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초기 관념론과 신학

신학과 철학 조회 수 4187 추천 수 0 2009.04.25 17:35:59
 

(강의 9장은 따로 요약한 강의안이 없습니다. 대신 졸역 <신학과 철학>의 9장을 여기 올리니

책이 없는 학생은 이 문건을 출력해서 읽어 오세요. 4월28일 강의예정)

 

9장

초기 관념론


19세기의 전반 반세기는 철학적으로 독일 관념론이라는 특색을 보였다. 관념론의 시작은 19세기가 시작되기 이전의 10년과 세기 전환 이후의 몇 년간까지로 보아야 한다. 이 시기가 바로 초기 관념론이 태동하는 국면이었다. 이런 국면을 결정적으로 이끌어낸 것은 피히테 철학의 발전이었다. 그 외에도 쉘링과 헤겔도 역시 이에 가세했다. 또한 쉴라이에르마허의 종교 강의, 그리고 그가 자신의 철학적 윤리와 변증법에 걸맞은 입장으로 전환한 것 등이 이런 흐름에 합세했다. 중기 관념론에 연결된 국면은 정신 현상학(1807) 이래로 이루어진 헤겔 사상의 체계적 발전을 통해서, 그리고 쉘링의 후기 철학을 통해서 그 특징을 보여주었다. 후자는 젊은 피히테와 크리스챤 헤어만 바이스의 사변적 이신론과 더불어 후기 관념론의 국면에 속한다. 초기 관념론은 이런 틀 속에서 단지 불완전하게만 다루어질 수도 있다. 피히테의 학문론에 대한 자리 매김의 문제와 그것으로 인해 유발된 무신론 논쟁과 연관에 대해서 집중하는 경우에 그렇다. 쉴라이에르마허 사상의 전개는 각각의 부각된 지점들에 이르기까지 설명될 것이다. 이 지점들은 그의 후기 철학에서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사변적 이신론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사상들은 다음 장에서 부수적으로 언급되긴 하겠지만, 그렇게 충분할 정도로 중요하게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1. 피히테와 무신론 논쟁


1762년에 태어난 피히테는 1780-84년 사이에 예나와 라이프니쯔에서 신학을 전공했지만 더 이상 계속하지 않고 중단한 다음에 가정교사가 되었다. 그는 칸트 사상과의 조우를 결정론적 세게관으로부터의 해방으로 경험했다. 그는 1791년 7월 직접 칸트를 방문했다. 그의 “모든 계시에 대한 비판 시도”(Versuch einer Kritik aller Offenbarung)는 1792년 칸트의 권고로 출판되었는데, 익명이었다. 그 책은 칸트의 작품에 포함되었다. 피히테는 1794년 바이마르의 장관이었던 괴테로부터 예나 대학교의 철학 교수 자리를 초빙받았다. 같은 해에 칸트의 초월철학을 체계적으로 재구성한 첫판이 “全지식학의 기초”(Grundlage der gesamten Wissenschaftslehre)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이 작품은 경험을 일치시키는 토대인 자의식에 기초를 두고 있다. 피히테는 이 작품에 대해서 뒤이은 해에 해명하는 머리말을 붙였으며, 1814년에 죽을 때까지 여러 번에 걸쳐서 새로운 판을 냈고, 특정 청중을 대상으로 강의하기도 했다. 그가 여러 번에 걸쳐서 증보된 지식학은 거의 대부분 출판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의 수많은 공적 생활 중에서 1794년 판이 그의 사상을 가장 잘 나타내주고 있다. 피히테는 예나에서 또 한권의 책 “지식학의 원리에 따른 자연법의 기초”(Grundlage des Naturrechts nach Prinzipien der Wissenschaftslehre, 1796)를, 그리고 1798년에는 “도덕론의 체계”(System der Sittenlehre)를 출판했다. 같은 해에 그는 무신론의 공격을 방어해야만 했는데, 이로 인해서 그는 1799년 예나 대학교에서 퇴직당했다. 뒤 이어 나온 중요한 책으로는 “인간의 운명”(Die Bestimmeng des Menschen, 1800)과 “행복한 삶을 위한 지침”(Die Anweisung zum seligen Leben, 1806)이 있다. 피히테는 베를린 대학을 창설한 사람들 중의 하나였으며, 1810년에 이 대학교의 초대 학장이 되었다.


a) 피히테의 학문론에 드러난 자아(Ich)의 철학


피히테는 예나 시절에 오랫동안 칸트에게 동의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학문론에서 우리 경험 의식의 구조에 대한 칸트의 분석을 자아 의식의 토대로부터 빈틈 없이 체계적인 서술 형식 안에서 새롭게 기초를 놓아보려고 했다. 여기서 핵심적인 문제는 소위 칸트 방식으로부터의 전환이었다. 이 방식은 판단하는 오성의 행위를 그 마지막 전제(초월적 조건들)에 대한 방향성에 입각해서 분석한 것이었으며, 결국은 자아 의식(“초월적 통각”)을 경험 의식의 기반으로 간주한 것이기도 했다. 이런 방식으로부터의 전환은 이미 예나 대학교의 피히테 선임자인 칼 레오나르트 라인홀트(Karl Leonhard Reinhold)에 의해서 개척되었다.1) 그리고 물자체(物自體)에 대한 칸트의 전제를 비판함으로써 알려지게 되었다. 이 물자체는 우리의 감각에 “작용하며”, 따라서 그 무엇을 경험한 사람의 그 경험을 그 대상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이러한 전제를 우리 경험 의식의 모든 내용이 우리 자라의 인식 형태를 통해서 규정된다는 칸트의 증명과 일치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비판가들 중에서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야코비를 대표적으로 손에 꼽을 수 있다. 피히테는 야코비가 1787년에 집필한 관념론과 현실주의에 대한 논문을 자기가 칸트를 이해하는 증거로, 특별히 물자체에 대한 전제를 포기하는 증거로 삼았다.2) 이런 전제가 사라지게 됨으로써 자기의식을 통해서 “조건부로”만이 아니라 “확고하게” 경험 의식을 서술해야 할 과업이 제기되었다.3) 또한 피히테는 이러한 서술을 시도함으로써 칸트의 이성 비판에 포함된 경험 의식의 체계를 제거할 수 있다고 믿었다.

피히테에 따르면 판단하는 인간 정신의 모든 사안에는 자아의 “행위”가 기초하고 있다. 인간은 이런 행위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확인한다.4) 이 경우에 자아는 “행위하는 자이며, 도한 이 행위의 산물이기도” 하다(16§6). 이것은 자아가 자기로 알고 있는 자기 자신은 주관인 자기 자신의 산물일지 모른다고 보면 안 된다. 왜냐하면 “자아는 자기를 인식하는 한도 안에서 그 정도로 존재하기 때문이다.”(17§7). 자아가 자기 자신 안으로 “물러서는 것”인 자의식은, 이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대상에서 찾게 되는데,5) 그 자의식은 사행(事行, Tathandlung) 자체이며, 자아로서의 활동 자체이다.

자아를 사행으로 해석함으로써 자아가 구별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비자아(Nichtich)가 자아의 산물로 이해될 수 있다. 자의식과 외부의 존재 의식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 전자는 후자의 토대임에 틀림 없다.6) 1794년의 학문론에서 추가적으로 이렇게 언급되었다. “대립적인 조정(措定)의 가능성”은 “의식의 일치성”을 전제한다(23§2 n.4). 즉 자아를 전제한다. 역으로 자아의 자기 조정이라는 일은 “자아 외부의 존재가 자아에게 연유하게 만드는 그 어떤 다른 것이 없는 한 ... 불가능하다.”7)

이렇게 조정된 비자아는 우선 철저하게 비어있다. 그 무엇(etwas)이 아니라 아무 것도(nichts) 아니다.8) 비자아로서의 자아가 스스로 반대하고 있다는 점을 알기 때문에 스스로를 통해서 한정되어 있다는 점을 알고 있다. 즉 유한하다고 말이다.9) 그리고 우선 “이제는 ... 이 양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것들은 그 무엇이다.”10) 피히테는 이런 세 번째 명제를 통해서 순수 자아의식을 반영하는 과정에서 주관과 객관으로 분리된 의식의 차원에 도달했다. 이 의식은 칸트의 이성 비판에서 묘사된 것처럼 지각의식의 기반을 조성한다. 유한한 자아가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은 감정의 방식에서만 우선적이고 직접적으로 지각된다. 그리고 “일종의 무엇의 활동으로부터 나오는 근원적인 감정을 더 설명한다는 것은 칸트주의자의 독단론인데”, 그것은 물자체에 대한 신앙 안에서 전개되는 독단론이다.실제로는 반대의 상태이다. 감정은 “직관을 통해서 연장(延長)된 질료를 얻어내는데, 감정의 단순 주관성은 사유를 통해서 자신의 근본이 아니라 이 질료에게 이관되며, 또한 단지 이런 종합을 통해서 객관이 출현한다.”11)

의식의 대상으로부터 구별된, 그리고 그 대상에 연관된 유한한 자아는 근원적인 자아 직관의 절대 자아를 통해서 구별되며 그 절대 자아와 대립한다. 그러나 유한 자아와 대상에 대한 전체 대상 관계는 절대 자아로부터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2) 자의 조정과 비자아의 첫 조정은 피히테가 여러번에 걸쳐서 강조했던 것처럼 이론적으로는 이끌어낼 수 없다. 이것들의 토대는 우리가 도덕률을 요청함으로써 경험하게 되는 “자기 활동과 자유”이다. 즉 “나는 순수 자아에 대한 나의 사유에서 분배되어야만 한다. 바로 그것을 절대적인 자기 활동으로 생각한다. 사물을 통해서 규정된 것이 아니라 사물을 규정하는 것으로 생각한다.”13)

피히테는 칸트와는 달리 경험 의식을 자기 안에 근거한 것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자아로 시작하기 때문에 자기 의식의 일치에 대한 질문을 매우 중요한 관심의 대상으로 삼았다.14) 칸트가 자아 의식을 경험 의식과의 관련 가운데서 자기에 대한 반영으로, 또한 모든 경험을 동반하는 것으로 묘사했다고 해서 자기 의식의 구성에 대한 질문이 자아와 자기 자신이라는 이중성에서 답변된 것은 아니었다. 앎의 주체인 자아와 객체인 자아 사이의 차이가 여기서 늘 전제되었다. 자아가 모든 경험의 단일한 토대이어야만 한다면 그것은 당연히 자기 자신의 단일한 토대임이 틀림 없다. 그래서 이 기능은 피히테가 말하는 사행(事行)으로서의 자아 개념을 성취시켰다. “즉 나는 한 행위를 통해서만 나 자신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나는 자유롭기 때문이다. 각기의 행위는 바로 자아개념이다.”15) 물론 사행 사상을 통해서 자신의 반영하는 자아의 지식이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이 지식에 대해서는 피히테가 자아와 나누일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앞 참조). 자아를 사행으로 해석하는 것은 “자아의 앎 뒤에 속한 문제이다. 그런 앎으로 돌아가지 않은 채 말이다.”16) 이로써 피히테는 1797/98년에 자신의 첫 기본명제를 확장시켰다. 즉 자아의 자기 직관은 “자신을 정립하는 자로 정립하는 것”(ein sich Setzen als setzend)이라는 특징화 되었다.17) 이런 명제 양식을 천명했다고 해서 피히테가 정립하는 자와 정립된 자아의 일치를 확인해 준 것은 아니다. 이것은 왜 자아가 자기 자신을 소유하고 있는 자로, 자신을 알고 있는 주체로 부각될 있는가에 대한 증거가 될 수는 없다. 따라서 피히테는 뒷날 자아의식의 토대라고 생각한 자기 조정(措定) 사상을 포기했다. 자아는 자기 자신을 야기시킬 수 없다. 오히려 자기에게로 다가오는, 행위한 토대로부터, 그것은 자기 자신의 토대인데, 이 토대로부터 자신을 이해해야만 한다. 이 토대는 다시금 “자아”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18) 피히테는 1801/2년에 쓴 지식학에서 자아의 자기 직관을 가리켜 “자유로운 빛을 포착하는” 눈이라고 표현했다.19) 피히테는 이미 이러한 새로운 사상적 기획을 끝내면서 이성 안에 있는 하나님의 보다 숭고한 능력을 고양시키는 것에 대해 언급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 능력은 곧 “감각 세계의 영원한 창조력”인데, 하나님의 능력을 고양시키는 자는 이 능력 안에서 “하나님 안에 있는 자기와 세계를 직관한다.”20) 그래서 피히테는 그 뒤로 자기의식을 마로 하나님의 자기 선언이라고 해석했다.21) 1804년에 쓴 지식학에 따르면 자아의 “절대적인, 내적인, 생동적인 발생사”는 “한 원리를 전제하고 있다.” 이는 곧 하나님의 빛을 가리키는데,22) 이 빛으로부터 자아는 빛이 된다. 또한 이 빛으로부터 이제 “하나님의 계시와 언설”23)인 “빛이 현상적으로 견인된다.”(200, 12f.). 피히테는 1806년 작품인 “행복한 삶을 위한 지침”에서 “존재의 언설과 계시”라는 의미에서 의식을 “존재의 현존”이라고 언급했다.24) 이 경우에 핵심 문제는 인간 의식이었다. 즉 “의식은, 혹은 우리 자신은 하나님의 현존 자체이다. 그리고 그 현존과 온전히 하나를 이룬다. 바로 이런 의미였다. 또한 이를 통해서 의식이 된다. 외냐하면 그의 고유한, 혹은 신적인 참된 존재는 그에게는 세계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의식으로 하나님의 생명이 세계로 변형되었는데, 그 변형은 “무한한 형태”를 반영함으로써 갈라지고 말았다.25) 그러나 “바로 그 하나님의 빛은 자기 자신을 통해서 이러한 파괴로부터 다시금 종합하고, 자신과 일치시킬 수 있다. 또한 즉자적인 것, 하나님의 현존과 계시로 나타날 수 있다.”26)


b) 피히테 철학의 실천적 특색과 무신론 논쟁


피히테의 경우에는 이론적 철학과 실천적 철학이 칸트와는 달리 분리되지 않았다. 더욱이 피히테는 법철학(1796년)과 윤리(1798년), 그리고 종교철학에 대한 특별한 서술을 집필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그에게 실천 철학과 이론 철학은 하나다. 왜냐하면 이 양자는 이성의 “자기입법”이나 이성의 자유에 걸려있으며, 또한 사행(事行, Tathandlung)인 자기완성에서 이루어지는 자아의 자기조정(調定)과 관계되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자아의식의 근원은 궁극적으로 도덕적인 근원이다. 이 근원은 도덕법에서 나타나는데, 이를 통해서 “절대적인, 단지 그 근원에만 토대하고 있는 행위가” 자아를 요구하게 된다. 여기에 “자기활동과 자유에 대한 직관이 근거하고 있다.”27) 이 직관은 1794년에 집필한 지식학의 양 첫 기본명제에 등장하는 개념인데, 끌어낼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는 1796년에 자연법의 기초에 대한 논문에서 이렇게 언급했다. “실천적인 자아는 근원적인 자기의식의 자아다.” 의욕은 “이성의 고유하고 본진적인 성격”을 말한다.28) 피히테는 바로 이런 생각을 인간의 운명(1800년)에서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의지는 활동하는 자이며, 또한 이성세계의 살아있는 자다. 이는 흡사 운동이 활동하는 자이며 감각세계의 살아있는 자인 것과 같다.”29)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렇다. 하나님은 영원한 대하(大河)의 원천이다. “생명과 능력과 행위, 즉 근원적인 생명에서 흘러나오는 원천이다. 그분의 생명으로부터, 무한한 자로부터 흘러나온다. 왜냐하면 모든 생명은 그분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눈만이 참된 아름다움의 나라로 돌입한다.”30)

