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강 - 7장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묻히셨으며

안녕하세요? 오늘은 29강입니다. 책으로는 7장예요. 제목이 다음과 같습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묻히셨으며. 강의로는 29강이 되겠습니다. 대체적으로 책의 중반은 넘은 것 같죠. 거의 중반에 해당되는 군요. 책이 223쪽까지 있으니까 오늘 우리가 해야 될 대목이 108쪽이니 반 조금 넘었군요. 지난 9월부터 시작해서요 10, 11, 12, 1, 2, 3월가지 7개월을 했군요. 7개월동안 반을 했으니 앞으로도 7개월이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1년 정도로 예상을 했는데 진도가 예상보다 조금 늦는가요. 아니면 제가 예상을 잘못했나요?

오늘 우리 중요한 부분으로 점점 들어가고 있습니다. 전체 사도신경 강해에서 지금 앞에서 한 것은 어떻게 보면 덜 중요하다고 말할 수 없지만 핵심, 말표현이 쉽지 않군요. 핵심중에 핵심이라고 말할 수 없겠죠. 안해도 되겠죠. 앞에는 나는 믿습니다 하나님을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시 하나님을 우리 주를 그리고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그리고 7장 지금부터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이야기하는 거니까 케리그마중의 케리그마라고 할 수 있겠죠. 모든 기독교 신앙의 내용들이 여기서부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가와 부활, 이거죠. 바울도 이 두 개 이외에는 그 이상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다고 했죠. 그가 자기 모든 지나온 인생살이에서 추구했던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기게 된 그러한 사유의 전환, 패러다임 쉬프트는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에 의한 것입니다. 그 시각으로 세상을 새롭게 이해하게 된 거고요. 이러한 사도 바울의 신앙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그대로 있습니다. 그게 핵심이죠. 이게 우리가 앞으로 이 부분을 다루면서 이야기가 나올 거라고 생각하고 앞에서도 비슷하게 언급했을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그것을 한 번 더 정리하고 넘어가야 되겠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고 하는 이런 것들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안다고 하는 것은 세례받기 위해서 문답으로 외운 거죠. 그리고 계속 꾸준하게 들은 설교와 성경공부 그런 것을 통해 우리들의 머릿속에 각인이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 말이죠. 그렇게 각인되어 있는 것하고 아주 그거를 실질적으로 이해하는 것과는 좀 차이가 있습니다. 그거는 드러나지는 않아요. 이 실질적으로 이해하고 있는지 깨우침 쪽으로 들어갔는지 아니면 교리문답 정도로 이해하고 있는지는 판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냥 하는 말로 얼굴에 쓰여 있지도 않고요. 잘 안다고 해서 얼굴이 더 훤하거나 시원찮다고 해서 이상하거나 그런 것도 아니거든요. 잘 안다고 해서 기도를 매끄럽고 유창하게 잘 하는 것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고 모른다고 해서 기도를 못하는 것이 아니고요. 믿음도 믿음으로도 잘 나타나지 않아요. 정말 그 사실을 리얼하게 이해하고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그걸 모르는 사람들보다 거기까지 들어가지 못하고 문답정도로 알고 있는 사람들 보다 믿음이 더 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거는 다른 문제라고 하는 거예요. 물론 이걸 엄밀하게 말하면 실질적으로 이해하고 그 세계 속에 들어간 사람만이 믿음이 강한 거죠. 엄밀하게 말하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제가 바로 앞서 이야기한 믿음이라는 것은 엄밀성이라기보다도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통용되는 그런 믿음의 수준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 것은 대개 기도 잘하고 헌금 잘하고 인격적이고 리더가 되고 그런 것을 잘하면 믿음이 좋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은 훈련을 통해서 얼마든지 가능한 거예요. 