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강 녹취록-머리말(2)

사도신경해설 조회 수 3635 추천 수 0 2009.04.05 00:05:29

판넨베르크의 사도신경 해설 제2강 (080905) - 머리말(2)

판넨베르크 사도행전해설 두 번째 시간입니다. 두번째 시간입니다. 두번째 인데 앞으로 이렇게 숫자를 기억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강의안에다 숫자를 카운트하면서 좀 해보기는 하겠는데 모르겠습니다. 숫자가 열댓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상당히 숫자가 나갈것 같아서 숫자를 기억할 수 있을 지 모르겠어요. 어쨌든 처음 강의이기 때문에 제가 몇번째 강의라고 말씀드릴 수 있는 것 같아요.

지난 번에 토요일에는 저녁 6시 되기 전에 한시간 녹화를 했어요. 기억하시겠습니다만 가정예배가기전에 조금했는데 오늘은 다른 일이 조금있어서 낮에요. 하나도 못하고 지금 7시 25분입니다. 30분 가까이 되어가는군요. 그래서 이 서재 바깥에 내다 보이는, 숲은 보이지 않구요. 멀리, 커튼을 옆으로 보면 멀리 하양쪽에 불빛이 주로 아파트 불빛 그런 것들만 보입다. 지금 제가 강의하기 위해서 전화기 꺼놓았구요. 핸드폰이 어디있는지 몰라서 끄지 않았습니다. 바라기는 전화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두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번 첫 번째 시간에 다른 이런 저런 이야기감가 많아서 머리말 첫 번째 패러그래프만 마치지 못가고 마지막 세 가지 중요한 요소 그런 것만 제시만하고 그 설명을 그 다음시간에 하겠다고 말씀드렸어요. 제가 지금 그 책은 가지고 있지 않구요. 복사, 프린트해서 가져왔습니다. 제 책을 지난번 월요일 안동에 있는 경안 대학원신학교인가요. 하여튼 대학원 제도로 나가는 신학교 강의가 있어서 갔다가 그 학생들이 사도신경 해설책을 갖고 있지 않아서 복사해서 쓰라고 하고 제가 이번 녹화한 것을 깜박한 채 그냥 왔습니다. 그래서 이제 책은 가져나오지 못하고 프린트만 해서 가져왔는데 익숙하지 않아서 다른 약간 저는 편하지 않는 것 같네요.

첫번 패러그래프를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이 책 <사도신경 해설>은 1965년부터 마인쯔 대학교와 뮌헨 대학교 신학부에서 여러 번 강의한 내용이다. 이 책의 목적은 오늘도 여전히 많은 기독교인들이 매 주일 예배 시마다 암송하고 있는 사도신경에 대한 현대적 비판과 해석을 우리 기독교 신앙의 전통과 중재시키려는 것이다.

이것을 이런 작업을 위해서는 세가지가 필요한데 그걸 제가 오늘 자세히 설명한다고 했어요.

우선 이 사도신경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의미를 적절하고 실질적인 방식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네. 이게 이제 사도신경이라고 하는 이 텍스트를 해명하려고 하는 이 판넨베르크가 제시한 첫 번째 작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이 사도신경 해설에만 머무는 게 아니라 어떤 텍스트를 가지고 하는 모든 작업에 공동으로 요구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설교도 역시 텍스트를 가지고 하는 것이죠. 성경공부도 그렇고 또 교회사 연구 작업도 그렇고요. 인문학은 거의 다 이러한 텍스트를 가지고 하는 작업입니다. 이 텍스트를 해석하기 위해서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작업이 뭐냐? 바로 그거죠. 그게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의미를 적절하고 실질적인 방법으로 살펴보아야 된다고 판넨베르크가 이야기 했습니다.

요거를 사실은 독일어 버전을 가지고 설명하면 좋겠는데 우리는 뭐 시간이 많으니까 고런 것들도 같이 연관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아직까지 제가 녹화하는 게 문자를 쓸 수 있는 도구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 교유한분이 은빛직유인가 거 왜 조교로 지난 6개월 동안 수고하신 분이 고거를 지금 찾고 있어요. 글도 쓰면서 강의를 하고 하는 것을 고게 잘 정리되면 강의를 좀 편하게 천천히 필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써가며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친구가 하는 작업이 노트북에다가 하여튼 뭐 제가 자세한 것을 잘 모르겠습니다만 노트북을 전문적으로 강해하는 방식으로 하여튼 이건 그러한 틀, 도구인가 그런 방식으로 가져와서 해준다고 하더라고요. 지난 주일날 한번 실험해보기는 했는데 조금 맞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고기 내가 글을 쓰려고 하려고 커서를 글씨로 해보려고 고 순간에는 동작이 멈추는 거예요. 고게 뭔가 한 주간 더 연구한다고 했는데 그게 잘 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사도신경도 그렇고 제가 노트북하나 들고 가면 강의하는데도 녹화할 수도 있고요. 시시때때로 심심할 때 제가 이 서재나 이 아파트 거실 나가서 간단간단한 것도 녹화할 수 있습니다. 편하게 할 수 있어요. 평소에 갑자기 떠오르는 그러한 것들도 신학단상이랄까 그런 방식으로 녹화를 하면 그것을 동영상으로 내보낼 수 있습니다. 지금은 제가 글을 쓸 수 없어요.

