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제 쇼트로프>


노아와 맺은 하나님의 계약

성서연구, 창8:20-9:17



물러간 대재난


우리의 아버지 세대들은 -어머니들은 극소수만 그렇습니다만- 성서를 성숙한 산업사회를 이끌고 갈 안내자, 즉 자연과학적으로 틀림 없는 말씀으로 읽었습니다. 그들은 성서의 고대사를 자연과학적인 입장과 비교해 보다가, 결국 어떤 하나님께서 어느 날 인간을 창조하기 시작하셨음을 더 이상 믿으려하지 않았습니다. 자연의 역사는 인간이 아주 오래 전 어떤 생명체로 부터 진화되었다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이제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과연 인간은 원숭이의 후손입니까? 성경은 하나의 신화에 불과합니까? 또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도록 강요받고 있는 건 아닐까요? 그러나 이러한 논쟁은 이미 끝나 버렸습니다. 아주 극단적인 근본주의자들만이 창조설화를 역사적 보도로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의 이유에서도 이러한 논쟁은 끝났습니다. 즉 우리는 더 이상 자연과학이 우리 인류에게 세계를 이해시키고 인류의 미래를 열어준다는 확신 속에서 성서를 읽지도 않습니다. 기술, 산업, 자연과학, 발명정신은 우리에게 공포를 가져다 줄 뿐입니다.

이제 우리는 성서를 전혀 다른 눈으로 읽습니다. 즉 산업화의 대열에 참여할 수 없었던 그런 여성들의 눈으로 말입니다. 우리는 희망에 대해 애타는 마음으로, 미래를 향해 등대불빛을 찾는 심정으로 성서를 읽습니다. 우리는 지나간 시대의 역사적 경험에서 나온, 더 정확히 말해서, 약 3천년 전 한 작은 유대족속의 역사에 담긴 이야기로 성서를 읽습니다. 왜냐하면 성서의 고대사는 그런 정도의 시대에서 시작했음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서의 고대사는 하나님이 아담과 이브를 풍요로운 동산에서 창조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아담과 이브는 무엇이 자기들에게 유익한 것인지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하나님께서는 그 보금자리에서 아담과 이브를 좇아내셨으며, 따라서 저들은 현실 앞에 놓이게 됐습니다. 혹독하게 노동해야했으며, 해산의 고통도 감수할 뿐만 아니라 불의에 시달리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고대의 불의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군림입니다(창3:16). 인간의 불의는 점점 눈덩이처럼 커졌는데, 이 사실을 우리는 카인이 자기 동생 아벨을 시기심으로 때려죽이는 데서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숫자는 불어나고 세대가 거듭되며 점차 많은 살인과 그에 따른 희생자들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카인과 아벨은 바로 인간의 역사를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카인은 아우 아벨을 ‘들로 가자’고 꾀어 들에 데리고 나가서 달려들어 아우 아벨을 쳐 죽였다. 야훼께서 카인에게 물으셨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카인은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하고 잡아떼며 모른다고 대답하였다.(창4:8,9).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아우쉬비츠나 여러 곳에서 우리가 살해한 수백만의 유대 형제와 자매가 어디에 있는가? 드레스덴과 히로시마에서 죽은 수많은 이들은 어디에 있는가? 보팔에서 독가스에 희생된 이들은 어디에? 아프리카에서 굶어죽어간 아이들은? 남아프리카의 흑인들이 사는 게토에서 죽어가는 그들이 어디에 있는가? 그렇습니다. 민중살해는 어쩌다가 있는 그런 특이한 일이 절대 아닙니다. 계획대로 진행될 뿐입니다. 독일 땅 위에는 오직 인간 살생만을 위한 무기들이 쌓여 있습니다. 원자 로켓이나 화학무기는 인간살생 외에 아무 쓸모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 땅 위에 아벨을 살해하려는 준비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동구에 사는 백성을 또 다시 파괴하고 말살하려는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동독, 폴란드, 러시아 등을 말입니다. 백성을 살해하는 것에 만성이 되어버렸습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독일 안에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땅 위에 끔찍한 전쟁이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불공평한 세계경제구조가 지난 날 식민지였던 백성들을 벌써 압제하였고, 이에 따라 저들의 일상생활이 파괴되고 있다는 사실을. 그런데 아직도 다음과 같이 믿고 있는 얼마간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장과 군비는 그저 상대에게 위협을 가하자는 목적일 뿐이라고. 굶주리거나 핍박당하는 자들은 저들 스스로의 잘못이라고. 그러나 이제 이러한 선전문구를 믿는 사람들은 더 이상 없습니다: 그런 선전의 소모품으로 전락해 있는 이들도 그 말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야훼께서 카인에게 물으셨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카인은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하고 잡아떼며 모른다고 대답하였다.(창4:9).


