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십자가와 부활사건

기독교를 말한다 조회 수 4405 추천 수 0 2009.04.25 11:07:50
 

3장
십자가와 부활사건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삼년 공생애를 통한 예수의 행적은 놀랍도록 단순명료하다. 갈릴리 호수*에서 시작해서 사마리아를 거쳐 유대의 예루살렘에서 끝난다. 갈릴리는 이스라엘의 변방으로서 반로마 소요사태가 자주 발생한 곳이었기 때문에 로마 정부도 상당히 골치 아프게 여기던 곳이다. 사마리아는 그야말로 지역 차별의 피해를 가장 많이 받은 곳이었지만, 예수는 그 지역도 역시 순례의 장소로 빼놓지 않았다. 예루살렘은 유대의 명실상부한 수도다. 다윗 왕조의 정통성이 그곳에 뿌리박고 있었다. 갈릴리에서 하나님 나라 운동에 불을 붙인 예수는 차츰 남하하면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게 되고, 그곳에서 체포당하고 공판을 받고 결국 십자가형을 선고받고 처형된다. 대개의 위대한 인물에 대한 이야기는 죽음으로 끝나게 마련이지만 예수 이야기는 무덤에 묻힌지 삼일 째 되던 새벽에 전혀 뜻밖의 상황으로 돌변하게 된다. 부활사건이다. 우리는 여기서 기독교의 초석이라 할 이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서 생각해보려고 한다. 이것이 아니면 기독교라는 종교, 그 문화, 그 역사가 허물어질 수 밖에 없을 정도로 그 중심의 문제이다. 복음서의 내용을 비교해 보더라도 이 사실은 명확하다. 예수의 다른 이야기들은 네 복음서들이 서로 다른 비중으로 다루고 있지만, 이 십자가와 부활만큼은 일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복음서의 이야기들이 한결같이 이 십자가와 부활을 향해 구성되어있다.

*신약성서에는 갈릴리 호수가 게네사렛, 혹은 디베랴 호수로 불리우기도 하는데, 남북으로 21km, 동서로 12km 정도의 크기다. 예수 당시에는 이 호수를 생활의 근거지로 삼는 이들이 많았다. 가버나움은 이 호수에 맞닿아 있는 어촌으로서 예수의 초창기 주활동무대가 되기도 했다. 갈릴리 호수의 물이 흘러내린 물줄기가 요단강이며 이 물이 바다로 흘러들어야 할텐데 그렇지 못하고 한쪽으로 갇혀서 형성된 호수가 사람이 누워있으면 그냥 뜰 정도로 소금기가 높은 사해다. 예수는 갈리리 호수를 근거지로 어부생활을 하던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제자로 삼았다. 예수가 그 호수 물위를 걸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더구나 부활 후에 “갈릴리로 가리라”는 말씀과 함께 그 호수가에 나타난 일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만큼 예수와 그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갈릴리라는 장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하겠다.

예수는 예루살렘을 향한 도상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이 겪게 될 끔찍한 사건을 어느 정도라도 예감했는지, 아니면 아무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유대인의 전통에 따라서 그저 유월절 순례길에 나섰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복음서가 이에 대해서 어떤 단서를 제공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예수의 공생애 초창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유대교의 공조직에서도 별로 이렇다할 제재가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어떤 경우에는 남자만 계산해서 오천 명 이상이 모일 정도로 예수에 대한 군중들의 관심이 증폭하자 유대교 고위층이 예수를 위험인물로 주목하기 시작했다. 특히 바리새인들과의 충돌이 이런 갈등의 외연을 확대시켰다. 예수에 대한 유언비어가 난무하면서 예수에 대한 군중들의 태도도 상반되게 나타났다. 여전히 예수에게서 어떤 메시야적 희망을 기대하는 이들이 있는 반면에 별 볼일 없는 인물로 바라본 이들도 있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를 반율법주의자, 반성전주의자, 반도덕주의자로 낙인찍는다. 예수는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는 나사렛 출신이었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뻔하다. 예수라는 인물을 처치해야만 했다. 어쩌면 예수 스스로 이런 조짐을 감지했는지도 모른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가?”(마태복음 16:13)라고 질문한 적이 있다. 더구나 자신의 십자가 죽음에 대한 직접적인 언질도 몇번이나 있었다(마가복음 8:31, 9:30-32, 10:32-34). 이런 일련의 사실을 놓고 볼 때 예수는 결국 자신에게 임박하고 있는 십자가형을, 아니면 최소한 어떤 위기를 느끼고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 상황에서 그는 호랑이굴이라 할 예루살렘으로 입성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이 약간 희화적으로 묘사되어 있다(마태복음 21:1-11). 예수가 예루살렘 가까운 곳에 이르렀을 때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맞은 편 마을에 가서 나귀와 나귀새끼를 끌고 오라고 했다. 아마 그 나귀 주인과 이런 약속이 되어있었던 것 같다. 제자들은 예수의 말씀대로 따른다. 제자들은 나귀 등에 자기들의 옷을 얹었고 예수는 그 위에 탔다.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예수의 길에 군중들이 겉옷을 벗거나 아니면 나뭇가지를 꺾어서 펴고 ‘호산나!’라는 환호성을 보냈다. 이러한 작지 않은 소동으로 인해서 사람들이 나귀를 타고 들어오는 예수에 대해서 호기심을 보였다. 마태는 이사야 62장11절과 스가랴 9장9절을 인용하여 예수의 이 사건을 해석한다.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이 장면은 고난을 짊어진 메시야상을 의미한다고 말이다.
항상 자신의 언행을 숨겨오던 예수가, 그렇지 않아도 예수를 향한 성전지도자들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은 때에, 예루살렘 입성에서 이렇게 공개적으로 자기를 드러내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국면이 더 이상 어찌해 볼 도리가 없을 정도로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극한의 상황으로 자신을 몰고가려는 의도였는지, 아니면 자신의 메시야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자는 것인지 확실하게 알 도리는 없다. 사실 이스라엘의 메시야상은 그런 초라한 모습이라기 보다는 말을 타고 모든 이방인들을 초토화시키는 능력으로 그려져 있지만.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예루살렘 성전의 권위에 대해서 예수가 전혀 게의치 않았으며 오히려 여러 장면에서 도발적인 행태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기점으로 예수의 운명은 십자가 처형을 향해 가파르게 달려가게 된다.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서 공히 예루살렘 입성 이후 예수의 행적에 대한 정보를 매우 풍부하고 세세하게 전달해 주고 있다. 그 중에 주목될만한 몇 대목만을 순서에 따라 검색해보도록 하자. 성서에 나오는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유월절 만찬, 겟세마네 기도, 체포, 공판, 십자가형 집행.