그리고 원서는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글라오벤 믿는다 베켄트니스 고백인데요. 어딘가 있을텐데. 아 옆에 있군요. 잠깐만요. 요 책입니다. 보시겠어요? 보이나요? 볼파르트 판넨베르크. 이상하네요. 이렇게 찍으니까 거꾸로 나오네요. 아 이게 지금. 이 캠코더가 보통 찍는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제가 혼자 셀프로 해서 거꾸로 나오는 것 같습니다. 하여튼 요 책인데요. 그 단어가 무엇으로 되어 있는지 확인하겠습니다. 이 용어들이 참 중요해요. 그런 것을 하는데 주로 어떻게 하느냐 방법이 첫 번째였던 거죠. 근원적인 의미를 찾는 작업, 실질적인 정보를 제공해주는 거죠. 제가 근원적인 의미가 뭐냐 하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이 독일어책을 보았어요. 이렇게 되어 있네요. 위버텐 워 수퍼레니신 진. 발음이 잘 안되네요. 오랜만에 안하다 하니까 그러네요. 보통 근원적인 의미라고 하는데 독일어에 뉘앙스가 특별하게 있습니다. 이게 번역의 한계인데 잘 전달이 되지 않습니다. 한 것이 있습니다. 의미라고 했잖아요. 근원적인 의미, 여러분이 강의안 그것을 들여다보시면서 들으시기 바랍니다.

단어 개념이 정말 중요합니다. 물론 전체적인 윤곽을 파악하는 것도 중요한데 하나하나의 용어 용어들이 연결해서 만들어내는 어떠한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게 신학 철학 인문학이니까요. 용어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보통 의미라고 하면 영어로 mean, meaning 이라고 하는데요 meaning하고 똑같은 것은 독일어는 베도이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 판넨페르크가 쓴 의미는 베도이통이 아니라 진이라고 하는데요. 요거는 일반적으로 베도이통 mean이라고 하는 것은 뭐라고 할까요? 그냥 표면적인 의미라고 한다면 진이라고한 하는 것은 아주 실질적인, 아 제가 제가 독문학자가 아니라서 표현하기라 좀 그런데요. 나중에 제가 말씀드리겠어요. 제가 지금 사전에도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데 지금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어쨌든 이건 분명합니다. 그냥 베도이통, 이걸 의미라고 할때 우리는 한글로 똑같이 번역할 수 밖에 없어요. 한글로 똑같이 의미입니다. 그런데 뭐 맥락에 따라 다른 의미로 사용할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똑같은데요. 이 베도이통은 그냥 표면적인 의미라고 한다면은 심층적인 의미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좀 다르죠. 근원적인 의미라 했잖아요. 근원, 원초적인, 원래의 그런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독일어를 중심으로 자꾸 이야기하면 여러분들이 잘 모르는 거기 때문에 지루하겠죠. 진도를 조금 나가겠습니다.

그거를 정확하게 살펴봐야 되는거겠죠.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나 성서를 공부할 때나 설교를 할 때도 마찬가지인데 텍스트의 아주 근원적이고 심층적인 의미, 실질, 실질적인 진실, 하면 그것을 말하는 실질적인 진실 그런 것을 뭐냐는 것을 찾는 것이 우선적인 작업입니다. 한국교회에 그런 작업이 상당히 느슨하고 대신 신자들이 어떻게 그것을 활용할 것이냐만 확대되고 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해석이라고 하는 것은 길을 잘못 가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판넨베르크가 이 책에서 사도신경 기독교 신학의 뼈대인 사도신경의 아주 그것이 형성되던 당시의 1700년전 그 당시의 실질적인 그 당시의 것을 제공하겠다는 것입니다. 재미있지 않겠어요?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백 년 전에 있었던 일들만 잘 살핀다고 하더라도 흥미롭잖아요. 지금 백 년 전에 신문 한번 찾아가보십시오. 1907년, 1908년 뭐 건국 60년, 1907년 건국하고는 상관없군요. 1908년, 어떻게 된 거예요? 한일합방 2년 전인가요? 역사의 시간 연대기들이 시간들이 자꾸만 힘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신문 읽고 하 그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런 것을 찾아가는 것이 재미있을 텐데 1700년 아니면 1800년 그 시대속으로 들어간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흥미롭겠어요. 우리가 놓쳐서 문제지 들어가면 재미있습니다.

