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강-제6장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2)

안녕하세요? 오늘 28강입니다. 지난주에 이어서 오늘도 역시 한국교회에서 가장 다루기 힘든 그러한 주제를 하게 되었습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물론 그 앞에서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에게 나시고 그렇게 되어있죠. 지난 주 강의에서 확인한 바대로 원래 이것은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이렇게 되어 있었는데 뒤에 이것이 두 문장으로 바뀌었다 그래요.

여기에 사정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계속해서 사도신경을 공부하면서 이미 눈치 채신 분들이 있을 거라고 봅니다만 기독교 교리라고 하는 것이 처음부터 딱 한가지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거쳐서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충돌하고, 반대되는 이야기들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가 기본적으로는 있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분에 대한 신앙인데 그것이 지역에 따라서 다른 옷을 입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른 옷, 일종의 문화가 거기에 들어 간 거죠. 폴틸리히의 표현을 빌리면 종교는 몸이고 문화는 옷이다. 이야기를 해요. 사람이 옷을 벗고는 못삽니다. 사실은 몸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옷을 걸치고 살아야 되요. 아무리 오지의 문명과 벽을 쌓고 살아가는 그러한 종족들에게서 옷 없이 사는 그러한 관습들을 좀 보기는 합니다. 그것도 일반적인 것은 아니에요. 그건 그렇다고 하고요. 문화적인 영향을 분명히 받았습니다. 그러한 것들을 우리가 촘촘하게 따지며 살피는 게 신앙성장에 무슨 도움이 되느냐 그러한 반론이 가능하기는 해요.

네 이런 문제들은 제가 몇 번 말씀드렸기 때문에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믿는 것은 참 소중한 것이고요. 결국 우리의 이성적인 판단으로 실증적인 확증을 갖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해야 하는 사실은 분명한 겁니다. 결국은 그 신뢰가 핵심인거죠. 모든 것이 관계가 앞뒤로 딱 들어맞다 거나 여기에서 이 땅에서 자연과학적으로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만 믿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가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확실한 게 아니거든요. 그걸 전제해야 되는 거예요. 다만 우리가 그렇게 신뢰해야만 된다고 하는 사실 거기까지는 우리가 생각해야 되는 거죠. 왜 하나님이 그렇게 신비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계시고 통치하시고 생명을 일으키시고 또 구원의 약속을 하셨는가 하는 합리적인 토대는 가져야 된다고 하는 겁니다.

이걸 오늘 우리가 다루어야 될 주제와 연관시켜 서 말씀드린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동정녀 탄생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기 어려워서, 물론 어렵기는 한데요. 그것이 실증적으로 증명되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가 문제를 삼는 것이 아니라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그러한 개념을 통해서 아니면 그러한 용어를 통해서 말하려고 했던 그 근본, 이거를 알자고 하는 거죠. 지난번에 판넨베르크가 그 문제를 부활과 연관시켜서 좀 설명했습니다. 부활은 복음이 선포될 때부터 모든 것의 근원이었다. 초기 기독교가 이것을 복음과 함께 갔다. 복음은 바로 부활의 예수였다. 그러나 동정녀 탄생은 그게 아니었거든요. 복음이 가는 곳마다 부활, 십자가와 부활은 선포되었지만 동정녀 탄생은 선포되지 않았습니다. 그걸 몰랐던 데도 많이 있었고 그것은 어느 흐름에서 들어오게 된 거예요. 그러한 사실을 우리가 알고, 그것이 무었을 말하려고 하는 지를 깊이 이해하는 것, 이게 기독교 신앙에서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잖아요. 네 기독교 신앙의 근본 교리 형성에 이러한 문화적인 요소들이 영향을 끼쳤다고 하는 사실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그것 때문에 기독교 진리가 전혀 훼손되지 않습니다. 그런 것으로 훼손된다고 하면 그것은 진리가 아닌 거죠. 우리는 걱정하지 말고 우리가 2천년동안  걸어온 길을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일단 있습니다. 거기서 정말 기독교 신앙이 붙들려고 했던 핵심이 뭐냐 붙들고요. 그리고 그렇지 않는 것은 줄여나가고 그러게 해야 되겠죠. 그 본질적이지 않았던 것을 몽땅 다 폐기처분하자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 폴 틸리히의 몸과 옷의 비유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듯이 몸은 옷을 필요로 하거든요. 걸쳐야 됩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 들어온 본질은 아닌 문화적 모습이지만 그것을 우리가 다 제거할 필요는 없어요.