피히테의 경우에 이런 생각의 단초는 이미 1792년 “모든 계시에 대한 비판 시도”에 내포되어 있었다. 그 책에서 이렇게 주장되었다. 하나님의 의지는 도덕법칙의 내용에 대한 근원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생각하면 타율이 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의지가 “우리 안에 있는 도덕법칙의 실존을” 야기하는 원인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31) 도덕법칙은 하나님의 본질에서 최고 형태를 갖춘다. 따라서 그 도덕법칙의 내용은 하나님의 의지에 의존적이지 않고, 오히려 우리 안에 있는 그의 실존에 해당되는 경우일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연세계의 원인이며, 또한 우리에게 속한 고유한 현존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피히테는 칸트처럼 하나님의 현존을 지선 개념에 토대를 두고 설명했다. 뒷날 칸트의 공준론(公準論)에 가한 일반적 비판의 결과로 이런 자리매김이 떨어져 나왔을 때 하나님이 우리 안에 있는 도덕법칙의 토대라는 사상도 역시 퇴각했다. 1796년에 쓴 “자연법의 기초”라는 논문에는 여전히 인간이 자유로운 자기활동을 위해서는 다른 이를 통한 “권유”가 필요하다는 사상이 남아 있다. 도한 이러한 권유는 교육에서 발생하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에게로 돌아간다.32) 그런데 1798년에 쓴 “도덕론 체계”에서는 이와 달리 우리 안에 있는 도덕법칙의 효율성이라는 점에서 하나님이 그것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는 요구가 없다.33)

1798년 무신론 논쟁을 촉발시킨 피히테의 작품 “우리가 하나님의 세계 통치를 믿는 근거에 대해서”에는34) “우리의 도덕적 운명에 대한 증명”이 곧 “신앙”으로 묘사되었다. 나는 “나의 고유한 본질을 통해서 내게 정립된 모든 목표를 포착함으로써, 그리고 그 목표를 나의 실제적인 행위에 적용시킴으로써 나는 동시에 실제적인 행위를 통해서 바로 그 목표를 설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35) 이로써 우리 생명에 “새로운 질서”가 등장했다. 세계는 우리에게 이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의무의 의심 심장한 질료”가 된 것이다. 말하자면 리얼리티에 대한 신앙이 이런 질서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요구되는” 그 강요는 “계시라고 불릴 수 있다.” 이를테면 “이것이 바로 참된 신앙이다. 왜냐하면 이런 도덕적 질서가 우리가 받아들여야할 신성이기 때문이다.”36) 결국 피히테의 계시 비판과 달리 신관이 축소되고 말았다. “모든 생동적이고 작용하는 도덕 질서가 하나님인 셈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어떤 다른 하나님이 필요하지도 않고 그 어떤 다른 하나님을 생각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제 도덕적인 질서와 자연 질서의 근원인 하나님에 대해서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성 안에는 모든 도덕적인 세계 질서로부터 파생되는 그 어떤 토대도 없으며, 또한 토대에 근거했다는 추론 덕분으로 어떤 특별한 본질을 그 원인으로 받아들여야 할 토대도 없다.”37) 그렇다기보다는 오히려 이것과 연결된 “하나님 개념이 특별한 실체로서 불가능하며, 모순되다”는 것이다.38) 이것은 뒷날 피히테가 해명했던 것처럼 칸트의 기본명제에 따라서 변형을 고집하는 실체 개념이 공간적이며 물질적인 사물에 적용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39) 이와 마찬가지로 피히테에 따르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표상한다는 것은 자가당착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이 표상이 하나님의 무한성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인격성과 의식이라는 것은 “제한과 유한성을 전제하지 않고는 절대로 생각할 수 없다”는40) 점에서 모순된다는 말이다. “따라서(17) 이런 본질은 이런 술어가 첨부됨으로써 너희들에게 유한자가 되며, 너희 같은 이들에게 본질이 된다. 그리고 너희들은 너희들이 원했듯이 아무도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사유가 여러 번 반복되었을 뿐이다.” 이런 언급이 말하고자 비난은 기독교의 하나님 이해가 인간의 투사라는 것인데, 이런 비판은 사실상 스피노자가 객관적인 지식을 갖고 의도하는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 중세기의 표상을 비판한 것에 소급된다.41) 왜냐하면 이 비판이 지식학이라는 피히테의 첫 기본명제를 둘러싼 주변 요소들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자아의 자기조정(Selbstsetzung) 명제가 파산된 것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자아의 토대가 다시 다른 자아가, 즉 절대 자아가 될 수 있는 게 아니라 전혀 다른 종류가 되어야 한다는 통찰과 묶여있다. 무신론 논쟁 논문에서는, “인간의 운명”에서 직접 다루어진 것처럼(각주 29를 참조할 것), 피히테는 우리 안에 있는 실천 이성의 도덕적 의욕을 생각했다. 반면에 뒷날 기획한 지식학에서는 우리에게 작용하는 빛에 대해서 언급했다. 1806년 이래로 여전히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스피노자의 생각에 훨씬 근접해 있었는데, 이 존재의 계시는 우리의 의식을 말한다.42)

피히테는 1798년 전통적 하나님 표상을 비판함으로써 “종파적 수다를 잠재워보려고 했다. 이로써 참된 종교가 즐거운 법 행위를 고양시킬 것이다.”43) 이렇게 입장을 명확히 함으로써 도덕성을 위해서 특수하게 종교적인 것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그의 주장이 극단적으로 배척받았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드레스덴의 고위 종교국은 작센의 영주에게 피히테와 그 제자인 포베르크의 학설에 대해서 불만을 제기했다. 1798년 11월19일자로 선포된 영주의 훈령으로 철학 저널은 압수되었으며, 라이프찌히 대학교와 비텐베르크 대학교 교수들은 다음과 같은 명령을 하달 받았다. “억압과 질투와 품위로 피곤해진 종교를 보호할 것이며, 하나님에 대한 이성적인 신앙과 기독교의 진리에 대한 생생한 증명이 어느 곳에서나 건설되고, 확대되고 견고해질 수 있도록 신경을 쓰라.” 피히테는 즉시 “대중에게 항소함”(1799년)이라는 글로 반박했는데, 이 글은 다음과 같은 비꼬는 투의 부제를 달고 있다. “압류당하기 전에 일독해볼 만한 논문”. 피히테의 도움으로, 또한 그가 쓴  “무신론이라는 고발에 대해서 사법적으로 책임을 지는 글”(1799년) 의 도움으로 대학생들의 시위가 뒤따랐다. 개인적인 견책을 받을 경우에 물러날 각오를 하고 종교국을 향한 피히테의 위협은 1799년4월3일자로 선포된 훈령으로 말미암아 결국 공직에서 쫓겨나는 계기가 되었다. 괴테 장관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 대해서 유감이라고 (J.G. 쉴로써에게 보낸) 편지에 썼다. “우리는 그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어리석은 자만심이 그로하여금 이 지구에서는 ... 그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그 좋은 자리에서 쫓겨나게 했습니다.” 그러나 피히테는 베를린으로 갔다. 그곳에서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뒷날 베를린 대학교의 학장이 될 이 사람에게 다음과 같은 단서를 달고 체류허가를 내주었다. “그가 사랑하는 하나님에게 적대적이라는 게 사실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이 이 체류허가를 제거할 것이다. 이것이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다.”

피히테는 무신론을 주장한다는 고발로 인해서 심리적으로 지친 것처럼 느꼈다. 그가 1798년에 이에 대해서 철저하게 해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고발은 좀더 심원한 의미에서 볼 때 피히테에게 사실상 정당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의 사상적 발전이 그 뒤로도 계속 이어진다는 사실에서 분명하다. 이 사상적 발전은 모든 비난에 대한 반동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아의 자기 확실성이라는 구조를 얻기 위한 피히테의 싸움이 이 사상적 발전 안에서 이어졌다. 여기서 피히테는 자아의 주관성을 위한 신적인 토대에 대해서 이렇게 언급해야만 했다. 즉 하나님은 또 다시 주관이나 자아로 생각될 수 없다고 말이다. 이로써 그는 자아의 자리매김을 순환적으로 제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무신론 논쟁에서 피히테 자신에 의해서 단순히 제기된 전통적 이신론의 하나님 표상인 신앙동형동성론을 피할 수도 있었다. 여기서 순환적이라는 말은 다른 자아와 절대 자아의 반대가 순환한다는 것인데, 이 절대 자아는 절대와 구별된 구성적 토대를 필요로 한다. 뒷날 피히테에게 중요했던 문제가 바로 이것에 기인하고 있다. 비록 1810년까지 새로운 형태로 진행된 지식학의 기획들이 인쇄되어 나오지 않아서 주관성의 이론적 동기가 세상에 공식적으로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말이다. 피히테는 헤겔의 명제에 대해서 질문함으로써, 명제는 주관으로서의 절대에 대한 것인데, 또한 사변적인 이신론과 포이에르바흐의 종교지판에 대해서 질문함으로써 하나님의 초월에 훨씬 합당한 미래의 철학적 신학으로 방향을 잡은 것이다. 물론 그런 철학적 신학에 대한 서술이 그에게는 아직 이루어지지 못했다.


2. 쉘링과 헤겔의 출발


중기 관념론의 가장 중요한 두 사상가는 쉘링(Schelling)과 헤겔(Hegel)이다. 이들은 프리드리히 휄더린(Hölderlin)과 함께 튀빙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튀빙겐 수도원에서 생활했다. 그들은 프랑스 혁명과 새로운 비판철학에 매료되었다. 그들은 이것이야말로 자유를 위한 신기원의 동시적인 징표로 생각하고 환영해 마지않았다. 이것에 매료된 이들은 튀빙겐의 교의학자인 슈토르(Storr)가 칸트의 초자연주의 신학을 철학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서 구사했던 방식으로부터 떨어져 나온다는 느낌을 받았다.44) 이들은 슈토르와는 반대로 이성의 자율이라는 칸트의 사상을 확고하게 견지해 나갔으며, 따라서 슈토르의 논증에 놓인 바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칸트의 공준론(公準論)에 숨어있는 행복주의를 포기해버릴 준비가 되었다.

젊은 시절의 쉘링은 튀빙겐의 친구들 사이에서 정신적인 지도자였다. 출판되지는 않았지만 바울의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대한 논평에서 겨우 17세에(1792/93년) 불과한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밝혀보려고 했다. 예수가 본래 가르친 내용은 칸트의 실천 이성 윤리와 일치하며,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이성의 법칙을 보편적으로 정당하게 하려는 목표로 지상에 발생한 정치적 혁명을 포함한다. 1793년 칸트의 철학적 종교론에 대한 슈토르의 연구가 출판되자 쉘링은 신학으로부터 발길을 돌려서 완전히 철학에 헌신하게 되었다. 특히 칸트의 철학적 착상을 계승한다고 본 피히테의 철학에 빠져들었다. 1795년 쉘링의 저서 “철학의 원리인 자아에 대해서”가 출판되었다. 이 작품은 피히테의 정신에 입각해서 집필된 것으로서, 모든 것에 배타적으로 작용하는 절대적 자아의 대립성을 대상과의 관계를 통해서 규정된 경험적 자아의 자유와 자발성의 토대라고 주장했다.45) 이것은 이미 피히테가 주장했던 바와 같이 “지적인 직관”에서 이루어진 쉘링의 자아성(Ichheit)이다.46) 그리고 이것은 모든 다양성을 극복함으로써 절대자아와 동일해져야 한다는 요청을 받고 있다. 이런 법칙은 도덕률의 유한한 자아에 대한 것이지만, 반면에 자연법은 모든 리얼리티를 포함하고 있는 절대적 자아에 대한 것이라고 한다.47) 피히테의 자아철학에 대한 스피노자의 해석은 도덕적 의욕에 상관받지 않는 원리를 지향하고 있는데, 이것은 앞서 살펴본 그런 고찰에서 드러나 있다. 그런데 이 원리라는 것은 유한한 자아에서 알려지지만 자연철학의 단초가 될 수도 있다.

무신론 논쟁이 발발했던 1798년에 쉘링은 23세의 젊은 나이에 예나 대학교의 철학과 조교수가 되었다. 그에 앞서 “자연 철학에 대한 관념”이 출판되었다. 이 책에서 쉘링이 말하고자 한 요점은 자아가 아니라 절대 관점, 혹은 절대 지식의 관념이었는데, 이것은 절대 이상과 절대 실재의 일치(무차별)를 뜻한다.48) 이러한 “절대는 일종의 영원한 인식 행위이다. 이 인식은 질료와 형상이며, 즉 생산이다. 이 안에서 영원한 방식으로 스스로 ... 실재가 되며 형상이 된다. 그리고 다시 한번 같은 영원한 방식으로 자기 자신이 대상인 한에서 형상으로서 본질 내부로, 혹은 주관 내부로 용해된다.”49) 따라서 이것은 이중 운동이다. 즉 “절대는 영원한 인식 행위를 통해서 특별한 것으로 확대되는데, 이것은 자신의 무한성을 완전하게 무한자 안에서 공상함으로써 이 특별한 것을 자기 내부로 받아들이기 위한 일이다.”50) 철학의 체계 안에 있는 초월철학과 자연철학의 이중성은 이런 두 운동의 두 견해에 상응한다. 쉘링은 두 철학적 입장의 일치를 가리켜 “절대 관념론”이라고 불렀다.51) 그래서 그는 피히테 철학을 이렇게 비판했다. 그는 이상(Ideal)과 실재(Real)의 모든 일치를 “일종의 특별한 것으로서 주관 의식에 한정한다.”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 일치의 절대성을 이미 절대 안에 현실화되었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무한한 과업의 대상으로, 즉 절대적인 요청이 되게한다.”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52)

쉘링이 절대(das Absolute)를 2년 앞서 피히테와 관련해서 구성의 토대인 경험적 자아 안에서 직관적으로 파악되는, 무한하거나 절대적인 자아로 (의식과 인격성이 없는 자유로) 생각했다면, 이 자아는 모든 리얼리티를 자기 자신에게 정립하는 것인데, 그는 1797년에 자아가 단지 한 측면이라는 점을 인식했다는 말이다. 그에게 자연은 독립적으로 대립해 있다. 그러나 양자는 절대지(知) 안에서 일치되었다. 쉘링은 자연 안에 정신이 본연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함으로써 자연과의 연관에서 발생하는 유한한 자아의 기원과 자연만을 근원적으로 피히테의 지식학이라는 틀안에 정위시키려고 했다. “바로 이러한 착상을 통해서 자연을 독립적으로 간주할 준비가 갖추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무의식으로부터 의식에 이르는 객관적 과정을 제시한다.”53)

1801년도에는 쉘링이 스피노자의 사상에 훨씬 분명하게 가까이 갔는데, 그 때의 사상적 발전이 이루어진 것을 보면 자연과 의식의 토대인 절대가 이제는 더 이상 자아가 아니라 “이성”으로 그 특색을 나타냈다. 이 이성은 “주관과 객관의 철저한 무차별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54) 절대 이성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려면 “생각하는 자가 도외시되어야만 한다.” 이는 흡사 피히테에게 필요했던 것처럼 경험적 자아로부터 절대 자아라는 사상으로 전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이성 밖에서 아무 것도 없으며, 그 안에는 모든 것이 있다.”55) 이것이 바로 쉘링의 스피노자주의이며, 본질적으로 절대적인 동일성 인식인 이성의 스피노자주의이다(§18). 이를 통해서 형상은 “주관으로서, 그리고 객관으로서 정립”된다(§22). 전체성이라 할 절대 동일성은 우주다(§26과 33). 바로 이 우주에서 절대 이성은 독자적으로 자기에게 집중하고 지양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인식하게 된다.56) 이런 과정에서 절대적 토대는 우선 신성이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쉘링에게는 이제 “전체로서의 역사는 계속되는, 점차적으로 스스로 노출되는 계시다.” 그리고 그 계시의 마지막에 “하나님도 역시 존재하게 될 것이다.”(초월적 관념론의 체계 a.a.O. 273과 275).