설교도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그것도 마찬가지인거예요. 구약성경이라고 한다면 2500년내지 3000년 정도 되었단 말입니다. 신약은 2000년 1900년 정도 되었는데요. 그 오래된 그 당시의 문서들이 채택이 될 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었다는 것이죠. 그런 것들을 타당하게 하나하나 찾아간다면 재미있는 일이지요. 성서 주석학자들이 보통 하는 일이랍니다. 사도신경의 근원적인 의미를 찾아간다. 이걸 여러분들이 잘 생각하셔야 됩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그것에 대해 생각하려고 마음도 먹지 않고 그냥 이미 작성된 사도신경에 문자적으로 매이고 있을 뿐이지요.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다고 하는 그 고백이 나오게 된 어떤 성서 신학에서 나온 삶의 자리, 근원적 그러한 세계, 그런 것들을 통찰하는게 정말 중요한데 정말 그런 것들을 다 놓치고 있는 거죠.

지금 제 옆에 컴퓨터가 커져있는데 몇 분지나면 화면보호를 위해서 자꾸만 바뀌잖아요. 제 사진 여행이라든지 사지을 슬라이드로 나오게 했는데 자꾸만 다른 사진들이 나오게 하는게 신경이 쓰이네요. 잠깐 컴퓨터를 끄겠습니다. 이게 지장이 있네요.

이게 사도신경만이 아니라 성서공부와 전체 공부의 핵심적인 문제다. 하나였고 일단 그게 문제는 알아야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으니까요.

그 다음에는 두 번째는 사도신경에서 거론된 신앙의 내용이 오늘의 성서 비평적 관점에서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확실한 근거를 찾아보아야 하며,

그렇죠. 사도신경은 성서는 아닙니다. 주기도문은 성서안에 있는 거지만요. 이 사도신경은 분명히 로마교회를 중심으로 형성된 고백론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거는 신학적인 고백인거예요. 이것이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이것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성서적 근거들을 거기에서 찾아내어야 하는 거거든요. 사도신경과 성서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는 것, 이런 것들을 우리가 찾아봐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작업도 역시 우리 일반적인 성서공부와 설교 이런 것에도 중요한 대목입니다. 우리가 어떤 주제로 설교를 한다거나 성서 텍스트를 한다고 하더라도 고 성서 일부분, 예를 들면 요한복음 3:16절 고 한부분만 갖고 이해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고요. 다른 성서 본문이 뒤받침 해줘야 되는 거거든요. 이런 작업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설교가 성구를 늘 들이밀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건 이렇게 생각하시면 좋아요. 성서 텍스트가 부분 부분은 어떤 특별한 상황에서 나온 신앙경험에서 나온 문자적 진술입니다. 여기서 특수한 상황이라고 하는 것을 꼭 염두에 두셔야 되요. 갈라디아서라고 하는 것은 갈라디아 지역에 있는 여러 교회에서 발생한 사건과 사도바울의 신앙적 관점과 더불어 그가 처해있었던 초기 교회 안에서의 위상, 위태로웠던 위상들, 그리고 조금 이걸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면 초기 기독교 안에서 벌어졌던 교권의, 뭐라고 애길 해야 되나요? 교권의 행사, 교권 사이에서 불거지는, 아 정확한 단어가 생각 안 나서요. 하여튼 갈라디아 지역에 있는 교회라고 하는 특별한 상태가 있는 겁니다. 아주 그건 특별한 겁니다. 그리고 바울이 처했던 특별한 상황이 있는 거예요. 그런 특별한 상황, 조건하에서 나온 문서라고 하는 그 사실이 왜 중요하냐? 그거는 뭐 여러분들이 눈치 채셨을 겁니다. 그걸 왜 중요하다기 보다도 왜 거기에 머무르지 말아야 하는 것은, 두 가지가 연결되는 건데요. 두 가지를 다 설명하긴 해야 되겠는데요.