이러한 점에서 조금 옆으로 나가는 이야기입니다만 여성신학쪽에서 간혹 기독교 2천년 역사에 가부장적인 그런 질서가 너무 견고하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제거하지 않으면 그거는 복음일 수 없다. 그러한 주장을 많이 합니다. 그건 틀린 이야기들이 아니에요. 그러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어거스틴의 그런 진술들에 있어서도 오늘 우리의 시각으로 보면 말되 되지 않는 여성 비하적인 발언들이 있죠. 그러나 그것은 일부분입니다. 한 부분이예요. 그 어거스틴에 의해서 가부장적인 그러한 관점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는 그 성적인 문제, 남성과 여성이라고 하는 구별, 이러한 것에 대한 관심은 많지 않는 거예요. 하나님, 그분의 계시 말씀, 그런 것들에, 모든 것을 거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고요. 네 그것이 교회 현실에서 여성들을 향한, 오늘 우리의 시각으로 볼 때 마땅치 않는 그러한 면들이 있기는 있습니다. 그러한 것은 작은 것일 뿐만 아니라 이런 것들을 생각해야 되는 거예요.

아무리 뛰어난 영성가, 신학자였다고 하더라도 그 시대의 정신이죠. 시대정신, 그것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거스틴이 언제 시대 사람입니까 4세기말 5세기 그때 살았던 사람이거든요. 그런 사람들에게 가부장적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해서 그가 하고 있는 신학적 이야기들을 우스운 것처럼 취급한다면 그건 그것 자체가 제가 보기에는 역사를 정확하게 내다보는 게 아니라고 봅니다. 동양으로 오게 되면 그것보다 더한 일이 얼마나 많겠어요. 동양과 서양을 제가 지금 딱 부러지게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올라가게 되면, 그러니까 그건 일종의 문화라고 하는 겁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요. 가부장적이라는 문화속에 있어서거든요. 그런 문화가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러한 문화안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 나온 내용 알갱이조차도 잘못이다. 그렇게 과도하게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여성 신학자들도 스펙트럼이 넓거든요. 온건파로부터 중도 극단적인 데까지 나가게 되잖아요. 가부장적 질서에서 나온 모든 기독교 교리는 잘못되었다. 그래서 이렇게 해체하고 탈교회쪽으로 나가는 분들도 있지 않습니까? 네 그렇게 해서 하나 하나 그런 것들을 다 우리가 부정하기 시작하며 바울 같은 사람도 인정할 수가 없는 거죠.

그리고 예수님도 인정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에게서도 가부장적 태도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오늘 시각으로 볼 때 마뜩치 않는 그러한 것이 없을까요? 예수님은 실질적으로 글을 쓰거나 뚜렷하게 어떠한 자기 입장들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우리가 소상하게 알 수 없습니다. 복음서에 나와 있는 것들은 다 사도에 의해서 간접적으로 전달된 것이거든요. 직접화법이 아니라 간접화법입니다. 사도들에 의해서 이해된 예수님의 말씀인거예요. 그런 것에 기초해서 예수님의 여성관 이런 것들을 말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제가 지금 제가 지금 사도들에 의해서 이해된 예수님이 말씀이라고 했는데 바로 거기에 대답이 있습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은 하나의 관점이거든요. 그 분의 모든 것들을 다 담아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는데 부활로 현현하셨고 그러한 핵심적인 케리그마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한 관점으로만 예수님의 공생애를 재조명한 결과로 나온 문서가 복음서라서 거기서 예수님의 모든 세계관을 완전하게 읽을 수가 없습니다. 이게 좀 말해갖고는 좀 무책임한 것이 될 수 있는데 이야기가 옆으로 나가서 그렇습니다. 문화와 종교의 관계들을 좀 이렇게 구분하면서 봐야지 그러한 문화를 종교의 본질인 것처럼 딱 집어놓고 말한다면 여기에 인제 실체적 진실로 들어가는데 좀 어려움이 있는 거죠. 조금 더 여기에 대해서 이야기할 까요. 오늘 우리가 나가야 될 공부내용이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에 다른 내용을 좀 짚어도 될 것 같습니다. 또 강의하고도 연관이 안 되는 것은 아녜요.