밥상공동체

우선 유월절 이야기부터 시작된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절기라 할 수 있는 유월절*에는 모든 가정에서 아주 특이한 절차에 따른 유월절 만찬 의식이 실행된다. 유월절 만찬의 주 식단은 양고기, 누룩 넣지 않은 빵, 포도주다. 가장이 집례자가 되어서 모든 식구들에게 유월절 내력을 설명해 주면서 자신들이 엑소더스 공동체임을 확인시키고 이 의식의 주체가 하나님인 것을 깨닫게 한다. 예수도 역시 유대인들의 일반적 전통습관대로 열두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소위 최후의 만찬**을 나누었다. 예수는 빵을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면서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마가복음 14:22)고 말씀하셨으며, 포도주 잔을 주시면서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가복음 14:24)고 하셨다. 그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빵이요, 포도주라고 지칭했다. 초기 기독교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장 중요한 종교의식으로 자리잡고 있는 이 유월절 만찬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신 예수의 대속적 죽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예수는 영적인 구원으로서만이 아니라 몸과 피의 구원까지 포함되는 전인적 구원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으셨다는 뜻이다. 결국 이러한 최후의 유월절 만찬이 기독교의 아주 특별하고 본질적인 종교의식으로 발전했다.

*오순절, 수장절과 더불어 이스라엘의 삼대 절기에 속하는 유월절의 유래는 출애굽기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모세가 자기 민족의 해방을 위해서 에집트의 바로와 상당한 기간 밀고 당기는 기싸움을 벌이는 중에 하나님은 이 싸움을 결정적으로 끝낼 방도를 준비하신다. 에집트에 속한 모든 가정의 장남, 집짐승의 맏배가 죽게 되는 사건이었다. 에집트 바로의 아들도 죽고 고관대작들과 백성의 아들도 죽고, 소와 양의 모든 첫새끼들도 죽음의 천사가 스쳐지나가자 죽었다. 어떻게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어떻게 성서기자는 아무리 바로의 교만과 불순종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것이라해도 갓난아이와 짐승새끼까지 하나님이 죽였다고 기술할 수 있었을까? 그는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이게 하나님의 정의이며 사랑일까? 이스라엘을 향한 편애는 이렇게 불의하게 나타나도 괜찮은 것일까?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출애굽기의 역사서술이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역사를 해석한 것이라 할 경우에 우리는 이 사건을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에집트에서 수 백 년간 강제노역에 시달린 소수 민족으로서 그들은 에집트의 처참한 비극을 하나님의 섭리로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고.
출애굽기에서 서술되는 유월절 사건은 비극과 행운, 슬픔과 기쁨, 두려움과 황홀경이라는 대치되는 두 스펙트럼으로 출애굽의 역사를 그려내고 있다. 장자를 잃은 에집트 여인들의 하늘에 사무치는 울부짖음과 자손대대로 노예로 살다가 드디어 자유의 몸으로 가나안 땅을 향해 대장정의 길을 떠나는 유대인들의 노래소리가 이 유월절 절기에 미묘한 불협화음으로 울려퍼지고 있다. 에집트인들에게는 제삿날이 유대인들에게는 축제날이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라는 구약성서의 역사관이다.
에집트 가정에 죽음의 천사가 방문하는 사이에 유대인들은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그 고기를 구워 먹었으며, 허리에 띠를 띠고 지팡이를 집고, 급히 여행을 떠날 차비를 한 채 누룩을 넣지 않은 빵과 쓴 나물을 먹었다. 그리고 아무런 미련도 없이 옛 조상 요셉의 드라마가 깃든 고센 땅을 떠난다. 유대인들은 두고두고 이 유월절을 기억했고 일정한 의식행위를 통해서 자신들의 생존이 하나님의 은총이었음을 확인해 나갔던 것이다.

**예수의 유월절 만찬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이탈리아 밀라노 산타마리아 델 그라체 성당에 그린 벽화 ‘최후의 만찬’으로 유명하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예수의 얼굴에 잘 어울리는 사람을 모델로 예수를 그린 다음에 오랜 세월에 걸쳐 가룟 유다의 모델을 찾아보았지만 헛수고만 되풀이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찾아내어 그림을 완성하게 되었는데 그 모델이 예수의 모델과 동일인이었다는 일화가 있다. 그 그림에는 일행이 예수를 중심으로 좌우로 의자에 앉아있는 것 처럼 보이는데, 원래 그 당시 유대인들은 식사할 때 왼쪽으로 비스듬하게 누워서 왼쪽 팔꿈치로 몸을 지탱하고 오른 손으로 음식을 집어먹었다고 한다.