그러한 특별한 상황이 왜 중요하냐 하면 기독교 신앙이 이렇게 막연하게 책상 앞에 앉아서 자기 관념과 사유의 방식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삶의 경험에서 나온다고 하는 겁니다.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거든요. 신앙 활동이라고 하는 것도 그냥 신학자가 그냥 머리만 돌려서 되는 것이 아니라 신학자의 영적인 경험이 전제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목회를 잘해야 된다거나 그러한 경험이 많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고요. 그렇다고 경험이 없어도 된다는 것도 당연히 안 되고요. 그러나 신학자에게 신학적인 이론에 앞서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영적인 경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 칼바르트가 말한 신학은 교회의 진행이다는 말이 옳은거죠. 지금 제가 말씀 드리고 있는 요 핵심은 성서 텍스트가 형성된 데는 고유한 거기에 참여한 사람들의 삶의 경험이 있다. 삶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루어지는 거거든요. 뜬금없이 가만히 기도하고 있는데 뚝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경험은 그렇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모세의 호렙산 경험이라는 것도요. 아주 구체적인 그 사람의 삶이 거기에 들어가 있는 거예요. 장인어른 말예요. 미디안 제사장이었거든요. 아내들은 제사장의 딸이었구요 제사장, 미디안 종교입니다. 유대종교가 아니고요. 이방인들이죠. 그가 호렙산에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는 것은, 호렙산 하나님의 산이라고 해서 미디안 이방종교의 성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거기서 가시나무 떨기에서 하나님을 경험했다고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이야기하느냐 그런 것들이 구약성서를 읽는데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성서텍스트는 그 텍스트에 참여한 사람들의 고유한 삶이 들어있다는 것을 놓치면 안된다고 하는 거구요. 그런데 왜 성서 텍스트에만 머무르면 안되냐? 것이 앞서 있는 질문이죠. 그러니까 성서 설교를 할때 고 부분으로 끝나지 말고 다른 것이 보충되어야 된다 그런 겁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려고 했던 것은 복음의 전부가 아니라 일부분이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에 있었던 교회들과 유대기독교하고의 아주 치열한 투쟁가운데서 그가 그렇게 과격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던 어떤 상황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 것만으로는 기독교신앙을 말하다보면 이게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는 거죠. 그러한 것들을 로마서와 다른 빌립보서나 이런 것을 통해서 또 근본적으로 복음서하구요. 이런 전체적인가운데서 풀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능력이 주어진 사람이 설교할 수 있습니다. 그런 능력은 그냥 성서를 주석할 수 있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뼈대 전체, 기독교 형이상학이라고 할 수 있어요. 창세론 부터 종말까지 이르는 전체 틀이 있잖습니까? 틀은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는 통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둑으로 예를 들자면 이것은 정석이죠. 정석. 정석을 잘 알아야만 실전에 들어가서 바둑을 잘못두지 않고 바른 길을 찾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정석이 옳은 수이기는 하지만 절대적이지 않다고 하는 거예요 정석은 수백 년 동안 고수들이 둔 바둑에서 양쪽의 흑과 백 양쪽의 최선의 수를 찾아야 되는 것도 정석이라고 하는 것인데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변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갑자기 변하는 것은 아니에요. 더 깊은 수를 보는 고수가 나오면 정석이 또 바뀌는 거예요 그게 막 바뀌는 것이 아니지요. 어쨌든 바둑을 잘 두려면 정석을 잘 알아야 되는 것처럼 전체적인 틀을 이해하는 것이 성서를 해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것이 한국교회에서는 상당히 소홀하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이건 제가 했던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 같아서 미안합니다. 지금 모든 것들이 포퓰리즘에 떨어져 있어서 그렇습니다. 설교하는 사람,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들, 교회지도자들이 청중들만을 바라보는 거예요. 청중들이 은혜 받는 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들이 원하는 것만 전달하려고 그래요. 나는 아니다 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다. 청중들이 거기에 세뇌당하는 방법을 알고 있을 뿐이에요. 그래서 그는 자기 자신의 영적인 경지에서 자기 말을 하는 것 같은데, 권위있는 설교자들입니다만 그렇지만 그거는 숨겨져 있는 겁니다. 교묘하게 청중들이 원하는 것을 절달할 줄 아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대중전달능력이, 그러니까 청중들이 원하는 것에만 영적인 초점, 눈높이를 거기에 맞추고 있기 때문에 사실은 기독교 전체에 대한 이해는 몰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거예요.

네 두 번째로요. 성서 비평적 관점. 독일어 원서에는 뭐라고 쓰여 있나 볼까요? 포르투게클츄세비텐사세 오늘날 비평적 성서연구, 성서학.