그러면 이제 우리가 해야할 일은 무엇이며, 내가 해야할 일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퍼씽미사일에 대항해서 아무 쓸모 없이 싸운 결과가 되었으며, 그 파멸의 길은 계속될 뿐입니다. 우리는 모두 정신이 나간 사람 처럼 되어버렸으며, 놀라자빠질 뿐입니다. 우리에게는 아주 짧은 유예기간 만이 남아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성서는 고대사 속에서 설명하기를, 살인하는 인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인내심이 어느 날 끝장났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으셨던 하나님을 저는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습니다. 저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한 인격 안에 카인과 아벨을 동시에 갖고 있으며, 불의를 통해서 부당한 이윤을 얻는 자이며, 동시에 그 희생자입니다. 행악지이면서, 동시에 희생자입니다.


그러나 야훼께서는 ‘네가 어찌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고 하시면서 꾸짖으셨다. ‘네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창4:10).


이 지구 땅덩어리는 지난 날 전쟁을 통해 피로 범벅이 되었고, 군용차의 디이젤 기름과 화학산업의 버려진 쓰레기, 그리고 석유덩어리들로 중독되어 버렸습니다. 우리의 지구는 피와 독으로 얼룩지고 말았습니다. 도대체 왜 내가 피로 물든 이 땅 위에 살아가야만 할 어린아이를 출산했을까요? 어떤 이들은 중독되어버린 이 땅 위에서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일은 다른 것이 아니라 전쟁뿐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 외에 더 해볼 만한 일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당시에 인간의 불의를 드러내셨습니다.


야훼께서는 세상이 사람의 죄악으로 가득차고 사람마다 못된 생각만 하는 것을 보시고 왜 사람을 만들었던가 싶으시어 마음이 아프셨다. 야훼께서는 ‘내가 지어낸 사람이지만 땅 위에서 쓸어버리리라. 공연히 사람을 만들었구나. 사람 뿐 아니라 짐승과 땅 위를 기는 것과 공중의 새 까지 모조리 없애버리리라. 공연히 만들었구나.’하고 탄식하였다.(창6:5-7).


하나님은 인간에게 대홍수를 당나게하셨습니다. 홍수대재난! 사십 주야의 홍수. 이 물은 높은 산 까지도 덮었습니다. 인간과 동물에게 이 재난은 쉽게 지나가버리는게 아니었습니다.

고대의 많은 사람들은 인간을 몰살시키는 대재난에 대해, 즉 큰 홍수나 큰 화재에 대해 말들을 했습니다. 저들의 두려움은 바로 우리 가까이에도 있습니다: 인간말살은 우리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바의 그것입니다. 우리는 전쟁과 자연파괴 앞으로 성큼 다가서고 있습니다. 핵겨울, 산성화된 땅, 오염된 공기는 동물과 식물세계를 파괴시킵니다. 생태학적 재난의 속도는 산술급수 정도의 속도가 아니라 이미 돌이켜 볼 수 없는 선상에 까지 도달했습니다. 처음에는 해당된 나무만 죽어갔지만, 오늘 날에는 숲 전체가 죽어가는 걸 발견할 수 있습니다. 소위 제3세계의 나라들에 있어서도 역시 자연이 파괴되고 있으며, 물과 숲과 땅과 짐승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바나나를 경작하는 밭 위에도 화학농약을 뿌리는 비행기가 날아다니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그곳에서 일하는 농부들은 평균 수명에 훨씬 못미치는 나이에 죽어가며, 땅 또한 중독되고 있습니다. 성서가 말한대로(창9:11 외) 모든 육체의 멸망을 우리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도대체 고대인들은 왜 오늘 우리가 두려워하는 모든 재난에 대해 보도하고 있는걸까요? 저들은 우리가 갖고 있는 것과 같은 두려움의 그 이유를 갖고 있지 못했는데도 말입니다. 당시에는 오직 지엽적인 재난만이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두개의 강이 만나는 지역에서 발생하는 홍수, 에집트 같은 곳에서의 가뭄과 작렬하는 태양정도입니다. 원자폭탄의 전쟁이나 핵겨울, 생태학적 재난이 없었는데도 그들은 왜 대홍수에 대해 말하고 있을까요?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이유는, 인간 상호간의 불의라는 면에서 볼 때 하나님에 대한 어떤 다른 개념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인간의 실상에 대해 알게 된다면 당연히 이러한 잔인한 현실들을 끝장내시는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입니다. 자신의 가정에서는 매우 다정다감한 남편이며 아버지인 어떤 사람이 히틀러 정권시절 제삼제국 공무집행 중에 유대인 학살 가스실의 책임자로 둔갑한다는 사실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장면 앞에서 저는 이 세상을 끝장내시도록 하나님께 오직 부르짖을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호기심을 갖고 1945년에 있었던 드레스덴 폭격에 대한 도큐멘트 영화를 텔레비젼으로 시청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미국 주간 뉴스 방송 가운데서 편집된 것이었습니다. 아나운서가 격앙된 목소리로 외쳐댔습니다. <여러분의 눈앞에서 한 도시가 죽어갑니다. 나치제국은 도시 도시마다 사라져 갑니다. ... city by city> 사람들은 사라져갔고 또 사라져갈 것입니다. 하나님은 끝장내야만 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역사가 말하고 있는 유일한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었습니다: <내가 창조한 인간을 지면에서 쓸어버릴 것이다.>