예수가 지상에서의 삶을 끝내야할 바로 그 순간에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함께 나눈 유월절 만찬은 기독교 공동체의 정체성을 명징하게 드러내 주는 사건이다. 말 그대로 ‘밥상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이다. 어떤 이는 ‘둘레상 공동체’라고도 표현한다. 예수가 지향한 하나님 나라는 늘 밥상공동체적 기초에서 이해된다는 말이다. 오늘의 교회도 역시 이런 지향성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해방의 날인 유월절이 이제는 참된 나눔과 친교가 이루어지는 축제가 되었다. 정치적 해방이 이제는 분리와 소외로부터의 해방이 되었다. 결국 우리는 예수의 ‘최후의 만찬’을 통해서 구원의 참 의미를 상징적으로 깨닫게된 셈이다. 그 전통이 기독교 예배에서 성찬식으로 전승되었다. (성찬식에 대해서는 7장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보게 될 것이다.)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제자들과 유월절 만찬을 함께 나눈 예수는 곧 예루살렘 근처의 겟세마네 동산으로 기도하기 위해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갔다. 복음서는 이 순간부터 십자가형이 집행될 때까지 예수의 일거수일투족을 예외적으로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만큼 이 국면이 복음서 기자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겟세마네에서 머문 몇 시간 동안 예수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측은지심을 갖게까지 한다. 세명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마가복음 14:34). 누가복음서에는 기도에 힘쓴 예수의 몸에서 흘러내린 땀방울이 핏방울 같이 보일 정도였다고 기록되어 있다(누가복음 22:44). 하나님의 아들이, 스스로 하나님인 그분이 십자가형을 앞에 두고 이렇게 인간적 한계를 보였다는 것은 많은 이들에게 의아스럽게 생각될 수 있다. 어느 정도 정신적으로 수양된 이들이나 의지가 강한 민족투사들도 자신들의 죽음을 의연하게 맞이하는데 하물며 신의 아들이 죽음 앞에서 고민하여 죽게되었다는 것이 괴이쩍지 않은가. 그 고통이 얼마나 견디기 힘들었는지 예수는 이렇게 기도했다고 한다.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마가복음 14:36).
어떤 이는 죽음 앞에 선 예수님의 태도와 소크라테스의 그것과를 이렇게 비교했다. 예수는 죽음에 직면한 한 인간의 고뇌를 여지 없이 노출시키고 있는데, 스크라테스는 인간 한계의 초월을 극적으로 보여주었다고 말이다. 잘 알다시피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빚진 닭 한 마리를 대신 갚아달라고 제자에게 부탁하면서 독사발을 받아마셨다고 하는데, 그의 이런 태도에서 죽음에 대한 그의 직관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참모습이 죽음에 직면해서 나타난다는 말이 옳다면 소크라테스에 비해서 예수는 얼마나 초라한가?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에게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나님의 아들은 인간적 한계를 여지없이 보여주고, 인간의 아들은 그 한계를 단숨에 뛰어넘어 버렸다는 이 역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두 관점에서 생각해보자.
첫째는 죽음에 대한 기독교적인 이해와 철학적인 이해의 차이점이다. 헬라철학은 인간을 영과 육이라는 이원론적 시각에서 바라본다. 육은 추하며 결국은 썩어없어질 것이지만, 영은 영원하며 본질이며 참된 이데아에 속하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것은 결국 영이 육으로부터 해방받는 사건인 셈이다. 인간이 죽는다고 해도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코스모스 안에서 참된 생명의 세계에 참여하게 된다. 오히려 해탈이며 자아로부터의 벗어남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자유다. 반면에 구약성서는 인간을 영육이원론이 아니라 통합적으로 바라본다. 따라서 죽음이 단순히 영혼이 육체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파괴되는 사건이다. 죽은 자는 아무런 즐거움에도 참여할 수 없었다. 완전한 단절이며 흑암이며 무(無)인데, 그것이 곧 스올(음부)의 세계이다. 예수님이 십자가형 앞에서 두려워할 수 밖에 없었던 것도 이러한 히브리적인 죽음 이해에 근거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둘째는 예수가 두려워한 그 본질이 무엇이었겠는가 하는 점이다. 위에서 언급한 죽음에 대한 히브리적 이해로서 예수의 처절한 몸부림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아무리 죽음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 극심했다고 해도 성서에서 묘사된 그런 과장된 감정와 태도를 모두 설명해 줄 수는 없다. 죽음 자체 보다는 자신이 감당해왔던 하나님 나라 운동이 이런 죽음으로 인해서 끝장날지도 모른다는 절박감이 그를 초조하게 만들지는 않았을까? 서른 살의 나이로 2년 여 동안 제자들을 삼고 사람들을 만나고 이런저런 사건들과 부닥치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 왔지만 아직 성과를 이루지도 못한 상태에서 매우 가깝게 닥아온 죽음의 그림자를 쉽게 받아들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석가나 공자, 마호멧 같은 성자나 종교 창시자들, 혹은 노자나 장자 같은 위대한 스승들만 해도 거의 천수를 다하면서 자신의 뜻을 펼쳤다. 그런데 예수는 삼십 대 초반에 눈에 들어오는 성과도 없이 자신의 과업을 마무리해야했다. 제자들을 좀더 의식화 시키고 부패한 예루살렘 성전 지도자들과 치열하게 투쟁하면서 대중적 운동으로서 어떤 결과물을 찾아보고 싶어졌을지 모른다. 자신의 가르침에 대한 이론적 체계도 세우고 조직도 꾸리고 가능하다면 재력가의 도움으로 큰 건물을 구입해서 명상쎈터나 교육훈련원 같은 것을 만들고 싶은데 죽어야 하다니!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 자의 마지막은 초조하고 절박하다. 아직도 이루어내야할 일이 산적한 자에게 죽음은 절망이요 허무다. 누구라도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 같으면 오히려 뻔뻔스럽게 끝까지 몸부림 치면서 이렇게 외칠 것 같다. “내가 죽으면 하나님이 손해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는 다음과 같은 말로 기도를 마무리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가복음 14:36).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예수 수난사는 겟세마네 동산과 골고다 언덕을 양 봉우리로 해서 상승과 하강의 곡선을 이루면서 진행된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신과의 내적인 투쟁을 거친 예수는 골고다 언덕의 형집행이 실행될 때까지 숨결을 고르듯 자신에게 다가온 험악한 운명을 받아들인다. 그 시작은 그의 체포다.
2천년 동안 악의 대명사 처럼 불려졌던 가룟 유다가 제사장과 장로들의 무장한 사병(私兵)을 이끌고 겟네세마네 동산으로 밤안개 처럼 찾아왔다. 그들과 미리 짜 맞춘대로 예수에게 입을 맞추며 “랍비여 안녕하십니까?”라고 인사했다. 그것을 신호로 무리들이 예수를 체포한다. 이에 당황한 제자 중의 한 사람이 호신용 칼을 휘둘러 무리 중 한 사람의 귀를 잘라냈다. 이를 본 예수는 그 유명한 말씀을 하셨다.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마태복음 26:52). 이어서 예수는 그 무리에게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칼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나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마태복음 26:55)라고 말씀하시고 순순히 포승줄에 묶이신다. 그리고 제자들은 모두 혼비백산 흩어진다. 아주 담백한 이 장면묘사에서 우리는 이 세계질서를 읽어낼 수 있는 독법을 본다. 칼을 쓰는 자와 칼을 칼집에 꽂는 자의 상반된 생존구조를 읽을 수 있다.
그당시 최고 종교지도자들로서 온갖 교양과 지식과 경건으로 치장하고 있었던 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공모하여 무장사병을 예수에게 보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어떤 점을 비교해 보아도 갈릴리의 예수공동체는 제사장 집단의 상대가 되지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칼로 예수를 잡아들였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차라리 예수와 그 일행이 하는 일들을 그대로 놓아두었으면 작은 소동으로 끝났을지도 모를 이 일을 긁어 부스럼 만드는 식으로 야만스럽게 칼로 해결하려다가 자신들이 감당하지 못할 사태로 빠져든 것인지 모른다.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아마 제사장들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순리대로라면 예수와 진리논쟁이라도 펼쳐야 하지만 이미 자신들에게는 그런 근거가 없었다는 것을, 기껏해야 그 생명력이 다해버린 모세의 권위만 모노 드라마의 독백 처럼 들먹거릴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스스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들은 자신들의 위선을 감추기 위해서 비록 예수에게서 그 어떤 흠집을 발견할 수 없었지만 칼을 들고 갔다. 그것도 한밤중에 예수의 제자 중 한 사람을 매수해서 말이다. 악은 항상 이렇게 비열하게 거동한다.
예수는 진리문제를 칼로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만약 그가 원하기만 했다면, 어느 정도 의도를 갖고 있었다면, 예수에게서 민족해방과 민중해방의 메시야적 희망을 보고 찾아온 이들이 노도 처럼 흘러넘칠 때가 있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피의 혁명을 불러일으킬 기회도 주어졌을 것이다. 예수가 그런 유혹을 받지는 않았을까? 칼을 통한 혁명을 일으켜 예루살렘 성전을 접수하고 그길로 가이사랴까지 내달아 로마 총독관저를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유대의 명실상부한 자유와 해방의 날이 오리라고 말이다. 그동안 많은 유대 혁명가들이 시도했지만 실패한 그 혁명을 예수가 완성할 수 있다면 민족의 영웅이 되며 그것이 바로 자기 민족이 살 길인 셈이다. 그러나 예수는 “네 칼을 도로 네 칼집에 꽂으라”*고 말씀하신다. 칼을 통해 해결하려는 사람은 그 칼을 통해서 망하리라.