미국의 기독교가 주로 복음주의적이고, 복음주의적이라고 하는 것은 근본적이고 보수적이다 그러한 뜻입니다. 그러한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된거든요. 그러니까 한국에 안티기독교를 하는 분들이 상당한 경우에 미국이라는 옷을 입은 문화를 공격하거든요. 기독교 본질이 그것이 아니거든요. 기독교 제국주의, 이렇게 이야기를 많이 하잖습니까? 제국주의적인 요소가 있어요. 유럽의 역사와 더불어 같이 왔기 때문에 문화의 옷으로 입은 겁니다. 네 그러한 옷을 중심으로 해서 나쁜 놈 이렇게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기본적으로 대화는 불가능한거예요.

제가 지금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이 문구가 초기 기독교에서 신앙의 본질이 아니라 그 본질을 담는 하나의 그릇, 혹은 본질이라고 하는 몸을 감싸는 옷과 같았다는 그 이야기를 드린 거예요. 그건 그렇게 끊어서 이야기하기에는 조금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문화와 종교의 관계를 동정녀 탄생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그 관계를 딱 맞춰서 말하기는 좀 곤란하고 그냥 큰 틀로 봐서 그렇다고 하는 겁니다. 여기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는 몸에 해당하는 부분도  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본질에 속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나 이것이 기독교 신앙이 처음 시작할 때 중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복음을 받아들인 일정한 사람들의 세계관과 연관되어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문화적인요소가 있다. 그렇게 말씀드린 겁니다. 네 한국교회에서 가장 까다로운 그리고 문제가 많이 된, 종교 재판꺼리가 된 동정녀 탄생에 관한 이야기를 지난번에 이어서 오늘 두 번째로 공부하게 되겠습니다. 오늘 이거를 우리가 마치게 될 겁니다. 아마 지금도 이 강의, 이런 것들이 외부에 나가게 된다면 정용섭 목사 자유주의 신학자, 혹은 이단 이렇게 까지 생각할 사람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 1년 선배 서울 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로 가 있는 분도 목사 인수받을 때 동정녀 탄생을 믿느냐 않느냐 그러한 질문을 받고 여러 학자들의 의견을 둘러써 말하다가 이 친구는 동정녀 마리아 출생을 믿지 않는다. 그런 이름이 붙어서 목사 안수 못 받았고요. 그것 때문에 군목도 오갔고 많은 불이익을 받았고요. 지금까지도 그러한 비난을, 지금은 좀 많이 약화 되었습니다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난을 받았거든요. 지금 웬만한 보수적인 그런 입장에 있는 사람들을 동정녀 탄생을 믿지 않으면 이거는 이단이다 이렇게 까지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이게 참 어려운 문제예요. 진리가 아닌 것들 진리라고 주장하면서 그걸로 상대방을 매도하는 이러한 것들, 글쎄요. 어디에 책임이 있을까요? 일단 본인들이 잘 모르는데 책임이 있을 거고요. 모르면 알려고 하면 좋을 텐데 그것도 잘 안되고요. 이건 조금 더 넓게 보면 이러한 학문적인 논의가 되기 이전의 사람들은 동정녀 탄생이라고 하는 것이 왜 이렇게 사도신경에 들어오게 되었을까 판넨베르크가 하는 설명을 전혀 몰랐을 거란 말입니다. 대다수가 동정녀 탄생이라고 하는 이걸 그냥 문자적인 의미로 받아들였을 텐데 이것이 참 그렇죠. 그렇게 믿는다고 해서 절대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근본을 찾아가보자 이런 뜻이죠. 네 제가 가지고 있는 책 103쪽입니다. 오늘도 지난주에 이어서 중요한 내용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읽겠습니다.