쉘링은 아카데미 연구 방법에 대한 강의를 통해서 1802년 자신의 새로운 사상적 체계의 개요를 이해하기 쉬운 형식으로 보여주었는데, 이것은 1803년에 인쇄물로 나왔다. (학문의 절대 개념에 대한) 열 네 편의 강의 중에서 첫 강의는 체계의 원칙을 다루고 있다. 이것은 “자기 자신에게 무조건적인 지식 관념”에 기인한다. 이런 관념은 곧 “대상과의 완전한 일치”를 말한다. 따라서 “참된 이상은 홀로, 그리고 그 어떤 중재 없이 참된 실재다. 그리고 각각의 외부에는 그 어떤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다.”57) 이러한 “원지식”(Urwissen)은 근원적으로 절대 안에 거주한다. 그러나 우리의 지식은 “각기의 영원한 지식의 모사(模寫)”이어야만 하며, 또한 모사가 되어야만 한다.58) 그에게는 자연이 그 우주의 “다른” 현상과 진배가 없다.59) 이 경우에 실재의 영역에서는 유한이 통치하며, 이상의 영역에서는 무한이 통채한다. 소위 이상이 “자신이 본질성은 실재로서의 형상 안에서 형성하고”, 그리고 이로써 유한하게 되는 동안에, 우리의 지식에서 모사를 발견해야만 할 원지식은 형상들의 유한을 “다시 본질로 용해시킨다.”60) 이를 통해서 이 형상들은 서로 묶인 채 절대의 무한 안에 놓이게 된다.

쉘링의 이러한 구상은 1801-1803년 사이에 예나에서 쉘링과 매우 긴민한 관계를 가졌던 헤겔에게 기본적인 토대를 제공했으며, 다른 방식이지만 쉴라이에르마허의 철학적 변증법에도 그런 토대를 제공했다. 쉘링은 1803년 카롤리네 쉴레겔과의 관계로 인해서 뷔르쯔부르크로 갔을 때 외면상으로나마 헤겔과 헤어졌다. 그곳에서 쉘링은 이혼녀인 카롤리네와 결혼했다. 뷔르쯔부르크와 뮌헨에서(1806년 이래로) 쉘링은 자신의 사상적 체계의 기본구상을 심화시켰다. 그것이 “인간 자유의 본질에 대해서”(1809년)라는 책으로 출판되었는데, 그의 사상을 드러내주고 있는 첫 작품이다. 실재는 이중적인 어두운 힘으로 나타난다. 그 힘은 정신을 통해서 억제될 필요가 있다. 이 두 측면은 하나님에게서 발생한다. 그러나 실재는 “하나님 안에 있는 자연”으로부터 발생한다. 즉 “하나님 안에 있을 뿐이지 하나님 자체는 아닌” 그것에서 발생한다.61)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이상적 원리”가 있으며, “사랑의 의지도 있다. 이를 통해서 낱말이 자연적 세계로 발음된다.” 그리고 여기서 따라오는 계시는 “행위와 실행”이다.62) “기초의 의지”와 정신이 하나님 안에서 불가분리인 반면에 피조물 안에서는 나누일 수 있다. 그리고 이 책의 주장에 따르면 악의 가능성도 이 안에 토대하고 있다. 이 문제가 이 책의 핵심 테마이기도 하다.

쉘링은 인간 자유의 본질을 다루고 있는 이 저작에서 (프란쯔 바아더에게 자극을 받아)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정립했다. 자유를 통한 세계의 창조적 근원이라는 그의 사상이 여기서 최고조에 달했다. 그가 이 저작을 여전히 확실하게 끝내지 않은 것은 “하나님 안에 있는 자연”을 더불어서 창조하는 근원이라고 생각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쉘링이 모든 것을 절대 개념에 (이것은 자아나 이성을 가리키는데) 연관시킨 것을 두고 스피노자가 쉘링 사상의 발전에 대해서 논했는데, 이런 변화되는 국면에서 왜 일종의 다른 유한한 것이 절대로부터 발생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답변될 수 있었다.63) 쉘링은 1809년에 하나님의 자유를 이런 전이의 토대라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이런 사상의 발전이 뒤이어 나오는 짧은 글 “시대”(1813년)에서 결정적으로 완성되었 다. 여기서 이르기를, 모든 이들은 “하나님이 사람들의 외부에 있는 본질을 자연의 맹목적인 필연성으로 적용시킬 수는 없고, 오히려 최고 자발성으로 창조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자연이 이렇게 단순히 필연적이라는 사실로부터는 “그 어떤 피조물도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는 것이다.64) 쉘링의 후기 철학에서 기초를 이루고 있는 이러한 명제를 통해서 그는 초기에 따르던 스피노자주의에서 확실하게 갈라섰다. 그는 다른 길을 찾았는데, 이것은 그가 젊은 시절의 친구인 헤겔과 1801-1803년 사이에 예나에서 함께 지낼 때 발견했던 그 길이었다.

헤겔은 자기보다 다섯 살이나 더 어린 쉘링과 함께 그가 철학으로 방향을 빠꾸기 전까지 신학적 주제로 씨름했다.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출판되지 않은 소위 (1800년까지) 젊은 시절의 저작들은 전반적으로 신학적인 주제였다. 그러나 정치적 관점과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그를 쉘링과 묶어주는 질문에서 출발하는 주제들이었는데, 이런 질문은 칸트와 피히테에 의해서 토대가 잡힌 관념론이 자유를 어떻게 현실화 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여기서 이제 그에게는 신학적 관심과 정치적 관심의 관계에 대한 질문이 파생되었다. 이 질문은 1800년에 무르익은 헤겔의 사상 체계를 이해하는 데 기본적으로 중요하다. 이러한 근본 사상은 이미 초기 저작을 통해서 준비되었기 때문에 그의 초기 사상에서 의미가 있을 뿐이라는 것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65)

종교와 정치 주제는 젊은 시절의 작품에서 서로간에 밀접하게 연관되었다. 따라서 사회 문제도 역시 궁극적으로 종교 문제로 나타났다. 이러한 조짐은 이미 “시민종교와 기독교”(1793년)의 관계를 다룬 첫 초기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대단한 신념으로 나타나고 발산되는 시민종교는 자유에 밀착해 있는 것이다.”(N27). 시민종교의 과업은 도덕적인 효과를 진작시키는 데 있으며(N48), 그래서 국가는 종교에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 왜냐하면 “객관적 종교를 주관화 하는 것이” 곧 “국가가 감당해야할 큰 업무라는 사실이” 틀림 없기 때문이다. 종교는 인간의 신념 안에서 종교의 중심으로 들어갈 입구를 발견할 수 있게 한다(49). 그런데 헤겔에 따르면 근대 세계는 (기독교) 교리와 인간의 사회적 삶이 나누어졌기 때문에 이런 국가의 과업과 대립적인 특색을 보이고 있다(N26). 헤겔은 이에 대한 이유를 기독교가 근원적으로 사적인 종교였다는 사실에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삶과 교리 사이에는 차단막”이(26) 세워지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서 종교는 별로 신뢰를 얻지 못하게 되었다. 뒷날 헤겔은 이와 똑같은 의미에서 주일과 평일의 구별에 대해서도 언급했는데, 이것은 근대 세계 안에 처한 종교의 처지를 가리킨다. 기독교를 사적인 종교라고 보는 판단은, 이런 종교는 그 어떤 추가적인 조치가 없이는 공식적인 종교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는데, 이런 판단은 루소에 의해서 자극을 받았다. 특별히 그의 사회계약론(Contrat Social, 1762)에 언급된 시민종교의 필연성에 대한 해명에서 큰 자극을 받았다.66) 루소나 헤겔 양자에게 똑같이 근대적 상황 가운데 있는 종교와 사회의 관계에 대한 타당한 묘사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 관계된 것이 아니다. 즉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에 이어서 종교전쟁이 일어났으며, 이 종교전쟁이 끝난 다음에는 세속화라는 길이 닦여졌는데, 종교와 사회의 문제가 이런 세속화의 결과와 관계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공적인 영역에서의 분리가 기독교의 독특성으로 이해되었다는 것이 타당한 이유다. 젊은 헤겔은 이에 대한 모형을 그리스인들에게서 찾았다(N23,26f.). 이들의 종교적 확신은 사람들에게 “어느 곳에서나 다정다감하게” 다가갈 수 있었다. “그들이 하는 일이나 보다 진지한 삶의 문제에서, 또한 축제와 즐거움에서 사람들 편에 설 수 있었다.”(N26).

헤겔은 이런 초기 시절에 인간의 공동생활 안에 있는 도덕성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부분적으로 칸트의 종교 문서에 기대어 종교를 단순한 수단으로 파악했다. 그렇지만 헤겔은 1796년 이후 칸트와 피히테가 시도한, 즉 기독교를 도덕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비판하는 인물이 되었다. 그 시기는 헤겔이 베른에서 프랑크푸르트로 이주했을 때인데, 그곳에서 휠더린은 헤겔에게 가정교사 자리를 소개해주었다. 참된 종교는, 즉 예수가 선포한 사랑은 도덕과는 대립적이었다.

횔더린은 이즈음에 이미 피히테의 자아철학에 비판적으로 논쟁을 벌였다. 횔더린은 대상에 대한 의식을 자기의식에서 이끌어내는 피히테를 반대하고, 주관을 객관과의 관계에서만 생각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절대적 자아 개념이 불합리하다고 보았다. 더구나 주관과 객관은 이미 자아의식 안에서 상호적으로 한정시키고 있다. 그래서 휄더린에게는 양자를 포괄하는 현실성(Wirklichkeit)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었다. 휄더린은 주관성과 객관성의 일치를 가리켜 “존재”와 “생명”이라고 불렀으며, 플라톤주의자인 프란쯔 헴스테르후이스(Franz Hemsterhuis)의 영향으로 이런 근원적인 일치는 생명과 그 반영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나갔기 때문에 상실된 것인데, 사랑으로 다시 회복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67)

휄더린 사상의 영향과 그 사상의 전망 안에서 헤겔은 1798년에 다시 한번 예수의 역사를 해석해보기로 마음을 정했다. 여기서 유대의 율법에 대한 예수의 대립은 앞서 나온 작품과는 다르게 해석되었다. 여기서 헤겔은 칸트가 말하는 도덕성과 합법성의 대립을 예수의 역사를 해석하는 데 적용시켰다. 예수는 칸트가 말하는 도덕률의 자율적 도덕성을 선포함으로써 유대교의 외면적 합법성에 맞서보려고 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헤겔에 따르면 유대인의 신념은 외면적 순종에 한정되었다(N153). 예수는 이와 달리 “종교와 덕을 도덕성으로 고양시켜보려고” 했다는 것이다. 또한 “도덕의 본질이 들어있는 그 도덕성의 자유를 다시 회복시켜보려고 했다.”(154). 그러나 1798년 헤겔은 “기독교 정신과 그 운명”이라는 저서에서 칸트의 도덕철학을 근대의 분열상을 표현한 것이라고 간주했다. 더욱이 칸트의 도덕철학은 이 분열상을 통해서, 즉 당위와 존재의 대립을 통해서 그 특색을 드러냈다. 헤겔에 따르면 이런 대립이 유대인의 율법 종교를 지배하고 있다고 한다. 이 대립의 특징을 이제는 더 이상 순종의 외형에서 보면 안디고, 오히려 당위와 존재의 내적 구조에서 일어난 특징으로 보아야 한다. 헤겔은 종교의 참된 의미를 이제 더 이상 도덕성에서가 아니라 분리된 것의 통일에서 찾았다. “주관과 객관을 ... 통일시키려는 요구는, 즉 인간 정신의 최고 정신을 통일시키려는 요구는 종교에 대한 충동이다.”(N332).

이러한 사상이 1798년에 전혀 새롭게 등장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1793년 “시민종교와 기독교”에 다음과 같은 진술이 나온다. “그리스도를 세계와 함께 하는 하나님의 속죄자라고 믿는 것은” 기독교의 요점이다(N68). 민중의 삶 전체에 대한 헤겔의 관심으로 인해서 그 당시 그에게 일종의 화두와 같았던 속죄 사상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1794년에 그는 이 속죄를 여전히 손해배상의 차원에서 이해했다. 즉 “낯선 이의 공로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책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N69). 그는 속죄를 아직은 갈라진 이를 통일시키는 사랑의 표현으로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속죄가 종교를 도덕적으로 해석하는 것에 대한 반대로 나타나지 못했다. 5년 후에 비로소 변화가 일어났다. 예수는 더 이상 도덕성의 법률고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예수는 유대인들의 그런 도덕적인 실증성에 대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대항토록 했다.”(N276). 예수는 “율법에서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는 생각에 근거해서 다른 사람을 추론하는 것을” 반대했다(N274f.). 즉 사랑은 판결하지 않는다(앞의 같은 곳).