마지막 세 번째로는 마지막, 어쩌면 이 세 번째를 이야기하지 않고 첫 번째 패러그래프를 지나지 않고 머물렀던 것 같습니다. 이 내용이 현대인들이 이해하는, 그리고 확신하고 있는 현실성과의 관련 속에서 오늘의 기독교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숙고되어야 한다. 아, 참 중요한 것을 짚었습니다. 세 번째죠. 이 세 번째 문장만 갖고도 한시간 이야기하는 것으로도 부족할지 모르겠습니다. 이 안에 많은 내용들을 담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시한번 읽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는 이 내용이 현대인들이 이해하는, 그리고 확신하고 있는 현실성과의 관련 속에서 오늘의 기독교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숙고되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대목들이 어떤 거예요? 세 가지로 저는 보았습니다. 현대인들이 이해하는 것, 현대인들의 세계관이죠. 우리가 지금 현재에 살고 있으니까요. 원서에 보면 호이트겐 크리스텐 네.. 고만 보아야 되겠네요. 요거는 약간 의역된 부분이 있어서요. 현대인들에 의한 현대적인 사유가 중요하고 두 번째로는 현실성과의 관련, 이 현실성이라고 하는 문제가 에서 이게 머리에 남아 있어서 말이 좀 헛돌았던 것 같습니다. 디겐베리티엔 드레클리카이츠 스펜테이테니스. 네 지금의 현재적인 오늘의 베리클리카이트에 대한 이해, 프리스텐 데이트츠 언더스탠딩하고 똑 같습니다. 이게 왜 중요하면 그 우리 기독교 신앙에 놓치는 것은 이 브래클리죠. 여러분들이 설교를 들으면서도 혹은 기독교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게 확 와닿지 않죠. 좀 추상적이라고 생각이 되죠. 뭔가 막연하다고 생각이 되죠. 그걸 좀 신비롭다고 애기하는데 그건 착각입니다. 여러분 착각하지 말아야 되요. 신비로운 것하고 실질적이지 않다고 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는 겁니다. 신비로운 게 막연한 게 아니고요. 신비는 또 나중에 또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때로 남겨두기로 하구요. 강의가 자꾸만 옆으로 분산되면 여러분들이 집중력을 떨어뜨릴 테니까 조금 더 이 이야기 안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현대인들이 드리클리한것, 영어로 리얼리티라고 합니다. 좀 쓸 수가 없어서 아쉬운데요. 그게 아마 기독교가 뭐꼬 강의를 할때도 단어의 차이를 말씀 드렸을 겁니다. 영어의 리얼리티하고 독일어의 베레클리카이트하고 똑 같은 것은 아니에요. 독일어로 레라리텍트라고 하는 단어가 따로 있습니다. 이게 리얼리티하고 똑같은 의미죠. 사실적인, 실질적인 것, 현실적인 것 이런 것들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리클리카이트라고 하는 것은 영역은 할 수 없어요. 다 이거를 이 단어를 영역할 때는 리얼리티라고 씁니다. 우리나라 말로는 조금 곤란하구요. 이거는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아주 참된 것의 변증법적 작용으로 일어나는 어떤 확실한 것, 이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말장난처럼 들리죠. 이게 여러분들이 기독교 신앙안으로 들어가려면 그 맥락을 빨리 아셔야 합니다. 신비라고 하는 말도 했구요. 변증법적이란 말도 조금 연결되어 있고요. 이런 것들이 사실은 신비로운 건데요. 어떤 사실 사태가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니라 변하는 거예요. 변함으로서 이게 발전인지 아닌지는 둘째 치고 움직이고요 새로운 것들이 들어오고요.

이거는 철학 이런 것들 뿐만 아니라 자연과학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 세계에 하늘이 땅이 있고 민들레가 있고 다람쥐가 있는 세계도 사실 고정되어 있지 않다고 하는 것도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을 거예요. 언젠가는 다람쥐가 없어지는 세상도 오구요. 이젠 전혀 다른 세계도 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렇게 진화된다고 하는 차원뿐만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아 이건 지금 제가 설명하기가 버거운 문제이긴 한데요. 우리 강의의 옆으로 가는 것 같기도 해서요.

