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역사적 예수

기독교를 말한다 조회 수 4350 추천 수 0 2009.04.25 11:06:09
 

2장
역사적 예수


예수에 대해서 무언가를 말한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전제해야만 한다. 자그만치 2천년 전의 유대 나라다. 더군다나 예수에 대한 정보가 그렇게 많은 형편도 아니다. 넓게 보아서 신약성서와 외경 몇 편이 모두다. 그러나 그 문서들도 사실은 경우에 따라서 약간씩 다르지만 대개가 어떤 전승층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에 대한 객관적이고 엄밀하고 원래적인 정보라고 보기에는 충분하지가 않다. 신학계에서는 이미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가 상당히 전개된 바 있다. 아프리카의 성자로 알려진 알버트 슈바이쩌는 이 부분에서도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예수를 보도하고 있는 신약성서는 역사적인 접근이 아니라 신앙고백적인 접근이기 때문에 예수에 대한 역사적 연구는 별 실효가 없다고. 그 뒤로는 아무도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는다. 소위 변증법신학의 대두인 바르트는 성서를 계시 실증주의식으로 해석할 뿐이고, 실존주의적 해석으로 유명한 불트만은 예수 사건의 실존적 의미만을 중요시했다.
이런 점에서 이 장에서 우리가 시도하려는 작업의 한계는 분명하다. 예수의 역사적 사실을 조목조목 재건할 수는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 다만 성서가 전달해주고 있는 정보만으로도 우리는 예수에 관한 어떤 의미있는 사건들을, 어떤 현실과 실질들을 캐낼 수 있다. 우리가 인문학적인 눈으로 바라보기만 한다면. 우리가 시적 상상력을 닫아두지만 않는다면. 신앙의 본질을 염두에 두기만 한다면.

처녀 마리아

예수는 처녀 마리아에 의해서 출생했다고 알려져 있다. 사도신경이 그렇게 말하고 복음서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약간 이상한 점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만 이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최소한 열편 이상의 신약성서를 기록한 바울은 예수의 탄생에 대해서 일절 언급이 없으며, 복음서 중에서도 가장 먼저 기록된 마가복음과 가장 늦게 기록된 요한복음 또한 이 사실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없다. 그들이 침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사실을 몰랐는가, 아니면 별로 중요한 사건이 아니었는가, 혹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뒤로 미루어두고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중심으로 예수탄생에 대한 사실들을 따라가보자.
우선 마태복음이 전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마리아라는 처녀가 요셉이라는 총각과 정혼은 하였지만 아직 동거하기 전에 임신한 사실이 알려졌다. 그당시의 일반적 상식과 율법에 의한다면 그런 여자는 돌맞아 죽어 싼, 우리 식으로 하자면 멍석말이를 당해야했다. 그러나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서 이 일로 마리아를 파탄에 몰아넣지 않고 조용하게 파혼하는 것으로 마리아와의 관계를 청산하려고 했다. 이런 와중에 하나님의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서 이렇게 말한다.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태복음 1:20,21). 천사는 이어서 이 사실은 이미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된 바라고 하면서 이사야 7장14절을 인용하여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말씀을 전한다. 참고적으로 이사야 7:14절에 기록된 이 구절의 난외주에는 처녀가 “젊은 여자”로 번역되어 있다. 요셉은 꿈에 나타난 그 천사의 말을 그대로 믿고 마리아를 데려왔으며, 마리아가 예수를 출산하기까지는 동침하지 않았다고 한다.

*성서에는 사자(使者)라 칭하기도 하는 천사에 대한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노아, 아브라함, 야곱, 모세, 엘리야, 이사야, 그리고 마리아, 요셉, 사가랴, 베드로, 바울, 요한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이들이 이런 천사, 혹은 사자를 만났다. 흔히들 이런 천사, 혹은 그런 천사의 경험을 어떤 초월적 실체라고 생각한다. 어린이들의 머리를 빌린다면 슈퍼맨 처럼 하늘을 날아다니고 타임머신을 타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존재다. 성서가 이런 특별한 경험을 천사의 출현으로 보도하고 있다고 해서 오늘 우리도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신화적 표상일 뿐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허무맹랑한 환상이라는 뜻은 아니다. 오늘도 우리 주변에는 천사의 활동과 같은 일들이 늘 일어난다.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귀한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 모든 게 천사 이야기다. 톨스토이의 작품에는 이런 식의 이야기가 많다.

누가복음에는 비슷한 내용이 마리아를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다.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에게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서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전한다. 이에 마리아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겠는가 하고 반문한다. 천사는 의심스러워 하는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한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누가복음 1:35). 이어서 마리아의 친족으로서 이미 늙어버린 엘리사벳도 역시 하나님의 능력으로 임신한지 여섯 달이나 되었다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누가복음 1:37)고 결론을 내린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요셉이 주체자인가, 아니면 마리아인가 하는 점에서만 차이가 있고 그 내용은 거의 비슷하다.

성령잉태의 뒷 이야기는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했다는 사실에서 마태와 누가가 일치하고 있지만 성탄절* 노래나 극에 자주 등장하는 몇 가지 에피소드가 서로 다르게 연결되어 있다. 마태는 동방박사 이야기를, 누가는 목동 이야기를 흡사 삽화 처럼 그려넣고 있다. 특히 누가는 로마의 카이저 아우구스티누스의 호적명령 사건을 첨부하여 예수의 베들레헴 출생에 역사성을 부여하고 있다. 예수의 출생을 제일 먼저 알게 된 사람들이 마태복음에서는 동방의 박사들이며, 누가복음에서는 목자들이었다는 사실은 무언가 두 복음서의 신학적 오리엔테이션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하겠다. 마태복음이 여전히 유대적 전통과 예수의 높은 신분을 드러내려고 했다면, 누가는 예수의 민중적 이미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어쨌든지 이 두 복음서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바는 예수가 특별한 방법으로, 즉 성령으로 잉태되어 베들레헴에서 출생했다는 사실이다.

*성탄절은 부활절, 추수감사절과 더불어 기독교의 삼대축일에 속한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성탄절은 연말연시와 맞물린 탓인지 기독교 국가이든지 아니든 상관없이 거의 모든 나라에서 나름대로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12월25일은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를 비롯한 대부분의 기독교가 지키는 성탄절이고, 1월7일은 그리스 정교회 및 아르메니아 교회가 지키는 성탄절이다. 왜 이렇게 다른 것일까? 서로의 전통이 다르기 때문인데, 여기서는 일단 12월25일의 의미만 짚어보려고 한다. 기독교의 거의 모든 절기가 기독교의 로마국교화 이후에 점차적으로 완성된 것 처럼 성탄절도 그렇다. 태양을 신적인 존재로 섬기던 로마 전통에 따라서 동지인 12월22일 이후 낮의 길이가 다시 길어지기 시작한다고 생각된 25일을 빛으로 온 예수의 출생일로 삼게된 것이다. 참고적으로 예수의 출생년도가 정확하게 언제인지도 역시 가려내기 쉽지 않다. 예수의 출생을 중심으로 BC(before Christ, 그리스도 이전)과 AD(Anno Domimi, 주님의 해)가 구분되고 있지만 그것은 532년 수도사이자 천문학자인 디오니수스 엑시귀스가 예수의 출생연도를 잘못 계산한 탓이다. 최근에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기원전 6년이 정확한 연도라고한다.

