인간적인 방법으로 오신 것으로 보기 힘든 것이죠. 그들은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인간일 수 있느냐? 이 땅에 살았던 예수님은 참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라기보다 가현되었다. 도케시즘이라고해서 가현설입니다. 그렇게 나타난 것뿐이다 라고 했는데요. 그들과 투쟁한 교부들은 이 영지주의자들이 생각을 교회에서 밀어내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구원자가 실제 인간으로 출생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가상적 몸으로 살았거나 아니면 인간과 가상적으로만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사람들은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리스도를 우리인간과 똑같은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 하는 거죠. 그런 주장이 이해가 가기는 갑니다. 이렇게 경솔한 건가요. 그렇게 표현해줘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와 똑같이 화장실가구 말이죠. 그렇다고 생각하면 그 분의, 예수님의 거룩성이라고 할까요? 경외심 그런 것이 좀 떨어지는 것 같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이게 좀 미묘하면서도 중요한 문제가 담겨 있어요. 지금 화장실에 가냐 안가냐 정말 쓸데없는 질문인데요. 그런 것과 상관없이 초기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을 온전한 인간으로 이해했습니다. 베레 호모에요. 참된 인간이에요. 조금도 인간적 속성이 손상되지 않는 그러한 예수님을 이해했습니다. 바로 그 분이 동시에 베레 데우스 참된 하나님으로 이해된 거죠. 도대체 이 두 가지가 한 인격체 안에 하나로 종합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기독교론에서 가장 핵심적인 논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의 인간성을 좀 약화시켰다. 약화가 아니라 거의 부정했고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동정녀에게서 인간의 방식 아닌 방식으로 예수님이 출생할 수밖에 없었다는 그런 결론에 도달하게 된 거죠.

한마디만 오늘 우리 기독교 신앙과 연관해서요. 한국 기독교인들은 거의 다 영지주의자들이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초기 기독교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교부들의 치열한 투쟁을 통해서 기독교 신앙의 건강을 지켜내기 위해서 쫓겨난 영지주의자들의 신앙이 오늘 한국인의 정서에 깊이 들어와 있습니다. 예수님의 인간적 본질을 전혀 용납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죠. 이 동정녀 탄생이. 이런 거죠. 예수님이 인간과 똑같은 방법으로 출생했다고 하는 말을 용납하지 않는 거죠. 그러면 남녀의 성적 관계를 통해서 예수님이 이렇게 잉태되고 그렇게 예수님이 출생했냐? 질문이 가능합니다. 그건 질문할 필요도 없어요. 사실은요. 예수님의 출생이 인간과 똑같다는 말은 그걸 전제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아버지가 누구냐 그런 것들은 성서가 관심이 없는 거고요. 요셉이라고 하는데 요셉은 복음서에서도 거의 다뤄지지 않고요. 그러나 굳이 우리가 예수님의 육체적 아버지가 누구냐 따진다고 한다면 요셉이라고 하는 것이 옳겠죠. 물론 성서는 요셉이 마리아와 동거하기 전에 마리아가 잉태되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그건 나중에 들어오게 된 전승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러한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기독교가 나온 게 아니라 거꾸로 돌아가는 거예요. 거꾸로. 거꾸로 나중에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으로부터 신앙이 발생해서 점점 앞으로 가서 결국은 예수님의 출생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시겠죠. 예수님의 출생사부터 신비로워갖고 점점 점점 하나 하나 단계 단계 거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고 이러한 프로그램에 따라서 예수님이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는 거죠. 요걸 이해하셔야 되요. 거꾸로예요. 그러면 맨 마지막이 무엇입니까? 부활의 현현에 대한 경험이거든요. 거기로부터 십자가 공생애 앞으로 세례 주욱 넘어가서 출생까지 나오게 되는 겁니다. 어디까지가 역사적 객관성을 담보하고 있는 건지 그런 것은 더 토론해봐야하는 겁니다. 신학적인 문제인 겁니다. 예수님은 그건 짚고 넘어가야 될 문제입니다. 인간과 똑같은 방법으로 출생하셨다. 이거는 뭐 그러냐 그럴 수 있느냐 없느냐 그럴 여지가 없습니다. 그건 초기 기독교가 어떤 일이 있어도 놓치지 않았던 그런 부분입니다.

이들의 생각에 따르면, 영지주의자들이요. 불변의 하나님이 시간 속에서 출생한, 가변적인 고통을 당하고 죽어야 할 인간과 실제로 하나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가현이죠.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습니다. 이에 반해 ‘2세기의 反영지주의 교부들’. 여러분들 책을 갖고 있으면 잘 보십시오. 99쪽이예요. 2세기의 反영지주의 교부들1) 의한 그때 누구냐 하는 것은 제가 초기 교부사에 대한 것을 검토하지 않고 강의를 시작했기 때문에 말씀을 드리지 못하겠습니다만. 이름이 나오면 누구라고 말씀드리겠는데요. 오리게네스인가요? 상당히 앞부분인것 같은데요. 터툴리안은 좀 뒷부분인것 같고요. 반영지주의 교부들 때문에 예수님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참된 하나님, 참된 인간, 반영지주의, 영지주의를 극복하고 기독교가 영지주의 영향을 받았지만 거기에 빠져들지 않고 극복함으로서 새로운 하나님 이해에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2세기의 反영지주의 교부들 의한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아들 자신이 마리아라는 여자를 통해서 출생했다고 진술되었다. 밑줄을 쳐 놓으세요. 핵심이예요. 영지주의자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적인 것과 연결될 수 있느냐 그걸 부정한 반면에 이 세계의 반영지주의 교부들은 하나님의 아들 자신이 마리아라고 하는 여자를 통해서 출생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출생 사건에서 동정녀라는 사실은 이를 불쾌하게 생각하는 현대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별로 강조되지 않는다. 동정녀는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마리아가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이런 것들은 신학적 훈련이 없으면 되지 않죠. 우리는 마리아보다는 동정녀가 중요한 것이죠. 일반 신자들 생각은요. 원래 기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무조건 믿고 있으니까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모르겠어요. 그걸 무조건 믿으라고 그걸 믿지 않으면 종교재판도 당하고 그런 일들도 많이 벌어졌어요.

예수 출생이 동정녀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은, 그런 고백이 실제로 있지 않아요? 당연한 일이라기보다는 타당한 일이라고 보아야 된다. 그렇게 고백할 수 있다고 하는 거죠. 조금 혼란스러운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좀 더 나가보겠습니다. 즉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다른 인간들과 같은 방식에 의해 출생하지 않았다는 것은 헬라시대의 사람들에게는 극도로 명백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기독교 복음이 헬라지역으로 넘어가면서 거기서 당연히 특별한 방식의 출생에 대한 전승들이 나오게 된다는 이야기죠. 이교도의 신화들은 제우스의 아들들인 페르세우스와 헤라클레스의 경우와 같이 중요한 인물이나 영웅들의 신적인 유래를 보도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예수는 삼손(삿 13:5), 예레미야(렘 1:5), 하나님의 종(사 49:5) 처럼, 그 ‘출생’이 선택된 고대 이스라엘의 위인들에게까지 소급되어야만 한다. 특별한 방식으로 태어난 고대이스라엘의 위인들까지 소급되어서 해석되어지죠.