그래도 한마디 하고 지나가야 하겠습니다. 자연과학에서도 패러다임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요. 천동설이라는 패러다임이 지배하던 그 시대에는 우주를 그렇게 밖에 못 보는 거예요. 다 그렇게만 보이는 거예요. 하늘이 지구를 중심으로 도는 것으로 그렇게 세계가 그렇게 보입니다. 그게 패러다임이에요. 모형이고 하나의 틀입니다. 그게 다시 지동설로 바뀌었잖아요. 패러다임이 쉬프트되었다고 하는것, 패러다임이 전이 이전 되는 것, 다른 우주로 세계가 보이는 거죠. 이상하지 않습니까? 천동설이 있을때나 세계는 똑같은데 지동설이 있을 때나 세계는 똑같은 데 전혀 다른 세계가 되어 버리는 거예요. 뉴턴의 기계적 역학이 지배하던 그런 시대하고 이제 양자역학이 들어온 세계하고는 물리의 세계가 똑같은 것 같은 데 다른 세계가 되어있다고 하는 겁니다. 앞으로는 이게 또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차원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이 세계가 달라져 있는 거죠. 우리가 다람쥐를 여태까지 보고 있었는데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보는 어떤 틀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그게 이게 달라지는 거죠. 이게 어떻게 전달이 되나요? 너무 피상적인 얘기처럼 들리시나요? 이렇게 보세요. 원소의 상태로 본다면 사람에게 있는 원소나 나무에게 있는 원소나 땅이나 흙에 있는 원소나 왔다 갔다 하고 똑 같거든요. 그런 차원에서 보면 차이가 없는 거죠. 이거는 원소의 차이만 나타나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세계가 달라질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이런 것들이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있는 이 강의에 나오는 드레클린카이츠 리얼리티 이 문제하고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러니까 정말 참된 것, 리얼한 것, 드레클린 한것, 리얼리티는 접어두고 이건 약간 기계적인 것이니까 접어두고요. 훨씬 더 변증법적인 독일어를 통해서 말하면 이렇습니다. 진리의 속성이거든요. 변증법적으로 유기적으로, 관계 속에서, 기독교적으로 종말론적으로 활동함으로서 열려지는 그러한 아주 참된 것, 그걸 뭐라고 우리가 딱 집어서 말할 수 없어요. 그렇게 규정하고 있을 뿐이죠. 그것이 계시일수도 있고 생명일 수도 여러 가지 일수도 있죠. 그런 모든 것을 아우르는 어쩌면 그것이 하나님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정말 리얼한 것, 정말 베리클라이트한 것 이런 것이 하나님이잖아요. 그런데 그게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움직이고 변화되고 종말론적으로 가잖아요. '하나님도 변한다.' 제가 그런 것을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인간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 너무 제한 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그 방식으로 밖에는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 이야기 입니다. 우리는 시간을 과거-현재-미래 이렇게 나누어서만 생각하잖아요. 하나님 안에서만 산다는 것은 영원한 현재를 의미합니다. 그것이 어떻게 이해가 되나요? 우리에게는 그게 불가능한 것인데 이미 성서기자들도 그런 이야기들을 이야기하고 있고요, 그런 방식이 아니면 참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영원한 시간, 이런 쪽으로 이야기 하게 됩니다. 우리가 지금 아주 부분적인 것에, 말하자면 ‘코끼리의 털 하나’ 이런 정도에서 무엇을 분석하고 이해하고 있는 과정이기 때문에 우리 인식이 정말 제한적이라고 하는 것,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 것도 그런 정도고요. 그 분이 우리에게 자신을 우리에게 열어주는 것만큼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사도신경을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오늘 우리 현대인들이 정말 참된 것을 이해하는 그 관념 속에서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겁니다. 제 말이 좀 힘들죠. 힘이 들어가는 것 같아요. 더 천천히 더 잘 이해 할 수 있도록 설명해야 하는데....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나중에 질문에 댓글로 달아주세요. 제가 말하는 게 너무 자기 혼자의 주관성 속에서 빠져서 설명방식이 비약이 심하면 전달이 안 되니까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를 드는 게 요부분에서 좀 필요하겠군요. “하늘에 오르사” 사도신경에 그러한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부활하시고 승천하신다.” “하늘에 오른다.” 그것을 가져다가 하늘이라고 라는 것을 지금 “하늘에 오른다.” 그렇게 말하면 누가 그것을 귀담아 듣겠습니까? 오늘 현대인들은 그런 것을, 성서와 사도신경에 나와 있는 하늘이라고 하는 것을 현실성으로 이해하지 않잖아요. 거기에 뭐가 또 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오늘 현대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참된 현실, 이런 것하고 연관성 속에서 승천이라고 하는 것도 설명을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완전히 현실적이지 않는 그런 이야기를 하게 되는 거죠.

우리 기독교인들은 현실적이지 않은 이야기에 너무 익숙해 있어요. 그것을 신앙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채색해버립니다. 이해는 되지 않아도 믿으면 된다고 강요하구요. 지금 질문한다고 하는 것은 현실성을 요구한다는 것이거든요. 도대체 삼위일체가 무엇이냐 그 리얼리티를 찾으려고 하는 겁니다. 예수가 재림한다고 하는데 그것을 오늘의 현실성, 현실이해 가운데서 해명이 되는가! 그것을 조금 듣고 싶다고 하는 거예요. 최소한도 지성적인 사람들이라면 그런 것을 그런 질문이 들지 않겠습니까? 물이 포도주가 되었다고 하는데 그건 말이 안 되잖아요. 오늘 현대 현실성으로는 말이 안 되는 것을 자꾸만 그것을 ‘믿어라! 믿어라!’ 라고 한다면 기독교가 진리가 아니잖아요. 진리는 정말 현실성이 있어야 하거든요. 그건 변증법적인 진리를 담아내야 되거든요.

우리는 이런 것들을 그냥 믿으면 된다 하는 식으로 얼버무리고 넘어간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무책임한 태도입니다. 여기에는 교회지도자들하고 일반 신자들하고 모종의 결탁이 되어 있는 거예요. 어떤 부분은 터부시 하는 거죠. 건드리지 말자 대신 우리끼리 재미있게 신앙생활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어떤 경계선을 정해놓고 그 안에서만 우리끼리 노는 거죠. 종교적인 놀이, 유희, 게임, 오락정도에 머물러 있다고 한다면 기독교 신앙은 이 세계 진리론 중에서 용납될 수가 없습니다. 받아들여지지가 않습니다.