*칼에 의해 체포당한 예수를 따르는 기독교가 칼의 역사를 심심치 않게 자행해왔다는 것은 참으로 비극적인 아이러니다. 정통교회의 가르침과 약간만 다른 말을 해도 종교재판에 처했다. 이단으로 몰아 출교시키거나 심지어는 일벌백계식으로 죽였다. 점성술사들, 자유주의적 과학자들과 인문주의자들, 집시들에게도 가혹한 박해를 가했다. 예수의 뒤를 따르는 우리는 이를 역사적 교훈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손 씻는 빌라도

불법으로 야반체포당한 예수는 그 즉시로 가야바 대제사장 관저로 호송되어 철야심문을 당하고 날이 새자 산헤드린 공회*에서 정식으로 종교재판을 받는다. 이들의 심문은 두 가지로 모아진다. 첫째는 “당신이 그리스도인가?”, 둘째는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인가?”이다. 그들이 이렇게 질문한 까닭은 이런 소문이 이미 떠돌고 있었으며 이걸 확인해야만 예수를 적법하게 처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이에 대해서 딱 맞아 떨어지는 답변을 하지는 않는다. 첫번 질문에 대해서는 이렇게 대꾸한다.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그러나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있으리라”(누가복음 22:67-69). 두번 째 질문에 대해서는 이렇게 답변한다.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누가복음 22:70). 일종의 선문답 처럼 들린다. 예수를 심문한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에게 결국 신성모독죄**를 언도한다. 그들이 볼 때 예수는 이번 심문에서만이 아니라 애시당초 모든 언행에서 신성모독적인 태도를 보였다. 산상수훈에서 선포된 반율법적 명제들이나 안식일 논쟁, 성전청결과 성전상대화 같은 행태들이 근본적으로 신성모독적으로 비쳤다. 신성모독자는 죽어 마땅했다. 예수의 신성모독이 변명의 여지가 없게 되었다고 판단한 산헤드린은 예수를 로마의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사법적으로 처리하고자 한다.