여기서 우리의 흥미를 끄는 대목은 동정녀 탄생이다. 일반적으로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 사건을 예수의 초월적 능력이나 기독교 신앙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그래, 봐라. 처녀가 남자와 성적인 관계를 갖지 않았는데도 아들을 낳지 않았느냐. 그러니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임에 틀림 없다.” 대충 이런 식이다. 또한 지성적인 기독교인들은 이 동정녀 사건을 무턱대고 믿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믿지 않을 수도 없어서 아주 어정쩡한 입장을 취하기도 한다. 잘 모르니까 그냥 그런 것라고 생각하고 아예 언급을 삼가는 실정이다. 우리는 이 사건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동정녀 출생의 실체는 무엇인가? 이를 언급하고 있는 성서기자들과 사도신경 형성에 영향을 끼친 이들이 어떤 신학적, 혹은 신앙적 태도를 갖고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주장하고 있는가?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신학적 의미는 무슨 신학적 의미, 그냥 있는대로 믿으면 되는 거지! 그런 건 모두 믿음이 없기 때문이야.” 이런 식으로 말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우리 보다 훨씬 믿음의 강도에서 앞서 있는 이단들의 주장에 대해서도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한다. 우리의 믿는 바가 진리론적인 지평에서도 여전히 타당하다는 점을 밝혀내려면 보편적 인식을 무시하고 극단적인 독단 속으로 떨어져 버리면 안된다. 주 요점은 아래와 같다.
초대교회에서 가장 첨예하게 대립했던 논쟁점은 예수의 신성과 인성 문제였다. 1세기 때의 영지주의자들은 예수의 신성만을 강조해서 결국 가현설(假顯說, docetism)을 주장하게 되었다. 예수는 신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현실을 가질 수 없으며 이 땅 위에서의 모습은 그림자 처럼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2세기의 반(反)영지주의적 교부들은 예수가 우리와 똑같은 육체를 갖고 살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예수의 출생 역시 우리와 똑같이 여자의 몸을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예수의 현실이 그림자일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참된 몸으로 세상에 온 예수가 육체적 고통도 없이 허상으로 살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말하자면 여자의 몸이라는 진술이 이 이야기의 알맹이다. 동정녀*라는 점은 부수적인 요인에 불과했다.

*판넨베르크의 설명에 (사도신경해설) 의하면 예수의 동정녀 출생 이야기의 핵심은 예수가 창조적인 하나님의 영으로 인해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출생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워야만 한다는 점이다. 즉 이 이야기는 ‘하나님의 아들’ 칭호에 대한 일종의 구성적인 윤색과 설명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초대교회 교부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밝히기 위해서, 영지주의자들과는 달리 인간 마리아의 몸이라는 사실을 강조했으며, 아울러 어떤 신적 능력이 임했다는 사실, 그것이 성령의 역사인데, 그 사실을 동정녀 설화를 통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이야기가 내보이고자 하는 핵심은, 다시 강조하건데, 동정녀 탄생에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됨에 대한 신학적 동기다. 즉 예수가 부활을 통해서, 혹은 세례를 받은 이후에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 아니라 원래 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점에 대한 확증이다. 그러나 비록 전설적 형식을 빌리고 있지만 이러한 신학적 동기에서 동정녀 탄생은 예배의 중요한 고백문으로서 우리에게 여전히 설득력을 갖는다 하겠다.
위에서 약간 신학적으로 설명했기 때문에 무슨 말인지 감을 잡기 힘들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 것 같다. 이들의 심정은 “동정녀 탄생을 믿어야 되는가, 믿지 말아야 되는가, 동정녀 탄생이 사실인가, 아닌가?”라는 질문에 딱 끊어서 답하라고 다그치고 싶을 것이다. 우리가 앞으로 5, 6장에서 성서를 다룰 때 언급되겠지만 성서를 무조건 사실*이냐 아니냐라는 차원에서 읽을 수만은 없다. 본문이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가 하는 점에 관심을 기울여야지, 곁다리로 묻어온 어떤 설화 내지 문학양식을 물고 늘어지는 것은 정도를 벗어나는 행위이다. 예컨대 요한계시록에 묘사되어 있는 각양의 묵시문학적 묘사들을 문자적으로 사실이냐 아니냐 하고 묻는 것은 부질 없다. 그것은 사실일 수도 있고, 사실이 아닐 수도 있는 신학적 진술이다. 이렇게 설명해 보자. 어떤 시인이 장미꽃을 보고 “아! 당신은 내 사랑하는 님의 얼굴이다”라고 했을 때 이 말이 사실이냐 아니냐 하고 물을 사람은 하나도 없다. 이 진술은 시적 상상력에서 사실이고 생물학적 관점에서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서는 신문보도가 아니라 신학자의 신앙고백이며 역사신학적 진술이다. 성서는 물리학자의 물리적 사실에 대한 연구보고서라기 보다는 시인의 상상력이 녹아 있는 일종의 문학작품이다. 굳이 독일어법으로 표현하자면, ‘히스토리’(혹은 팍툼)라기 보다는 ‘게쉬히테’(혹은 에어아이그니스)이다.

앞에서 바울과 요한이 동정녀 탄생 이야기를 거론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나중에 답변하자고 했는데, 이제 그 말을 할 때인 것 같다. 바로 위해서 이미 어느 정도 비슷한 답변이 주어진 것 처럼, 그 동정녀 사건이 그들에게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바로 그 답이다. 한번 생각해 보라. 만약 동정녀 출생 사건이 기독교의 본질을 이루고 있다면 그렇게 포괄적이고 심층적으로 기독교 교리의 뼈대를 조직한 바울이 이를 언급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아울러 성서기자들은 예수의 어릴 적 이야기에 대해서도 역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 문제와 연관성을 갖는다 하겠다. 기껏해야 예수의 어릴 적 이야기는 정결의식 때문에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갔다는 이야기와 열두살 되던 해에 부모를 따라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한 이야기가 모두다(누가복음 2장). 물론 외경 가운데는 예수가 어릴 때 행한 초능력에 대한 묘사들도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지만 초대교회는 이런 모든 전승들을 외경이나 위경으로 제쳐놓았으며, 예수의 인성을 약화시키는 모든 이단들을 철저하게 배격했다.
이 문제를 순진하게 생각하고 있는 이들은 여전히 속이 불편할 것 같다. “도대체 동정녀 탄생을 믿는다는 말이냐, 아니냐? 확실하게 단적으로 말하지 않는 것 보니 당신 이단 아니냐?” 나는 우리가 옳게 믿자는 말이지 무조건 합리주의 얼굴로 성경을 재해석하자는 것은 아니다. 동정녀 마리아 출생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멧시지의 초점은 인간 마리아의 몸이며, 그녀를 통한 성령의 역사는 곧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려준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우리가 이해하고 믿는다면 그것으로 성경을 읽는 자의 자세는 충분하다. 그것 말고 우리에게 무엇을 더 요구하는가? 처녀로서 아들을 낳았다는 것을 무조건 믿어야만 기독교인이 된다는 건가, 아니면 반대로 그것의 신학적 의미를 송두리 채 제거해 버리고 그런 내용을 사도신경에서 삭제해버려야 하는가? 우리는 여기서 동정녀 탄생의 사실성 여부를 구하는 것 보다 그 설화의 신학적 동기가 말하려는 현실성 여부를 모색하는 것이 훨씬 건강한 기독교인의 신앙적 태도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인간예수