고대인들도 역시 망연자실, 당혹스럽게 자신들의 역사와 현재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직 핵폭탄을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벌써 잔인하게 압박하는 방법들을 통해, 즉 명예와 권력독점, 그리고 종속성과 나약성의 강요를 통해 두려움을 뼈속 깊이 경험했습니다. 저는 (후기) 로마제국에서 한 예를 찾고 싶습니다: 즉 인간의 십자가형입니다. 만약 서민층의 어떤 사람이 사회혼란을 야기시켰다면 -나사렛 예수처럼- 그는 고난받고, 공개적으로 십자가에 달리며, 고통스럽게 죽어갔고, 그의 시체는 원칙상 동물이 뜯어먹을 때 까지 십자가에 달려 있어야만 했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백성들에게 공포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왜 고대인들이 세상멸망에 대해 이야기 했는지, 왜 그들이 살인자들과 희생자들과 소심한 자들 가운데서 홍수로 멸절당하는 인간을 만나시는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 했는지 분명합니다: 이 물은 가장 높은 산꼭대기 까지 덮어야만 했습니다. 완전히 끝장을 내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노아홍수 이야기의 한쪽 편에만 해당합니다. 여기에 이 이야기가 담고 있는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즉 분명한 사실 그것은 바로 이 대재난이 지나갔으며, 우리 뒤로 물러갔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이제 절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노아홍수와 노아와 나눈 확실한 계약의 본문들은 보증들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다시는 결코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다시는 결코. 우리는 대재난에서 벗어난 자들이며 용서함 받은 자들이지, 정죄받은 이들이 아닙니다. 노아홍수를 알고 그걸 두려워하던 이들은 이제 이후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재난에 대해 예상할 수 있는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이 재난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땅이 있는 한 뿌리는 때와 거두는 때,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밤과 낮이 쉬지 않고 오리라.>(창8:22).

오직 하나님의 약속만이 우리를 인간역사가 만들어가는 비참한 결과로 부터 떼어놓으십니다: 세계에 편만한 살인사건, 중독, 파괴로 부터 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그 인간이 저지른 사건 사이에 거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은 죽음의 웅덩이를 팠는데 하나님은 그 댓가를 갚지 않아도 되도록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는 우리를 붙잡아 주실 것입니다. 그는 인간이 삶을 완성할 수 있도록 싸우십니다. 그러므로 대재난은 과거지사입니다.


현실적 조건 가운데서 행한 하나님의 두 번째 창조


성서는 아담과 이브의 후손들이 익사당했다고 전합니다. 오직 한 가족만을 하나님이 살리셨습니다: 의로운 사람 노아의 가족이었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인류의 조상이었던 것 처럼, 노아와 그의 아내도 오늘날 인류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아의 아내는 성서에 여러번 언급되고 있으나 이름도 없고 인상착의도 없습니다. 성서는 가부장적인 언어로 말합니다. 왜냐하면 성서도 가부장적인 세계에 뿌리박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아는 그의 아내와 아들들과 며느리들에 의해 수종을 받습니다(창6:18 이하). 저들 일행이 자손 번식에 아무 쓸모 없는 늙은 여자를 함께 방주에 승선케했다는 사건에 대해 기쁨을 감출 길 없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방주는 오직 한 가지 일, 즉 창조를 위해 생물학적인 가능성을 가진 인간과 동물만이 구원받기 위해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종류의 짐승 한쌍 씩 말입니다. 오늘날도 이러한 방주와 같은 사고방식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직 출산할 수 있는 여자들만이 앉아 있는 방공호 말입니다. 노아 홍수 이야기는 놀랍게도 오늘날 대재난에 대한 기대와 어떤 유대성을 갖고 있지만, 본인은 그것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 늙은 노아부부와 아들들, 그리고 며느리들이 새 인류의 조상입니다. 여기에는 우주보편적인 인간이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노아의 아들인 셈, 함, 야벳은 성서의 관점에서 볼 때 세계 모든 민족을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을 통해 하나님은 새로운 시작을, 즉 현실적인 조건 아래서 두 번째 창조를 실행하십니다. 현실적인 조건이란 바로 죄의 권세가 인간을 휘어잡고 있음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란 다음과 같은 성구를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어려서 부터 악한 마음을 품게마련,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 다시는 전처럼 모든 짐승을 없애 버리지 않으리라.>(창8:21).