*산헤드린 공회는 유대의 공식 최고종교재판소에 해당된다. 71명의 최고위층 유력인사들로 구성되었다. 예수의 시체를 장사지낸 아리마대 사람 요셉도 이 공회의원이었다(누가복음 23:50).

**산헤드린이 예수를 기소한 이유는 예수가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함으로써 신성을 모독했다는 것이다. 과연 예수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메시야라고 언급했을까? 물론 복음서에는 그런 구절들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특히 요한복음 안에는 “나는 … … 이다.”라는 문장이 정형화 되어 있을 정도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나는 포도나무라고 말이다. 그러나 예수가 자신을 가리켜 분명하게 그리스도라고 지칭한 적은 없다는 게 정설이다. 오히려 그런 메시야 칭호를 물리치려고까지 했다(마태복음 16:23). 설령 비슷한 표현이 있다고 해도 상당히 간접적이요 암시적이었을 뿐이다.

산헤드린으로부터 이첩받은 예수 사건에 대해서 빌라도는 매우 곤혹스러워했다. 공회의 고발장에 적시된 예수의 죄목은 이랬다.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누가복음 23:2).” 이 죄목 중에서 유대인의 왕이라는 내용은 빌라도에게 별로 흥미를 끌지 못했다. 아마 그는 예수가 일종의 민족주의적 몽상가 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이미 모든 주권을 상실한 유대인의 왕이라고 해봐야 무슨 문제를 일으킬 수 있겠는가? 예수가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지 못하게 했다는 고발건은 그야말로 유언비어에 불과했다. 언젠가 예수는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에 대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때 예수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누가복음 20:25). 예수는 결코 의도적으로 사회체제를 전복시키려한 반정부주의자이거나 반로마적 열혈당원도 아니었다.
마지막 한 가지 문제인 유대백성을 미혹케하고 소동을 일으켰다는 죄목은 보기에 따라서 서로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제사장들의 입장에서 보면 분명히 예수는 사회질서를 혼란케 하는 요주의 인물이었다. 예컨대 모세의 율법을 상대화 하고, 성전에서 실행되던 관행들을 정죄하고, 특히 세리와 여자와 죄인들을 천히 여기지 않는 태도는 기존질서에서 볼 때 위협적일 수 밖에 없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기득권층이 가장 원하는 바는 현상유지(status quo)이기 때문에 그것에 역행하는 행위는 여지 없이 배척되기 마련이다. 산헤드린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과 그 지향성은 사회를 혼란케 하는 반사회적 범죄행위일지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일반적으로 혁명가들은 사회를 불안하게 만들고 그것에 터해서 혁명적 정서를 조작해나가지만, 예수는 레닌이나 모택동 처럼 어떤 사회과학적인 프로그램을 감행한 적이 없다. 열려진 하나님 나라만을 추구했기 때문에 상층부 사람들에게는 사회불안을 야기시키는 위험인물이라고, 하층부 사람들에게는 -혁명을 꿈꾸는 자들에게는- 지나치게 종교적인 자라고 비판받을 수 밖에 없었다.
복음서에 의하면 로마의 지방장관으로서 빌라도 총독은 산헤드린 공회의 고발건을 감정적으로만 처리하지는 않은 것 같다. 예수를 심문한 결과 예수에게서 그 어떤 중범죄의 요건을 찾아낼 수 없다고 생각하고 가능한대로 훈방조치로 끝내려고 했다. 그러나 산헤드린의 압력이 녹녹치 않다는 사실을 알고 로마제국의 고위 관료답게 공회의 체면도 살려주고 로마의 권위에도 손상이 가지 않는 방법을 찾아냈다. 로마제국은 식민지 국가의 명절에 특별 사면제도를 실시하고 있었다. 빌라도는 유대인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에 맞추어 흉악범인 바라바와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예수 중에서 한 사람을 특사로 풀어주겠다고 했다. 산헤드린이 당연히 예수를 택할 것으로 생각했는지 아니면 만약의 경우에 자신의 책임을 모면키 위해서 그런 제안을 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다만 이 고발건로 인해서 빌라도가 적지 않게 혼란스러워 한 것은 분명하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빌라도가 헤롯의 조언을 구하기도 했으며(누가복음 23:8-12), 마태복음에 의하면 이상한 꿈을 꾼 그의 아내가 옳은 사람의 일에 상관하지 말것을 간청하기도 했다(마태복음 27:19), 빌라도는 결국 물을 가져다가 공개적으로 손을 씻으면서 자신이 예수의 죽음과 상관이 없다고 선언한다(마태복음 27:24).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예수는 빌라도에 의해 최종적으로 십자가형으로 선고받았다.
예수에 대한 사형선고는 유대 종교를 대표하는 산헤드린과 로마 정치를 대표하는 총독이 합작해낸 작품이다. 종교적 광신과 정치적 폭력이 인류역사에서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는지 우리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종교인이라면 종교인답게, 정치인이라면 정치인답게 자신들의 합리적 논리에 근거해서 행동해야 할텐데 역사는 그렇게 흘러오지 못했다. 더우기 이번 사건에서 비열한 것은 산헤드린과 총독이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만약 산헤드린이 예수를 자신들의 종교적 권위에 도전한 인물로 판단했다면 유대의 사형법대로 돌로 때려 죽여야 했는데 그들은 교묘하게 빌라도의 정치적 힘에 기대보려했다. 빌라도 역시 자신의 정치적 판단에 따라 기왕에 자신이 사형선고를 내려야만 했다면 끝까지 자신의 정치적, 사법적 정당성을 붙잡고 있어야 했는데 그는 손씻는 몸짓으로 자신의 불가피성을 비굴하게 합리화했다. 악은 그렇게 좀스럽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예수는 일정한 로마 형집행 수순에 따라서 예루살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렸다. 로마인은 어떤 경우에도 이런 방법으로 죽을 수 없게 되어있는 십자가형은 주로 반로마 투쟁을 하던 국사범들에게 실행되었다. 예수 이전과 이후에도 십자가형을 당한 이들이 적지 않았으며, 예수의 십자가 좌우에도 함께 처형된 이들이 둘이나 있었다. 십자가형은 이렇게 집행되었다고 한다. 원래 십자가는 티(T)자형이다. 사형수의 양팔을 벌려 십자가의 가로 막대 양 끝에 묶은 다음, 손바닥에 대못을 박는다. 몸무게로 인해서 손바닥이 찢겨져나가지 않을 정도로 몸을 십자가 세로 막대에 묶은 다음에 십자가를 세운다. 결국 약간씩 찢겨지는 사형수의 손바닥을 통해서 몸의 액체가 모두 쏟아짐으로써 죽게되는 사형법이다. 일반적으로 건강한 남자가 완전히 생명을 잃게 되는 시간이 대충 일주일 정도 걸리는데 그 기간 내도록 무의식과 의식 사이를 오락가락하게 된다. 죽은 다음에도 주검을 즉시 수습하지 않고 날짐승이나 들짐승이 뜯어먹을 때까지 노천에 내쳐둔다. 피식민지 백성들에게 겁을 주기위한 로마 제국의 잔혹한 사형제도였다. 예수는 의외로 빨리 여섯 시간만에 숨을 거두었다. 로마 정부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의 주검을 즉시 수습하여 자신의 가족 묘지에 매장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그 숨막히는 순간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한 장면이 복음서에 묘사되어 있다. 예수의 옷을 취하기 위한 로마군사들의 제비뽑기가 그것인데, 네 복음서 모두 이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마태복음 27:35, 마가복음 15:24, 누가복음 23:34, 요한복음 19:23). 한쪽은 몸부림치며 죽음과 투쟁하고 있는데, 다른 한쪽은 여흥에 빠져있다. 십자가에 달린 자는 모든 것을 잃어가고 있는데 십자가 발밑에 앉아있는 자들은 모든 것을 잃는 자의 작은 것 마저 빼앗는다. 이것 보다 더한 코메디가 있을 수 없다. 이게 바로 인류의 역사지만.*