동정녀를 통한 메시야의 출생을 이사야가 선포하지 않았던가? 물론 거기는 동정녀라기보다 젊은 여자로 나와 있죠. 결국 구약성서의 헬라어 번역에서 그렇게 언급되고 있다(사 7:14, 칠십인역, 마 1:23 인용). 원래는 젊은 여자였는데 헬라어 번역으로 가면서 동정녀라고 하는 것으로 바뀐 것 같습니다. 자 여기까지가 첫 번 패러그래프였어요. 첫 패러그래프에서도 참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했던 것을 허물어뜨리는 그러한 내용들이 많았습니다. 너무 충격 받지는 마시고요. 이미 이러한 문제들은 신학에서 다 정리된 그런 내용들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한국교회에는 이런 문제로 시시비비 쓸데없이 논란을 벌일 때가 많이 있고요. 그렇습니다. 참 어리석은 일이 아닐까요? 이미 지동설이라고 하는 사실이 밝혀졌는데도 천동설을 무조건 주장하는 사람들하고 정서적으로 비슷한 것 같습니다 물론 신학계라고 하더라도 근본주의에 속한 사람들은 이러한 말을 용납하지 않겠죠. 그건 여러분들이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첫 번 패러그래프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이 말은 예수님의 초자연적 출생을 뜻한다고 하기보다도 오히려 반대로 예수님의 인간적 출생을, 더 정확하게는 예수님의 인간적 그러한 온전성을 말하려고 했던 그것에 그 뿌리가 놓여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의 동정녀 출생에 대한 주장은 이와 달리 그의 완전한 인간성을 제한하는 것처럼 간주되고 있다. 그렇잖아요. 초자연방식으로 출생했다고 하면 인간이 아니잖아요. 인간은 그렇게 태어나지 않잖아요?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가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에 와야만 했는지 결코 알 수 없는 일이다. 여기서 이렇게 또 따져 물을 수 있어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분인데 그거 동정녀에게서 예수님이 출생할 수 있도록 할 능력이 없냐? 그럴 수 있는 게 아니냐? 이런 말이죠. 그렇게 말하기 시작하면 사실은 끝이 없죠. 끝이 없는 것은 두 번째 치고 그것을 초기 기독교에서 말하려고 하지 않는데 핵심이 있습니다. 만약에 초기 기독교인들이 바로 그것을 말하려고 했으면 우리는 그렇게 믿어야죠. 동정녀에게서 태어났다고 믿어야죠. 초기 기독교인들이 아주 실질적으로 그런 신앙으로 살았다면 말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이것이 반영지주의 교부들에 의해서 영지주의자들을 배격하면서 나온 그런 신앙고백 등등 연관성에서 볼 때 동정녀에게서 포커스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마리아라고 하는 여자에게 포커스가 있다는 것 더 중요합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인간적인 방식으로 출생하셨다고 하는 것을 강조하려고 하는 거죠.

무엇보다도 예수의 동정녀 출생 전승은 역사성이라는 점에서 심각하게 의심을 받았으며, 이런 전승의 경우에 그에 앞서 발생한 사건이 사실적인 것으로 주장되고 있기 때문에 역사적 의심이 그렇게 간단히 폐기되지는 않는다. 이건 뭐 신학적으로 좀 복잡한 문제라서 이 문장이 딱 귀에 들어오지 않죠? 그냥 지나가도 됩니다. 이 동정녀 탄생의 전승은 앞의 어떤 중요한 사실에서 나온 것인데 이 중요한 사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게예요. 미리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사실이 초기 기독교의 핵심에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에 따른 귀결인 동정녀 탄생인 그것도 금방 예수님의 인간적 현실을 강조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 것들이 쉽사리 떨쳐지지 않는다. 그런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조금 천천히 중심으로 들어갑니다. 문제와 연관되어 있는 성서와 초기 기독교의 신학, 이 문제 안으로 들어갑니다.

예수의 동정녀 출생에 대한 전승은 오직 두 신약성서 본문인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에서만 발견된다.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그 이야기가 안 나와요. 정말 중요한 거라고 한다면 복음서가 빼놓을 리가 없잖아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빼놓지 않잖아요. 바울과 요한은 다소간 차이가 있지만 이에 반대하는 입장을 명확하게 견지했다. 이것도 의외죠? 바울과 요한은 동정녀 출생에 대해서 반대하는 의견을, 입장을 견지했다고 하는 겁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갈라디아서 4장 4절을 보면 그는 여자에게서 출생했고 율법 아래서 행했다(갈 4:4). 결코 동정녀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 율법을 행했다는 그러한 인간적인 삶을 그대로 살았다고 하는 겁니다. 예수의 동정녀 출생에 대한 전승이 근원적으로 예수가 다른 이들과 특별하게 구별된다고 하는 점을 말하고자 했다면, 바울은 예수가 다른 인간들과 같았다는 점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동정녀 출생에 대한 전승이 구별되게 말하는 것은 분명하니까요. 바울은 그러나 같았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고 반대하거나 뭐 그런 입장인거죠.

바울이 예수의 기적적인 출생, 동정녀 출생에 대한 표상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는가를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그는 사라를 통한 이삭의 출생과 연관해서 이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갈 4:23, 27, 29). 그러나 그는 이 문제를 예수에게 직접 적용시키는 게 아니라 약속의 상속자인 기독교인들에게 일반적 의미에서만 적용시키고 있다(갈 4:28). 이러한 언급들은, 나중에 시간이 있으면 갈라디아서 4장 그 부분을 읽어보면 좋겠어요.2) 제가 미리 좀 읽어볼 걸 못했습니다. 나중에 좀 해야 되겠네요. 이러한 언급들은 바울이 예수의 동정녀 출생에 대해서 알지 못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두 가지 가능성이 열려 있는 거죠. 알았을 수도 있고 몰랐을 수도 있고. 알았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을 반대하기 위해서 여자에게서 출생해서 율법아래 행했다 말할 수 있는 거고요. 아니면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냥 일반적인 의미에서 그냥 출생의 문제를 이야기한 거다. 예수 출생에 대해서 이렇게 간접적으로 이야기한 거다. 그렇게 보는 거죠. 또한 요한복음에서는 예수의 동정녀 출생에 대한 전승을 논쟁적으로 풍자하고 있는 일종의 분기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초기 기독교의 이런 흐름과 저런 흐름들이 뒤섞여 있다고 하는 거죠. 전체적으로 기독교인에 대한 언급이라 할 수 있는 요한복음 1장13절은 기독교인을 가리켜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인간의 뜻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증거’ 된 자들이라고 진술한다. 이 진술은 말씀의 성육신에 대한 문장(1:14) 바로 앞에 놓여 있다.

고 구절은 제가 확인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혹시 번역을 착각해서 잘못했는가? 아닌가? 기독교인을 가리켜서 했는데 기독교인이 아니라 그리스도라고 했는지요. 독일어로 그리스도를 크리스투스라고 하고 기독교인을 크리스트라고 하거든요. 오히려 영어로는 크라이스트, 그리스도잖아요.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을 크리스트, 이게 독일어하고 영어하고 좀 다릅니다. 독일어로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고 영어로는 그리스도, 크리스트 제가 번역을 하면서 착각을 했을 수도 있으니까 확인하려고 해요. 요한복음 1장 13절이요. 제가 번역을 맞게 했군요.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네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게 맞습니다. 요한과 바울은 신학자들이거든요. 이들은 동정녀 출생에 대해서 몰랐거나 알아도 반대했다. 그런 흐름들에 대해서 반대했다. 그런 이야기죠.

마태복음과 누가복음만이 예수의 동정녀 출생에 대한 역사를 전해주고 있다. 두 전승 중에 누가복음 1:26-38이 시간적으로 마태복음보다 앞서 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예수가 창조적인 하나님의 영으로 인해 마리아의 몸을 통해 출생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어야만 한다는 점에서 두드러진다. 이 문장은 전체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에 해당한다. 이 본문이 의미하는 바는 이 이야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에 대한 일종의 구성적인 윤색과 설명으로서 이해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고기는 밑줄 쳐놓고 나중에 더 생각해 보세오. 번역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확 와 닿지 않습니다. 이 본문이 이야기하는 것은 이런 거죠. 동정녀 출생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칭호를 구성적 윤색, 있게 만들어야 될 어떤 그, 윤색이라는 것은 조금 바꾸었다 편집인가요? 하여튼 그러한 의미의 단어에요. 구성적인 윤색과 설명으로서 이해되어야 된다. 이 이야기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해야할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설명하는 근거임에 틀림없다. 원시 기독교 전승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중요한 문제군요. 예수의 동정녀 출생에 대한 역사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이 칭호를 통한 신앙고백이 동정녀 마리아라고 하는 칭호보다 더욱 중요하게 기독교 신앙안에 퍼져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이 칭호가 예수의 부활과 세례에 소급됨으로써 다른 본문에서 이에 대한 다른 근거들이 주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우리가 다룰 동정녀 출생에 관한 역사는 다른 곳에서 이미 주어진 칭호를 추가적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게 틀림없다.