이 말씀에, 성서가 오용당하는 충격적인 역사를 갖고 있듯이, 벌써 큰 좌절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말하기를 <사람의 마음의 계획(도모)하는 바가 어려서 부터 (오직) 악함이라.>고 루터는 번역했습니다(창8:21, 6:5).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인간은 항상 죄인이고 따라서 억압이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악하기 때문에 소위 자본주의 경제제도만이 작용할 수 있다는 겁니다. 오직 자본주의만이 모든 개개인에게 그 욕구에 따라, 그 소유욕에 따라, 그 이익에 따라 적용됩니다. 그래서 자본주의만이 인류의 그 어떤 경제제도 보다도 훨씬 능률적으로 운용된다고 합니다. 소위 현실 사회주의의 역사는 이런 기초적 사실들을 늘 증명해 온 셈입니다. 자본주의를 합리화하기 위해 우리는 동독에 대한 우리의 우월한 입장을 사용합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소시민들에게 착취할 것이 없는 곳에서는 시민들의 일상생활이 궁색하고 비참하기 마련입니다. 예컨대 서독이 수입해 온 치키타(Chiquita)의 바나나를 동독이 수입해 온 쿠바의 작고 회녹색갈의 바나나와 비교해 보십시요. 프로기질로 자극받지 않는 곳에서는 인간이 수동적으로 행동하고, 천박하게 굴며, 철저하게 나태하여질 뿐입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이러한 신학적 주장은 (왜곡된) 성서구절에 기인합니다. <사람의 마음의 계획과 도모함이 어려서 부터 악함이라.> 인간을 이러한 악한 요소에 근거해서 해석하고 적용시킬 때만 인간은 생산적인 방향으로 작동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에 대한 성서적 전통으로 볼 때 인간은 구원받지 못할 존재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죄에 대한 이러한 잘못된 이해가 본인에게 있어서도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인간 마음의 악함을 어떻게 다루어왔는지에 이 자리에서 더듬어 보려고 합니다. 니카라구와는 지난날의 칠레처럼 파괴되었습니다: 서독에 대해 미국의 군사적 원조가 증가되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 예컨대 마인쯔-핀텐과 바케른하임의 농부들이 저들의 과수원을 지켜내기 위해 숨가쁘게 투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군사적 관심이 필경 승리하리란 것을 저는 세계 2차대전 당시 어린 아이였을 때 이미 경험했습니다. <사람 마음의 계획과 도모함이 어려서 부터 악함이라.>

저는 잠시 마음의 악함이라는 성구말씀을 오용하고 있는 전통적 성서해석을 언급해 보려고 합니다. 제가 속해 있는 신학자협회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이 협회는 남성신학자들을 말하는 것이지 여성신학자들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오늘에 이르기 까지 여성신학자들은 그 어떤 것도 의견을 내세우거나 결정할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서 안에서 볼 때 죄란 극복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학자들은 수 세기 동안 서로 사이 좋게 공모하여 죄론을 완벽하고 거창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복음을 기쁜 소식으로 생각합니다: 즉 당신은 죄인이라는 명제를 말입니다. 토마스 만(Thomas Mann)은 (19세기의 풍자시 형식을 빌려) <부덴부륵스, Buddenbrooks>에서 신학자들의 이런 신학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나는 올바른 불량배요.

죄로 물든 참된 불구자올시다.

자기의 죄를 잡아먹고 사는.

오, 주여, 개자식 같은 나를 붙드시어,

은혜의 자리로 인도하소서.

그리고 죄로 멍텅구리가 된 나를 들어

당신의 은혜의 자리로 이끄소서.


이것은 일종의 풍자적인 묘사에 불과하지만, 그는 사실에 입각해서 쓰고 있습니다. 아울러 알아야할 것은 바로 이것이 오늘날에도 역시 남아있는 기독교 신학의 반유대적, 반(反)셈적 전통이라는 사실입니다. 당신은 죄인이요. 이 말은 우리 삶의 현실 속에서 아무 것도 변화될 수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는 모든 것이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새로울 것입니다. 당연히. 오직 여기에 모든 것이 옛 것으로 남습니다. 그리고 악한 것으로 남습니다. 당신은 죄인이요. 다른 것을 생각지 마시오. 당신은 그 어떤 것도 변화시킬 수 없오.

저는 이 문제에 대해 계속 말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첫째로 제가 속해 있는 신학자협회의 무관심을 자극하는 것이 나에게 흥미 있는 일이며, 둘째로 이것은 바로 여성들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많이 배우고 학문적으로 세련된 우리 신학자들은 여성을 남성 밑에 잡아두기 위해 성서적으로 합리화하는 고된 작업을 조금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후에 이브는 형벌을 받았습니다. 아담이 바로 그녀의 주인이며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창3:16). 이 말씀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여성멸시 작업이 강화됐습니다. 이는 바로 이 세상이 죄의 상태에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귀결이었습니다. 즉 여성은 남성과 똑같은 인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동등해지려는 마음과 해방되려는 욕망은 복음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고린도에서는 사도 바울이 우선적으로 도적적인 훈련을 시켜야만 했던, 해방되려고 노력하던 여성들이 있었습니다. 이 내용은 오늘날 신학생들의 졸업시험에 종종 출제되고 있습니다. 수 대에 걸쳐 신학자들은 일치단결해서 (신학적 논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성구에 대한 물샐틈없는 방벽을 쌓아놓았습니다. 이 방벽으로 어느 누구도 성서 안에 있는 해방의 능력을 발견할 수 없도록 말입니다. 여기서 저는 가장 기초가 되는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고린도전서 7장20절은 예외 없이 <그러므로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십시요.>라고 번역됩니다. 노예와 여성들은 엉뚱한 생각을 품으면 안 됩니다. 당신이 여성으로 부름을 받았으면 하위질서에 머무를 것이며, 노예로 부름을 받았으면 충실히 당신의 주인을 섬기십시요.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런 번역과 이런 신학은 성서본문을 지나치게 극단적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헬라어 Klesis는 신분을 뜻하는게 아니라 소명을 뜻합니다. 이것은 모두 각자 하나님의 소명 안에, 그리고 종에서 그리스도의 자유인으로 만드는 하나님의 선택 안에 머물러야만 한다는 것을 뜻하는데, 이 하나님의 선택은 낮은 계급에 속한 사람들을 향한 것입니다. 이 말의 해방하는 능력을 제거하기 위해 너무 많은 철학적 낭비가 있었습니다. 제가 믿기로는 내일이라도 당장 어느 누가 이 낱말을 새롭게 보수적으로 해석하는 신학박사 학위논문을 쓴다면 그는 그 다음날 신학교수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성구 오용은 지나간 역사만으로 충분합니다.