*톨스토이의 「부활」을 보면 그 당시 러시아의 사회상이 잘 그려져 있다. 특히 사법부, 고위관료, 귀족, 부자들의 위선이 소외계층의 고통을 확대시키고 있으며, 그것으로 인해 그들 스스로도 불행해진다는 점이 부각되어 있다. 예컨대 까쮸사의 재판 장면을 보자. 억울하게 살인사건에 연루된 가련한 창녀의 재판을 맡은 판사들은 사실을 밝혀내려는 마음 보다는 엉뚱한 일만 생각하고 있었다. 자기 아내와 싸웠던 일, 대충 재판을 끝내고 내연의 여인을 만나기 위해 호텔을 찾아가야할 일, 혹은 소화불량 같은 일에만 신경을 쓴다. 그러니 재판이 옳바로 진행되겠는가. 검사도 그 사건 자체에 대한 관심 보다는 어떻게 일을 처리해야 판사들의 눈에 들어 출세할 수 있는가 하는 것에만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배심원들도 역시 까쮸사의 성적 매력에만 마음을 둘 뿐이었다. 결국 이들의 무사려한 태도에 의해서 까쮸사는 살인혐의로 실형을 선고받는다.

십자가상에 매달려 있던 여섯 시간 동안 예수는 일곱 마디 말씀을 한 것으로 복음서 기자들이 보도하고 있다. 이를 가리켜 통칭 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고 한다. 각기 다른 국면에서 말씀하신 이 일곱 구절 중에서 특히 마태와 마가복음에 동시에 기록되어 있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는 우리에게 십자가사건의 신학적 의미를 분명하게 전해준다 하겠다. 아람어인 이 말을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라는 뜻이다. 인류구원을 완성시킬 그 원대하고 위대한 사역의 마지막 순간에 예수가 하필이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심정을 토로했을까? 십자가형의 고통이 그의 인내심을 벗어난 때문이었을까? 그건 말이 안된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죽어갔다. 어떤 독립투사들은 십자가상에서 ‘유대민족 만세!’를 외치며 장렬하게 최후를 마쳤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겟세마네에서도 이 잔을 물리쳐 달라고 기도하더니 골고다에서도 “왜 버렸는가” 호소하고 있다. 아무리 육신의 고통이 못견딜 정도였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모든 존재근거가 되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감히 생각할 수 있겠는가라는 말이다.

*가상칠언은 다음과 같다. 1)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복음 23:34). 2)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누가복음 23:43). 3)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누가복음 23:46). 4)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태복음 27:46, 마가복음 15:34). 5)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요한복음 19:26,27). 6) 내가 목마르다(요한복음 19:28). 7) 다 이루었다(요한복음 19:30).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으로부터의 유기가 사실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분명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 신학적 의미를 찾아낼 수는 있다. 십자가 사건은 어느 누구도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어떤 인간의 도움이 와 닿을 수 없는 완전한 절망의 상태, 그래서 “왜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절규할 수 밖에 없는 상태를 말한다. 예수는 실제로 모든 이들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자기 동족인 유대인들로부터, 대정치가인 빌라도로부터, 유대의 분봉왕 헤롯에게서, 심지어는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호언장담하던 제자들로부터. 그 상황은 김현승 시인의 표현처럼 ‘고독의 끝’이다. 그 절망의 맨 밑바닥, 그 허무의 가장 아래층, 햇살의 가느다란 선 마저 가 닿지 못하는 해저심연이 그곳이다. 거기에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있었다. 그 고통과 절규와 무의미가 자리한 십자가에 하나님 자신이 매달려* 있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어린아이가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어떤 젊은이가 랍비에게 따지고 들듯이 물었다고 한다. 하나님은 계시는가? 이러한 저주스러운 죽음의 순간에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서 무얼하고 있는가? 랍비의 대답은 이랬다. 저 가스실에, 저 아이의 죽음에 하나님이 계신다.