이제 우리는 조금 더 본질적인 문제에 부닥쳤다. 예수는 인간인가, 아니면 신인가? 물론 이에 대한 대답은 이미 주어져 있다. 그는 온전한 인간이며 동시에 온전한 신(vere homo, vere deus)이라고 말이다. 이게 기독교 전통이다. 세례교인이라고 한다면 그런 정도의 교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게 어떤 상태인지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어쩌면 예수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는 도저히 풀릴 길 없는 신비의 세계일 수도 있으며, 그저 교리적으로만 묻어두고 신앙생활 하는게 속편한 일일지도 모른다. 도대체가 한 인격 안에 신성과 인성이 동시에 온전한 상태로 들어있다는 말이 가능하냐 하는 것이다. 앞으로 8장(하나님에 대한 물음)에서도 이 문제를 어느 정도 다룰 예정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주로 인간으로서의 예수라는 문제에 대해서만 생각하겠다.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거의 대부분 신자들은 예수를 전지전능한 신으로 믿는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 자체이다. 그는 부활한 분으로서 죽은 자도 살릴 수 있으며,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는 분이라고 여긴다. 때로는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거나 병을 치료하기도 한다. 기독교인들에게 예수는 무언가 이익이 되는 분, 무언가 초능력적으로 우리를 돕는 분, 또한 사도신경에서 고백되듯이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돌아가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마지막 때에 심판하러 오실 분으로 생각한다. 이런 많은 생각들을 관통하는 핵심은 예수는 우리와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라는 것이다. 그는 우리와 근본적으로 다른 신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생각들이 일단 옳긴 하지만, 이로 인해 예수의 인성이 약화된다면 초대교회가 이해한 예수像과 큰 차이가 난다. 결국 우리의 신앙이 대단히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방향으로 흘러들게 되고 만다.
만약 예수를 보다 깊이 알기 원한다면 그의 인성을, 즉 인간으로서의 예수*를 우선 이해해야 한다. 그는 분명히 우리와 전혀 다를 것이 없는 인간으로 이 세상에 왔다. 교부들은 앞서 언급한대로 예수의 인성을 무시하려는 영지주의자들과 격렬하게 투쟁함으로써 이 부분을 확보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전통은 오늘 우리에게서도 전혀 약화되지 말아야 할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 요소이다.

*예수를 인간적 각도에서 바라본 책을 한 권 소개하겠다. 최근에 영화화되기도 한 니코스카잔차키스의 「그리스도의 최후의 유혹」이다. 그 소설의 내용은 대충 다음과 같다. 직업이 목수인 예수는 집짓는 일만이 아니라 로마정부가 반정부자들을 처형시킬 때 사용할 십자가를 만들기도 한다. 자기 아들이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해서 무장투쟁을 하다가 체포되어 십자가 처형을 당하는 어떤 여인이 그 십자가를 만든 예수를 저주한다. “너도 내 아들 처럼 이런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될 것이다.” 예수는 다른 유대 청소년들과 비슷한 과정을 거치면서 성장한다. 어떤 소녀의 사랑을 받기도 한다. 성장한 후에 그는 성경의 내용대로 제자들을 택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체포당하여 십자가에 못박힌다. 십자가에서 정신이 혼미한 순간에 예수는 십자가에서 내려와 도망간다. 그는 이제 백마를 타고 마리아 자매 두 사람과 결혼해서 자식들을 낳고 목수일을 계속하면서 평범하게 살아간다. 어느 날 베드로와 안드레를 비롯한 몇명의 제자들이 예수를 찾아와 그의 멱살을 잡고 폭력을 행사한다. 예수를 땅바닥에 내동댕이 치고 발로 그의 머리를 짓밟는다. “당신이 십자가에서 도망쳤기 때문에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실패하고 말았소. 당신은 비겁자요. 당신은 위선자요. 책임을 지시오.” 제자들의 발에 머리를 밟힌 예수는 심한 통증에 정신을 잃는다. 그러던 중에 다시 정신이 들어 눈을 뜨자 그는 여전히 태양이 내리쬐는 십자가에 달려 있었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이렇게 중얼거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나는 십자가에서 도망치지 않았다. 나는 겁쟁이가 아니다.” 니코스카잔차키스는 이 책에서 작가적 상상력을 발휘해서 예수의 인간적인 모습을 매우 그럴싸하게 그렸다. 어떤 이에게는 신성모독 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굳이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과연 예수가 십자가상에서 받은 최후의 유혹이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는, 그저 그런 평범한 인간으로 살고 싶다는 바램이었을까? 아니면 복음서가 안내해주고 있는대로 그런 비상한 삶의 길이었을까?