여기에 제가 시간을 너무 많이 끌은 것 같군요. 첫 번째 패러그래프였습니다. 중요한 지적이었어요. 세 가지였습니다. 그다음 패러그래프를 읽어 보겠습니다. 논제로 주어진 각 단락의 사도신경 본문은 이 논제로 주어진 것이 14장까지예요. 1장부터 14장까지 나는 믿습니다로 시작해서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 여기 까지 14장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논제로서 주어진 각 단락의 사도신경 본문은 루터 교회에서 오늘날도 역시 사용하고 있는 루터의 신앙고백문이다. 우리하고 좀 달라요. 한 단락이요. 여기 판넨베르크의 이 책의 8장에 예수님이 땅에 묻히시고 지옥에 내려갔다는 이야기 이 내용이 우리 고백문에서 빠져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도 조금 차이가 있는데요. 판넨베르크가 이렇게 설명합니다.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공동체가 아니라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거룩하고 보편적인 교회’ 라고 하는 구절은 사도신경의 전체 구조에서 세 번째 항목에서 다루고자 한다. 성령론에서 다루고자 하는 거죠. 왜냐하면 이것이 라틴어 원문의 의미에 훨씬 적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종교개혁 전통은 ‘보편적’이라는 구절을 로마 카톨릭에서 그렇게 사용하는 구절을 ‘기독교적’이라는 구절로 대체함으로써 이 보편성 문제를 참고사항쯤으로 취급하고 있다. 잘못이라고 하는 것은 ‘교회의 보편성’ 우리말로 사도신경을 보면요. 교회론에 관한 건데요.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교통하는 것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거룩한 공회”라고 되어 있네요. 교회의 본질은 네 가지입니다. 단일성, 보편성, 사도성, 거룩성, 이 네 가지가 사도신경에 있어야 되는데 개신교 사도신경에는 조금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저희 샘터 교회에서 매월 첫 주일 성찬식이 있는 그 주일의 공동예배 때에 사도신경 대신으로 니케아 신조를 읽거든요. 거기에 아마 이 교회의 본질 네 가지가 나와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지금 손에 없어서 설명 드리기는 힘든데요. 중요하지 않으니까 넘어가죠.

교회의 보편성, 무슨 말인지 한마디만 하고 지나가죠. 나중에 교회론을 다룰 때 나오겠습니다. 교회의 보편성은 그냥 교회가 보편적이다. 그런 차원을 그런 낱말 뜻을 넘어서 그 지역의 교구 전체가 한 교회라고 하는 겁니다. 그것이 교회의 보편성이예요. 그러니까 우리 개신교로 말하자면 장로교회의 노회, 노회가 교회입니다. 노회차원에서 모회에 속해 있는 모든 교회가 하나의 교회인거죠. 이런 점을 우리가 잘 파악을 한다면 그 노회 안에 있는 100개 150개의 교회가 단일한 공동의 재정구조를 갖는 것이 건강한 겁니다. 큰 교회나 작은 교회나 할 것 없이 거기에 있는 목사들은 비슷한 수준의 월급을 받아야 되고요. 생활비를 얻어 써야 하구요. 또 교회에 운영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도 같이 공유할 수 있는 그런 운영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가야 하는 겁니다. 이것은 이렇게 예를 들 수 있군요. 한교회안에 여전도회 남전도외 성가대가 있듯이 그 교회에 속해 있으면 성가대만 지원을 안 하고 청년회는 지원 한다는 그런 일은 없잖아요. 같은 교회의 재정으로 같이 전체 교회가 건강하기 위해서 재정을 사용하는 것처럼 노회 안에 있는 전체 150개 이상 되는 교회가 공동의 건강한 재정을 같이 나누어 공유할 수 있는 제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의 보편성이지요. 보편성이라는 개념만 한국 개신교회가 살려나간다고 해도 참 건강해질 것 같은데요.

계속 나가겠습니다. 교회의 보편성을 에큐메니칼 운동시대에 더 이상 일종의 종파적 표식으로만 유효한 것이 아니라 그러니까 가톨릭교회만 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교회일반의 근간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교회의 특수한 울타리를 뛰어넘어 전체 인류를 향한 기독교 공동체의 개방성이 그 보편성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판넨베르크는 여기서 교회보편성 문제를 일 개교회만 아니라 전체 노회 차원의 지방회 차원의 혹은 총회 차원의 전체교회라는 것을 말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교회가 교회 울타리 안에만 머물러 있는 것만이 아니라 전체 인류를 향해서 열려져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런 부분들도 참 중요한 것 같네요. 기독교가 덩치는 큰데.... 한국기독교를 말하는 겁니다. 상당히 소종파적(Sect) 기질을 보이고 있습니다. 자기들 끼리 탁 튀어 나가는 거예요. 우리만 달라! 우리만 구원받아! 우리만 선민이야! 우리만 믿음이 좋아! 이러한 성향을 보이는 거죠. 구원파도 그렇고 자기들끼리만 뭐 한다고 그러잖아요. 때로는 그 소종파가 본질을 살려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근본적으로는 소종파적인게 아니라 개방적이고 보편적인 것이거든요. 한국교회가 덩치는 정말 큰데 담을 딱 막고서 우리는 달라 이런 분파주의적 성향, 바리새적인 성격을 보이지 않습니까? 물론 신약성서에 성도라고 하는 것이 ‘하기오스’가 구분된다는 뜻을 갖고 있기는 있습니다만은 거기에는 더 많은 설명이 필요한 것이니까요. 그 당시는 특별한 상황이 있기도 했고요. 더 근본적으로는 교회가 개방적이고 보편적이고 하는 그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하는데 이렇게 선을 가르고 세상과 성속 이원론적인 생각 속에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불교하고도 조금씩 불거지는 것 같고요.