그러니까 잘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저 사람이 정말 정말 기독교 신앙을 알고 있는지 아니면 그냥 들은 풍월로 머물러 있는지 분간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제가 뭐를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모른다고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을 말하려고 했는데 다른 것을 이야기를 하다가 그 흐름을 깜박 놓쳤어요. 이야기하다보면 나오겠지요. 십자가와 부활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들은풍월로 아는 정도가 아니라 어떤 새로운 세계 변화에 이르러야 되는 거죠. 바로 그겁니다. 제가 깜박 놓쳤다고 하는 것이 바로 그거네요. 바울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복음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거기에 세계에 들어가니까 전혀 다르게 보이는 거예요. 세상이요. 다른 것들을 내려놓을 수가 있는 거예요. 그렇게 자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내려놓고 배설물처럼 내려놓을 수 있었다는 것이죠. 무슨 말이냐 하면, 쉬운 것은 아닙니다. 저도 이렇게 도사연하고 말하지만 바울이 신앙의 경지에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게 방향이라고 하는 것을 제가 알고요. 그렇게 갈려고 기회가 되는대로 노력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런 거죠. 세계를 전혀 새롭게 보는 거예요. 이 예수를 잘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세상을 새롭게 보지는 못하잖아요. 그러면 우리 신앙생활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강남지역이 서울의 강남지역이 서울의 다른 지역보다 기독교인의 프로테지가 높다고 그럽니다. 서울이 다른 시골, 시골이라기보다도 서울이외의 지역보다 기독교의 프로테지가 높다고 그래요. 그중에 강남지역이 높다고 합니다. 거기에 대형교회들 잘나가는 교회들 있잖습니까? 제가 어느 한 두 교회 어떤 기독교인들을 염두에 두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신앙 형태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나 인제 강남지역의 기독교인들이 많기도 하고 어떤 기독교적인 특징들을 많이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연관 지어 하는 이야기입니다. 열심히 교회 나가고 주일 안 빠지고 그리고 이런 저런 좋은 성경공부 꼭 다니고 말이죠. 세련된 그러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지만 똑같이 부동산 투기하고요. 그렇게 자식들을 똑같이 그런 방식으로 공부시키고 그냥 똑 같이 사는 거죠. 오늘 이 시대가 요구하는 사람을 영악하게 잘 따라가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기독교인들이라고 특별히 다른 모습들이 있을까요? 기독교인들이라고 해서 세상 사람들을 보다 더 도덕적이지도 않고 더 못하지도 않아요. 대개 그 수준입니다. 이게 조금 우리가 부끄러운 일들이죠. 왜 그러냐? 제가 그것을 기독교인들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종교인들도 마찬가지이고요. 인간의 한계이기도 하고요. 그런 것들이 완전히 세워지지 못하면 구원 못 받느냐 그런 문제들이 아니고요. 그 자체가 불행한 거죠. 기독교 영성에 들어가지 못하니까 불행한 거죠. 적당하게 양다리를 걸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게 인간의 한계이기 때문에 이해를 하면서도 그것이 답이 아니기 때문에 연민을 느낀다고 하는 겁니다. 세상을 전혀 다르게 봐야 하는 거죠. 생명의 토대가 어디 있느냐 새롭게 보는 겁니다. 저금통장 채권 돈 월급 연봉 자식들 좋은 대학교, 우리가 흔하게 이야기하는 그게 내 길이 아니라고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러면서 또 따라가고 있는, 그런 것들로 우리는 생명이 확보된다. 그러한 경쟁을 통해서 뭔가 살아갈 생명이 보장된다. 예수님의 사람들을 아마 속으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걸 위해서 예수를 믿는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예수 믿으면 그런 것도 잘되고 이것도 잘되고 다 잘되고 이거 말이죠. 이게 불행한 겁니다. 사실은요. 저는 그렇게 사는 기독교인들을 딱 꼬집어서 왜 그렇게 사냐? 예수 믿는 사람이 뭐 그러냐? 그런 말씀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크게 다르게 사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러나 그게 불행한 것만은 분명합니다. 왜 불행하냐?