헤겔은 유대인의 율법을 역사적으로 우연한 힘일 뿐만이 아니라 철학적으로 훨씬 일반적인 실태의 표현으로 간주했다. 유대인들의 율법이 자연법의 명령과 일치했다는 한도 내에서 헤겔은 전통적인 관찰 방식을 따랐다. 헤겔은 이성의 도덕률에서, 또한 율법의 역사적 형태에서 그것이 구별되기 때문에 갈라지게 된 오성의 모습을 보았다. 헤겔은 이와 달리 사랑에 대한 생각이 이런 갈라짐을 뛰어넘어 생명의 일치로 갱신시킨다고 생각했다. 즉 “사랑 안에는 많은 특수한 것과 갈라진 것의 총체(Summe)가 아닌 전체(Ganze)가 포함되어 있다. 왜냐하면 사랑 안에는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 물론 사랑 안에도 갈라진 것이 있지만 더 이상 갈라진 것으로 남아있지는 않는다. 일치를 이룬다는 말이다. 그리고 살아있는 자는 살아있음을 느낀다.”(N379). “사랑 안에서 인간은 다른 이 안에서 자신을 재발견했다 ... 그 기쁨은 다른 이들의 생명과 혼합되며, 승인된다.”(N322).68) 사랑이 곧 오성의 분리를 극복하는 것이라는 사상은 생명의 일치를 제시하는 것으로서 헤겔의 후기 사변 개념을 꽃피우게 하는 맹아였다. 이 개념은 분명히 갈라진 자의 일치를 말하며, 여기서 각기의 운명이 다른 이들과 연관되어서 그들과 함께 하게 된다.69) 헤겔은 “기독교 정신과 그 운명”이라는 글에서 개념 철학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 즉 사랑은 여기서 아직 규칙성과 함께 하는 오성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지향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 규칙성과 오성을 사랑과 반대되는 것이라고 밖으로 물리쳤으며, 이런 반대에 직면했다. 그래서 예수의 사랑은 단지 객관과 법칙적인 상존의 힘을 맞서서 무력하게 남아 있는 주관적인 신념처럼 보인다. 예수는 현실성에서 파산되어야만 했다. 그리고 리얼리티 안에서만, 즉 종교적 신앙의 실재적인 세계 안에서만 이러한 파산이 극복되었다. 요컨대 예수의 부활과 승천에 대한 초기 기독교의 신앙 안에서만 말이다. “예수의 실존은 세계와의 분리였다. 또한 세계로부터 하늘을 향한 도피였다.”(N329). 1798년의 헤겔의 판단에 의하면 기독교인들에게도 역시 이러한 모순이 신앙과 삶의 현실 사이에서 여전히 모순으로 작용한다. 헤겔은 기독교의 본질에 토대하고 있는 기독교와 시민종교 대립이라는 표상을 아직은 극복하지 못했다.

헤겔의 길은 이제 사랑이라는 생각에서 단순한 주관 표상을 극복해보려는 길목으로 접어들었다. 또한 그는 이 객관적 세계를 사랑 안에 제시된 생명의 단일성 안으로 견인해보려고 했다. 이것은 우선 종교 개념의 확장을 통해서 일어났다. 이런 확장은 쉴라이에르마허의 “종교강연”에 영향받은 것 같은데, 어쨌든지 이런 확장은 1800년 헤겔의 사상적 체계의 단편에서 중심 테마였다. 여기서 종교는 이미 2년 전에 언급했던바와 같이 더 이상 삶의 현실성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삶의 일치는 종교에서 최고로 표현된다. 종교는 체계의 단편에서 최초로 “고양”(Erhebung) 개념으로 정의되었다.70) 즉 “유한한 생명으로부터 무한한 생명에 이르기까지 ... 고양되는 것이 곧 종교다.”(N347). 인간이 “무한한 생명을 전체 정신(Geist des Ganzen)이라고 한다면, 그런데 자신이 제한받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생명은 자기 외부에 놓여있는 것인데, 또한 살아있는 자에게 높아지고 그와 최고로 밀접한 일치를 이룬다면 그는 하나님을 열망하게 된다.”(N347). 여기서 헤겔은 일년 전에 쉴라이에르마허가 “종교에 대한” 강연에서 그랬던 것처럼 무한자를 생명의 총체성에서 발견하려고 했지 유한자의 피안에서 발견하려고 하지 않았다. 모든 유한하게 제한된 것과 개별적인 것에서 구별된, 그러나 모든 유한한 것들을 포괄하는 생명의 총체성은 헤겔의 경우에 “정신”이라 불리운다. 즉 정신은 특별한 것들과 대립하고 있는 법칙의 추상적인 보편성과 달리 구체적인 보편이다. 이 보편은 모든 특별한 것을 포괄하는 것으로서 생명의 총체성과 같다. 바꿔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정신은 생동적인 가지각색과 일치하면서 생동적이게 하는 법칙이다.”(N347). 종교는 생명의 무한한 총체성으로 인간을 고양시키는 것이다. 이 총체성은 구별되는 것들을(유한자) 함께 아우르는 것을 말한다. 이 경우에 1800년 헤겔의 사상적 체계에서 보면 이러한 무한한 총체성을 파악하는 일은 종교에서 이루어진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철학과 대립된다는 말은 아니다. 철학적 반성은 “모든 유한자 안에서만 유한성을 내보여야만” 한다(N348).

잠시 뒤에, 그러니까 “피히테와 쉘링의 철학 체계의 다른 점”이 처음으로 인쇄되어 나왔을 때(1801년) 헤겔은 무한한 전체를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철학에게 있다고 피력했다. “직관”을 통해서 말이다.71) 직관 개념은 피히테와 쉘링이 말하는 의미에서 “지적인 직관”을, 또한 쉴라이에르마허가 “종교에 대한” 강연에서 사용한 개념을 생각나게 한다. 이런 점에서 헤겔은 직관이 구체적인 대상에 연관되어 있다기보다는 쉴라이에르마허의 언어 영역에 아주 가깝게 자리하고 있다. 말하자면 다양한 전망을 공동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헤겔의 종교는 쉴라이에르마허와는 달리 이미 하위의 자리로 돌아가야만 했다. 즉 종교적 직관은 단순히 주관적으로 머물러 있는 직관이라는 특색을 지닐 뿐이다. 종교적 직관은 객관적 진리가 없다.72) 이와 달리 철학적 직관은 모든 반대를 자기 자신 안에서 지양함으로써 보편타당한 것으로 제시될 수 있다는 것이다.73) 이런 일은 철학이 반성 작업을 공동으로 펼쳐나감으로써 일어난다. 이 반성은 모든 유한한 것들과 규정된 것들의 조건을 그 대립을 통해서 내보인다는 것이다.74) “이성적이라는 것”은, 즉 사변적으로 이해된 차별성의 일치는 “그 이성적인 것의 분명한 내용에 따라서, 즉 굽명한 대립의 반대로부터 연역되어야만 한다. 여기서 이 대립의 종합은 이성적인 것을 말한다. 왜냐하면 이 이율배반적인 것을 가득 채우고 유지하는 직관만이 요구될 수 있기 때문이다.”75) 뒷날 헤겔이 “개념”이라고 일컬게 된 철학적 직관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통해서 종교적 직관과 구별된다. 반성의 도움으로 그 철학적 직관이 필연적이라는 점이 드러날 수 있고, 또한 철학적 직관이 반성을 통한 대립의 일치로 알려질 수 있다는 사실에서 말이다.

주목해야 할 사실은 이러한 직관의 대상이 이제는 더 이상 단순하게 생명의 총체성이 아니라 (쉘링과 더불어서) 오히려 절대(Absolute)라는 것이다. 더욱이 헤겔은 철학의 과업을 “총체성의 재생산”으로 규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제한의 총체성”을 총체성에서 단순히 “현상”하기만 하는 절대와 구별했다.76)

절대 개념을 쉘링에게서 물려받았지만 헤겔은 절대의 직관을 반성과 연결시킴으로써, 즉 반대를 숨기지 않고 드러냄으로써 자기 친구와의 차별성을 유지했다. 이 반대의 종합적인 일치는 “직관”을 통해서 이해되고 표현되는 것이다. 헤겔의 생각에 따르면 쉘링는 이와 달리 반대에 대해서는 공허할 수 밖에 없는 최고 직관으로 비약한다. 외냐하면 이 최고 직관이 반성을 통해 구별된 것이 일치하는 데서 아무런 내용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분명히 쉘링에게도 절대는 구체적인 부정(否定)이며, 무언가와의 무차별이며, 즉 최고 대상에 맞서 있는 무차별이며, 주관과 객관, 이상과 실재의 대립에 맞서 있는 무차별이다. 그러나 이런 대립은 이미 추상의 최고 차원에 등장한다. 그리고 절대의 단일성은 이 대립과의 관계에서 명시적으로 “무차별”로 묘사된다. 헤겔이 몇 년 후 정신 현상학(1807년)의 머리말에서 조소했듯이, 쉘링이 말하는 의미로 아무런 차이가 없는 단일성의 절대라는 것은 “밤이다. ... 이때는 모든 사람들이 젖소를 보고 검다고 말하는 습관이 있다.”77)


3. 쉴라이에르마허와 관념론과의 관계


프리드리히 다니엘 에른스트 쉴라이에르마허(Friedrich Daniel Ernst Schleiermacher, 1768-1834)는 특별한 방식으로 독일 관념론 역사에 속한다. 즉 그는 관념론 철학의 발전에 나름대로 독특하게 기여한 유일한 신학자였다. 베를린 자선 병원의 목사이며, 또한 프리드리히 쉴레겔을 중심으로 한 베를린 낭만주의 모임의 회원인 쉴라이에르마허는 서른 살의 나이에 첫 저서를 출판했는데, 그것이  “종교에 대해서. 종교를 경멸하는 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지성인들을 향한 강연”(Über die Religion. Reden an die Gebildeten unter ihren Verächtern, 1799)이다. 그는 이 책을 통해서 쉘링과 특별히 헤겔의 주목을 끌었으며, 또한 1798년 이래로 점차적으로 쉘링의 동일철학의 기본 구상에서 영향을 받았다.78) 이 동일철학은 쉴라이에르마허의 “변증법” 및 쉴라이에르마허 생존 시에 출판되지 못한 철학적 윤리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획득했다.

쉴라이에르마허에게 피히테나 쉘링 사상보다 훨씬 중요했던 것은 물론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야코비의 직접적인 실재성 의식이라는 명제였다. 이런 의식에서 대상과 자기의식이 근원적으로 일치하며, 또한 유한과 무한 의식도 역시 이 의식에서 일치한다.79) 이런 생각은 분명히 쉴라이에르마허의 “종교에 대해서” 강연에 토대가 되었으며, 또한 쉴라이에르마허가 1819년 야코비에게 헌정하려했던 책 신앙론(1821)을 포함해서 그의 전체 사상적 발전에서 중요한 몫을 차지했다.80) 이러한 직접적인 실재성 의식의 수용은 칸트의 인식비판이나 쉘링에 의한 체계 구상을 쉴라이에르마허가 제한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a) “종교에 대해”81) 강연에 나타난 종교 개념의 철학적 전망


쉴라이에르마허는 이 작품에서 종교는 본질적으로 인간 실존에 속한다는 사실을 말하려고 했다. 따라서 그는 이 문제를 해명하면서 “인간의 측면에서 형성되고 제시되는 그 진지성”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였다.82) 논증의 기반은 모든 면에서 육성되는 인간의 총체성 관념이다. 이 관념은 쉴라이에르마허의 교육 사상을 규정했으며,83) 종교의 인간론적 장소에 대한 질문이 야기되었다.

쉴라이에르마허에 따르면 인간의 지식과 행위와 나란히 있는 특별히 “고유한 정서적 영역”(37)이 종교에 속한다. 지식과 행위에 종속되지 않는 종교의 독자성에 대한 요구는 바로 이것에 기인한다. 이 독자성은 이성의 자연적 하나님 인식이라는 의미에서 형이상학의 토대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또한 칸트나 피히테의 경우처럼 도덕에 대한 첨가물도 아니다. 이런 명제는 쉴라이에르마허의 많은 독자들에 의해서 무언가 해방감으로 느껴졌다. 또한 이 명제는 종교개념에 대한 새로운 규정의 철학적 작용이 쉴라이에르마허에 의해서 제한받게 되었었다는 사실에 대한 가장 중요한 토대를 포함하고 있다.

쉴라이에르마허가 종교가 형이상학에 의존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래도 종교의 인간론적 기반과 대상에 대한 쉴라이에르마허의 규정은 한편으로는 스피노자의 영향으로 인해서, 다른 한편으로는 직접적인 실재정 의식이라는 야코비의 명제로 인해서 제한받는다. 여기서 인간은 이미 “종교적 성향”이라는 의미에서 무한자와 관련된다(144). 종교의 대상은 초자연적인 것이나 지구 밖의 것이 아니라 “우주”, 즉 유한자의 총체성이 일차적인 대상이다. 무한자가 그 유한자에 현재하는 한에서 말이다(38f.).84) 무한자는 유한자의 피안이 아니라 그 안에 현재한다. 즉 “모든 유한자는 자기 한계를 규정함으로써만 존속할 수 있다. 이 한계를 규정한다는 것은 무한자에게서 분리되어 나와야만 한다는 뜻이다.”(53). 종교는 이러한 사태를 의식하는 것이다. 종교는 모든 “개인들과 유한자들 가운데서 무한자를 보아야만 한다.”(51). 또한 “모든 개인들을 전체의 한 부분으로, 모든 제한된 것을 무한자의 서술로 받아들여야만 한다.”(56). 이런 문장으로 인해서 우주, 전체, 무한자라는 표현이 명백하게 등가적이라는 사실이 충분하게 설명될 수 있다. 더구나 전체는 부분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확인해준다. 이런 부분들은 이 부분들이 “분리되어 나와야 할” 전체를 통해서 “정의”된다(53). 따라서 모든 유한자는 무한자와 전체의 “서술”이다. 그리고 이러한 서술로서 유한자는 다시 한번 “이러한 한계 안에서” 무한하다(53).85)

“지적이고 실천적인 사람”의 일상 의식에는(144) 모든 유한자가 무한자와 전체를 통해서 주어진 조건들이 은폐되어 있다. 왜냐하면 이 조건은 유한한 사물과 그 관계만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조건의 영향이 이미 어린 아이들의 종교적 성향을 질식시키고 있다(145). 따라서 우주와 우리와의 “거래”(Handeln)가 필요하다. 그래야 개체로서의 우리와 유한자는 무한자를 직관하게 된다. “모든 직관은 직관되는 자가 직관하는 자에게 끼치는 영향으로부터, 또한 직관되는 자의 근원적이고 독립적인 거래로부터 발생한다. 이 거래는 직관하는 자에 의해서 그 본성에 따라 받아들여지고, 종합되고, 납득된다.”(55). 이 경우에 모든 직관은 감정(Gefühl)과 연결된다. 왜냐하면 경험된 작용이 우리의 “내적인 의식을 변화시킨다는 사실”이 틀림없기 때문이다(66). 쉴라이에르마허에 의하면 우주의 직관과 감정이 종교의 본질을 생산해내는데, 이것은 우주가 우리와 벌이는 “거래” 의 결과다. 여기서 우리는 무한자가 유한자 안에 현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쉴라이에르마허는 종교의 하나님 표상은 이러한 우주와의 거래에 연관된다. 이 표상은 종교의 본질 일반에 대해서 근본적인 게 아니라, 우주와의 거래를 단지 “자유로운 본질 형식 안에서 생각”할 수 있는 바로 그런 사람의 경우에 형성된다(129). 어떤 사람이 “[우주를] 직관함으로써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그가 보는 판타지의 방향에 달려있다.”(128f.) 즉 이런 직관에서 자유 의식이 우주와 벌이는 거래의 토대로서, 또는 일반적인 인과관계의 오성사상으로 기준이 될 수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86)