이 전설의 동기에 대해서,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라고 하는 이 전설, 이 전설적 요소가 있다고 했습니다. 부활은 전설적 요소가 아니라 역사적 요소가 있는 반면에 동정녀 탄생은 전설적 요소가 있는 거예요. 전설의 동기에 대해서 우리는  여전히 무언가 정확하게 접근해야만 한다. 이것이 가리키는 바는 분명히 다음과 같다. 이 전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설명한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을 설명하는 하나의 서술, 서술이라고 하나요? 문법적으로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주부, 술부, 술어인거에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 중심인거죠. 그러나 이 전설이 그 뿌리를 여전히 유대적 영역에 두고 있기 때문에, 정확히 말해서 헬라 사상으로 각인된 유대 기독교에 두고 있기 때문에 이 전설에 관계된 이들은 ‘하나님의 아들’ 칭호를 최초로 제시하고 설명한 이들이 이 칭호에 담긴 오래된 의미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는 것을,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됨은 결코 초자연적 출생을 요청하지 않았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문장이 좀 길고 복잡하네요. 내용은 간단한 겁니다. 이 전설에 연관되어 있는 사람들은 이 동정녀 마리아게서 나시고 라는 이 말의 의미를 전혀 알지 못했다. 말이 잘 안되네요. 다시 해야 되겠습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하는 이 전설, 이러한 신앙에 관계된 사람들은 원래 그것의 뿌리인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칭호를 최초로 전한 사람들이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라는 말을 알지도 못했고 필요로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거죠. 그들은, 바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하는 사실을 신앙의 내용으로 삼은 그러한 사람들은, 처음으로 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이 사실을 전하고 그러한 신앙의 중심에서 나왔다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한거죠. 그게 바로 정통이죠. 정통이라고 하는 말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서로 칭호에서 혼란, 다툼 그런 것들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추론해낼 수 있다. 즉 예수의 동정녀 출생을 언급했던 첫 번째 사람들이 이를 통해서 분명하게 의도한 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었다. 새로운 해석,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줄기차게 밀고 나가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또 다른 부류는 이것을 해석해 보려고 한거죠. 따라서 이 이야기의 신학적 동기는 예수가 자신의 부활을 통해서, 또한 요한의 세례 이후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것이다. 신학적 해석이 바로 거기에 있는 거죠. 이러한 신학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하는 그러한 구절을 그들은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헬라적으로 유대기독교였기에 헬라적인, 헬라 사람들은 그러한 특별한 존재로 출생해야 된다고 하는 사실을 당연히 생각했죠. 유대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죠. 헬라적 유대인들이 아니라 팔레스타인계 유대 그 뿌리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헬라적인 사상에 들어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제가 강의를 시작하면서 문화적인 요소가 있다.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예수의 동정녀 출생 이야기의 전설적 성격에 대해 지금까지 언급된 이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신학적 의도에 담긴 그것의 진리순간*을 보아야만 한다. 문제들, 문화적인 요청으로 나온 한계들이 있지만 그러나 여기에, 이러한 신학적 해석이니까요. 여기에 담긴 진리가 드러나는 순간을 보아야 한다. 바하이트 모멘트라고 하는 독일어입니다. 제가 역주를 달았어요. 뒤쪽에 보면 나옵니다.

*Wahrheitsmoment(진리순간)이라는 말은 예수의 본질이 원시 기독교 신자들에게 드러나고 인식되는 그 순간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예수의 동정녀 출생이 비록 전설적 성격의 지평에 놓여 있지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부활한 메시야라는 인식과 고백이 담겨있다는 점에서 기독교 신앙에서 여전히 진리라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다.

이해가 되시죠? 예수가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하는 이 신학적 동기는 바로 예수의 부활에서도 역시 타당했다. 왜냐하면 이 신학적 동기가 부활 이전의 복음 선포에 대한 확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신학적 동기와 불가피하게 연결되어 있는 그의 고유한 인격체에 관계된 확증, 따라서 이 인격체의 근원으로 소급되고 있다고 하는 일종의 확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출생, 그리고 부활 이런 모든 것들이 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그러한 신학적 동기에 있다고 하는 거죠. 이 이야기가 제가 앞에서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이 전설적 성격과 부활에 대한 역사적 성격이 구별된다고 이야기했는데 여기서는 비슷한 것처럼 말하고 있어서 좀 혼란이 올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동정녀 마리아는 분명히 전설적 성격이 있는데요. 그럼에서 불구하고 여기서 판넨베르크가 이야기한 대로 여기에도 진리의 순간이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한 차원에서 본다면 동정녀 출생과 부활, 이게 연결되는 문제죠.