제가 이 문제를 더 설명할 필요가 없겠죠. 설교시간도 아닌데 그만하겠습니다. 그러나 한마디만 이야기하고 나가면요. 수업 들어가야 하니까요. 결국 이러한 우리의 삶, 새로운 시각으로 세계를 보지 못하는 이러한 삶은 여전히 기독교 영성으로의 중심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하는 것에 대한 반증(反證), 혹은 방증(傍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증이라는 말도 있고 방증이란 말도 있어요. 한자요. 쓰기에 따라서 다른데 혼동도기도 하고 같이 써도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한 거죠. 기독교 신앙의 영성에 깊이 들어가게 되면 무엇을 내려놓아야 할지 무엇을 유지해야 될지 그게 분명히 구분이 되는 겁니다. 제가 구분된다고 해서 선악이원론 그런 차원으로 드리는 말씀은 아녜요. 생명의 중심으로 치고 들어갈 수 있는 그러한 힘이 생긴다고 하는 것이죠.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십자가 부활인데 오늘서부터 본격적으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앞서 보았던 동정녀 마리아 탄생 이것은 그렇게 중심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방식을 통해서 초기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고 또 그것이 헬라파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어떤 방식으로 신앙고백 되었는가. 그걸 짚었어요. 그건 다 좋은 공부들입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오고요. 8장에는 지옥에 내려가셨다고 하는 특별한 항목도 나오고요. 9장에 부활이야기가 나오고요. 그다음에 10장 승천, 심판 그런 정말 중요한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어요.

앞서 한 강의는 조금 느슨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거는 그냥 우리가 신앙생활 할 수 있는 어떤 기본 토대라고 해야 될까요. 아니면 본격적으로 게임을 하기 전 워밍업을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네 워밍업이죠. 그러나 지금으로부터는 본격적인 문제예요. 이거는 어떻게 이렇게 저렇게 양보하거나 타협할 수 있는 그러한 문제들은 전혀 아닌 겁니다. 십자가부활, 승천 재림 이런 거니까요. 서론이 좀 길었습니다. 본문으로 들어가 보죠.

7장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묻히셨으며, 본디오 빌라도 라고 하는 사람이 이렇게 2천년동안 수많은 기독교인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악의 대명사처럼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에도 이 사람의 이름이 올라왔군요. 그러한 제목입니다. 본문을 좀 보겠어요.

사도신경이 예수의 고난을 각각 세목별로 얼마나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는지 놀라울 정도다. 하나 하나 떼어서 설명한다고 하는 거죠. 로마 총독인 본디오 빌라도에 대한 언급은 예수의 고난이 매우 공개적으로, 그리고 확실한 역사적 불빛 가운데서 전개되었다고 하는 점을 가리킨다. 이 사도신경의 진술 형식과 내용들이 좀 특이합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본디오 빌라도가 나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긴 한데 그 말은 꼭 그것을 전제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심판을 받은 것이거든요. 복음서 같은 데를 보면 본디오 빌라도에게 호의적 이예요. 복음서 기자들이 좀 그렇습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가능한대로 예수를 석방시키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공관복음서하고 요한복음서도 그렇죠. 복음서 기자들은 오히려 제사장, 민중들,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 십자가 처형에 대한 책임의 무게를 더 두고 있습니다. 어쨌든 오늘 여기 판넨베르크의 설명에 따르면 빌라도에 대한 언급은 예수님의 고난, 죽음 이것이 공개적이었고 확실한 역사적 사건이었다고 하는 거를 말한다고 하는 거죠. 이 사건의 개개 진행과정이 세세하게 묘사되고 있다. 세세하다는 것은 작은 문제까지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항목적으로 빠지지 않고 다 짚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묻히셨다고. 못 박히고 죽으시고 묻히셨다. 고난, 못 박힘, 죽으심, 묻히심 라고 하는 이러한 항목들이 하나하나 구분되어서 뭉뚱그리지 않고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묘사 가운데서 특별히 강조되고 있는 점은 예수의 십자가형이 그를 완전히 죽음에 이르게 했으며, 이 죽음은 매장을 통해서 마무리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매장까지 했으니까 그의 죽음은 완전한 죽음이다. 사도신경이 이렇게 쓴 이유가 있다고 거예요.