쉴라이에르마허가 직관과 감정 개념을 칸트, 피히테, 쉘링과 상관관계 속에서 사용하고 있긴 하지만, 이들 철학자들의 언어 사용과는 유별나게 상이하다. 칸트 같은 이들의 경우에 직관은 그 직관의 대상이 우리게 미치는 영향을 통해서 야기된다.87) 그러나 쉴라이에르마허에 따르면 이런 종교적인 직관에서는 이런 대상이 무한자이다. 바로 여기에 무한자와 절대에 경도된 쉘링의 “지적인 직관”과 비슷한 점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쉴라이에르마허에게서처럼 무한자 의식을 통해서 중재되지 않는다. 즉 유한 안에 있는 무한을 직관함으로서, 유한의 구성적 토대로서 중재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직관과 감정의 공속(共屬)에 대한 쉴라이에르마허의 설명은 다시 한번 피히테가 1794년에 제시한 지식론를 상기시킨다.88) 그러나 피히테는 (대칭적인) 직관과 감정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우선 감정 안에 있는 비(非)자아는 자아의 근원적인 행위를 억제하는 것으로 경험되며, 이 억제는 직관을 통해서 억제를 야기한 대상으로 되돌아간다. 피히테는 이로써 물자체에 대한 칸트의 추론이 경험적 실재성 의식을 묘사하기 위해서 너무 앞으로 나가버린 것이라는 점을 증명해 보려고 했다. 반면에 쉴라이에르마허는 실재적으로 우리에게 미치는 대상의 영향이 감정이나 직관의 생성에 책임이 있다고 보았다. 그렇지만 쉴라이에르마허에게도 역시 야코비가 (그리고 흄) 말하려는 의미에서 직접적인 실재성 의식은 본질적으로 “감정”이었다.89) 그러나 “강연”의 종교이론에서 볼 때 직관과 조우하는 감정은 우리의 “내적 의식”이 발동됨으로써 일어난 근본 감정의 제한으로 이해되었다. 이 근본 감정의 제한은 대상의 영향으로 발생하는 것이다(a.a.O. 66). 물론 뒷날 쉴라이에르마허이 발전해 나가면서 감정 개념은 야코비의 영향으로 “직접적인 자기의식”으로서 종교이론의 핵심에 자리했다. 몇몇 진술에서는 피히테와의 동감한다는 내용이 나오기도 했다. 즉 우리가 하나님 표상에 의존적이라는 감정을 “방기”해두고 있다는 관점에서 신앙론을 설명하면서 말이다. 이 하나님 표상은 우리 의존성의 근원적인 자리이다.90) 의존감정으로서의 직접적인 자기의식에 대한 신앙론(§4)의 설명은 분명히 피히테가 감정을 자아행위의 억제에 대한 지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자기 의식과 감각적인 대상 의식이 공존하고 있다는 설명(§5)은 곧 쉴라이에르마허의 사상이 경험론적인 방향에서 전개된다는 사실을 말한다.

쉴라이에르마허가 1799년에 강의한 종교 의식에 대한 설명은 전반적으로 의식에 대한 철학적 반성의 결과를 이용했다. 그렇지만 종교는 지식과, 또한 행위와 완전히 구별되어야만 한다. 이중에 한 가지는 종교의 독립 보장이 종교적 직관과 감정의 내용에만 관계된다는 전제 하에서 또 하나의 다른 것과 일치될 수 있다. 쉴라이에르마허에 따르면 이 내용은 순전히 개인적인 것이다. 이로써 철학적 비판을 자극한 문제들이 불거지게 된다.


b) 쉴라이에르마허의 “강연”에 대한 쉘링과 헤겔의 반작용


쉘링은 1802년 아카데미 연구의 방법론에 대한 강의에서 “종교의 본질을 새롭게 알렸으며”, 또한 “종교가 도덕과 철학에 의존하지 않는다고 주장한” 쉴라이에르마허를 직접 거명하지는 않았지만 분명하게 암시했다. 쉘링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이렇게 논증을 전개한 사람이라면 역으로 “종교가 철학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으며, 철학의 자리를 주장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해야만 했다는 것이다. 이미 종교가 자신과의 조화를 이룬다는 설명은 “단순히 주관적인 독창성과 전혀 다른 과업”이라는 것이다.91) 쉘링은 철학이 지적인 직관을 통해서 절대 관념을 이상과 실재의 일치점으로 파악해야하고, 이로써 근원지식을 파악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 근원지식은 모든 학문의 토대를 이루는 것이다.92) 이것으로 부터 “기독교의 역사적 구조”가 생산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93)

헤겔도 역시 “강연”의 종교이해가 주관주의에 기울어졌다고 비난의 수위를 높혔다. 그러나 헤겔의 경우에 이 비난은 이 책의 가치를 1802년에 쉴라이에르마허가 언급했던 것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인정한다는 사실과 연결되어 있다. 또한 쉘링과는 다른 토대에서 제기되고 있다. 헤겔은 피히테와 쉘링 철학의 차이점에 대해서 평하는 논문의 “머릿말”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강연”은 그것이 “사변적 필요성과 직접 관계되는 게 아니더라도 칸트나 피히테와 달리 이성과 자연을 화해시키는 “철학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고 말이다(PhB 62 a, 6). 헤겔은 강연에 등장하는 종교 개념에서 “우주”가 중심적 기능을 한다는 점을 잊지 않았으며, 또한 이 강연에서 표현되는, 즉 스피노자주의로부터 영감을 받는 쉴라이에르마허의 기본 구상을 잊지 않았다. 이 기본 구상이라는 것은 쉘링의 구상과도 전반적으로 근친한 관계에 있는 것이었는데, 헤겔도 그 당시에는 이런 것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다.

헤겔은 종교와 철학의 관계에 대해서 일 년 전 쯤에94) 이미 언급한 적이 있다. 그는 종교가 자신을 고양시켜 나가야할 무한한 생명을 철학과는 달리 종교에만 해당되는 것으로 간주했다. 왜냐하면 철학은 반성함으로써 대비의 영역으로 움직여가는 반면에, 종교에서는 그 대비가 지양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해는 “강연”에서 이루어진 종교와 지식의 분리를 사실적으로 정확하게 본 것이다. 헤겔은 쉴라이에르마허를 반대하는 글에서 철학은 반성의 기능 이외에도(PhB 62 a, 17f.) “직관”의 기능이 있다고 보았다. 이 직관은 “대립되는 것들의 종합”으로서 그에 의해서 “초월적 직관”이라고 일컬어졌는데(a.a.O. 31), 이는 흡사 반성이 절대와 연결되어 있는 것과 같다.95) 헤겔은 철학적 지식을 직관과 반성의 일치라고 생각함으로써 종교에 대한 강연에서 등장한 종교적 직관을 그 내용적인 면에서 우연하게, 그리고 주관주의적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말하는 종교적 직관은 모든 유한자에게서 무한자를 직관할 수 있으며, 또한 무한자를 이러한 직관의 무제한적인 다양함으로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헤겔은 1802/03년에 쓴 “신앙과 지식”(Glauben und Wissen)이라는 글에서도 쉴라이에르마허의 직관 개념을 이렇게 판단했다. “종교에 대한 이 강연”은 역사적으로 볼 때 야코비의 철학과 일치하며, 야코비 철학을 설명하기 위한 부록이라고 할 수 있다. 쉴라이에르마허는 야코비와 더불어서 “개념의 개인적인 요소와 특수한 요소”를 강조한 것이다. 헤겔은 쉴라이에르마허가 야코비처럼 참된 절대를 “절대적 피안”으로 생각한 게 아니라는 점은 알고 있었다.96) 이 절대적 피안은 단지 신앙이나 감정에서만 획득될 수 있는 것이지, “우주로 인정받는” 자연 안에서는 획득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PhB 62 b, 89). 쉴라이에르마허가 이렇게 스피노자에게 방향을 설정함으로써 야코비의 주관주의적 “원리”는 “최고의 상태”에 도달되었다. 우주에 대한 생각으로 주관과 “도달될 수 없는 절대적인 객관” 사이에 놓인 장벽이 허물어졌기 때문에, 그렇지만 “최고의 직관 자체가 무언가 주관적인 것과 특이하게 잔존하고 있는 것들의” 해명이 됨으로써 그것이 가능했다(바로 앞의 곳). 쉴라이에르마허가 생각하는 직관은 “무언가 분명히 주관적인 것이며 특수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 직관은 자기 의견을 “고착화 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바로 앞의 곳).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작관과 반성의 공속(共屬)에 대한 차이를 설명하는 글에 잘 나타나 있다. 객관적인 타당성은 반성에 의해서 지적된 반대를 자기 안에 지양할 수 있으며, 또한 그런 한에서 “반성에 의해 요구된 것으로” 증명된다는 사실을 통해서 직관을 갖는다. 즉 “이성적인 것은 명확한 내용에 따라서, 즉 명확한 대립의 반대로부터 축소되어야만 한다. 여기서 이 대립의 종합은 이성적인 것을 말한다. 왜냐하면 이율배반적인 것을 가득 채우고 유지시키는 직관은 요구될 수 있는 것이다.”(PhB 62 a, 32). 이것과 비교할 때 “강연”에서 말하는 종교적 직관은 사실상 주관적인 우연성에 자리하고 있다. 쉴라이에르마허의 입장을 옹호하려면 그가 보편타당한 진리를 종교적 직관의 소관으로 요구하지 않으려 했다는 점이 우선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쉴라이에르마허가 강조하는 개인과 다원에 정반대되는 일이었다.97) 기독교에 대한 다섯 번째 강연을 설명할 때만 이 문제는 달라졌다. 왜냐하면 유한자와 무한자 사이를 불충분하게 중재한다는 관점에서 볼 때  나머지 종교와의 “논쟁적인” 관계가 이 문제에 관련되기 때문이다.98) 쉴라이에르마허는 이런 진리 요청을 필요하다고 간주한 헤겔과는 달리 이미 언급된 직관과 반성의 교환 관계를 통해서 주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독교가 논증을, 헤겔은 이 논증을 뒷날 종교철학 강의에서 거론했는데, 제한된 형태로 받아들여야만 했다는 명제를 통해서 주장했다. 기독교가 그래야만 했던 이유는 “종교 자체를 종교에 대한 질료로 생각하고, 동시에 그 종교의 보다 높은 능력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99)

헤겔은 쉴라이에르마허의 주관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쉴라이에르마허의 “강연” 제2쇄가 출판된 1806년 이래로 종교나 경건에 대한 그의 강조점이 감정에 모아졌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직관의 순간이 이 감정 밑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야코비와의 관계는 이를 통해서 좀더 분명하게 부각되었다. 물론 헤겔이 종교철학 강의에서 종교를 감정으로 해석한 것을 능숙하게 비판했는데,100) 이 비판은 쉴라이에르마허가 뒷날 이해한 감정 개념이 우연한 감정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여기서 말하는 이 감정은 각각의 내용을 사실상 완전히 이 표상 덕분으로 돌리는 것인데, 오히려 자기의식의 구조라는 특색으로 본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이것은 칸트의 초월적 통각(統覺)과 비교될 수 있다. 도한 후기의 피히테에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초월적인 토대를 통해서 구성되는 것과 같다. 자기의식은 대상적인 세계 경험과의 연결에서만 이 토대를 알게 된다.101) 헤겔의 종교철학이 비록 이러한 사태를 잘못 판단하고 제기한 비판이었지만 쉴라이에르마허의 “강연”에 나타난 종교와 기독교 이해에 일치되는 몇 가지 중요한 관점들이 있다.  

첫째로 다음과 같은 점이 언급되어야만 한다. 헤겔은 쉴라이에르마허와 마찬가지로 종교의 구체적인 현실성(Wirklichkeit)을 완전히 실증적인 종교에서 찾았지 “자연” 종교에서 찾지 않았다. 쉴라이에르마허는 이 자연 종교를 (루소나 흄과 똑같이) 단일신론적인 종교에서 파생된 공동의 추상적 산물로 다루었으며,102) 헤겔의 경우에는 구체적인 종교가 역사에서 제시됨으로써 보편적인 “종교 개념”의 논의가 이 자연 종교에 상응한다.103) 헤겔은 종교의 개념에 대해서 다루면서 쉴라이에르마허와 마찬가지로 모든 실증적 종교의 특수성이 다음의 사실에 토대를 둔다고 보았다. 일종의 분명한 종교적 직관은 모든 나머지 것들의 중심이 된다는 사실에 말이다.104) 기독교의 중심 관념은 “종교”를 핵심 사상으로 생각했다. 이 핵심 사상은 하나님과 인간의 본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된다는 표상에서 표현되었다.105) 헤겔은 쉴라이에르마허보다는 훨씬 이러한 견해에 가까이 접근해 있었다. 쉴라이에르마허는 신앙론에서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을 그 중심에 둠으로써 다시 주관적 경험을 강조하게 되었다.106) 종교의 본질이 전체적으로 종교적 의식의 내용인 한에서107) 기독교를 “계시의 종교”라고 보는 헤겔의 이해는 그 마지막 접촉점을 쉴라이에르마허가 “강연”에서 기독교를 “종교들 중의 종교”라고 파악한 것과 상응토록 한다.108) 이 종교는 유한자와 무한자의 중재인 종교의 본질을 사실상의 형태에 대한 비판이 되게 함으로써 모든 나머지 종교들과 논쟁적인 관계를 맺는다. 물론 쉴라이에르마허의 경우에 이런 관점은 그가 “강연”에서 강조한 기독교와 역사의 관계와 더불어서 뒷날 재등장했다.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을 인간 본성의 창조가 완성되는 것으로 해석함으로써 말이다.109)


c) 쉘링과 헤겔과 관계된 쉴라이에르마허의 철학 체계110)


“강연”에서 쉴라이에르마허는 이르기를 철학은 인간을 “세계와의 교화작용 개념으로”(171) 고양시킨다고 했다. “철학”에 대한 이러한 묘사는 종교를 도덕과 물리학 사이에 정위키시는 것과(172) 비슷한 것인데, 어쨌든지 이러한 묘사는 초월철학적인 면에서 자아에 집중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실재성 의식이라는 의미에서 직접적으로 인간론적인 방향에서 접근하는 것이다. 여기서 자기의식과 세계의식이 이미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성향은 다음 해에 형이상학적인 기초에서 이루어진 지식론이라는 점에서 심화되었다.111) 여기서 아카데미 연구에 대한 쉘링의 첫 번 강의가 나름대로의 역할을 했다. 지식 개념 안에서 이상과 실재의 “동일성”이라는 쉘링의 명제는 쉴라이에르마허의 사상에 상대적으로 근접해 있었다. 그런데 쉴라이에르마허는 1804년 쉘링의 강의를 비판하는 글에서 자기 철학의 “특징”에 대한 첫 강의를 아주 간단하게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지적했다. 어떤 이들은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도 여기서 이 특징을 훨씬 명백하게 내다보고, 또한 그것과의 결합에서 훨씬 바르게 표상한다.”고 말이다.112)

쉴라이에르마허의 철학적 윤리 최종판113)에 나오는 “일반적 서론”은 그의 기본 구상이 쉘링과 근접해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즉 최고知 개념을 그 토대로 삼았다는 말이다(§1). 이런 최고지에 의해서 이제 그 밑에 자리하게 될 지식의 자리가 규정되어야만 한다. 여기서는 지식과 존재가 서로 간에 상관적인 관계를 형성할 뿐이다(§23). 쉴라이에르마허의 경우에는 이 문제가 쉘링의 경우와는 다르다. 최고지는 “그것과 동일한 최고 존재를 간단하게 표현하는 것으로서”(§29) 우리 의식에서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게 아니다. 오히려 ... 다른 지식의 내적인 토대와 원천으로 나타난다.”(§33). 쉴라이에르마허는 이상과 실재 사이의 절대적인 영점(零點, Indifferenzpunkt)을 직접 “지성적으로 직관해야”한다는 쉘링의 주장을 침묵으로 일관했다. 쉘링에 따르면 이 영점이 바로 철학의 원리다. 쉴라이에르마허에 따르면 이와 달리 “사물적인 존재와 정신적인 존재”(§46) 사이의 대립이, 자연과 이성(§47) 사이의 대립이 지식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이상과 실재의 근본 대립에 상응한다. 따라서 지식의 목표는 “자연과 이성이 완전히 관철되고 일치를 이루는 것”이다(§48). 이에 상응하는 “주요 학문은 단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자연학이며 다른 하나는 이성학이다.”(§55). 자연이 이성이 되려면 물리학이 필요하며(§59), 이성을 통해서 자연이 관철되려면 윤리가 필요하다(§60). 이 윤리는 단순한 당위가 아니라 “이성이 실제로 자연에서 활동하는 것을” 그 대상으로 하며(§95), 따라서 “역사학”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65, 참조 §60).