기독교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 같은 상황에서 구원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종교다. 화려한 교회장식과 의식들이 문제가 아니라 오늘의 세계 안에도 여전히 이러한 버림받은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는 점을 눈여겨 보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절망적인 상황을 희망의 불빛으로 가득 채우는 일이 바로 교회가 이 세상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이다. 교회 자체에 관한 일들은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 심각하지도 않다. 교회가 재벌들 보다 훨씬 막강한 재력을 자랑하겠는가, 세종문화회관 보다 더 품위있는 교회당을 내세울 것인가, 프로 야구나 열린 음악회 보다 더 감동적인 예배의식으로 경쟁하겠는가. 스릴이 넘치고 고상하고 이름나는 일은 교회가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앞장 서서 할 단체나 사람이 많지만, 신으로부터 버림받은 것 처럼 절망하는 그곳에 함께 있어주는 일은 교회가 최후의 보루다. 물론 교회가 앞서 이 일을 감당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일을 이루실 것이다. 이게 바로 ‘십자가 신학’이다.

빈무덤

우리는 이제 기독교를 설명할 때 넘어야 할 마지막 험산준령에 도달한 셈이다. 예수의 부활사건이다. 우리의 현실세계에서 경험될 수 없는 사건을 현실언어로 드러내 보이려는 시도 자체가 무모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고서는 기독교의 근거가 세워질 수 없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데까지 찾아가보아야 한다. 부활절 마다 교회에서는 계란을 비유로 들어 설명한다. 겉으로는 죽은 것 같지만 적당한 온도를 맞추어 주고 때가 되면 병아리가 태어나는 것 처럼 예수도 부활했고 그를 믿는 자도 부활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런 것만으로 현대인들을 설득시킨다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발상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믿으라고 말할 수는 더더욱 없다. 일단 복음서가 무엇을 말하고있는지 그 부활보도를 충실히 따라가 보도록 하자.
안식일 전날인 금요일 오후 3시에 운명한 예수는 아리마대 요셉의 가족묘지에 매장되었다. 금요일 저녁부터 시작되는 안식일을 피하느라 급히 서두른 탓에 적절한 장례절차는 생략되었다. 안식일이 지난 다음날 새벽, 그러니까 일요일 새벽에 평소 예수를 따르던 여인들 몇명이 단순히 예수의 몸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서 무덤에 왔다. 웬만한 힘으로는 끄떡하지도 않을 무덤의 돌문이 열려진 게 이상했지만 이 여인들은 일단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당연히 그곳에 있어야 할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않았다. 당황하고 있는 이 여인들 앞에 눈부신 모습의 천사가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 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니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마가복음 16:6, 7). 복음서 마다 약간 씩 표현을 달리하고 있지만 대충 그런 내용이다. 부활한 예수는 그 후에 여러 번 현현했다. 한 두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열한 제자 모두에게, 막달라 마리아에게, 바울의 고백에 따르면(고린도전서 15:1-11) 오백여 형제들에게, 예수의 동생 야고보와 바울 자신에게도 나타났다고 한다. 부활 후 사십일 동안 지상에 있었던 예수는 믿는 이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셨고 재림할 것이 약속되었다(사도행전 1:6-11).
우리가 복음서에서 예수의 부활 전승과 연관된 내용을 읽을 때 마다 의아스럽게 생각되는 것은 제자들이 왜 예수의 부활을 예상하지 못했는가하는 점이다. 예수는 이미 몇번이나 자신이 받아야 할 수난과 부활을 예고했는데도 제자들은 십자가형 앞에서 당황했을 뿐만 아니라 부활은 아예 상상도 하지 못했다. 먼저 무덤에 가보았던 여자들이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을 때 귀담아 듣지 않았으며(누가복음 24:11), 부활한 예수의 현현을 경험한 사람이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전했을 때도 믿지 않았다(마가복음 16:12, 13). 제자들 스스로 무덤을 확인해보고도 그것이 부활을 가리킨다고 전혀 생각하지 못한 채(요한복음 20:9) 예수의 십자가처형으로 볼장 다 봤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그들은 각자 고향집으로 흩어졌다. 모든 정황으로 미루어보아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기대하지도 않았고 그 예고를 기억하지도 않았다는 게 확실하다. 왜 그랬을까? 우선 예수가 말씀한 부활예고가 제자들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졌을 가능성이 있으며, 조금 역사비평적으로 생각하면 부활예고가 부활절 이후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적 전승일 수도 있다. 어쨌든지 분명한 것은 예수의 부활이 제자들에게는 너무나 낯선 사건이어서 갈피를 잡지 못했다는 점이다.
복음서에 진술되어 있는 상이한 부활보도가 우리에게 확실하게 알려주고있는 사실은 두 가지다. 예수가 묻혔던 아리마대 요셉의 가족 무덤이 비었다는 것이 그 하나요, 십자가에 달려 처형된 예수가 그들 앞에 다시 나타났다는 것이 다른 하나다. 십자가 처형과 매장, 그리고 다시 나타남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복음서는 구체적으로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다음과 같은 여러 이야기가 전해진다. 무덤 안에서 희게 빛나는 천사가 나타났다. 엠마오로 돌아가던 두 제자에게 예수가 현현했다. 예수가 구운 생선을 먹었다. 제자들이 모여있던 방의 문이 닫혀 있었는데도 예수가 홀연히 나타났다. 대충 이런 이야기들이다. 이것들이 예수의 부활을 사실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예수의 부활을 예상하거나 기대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경험하고도 설명할 재간이 없었다. 다만 제자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현상에 대한 경험을 산만하게 서술해 주고 있을 뿐이다.
다시 생각해 보자. 금요일 저녁부터 일요일 새벽 사이에, 만 하루 반 뿐이 되지 않는 그 시간에 아리마대 요셉의 가족 묘지 안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하나님이 예수의 몸에 숨을 돌아오게하고 심장을 소생시키고 뇌활동을 재생시킨 것인가? 대수술을 받은 사람이 마취에서 깨어나듯 조금씩 의식이 돌아온 예수가 세마포를 벗어던지고 무덤 밖으로 뛰쳐나온 것일까? 안타깝게도, 아니 다행스럽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성서는 그것에 관한 장면묘사를 전혀 하지 않는다. 만약 그럴듯한 묘사가 있었다면 부활사건은 마술사들의 소생술과 별로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복음서는 부활사건을 그런 것과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하나님의 사건으로 이해하고 있다. 하나님이 십자가 처형과 다시 나타남 사이에 개입하여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을 이루어냈다는 사실과 그 귀결 그 이외에 아무 것도 밝히지 않았다. 사실상 복음서 기자들은 아무 것도 말할 게 없었다.
우리는 아직 부활*에 대한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답변을 제시하지 못했다. 부활이 무엇인가? 예수의 부활, 그리고 우리가 장차 입게될 부활의 세계는, 그 부활의 실체는 무엇인가?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이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다. 기껏해야 다음과 같이 소극적으로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부활은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나 나사로 처럼 죽었다가 다시 살았다는 그런 사건과는 다르다고. 원래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다시 살지 못한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에 죽었다가 다시 살았다는 말 자체가 모순일 뿐만 아니라, 나사로 같은 사건들은 모두가 다시 죽을 몸으로 돌아왔다는 점에서 예수의 부활과는 전혀 다르다. 또한 영혼불멸 사상이 기독교의 부활사상과 정확하게 들어맞는 것도 아니다. 부활은 세계이해의 논리에 근거한 불멸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죽은 자로부터의 보편적인 부활을 하나님이 종말에 일으킨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이며 희망이다. 약간 신학적 표현이 허락된다면 이와같이 말할 수 있다. 예수부활은 유대인의 묵시문학적 세계관에 기초된 궁극적 미래에 대한 희망이라고. 하나님이 통치하는 생명의 세계에 참여한다는 궁극적 희망이라고.