판넨베르크의 설명이 참 옳다고 봅니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을 확실하게 잡아주는 그러한 가르침 같아요. 그 죽음이 매장을 통해서 마무리 되었다는 것을 거기서 사도신경이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왜냐하면 교회의 영지주의적 적대자들이 영지주의 사람들, 그들이 믿음이 없었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교부들의 중심신학과는 거리가 있었던 거지요. 그러니까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는 것은 어떤 면에서 그렇게 결정적으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단도 다 믿음이 있는 거죠. 그 각각의 주장하는 내용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죠. 영지주주의자들도 나름으로 예수에 대한 깊은 신앙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너무 신격화했다고 할까요? 그래서 육신으로 살아난 예수님은 진짜 모습이 아니라 가짜다. 하나의 가현설이라고 해서 그냥 하나의 그림자처럼 나타난 것뿐이다. 그런 쪽의 주장을 한 사람들이 영지주의자들에요. 영지주의자 적대자들이 논쟁을 제기한 하나님 아들의 죽음이야말로 기독교인들에게는 죽음의 극복을 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지주의자들의 입장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 죽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거죠. 그렇지만 그 영지주주의자들과는 달리, 이거는 기독교 영지주의들입니다. 그들과는 달리 교부들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 중심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완전한 죽음이야말로 기독교인들의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을 보장한다는 것이죠. 차이가 있죠. 비슷비슷하면서도 차이가 있지요.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죽을 수 없다. 기독교 중심에서는 우리와 똑같이 죽었다. 그래야만 그를 통해서 우리가 죽음을 극복한다는 그러한 주장 충돌이 초기부터 있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형과 매장에 대한 주도면밀한 논의를 통해서만 이 사도신경 문서가 담고 있는 예수 죽음에 대한 해석을 따라잡을 수 있다. 그런데 사도신경은 이 시점에서 자기표현을 놀라울 정도로 절제하고* 있다. 오직 사건에 대한 일련의 결과만이 명시적으로 언급되고 있을 뿐이지, 예수 죽음에 대한 원시 기독교적 해석은 없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되죠? 뒤에 나오면 설명이 나옵니다. 뒤에 나오는 내용을 잘 따라가시라고 한 가지 보충설명을 하면 이렇습니다. 사도신경하고 초기기독교의 신앙표현들 이런 것은 아예 차이가 있다고 하는 거죠. 초기 기독교와 복음서와 서신들 이런 것들이 초기 기독교 신앙을 문서로 보여준 건데요. 거기에서는 예수님의 죽음을 해석했어요. 우리를 대신해서 죽었다든지 구약성서에서 이미 예언된 어떤 것이라든지 그런 식으로 해석을 가합니다. 그러나 이 사도신경에는 그런 해석이 없지요. 그러게 죽죽 나가고 있을 뿐이에요. 그런 것을 전제하고 들어보십시오.