성서의 고대사는 죄와 해방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카인이 살인을 계획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잘했다면 왜 얼굴을 쳐들지 못하느냐?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잘못 먹었다면 죄가 네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릴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그 죄에 굴레를 쒸워야 한다.(창4:7).


성서의 고대사에 따르면 죄란 피할 길 없는 그런 숙명이 아닙니다. 그것은 문지방에서 도사리고 있는 마귀 같은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극복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무엇이 삶에 유익하며, 무엇이 악한지 결정할 수 있습니다(창3:22). 그리고 이 능력을 사용해야만 합니다. 성서는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죄인이다. 성서는 오히려 그 죄는 정복되어질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현실적인 조건 속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두 번째 창조는 하나님의 거대한 신뢰행위입니다.


사람 마음의 되어지는 바가 어려서 부터 악할찌라도, 나는 사람으로 인하여 이 땅을 더 이상 저주하지 않으리라.


하나님은 환상에 사로잡히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나무를 바라보는 한, 햇살의 따스함을 느끼는 한, 하나님의 창조를 보면서 우리의 가슴이 웃는 한, 우리는 우리가 오직 살인자만은 아니라고 우리를 믿어주시는 하나님의 가시적인 증표를 봅니다.


땅이 있는 한, 뿌리는 때와 거두는 때,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밤과 낮이 쉬지 않고 오리라.


이 땅이 산성비와 화학비료로 인해서 얼마나 큰 위협을 받고 있는지 알고 있지만, 저의 가슴은 아직 웃고 있습니다. -이 끔찍스런 경지정리 후의 포도원 언덕을 바라볼 때도 말입니다. 저는 결코 하나님에 대한 신뢰증표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지금 까지 제가 말씀드린 성서의 고대사에다가 몇 백 년 후에 유대의 한 제사장이 또 하나의 해석을 덧붙였습니다. 이 자료는 (이른바 J자료) 유다가 작은 농경씨족사회로 부터 중앙집권적 행정과 관료와 상비군으로 짜여진 왕국시대로 변화해 갔을 때 그 사회가 포악해져가는 문제점을 가장 철저하게 불신했던 사람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제사장 계급에 속하는 주석자는 전혀 다른 백성들의 상황 속에서 말했습니다: 바벨론 제국에 의해 정복당했고, 백성의 일부가 포로로 잡혀갔으며, 승전한 바벨론 사람들 사이에서 외국노동자로 살아가는 상황입니다. 이 제사장은 저들이 노예로 살아가고 있지만 어디에서나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는 걸 말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노아와 함께 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동물에게 약속을 주십니다. 인간은 동물을 지배해야 한다는 이 말을 우리는 오늘날 다른 귀를 통해 듣습니다. 왜냐하면 식물과 동물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은 우리를 창조의 몰락 끝으로 이끌어가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 동물에 대한 지배권은 무죄한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인간, 동물, 식물은 일종의 생명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식물과 동물을 통해서 양식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인간은 음식물을 취하고 성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배자의 뜻에 따라 될 수 있는대로 약자로 머물러야 하는 노예들에게 한 제사장이 이와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 하여금 말씀하시게 합니다. <너희는 많이 낳고 번성하거라. 땅 가득히 퍼져 (땅을 정복하여라)(창9:1,7)>. 교황에 의한 피임약의 금령은 거기서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교회가 기아와 전쟁에 대해 전력으로 대항하지도 않으면서, 태아에 대해서는 가면적으로 염려한다는 사실이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노아와 나눈 하나님의 계약은 죽음에 항거한 것이며,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모든 인간의 생명에 대한 것입니다.


이제 나는 너희와 너희 후손과 계약을 세운다. 배 밖으로 나와, 너와 함께 있는 새와 집짐승과 들짐승과 그 밖에 땅에 있는 모든 짐승과도 나는 계약을 세운다. 나는 너희와 계약을 세워 다시는 홍수로 모든 동물을 없애 버리지 않을 것이요, 다시는 홍수로 땅을 멸하지 않으리라.(창9:9-11).