이러한 신학적 동기는 이미 앞서 언급한대로 원시 기독교에서 예수의 선재성에 대한 사상으로 연결되었다. 십자가에 달린 자의 부활은 예수가 하나님과 일치한다는 점을 확증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예수가 그의 사명에서, 그리고 그의 인격체에서 그가 인간적으로 출생했지만 하나님의 영원성과 하나가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선재성, 예수님이 역사적인 한계안에 있는 게 아니라 선재하셨다고 하는 것인데요. 요한복음에 나와 있는 로고스 개념으로 설명된 것처럼 이미 창조당시에 예수님이 로고스로 모든 것을 만드셨다, 만드시는 로고스였다 그렇게 표현되잖아요. 선재성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성과 하나되었다고 하는 뜻입니다.

선재성이라는 생각은 후에 선재적인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되었다는 표상 구조에서 동정녀 출생과 연결되었다. 복잡해지기 시작하네요. 여기에 성육신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incarnation.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되었다고 이러한 어떤 표상구조. 그러한 신학적 사유, 여기서 동정녀 출생과 연결되었다. 선재성, 성육신의 신학적 사유, 동정녀 출생,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 이런 것이 연결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평신도들이 이런 책을 따라서 읽기가 힘든 겁니다. 내용전체도 우리가 처음 신앙생활을 하면서 들어보지 못한 것이지만 더더구나 단어 하나하나의 신학적 의미를 우리가 충분하게 공부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도 우리가 다른 수가 없습니다. 하루 이틀에 반짝 공부해서, 1, 2년동안 반짝 공부해서 해결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꾸준한 공부를 통해서만 가능한 건데요. 일반 교회 목사들도 이 신학적인 내용을 잘 모릅니다. 신학에 대한 관심도 없고요. 신학교 다닐 때도 그러한 훈련도 잘 되지 않았고 말이죠. 그런 것이 없어서도 목회가 가능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히려 그런 것이 없어야 목회가 능률적이 된다는 목회구조를 한국교회가 갖고 있지 않습니까?

선재성이라는 생각은 후에 선재적인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되었다는 표상 구조에서 동정녀 출생과 연결되었다. 성육신 사상은 기독교인들이 부활절 신앙에 근거해서 나사렛 예수의 인격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현재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했는가라는 점을 논리적으로 설명한다. 하나님의 현재, 예수 그리스도 인격안에 있는 하나님의 현재, 이거는 성육신을 의미하는 것이죠. 성육신 신앙은 예수의 사신, 복음선포와 직접 연관되어 있다. 왜냐하면 예수는 도래하는 하나님의 현재를 자신의 고유한 등장에서, 즉 자신의 말과 행위에서 표명했기 때문이다. 성육신 신앙은, 성육신, 하나님이 육을 입었다는 뜻입니다. 이룰成, 육체肉, 몸身, 인카네이션. 한자를 제가 정확하게 뜻풀이를 했나요? 성육신 신앙은 하나님이 현재적으로 예수와 함께 한다는 확신이 기독교 공동체에서 최종적인 형태를 이룬 형식이다. 여러분들이 밑줄 그어 놓고 기억해야 하실 부분입니다. 성육신하면 늘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 그렇게 공식으로 외울 뿐이지 이렇게 공부는 우리가 알지는 못하고 있지 않겠어요? 이 경우에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인간됨과 육신입음에 대한 신앙은 예수의 출생 역사에 담겨있는 고유한 목표와도 상응한다. 이처럼 성육신적 신앙고백은 예수가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며, 인격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성육신 사상은 예수의 동정녀 출생에 대한 전승이 근원적으로, 중요한 부분이에요,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설명과 모순되며, 또한 이 신학적 동기가 이러한 전설의 출현에 근거한다는 설명과 모순된다. 왜 모순된다고 하는지 보세요. 모순된다고 하는 사실은 전달되었겠죠? 성육신 사상은 예수의 동정녀 출생에 대한 전승이 예수의 본질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그러한 설명, 그런 것이 모순이 된다고 하는 거죠. 왜냐하면 이건 더 근원적인 것이기 때문에. 고렇게 설명이 되나요. 뒤로 나가게 되면 설명이 나올 것입니다.