그렇다면 이러한 지식학에서 이론적인 철학의 자리는 어느 곳인가? 이론적인 철학은 “세계 지혜”(Weltweisheit)라는 관념에서 윤리적 지식과 물리적 지식을 갖고 있었지만 “변증법”이라는 형태를 간과했다. 쉴라이에르마하는 이 변증법을 “온전히 진리인 최고知의 내용이 빠져버린, 그저 겉모양인 모사(模寫)라고 불렸다. 최고지와 모사 안에서 달라진 것 만큼의 모사된다고 할 수 있다.”(§61) 즉 윤리학과 물리학의 차이만큼 말이다. 쉴라이에르마허에게서 이런 “변증법”은 다른 관념론적 체계 안에 있는 절대 학문이라는 자리에 등장했다. 모든 유한한 존재의 토대인 절대는 쉴라이에르마허에게 이론학문의 대상이 아니라,114) 실증적 종교에서 구체적인 형태를 획득한 것처럼 종교적 의식(意識)의 대상이다.

변증법 개념은 쉘링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쉘링은 1802년에 행한 아카데미 연구의 여섯 번째 강의에서 변증법이라는 이름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의 특징을 부각시켰다. 즉 “강의를 통해서 확실해질 수 있는 것이라고, ... 즉 이런 학문의 예술적 측면이라고” 말이다.115) 변증법은 “사변과 반성의 관계”에 기인한다(ebd.). 그런데 이것은 헤겔이 철학적 방식을 묘사하는 것과 흡사하다. 쉘링이 그렇게 계속해서 언급했듯이 철학의 예술론은 실존하지 않는다고 한다. “예술론이 유한성의 형상을 절대와 관계에 순수하게 제기되어야만 한다면, 그것은 곧 학문적 회의론임이 틀림없다.”116)

쉘링의 이러한 진술은 쉴라이에르마허가 1811년 이래로 “변증법”이라는 제목으로 베를린 대학교에서 수차에 걸쳐 강의했지만 (서론 부분을 제외하고는) 결국 책으로 출판되지 않았던 내용을 묘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117) 플라톤의 변증법적인 방식을 모두 기억한다면 쉴라이에르마허에 의해 수행된 체계의 제시는 플라톤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쉘링에 의해서 형성된 순서를 설명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만 할 것이다. 비록 쉴라이에르마허가 “철저한 회의주의”의 거점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지만, 또한 그 대신에 존재자에 대한 논쟁과 그런 논쟁을 극복하기 위해서 “예술론”을 제기하려고 했지만 말이다.118)

쉴라이에르마허는 지식의 조건과 한계에 대한 연구를 이런 변증법적 훈련의 첫 부분으로서 생각해서 변증법의 “예술론” 보다 앞서 실행해야된다고 주장했다. 지식의 조건은 “쉘링과 마찬가지로) 주관과 객관의 차별, 그리고 이상과 실재의 차별이며,119) 또한 지식에서 지양되어야 할 그 차별의 토대이다. 왜냐하면 지식 안에서 사유와 존재, 이상과 실재가 일치된다. 이에 대한 조건은 사유하는 자의 조화인데,120) 이럼으로써 지식은 모든 논쟁의 마지막을 의미한다. 동시에 지식은 대상의 측면을 광범위하게 둘러싸며,121) 따라서 지식은 가장 보편적의 지양으로, 가장 포괄적인 대립의 지양으로, 즉 이상과 실재 사이에서 벌어지는 대립의 지양으로122) 진술된다.

이상과 실재 사이에 있는 가장 첨예한 대립에 상응하는 것은 주관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우선적으로 감각과 오성의 차별이다. 또한 오성의 내부에서는123) 판단과 개념이며, 개념의 측변에서 볼 때는 특수와 보편 사이의 차별이다.124)

지식 안에 있는 의식의 대립을 극복하기 위한 최고의 조건은 대러한 대립의 피안을 전제하며, 따라서 그 조건은 그 공속의 “초월적인” 기반이다. 이러한 단일성의 토대는 지식을 향한 모든 노력의 기반이며, 따라서 모든 논쟁의 피안에 자리하게 된다.125) 모든 지식은 쉴라이에르마허에 의해서 “종교적”이라고 불려진 “절대와 최고에 대한 의식에” “기초하고 있다.” “이런 지식을 우리는 모든 개체들이 소급되어 돌아가야만 할 토대로 알고 있다.”126) 쉘링과는 반대로 쉴라이에르마허는 우리가 우리의 사유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지식과 존재의 이런 초월적 토대를 적당하게 규정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논란을 벌였다. 왜냐하면 우리의 사유는 늘 이미 앞서 논쟁이 벌어진 상대적인 대립에 연결되어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 근원이 최고 개념에 해당되는 존재로, 또한 모든 현상에 작용하는 능력으로 생각된다면 이것은 한편으로 범신론이 될 것이다. 이 범신론은 능력과 현상의 상관설 때문에 근원을 무조건적인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127) 다른 한편으로는 창조자 하나님 사상이 될 것이다. 이 하나님은 어쨌든지 질료 표상에 연결되어 있거나, 아니면 대(對)개념으로서의 세계관념과 연결되어 있다.128) 존재의 공동에 대한 관점은 판단에서 사상의 규정에 연계되는 것인데, 이 관점 역시 무한자를 파악하는 게 아니라 운명과 섭리를 상호 대립적으로 표상할 뿐이다.129) 모든 이 양식들이 “대립 영역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은 불충분하다.130) 이것은 지식 대신에 의욕으로부터 칸트와 일치를 이루는 토대에 도달해보려는 것으로는 좋아지지 않을 것이다.131)

모든 지식의 “초월적 토대”가 사유의 그 어떤 양식에서도 적합하게 표현될 수 없다면, 인간의 자기의식에서 이 토대에 상응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즉 감정의 직접적인 자기 신뢰 안에서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 감정은 의식의 모든 기능과 대립을 뛰어넘는 것인데,132) 여기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제한되며, 규정된다.” 따라서 우리 안에 있는 “초월적 토대를 대표하는” 감정은 의존감정이며, 이로써 종교적으로 규정된다.133) 종교의식은 그러나 초월적 토대를 결코 순수하게 제시하지 않고, 오히려 대상적으로 규정된 의식과의 연결에서만 제시한다. “직접적인 자기의식과의 혼합”은 결과적으로 종교 의식 안에서 “초월적 토대의 인간화”를 이룩한다.134) 따라서 “사유”가 초월적 토대에 접근하는 양식은 사유가 감정 안에 현재하는 보충(Komplement)으로서의 그 상징적 가치를 유지한다.135)

쉴라이에르마허가 사유를 통해서 얻어지는 초월적 토대의 구체성에 대해서 논쟁을 제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초월적 토대에 근거한 한 “지식”을 주장했다.136) 여기서 관건이 되는 문제는 초월적 반성의 결과이며, 무조건적인 것에 대한 질문 형식이다. “사유”에 대한 쉴라이에르마허의 설명은 이 양자에 대해서 무관심하다. 그의 설명은 실제로 오성개념과 판단을 통한 감각인상에 대한 작업만을 주제화하기 때문이다. 쉴라이에르마허에 의해서 주장된 “사유의 한계”는137) 우선적으로 오성에 대한 사유에서 파생되는 한계다. 무조건적인 것을 목표로 하는 이성개념은 이미 칸트가 말하는 의미에서 이러한 오성 사유와 구별되어야만 했다. 쉴라이에르마허가 초월적 토대에 대한 사상으로 오성적 사유의 영역을 뛰어넘어버렸지만 그래도 그는 모든 사유를 이런 조건과 대립과 연결시켜 놓았다.

쉴라이에르마허의 사유와 헤겔의 사유가 다르다는 사실의 토대는 바로 이런 점에 있다. 왜냐하면 헤겔에 따르면 오성 개념의 본질은 반성을 통한 대립을 자기 자신 안에서 통일시키며, 또한 “동일성과 비동일성의 동일성”을 명확히 한다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138) 헤겔은 1807년 정신 현상학 서문에서 이 동일성 문제를 독단론적인 회의가 아니라 방법론적인 회의라고 묘사했다. 그것은 곧 “현상적인 의식의 전체 주변을 지향하고 있는 회의주의”이다.139) 헤겔의 이러 관찰은 바로 쉴라이에르마허의 변증법과 비교될 만하다. 더구나 이 양자의 배경에는 철학적 사유의 예술론이 감당해야할 과업에 대해서 아카데미 연구 방법이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여섯 번째로 강의한 쉘링의 말이 들어 있는데, 이 예술론은 “절대와의 관계에서 유한성의 형식을 제시하는 것”으로서 “학문적 회의주의”와 별로 다를 게 하나도 없다(각주 116 참조). 쉴라이에르마허의 변증법에 나오는 두 번째 타이틀이 바로 이러한 예술론이다. 그러나 이 변증법에 설명되는 그 예술론은 오성 사상의 일방성을 그 대립적인 면에서 확립하며, 또한 그 일방성을 그 대립적인 것과 결합시키거나 그저 대립적으로 관철시키나가는 것에 머물러 있다. 헤겔의 정신 현상학은 예술론이 아니라 의식(意識)학인데, 이 의식학은 진리를 향하려는 생각과 사실적인 내용 사이의 대립을 늘 새롭게 반성함으로써 자기를 이해해보려는 길이다. 따라서 의식의 자명성을 새롭게 형태화 할 때 대립이 앞서 발생하게 되는데, 이 대립을 지양하기 위한 방법의 매 단계마다 쉴라이에르마허와의 차이가 드러난다. 자기의 진리를 드러내려는 의도한다는 점에서 그런 차이가 드러난다는 말이다. 쉴라이에르마허와 헤겔은 양자 모두 쉘링과 달리 절대의 “지적인 직관”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식의 기능과 내용을 반성하는 것에 몰두했다. 물론 이런 일에 바로 진리인 것과의 관계에서 말이다. 쉴라이에르마허가 의식의 기능과 내용의 유한성을 서로 상대방을 통한 한정된다는 사실에서 찾았다면, 헤겔은 그것의 고유한 모순성에서 밝혀내려고 했다. 그가 논쟁문헌에서 말하는 대로 모순을 자기 안에 포함하고 지양하는 “직관”을 통해서 이런 모순적인 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말이다.


1) K.L. Reinhold: Versuch einer neuen Theorie des menschlichen Vorstellungsvermögens, 1789.


2) F.H. Jacobi: David Hume über den Glauben, oder Idealismus und Realismus, 1787. 또한 피히테의 두 번째 지식학 개론, 1798 (J.G. Fichte: Versuch einer neuen Darstellung der Wissenschaftslehre, 1797/98, (hg.) P. Baumanns PhB 239) 62쪽을 참조할 것. 야코비는 자기 나름 대로 우리 외부에 있는 사물의 리얼리티에 대한 전제를 포기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는 그것을 신앙의 문제로 설명했다.


3) 피히테가 칸트와의 관계를 이렇게 묘사했다. a.a.O. 57f.


4) J.G. Fichte: Grndlage der gesamten Wissenschaftslehre (1794), 3.Aufl. 1802, (hg.) F. Medicus PhB 246, 11f. (erster Grundsatz). 본문에 나오는 이후의 쪽수는 이 작품에서 따왔다(PhB 246, 1988과 동일함).


5) 피히테는 두 번째 지식학 개론(1798)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PhB 239, 39과 39.


6) J.G. Fichte a.a.O. 37f.


7) 두 번째 개론 a.a.O. 38.


8) J.G. Fichte 1794 a.a.O. 24n. 9ff., 참조 30.


9) 두 번째 개론 a.a.O. 69.


10) J.G. Fichte 1794, 30. 두 번째 개론 a.a.O. 69를 참조할 것. “내가 분명히 이렇게 나를 조정(措定)한다면 나는 한정된자 일 수 밖에 없다. ... 왜냐하면 나는 이런 직관에 의해서 유한기 때문이다.”


11) J.g. Fichte, 두 번째 개론 a.a.O. 71.


12) J.G. Fichte 1794, 30.


13) J.G. Fichte, zweite Einleitung 46f., Zitat 47.


14) D. Henrich: Fichtes ursprüngliche Einsicht, 1967. 본문의 뒷문장에 대해서는 이 책 11쪽에 나오는 서론 부분을 참조할 것.


15) J.G. Fichte, Zweite Einleitung 40.


16) D. Henrich a.a.O. 21.


17) J.G. Fichte: Versuch einer neuen Darstellung der Wissenschaftslehre, hg. P. Baumanns PhB 239, 108.


18) D. Henrich a.a.O. 25.


19) J.G. Fichte: Darstellung der Wissenschaftslehre aus den Jahren 1801/1802, hg. R.Lauth PhB 302, 1977, 48. 참조 46. 피히테의 눈(眼) 메타포에 대해서는 D. Henrich a.a.O. 261f.을 참조할 것. 눈이 “정립(定立)되어” 있다는 사상은 피히테가 1798년에 쓴 도덕론 체계의 난외주(注)에 나와 있다.  


20) J.G. Fichte PhB 302, 218f.


21) D. Henrich a.a.O. 39.


22) J.g. Fichte: Die Wissenschaftslehre. Zweiter Vortrag im Jahre 1804, hg. R. Lauth u.a. PhB 284, 1975, 216, 참조 226, 231ff.


23) J.G. Fichte a.a.O. 172, 27. 1810년의 지식학에서는 자아가 신적인 존재의 “선험적 도식”으로 묘사되었다(Die Wissenschaftslehre in ihrem allgemeinem Umriß, 1810, hg. G. Schulte 1976, 26ff.).


24) J.G. Fichte: Die Anweisung zum seligen Leben, hg. H.J. Verweyens PhB 234, 1983, 50. 참조 63: 하나님의 절대 존재는 “자기를 계시한다.”


25) J.G. Fichte a.a.O. 68.


26) J.G. Fichte a.a.O. 73.


27) J.G. Fichte: Zweite Einleitung in die Wissenschaftslehre 1798, PhB 239, 46f.


28) J.G. Fichte: Grundlage des Naturrechts, PhB 256, 21.