좀 길고 복잡하죠. 간단하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동정녀 출생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것을 설명하거나 그걸 보강하기 위해서 추가적으로 보태진, 아니면 하나의 귀결로서 나온 그러한 전승이라고 하는 거죠. 하나님의 외아들, 즉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이 사실을 혹은 그 사실로부터 나온 귀결이 동정녀 출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나올 수밖에 없었던 그 배경이 있었던 거예요. 결국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헬라지역에 있었던 기독교인들에게 그 분의 출생마저도 일반 사람들하고 구분이 되어야 하지 않느냐 그러한 요청이 나올 수밖에 없는 거죠.

이러한 이야기는 그것이 주어진 실질적 진실에 어떻게 접근할 수 있는지, 그리고 아이티아(aitia, 원인)와 근거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려고 하는 목적과 동기라는 점에서 일종의 병원적 전설이라고 (혹은 민담*이라고) 불린다. 이건 너무 전문적인 용어인데요. 제가 역주를 달았습니다. 병원적 전설, 혹은 민담, 동정녀 탄생이 그렇다고 하는 거죠. 역주를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의 동정녀 출생에 대한 이야기는, 예수에 대한 다른 칭호와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일목요연하게 설정되어 있었다기보다는 초대교회가 예수를 이해해 나가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이 과정에서 전해져 내려온 이야기를 Legende(게겐데, 전설), 혹은 Sage(자게, 민담)이라고 일컫는다. 본문에서 특히 병원(病原)적(ätiologische) 에티오로기쉬 자게, 병원, 병을 야기하는, 병의 원인이 된다고 하는 뜻에서 병원적 민담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이러한 전설과 민담이 그 어떤 원인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예수현상을 사실적인 사건으로만 믿어야지 이렇게 해석하는 것을, 더구나 전설이니 민담이니 하는 것을 불경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계시는 이런 역사적 해석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당연히 받아들여야할 접근방식이다. 이러한 연구방식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대화하거나 믿기 힘든 것으로 깎아내리려는 것이 아니라 그 전승과정에서 드러나는 진리의 현실성을 찾아내자고 하는 것이다.

네 동정녀 마리아라고 하는 이 민담, 혹은 전설이라고 이것은 병원적이다. 성격상 그러한 해석학적인 관점에서 그렇게 볼 수 있다고 하네요. 이거는 공연히 어려운 말을 통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 같은데 제가요. 판넨베르크가 쓴 말에서는 고의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요. 학문적으로 나가니까 그렇게 하는 건데요. 내가 설명을 잘 못해서 그렇습니다. 고건 넘어가도 되요.

이 경우에 이 이야기의 주제라 할 가장 중요한 실질적 사실은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예수에게 적용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 칭호에 대한 가장 오래 된 형식의 전승을 연구한 바에 따르면, 즉 이 전승의 출발점과 그 관심거리를 찾아보려는 연구에 따르면 이 형식이 역사적으로 가장 확실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어떤 형식이요? 어떤 형식이 가장 확실한 것으로 확인되었어요? 동정녀 출생이라고 하는 이 전승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칭호를 예수에게 적용하는 과정에서 나온 거다. 그거죠. 정확한 표현이 잘 안되었군요. 그러나 여러분들이 제가 몇 번 반복해서 말씀드렸으니까 이해 되셨을 겁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서 조금 멈칫거리는 것은 이 전설이라는 단어를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말 할 때도 끌어들여서 쓸 수 있는 용어가 될 수 있느냐 조금 여러분들에게 시험이 될까? 시험이라기보다도 당혹스럽게 전달되지 않을까 싶어서 그럽니다. 그래도 견뎌나가야 되어요. 사실은 사실대로 인정하고 그 안에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찾아 나가야 되니까 일종의 예방주사가 될까요? 예방주사라고 하는 것은 병의 균을 적당한 양으로 맞아서 병을 이겨나가도록 하는 겁니다.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어떤 도전 앞에서도 이것이 진리로서 흔들리지 않으려면 학문적 방식으로 기독교 신앙을 해명하는데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거예요. 자 그 다음요.

동정녀 출생은 일종의 전설과 관계된다. 이 경우에 전승된 본문 자체가 전통적으로 전설이 출현하게 되는 동기와 정확하게 부합하고 있기 때문에 전설적인 관련성이 명약관화하다고 볼 수 있다. 첨가적으로 이러한 부활은 전설적 관련성이 없는 거예요. 이 두 가지가 구별됩니다. 이거는 전문적인 신학의 관점으로 이해할 수 있는 건데 하여튼 그 대목에서 그걸 한번 짚어 드린 겁니다. 부활에 반해서 동정녀 출생은 전설적인 관련성이 강하다는 거죠. 이 문제를 다룰 경우에 근본적으로 동정녀 출생의 역사를, 바로 나오는 군요. 부활 전승들과 구별하고 있는데, 이 두 부분은 자주 비교되곤 했던 것이다. 칼 바르트는 이 두 기적 이야기를 예수 역사의 입구와 출구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러한 비교는 곁길로 빠져드는 격이다. 물론 부활 전승의 전설적 요소들에 대해서도 역시 질문할 수 있다. 그러나 부활전승에는 동정녀 출생에서처럼 전체 전승이 유래될 수도 있는 그런 전설적 동기가 어떤 식으로라도 밝혀질 수는 없다. 아 요 부분은 참 연구를 하면 재미있을 것 같아요. 판넨베르크의 설명에 의하면 동정녀 출생이라고 하는 전승은 전설적 동기가 아주 명확한데 반해서 이 부활전승은 그렇지 않다고 하는 거예요.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들이 이렇게 저렇게 나오는 것은 오히려 전설적 성격이 별로 없다고 하는 뜻이거든요. 그냥 초기 기독교인들이 부활 현현한 예수를 경험했다고 하는 그 명백한 사실만 별로 논리적, 논리성 그러한 것이 없이 기술되고 있는 거죠. 그런데 이 동정녀 탄생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가 완벽한 드라마처럼 되어 있는 거죠.

부활전승의 발전은 그것이 여러 차원에서 접근될 수 있는 전설적 확장을 포함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전반적인 면에서 역사적 근거에서만 이해된다. 요 두 개가 그런 차이이군요. 부활은 역사적 근거에 놓여 있고 동정녀 탄생은 전설적 근거에 놓여있다. 전문적인 문제네요. 이 역사적 근거는 그 전승의 내용을 형성하고 있는 그것이다. 동정녀 출생에 대한 전승*은 전체적인 면에서 볼 때 가장 오래된 전승본문에 명시적으로 알려져 있듯이 다른 방식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칭호를 설명하려는 동기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반면에 기독교가 말하는 부활신앙의 근원에 대해서는 아무리 날카로운 비평가라고 하더라도 이와 비슷한 논증을 시도하지 않았다. 부활전승에는 이러한 설명이 결코 첨가되지 않았다. 이것은 양 전통의 형식과 전승의 전례에서 볼 수 있는 기본적인 차이점이다. 동정녀 탄생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을 설명하려고 하는 그러한 동기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그거는 아주 분명하게 나타나는데 부활은 그것과 상관없이 그 자체로서만 사도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명백한 경험으로 진술되어 있다고 하는 점에서 문서상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하는 겁니다. 이것은 양 전통의 형식과 전래에서 볼 수 있는 근본적인 차이점이다. 우리는 오늘 중요한 것을 배웠습니다.