예수는 과연 어디까지 인간적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을까? 그는 귀신 처럼 숨도 쉬지 않고 밥도 먹지 않고 산 게 아니라, 우리 처럼 숨쉬고 먹고 배설하고 산 것이 분명하다. 때로는 화도 내고 울기도 하고 잔치집에 가서는 함께 즐거워했다. 어떤 학자는 예수가 남성이 여성에게 느끼는 그런 감정을 가졌을지 모른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런 것까지는 별개로 친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삶에 그려지는 일상의 무늬들을 정겹게 여기는 이였다는 사실은 아주 분명하다. 더구나 예수는 동양의 지혜자들이라면 너털 웃음으로 넘겨버릴 상황에서도 고독해하거나 노여워할 정도로 인간적이었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이들을 보고 채찍을 휘두르며 그들을 내어 쫓기도했고(요한복음 2:13-22), 바리새인들을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책망했다(마태복음 23:33). 헤롯을 여우라고 칭하기도 했으며(누가복음 13:32),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고 여우도 굴이 있지만 자신은 머리 둘 곳 조차 없다며 외로워한 적도 있다(마태복음 8:20). 어디 그것 뿐인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는 순간에는 십자가형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땀방울이 피빛으로 보일 정도였다.
초대교회는 예수의 인성문제에서 절대로 양보하지 않았다. 신이 인간적 한계를 갖는다는 것을 도저히 납득시키기 힘든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가 온전한 인성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은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는 것 만큼 같은 정도의 크기로 예수를 인간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믿는다. 신이며 동시에 인간인 예수라고. 반신반인이 아니라 온전한 신이며 온전한 인간이라고.
예수의 인간성에 대한 언급을 어떤 이들은 매우 불경하게 생각할 지 모르겠다. 예수가 인간적 모습은 전혀 없고 온전히 신적인 모습으로만 투영되어야만 그를 더 위대한 존재로 믿고 따를 것인가? 그래야만 그는 우리를 구원할 자인가? 헬라신화에 나오는 온갖 신들 처럼 초능력의 소유자이어야만 우리의 메시야가 되는가? 포이에르바흐, 니이체, 프로이트, 맑스 같은 이들의 비판 처럼 우리의 종교성 밑바닥에는 이러한 신적 카리스마, 신적 슈퍼 파워에 대한 기대가 있을 수 있다. 흡사 초등학교 학생들이 예쁘고 아는 게 많은 담임 여선생님은 변소에도 안가고 거짓말로 전혀 안 한다고 믿고 싶은 것 처럼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우리와 같은 인성을 갖는다는 것이 불쾌하게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기독교 전통은 그러한 위험과 오해를 무릎쓰고 예수의 온전한 인성을 포기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만약 우리가 기독교 전통을 소중히 생각한다면, 더우기 복음서의 예수에게 온전히 다가가고 싶다면 피와 살을 가진 예수님에 대해서 좀더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한다. 이는 곧 우리 신앙이 인간의 삶을, 그것의 리얼리티를 귀하게 여긴다는 사실과도 상통하는 문제다.

출가

우리가 복음서를 통해서 아는대로 예수는 서른살 쯤 출가해서(누가복음 3:23) 공생애를 시작했는데, 복음서는 출가 이전의 예수에 대해서는 거의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우선 그가 출가 이전에 어떻게 살았을른지 복음서의 몇 가지 단서를 통해서 추정해 보도록 하자.
고대시대에 장남이 아버지의 직업을 물려받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아주 일반적 현상인 것 처럼 예수는 아버지 요셉 처럼 목수일을 하며 살았다. 예수에게는 동생들이 몇명 있었다. 큰 형이며 큰 오빠로서 예수는 가정에서 기둥노릇을 하며 살았다. 그의 동생 중에 야고보라는 이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 승천 이후 예루살렘 교회에서 베드로와 더불어 대표적인 지도자로서 활동하기도 했다. 예수가 서른 살에 이르러서야 출가하게 된 이유는 아버지 요셉이 일찍 세상을 떠나서 그가 집안생활을 떠맡았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이제 그의 나이가 서른 살이 되었다면 동생들도 거의 성장해서 더 이상 부양하지 않아도 괜찮을 때였다.
예수가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동네 사람들에게 무언가 특별한 존재로 비치지는 않은 것 같다. 그저 평범한 젊은 목수요, 성실한 가장이요, 여러 친척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한 그런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가 공생애를 시작하고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기 시작했을 때 동네 사람들은 별로 탐탁치 않게 생각했으며, 더 나아가서는 그를 무시하기까지 했다는 것이 이에 대한 증거다. 이들의 태도를 본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마태복음 13:57). 동네 사람들만이 아니라 사실은 예수의 가족들도 예수를 특별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집으로 데려가려고 한 적이 있다(마가복음 3:20-35 참조). 출가하기 이전의 예수는, 물론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였지만, 현상적으로는 아주 평범한 유대 청년이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예수가 출가하게 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이에 대해서도 복음서는 별 말이 없다. 미루어보건데, 예수는 그 당시 모든 사회적, 정치적, 인간의 실존적 상황 가운데서 그가 감당해야 할 몫을 발견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 집을 떠날 수 밖에 없었던 게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스도적 사명감에 사로잡힘으로써 이런 출가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가 언제 자신의 정체성, 즉 메시야성을 인식하게 되었는지 우리가 짚어낼 수는 없지만 분명히 어느 시점이 있었을 것이다. 그의 메시야됨, 그의 성육신, 그의 하나님 아들됨은 존재론적으로 태초로 돌아가지만, 그 인식은 그의 출가* 이전 어느 시점엔가에서 이루어졌다는 말이다. 그 시점이 아버지를 따라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한 열두 살 때인지, 목수일을 하면서 틈틈히 율법을 공부하던 어떤 순간인지, 아니면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푸는 것을 보았을 때인지 알 도리는 없지만.

*집을 떠난다는 것은 가족과의 인간적, 세속적 관계를 끊는다는 것인데, 이런 순간이 모든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거룩한 체험은 그 체험이 없는 식구들이 이해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험한 이들은 더 이상 세속적 질서에 묶여지낼 수 없게 마련이다. 결국 신앙이란 이런 출가의 과정, 떠남의 과정이 아닌가 생각된다. 우리는 예수에게서 집을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새로운 깨달음의 순간, 새로운 인식의 순간이 있었음을 내다볼 수 있다.

예수가 집을 떠나 공생애를 시작하기까지 상당한 심리적 어려움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우선 가족관계가 그렇다. 어머니 마리아가 남편 없이 자식들을 키웠을텐데 장남이 집을 뜨게 된다면 그녀가 겪게될 유무형의 고통이 얼마나 심했겠는가. 그녀의 마음을 헤아렸기 때문인지 예수는 십자가의 죽음에 직면해서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고 눈을 감는다(요한복음 19:26, 27).
어디 문제가 그것 뿐이겠는가. 예수가 앞으로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는 엄청났다. 그는 공생애를 시작하면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금식하며 자신과 투쟁했다. 급기야는 마귀에게 세 가지 시험을(마태복음 4:1-11) 당하게 된다. 그 시험은 다음과 같다. 첫째, 마귀가 예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하라.” 둘째,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말한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뛰어 내리라.” 셋째, 마귀가 예수를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말한다.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대한 예수의 답변은 다음과 같다. 첫째,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둘째,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셋째,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예수의 이 광야시험이 사실적으로 무엇인지 우리가 정확하게 가려내기는 불가능하다. 무의식의 세계에서 진행된 그의 영적인 투쟁이었는지, 꿈으로 나타난 내적 불안의 한 현상이었는지, 아니면 고지식하게 생각해서 실제로 마귀가 나타난 것인지 말이다. 어떤 경우였든지 예수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영적으로 무척이나 힘들어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예수는 공생애의 마지막 순간이라 할 수 있는 겟세마네에서의 기도에서도 역시 자기에게 오는 잔을 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토로했다. 이런 모습이 바로 예수의 인간적 현실을 말해주는 것이며, 그것으로 인해 오히려 그가 이룬 구원의 은총이 더욱 깊어진다.