사도신경에는 예수가 모든 예언자들의 운명을 감당해야만 했다는 고대사상이 (눅 13:33, 34이하) 개입되지 않았다. 이런 것들은 해석이었거든요. 그런 것이 없었어요. 이 신앙고백은 구약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예수 죽음의 神적인 필연성에 대한 일언반구도 없다. 신적인 필연성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하는 그게 다 해석이거든요. 예수 죽음에 대한 해석이죠. 신적인 필연성이라는 사상은 원시 기독교 문서에서 매우 다층다기하게 다층적으로 여러 차원에서 확산되었던 것인데도 말이다. 사도신경은 거기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말 할만도 한데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했다 그런 것이 없는 거죠. 원시 기독교에서는 예수의 고난과 죽음의 이해가 속죄로서 표현된다. 이런 것들은 다 해석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준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혔던 담을 허문다. 이런 거들은 다 초기 기독교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이어진 예수님의 구원사건을 해석한거죠. 속죄, 그중에서도 중요한 요소입니다. 성만찬 전승은 '많은 이들을 위하여'(막 14:24) 혹은 '우리를 위하여'(눅 22:20) 흘린 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예수 죽음의 해석이 우리 죄를 위한 보상금의 지불로서(막 10:45), 제의적 의미에서 속죄제물로서(롬 3:25, 히브리서), 이러한 속죄제물로서 그리고 인간과 맺는 하나님의 새로운 약속이 체결되었다는 약속의 제물로서(고전 11:25, 눅 22:20) 설명되고 있다.

그러니까 초기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 더불어서 다 같이요. 그런 것이 하나로 딱 규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어요. 각 공동체마다 학파라고 할 수 있죠. 학파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사건이 다양한 거죠. 달랐다기 보다 다양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층적이었다고 판넨베르크가 기록하고 있는데 그런 내용들로 각각 많이 해석되어 있습니다. 그중에서 바르지 못한 것은 제거된 것이죠. 영지주의자들이나 아리우스파는 다 제거됩니다. 그게 몇 세기 동안 초기 기독교에 일어났던 이단논쟁들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역동적이었고 역사적이었고요 진리논쟁에 과감했습니다. 그냥 죽어있는 그러한 진리가 아니라 살아서 꿈틀거리고 어쩌면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기독교 교리, 가르침은, 그 도그마는,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내용들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쭉 자리 잡고 내려온 그것들은, 진화론의 중요한 논리 중에 하나인 적자생존을 거친 결과물이다. 제가 표현을 정확하게 한 것일 겁니다. 싸운 거예요. 싸우다가 이긴 것만 남았습니다. 이거는 힘 갖고 싸웠다기보다도 진리 갖고 싸운 겁니다. 옳은 건만 남은 겁니다.

물론 여기에 비판적인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진리이기 때문에 남았느냐? 그게 아니라 기독교 교리화라고 하는 것은 순전히 교권투쟁이었다고 말이죠. 그런 분은 잘 모르는 이야기입니다. 교권이 일시적으로는 어떤 진리를 누릴 수는 있어요. 그러나 길게 가지는 못합니다. 그러한 방식으로 기독교가 왔다면 많은 종교가 역사에서 사라졌던 것처럼 사라졌을 거예요. 기독교 도그마는 교권논쟁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 영향을 물론 부분적으로 받았지만 그 중심에는 진리를 향한 개방성이 움직이고 있다. 그렇게 봐야 됩니다. 여러 가지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해석들이 많이 나왔죠. 그런 것들이 성서복음서와 그리고 서신안에 많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런 내용들이 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필연적으로 꼭 있어야 되었다 그걸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더 보겠습니다.