과연 기독교 사신에서 무엇이 중요한 문제인가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각기의 전승에 내재한 근본적인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원시 기독교의 사신, 복음선포는 예수의 동정녀 출생에 대한 사실을 고려하지 않은 채 멀리까지 전파된 게 틀림없다. 그게 없었어요. 동정녀 출생이라고 하는 사실 없이 널리 퍼졌습니다. 나중에 이것은 어떤 널리 퍼진 사실, 그 복음의 내용을 보충하기 위한 아니면 그것을 더 강조하기 위한 요청에 의해서 나온 전설적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 거죠. 더구나 이러한 동정녀 출생이라는 생각을 의식적으로 거부하지 않았을 텐데도 말이다. 그러나 예수가 죽은 자로부터 부활했다는 복음의 핵심에 근거하지 않은 그리스도 사신, 복음 선포는 애초부터 한 번도 주어진 적이 없다. 여기서 핵심문제는 전체 기독교 선포의 실질적 근거다. 부활의 근거다. 동정녀 마리아는 아니었거든요. 이렇게 판넨베르크가 이야기합니다. 동정녀 출생의 역사는 이와 달리 상대적인 주변적 현상일 뿐이다. 두 가지를 구분하시겠죠. 부활은 처음부터 복음이 선포되고 확산될 때 그 중심에 있었던 방면에 동정녀 출생의 전승은 없었으며, 그런 것이 복음을 따라가지 않았으며 나중에 필요에 의해서 생긴 하나의 전승이다. 전설이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거죠. 그런 점에서 부활은 모든 복음의 근거이지만 동정녀 탄생은 주변적 현상이다. 판넨베르크가 요 부분에 있어서는 칼바르트의 잘못된 시각을 교정하고 있습니다. 20세기 개신교 신학의 거두인 칼 바르트가 동정녀 출생을 예수 역사의 입구이고 부활을 출구라고 하면서 이 양대산맥인 것처럼 말한 것은 잘못본거다. 그 이야기죠. 칼바르트가 동정녀 출생을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인 것으로 보기는 보았을 텐데요. 지금 우리가 보는 것처럼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차원으로 보지 않았을겁니다. 요 부분도 제가 지금 자신 있게 끊어서 말씀드리기 힘든 부분이군요.

그분의 말씀묵상 책이 곧 나올 텐데요. 우리 몇 사람이 번역을 했습니다. 제가, 365일 끊어서 하는 묵상인데요. 제가 10월 11,12월 세 달을 했습니다. 고 부분이 동정년 탄생에 대한 부분이 있었을 텐데 저에게 강하게 인상에 남는 것은 요부분과 연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거는 신학이라는 것이 워낙 변증적인 것이라서요. 이렇게 판넨베르크처럼 조직신학적으로 접근하고 그렇게 하지는 않습니다. 동정녀에게 임한 그러한 사건들은 말씀신학에 근거해서 풀어주고 있습니다.3) 그건 중요하지는 않고요. 오늘 여기까지인데요. 여러분들에게는 개인적에 따라서 좀 다르기는 하겠지만 일반적인 신앙에 묶여있던 분에게는 충격적인 이야기였을 것 같습니다.

동정녀 출생 전승은 예수님의 초자연적 본질을 말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적 실존을 말하려고 했던 것이다. 부활과 연관해서 본다면 이 동정녀 탄생은 복음이 선포되면서 확장될 때 처음에도 없었고 나중에도 별로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 반면에 이 부활은 처음부터 복음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런 점에서 동정녀 탄생은 전설적 전승이라고 한다면 부활은 역사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1) 185경 이레나이우스, 230경 히폴리투스, 375경 에피파니우스


 

2) [23]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25]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 노릇 하고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27]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갈 4:23-29)


 

3) 여기서 그녀가 처녀라는 말은 전혀 언급되지 않습니다. ... 그녀를 특별하게 만든 것은 은총이지 그녀의 소유가 아닙니다. (칼바르트의 신학묵상 812쪽, 대한기독교서회)


 

27강 - 제6장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1)

안녕하세요? 오늘은 27강입니다. 판넨베르크책으로는 제6장이 되죠. 제목이 이렇습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조금 예민한 문제이죠.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이 두 가지가 한국교회에서는 예수님의 본질을, 좀 더 정확하게 하면 예수님의 그 초월성을 확인하는 그러한 내용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었으니 당연히 일반 사람들의 출생과는 다르게 남자 없는 여자의 몸만으로서 출생했다 그러한 이야기죠. 이러한 동정녀 탄생의 문제는 뜨거운 감자처럼 다루어질 때가 많습니다.  이건 좀 난처한 거죠. 믿기 힘든 그러한 내용인데 믿지 않을 수도 없고요. 분명히 성경에 있고 사도 신경에 나와 있는데요. 그렇게 고대 문서들, 문서라기보다도 성서와 사도신경이 말하고 있으니까 아주 중요한 기독교 문서가 이런 것들을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는데 그거를 믿을 수 없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좀 곤란하지 않습니까? 그런 방식으로 하면 부활도 못 믿고 아무것도 못 믿는 것이 아닌가? 예수님의 재림도 못 믿고 그렇지 않냐? 요런 문제가 좀 까다롭습니다.

모든 것이 동일한 무게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동일한 무게라는 표현보다도 이렇게 말을 해야 되겠군요. 어떤 것이 더 우선적인지 어떤 것이 그것에 따라오는 귀결인지 그걸 좀 구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구성하고 있는 많은 요소들이 있잖아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든지 우리가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다 등등 수많은 것들이 다 기독교 교리인데요. 이러한 것들이 다 독립적으로 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 연결되어 있어요. 어떤 것에서 어떤 것이 나오고 차츰 그렇게 단계적으로 발전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부활과 동정녀 탄생, 이 두 가지 다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개입으로 인한 사건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당연히 구분되어야 한다. 그것을 어떻게 구분하냐? 그런 질문이 가능하죠? 그런 것은 신학이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고요. 그리고 그렇게 구분하기 시작하면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을 다 산산이 조각을 낼 수밖에 없지 않느냐. 그런 또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이런 문제를 제가 이 시간에 다 해명할 수는 없고요. 여태까지는 우리가 사도신경을 공부하면서 어느 정도 방향은 주어졌다고 앞으로도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될 테니까 이런 문제를 가지고 깊이 들어가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이 문제는 이렇게 정리하고 넘어가야 되겠어요. 우리가 어떤 사실을 믿되  어떤 사실은 기독교 교리를 이야기합니다. 믿되 정말 그것이 초기 기독교회가 말하려고 했었던 핵심이냐 아니냐는 고거는 구분할 줄 알아야 되겠죠. 무슨 뜻인지 전달이 되었죠? 정말 말하고 싶어 했던 것이 무엇이냐? 그거 말입니다. 그거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잖아요. 그거를 구분해내야지. 그렇지 않는 것까지 다 포함해서 무조건 믿고 따라야 된다고 주장하면 그러면 그것은 범신이지 참된 진리에 근거한 기독교 교리에 대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자면 마가복음 끝부분에 나오는데요. (막16:18) 독을 마셔도 믿는 자는 아무런 해가 없다. 이러한 구절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사실적인 진술로 믿는 사람은 없잖습니까? 그러한 방식으로 초기 기독교공동체가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했는지 그것을 찾아내어야 되는 거죠. 오늘 여기 같이 공부하게 될 단락과 연결시켜서 말씀드린다고 한다면 정말 초기 기독교회가 동정녀에게서 예수님이 출생했다고 하는 사실을 말하려고 했었느냐 하는 그러한 질문을 해야 된다고 하는 겁니다. 여기서 일단 대답을 드린다면요. 그거는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부활에 대해서는 어떤가? 그것은 확실하게 그것을 말하려고 했습니다. 이런 것을 잘 정리해서 설명할 수 있는 게 신학의 영역인데요. 오늘 우리는 강의로 27강, 그리고 사도신경의 해설이라는 판넨베르크의 책에 따르면 제6장 이 부분을 통해서 그러한 문제들을 정확하게 따라가려고 합니다. 이 대목은 별로 그렇게 길지 않더군요. 그래서 두 번에 나누어서 하겠습니다. 책을 좀 보실까요?