29) J.G. Fichte: Die Bestimmung des Menschen, PhB 226, 118.


30) J.G. Fichte a.a.O. 151.


31) J.G. Fichte: Versuche einer Kritik aller Offenbarung (1792), hg. H.J. Verweyen PhB 354, 26. 또한 다음도 참조할 것. F. Wagner: Der Gedanke der Persönlichkeit Gottes bei Fichte und Hegel, 1971, 24ff.


32) J.G. Fichte: Grundlage des Naturrechts, PhB 256, 33ff., 특히 39.


33) 극단적인 악에 대한 칸트의 학설을 설명하면서 (피히테 전집 Ⅳ, 198ff.) 언급된 문제는 도덕성에 대한 외적인 동인의 유용성인데, 피히테는 그곳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이제 무언가 적극적인 종교가 발생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종교는 뛰어난 사람들이 도덕적 의미를 전개시키려고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기 위해서 만난 어떤 준비이기 때문이다.”(205). 


34) 피히테의 제자인 프리드리히 카알 포베르크(Friedrich Karl Forberg)가 Philosophischen Journal 1798에 게재한 논문 “종교개념의 발전”이 피히테의 글보다 앞서 나왔다. 피히테는 “우리가 하나님의 세계 통치를 믿는 근거에 대해서”를 통해서 포베르크의 이 논문을 보호해 보려고 했다. 즉 포베르크의 작품은 모든 종교에 대한 의혹을 옹호한다는 인상을 막아보려고 한 것이다. “피히테와 포베르크의 무신론에 대해서 아버지가 학업 중인 아들에게 보낸 글”(1798년)은 이 논쟁을 촉발시켰다. 드레스덴의 종교국은 작센 영주의 건의문에 불만을 갖고 이 문제에 즉시 간섭하기 시작했다. 


35) 무신론 논쟁에 대한 피히테의 논문은 아래에 게재되어 있다. (hg.) H. Lindau, 1912, 28 = Philosophische Journal 8, 1798의 9f.


36) J.G. Fichte a.a.O. 31 = 원전의 13쪽.


37) J.G. Fichte a.a.O. 32 = 원전의 15쪽.


38) J.G. Fichte a.a.O. 35 = 원전의 18쪽.


39) J.G. Fichte: Der Herausgeber des Philosophischen Journals Gerichtliche Verantwortungsschriften gegen die Anklage des Atheismus (1799), H. Lindau의 전집 1912, 221ff.에서 인용.


40) J.G. Fichte: Über den Grund unsers Glaubens etc., a.a.O. 34 = Philosophisches Journals 8, 1798의 16쪽. 이 뒤의 인용은 그곳의 다음 문장에서 따온 것이다.


41) B. de Spinoza: Ethica prop. 17, Scholium zum Coroll. Ⅱ. 또한 헤르더(J.G. Herder)가 1787년에 고찰한 점(전집 ⅩⅥ, 497ff.)도 참조할 것. 이 문제는 H. Timm: Gott und die Freiheit, 1974, 339에서 논의되었다. 


42) 앞의 각주 24,25를 참조할 것. 피히테가 뒷날 근원적으로 아주 명백하게 스피노자의 입장으로 돌아섰다는 진술에 대해서는 다음의 졸고를 참조할 것. Fichte und die Metaphysik des Unendlichen, in: Zeitschrift für philosophische Forschung 46, 1992, 348-362, 특히 351ff.


43) J.G. Fichte: Über den Grund unsers Glaubens etc., a.a.O. 35 = 18 in Philosophisches Journal 8, 1798.


44)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할 것. D. Henrich: Hegel im Kontext, 1971, 41ff. (헤겔의 사상적 체계에 대한 역사적 가정들).


45) F.W.J. Schelling, Ausgewählte Werke 1 (Schriften von 1794-1798), 1975, 56f.(6), 참조 60(8). 쉘링에 의하면 절대자아는 “모든 존재와 모든 리얼리티”를 포함하며(66,10), 또한 스피노자의 생각처럼 “유일한 실체”(72,12)인데, 쉘링은 아주 명백하게 이것을 자기 논리의 증거로 삼았다(74). 쉘링에게 피히테의 자아 철학은 칸트의 비판철학을 완성시킨 것만이 아니라 스피노자주의를 완성시킨 것이기도 했다.


46) F.W.J. Schelling a.a.O. 61(8, 참조 112f.). 피히테는 그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자신의 에데지드무스-비평(Aenesidemus-Rezension, 1792)에서 자아를 알기 위해서 지성적인 직관 개념을 스스로 도입했다(전집 AAⅠ/2, 1965, 48). 그런데 이런 표현은 1794년에 집필한 “全지식학의 기초”에서 경험적 자아가 자기의 자아성을 반영하는 표현 뒤로 숨었다. 그렇지만 이 표현은 1797/98년에 다시 등장해서 세세하게 해명되었다. 그리고 이제 절대적 자아의 자기이해에 관련되었으며, 마찬가지로 경험적 자아의 거점을 지각하는 것과 관련되었다. 지식학의 새로운 서술 시도 (1797/98) PhB 239, 39ff., 특히 41과 43ff. 동시에 피히테는 이 개념을 칸트에 대한 오해로부터 야기된 비난에 맞서서 자세하게 방어해나갔다(a.a.O. 51ff.). 피히테는 1795년에 자아가 비-자아의 관계에 근거해서 직관에 대해서 언급했다(Grundriß des Eigentümlichen der Wissenschaftslehre, PhB 224, 18).


47) F.W.J. Schelling a.a.O. 78f.


48) F.W.J. Schelling a.a.O. 385. 자아가 지식의 일치를 위한 토대로 퇴각한 것은 물론 자연철학의 주제로 인해서 제한받은 때문이었다. “초월주의적 관념론의 체계”(1800)에서는 자아가 여전히 중심 테마로 작용했다.


49) F.W.J. Schelling a.a.O. 386.


50) F.W.J. Schelling a.a.O. 389.


51) F.W.J. Schelling a.a.O. 392.


52) F.W.J. Schelling a.a.O. 396. 스피노자의 사상적 체계는 이와 달리 “일종의 창조적 상상력을 대담하게 기획한 첫 시도였다. 이 기획은 무한자 관념 안에서 유한자를 순수하게 직접적으로 파악하고, 이런 것을 각각으로 인식한 것이었다.”(344, 1803년의 두 번째 판의 본문임). “자기의식의 심연으로 떨어지는 대신에, 또한 거기서 벗어나서 우리 안에 있는 두 세계, 즉 이상적인 세계와 실재적인 세계의 기원을 관망하는 대신에 스피노자는 자기 자신을 뛰어넘어 버렸다.” 그리고 “동시에 그는 우리 외부에 있는 무한자 관념에서 길을잃어버렸다.”(360). 쉘링은 피히테에 대한 이 비판을 뒷날 다음과 같은 제목의 글에서 훨씬 강화시켰다. “자연 철학이 철학 일반과 맺는 관계에 대해서”, Ausgewählte Werke 2 (Schriften von 1802-1804), 1973, 422-440.


53) 슐쯔(W. Schulz)는 쉘링의 “초월 관념론의 체계”에 대한 개론(Einleitung zu Schellings “System des transzendentalen Idealismus" ,1800, PhB 448, 1992, ⅩⅩⅤ)에서 이렇게 언급했다. 이 개론에는 1795-1800년 사이에 이루어진 쉘링의 사상적 발전에 대해서 배울만한 점이 많다.   


54) F.W.J. Schelling: Darstellung meines Systems der Philosophie, in Ausgewählte Werke 2, 1973 (Schriften von 1801-1804), 10(§1). 본문에 있는 그 다음의 인용은 바로 이 부분에 있는 것이다. 이미 1797년에 무차별 사상이 절대라는 특징으로 나타난 것에 대해서는 각주 48을 참조할 것.


55) F.W.J. Schelling a.a.O. 11 (§2).


56) 이 논문은 미완으로 남아 있으며, 자연철학의 측면으로만 무차별의 체계를 견인해나갔다.


57) F.W.J. Schelling, Ausgewählte Werke 2 (Schriften von 1801-1804), 449.    


58) F.W.J. Schelling a.a.O. 450f.


59) FW.J. Schelling a.a.O. 452.


60) FW.J. Schelling a.a.O. 453.


61) F.W.J. Schelling 전집 Ⅰ,7,359.


62) F.W.J. Schelling a.a.O. 395. 참조 363. “ ... 영원한 정신은 단일성과 낱말을 자연 세계에 발설한다.”


63) 도르마티즘과 크리티시즘에 대한 철학적 서한(1795)은 “절대로부터의 등장”을 가리켜 “철학의 핵심 논점”이라고 했다(Schellings Ausgewählte Werke 1 (Schriften von 1794-1798), 174 - 전집 Ⅰ/1, 1856, 294), 또한 쉘링은 이렇게 생각했다. “무한으로부터 유한으로의 전이를 현실화할 수 있는 체계는 없다.” 철학은 단지 “역으로 유한으로부터 무한으로 넘어갈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무한으로의 경향”이 유한의 특색이며, “무한에서 길을 잃어버리게 될” 노력이 유한의 특색이기 때문이다.


64) 쉘링 전집 Ⅷ,210. 여전히 초월 관념론의 체계(1800년)에서는 절대 자유가 절대 필연성과 동일시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행위는 절대적으로 자유롭다고 생각된 게 틀림 없다. “그러나 이런 절대 자유는 동시에 절대 필연성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안에서는 자연의 내적 필연성에서 발생하지 않는 그 어떤 법칙이나 어떤 행위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PhB 448, 64 = Sämtliche Werke Ⅰ/3, 1858, 395).


65) 소위 헤겔의 젊은 시절 작품들은 1907년에 헤어만 노올의 편집에 의해서 다음과 같은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Hegels theologische Jugendschriften (이 책의 본문에서는 N에다 쪽수를 병기했다.). 이 작품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은 다음과 같다. Volksreligion und Christentum(1793), Die Positivität der christlichen Religion(1795/96, 1800년에 보충), Der Geist des Christentums und sein Schicksal(1798). 이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할 것. G. Rohrmoser: Subjektivität und Verdinglichung. Theologie und Gesellschaft im Denken des jungen Hegel, 1961.


66) J.J. Rousseau: Cotrat Social, 1762, Ⅳ,8. 헤겔과 루소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할 것. H.F. Fulda: Rousseausche Probleme in Hegels Entwicklung, in dem vom Fulda mit H.-P Horstmann hg. Band: Rousseau, die Revolution und der junge Hegel, 1991, 41-73.


67) 헤겔과 휄더린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할 것. D. Henrich: Hegel im Kontext, 1971, 9-40, 휄더린의 고유한 사상에 대해서는 같은 저자가 집필한 다음의 책을 참조할 것. Der Grund im Bewußtsein. Untersuchung zu Hölderlins Denken (1794-1795), 1992.


68) 사랑의 개념에 대한 이러한 철학적 해석에 대해서는 “시민종교와 기독교”를 참조할 것(N18). 여기서는 이미 다음과 같은 사실이 주장되었다. 사랑은 “무언가 이성과 유비적이다. 그런 한도 내에서 사랑은 다른 사람 안에서 발견되거나 또는 자기 자신을 망각하기 보다는 자기 실존 밖으로 나타나고, 동시에 다른 것 안에서 살아 있으며, 민감하게 반응하며, 또한 활동적이다. 이는 흡사 보편타당한 법칙인 이성이 모든 이성적인 본질 내에서 자신을 다시 예지계(界)의 동료시민으로 인식하는 것과 같다.”


69)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할 것. G. Rohrmoser a.a.O. 59f.


70) 이 고양 개념은 절대 사상으로의 고양이라는 뜻에서 이미 피히테와 쉘링에게서도 발견된다. 쉴라이에르마허의 “종교에 대한” 강연, 1799, 167쪽에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71) G.W.F. Hegel: Differenz des Fichte'schen und Schelling'schen Systems der Philosophie (1801) PhB 62 a, 30ff. 직관과 명상 개념이 여기서 병행되고 있다.


72) G.W.F. Hegel a.a.O. 91.


73) G.W.F. Hegel a.a.O. 32.


74) 헤겔의 젊은 시절 작품을 참조할 것. (hg.) H. Nohl 348.


75) G.W.F. Hegel: Dfferenz etc. 32.


76) G.W.F. Hegel a.a.O. 16과 12f.


77) G.W.F. Hegel: Phänomenologie des Geistes, hg. J. Hoffmeister, PhB 114, 19.


78) 쉴라이에르마허와 쉘링 사상의 관계에 대한 평가에는 의견이 분분하다. 본 저자는 쥐스킨트의 입장보다는 (H. Süskind: Der Einfluß Schellings auf die Entwicklung von Schleiermachers System, 1909, 55) 헤름스의 판단을 (E. Herms: Herkunft, Entfaltung und erste Gestalt des Systems der Wissenschaften bei Schleiermacher, 1974, 256ff.) 따르고자 한다. 쥐스킨트는 쉴라이에르마허가 1790년대에 피히테의 영향을 받았다고 믿었는데, 헤름스(252ff.)는 이에 반대한다. 또한 쥐스킨트는 쉴라이에르마허가 1804년에야 쉘링과의 접촉이 이루어졌다고 주장했다. 헤름스와의 논쟁을 벌이지 않은 채 쥐스킨트의 견해를 따르는 이는 알프레히트다. Chr. Albrecht: Schleiermachers Theologie der Frömmigkeit, 1994, 62ff.


79) 1793년 이후 쉴라이에르마허가 야코비에게 기울어졌다는 것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할 것. E. Herms a.a.O. 121ff.과 136ff., 야코비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는 139ff. 쉴라이에르마허가 야코비의 이신론을 비판했다는(142ff.) 것은 그가 스피노자의 유한과 무한의 관계 규정에 동정적이었다는 사실을 말한다(이에 대해서는 헤름tm의 책 144ff.).


80) 이에 대해서는 레데커(M. Redeker)가 쉴라이에르마허의 신앙론에 대해서 설명한 글을 보라. 7.Aufl. Berlin 1960, Band 1, ⅩⅩⅥ.


81) 이 “종교에 대해”의 내용에 대해서 설명을 잘 해주고 있는 다음의 책을 참조할 것. P. Seifert: Die Theoligie des jungen Schleiermacher, 1960.


82) F. Schleiermacher: “Über die Religion. Reden an die Gebildten unter ihren Verächtern, 1799, 26. 본문의 쪽수는 쉴라이에르마허의 원서에서 따왔다.


83)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책을 볼 것. M. Riemer: Bildung und Christendum. Der Bildungsgedanke Schleiermachers, 1989.