즉 예수가 하나님에 의해 마리아로부터 출생했다는 사실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면, 그는 선재성이라고 하는 차원에서 볼 때 그 이전에는 결코 하나님의 아들일 수 없었다는 말이다. 동정녀 마리아라고 하는 그 사실, 초자연적 그러한 출생이라고 하는 사실이라고 하는 차원에서 예수님이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한다면 성육신이 말하려고 하는 예수님의 선재성 사상과 모순되는 것은 분명한 거죠. 서로 모순되는 것인데 기독교 교리안에 그대로 들어와서 자리를 잡게 된 겁니다. 그렇게 자리 잡게 된 것은 어떤 논의들이 그러한 예수님의 칭호에 대한 이해와 인식 그런 것들이 일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단계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가보죠.

예수의 선재성이라는 의미에서 그가 하나님이라는 설명, 예수가 선재했다고 하는 차원에서 그가 하나님이라고 하는 설명, 그리고 그의 동정녀 출생에 대한 표상을 통해 이러한 선재성과 모순된다는 설명이 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진도 그냥 나가야 되겠네요. 일일이 제가 설명을 하려다 보니 복잡해지고요. 우리는 이런 갈등 가운데서 선재성 사상에 보다 큰 실질적 무게를 두어야만 한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이해한, 인식한 하나의 특징인 선재성 사상이 그게 정말 중요했다 그거죠. 만약 예수가 부활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부활이 부활절 이전의 사명을 보증한다고 하는 의미이며, 또한 이 사명이 예수의 인격과 분리되지 않고 오히려 그의 신적인 권능을 기초하고 있다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사실은 그의 세례나 공생애의 출발, 그리고 그런 것들의 시작과 특별하게 관련된다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인간성을 처음부터 구별해주고 있는 것이다. 선재성 사상을 지금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과 하나가 된다는 거죠.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의미인 예수의 부활은 그의 출생에 근거해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선재성 사상에서 표명되고 있듯이 하나님의 영원성과 관계되어 있는 게 틀림없다. 하나님의 아들은 부활을 통해서 확증되는 거고요. 초대교인들에게 확증으로 닿게 되었고요. 그 부활은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라고 하는 여자에게서 동정녀 탄생이라는 초자연사건을 통해서 출생했다는 그런 거보다는, 그런 거에 관계된 것이 아니라 선재성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영원성과 관계되어 있음이 틀림없다.

전체적인 그림은 들어오죠. 복음의 핵심에는 부활 경험이 있습니다. 이거는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빠질 수 없는 것, 정말 기독교 신앙의 실증중의 실증이라는 것, 이것은 바로 그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이고요. 그것에 근거해서 우리 공생애에는 초기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나라, 통치, 곧 하나님이 그의 인격과 삶에 편재했다고 하는 사실이 드러나는 겁니다. 그쪽으로 들어가게 된 거예요. 기독교 신앙이요. 네 그런데 근거해서, 근거 했다기보다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하나님과 일치하는 것이고 당연히 예수님은 선재하는 분으로 고백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선재성, 하나님의 영원성과 관계되는 것, 이게 핵심이었지 동정녀는 아니었다는 거죠. 그 다음 패러그래프요.

오늘의 기독교인이 이러한 정황에서,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는 내용을 예배의 고유한 신앙고백으로 아뢸 수 있는가? 지금까지 숙고한 모든 것은 이 문장이 더 이상 우리의 신앙고백일 수 없다고 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오늘의 기독교인은 예수의 동정녀 출생이 유래하고 있는 그 의도를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일까? 참 곤란한 질문이죠? 참 어떻게 해야 되냐 하는 것이죠? 출생 설화에 있는 그 표현의 의도가 하나님의 영원한 본질 가운데서 예수의 아들됨이 담지하고 있는 선재성 사상으로 확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렇게 되었지만 결국 어려운 점이 그것이 원래 본질이 아니었다고 하는 사실 앞에서 여전히 우리가 사도신경의 이 내용을 신앙 고백할 수 있겠냐 하는 거죠. 오늘의 기독교인은 이 의도들, 신학적 의도들을 보다 확실하게 구분해낼 수 있다. 이러한 의도, 동정녀 마리아가 결국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사실과 연관되고 선재성과 결국은 연관되는 진리 순간이 있었다고 하는 겁니다. 이거는 우리가 잘 구별해 낼 수 있는거죠. 거기서 이러한 사도신경이라고 하는 형식이 신앙고백으로 자리잡게 된것입니다.