3세기의 로마 교회는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는 세례고백 양식을 여전히 사용하고 있었다.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는 한 문장이죠. 이러한 세례고백양식, 세례를 받을 때 고백하는 고백문, 양식을 여전히 사용하고 있었다. ‘여전히’라고 하는 것은 그게 인제 변한다고 하는 거죠. 3세기 까지는 그것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뒤로는 조금 달라집니다. 달라진 사연도 있는 거거든요. 우리는 지금 이것이 왜 달라지는지는 별로 생각하지 않고요. 그전에 이렇게 한 문장으로 있었다는 것도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재미있죠. 다음을 조금 더 보겠습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사도신경에는 하나님에게 연관된다는 것과 (성령으로 잉태하사) 하나님의 역사라고 하는 것의 강조이죠. 성령으로 잉태하사 그런 부분이 있고요. 사람에게 연관된다는 구절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이런 것이 서로 구별되어 있습니다. 3세기 로마교회의 세례고백양식에서는 하나로 되어 있었는데 지금 우리는 나누어진 사도신경을 갖고 있습니다. 이 표현양식의 두 구조, 성령으로 잉태하사라고 하는 거, 하나님과 연관된다고 하는 거고요.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이것은 인간에게 연관된다고 하는 것이죠. 마리아가 중요하니까요? 두 부분이, 이러한 표현양식의 두 구조. 이것은 원래 하나로 묶여 있었다. 하나였다.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이렇게 되어 있었던 것이 성령으로 잉태하사 그 다음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이렇게 나눠진 것입니다.

이런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로 있다가 둘로 나누어졌다는 사실은 두말 할 것 없이 분명하다. 즉 예수의 실존이, 그의 예수됨이, 바로 그 됨, existence 실존이 하나님으로부터, 즉 성령에 기초했으며, 그리고 그는 동시에 바로 인간적 방법으로 마리아에게서 출생했다는 의미이다. 이것으로 이미 오늘 우리가 6장,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라고 하는 이 사도신경의 이 단락을 다 공부한 거나 마찬가지 입니다. 가장 핵심인 것을 우리가 지금 짚으면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의 출생은 하나님과 연결되고 동시에 인간적 방법으로 진행되었다. 이거죠. 초기기독교인들이 말하려고 했던 핵심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문제가 한 두 마디로 끝나고 다 해결될 만큼 간단하지 않다는 거죠. 그걸 이제 판넨베르크의 설명을 통해서 우리가 천천히 따라가는 겁니다.

여기서 명백한 사실은 1세기의 교회에서 동정녀 출생이 영지주의자들의 생각과는 반대로. 잘 들으셔야 되요. 예수의 참된 인간성을 징표하는 것으로서 인정되었다는 점이다. 동정녀라고 하는 이 표현은 어떤 초자연적인 출생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참된 인간성, 인성 베레호모라고 하는 거죠. 베레 데우스 참된 하나님 베레호모 참된 인간. 이 참된 인간적 실존을 말하려고 하는 핵심용어였다고 하는 거죠. 1세기에서요. 동정녀 마리아라는 거죠. 우리가 알고 있었던 것하고는 정반대죠. 우리는 그것이 오히려 인간적 한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초월성, 그러니까 예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하는데 처음 시작이 그렇지 않다고 하는 거죠. 그걸 우리가 잘못알고 있는 거죠. 그러면서 잘못알고 있는 것을 기초로 해서 봐라. 예수님이 동정녀에게서 태어났으니 정말 그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냐? 그렇게 강조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것 입니다. 좀 예상외죠? 그런데 이게 영지주의자들의 생각과 반대되는 거였다고 하는 거죠. 그게 중요합니다. 일반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의 참된 인간성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그러거든요. 이렇게 본다면, 영지주의, 노시스티즘 gnostisism 영어는 g 발음을 잘 하지 않는데요. 노스티스즘이라고 하는데요. 해도 될 것 같은데. 그러한 영지주의자들이요 영지주의자에 대한 설명은 제가 이 시간 설명하지 않습니다. 간단하게 말한 다면요. 헬라철학의 태두라고 할 수 있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근거해서 이 세상을 이원론적으로 보려고 하는 그러한 초기 기독교의 전반적인 세계이해의 한 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기독교에도 큰 영향을 끼쳤고요. 그러한 영향들이 성서안에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들이 교회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상당한 세력을 확보했습니다. 그들에 의해서 가현설이 기독교안에서, 물론 그것이 이단으로 정죄되었습니다만 오랫동안 기독교의 한축을 담당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의 출생을 인간적인 방법으로 오신 것으로 보기 힘든 것이죠. 그들은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인간일 수 있느냐? 이 땅에 살았던 예수님은 참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라기보다 가현되었다. 도케시즘이라고해서 가현설입니다. 그렇게 나타난 것뿐이다 라고 했는데요. 그들과 투쟁한 교부들은 이 영지주의자들이 생각을 교회에서 밀어내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구원자가 실제 인간으로 출생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가상적 몸으로 살았거나 아니면 인간과 가상적으로만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사람들은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리스도를 우리인간과 똑같은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 하는 거죠. 그런 주장이 이해가 가기는 갑니다. 이렇게 경솔한 건가요. 그렇게 표현해줘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와 똑같이 화장실가구 말이죠. 그렇다고 생각하면 그 분의, 예수님의 거룩성이라고 할까요? 경외심 그런 것이 좀 떨어지는 것 같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이게 좀 미묘하면서도 중요한 문제가 담겨 있어요. 지금 화장실에 가냐 안가냐 정말 쓸데없는 질문인데요. 그런 것과 상관없이 초기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을 온전한 인간으로 이해했습니다. 베레 호모에요. 참된 인간이에요. 조금도 인간적 속성이 손상되지 않는 그러한 예수님을 이해했습니다. 바로 그 분이 동시에 베레 데우스 참된 하나님으로 이해된 거죠. 도대체 이 두 가지가 한 인격체 안에 하나로 종합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기독교론에서 가장 핵심적인 논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의 인간성을 좀 약화시켰다. 약화가 아니라 거의 부정했고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동정녀에게서 인간의 방식 아닌 방식으로 예수님이 출생할 수밖에 없었다는 그런 결론에 도달하게 된 거죠.

한마디만 오늘 우리 기독교 신앙과 연관해서요. 한국 기독교인들은 거의 다 영지주의자들이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초기 기독교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교부들의 치열한 투쟁을 통해서 기독교 신앙의 건강을 지켜내기 위해서 쫓겨난 영지주의자들의 신앙이 오늘 한국인의 정서에 깊이 들어와 있습니다. 예수님의 인간적 본질을 전혀 용납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죠. 이 동정녀 탄생이. 이런 거죠. 예수님이 인간과 똑같은 방법으로 출생했다고 하는 말을 용납하지 않는 거죠. 그러면 남녀의 성적 관계를 통해서 예수님이 이렇게 잉태되고 그렇게 예수님이 출생했냐? 질문이 가능합니다. 그건 질문할 필요도 없어요. 사실은요. 예수님의 출생이 인간과 똑같다는 말은 그걸 전제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아버지가 누구냐 그런 것들은 성서가 관심이 없는 거고요. 요셉이라고 하는데 요셉은 복음서에서도 거의 다뤄지지 않고요. 그러나 굳이 우리가 예수님의 육체적 아버지가 누구냐 따진다고 한다면 요셉이라고 하는 것이 옳겠죠. 물론 성서는 요셉이 마리아와 동거하기 전에 마리아가 잉태되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그건 나중에 들어오게 된 전승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러한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기독교가 나온 게 아니라 거꾸로 돌아가는 거예요. 거꾸로. 거꾸로 나중에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으로부터 신앙이 발생해서 점점 앞으로 가서 결국은 예수님의 출생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시겠죠. 예수님의 출생사부터 신비로워갖고 점점 점점 하나 하나 단계 단계 거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고 이러한 프로그램에 따라서 예수님이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는 거죠. 요걸 이해하셔야 되요. 거꾸로예요. 그러면 맨 마지막이 무엇입니까? 부활의 현현에 대한 경험이거든요. 거기로부터 십자가 공생애 앞으로 세례 주욱 넘어가서 출생까지 나오게 되는 겁니다. 어디까지가 역사적 객관성을 담보하고 있는 건지 그런 것은 더 토론해봐야하는 겁니다. 신학적인 문제인 겁니다. 예수님은 그건 짚고 넘어가야 될 문제입니다. 인간과 똑같은 방법으로 출생하셨다. 이거는 뭐 그러냐 그럴 수 있느냐 없느냐 그럴 여지가 없습니다. 그건 초기 기독교가 어떤 일이 있어도 놓치지 않았던 그런 부분입니다.