새들과 야수들, 모든 짐승도 이 계약 안에 포함됩니다. 토끼와 밤꾀꼬리는 우리에게 확신을 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지키신다는 것을. 가장 작은 새라고 하드라도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자라는 것을. 우리에게 머리를 들라고 말합니다. 죄와 죽음은 극복될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리멜스하우젠(Grimmelshausen)은 30년 전쟁에 대해 말합니다. 마을에서 벌어졌던 고문과 살인에 대해서 말입니다. 한 어린아이가 전쟁을 통해 외로움 속에 미쳐갑니다: Simplicius. 외로운 사람. 어느 날 저녁 숲속에서 어떤 은자가 노래하는 것을 듣게 되는데, 그 노래 안에는 죽음에 대항하는 노아의 약속이, 생명의 약속이 강조되고 있었습니다. 그 노래의 밤꾀꼬리는 노아의 하나님을 향한 예찬의 목소리를 음습한 전쟁의 와중에서 외쳐대고 있습니다:


오라. 밤의 위로자여. 오! 나이팅게일!!

평화를 알리는 너의 목소리를

사랑스레 울려다오.

오라. 오라. 그리고 너의 창조자를 찬양하라.

왜냐하면 다른 새들은 잠에 빠져버렸기에.

그리고 더 이상 노래하려들지 않기에.

너의 작은 목소리를 크게 울려다오.

그리고 모든 것 앞에서 찬양할 수 있으리오.

저 높은 곳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당신의 작은 목소리를 크게 울리십시오. 당신의 목소리와 머리를 반듯이 쳐들고 우리가 당면해 있는 전쟁의 한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인간, 짐승, 식물에 대항한 탐욕의 전쟁 속에서. 그 은자는 계속 노래했습니다:


햇살이 사라지고

그리고 우리가 어둠 속에 있어야 할지라도,

그래도 우리는 노래할 수 있노라.

하나님의 선하심과 능력에 대해서.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는데

어둠이 우리를 방해할 수 없기에.

그러므로 너의 작은 목소리를 울려다오.

그래서 모든 이들 앞에서 너는 찬양할 수 있노라.

저 높은 곳,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을.


이윤과 힘의 관심 때문에 인간과 동물과 식물의 생명을 파괴하는 탐욕의 전쟁 속에서도 우리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증거로서 새의 노래를 들으며, 생명의 약속에 대한 확증으로서 하늘에 있는 별들을 봅니다. 인간의 욕망과 권력은 이 별들을 붙잡으려고 했습니다: 별들의 전쟁은 계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별들은 분명 하나님의 생명에 대한 약속의 증표입니다.


하늘의 별들은

하나님에 대한 예찬을 증거하라.

그리고 그에게 영광을 확증케 하라.

노래하지 못하는 부엉이 역시

저들의 부엉이와 함께 증거하라.

저들 역시 하나님을 찬양하리라는 것을.

그러므로 너의 작은 목소리를 울리게하라.

그리고 모든 이들 앞에서 너는 찬양할 수 있으리라.

저 높은 곳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이 부엉이의 목소리는 저의 가슴을 따뜻하게 하여 웃게 만듭니다.