이와 같은 예수 죽음에 담긴 신적인 필연성은 구약성서가 인용된 본문들의 증거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상을 드러내주고 있는 모든 상들, 그림들은 그의 고난,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이 우리를 대신해서 수행되었다는 사실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를 대신한 수난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수난의 중심 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사상인데도 불구하고 사도신경에서는 예수의 죽음과 매장을 특별히 강조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앞서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초기 기독교에서 굉장히 중요했었던, 그래서 복음서와 서신의 여러 군데 들어가 있는 예수 수난의 신적인 필연성이라고 하는 것이, 그것은 물론 초기 기독교의 해석인데요. 사도신경에는 빠져있을 뿐입니다. 다만 죽음 매장 이런 내용을 하나하나 항목별로 꼭꼭 짚어서 진술함으로서 강조하고 있을 뿐인데 그런 것으로 간접적으로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죠. 네. 이것이 사도신경이 왜 그랬을까? 생각해 볼만하기는 합니다. 이거는 기본적으로 신학을 해명하는 그러한 문서가 아니라 사도신경이 말예요. 세례 고백문이라고 하는 점에서 그러한 해석을 이미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고 아니면 해석을 아는 사람들이 외워야 할 그러한 내용이기 때문에 초기 기독교에서 아주 중요했던 신적인 필연성이라고 하는 그러한 내용들이 여기서 빠진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그러한 특징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의 죽음에 대리적 의미가 부여될 수 있는지. 내 대신 고난당하고 수난당하고 죽으시고 그게 나에게 까지 효험이 있다고 하는데 왜 그런지 명확하게 알고자 하는 이는 예수의 체포와 판결이 그의 사신, 복음선포나 활동에 담겨있는 독특성과 어떤 관계를 갖는지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여기서부터 여러분들이 좀 머리를 맑게 하고 들으셔야 합니다. 조금 이게 신학적인 사유가 필요하거든요. 이 말이 도대체 뭐예요? 그러니까 예수의 수난과 죽음이 나의 속죄를 위한 대리적 죽음이라는 사실을 조금 더 우리가 정확하게 알려면 예수님의 체포 판결 이런 것들이 예수님의 복음 선포 그리고 활동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이러한 것에 대한 질문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거죠. 도대체 거리가 먼 이야기 같은데 이것으로부터 시작되는가?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어요. 거리가 먼 이야기같이 생각되는데. 이건 이거고 그건 그건데 예수님의 공생애 활동하시면서 말씀 가르친 것 이런 것들하고 지금 수난 받고 십자가지는 것 하고 무슨 상관이기에 그걸 알아야지만 지금 대리적인 대속 이런 것들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가 하는 거죠. 조금 이렇게 정신 바짝 차리고 판넨베르크의 설명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예수가 예루살렘을 향한 자신의 마지막 여정에 나섰을 때. 공생애 뒷부분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뒷부분의 중간서 부터겠지요.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는 여정이겠지요. 복음서에서, 특별히 수난예언에서 제시되어 있듯이 죽음을 직접 모색했다는 주장은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다시 읽어 드릴까요? 예수가 예루살렘을 향한 자신의 마지막 여정에 나섰을 때 복음서에서, 특별히 수난예언에서. 수난예언이 무엇인지 아시죠? 내가 예루살렘에 가서 고난 받고 죽고 또는 다시 살것이다까지 포함될 수 있고요. 그러한 죽음과 부활, 이런 것들을 예언하셨잖아요. 그 예언입니다. 그 예고에서  제시되어 있듯이 죽음을 직접 모색했다는 주장은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다. 오늘 기독교인들은 그걸 다 사실이라고 생각하잖아요. 판넨베르크는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잖아요. 예수님이 인류 구원을 위해 내가 반드시 죽어야 된다고 하는 그러한 말은, 작정하고 자신이 죽어야 하겠다고 하는 말은 안 된다. 그건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런 뜻입니다. 동의하시나요? 이게 평신도들에게서 받는 질문 중 가장 중요한 질문이기기도 하고요. 제가 설명을 하기에 가장 까다로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여러 경우에 그러한 말을 하기도 하고 그런 경우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의도적으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다. 혹은 자기 죽음을, 십자가 죽음을 의도하지 않았다. 그리고 부활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건 아주 우연한 사건으로, 십자가도 우연한 사건으로 예수 운명에 개입되었을 뿐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요. 그걸 이해 안하는 거죠. 못하는 거죠. 왜 성경에 그렇게 나와 예수도 그렇게 하신다고 했는데 다 나와 있는데 아니다고 이야기하느냐? 이렇게 반론을 펴시거든요. 참 그거는 말하기 힘든 거예요. 그런 것들을 다 설명하려면 성서가 뭐냐 성서를 어떻게 해석해야 되느냐 그런 거로 다 돌아가야 하는데 그런 것 말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죠. 네 봅시다. 요 부분은 굉장히 중요한데 그래서 제가 앞에서 머리를 맑게 하고 들으시라고 한 거예요.