이들의 생각에 따르면, 영지주의자들이요. 불변의 하나님이 시간 속에서 출생한, 가변적인 고통을 당하고 죽어야 할 인간과 실제로 하나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가현이죠.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습니다. 이에 반해 ‘2세기의 反영지주의 교부들’. 여러분들 책을 갖고 있으면 잘 보십시오. 99쪽이예요. 2세기의 反영지주의 교부들1) 의한 그때 누구냐 하는 것은 제가 초기 교부사에 대한 것을 검토하지 않고 강의를 시작했기 때문에 말씀을 드리지 못하겠습니다만. 이름이 나오면 누구라고 말씀드리겠는데요. 오리게네스인가요? 상당히 앞부분인것 같은데요. 터툴리안은 좀 뒷부분인것 같고요. 반영지주의 교부들 때문에 예수님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참된 하나님, 참된 인간, 반영지주의, 영지주의를 극복하고 기독교가 영지주의 영향을 받았지만 거기에 빠져들지 않고 극복함으로서 새로운 하나님 이해에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2세기의 反영지주의 교부들 의한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아들 자신이 마리아라는 여자를 통해서 출생했다고 진술되었다. 밑줄을 쳐 놓으세요. 핵심이예요. 영지주의자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적인 것과 연결될 수 있느냐 그걸 부정한 반면에 이 세계의 반영지주의 교부들은 하나님의 아들 자신이 마리아라고 하는 여자를 통해서 출생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출생 사건에서 동정녀라는 사실은 이를 불쾌하게 생각하는 현대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별로 강조되지 않는다. 동정녀는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마리아가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이런 것들은 신학적 훈련이 없으면 되지 않죠. 우리는 마리아보다는 동정녀가 중요한 것이죠. 일반 신자들 생각은요. 원래 기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무조건 믿고 있으니까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모르겠어요. 그걸 무조건 믿으라고 그걸 믿지 않으면 종교재판도 당하고 그런 일들도 많이 벌어졌어요.

예수 출생이 동정녀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은, 그런 고백이 실제로 있지 않아요? 당연한 일이라기보다는 타당한 일이라고 보아야 된다. 그렇게 고백할 수 있다고 하는 거죠. 조금 혼란스러운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좀 더 나가보겠습니다. 즉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다른 인간들과 같은 방식에 의해 출생하지 않았다는 것은 헬라시대의 사람들에게는 극도로 명백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기독교 복음이 헬라지역으로 넘어가면서 거기서 당연히 특별한 방식의 출생에 대한 전승들이 나오게 된다는 이야기죠. 이교도의 신화들은 제우스의 아들들인 페르세우스와 헤라클레스의 경우와 같이 중요한 인물이나 영웅들의 신적인 유래를 보도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예수는 삼손(삿 13:5), 예레미야(렘 1:5), 하나님의 종(사 49:5) 처럼, 그 ‘출생’이 선택된 고대 이스라엘의 위인들에게까지 소급되어야만 한다. 특별한 방식으로 태어난 고대이스라엘의 위인들까지 소급되어서 해석되어지죠.

동정녀를 통한 메시야의 출생을 이사야가 선포하지 않았던가? 물론 거기는 동정녀라기보다 젊은 여자로 나와 있죠. 결국 구약성서의 헬라어 번역에서 그렇게 언급되고 있다(사 7:14, 칠십인역, 마 1:23 인용). 원래는 젊은 여자였는데 헬라어 번역으로 가면서 동정녀라고 하는 것으로 바뀐 것 같습니다. 자 여기까지가 첫 번 패러그래프였어요. 첫 패러그래프에서도 참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했던 것을 허물어뜨리는 그러한 내용들이 많았습니다. 너무 충격 받지는 마시고요. 이미 이러한 문제들은 신학에서 다 정리된 그런 내용들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한국교회에는 이런 문제로 시시비비 쓸데없이 논란을 벌일 때가 많이 있고요. 그렇습니다. 참 어리석은 일이 아닐까요? 이미 지동설이라고 하는 사실이 밝혀졌는데도 천동설을 무조건 주장하는 사람들하고 정서적으로 비슷한 것 같습니다 물론 신학계라고 하더라도 근본주의에 속한 사람들은 이러한 말을 용납하지 않겠죠. 그건 여러분들이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첫 번 패러그래프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이 말은 예수님의 초자연적 출생을 뜻한다고 하기보다도 오히려 반대로 예수님의 인간적 출생을, 더 정확하게는 예수님의 인간적 그러한 온전성을 말하려고 했던 그것에 그 뿌리가 놓여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의 동정녀 출생에 대한 주장은 이와 달리 그의 완전한 인간성을 제한하는 것처럼 간주되고 있다. 그렇잖아요. 초자연방식으로 출생했다고 하면 인간이 아니잖아요. 인간은 그렇게 태어나지 않잖아요?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가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에 와야만 했는지 결코 알 수 없는 일이다. 여기서 이렇게 또 따져 물을 수 있어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분인데 그거 동정녀에게서 예수님이 출생할 수 있도록 할 능력이 없냐? 그럴 수 있는 게 아니냐? 이런 말이죠. 그렇게 말하기 시작하면 사실은 끝이 없죠. 끝이 없는 것은 두 번째 치고 그것을 초기 기독교에서 말하려고 하지 않는데 핵심이 있습니다. 만약에 초기 기독교인들이 바로 그것을 말하려고 했으면 우리는 그렇게 믿어야죠. 동정녀에게서 태어났다고 믿어야죠. 초기 기독교인들이 아주 실질적으로 그런 신앙으로 살았다면 말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이것이 반영지주의 교부들에 의해서 영지주의자들을 배격하면서 나온 그런 신앙고백 등등 연관성에서 볼 때 동정녀에게서 포커스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마리아라고 하는 여자에게 포커스가 있다는 것 더 중요합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인간적인 방식으로 출생하셨다고 하는 것을 강조하려고 하는 거죠.

무엇보다도 예수의 동정녀 출생 전승은 역사성이라는 점에서 심각하게 의심을 받았으며, 이런 전승의 경우에 그에 앞서 발생한 사건이 사실적인 것으로 주장되고 있기 때문에 역사적 의심이 그렇게 간단히 폐기되지는 않는다. 이건 뭐 신학적으로 좀 복잡한 문제라서 이 문장이 딱 귀에 들어오지 않죠? 그냥 지나가도 됩니다. 이 동정녀 탄생의 전승은 앞의 어떤 중요한 사실에서 나온 것인데 이 중요한 사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게예요. 미리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사실이 초기 기독교의 핵심에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에 따른 귀결인 동정녀 탄생인 그것도 금방 예수님의 인간적 현실을 강조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 것들이 쉽사리 떨쳐지지 않는다. 그런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조금 천천히 중심으로 들어갑니다. 문제와 연관되어 있는 성서와 초기 기독교의 신학, 이 문제 안으로 들어갑니다.

예수의 동정녀 출생에 대한 전승은 오직 두 신약성서 본문인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에서만 발견된다.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그 이야기가 안 나와요. 정말 중요한 거라고 한다면 복음서가 빼놓을 리가 없잖아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빼놓지 않잖아요. 바울과 요한은 다소간 차이가 있지만 이에 반대하는 입장을 명확하게 견지했다. 이것도 의외죠? 바울과 요한은 동정녀 출생에 대해서 반대하는 의견을, 입장을 견지했다고 하는 겁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갈라디아서 4장 4절을 보면 그는 여자에게서 출생했고 율법 아래서 행했다(갈 4:4). 결코 동정녀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 율법을 행했다는 그러한 인간적인 삶을 그대로 살았다고 하는 겁니다. 예수의 동정녀 출생에 대한 전승이 근원적으로 예수가 다른 이들과 특별하게 구별된다고 하는 점을 말하고자 했다면, 바울은 예수가 다른 인간들과 같았다는 점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동정녀 출생에 대한 전승이 구별되게 말하는 것은 분명하니까요. 바울은 그러나 같았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고 반대하거나 뭐 그런 입장인거죠.