세례요한과 예수

누가복음에 따르면 세례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친족간이었다(누가복음 1:36). 천사 가브리엘은 먼저 세례 요한의 아버지에게 나타나서 요한의 출생을 예고했고, 여섯 달 후에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예수의 출생을 예고했다. 그러니까 요한이 예수 보다 여섯달 더 먹은 형이다. 복음서는 세례요한과 예수의 사적인 관계에 대해서는 별로 말이 없다. 그저 공적인 몇 가지 사건들만 간헐적으로 나열되고 있다. 가장 중요한 사건은 예수가 그 당시 여러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세례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이다. 왜 예수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을까?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굳이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었으며, 오히려 요한이 예수에게서 세례를 받았어야 옳은 일 아닌가. 아마 예수는 그 당시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종교지도자들과는 달리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고 있던 요한에게서 새로운 종교적 각성을 받게 되어 결국 그 당시에 일반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그에게서 세례를 받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세례요한이 한창 유대민족의 회개운동을 전개하고 있을 당시에 유대를 통치하던 인물은 로마 총독 빌라도였다. 또한 헤롯대왕과 말타케 사이에서 출생한 헤롯 안티바스가 갈릴리 분봉왕으로, 헤롯대왕과 클레오파트라 사이에서 출생한 빌립이 이두레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재위하고 있었으며,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교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요한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면서 다음과 같이 불을 토하듯이 설교하고 있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누가복음 3:7-9). 로마를 방문한 헤롯 안티바스가 헤롯대왕과 미리암네 2세 사이에서 출생한 헤롯 빌립의 아내인 헤로디아를 유혹해 아내로 삼은 일이 있었는데, 요한은 이 사건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이 일로 인해서 결국 요한은 구속당하고 얼마 후에 죽는다. 유대의 마지막 예언자요 영적 거인이었던 요한의 최후는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었다. 헤롯의 생일에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가 춤을 추어 헤롯을 즐겁게 하자 헤롯은 살로메의 그 어떤 청이라도 모두 들어주겠다고 허풍을 떤다. 살로메는 자기 어머니 헤로디아가 시키는대로 세례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달라고 말한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 요구를 듣고 헤롯은 크게 당혹해 하지만 자기가 내뱉은 말에 대한 체면 때문에 신하들에게 그대로 명령을 내린다(마태복음 14:1-12).
세례요한이 말씀을 선포하던 초창기에는 종교와 사회의 기득권층이라 할 수 있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까지 그에게 나와서 세례를 받을 정도였으니까 그의 대중적 인기를 알만 한다. 요한은 나름대로 유대인 사회에서 지도층에 속한 바리새인 같은 이들을 향해서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독설을 퍼부을 정도로 영적 카리스마를 갖추고 있었다(마태복음 3:7). 예루살렘 성전의 종교지도자들과 정치지도자들이 요한을 두려워한 것은 요한이 말로만 그들을 비판하는 게 아니라 어느 누구도 넘겨다 볼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금욕적 삶을 실천함으로써 탁월한 도덕적 권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가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매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거리고 삼으며 광야에서 살았다고 하는데(마태복음 3:4), 그런 모습을 보면 쿰란(에쎄네파)* 공동체의 일원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인간적 모든 욕구를 차단하고 오로지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가운데 그당시 기득권층의 턱밑에 칼을 들이밀듯이 살았던 요한은 영적으로 깊은 잠에 빠진 유대민족을 흔들어 깨우는 양심의 소리요, 로마의 식민 통치로 인해 드리워진 어둠의 시간을 밝혀내는 여명이었다.

*쿰란 공동체는 로마의 식민지 하에 있었던 모든 체제와 질서를 부정하고 사회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어서 자신들만의 순수 종교적 공동체를 유지하고 있던 유대인 집단을 가리킨다. 에쎄네파라고도 불리우는 이들은 도자기를 굽기도 하고 성서를 필사하면서 먹고 살았다. 유대계 로마인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새로 가입해 들어온 회원은 우선 공동체 밖 광야에서 1년 동안 그들의 생활방식을 따랐으며 그 다음 2년 동안 시험을 거친 다음에야 회원의 자격이 주어졌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따라서 빛의 아들들을 사랑하며 반대로 어둠의 자식들을 증오해야 할 의무를 지고 살았다. 그만큼 이 세상을 선과 악의 대립으로 보았다는 말이다. 이들에 대한 정보는 1947년 사해 부근의 동굴에서 발견된 두루마리 문서들에 의해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이 쿰란문서들은 금욕적인 삶과 심판을 주제로 하는 요한의 설교와 비슷한 점이 많다.(참조: 게르트 타이센, 갈릴래아 사람의 그림자).

요단강 서안의 광야에서 가슴에 불을 안고 고독하게 예언하던 세례요한의 시대는 유대 땅에 어둠이 짙어갈 때였다. 로마 총독의 정치적 억압, 분봉왕들의 허세, 예루살렘 종교지도자들의 종교적 자기만족, 민중들의 절망이 그 시대의 색갈이었다. 어떤 면에서 메시야 운동의 선구자라 할 세례 요한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온 예수를 마음 속 깊히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예수라는 이의 눈빛, 그가 세례받을 때 있었던 이상한 현상들(마태복음 3:13-17). 더구나 요한이 헤롯에 의해 옥살이를 시작하고 그의 생명이 촌각에 달려 있는 순간에 제자들을 통해서 들려오는 예수에 대한 소문은 그의 마음을 들뜨게 했을 것이다. 가슴 답답한 이 시대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열어제쳐나갈 이가 바로 예수는 아닐까? 그에게 메시야적 징표들이 나타나고 있는 게 아닐까? 이렇게 이 두 사람은 연결된다.
영오의 몸이었던 요한은 예수에 관한 소문을 듣고 제자들을 예수에게 보내서 이렇게 묻는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까?”(마태복음 11:3). 이에 대한 예수의 답변은 간접적 방식이었다.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마태복음 11:4-6). 예수는 이어서 요한을 가리켜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큰 자라고 했으며, 요한의 제자 중에서 몇명은 결국 예수의 제자가 되기도했다. 원래 요한은 자신이 예수의 신발끈을 매고 풀 자격이 없다고까지 선언하기도 했다. 한편 예수의 권위에 대해서 시비를 거는 이들을 향해서 예수는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온 것이냐 아니면 땅으로부터 온 것이냐는 질문으로 답하기도 했다(누가복음 20:4). 예수를 죽은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으로 보는 소문이(마태복음 14:2) 있을 정도였다.
요한과 예수 사이에 여러 면에서 통하는 점이 있긴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요한의 선포와 예수의 선포, 요한이 택한 길과 예수의 그것은 상당히 달랐다. 세례요한은 앞서 말한대로 과하다 싶을 정도로 금욕적이었지만 예수는 심하다 싶을 정도로 먹고 마시기를 즐겼다. 사실 예수가 그런 먹고 마시는 일을 노골적으로 탐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금식과 기도를 거의 일상적으로 실행하던 바리새인들의 기대치에는 훨씬 못미쳤다. 심지어는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예수에게 이런 말을 할 정도였다.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마태복음 9:14). 예수는 어떤 종교적 격식을 별로 중요시하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서 상당한 오해를 받기까지 했다. 설교의 내용이라는 점에서도 요한과 예수는 차원을 달리했다. 요한은 사람의 죄를 꼬집고 회개하라고 불을 토했지만, 예수는 그 죄를 덮어주고 용서해주고 감싸주었다. 요한이 심판을 말했다면 예수는 용서와 사랑을 말했다. 물론 예수도 천국이 가까왔으니 회개하라는 말씀을 하셨지만 이 회개는 하나님께 돌아오는 존재론적 변화인 반면에 요한이 선포한 회개는 실제적 삶에서 정의로워야 한다는 윤리적 변화를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런데 예수의 ‘시대에 대한 비유’에 따르면 사람들은 요한의 금욕적인 삶도 싫어하고 예수의 비종교적인 삶도 원치 않았다(마태복음 11:16-19). 민중들, 그리고 종교지도자들이 요한과 예수의 삶에 대해서 트집을 잡았다는 것은 그것 자체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요한과 예수의 가르침이 그들의 이중성을 노출시켰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요한의 가르침을 따르기에는 너무나 세속적이었으며,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기에는 너무나 종교적이었다는 말이다. 결국 그들은 요한도 죽이고 예수도 죽였다. 요한은 의로운 심판을 외치다가 먼저 죽었고, 예수는 보편적인 사랑을 외치다가 삼년 후에 죽게 된다.