오늘날 주석학자들에 의해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의견에 따르면 수난예언들은 예수 자신의 권위 있는 말씀이 아니다. 여기에 대해서도 동의하시나요? 동의하실 수 없으신가요? 아마 동영상 강의를 들으시는 분들은 아마 그런 정도는 알고 계실 겁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도 있고 예수님의 말씀처럼 나오고 있지만 예수님의 직접 말씀이 아닌 것도 많이 있습니다. 그걸 어떻게 구분하느냐? 꼭 구분해야 되느냐 그런 질문이 가능합니다. 그걸 완벽하게 구분하지 못하지만 상당한 부분에서는 구분할 수 있고요. 그게 만약 완전하게 구분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결정적으로 복음서나 성서의 권위가 손상되는 것은 아닙니다. 초기 기독교 신자들에게 의해서 편집된 거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한 사람들에게서 나온 진술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일어나는 어떤 하나님의 구원사건을 우리가 따라갈 수 있는 거죠. 요거는 중요하지 않는데 말을 하다 보니 나왔습니다. 예수님의 권위있는 말씀이 아니다. 오히려 이 예언, 혹은 예고는 후기 기독교 공동체가 예수에게 기대한 사건을 부가적으로, 추가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에게서 있어야 될 어떤 것들을 추가적으로 거기에 기록한 것이죠. 다른 한편으로는 이 수난사건의 성격이 사실 그대로의, 또한 아무도 예지 미리 아는 것, 할 수 없었던 일이라고 주장되기도 한다. 성서 주석학자들의 면밀한 성서 텍스트 주석에 의한 결과입니다.

그러한 답들이 나와 있는 거죠. 신학에서는 다 그러한 답들을 알고 있는데 신자들에게는 정말 거리가 멉니다. 이해가 되지도 않고요. 여기에는 설교를 하는 교회를 이끌어가는 목사들이 가장 큰 책임이 있고요. 그리고 신학교들의 책임도 있고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신학하고 교회의 놓여 있는 갭, 이 틈을 어떻게 메우느냐 이게 큰 문제인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한국교회를 신학무용론이라고 하는 풍토도 그렇고요. 그리고 한국의 거의 보수쪽으로, 보수라기보다도 문자주의 이러한 쪽으로 있는 신학적인 흐름, 많은 이들이 그렇거든요. 이러한 책임이 큽니다. 세계 신학의 메인 스트림을 따라가는 것이 아닌 거예요. 전체를 끌어가는 중심신학이 있거든요. 그런 게 아니라 주변적인 것에 매달려 있습니다. 주변, 지류예요. 청교도 신앙, 이건 사실 한물간 신학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인간의 도덕성을 강화하는 쪽으로의 신앙에만 매달리는 신학이거든요. 여기서 그거는 신학이라기보다 경건활동에 불과한 거죠. 그걸 신학인거처럼 한국에서는 강조하고 있거든요. 그건 참 할 말이 없습니다. 미국에서 온 실용적인 신학들도 그렇고요. 부흥운동 스타일도 그렇고요. 오순절 계통의 신학운동도 그렇고요. 신학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제가 과격하게 한쪽으로 그분들을 매도하는 것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글쎄요. 신학의 흐름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제 말에 동조하실 겁니다.