바울이 예수의 기적적인 출생, 동정녀 출생에 대한 표상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는가를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그는 사라를 통한 이삭의 출생과 연관해서 이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갈 4:23, 27, 29). 그러나 그는 이 문제를 예수에게 직접 적용시키는 게 아니라 약속의 상속자인 기독교인들에게 일반적 의미에서만 적용시키고 있다(갈 4:28). 이러한 언급들은, 나중에 시간이 있으면 갈라디아서 4장 그 부분을 읽어보면 좋겠어요.2) 제가 미리 좀 읽어볼 걸 못했습니다. 나중에 좀 해야 되겠네요. 이러한 언급들은 바울이 예수의 동정녀 출생에 대해서 알지 못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두 가지 가능성이 열려 있는 거죠. 알았을 수도 있고 몰랐을 수도 있고. 알았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을 반대하기 위해서 여자에게서 출생해서 율법아래 행했다 말할 수 있는 거고요. 아니면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냥 일반적인 의미에서 그냥 출생의 문제를 이야기한 거다. 예수 출생에 대해서 이렇게 간접적으로 이야기한 거다. 그렇게 보는 거죠. 또한 요한복음에서는 예수의 동정녀 출생에 대한 전승을 논쟁적으로 풍자하고 있는 일종의 분기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초기 기독교의 이런 흐름과 저런 흐름들이 뒤섞여 있다고 하는 거죠. 전체적으로 기독교인에 대한 언급이라 할 수 있는 요한복음 1장13절은 기독교인을 가리켜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인간의 뜻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증거’ 된 자들이라고 진술한다. 이 진술은 말씀의 성육신에 대한 문장(1:14) 바로 앞에 놓여 있다.

고 구절은 제가 확인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혹시 번역을 착각해서 잘못했는가? 아닌가? 기독교인을 가리켜서 했는데 기독교인이 아니라 그리스도라고 했는지요. 독일어로 그리스도를 크리스투스라고 하고 기독교인을 크리스트라고 하거든요. 오히려 영어로는 크라이스트, 그리스도잖아요.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을 크리스트, 이게 독일어하고 영어하고 좀 다릅니다. 독일어로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고 영어로는 그리스도, 크리스트 제가 번역을 하면서 착각을 했을 수도 있으니까 확인하려고 해요. 요한복음 1장 13절이요. 제가 번역을 맞게 했군요.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네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게 맞습니다. 요한과 바울은 신학자들이거든요. 이들은 동정녀 출생에 대해서 몰랐거나 알아도 반대했다. 그런 흐름들에 대해서 반대했다. 그런 이야기죠.

마태복음과 누가복음만이 예수의 동정녀 출생에 대한 역사를 전해주고 있다. 두 전승 중에 누가복음 1:26-38이 시간적으로 마태복음보다 앞서 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예수가 창조적인 하나님의 영으로 인해 마리아의 몸을 통해 출생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어야만 한다는 점에서 두드러진다. 이 문장은 전체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에 해당한다. 이 본문이 의미하는 바는 이 이야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에 대한 일종의 구성적인 윤색과 설명으로서 이해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고기는 밑줄 쳐놓고 나중에 더 생각해 보세오. 번역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확 와 닿지 않습니다. 이 본문이 이야기하는 것은 이런 거죠. 동정녀 출생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칭호를 구성적 윤색, 있게 만들어야 될 어떤 그, 윤색이라는 것은 조금 바꾸었다 편집인가요? 하여튼 그러한 의미의 단어에요. 구성적인 윤색과 설명으로서 이해되어야 된다. 이 이야기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해야할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설명하는 근거임에 틀림없다. 원시 기독교 전승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중요한 문제군요. 예수의 동정녀 출생에 대한 역사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이 칭호를 통한 신앙고백이 동정녀 마리아라고 하는 칭호보다 더욱 중요하게 기독교 신앙안에 퍼져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이 칭호가 예수의 부활과 세례에 소급됨으로써 다른 본문에서 이에 대한 다른 근거들이 주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우리가 다룰 동정녀 출생에 관한 역사는 다른 곳에서 이미 주어진 칭호를 추가적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게 틀림없다.

좀 길고 복잡하죠. 간단하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동정녀 출생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것을 설명하거나 그걸 보강하기 위해서 추가적으로 보태진, 아니면 하나의 귀결로서 나온 그러한 전승이라고 하는 거죠. 하나님의 외아들, 즉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이 사실을 혹은 그 사실로부터 나온 귀결이 동정녀 출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나올 수밖에 없었던 그 배경이 있었던 거예요. 결국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헬라지역에 있었던 기독교인들에게 그 분의 출생마저도 일반 사람들하고 구분이 되어야 하지 않느냐 그러한 요청이 나올 수밖에 없는 거죠.

이러한 이야기는 그것이 주어진 실질적 진실에 어떻게 접근할 수 있는지, 그리고 아이티아(aitia, 원인)와 근거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려고 하는 목적과 동기라는 점에서 일종의 병원적 전설이라고 (혹은 민담*이라고) 불린다. 이건 너무 전문적인 용어인데요. 제가 역주를 달았습니다. 병원적 전설, 혹은 민담, 동정녀 탄생이 그렇다고 하는 거죠. 역주를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의 동정녀 출생에 대한 이야기는, 예수에 대한 다른 칭호와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일목요연하게 설정되어 있었다기보다는 초대교회가 예수를 이해해 나가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이 과정에서 전해져 내려온 이야기를 Legende(게겐데, 전설), 혹은 Sage(자게, 민담)이라고 일컫는다. 본문에서 특히 병원(病原)적(ätiologische) 에티오로기쉬 자게, 병원, 병을 야기하는, 병의 원인이 된다고 하는 뜻에서 병원적 민담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이러한 전설과 민담이 그 어떤 원인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예수현상을 사실적인 사건으로만 믿어야지 이렇게 해석하는 것을, 더구나 전설이니 민담이니 하는 것을 불경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계시는 이런 역사적 해석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당연히 받아들여야할 접근방식이다. 이러한 연구방식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대화하거나 믿기 힘든 것으로 깎아내리려는 것이 아니라 그 전승과정에서 드러나는 진리의 현실성을 찾아내자고 하는 것이다.

네 동정녀 마리아라고 하는 이 민담, 혹은 전설이라고 이것은 병원적이다. 성격상 그러한 해석학적인 관점에서 그렇게 볼 수 있다고 하네요. 이거는 공연히 어려운 말을 통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 같은데 제가요. 판넨베르크가 쓴 말에서는 고의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요. 학문적으로 나가니까 그렇게 하는 건데요. 내가 설명을 잘 못해서 그렇습니다. 고건 넘어가도 되요.

이 경우에 이 이야기의 주제라 할 가장 중요한 실질적 사실은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예수에게 적용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 칭호에 대한 가장 오래 된 형식의 전승을 연구한 바에 따르면, 즉 이 전승의 출발점과 그 관심거리를 찾아보려는 연구에 따르면 이 형식이 역사적으로 가장 확실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어떤 형식이요? 어떤 형식이 가장 확실한 것으로 확인되었어요? 동정녀 출생이라고 하는 이 전승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칭호를 예수에게 적용하는 과정에서 나온 거다. 그거죠. 정확한 표현이 잘 안되었군요. 그러나 여러분들이 제가 몇 번 반복해서 말씀드렸으니까 이해 되셨을 겁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서 조금 멈칫거리는 것은 이 전설이라는 단어를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말 할 때도 끌어들여서 쓸 수 있는 용어가 될 수 있느냐 조금 여러분들에게 시험이 될까? 시험이라기보다도 당혹스럽게 전달되지 않을까 싶어서 그럽니다. 그래도 견뎌나가야 되어요. 사실은 사실대로 인정하고 그 안에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찾아 나가야 되니까 일종의 예방주사가 될까요? 예방주사라고 하는 것은 병의 균을 적당한 양으로 맞아서 병을 이겨나가도록 하는 겁니다.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어떤 도전 앞에서도 이것이 진리로서 흔들리지 않으려면 학문적 방식으로 기독교 신앙을 해명하는데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거예요. 자 그 다음요.