하나님 나라

앞서 논한 예수에 대한 몇 가지 사실들, 혹은 추정들은 예수를 좀더 인간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접근에 불과하지 예수 현상의 본질을 말하고 있지는 않다. 이제 예수와 관련된 기독교의 핵심을 말할 차례가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바실레이아 투 데우)이다. 예수가 누구인가를 알려면 그가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행했는가를 알아야 하는데 그것이 곧 하나님 나라이다. 그는 삼년 동안의 공생애 중에 오직 한 가지 사실인 이 하나님 나라에만 집중했다. 그의 말, 그의 행위는 모두 이 하나님 나라에 의존되어 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가 지향한 목표였으며, 하나님의 존재양식이기도 한다. 예수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선포한 처음 말씀이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마가복음 1:15, 마태복음 4:17)인 것을 보더라도 예수가 얼마나 일관되게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때’는 헬라어의 ‘카이로스’에 해당되는 단어인데, 일반적인 시간을 뜻하는 ‘크로노스’와는 달리 어떤 의미있는, 종교적인 시간을 뜻한다. 히브리인들에게 하나님의 때는 매우 중요했다. 특히 묵시문학적 사유에서는 현재의 악한 시간은 반드시 물러나야되고 하나님의 선한 시간이 오게되어 있다. 그 때는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진다. 히브리인들은 이 새로운 때를 새로운 ‘에온’이라고 칭했으며, 그런 하나님의 심판과 통치를 기다리면서 주변 제국의 악한 권세와 맞섰다. 예수도 이러한 묵시문학적 세계이해 가운데서 하나님의 때, 새로운 에온, 카이로스, 곧 하나님의 나라를 뜻하는 그 때가 임박했다는 소식을 알리는데 모든 힘을 쏟았다. 긴박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야말로 예수 사건의 출발이며 종착지였다.

우리가 교회에서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면 예수믿고 죽어서 가게되는 천당 쯤으로 생각하고 있다. 특히 천당(天堂)이라는 단어에 집 당(堂)자가 사용되기 때문에 대궐이나 호화 맨션 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요한 계시록에도 새 예루살렘에는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있고, 생명나무와 열 두 가지 실과를 맺는 나무가 있다고 묘사된다(요한계시록 21, 22장). 어떤 이들은 이 땅에서 어떤 믿음생활을 했는가에 따라서 좋은 집에 들어가기도 하고 단칸방에 들어가기도 하며, 황금 면류관을 쓰거나, 아니면 개털모자를 쓴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좁은 의미로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면 예수가 내보이고자한 하나님 나라에 접근할 수 없다. 그 역동성을 축소시키고말 뿐이다. 예수가 직면해 있던 하나님 나라를 한 두 마디로 정의내릴 수는 없지만 몇 가지 지평에서 그 개념을 파악할 수는 있다.
우선 하나님의 나라는 소유가 아니라 존재의 차원에서 이해되어야한다. 이 문제를 이렇게 설명해보자. 우리가 예수를 믿는 이유는 죽어서 천당가기 위함이라는 것이 일반적 생각인데, 그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충분하지는 않다. 구약성경에 의하면 그런 천당이란 개념이 없다는 게 정설이다. 인간이 죽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음부(스올)에 가게 된다. 구약시대 때 죽음은 말 그대로 죽음이다. 다음과 같은 시편기자의 노래에서 처럼 모든 게 끝장 나는 사건이다.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시편 6:5,6). 이에 반하여 신약시대에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로, 즉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사건이 되었다. 그 결정적인 계기는 예수의 부활이다. 인간이 죽은 후 곧 심판을 받고 부활과 지옥으로 갈리는지, 아니면 최후의 심판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이 하나님 나라와 연관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천당에 간다는 것을 흡사 초대권을 갖고 음악회장에 들어가는 것 처럼 생각한다. 교회에 나가서 세례받고 구원의 확신이 있으면 이제 죽어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생겼다고 생각한다. 이 천당, 천국, 즉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들어가거나 나가는 그런 소유의 개념이 아니라 그 세계에 참여하는가 하지 못하는라는 존재의 개념이다. 예컨대 우리가 베에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을 듣는다고 하자. 카라얀이 지휘한 베를린 필의 이 곡을 누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음악을 듣고 감상함으로써 음악의 세계에 참여하고 즐길 수 있을 뿐이다. 돈을 주고 그 CD를 샀다고 해서 누구의 소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체제나 질서가 아니라 변화와 운동의 성격이다. 예수가 가르친 비유*를 조금이라도 유심히 들여다 본 이라면 모든 비유가 하나님 나라를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대표적으로 씨뿌리는 자의 비유인데, 예수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누가복음 8장). 유명한 비유로 ‘선한 사마리아 사람’(누가복음 10장), ‘어리석은 부자’(누가복음 12:13-21), ‘다시 찾은 한마리의 양’(누가복음 15:3-7), ‘탕자’(누가복음 15:11-32)를 비롯해서 여럿이다. 그것들은 거의 하나님 나라의 속성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하나님 나라의 비유라는 것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내용도 적지 않다. 예컨대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꼬. 내가 무엇으로 비할꼬.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누가복음 13:20,21), 잔치초청의 비유에서 나오는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누가복음 14:15),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마가복음 4:26),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꼬.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마가복음 4:30,31),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마태복음 18:23), “천국은 마치 품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마태복음 20:1) 등이 이에 해당된다. 이런 비유들의 특징은 우선적으로, 그 비유에 쓰인 재료들이 일상적인 이야기라는 점이다. 그냥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그런 이야기거리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있다. 일상적 사건이나 사물로 비유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속성은 한결 같이 어떤 힘이나 변화나 새로움, 열린 마음 같은 것들이지 어떤 조건이나 지위나 안정감, 보수적 사고방식 같은 것이 아니다. 어떤 상태라기 보다는 어떤 방향성 같은 것들이다.