판넨베르크는 이 문제, 즉 본질은 아니었지만 어느때에 해석으로 들어오게 된, 그러나 오늘의 어떠한 현실 개념에서 체험하기 힘든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하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는 그러한 질문 앞에서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우선 첫 번째는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 실제로 역사적 인물인 나사렛 예수와 일치한다는 점이 중요했다. 하나님은 인간적 조건 하에서 인간적으로 위장한 것이 아니다. 즉 자기 의지에 따라서 다시 내던져버릴 수도 있는 그런 위장, 가짜로 머문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스스로 이러한 인간과, 그리고 이러한 인간성과 궁극적으로 결합하였다.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라고 하는 구절, 특별히 동정녀 마리아라고 하는 구절에서 우리가 분명하게 생각해야 될 것은 하나님이 이러한 구체적인 역사적 예수와 하나 되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일단 고렇게 하고 지나가죠. 두 번째 요소가 여기에 있다. 이는 예수가 자기 역사의 어떤 한 시점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인간성 가운데서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요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통치를 중재하는 자였다고 하는 것, 그리고 지금도 그렇다는 것이다.

두 가지예요. 하나는 하나님이 아주 구체적인 인간현실과 하나가 되었다고 하는 것, 실질적으로 예수는 인간, 그 모습 그대로 가지고 있었지. 가짜가 아니었다. 위장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 하나였고 그리고 예수는 출생 이후나 세례 받은 이후나 부활이후가 아니라 선재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가 존재되었다. 그러한 사실들이 여기에 핵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동정녀 출생이라고 하는 이 form 형식은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와, 그리고 이 인간과, 또한 이 인간을 통한 인류와 하나님의 결합이 갖는 궁극성을 말한다고 하겠다.

대개의 기독교인들은 오늘날 이러한 의도에 대해서 예수의 동정녀 출생이 갖는 역사를 제시하기보다는 인간적으로 무언가 다른 표현방법을 찾아보려고 했다. 다른 방법, 동정녀라고 하는 것을 빼버리는 것이죠. 더 나아가서는 사도신경자체도 포기하는 것이죠. 오늘 이 시대에 맞지 않는다고 말이죠. 이게 재미있는 일인데요. 그러한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신앙적 전통, 신앙고백 이런 것들을 좀 소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어느 쪽이냐 하면 이게 좀 재미있는 거예요. 양극단이 거기에 다 속해있어요. 조금 진보적이라고 할까요? 자유주의적이라고 할 까. 그런 쪽에 있는 사람들이 그런 것을 좀 소홀하게 생각합니다. 사도신경, 그거 한물갔다 그런 식으로요. 그리고 또 침례교회가 많이 그럴 테인데 현재 보수적이면서도 현대적 감각을 가지고 있는 교회들이 이러한 신앙고백을 좀 멀리합니다. 기독교 신앙을 개인화하는 거죠. 개인적으로 믿고 위로받고 그런 쪽으로 가 있습니다. 이게 참 이상하고 아이러니한 거죠. 좌우적으로 극단적으로 보는 사람들, 다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고요. 그렇게 같이 양쪽에 있는 사람들이 사도신경을 조금 변형해 보려고 하는 자기들끼리의 신앙고백으로 대체적으로 쓰는 그런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우리가 신앙고백을 어디서 어떻게 드러내야 할는지 확실하지 않다. 우리가 물려받은 표현이 우리의 선택이 아닐지라도 이러한 신학적 의도에서 충분히 조화를 이룬다. 신학적으로 해석만 분명하게 하면 동정녀 마리아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고 현실개념에서 적절하지 않지만 그러나 받아들일 수 있다. 큰 문제가 아니다. 신학적의도는 두가지 앞에서 이야기한 거예요. 그 바로 예수, 그는 위장으로서 어떻게 나타나는 게 아니라 가현설과의 투쟁을 염두에 두고 한말입니다. 그게 아니라 실질적인 인간예수에 의해서 하나님의 통치가 현재했다고 하는 사실이고요. 또 하나는 그 예수가 어느 때를 기점으로 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게 아니라 선재적이다 고 두가지 신학적 의도를 담고 있다고 하는 말입니다.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는 더 논의할 수 있는 거죠. 어쨌든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하는 고 구문이 고 구절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 의미가 바로 그 두 가지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큰 문제가 없는 겁니다.