*자연과학을 신봉하는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의 이 부활교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려고 들 것이다. 과학적으로 말이 안된다고. 그러나 과학만이 진리를 드러낸다고 단정할 수 없는 게 아닐까. 부활은 하나님이 이루게 될 종말사건이며 종말희망이며 종말신뢰인데, 이것을 과학적으로 논증하라는 주장은 과학의 자기한계를 넘는 발언이 아닐까 모르겠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이론이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같은 현대물리학을 끌어들일 필요도 없이 최소한의 직관만으로도 이건 분명하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과학이 시간의 실체도 아직 풀어내지 못하고 있는 마당에 종말론적 진리까지 과학적 증거로 재단한다는 것은 과학만능주의적 발상이 아닐른지. 좀더 실제적인 문제를 제기하자면, 자연과학이 인간과 우주의 미래를 위해서 지금까지 무엇을 감당했으며 앞으로 감당할 몫이 과연 무엇일까라는 것이다.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했을 뿐이지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하고, 많은 것을 생산하긴 했지만 자연의 조화를 깨뜨리고, 우주를 여행할 가능성을 열었지만 자기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 유럽의 중세기 때 처럼 신학적 도그마가 자연과학을 규정해버리는 행위를 종교적 독단이라고 한다면, 역으로 오늘의 과학이 신학적 진리를 자신들의 틀 안에 가두려는 태도도 역시 자연과학적 교만이다.

위의 신학적 대답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이들은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묻고 싶을 것이다. 예수 믿으면 구원받고 영생을 받는 것 아니냐, 부활해서 예수님과 더불어 천국에서 잘먹고 잘살고 멋지게 지내는 것 아니냐? 이들에게 줄수 있는 대답은 이와 같다. 아무리 부활의 세계에 대한 희망이 강렬하다고 하더라도 부활한 다음에 우리가 어떻게 살게될 것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라는 요구는 신앙적인 게 못된다. 하나님이 종말에 이루게 될 그 생명의 세계를 우리가 어떤 그림으로 구체화 시킬 수는 없다. 생각해보라. 지금 우리가 최상으로 상상할 수 있는 세계라고 해봐야 이 지상적 삶의 확대이며 그것의 연속에 불과한 것인데, 그것이 곧 하나님 나라가 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런 삶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이 하나님이 온전하게 통치하게될 세계를 우리 인간의 상상력 안에 끌어당겨 고정시키기 보다는 하나님의 자유에 맡기는 것이 훨씬 신앙적인 태도다. 초대교회는 이렇게 열려져 있는 미래와 종말에 대한 희망에 터해서 저주스러운 십자가에 달린 자를 하나님으로 믿었고, 결국 그런 믿음으로 유대종교와 로마정치와 헬라문화의 틈바구니에서 독자적인 정신세계를 완성시켜 나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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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사도신경해설 20강 녹취록 - 4장 예수 그리스도를(2) file 2009-04-05 2977
124 사도신경해설 19강 녹취록 - 4장 예수 그리스도를(1) file 2009-04-05 2946
123 사도신경해설 18강 녹취록 - 3장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5) file 2009-04-05 2908
122 사도신경해설 17강 녹취록 - 3장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4) file 2009-04-05 30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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