형제를 돌보는 여성


하나님이 카인에게 물으셨습니다. “어디에 네 아우 아벨이 있느냐?” 카인이 대답하기를 “내가 알지 못합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살인자의 길은 이 처럼 간단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생명을 약속하는 길도 또한 이 처럼 간단합니다. 저는 형제를 지키는 여성입니다. 물론 이 말은 남성들도 저의 자매와 형제를 지키는 자임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우리 여성들에 대한 어떤 가능성에 관해 숙고해야할 그 무엇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면 남성들은 여성들에 대해 충분히 이해해야 합니다. 저는 여기서 남성들이 생태적으로 고약한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것을 말하려는게 아니라, 저들이 남녀를 구별하는 기능과 교육과 작업을 통해서 더 심각하게 카인의 운명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는 것을 밝히고 싶을 뿐입니다. 저들은 이 문제를 점점 어렵게 만들어 갑니다. 사람들은 남성에게 경력을 쌓아가야하며, 그렇지 못할 때 아무 쓸모 없는 인간이 된다고, 또한 여성들에게는 아이를 낳아서 바르게 키워야 하며, 가족의 시중을 들어야 하며, 환자를 간호해야하며, 전쟁의 뒤치다꺼리를 도맡아야 하고, 새 집을 지어야 한다고 주입시킵니다. 여성의 역할은 그것을 규정하는 사회에 의해 여성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합니다. 그 역할이라는 것은 하부구조, 즉 자본주의와 불의와 전쟁 등과 같이 남성에 의해 만들어진 힘의 조직 밑에, 다시 말해서 남성의 지배 밑에 놓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카인의 길을 버리고 마틴 루터나 여러 성자들과 같은 길을 가는 많은 남성들이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은 사실도 주시해야 합니다: 자본주의, 전쟁, 무력, 불의 등은 남성의 일이며, 모두 비슷비슷해 보이는 남성에 의해 대표되고 조직된다는 것 말입니다. 좀더 멀리 내다 볼 줄 아는 사람으로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좋은 옷감으로 만든 양복, 흰 와이셔츠, 고급 넥타이, 서류가방, 이러한 것들은 남성을 만드는 국제적인 가면들입니다. 또한 이들이 숨쉬는 공기는 항상 적절히 조절되어 있습니다. 공항, 일류호텔, 사무실, 강의실 등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어린아이로 부터, 땅으로 부터, 오물 덩어리로 부터, 늙음으로 부터, 죽음으로 부터 멀리 멀리 도망치고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동구라파의 지배자들도 역시 거의 이와 비슷한 인공적인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대학과 대중매체 속에 구축되어있는 경제와 소위 큰 정치와 군비 같은 것에 연루되어 있는 세계는 그들에 의해 주목받고 있는 힘의 게토입니다. 드레스덴을 폭파한 어느 전투기 조종사는 말하기를 자기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모든 것은 계획되었을 뿐입니다. 겨우 수 분, 수 초가 흘렀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서 모든 것이 박살나버렸습니다. 그는 도시가 불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게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저는 모든 남성의 배경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이 그 남성들을 지켜낼 수 있으리라고 순박하게 생각할 수만은 없습니다. 그러기에는 그 여성들이 이 세상에 너무 깊숙이 빠져들었으며, 또한 그런 일을 하기에는 너무 외롭다는 말씀입니다. 전쟁을 일삼는 남성들을 평화로 이끌어내기 위해 남편과 별거했던 뤼지스트라타의 꿈은(Lysistratas Traum, 아리스토판의 고대 코메디에 나옴) 유감스럽게도 아직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그 꿈이 그렇게 아름다운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여성들 입장에 서고 싶습니다. 여성들이 참여하는 많은 단체가 있습니다: 평화단체, 여성단체, 평화를 위한 여성들, 여성-남아프리카-행동, 여성노인복지 같은 것들입니다. 그런데 문제점은 상당히 많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교회 안에서 여성들의 역할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사실 지교회에서는 여성들이 남성들 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교회의 간부급에는 남성보다 여성이 더 많습니다. 그러나 거기서도 벌써 하부구조가 시작됩니다: 관리와 재정과 사업계획에 대해서 더 많은 경험과 능력을 갖춘 남성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역시 대화에 대해 더 많은 훈련과 더 많은 자신감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능력을 발휘해야 할 여러 종교회합 등에서는 이미 남성들이 절대적으로 많이 활동합니다. 능력을 갖춘 사람들은 훨씬 앞서기 마련입니다. 여성들은 그런 남성들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만약 특별한 분야에서 어떤 여성이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뽑히게 되는 경우에도, 힘을 가진 남성들에 의해 단번에 또 다른 여성 경쟁자가 등장하게 됩니다. 남성들에 의해 선택된 이 여성은 더 유용하며, 적당한 여성으로서 남성들이 모든 질서를 옛 전통대로 유지할 수 있도록 쉽게 해줍니다. 남성들은 <아니요. 우리는 그 어느 것도 여성들에게 반대하는 것이 없오.>라고 위선적으로 말합니다. 경쟁자로 등장한 이 여성, 그는 책략적인 술책의 제물로서 속히 끝장나 버립니다. 어중간한 여성들은 뽑히지도 않습니다. 마지막 효과는 총회차원에서 나타납니다. 즉 권력에 대한 관심으로 눈이 먼 남성들이 이런 일을 합니다. 아마도 그들은 어둠으로 나타나지 않고 대신 성직자의 모습으로 보일 겁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여성들이 동조하지 않으면 그들은 벌써 끝장났을 것입니다.

여성들은 아무리 상황이 나쁠지라도 스스로 조직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사실 우리 여성들은 이런 일에 전혀 훈련을 받지 못했으며 경험도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가능합니다. 이 가능성의 경험을 저 혼자만으로는 할 수 없었습니다. 저를 밀어주는 자매들이 없었다면 저는 벌써 중도에서 포기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을 경험했는지 설명해 보겠습니다: 교회소속의 어떤 조직체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있다고 합시다. 그들은 저 같은 사람들이 이 사회 속에서 끝장나는 중요한 안건에 대해 듣습니다: 이는 하나의 공산주의식과 비슷합니다. 그녀는 열정적이며,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여성은 이 안건에 대해 남성보다 더 침묵하도록 요청된다는 사실을 저는 경험하고 있습니다. 여성들은 가끔 이 모임에 초청되기도 하지만 항상 그렇지는 못합니다. 그녀들은 나에게 확실히 말하기를, 당신은 중요합니다, 우리는 당신 편입니다, 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것으로 나를 강하게 만들기에 충분합니다.