동정녀 출생은 일종의 전설과 관계된다. 이 경우에 전승된 본문 자체가 전통적으로 전설이 출현하게 되는 동기와 정확하게 부합하고 있기 때문에 전설적인 관련성이 명약관화하다고 볼 수 있다. 첨가적으로 이러한 부활은 전설적 관련성이 없는 거예요. 이 두 가지가 구별됩니다. 이거는 전문적인 신학의 관점으로 이해할 수 있는 건데 하여튼 그 대목에서 그걸 한번 짚어 드린 겁니다. 부활에 반해서 동정녀 출생은 전설적인 관련성이 강하다는 거죠. 이 문제를 다룰 경우에 근본적으로 동정녀 출생의 역사를, 바로 나오는 군요. 부활 전승들과 구별하고 있는데, 이 두 부분은 자주 비교되곤 했던 것이다. 칼 바르트는 이 두 기적 이야기를 예수 역사의 입구와 출구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러한 비교는 곁길로 빠져드는 격이다. 물론 부활 전승의 전설적 요소들에 대해서도 역시 질문할 수 있다. 그러나 부활전승에는 동정녀 출생에서처럼 전체 전승이 유래될 수도 있는 그런 전설적 동기가 어떤 식으로라도 밝혀질 수는 없다. 아 요 부분은 참 연구를 하면 재미있을 것 같아요. 판넨베르크의 설명에 의하면 동정녀 출생이라고 하는 전승은 전설적 동기가 아주 명확한데 반해서 이 부활전승은 그렇지 않다고 하는 거예요.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들이 이렇게 저렇게 나오는 것은 오히려 전설적 성격이 별로 없다고 하는 뜻이거든요. 그냥 초기 기독교인들이 부활 현현한 예수를 경험했다고 하는 그 명백한 사실만 별로 논리적, 논리성 그러한 것이 없이 기술되고 있는 거죠. 그런데 이 동정녀 탄생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가 완벽한 드라마처럼 되어 있는 거죠.

부활전승의 발전은 그것이 여러 차원에서 접근될 수 있는 전설적 확장을 포함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전반적인 면에서 역사적 근거에서만 이해된다. 요 두 개가 그런 차이이군요. 부활은 역사적 근거에 놓여 있고 동정녀 탄생은 전설적 근거에 놓여있다. 전문적인 문제네요. 이 역사적 근거는 그 전승의 내용을 형성하고 있는 그것이다. 동정녀 출생에 대한 전승*은 전체적인 면에서 볼 때 가장 오래된 전승본문에 명시적으로 알려져 있듯이 다른 방식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칭호를 설명하려는 동기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반면에 기독교가 말하는 부활신앙의 근원에 대해서는 아무리 날카로운 비평가라고 하더라도 이와 비슷한 논증을 시도하지 않았다. 부활전승에는 이러한 설명이 결코 첨가되지 않았다. 이것은 양 전통의 형식과 전승의 전례에서 볼 수 있는 기본적인 차이점이다. 동정녀 탄생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을 설명하려고 하는 그러한 동기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그거는 아주 분명하게 나타나는데 부활은 그것과 상관없이 그 자체로서만 사도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명백한 경험으로 진술되어 있다고 하는 점에서 문서상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하는 겁니다. 이것은 양 전통의 형식과 전래에서 볼 수 있는 근본적인 차이점이다. 우리는 오늘 중요한 것을 배웠습니다.

과연 기독교 사신에서 무엇이 중요한 문제인가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각기의 전승에 내재한 근본적인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원시 기독교의 사신, 복음선포는 예수의 동정녀 출생에 대한 사실을 고려하지 않은 채 멀리까지 전파된 게 틀림없다. 그게 없었어요. 동정녀 출생이라고 하는 사실 없이 널리 퍼졌습니다. 나중에 이것은 어떤 널리 퍼진 사실, 그 복음의 내용을 보충하기 위한 아니면 그것을 더 강조하기 위한 요청에 의해서 나온 전설적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 거죠. 더구나 이러한 동정녀 출생이라는 생각을 의식적으로 거부하지 않았을 텐데도 말이다. 그러나 예수가 죽은 자로부터 부활했다는 복음의 핵심에 근거하지 않은 그리스도 사신, 복음 선포는 애초부터 한 번도 주어진 적이 없다. 여기서 핵심문제는 전체 기독교 선포의 실질적 근거다. 부활의 근거다. 동정녀 마리아는 아니었거든요. 이렇게 판넨베르크가 이야기합니다. 동정녀 출생의 역사는 이와 달리 상대적인 주변적 현상일 뿐이다. 두 가지를 구분하시겠죠. 부활은 처음부터 복음이 선포되고 확산될 때 그 중심에 있었던 방면에 동정녀 출생의 전승은 없었으며, 그런 것이 복음을 따라가지 않았으며 나중에 필요에 의해서 생긴 하나의 전승이다. 전설이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거죠. 그런 점에서 부활은 모든 복음의 근거이지만 동정녀 탄생은 주변적 현상이다. 판넨베르크가 요 부분에 있어서는 칼바르트의 잘못된 시각을 교정하고 있습니다. 20세기 개신교 신학의 거두인 칼 바르트가 동정녀 출생을 예수 역사의 입구이고 부활을 출구라고 하면서 이 양대산맥인 것처럼 말한 것은 잘못본거다. 그 이야기죠. 칼바르트가 동정녀 출생을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인 것으로 보기는 보았을 텐데요. 지금 우리가 보는 것처럼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차원으로 보지 않았을겁니다. 요 부분도 제가 지금 자신 있게 끊어서 말씀드리기 힘든 부분이군요.

그분의 말씀묵상 책이 곧 나올 텐데요. 우리 몇 사람이 번역을 했습니다. 제가, 365일 끊어서 하는 묵상인데요. 제가 10월 11,12월 세 달을 했습니다. 고 부분이 동정년 탄생에 대한 부분이 있었을 텐데 저에게 강하게 인상에 남는 것은 요부분과 연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거는 신학이라는 것이 워낙 변증적인 것이라서요. 이렇게 판넨베르크처럼 조직신학적으로 접근하고 그렇게 하지는 않습니다. 동정녀에게 임한 그러한 사건들은 말씀신학에 근거해서 풀어주고 있습니다.3) 그건 중요하지는 않고요. 오늘 여기까지인데요. 여러분들에게는 개인적에 따라서 좀 다르기는 하겠지만 일반적인 신앙에 묶여있던 분에게는 충격적인 이야기였을 것 같습니다.

동정녀 출생 전승은 예수님의 초자연적 본질을 말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적 실존을 말하려고 했던 것이다. 부활과 연관해서 본다면 이 동정녀 탄생은 복음이 선포되면서 확장될 때 처음에도 없었고 나중에도 별로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 반면에 이 부활은 처음부터 복음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런 점에서 동정녀 탄생은 전설적 전승이라고 한다면 부활은 역사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1) 185경 이레나이우스, 230경 히폴리투스, 375경 에피파니우스


 

2) [23]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25]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 노릇 하고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27]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갈 4:23-29)


 

3) 여기서 그녀가 처녀라는 말은 전혀 언급되지 않습니다. ... 그녀를 특별하게 만든 것은 은총이지 그녀의 소유가 아닙니다. (칼바르트의 신학묵상 812쪽, 대한기독교서회)


 


profile

[레벨:5]:-) 선

2014.12.14 18:43:21
*.193.32.178

"비밀글입니다."

: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14.12.14 22:36:21
*.94.91.64

닉네임은 없고 기호로 되어 있군요.

재미 있긴 한데

뭐라 호칭하기가 어렵군요. ㅎㅎ

신학공부가 과일껍질 깎기와 비슷하다는 표현이

실감나게 들립니다.

바르트는 신학을 즐거운 학문이라고 했답니다.

주의 평화가...

profile

[레벨:5]:-) 선

2014.12.14 23:13:21
*.193.32.178

그렇네요 목사님. 저는 나름 기호로 표기하였는데 목사님과 앞으로 다른분들과 소통을 위해선 기호옆에 간단한 닉네임을 덧붙여야 할거 같습니다. 호호 편안한 주일 저녁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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