*예수의 비유가 지향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속성은 무엇이었을까? 이화여대 신약학 교수인 조태연은 겨자씨 비유(마가복음 4:30-32, 누가복음 13:18-20, 마태복음 13:31-32, 도마복음 20)를 “작은 나무가 되어 주변에 서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이 비유가 구약성서의 종말비전에 나타난 나무 이미지와 비슷한다는 점이 우선 눈에 뜨이는데, 구약의 나무 이미지는(에스겔 17:22-24, 다니엘 4:10-12) 유대 주변의 제국들이 갖는 중심과 높이이며, 결국 이스라엘 왕국의 실현이다. 그런데 예수의 비유는 오히려 작은 겨자씨와 그 가지들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제국주의적 팽장과 중심이 아니라 낮아짐에서 찾았다는 것이다. 아직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표상을 거창하고 화려한 제국이나 왕궁에 두고 있다면 이는 예수가 비유로 설명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와 전혀 지평을 달리한다고 볼 수 밖에 없다.(참조: 활천, 98년 1월호).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지평에 온 삶을 쏟아부었던 예수 앞에는 그 어떤 사람이나 체제나 이념도 절대적인 것이 될 수 없었다. 앞 장에서 언급한 안식일도 역시 인간을 위한 것일 수 밖에 없으며, 율법도 그렇고, 유대인들의 자부심이요 정신적 모태라 할 예루살렘 성전*도 역시 상대적 가치를 가질 뿐이었다. 종교를 포함한 모든 인간문화는 하나님 나라의 하부구조로 존재할 뿐이다.

*예루살렘 성전은 원래 솔로몬 성전이라고도 불리지만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은 파괴되어 버렸고 그 후에 다시 지은 것이 남아있다. 대충 그 단면도를 그리면 다음과 같다. 이방인의 뜰로부터 시작하는 여러 광장이 있다. 이방인의 뜰 다음은 여자의 뜰, 유대인의 뜰, 제사장의 뜰이 있으며, 가장 안쪽에 지성소가 있다. 지성소 안에는 여러 제사의식 때 사용되는 집기들이 있고, 그 유명한 법궤가 놓여 있다. 그 법궤 안에는 십계명 돌판, 만나, 모세의 형인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들어있었다고 하는데 물론 지금은 전쟁 통에 사라지고 없다. 오늘의 교회생활이 상당한 경우에 예루살렘 성전의 위용을 따라가기에 급급하고, 상행위에 버금가는 경제논리가 지배하고 있는 것 같다. 예수의 복음은 성전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사랑의 능력인데도 말이다.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과 연루된 핵심적 사건은 두 가지다. 제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위용과 아름다움을 보고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자 예수는 그들에게 의외의 말씀을 하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마태복음 24:2, 마가복음 13:2 외). 이런 말씀도 하셨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한복음 2:19). 유대교의 총본산인 성전을, 유대인의 모든 삶의 뿌리이며 영적 고향인 예루살렘 성전을 허물라는 그의 말은 그렇지 않아도 예수를 기피 인물로 간주하던 종교 지도자들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이 이야기가 성전의 겉모습에 관련된 것이라고 한다면, 다음 이야기는 성전의 내적인 성격과 관련된 것이다. 예수가 성전에 들어가서 장사하는 이들을 보았다. 성전 관리자들은 제사드리러 오는 사람들의 편리를 위해서 흠이 없는 짐승을 준비해서 팔았고, 돈을 바꿔주기도했다. 방문자의 편의를 위해서 시행된 이 제도가 나중에는 제사장들의 수익사업으로 그 실질적 내용이 바뀌었다. 예수는 성전 안에서 매매하던 이들을 강제로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마태복음 21:13). 갑작스러운 공격을 받고 제사장들은 공식적으로는 아무 대항도 하지 못했지만, 이를 계기로 예수를 제거하기 위해 본격적인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상당히 파격적이고 과격하게 보이는 예수의 이런 태도는 하나님 나라 지향성이라는 구도 안에서만 설명될 수 있다.

팔복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지향한 예수의 모든 가르침과 행위를 검토할 수는 없다. 다만 산상수훈에서 시적 운율로 선포된 팔복(마태복음 5,6,7장)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정리하는 것으로 일단 접도록하자. 팔복을 그 말머리로 담고 있는 산상수훈은 마태에 따른 것이다. 반면에 누가에 따르면 평지설교이며, 그 구성도 여러 곳에 흩어져 있다. 특히 누가복음은 복받을 자와 화가 임할 자를 대칭적으로 싣고 있다(누가복음 6:20-26). 이로 미루어보건데 마태복음의 상산수훈은 원래 서로 다른 상황에서 선포된 말씀이 마태의 편집에 의해 한 곳으로 집대성된 것으로 보인다. 팔복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2)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3)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5)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이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6)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7)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8)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태복음 5:3-10).
위의 말씀을 잘 들여야 보면 복있는 자의 첫 항목에서 천국이 주어지며 마지막 항목에서도 역시 천국이 주어진다고 되어있다. 결국 팔복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말씀인 셈이다. 일단 이 말씀을 마틴 루터의 해석에 따라서 설명해보자. 1) 여기서의 주제는 행복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물려받는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누가복음은 심령이 가난하다고 말하지 않고 단순히 가난하다고 했다. 누가복음에 따라서 물질적인 가난이든지, 마태복음에 따라서 영적인 가난이든지 그런 가난은 하나님 나라와 연결된다. 2) 여기서 애통한다는 것은 죄에 대한 것을 말한다. 3) 온유한 자는 새로운 땅을 (시편 37:22, 이사야 60:21, 베드로 후서 3:13, 요한계시록 20:2, 21:1) 소유하게 된다. 4)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의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사람에게 만족감이 있게 된다. 5)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남에게 베푸는 마음을 뜻한다. 6) 청결한 마음은 하나님에게 속한 마음이다. 7) 예수는 화평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의 전제를 보고 있다. 8) 핍박은 우리에게 시련을 뜻하는데, 그것이 오히려 우리에게 기쁨과 위로를 가져다 주며 보상을 준다.
우리가 팔복에서 배우는 하나님 나라는 어떤 종교적 조건이 아니라 어떤 삶의 방향성과 연관되어 있다. 판넨베르크는 이렇게 설명한다. 예수가 복을 선포한 이들은 예수를 믿는가 아닌가에 상관 없이 오직 하나님 이외에는 희망을 걸 수 없는 이들을 가리킨다고. 어쨌든지 예수는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기준이나 자세와는 전혀 달리 가난하고 울고 슬퍼하고, 또한 의와 평화를 갈구하며 살아가는 이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시련을 당하는 이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유업으로 주어진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고 그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무조건 가난해야 한다거나 금욕적이어야 한다거나 자기 희생적이어야만 한다는 것을 뜻한다고 볼 수는 없다. 우리가 모두 프란체스코 처럼, 마더 데레사 처럼, 슈바이쩌 처럼, 법정 처럼, 자기의 삶을 완전히 부정하고만 살아갈 수는 없다. 사실은 예수도 먹고 마셨으며 잔치집에도 갔고, 모든 인간의 삶을 긍정적으로 여겼다는 것을 보면 그렇지만도 않다는 게 확실하다. 그렇다면 팔복의 가르침은 하나님 나라를 지향해서 살아가야 할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가? 영적인 가치인가? 새로운 존재로의 부르심인가? 돈오(頓悟)의 세계를 말하는가? 우리가 어떤 유일한 모범답안을 찾을 수는 없지만 최소한 이렇게 말할 수는 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로마의 정치와 유대의 종교가 제시하는 가치에 반동하는 것이라고. 하나님 나라는 우리를 전혀 새로운 삶의 지평으로 옮겨가도록 압박해 온다고. 하나님 나라의 능력은 슬픔을 기쁨으로 만들기도 하고, 고난을 희망의 씨앗으로 만들기도 한다고.