저는 이 약속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나운 생명의 계약이 시작되기 위해 등장하는 두 종류의 인간이 출발하는 걸 믿습니다. 이것은 죽음 까지도 정복하게 됩니다. 사회에 의해 항상 저지당하던 여성의 역할은 양립적입니다. 한편에서 볼 때 여성들의 역할은 푼돈처럼 아주 사소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성들은 그것으로 번성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여성들은 직업적인 출세나 경력에 있어서 그 무엇을 가치있게 하는데 별로 능력이 없다고 일반적으로 증명되어왔기 때문에 우리는 형편없는 인간으로 간주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작은 놀이터라도 이용해야 합니다. 사실 사회적으로 주어진 여성의 역할은 강제력 밑에 설정되어 있습니다. 여성들은 힘을 행사할 논리를 전혀 갖지 못 합니다: 대화, 관리, 성취, 성공하는 일 등에서 말입니다. 여성으로서 선두주자가 된다 하드라도, 즉 개인 옷장에 비단옷이 즐비하고, 서류 핸드백을 들고, 잘 다듬어진 손 안에 비행기 표를 갖고 있다 하드라도 이것은 생명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별로 쓸모가 없습니다. 우리 여성들은 힘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과는 다른 힘입니다. 이 세상을 마지막 마을 까지 정복해가는 그런 폭력행사의 힘이 아니라, 생명을 약속하는 한분 하나님이신 바로 그 하나님의 힘입니다.

노아의 이야기 속에는 생명의 상징인 무지개가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생명의 약속은 하나의 비젼 가운데 나타납니다.


이것은 내가 나와 너희 모두들, 그리고 너희와 함께 하는 모든 생물에게 영원히 주는 약속의 증표다: 구름 속에 내 무지개를 세운다. 그것은 나와 대지 사이의 약속을 말하는 증표임에 틀림없다. (창9:12,13)


하나님이 대홍수를 일으키시고 인간을 멸망시키셨을 때 그는 전쟁의 하나님으로 행동했습니다. 그는 이 사회의 어느 한 신이 그랬을법한 대로 행동했습니다. 그는 활을(무지개를 뜻함) 구름 속에 감추었습니다. 무장해제를 시켰다는 말입니다. 그는 인간의 사악함이 항상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창조의 생명을 위해 무기 없는 어려운 싸움에 돌입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매순간 살인사건이 터집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 산업국가로 부터 착취당하고 있는 이 불의한 구조 밑에서 매순간 죽어가고 있는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와 밀착되어 있는 독재자의 약탈 가운데서도, 대도시의 슬럼가에서도 말입니다. 내일 당장 중부 유럽에서 전쟁이 발발한다 해도 우리는 별로 이상스럽게 여기지 않을 겁니다. 우리에게 별로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아주 짧은 순간만 남아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짧은 시간을 정말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죽음이 칠 마일장화를 신고 행군해 온다해도 우리의 이 작은 총총걸음은 훨씬 빠릅니다. 이 작은 생명의 약속은 하나의 강력한 효력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시간이 더 이상 없습니다. 그저 한번의 아주 긴 호흡을 갖고 있을 뿐입니다. 전쟁의 와중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밤꾀꼬리와 부엉이의 긴 호흡을 말입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121 사도신경해설 16강 녹취록 - 3강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3) file 2009-04-05 3078
120 사도신경해설 15강 녹취록 - 3장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2) file 2009-04-05 3136
119 사도신경해설 14강 녹취록 - 3장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1) file 2009-04-05 3597
118 사도신경해설 13강 녹취록 - 2장 하나님을(4) file 2009-04-05 3256
117 사도신경해설 12강 녹취록 - 2장 하나님을(3) file 2009-04-05 2920
116 사도신경해설 11강 녹취록 - 2장 하나님을(2) file 2009-04-05 2834
115 사도신경해설 10강 녹취록 - 2장 하나님을(1) file 2009-04-05 3351
114 사도신경해설 9강 녹취록 - 1장 나는 믿습니다(7) file 2009-04-05 3056
113 사도신경해설 8강 녹취록 - 1장 나는 믿습니다(6) file [2] 2009-04-05 2826
112 사도신경해설 7강 녹취록 - 1장 나는 믿습니다(5) file 2009-04-05 2917
111 사도신경해설 6강 녹취록 - 1장 나는 믿습니다(4) file 2009-04-05 2889
110 사도신경해설 5강 녹취록 - 1장 나는 믿습니다.(3) file [1] 2009-04-05 3182
109 사도신경해설 4강 녹취록 - 1장 나는 믿습니다(2) file 2009-04-05 3298
108 사도신경해설 3강 녹취록 - 1장 나는 믿습니다(1) file 2009-04-05 4181
107 사도신경해설 2강 녹취록-머리말(2) file 2009-04-05 3630
106 사도신경해설 1강 녹취록-머리말 file 2009-04-04 3881
105 사도신경해설 강의 책자 file 2009-04-04 3990
104 신학과 철학 6강 스토아 철학과 기독교 사상 2009-04-03 6631
»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 <번역> 노아와 맺은 하나님의 계약 2009-04-03 3796
102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 <번역> 차례, 머리말 (외) [2] 2009-04-01 3348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