예수님의 수난을 아무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수난예언들이 일언지하에 예수에 의해 진술된 것으로 치부되면 안 된다. 물론 세례요한의 죽음을 경험했으며 유대전통에 있는 예언자들의 수난전통을 알고 있던 예수가 예루살렘 도상에서 다가올 파멸적 마지막의 가능성을 내다보았으리라고 하는 가정을(눅 13:32) 무시할 필요는 없다. 누구나 역사의 흐름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자기에게 어떤 결정적인 위기가 오리라는 것을 예감할 수 있잖아요. 그런 정도로 예수님이 알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당연한 거죠. 그러나 내가 가서 어떻게 하고 십자가에 죽고 어떻게 하리라고 하는 어떤 프로그램으로 된 일련의 사건들을 점쟁이가 뭘 맞추듯이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죠. 이러한 수난과정의 의미는, 어떤 그 예언자적인 전통과 세례요한의 죽음과 자기에게 다가올 그러한 수난에 대한 그러한 느낌, 그런 것에 대한 표현, 이런 것들은 예수가 스스로 희생하려고 미리 계획해 놓았던 목표에 있는 게 아니다. 다시 반복합니다. 내가 십자가를 져야만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고 하는 그러한 프로그램에서 그러한 의지의 표현이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오히려 수도인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로 하여금 예수의 사신, 복음 선포를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거절도록 촉구한다고 하는 것에 그 의미가 있다. 그의 복음 선포는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죠. 하나님의 나라, 이걸 받아들이든지 거절하든지 거기에 대한 일종의 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제 종려주의 설교를 하면서 그런 표현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한 것은 루비콘강을 건너간 것과 같다. 더 이상 뒤로 물러서지 않는 그러한 자기에게 다가온 운명을 향해서 걸어간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온전한 순종의 자세로 그 길을 간 것이다. 이이야기를 했는데요. 여기에 맥락이 비슷합니다. 판넨베르크의 말하고 맥락이 비슷합니다. 자기 복음선포를 예루살렘이 받아들이든지 거절하든지 촉구한다고 하는 것에 의미가 있다. 요거는 번역이기 때문에 잘 전달이 안 되는 문장인데요. 의도적으로 준비된 예수의 자기희생이 어떻게 이해되어야만 했는가? 의도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고 고난 받고 직접 의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죠. 어떤 목적으로 이러한 희생이 수행되어야만 했는가? 초기 기독교가 그런 방식으로 왜 예수님의 말씀을 추가적으로 보충했는가하는 그런 질문들입니다. 왜 그들은, 성서기자들은 해석하는가 하는 거죠. 예수의 죽음이 세상의 죄인들을 용서한다는 사상에 근거해서 이 사건은 예수에 의해 의도적으로 야기된 활동이라는 해석이 복음서에 추가된 것이다.

그렇군요. 오늘 저도 이 부분을 읽으면서 새롭게 배운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수난 받고 고난 십자가 그런 것을 말씀한 것으로 복음서 기자들이 수난에 대한 이야기들을 쓴 이유는, 그것은 추가적으로 한 것인데 그렇게 한 이유는 인류의 구원, 죄인들을 구원, 혹은 죄인들을 용서한다는 사상에 근거한 것이죠.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이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복음서는 어떤 사실들을 요렇게 차례로 연대기적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신앙인의 사건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재구성한 거예요. 신앙은 예수의 부활에 대한 경험이죠. 거기서 구약성서를 해석하면서 예수님의 사건이 뭐냐 그런 것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 시각으로 예수님의 공생애와 마지막 때까지의 운명을 재구성하면서 경우에 따라서는 예수님의 이런 말씀을 하셨으리라고 하는 그러한 기대감으로 어떤 말들을 추가한거죠. 그것이 바로 예수살렘에서의 수난예고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의 죽으심으로 속죄받는다고 하는 그러한 사상에 근거한 겁니다. 어떻습니까? 이 이야기가 복잡합니까? 그리고 우리 신앙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나요? 여러분들이 천천히 더 생각해 주시길 바라고요. 이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십자가, 이것이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속죄와 특별히 더 근본적으로는 정확하게 한다면 대속의 길이었다고 하는 믿음, 그 인식, 그 이해 그 경험 그 안에서 우리가 잘 따라가야 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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