제자선택

예수의 공생애 가운데는 앞서 말한 여러 중요한 사건들이 있지만 이제 여기서 거론하게 될 제자선택도 역시 지나쳐 버릴 수 없는 사건이다. 예수는 갈릴리 호수 부근, 특히 가버나움 등지에서 처음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우선적으로 제자들을 택했다. 시몬(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바돌로매, 도마,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다대오, 가나안인 시몬, 가룟 유다(마태복음 10:2-4)가 그들이다. 마태와 유다를 비롯한 몇명을 제외하면 대다수가 어부들인데, 예수는 그들을 부를 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하겠다”고 말씀하셨다(마태복음 4:19). 사도행전에 따르면 유다가 열 두 사도에서 제외되고 대신 맛디아가 선택되었다(사도행전 1:26).
사도들 중에서 몇몇 주목할만한 이들은 다음과 같다. 베드로의 원래 이름은 시몬이다. 예수에 의해 베드로라는 이름(반석이라는 뜻)을 받았다. 그는 예수가 천국의 열쇠를 맡기겠다고 할 정도로 예수의 신임을 받았다. 도마는 의심이 많은 사도로 칭해지고 있는데, 아마 오늘식으로 말하면 불가지론자라고나 할른지. 마태는 그 당시 살인강도나 창녀들 처럼 죄인 취급을 받았던 세리였다. 가룟유다는 잘 알려진대로 예수를 은 삼십전에 판 사람으로서 비밀에 쌓인 인물이다. 다른 제자들이 거의 북방 갈릴리 출신인 반면에 유다는 남쪽 유대 출신이었으며 다른 제자들에 비해 지적 수준이 상당한 사람이었다. 그가 별로 많지도 않은 은 삼십전 때문에 예수를 팔 정도로 몰지각하거나 파렴치한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 민족의식이나 역사의식이 투철한 사람으로서 예수를 통해 민족해방을 꿈꾸다가 그게 여의치 않자 도발적인 행동을 통해서 예수를 그쪽으로 유도해보려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 집행되고 난후 그는 은 삼십전을 제사장들에게 되물려주고 목매달아 죽었다는 전승이 초대교회에 알려져 있었다. 베드로가 아닌 또 다른 시몬은 열심당원이었다(누가복음 6:15). 그당시 민족해방을 성취하기 위해 칼을 가슴에 품고 다니다가 매국노 등을 처단하던, 말하자면 일종의 무장 독립투사 같은 인물이었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가르친 예수의 제자 중에 이런 과격주의자가 있었다는 것은 아이러니이긴 하지만, 이는 적지 않은 제자들이 예수에게서 그러한 희망을 엿보았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말해준다.
이들 제자들의 면면을 보면 예수 공동체가 어떤 종교적이고 영적인 가르침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무언가 한을 가슴에 품고 그것을 일시에 해결해보고자 한 열광주의적 집단 처럼 비쳐졌을 것 같다.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의 눈에는 품위라고는 눈씻고 찾아볼래야 찾아볼 데가 전혀 없는, 그리고 신분도 미심쩍은 이들이었다. 앞서 말한대로 요한의 제자들도 예수의 제자들을 이상하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 두말하면 무엇하겠는가. 가정이나 직장 등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를 따라 나섰지만 그들 제자들은 예수를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가장 잘 나가던 베드로는 여러번 책망을 받았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태복음 16:23). “네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마태복음 26:34).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예수의 때가 되면 자기 아들을 오른 편과 왼 편에 앉게 해달라고 청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가룟 유다는 예수를 은 삼십에 팔지 않았는가. 예수가 십자가에 달릴 때 거의 모든 제자들은 꼬리를 감췄으며, 부활 이후에도 하나님의 역사를 따라잡지 못하고 뿔뿔히 흩어졌다. 어떻게 보면 오합지졸 같은 이들이 세계사를 가장 결정적으로 변화시키는데 그 핵심적 역할을 한 셈이다.
사도들에 의해서 기독교 신앙은 가장 명료하게 각인되었다. 이는 곧 기독교 신앙이 기본적으로 사도성에 있다는 말이다. 오늘 우리는 예수를 직접 만나지 못하고 다만 사도들의 증언에 의존해서 간접적으로 예수를 이해하고 믿을 뿐이다. 따라서 만약 사도들이 예수를 바르게 이해했다면 우리의 신앙도 바른 것이고 잘못 이해했다면 우리의 신앙도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 신앙의 사도성을 가장 적나라하게 알려주는 예배형식이 바로 우리가 매주일 예배시 마다 암송하는 사도신경*이다. 사도신경이 바로 사도들에 의해 직접 고백된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근원적으로는 그들과 맞닿아있다. 이렇게 사도적 전승을 유지한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다.

*사도신경은 기독교 신앙의 요약으로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그리고 교회와 죄의 용서와 부활과 영생에 대한 신앙고백이 그 안에 압축되어 있다. 이 사도신경은 초대교회의 여러 신앙고백이 수 세기 동안 전승의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예컨대 베드로의 신앙고백, 로마 교회의 세례고백문, 니케아 신조, 콘스탄티토플 신조 등이 이에 해당된다. 참고적으로, 4세기 로마교회의 고백문에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무덤에 묻힌 다음에, 특히 음부(지옥)에 내려갔었다는 문장도 포함되어 있다. 물론 우리말 사도신경에도 이 음부행에 대한 구절이 빠져있다. 사도신경의 전체 내용은 이렇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어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인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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