이 조화는 이 신앙고백이 교회의 신앙적 표현으로서 초기 기독교인들로부터 이어져 내려와서 오늘에까지 대물림 했다고 하는 사실을 정당화한다. 2000년 동안 계속해 내려왔죠. 여기서 그런 것들을 포기하고 다른 대안을 찾아보려보려는 것은 단순히 이러한 형식을 바꾸는 것만이 아니라 이를 통해서 전체 신앙고백을 훼손시키게 될지 모른다.* 형식이 바뀌면 본질도 바꾸어져 버릴 염려가 많이 있습니다. 형식제일주의라는 것은 아니고요. 그럴 위험성이 분명히 있습니다. 왜냐하면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라고 하는 그 표현형식에 담긴 역사적 배경이 손실되기 때문이에요. 그 신학적 논쟁, 투쟁, 그들의 치열한 신학적 고민들, 그런 것들이 거기에 면면히 들어있거든요. 그리고 그런 형식에 도달한 거거든요. 형식을 바꾸어 버리면 거기에 딸려 있는 역사의 내용들도 분분히 흩어지고 말겠죠. 이런 점에서 저는 하나님 아버지라고 하는 표현을 가부장적 표현으로 묶어버리고 이건 우리가 쓸 수 없다고 강조하는 것도 지혜롭지 않다고 봅니다. 고 부분, 고거 독일어에 특별한 뉘앙스가 있어서 제가 역주로 달았어요. 고 부분 잠깐 보겠습니다. 형식을 바꾸면 형식만이 아니라 신앙고백 자체를 훼손하게 될지 모른다는 고 번역으로는 불가능한 독일어 뉘앙스가 있어서 그래요.

*이 문장의 독일어 원문은 다음과 같다. Die Alternative wäre 이 베레라고하는 특별한 용법이 있거든요. be동사가. 오래되어서 잊어버렸는데. 특별한 용법이 있었습니다. 접속사라고 하던가요. ja nicht eine Änderung nur dieser Formulierung, sondern damit des ganzen Bekenntnisses überhaupt. 판넨베르크의 신학이 기독교 전통과 단단히 연대해 있다는 사실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다. 동정녀 출생문제가 새로운 현실성 안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어색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방식으로 신앙고백을 하려고 한다면 이는 단순히 형식의 변화만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신앙고백이 달라지기 때문에 매우 위험한 발상이라는 점을 그는 지적하고 있다. 판넨베르크가 말한 대로 예수의 인간성과 선재성을 동시에 드러내고자 하는 신학적 구도죠. 동정녀 출생의 신학적 의도를 분명히 인식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고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체 기독교의 일치를 위한 소중한 신앙고백으로 자리매김될 수 있을 것이다. 제가 역주를 달은 것이 결론 같네요.

네 그래도 판넨베르크가 쓴 마지막 문장을 읽는 것으로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이 신앙고백은 역사를 통해서 고전적인 형식으로 이어져온 기독교 일치의 징표이며, 또한 이 신앙고백에는 오늘의 교회가 대체해버릴 수 없는 예배적 기능이 기초하고 있다.

두 가지로 이 구절을 오늘에도 여전히 우리가 고수해야 된다고 말하는 겁니다. 두 가지가 이거예요 기독교 일치의 징표다. 기독교 일치의 징표,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신앙고백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거죠. 바꾸기 시작한다고 해보세요. 아프리카교회, 한국교회, 일치가 깨어질 수 있거든요. 일치의 징표이고 또 하나는 예배적 기능이 기초하고 있다. 2천년동안 같은 신앙고백을 함으로서 예배가 2천년 여기만 아니라 과거와 현재 미래 전체가 다 연결된다고 하는거죠. 우주적 예배의 차원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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