84) 쉴라이에르마허가 생각하는 우주는 단순히 자연 세계와 일치되는 게 아니다. 스피노자는 피히테를 통해서,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쉘링을 통해서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쉴라이에르마허는 우주의 직관이라는 차원을 “무시무시한 힘”(81f.)으로 작용하는 외면적으로 나타난 자연과 구분했다. 이 외면적인 자연은 그 내부의 법칙(82f.)을 뛰어넘어 생명체에 이르기까지(85), 또한 자연의 존재와 그 내적인 생명 안에 있는, 그 역사적 과정 안에 있는(87ff.) 인류에 이르기까지 지배력을 행사한다. “종교는 인류 외부와 위에 있는 그 무엇을 예감하려고 한다. ... ”


85) 개인주의적 사상에서 중요한 이러한 관점은 라이프니쯔의 단자론으로 소급된다. 라이프니쯔에 따르면 각각의 단자는 자기 장소에서 자기의 질서를 통해서 전체 우주 내지는 신적인 지식을 반사시킨다. 쉘링은 이미 1797년 자신의 저서 “자연철학의 관념”에서 모든 관념과 단자는 “이렇게 절대적으로 특별한 것”이라고 언급함으로써 라이프니쯔의 이런 생각을 다시 받아들였다.(Ausgewählte Werke 1, Schriften von 1794-1798, 1975, 388, 또한 344f.와 361f.에 있는 라이프니쯔에 대한 고찰을 참조할 것). 쉴라이에르마허는 물론 라이프니쯔와는 달리 창문 없는 단자론을 주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생각에 따르면 개인은 경험을 통해서 교육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


86) 어쨌든지 쉴라이에르마허의 신관은 우주와 인간의 거래 순간에 작용하는 기능에 한정되어 있다. “세계 안의 모든 사건을 하나님의 행위로 표상하는 이것이 종교다. 이 표상에서 무한한 전체와 이 사건의 관계가 설명된다. 그러나 세계를 초월해 있는 하나님의 존재를 심사숙고하는 것은 형이상학에서나 선용될 뿐이지 종교에서는 그저 공허한 신회론에 불과하다... ”(57f.).


87) 이것은 물론 칸트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모든 경험주의 일반에게 해당된다. 초기의 쉴라이에르마허는 이 경험주의에 매료되었으며, 또한 사변적인 인식 요청을 불신하고 있었다. 참조 E. Herms a.a.O. 91. 또한 “강연” 181쪽에 나오는 직관 개념의 사용도 참조할 것.


88) J.G. Fichte: Grundlage der gesamten Wissenschaftslehre, 1794, PhB 346, 230ff. (=Ⅰ,314ff.)와 237(Ⅰ,321), 감정의 우위성에 대해서는 184(Ⅰ,267) 및 224n. 18(Ⅰ,307). 자아의 지성적 자기 직관과의 차리를 보려면 피히테의 다음을 참조할 것. Versuch einer neuen Darstellung der Wissenschaftslehre(1797/98) PhB 239, 71.


89)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할 것. E. Herms a.a.O. 124, 157.


90) F. Schleiermacher: Der christliche Glaube, (1821) 2.Ausg. 1803, §4,4.


91) F.W.J. Schelling: Ausgewählte Werke 2 (Schriften von 1801-1804), 1973, 512f.


92) F.W.J. Schelling a.a.O. 489, 참조 450f.


93) F.W.J. Schelling a.a.O. 520-529, 특히 526. 쉴라이에르마허는 이 작품을 비판하면서 기독교에 대한 이런 서술을 “매우 빼어난” 견해라고 말했다. 기독교와 역사의 관계에 대한 서술은 “강연”(293ff. 참죄)을 통해서 자극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낯선 사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오히려 “규칙적으로 야기된 전체에 속함으로써 두 번째의 참된 발견으로 나타나는” 그것이 핵심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먼저 있던 것은 단지 어쩌다 이런 두 번째 발견에 앞서 있을 뿐인 것이다.”(Jenaische Literaturzeitung 1804 Bd.Ⅰ, 137ff., 다음에서 인용됨. Aus Schleiermacher's Leben. In Briefen etc. hg. W. Dilthey Ⅳ, 1863, 579-593, 인용 586). 만약 아카데미 연구에 대한 여덟번째 강의와 아홉번째 강의에 나타난 쉘링의 설명을 그가 역사 개념에 대한, 그리고 계시와 절대의 관계에 대한(PhB 448, 258-275) 초월 관념론의 체계(1800년)에서 제시한 설명을 비교해본다면, 사실상 쉘링의 역사 이해에서 주목할 만한 기독교-신학적의 심층적 견해를 틀림없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94) Im Systemfragment vom September 1800, 참조 H. Nohl (hg.): Hegels theologische Jugendschriften, 1907, 345ff., 특히 347f.


95) G.W.F. Hegel: Differenz etc., PhB 62a, 30f.와 17. 여기서는 반성과 “절대 직관”의 종합이 언급된다. 즉 반성은 “모든 것을 절대와 연결시킴으로써 이런 종합이라는 한도 안에서 자기 자신을, 그리고 모든 존재와 한정된 것들을” 파기한다. 반성은 “절대적인 부정”이다(바로 앞의 곳). 반면에 직관은 대립적인 것들을 일치시킨다.


96) 헤겔의 “절대적 피안”이라는 표현은 (Glauben und Wissen, PhB 62b, 87) 야코비의 입장과 관계된다.


97) 헤겔은 다음과 같이 집단화(Gruppierung)로 인한 다원을 신랄하게 비판했는데, 이를 참조할 것. 즉 “이런 집단화에서는, 당연한 말이지만, 그 시각의 특수성과 그 독특성은 매우 무용한 것이거나 혹은 하찮은 것이 된다. 그래서 그 집단화는 바로 그 객관성을 받아들이는 일을 포기하며, 또한 보편적인 원자론에 전적으로 조용히 머물 수 있게 된다. 교회와 국가의 계몽된 분리가 이런 문제에 아주 적절하게 맞아 떨어지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 (Glauben und Wissen a.a.O. 90).


98) F. Schleiermacher: Über die Religion (1799) 294ff.


99) F. Schleiermacher a.a.O. 293f.


100) G.W.F. Hegel: Begriff der Religion, hg. G. Lasson. PhB 59, 97-110, 참조 55f.


101) F. Schleiermacher: Der christliche Glaube (1821), 2.Ausg. 1803, §4와 §5.


102) F. Schleiermacher: Über die Religion, 1799, 243과 272ff., 특별히 277, 참조 D. Hume: The Natural History of Religion, 1757. 헤겔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할 것. Begriffe der Religion, PhB 59, 45와 54.


103) G.W.F. hegel: Begriff der Religion passim.


104) G.W.F. Hegel: Vorlesungen über die Philosophie der Religion 2: Die bestimmte Religion, hg. G. Lasson PhB 60과 61. 또한 다음을 참조할 것. R. Leuze: Die außerchristlichen Religionen bei Hegel, 1975. 헤겔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할 것. “Über die Religion", 1799, 259f.


105) F. Schleiermacher: Über die Religion, 1799, 295, 성육신 사상과 그리스도의 신인양성론의 결합에 대해서는 302쪽을 볼 것. 쉘링도 역시 1802년에 행한 아카데미 연구의 8번째 강의에서 신성과 인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를 이룬다는 것과 성육신 사상의 의미에를 강조했다. 물론 “참된 무한은 유한으로 돌입한다. 유한을 우상화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고유한 인격을 하나님께 희생으로 드림으로써 하나님과 화해하기 위해서 말이다.”(F.W.J. Schelling: Ausgewählte Werke 2(Schriften von 1801-1804), 1973, 526).


106) 그렇지만 헤겔은 “유한자가 영원으로, 또한 신적인 본성과 인간적인 본성의 일치로 받아들여는 데” 사회 개념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Die absolute Religion, PhB 63, 34, 참조 38). 여기서 사죄 개념은 바로 앞서 인용된 쉘링의 고찰과는 다르게 사용되었다. 쉴라이에르마허의 경우에 대해서는 그의 Der christliche Glaube, 1821, §11과 §91쪽 이하를 참조할 것.


107) G.W.F. Hegel: Die absolute Religion, PhB 63, 1ff., 또한 15. “이런 종교 안에서 종교는 그 자체가 객관적이다.”(Vorlesung von 1824). 이렇게 종교는 계시 종교다.(a.a.O. 19, Vorlesung von 1827), 동시에 하나님에 의해서 “계시된” 종교다(바로 앞의 곳). 이 양자는 절대 종교 개념에서 일부를 이루고 있다.


108) F. Schleiermacher: Über die Religion, 1799, 310.


109) F. Schleiermacher: Der christliche Glaube (1821) 2.Ausg. 1830, §89.


110) 이런 철학 체계의 발전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할 것. E. Herms: Herkunft, Entfaltung und erste Gestalt des Systems der Wissenschaften bei Schleiermacher, 1974, 이런 철학 체계의 여러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할 것. W. Dilthey: Leben Schleiermachers Ⅱ: Schleiermachers System als Philosophie und Theologie, aus dem Nachlaß hg. von M. Redeker, 1966.


111)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할 것. E. Herms a.a.O. 193-234, 특히 231ff.


112) W. Dilthey (Hg.): Aus Schleiermachers Leben. In Briefen etc. Ⅳ, 1863, 579.


113) F. Schleiermacher: Grundriß der philosophischen Ethik hg. A. Twesten, 1841, 3-37 (§§1-122).


114) 1804년 쉴라이에르마허가 쉘링을 비판하면서 제기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참조할 것. “대상의 영점(零點)이 과연 실재 학문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왜냐하면 모든 유한한 지식은 “갈라짐과 분리”의 영역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a.a.O. 584). 쉘링의 경우와 마찬가지로(저작선집 2,517) 신학은 쉴라이에르마허에 의해서 “절대적이고 신적인 본질에 직접 중재되는 학문”이 아니라고 이해되었다. 이것은 “영점을 객관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이와 달리 “실천적인 학문으로”, 즉 “교회를 지도하는” 과업에 연결된 학문으로 이해되었다(Kurze Darstellung des theologischen Studium, 1811, 2.Aufg. 1830, §§1-5). 그리고 신앙론의 경우에는 윤리에 적용되는 학문으로 이해되었다. 이 윤리는 인간적인 공동 교육의 형태에서, 즉 경건과 관계를 맺는 교회 안에서 작업하는 학문이다(Der christliche Glaube, 1821, 2.Aufg. 1830, §2, 2f.).


115) F.W.J. Schelling, 저작선집 2 (Schriften von 1801-1804), 1973, 501.


116) F.W.J. Schelling a.a.O. 503.


117) Friedrich Schleiermachers Dialektik hg. R. Odebrecht, 1942.


118) A.a.O. 11, 19ff. 쉴라이에르마허가 “지식을 전체적으로 부정하는 완전 회의주의”를 거부했다는 사실은(a.a.O. 111) 지식의 조건에 대한 한 연구에서 밝혀졌다. 다음을 참조할 것. F. Wagner: Schleiermachers Dialektik. Eine kritische Interpretation, 1974, 25.


119) F. Schleiermacher: Dialektik hg. Odebrecht 174ff. 사유된 것과 사유하는 자의 상이성은 이상과 실재, 주관과 객관의 대립에 상관된다.(19ff., 129, 135ff.). 이 상이성은 모든 논쟁의 조건들이다. 바그너(a.a.O. 33ff.)는 쉴라이에르마허가 “사유와 구별되어 대립해 있는 존재를 일종의 전망으로 전제하는 것”을 정당화 시키지 못했다고 안타까워 했다(34). 그러나 이 정당화는 “사유”에 대한 이해에서 판단이라고 자리가 잡혔다. 바그너는 쉴라에르마허가 의식에 대한 칸트의 진술에 연결되어 있다고 강조했는데(65ff.), 정당화 문제는 바로 이런 것과 밀접한 연관을 맺는다. 쉴라이에르마허에게 “사유”라는 표현은 실제로 자주 막연하게 사용되고 있다고 하는데, 이는 올바른 지적이다.


120) F. Schleiermacher: Dialektik hg. Odebrecht 129, 참조 155, 및 F. Wagner a.a.O. 58ff.


121) F. Schleiermacher a.a.O. 162f. “모든 지식의 완전한 연관이 주어지기 전까지는 완전한 지식도 주어질 수 없다.”(162). 참조 a.a.O. 62f.


122) F. Schleiermacher a.a.O. 177.


123) F. Schleiermacher a.a.O. 138ff. 그렇지만 쉴라이에르마허는 이성과 오성을 구별하지 않았다. 또한 대개 그가 오성에 대한 사유를 바라본 “이성”에 대해서 언급했다(F. Wagner 66ff.). 그는 “사유” 개념을 이 오성 사상에 제한시킬 수 있었다(Wagner 68ff.).


124) F. Schleiermacher a.a.O. 190ff. (참조 142, 144ff.). 바그너는 개념과 판단에 대한 논의로 넘어가는 과정을 가리켜 “중재되지 않은 것”이라고 그 특색을


125) F. Schleiermacher a.a.O. 312와 115.


126) F. Schleiermacher a.a.O. 91. 지식의 근원과 목표의 동일성에 대해서는 171쪽을 참조할 것.


127) F. Schleiermacher a.a.O. 245.


128) F. Schleiermacher a.a.O. 246ff., 267, 300ff.


129) F. Schleiermacher a.a.O. 253ff. 초월적 토대의 “네 양식”에 재검토하는 265ff.를 참조할 것. 이 양식들은 모두 충분한 상태에 도달되어 있지 못하다.


130) F. Schleiermacher a.a.O. 270.


131) F. Schleiermacher a.a.O. 275ff. 의욕과 존재를 조화시킬 수 있는 토대는 사유와 존재를 일치시킬 수 있는 토대와 동일해야만 한다(281). 칸트가 한편으로 실천 이성에 근거해서, 즉 의욕의 영역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현존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에 대한 비판은(281f.) 바그너(a.a.O. 132)에 의해서 거부당했는데, 이는 옳다. 왜냐하면 칸트의 경우에 실천 이성에 토대를 두고 제시된 하나님 현존에 대한 요청은 신관이 이론적 이성 앞에서 최소한 “무흠한 관념”을 형성한다는 사실을 전제하기 때문이라고 한다(Kr. r.V,B 669).


132) F. Schleiermacher a.a.O. 286ff., 특히 289. 쉴라이에르마허는 이런 의미에서 감정을 대상적 관계에 있는 느낌과 구별하며, 또한 자아의 반성하는 자기의식과도 구별한다(287f.). 참조 Der christliche Glaube, 1821,3과 4.


133) F. Schleiermacher a.a.O. 289 (Schleiermachers Notizen von 1822). 참조 Der christliche Glaube, 1821,4,3. 여기서는 감정을 의존감정으로 규정하는 것이 초월적 토대와의 관계에서 획득되는 게 아니라 절대적인 자유를 부정함으로써 획득된다.


134) F. Schleiermacher a.a.O. 296f.


135) F. Schleiermacher a.a.O. 297ff. 특히 300.


136) 다시 한번 각주 123을 참조할 것. 이런 사태에 놓여 있는 문제를 바그너(a.a.O. 123ff. 등에서)는 정확하게 짚어냈다. 


137) F. Schleiermacher a.a.O. 228, 바그너의 비판(a.a.O. 68ff.)을 참조할 것.


138) 동일성과 비동일성의 동일성이라는 양식은 우선 헤겔이 1800년에 쓴 체계적 단편에서 “결합과 비결합의 결합”이라는 표현으로 등장한다. 이 연결은 생명을 생산하는 것이라고 말이다(N348). 논쟁문헌에서는 절대를 표현하는 양식으로 등장한다(PhB 62a, 77).


139) G.W.F. Hegel: Phänomenologie des Geistes, PhB 114,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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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사도신경해설 17강 녹취록 - 3장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4) file 2009-04-05 30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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