사실 이런 것들은 교회지도자들의 책임이 크지요. 신자들은 어떤 면에서는 착하다고 할까 자기 주관이 별로 없기 때문에 힘이 있는 지도자들이 어떻게 말을 하느냐에 따라서 많이 달라지게 됩니다. 이명박 정권이후로 그를 대통령으로 밀었던 한기총에 속한 대형교회 목사들을 중심으로 해서 기독교 패권적인 행태들을 많이 보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번 기회에 이명박이 대통령으로 있을 때 한국의 체질을 기독교적인 체질로 좀 바꾸자 그런 야망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지난 몇 번의 총선에서도 기독교 정당도 만들고 말이죠. 그들의 야망이 있는 거죠. 한국을 기독교 국가 비슷하게 좀 만들고 싶다 그런 것 말입니다. 이게 참 시대착오적인 것이고 기독교적인 것도 기본적으로 아니기도 하구요. 그러한 생각이 강하고 이번에 그런 꿈을 일단 이루었잖아요. 총궐기해서 이명박 장로를 대통령으로 만들었습니다. 아마 이 기회를 놓치기 싫어서 알게 모르게 여러 가지 사회층에서 기독교 색깔들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을 가열차게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것을 불교에서 눈치를 좀 챈 것 같기도 하구요. 그것이 얼마나 깊숙이 되어 있는 지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판넨베르크는 계속 이야기합니다.

에큐메니칼 정신을 예견하고 있는 독일어 사도신경 본문의 통일된 텍스트를 실질적인 이유 때문에 몇 가지, 아니면 최소한 한 가지만이라도 바꾸어야만 했다. 이는 곧 고대양식인 ‘지옥에 내려가시고’ 라는 구절이 ‘죽음의 나라로 내려가시고’ 보다 훨씬 풍부하고 심층적인 의미를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신경의 여러 형태들이 ‘죽음의 나라로 내려가시고’ 도 있는 것 같아요. 독일어 사도신경이 그렇게 되어 있는 가본데요. 판넨베르크는 아주 노골적으로 ‘지옥에 내려가시고’ 이것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지옥이라고 하는 것이 고대인들의 표상이거든요. 거기에 훨씬 더 영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아주 미묘한 긴장이 있습니다. 고대인들의 표상을 우리가 그대로 따라가서도 안 되지만 그것을 무조건 배척해서는 안 되는 그러한 긴장 말입니다. 이해하시겠지요? 지옥이라고 하는 것을 아주 실질적으로 땅속에 있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지요. 일종의 신화적인 세계관이니까 신화를 하나의 fact, 이런 사실로 받아들일 수 없잖아요. 그러한 고대인들의 신화적 표상이 담아내려고 했었던 어떤 영적인 깊이가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것마저 우리가 놓쳐버리게 된다면 그건 어리석은 일들이죠. 이게 지금도 헬라신화를 연구하고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잖습니까? 그것과 똑같다고 보기에는 좀 그렇습니다만 그래도 하나의 문학적 형태에서 보면 연구하는 방식은 비슷한 거죠. 이 긴장, 다시 말씀드립니다. 고대성서는 고대인들의 표상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겁니다. 고대인들의 표상을 문자적으로 수호한다고 하는 점에서 우리가 배격해야 하지만 그러나 그 고대인들의 표상이 담고 있는 영적인 깊이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점에서는 당연히 우리는 그것을 버리면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나오겠습니다만은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이런 것들도 고대인들의 표상인데 그런 것들이 아주 유치하다고 그래서 그것을 무조건 배격하면 안 되는 거거든요. 그러한 방식으로 사도신경의 전통에 들어왔던 우리 신앙의 1700년, 2000년 전 선배들이 과연 어떠한 경험을 했는가 영적인 심층을 우리들에게 전하려고 하는가 그것을 아는게 중요하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판넨베르크는 지옥이라는 이 고대인의 표상을 조금 낯설지만 자기가 그대로 자기가 말하겠다 라고 하는 겁니다.

한 시간이 거의 다 되가네요. 동영상 강의는 한 시간 이상 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의 집중력이 떨어지게 되고 저도 그렇구요. 화면을 계속 보기가 힘들잖아요?

마지막 파라그래프 죽 읽고 마치겠습니다. 이런 문제들에 대한 사전 지식이 충분한 독자들은 필자가 몇 항목에서 지난날 표현을 수정할지 모른다고 확신하게 될 것이다. 이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했었던 몇 가지 학문적인 작업과 요문제가 조금 엇갈리는데 그것을 조금 정리하고 있는 겁니다.

좀 더 근본적인 변화에 대해서는 이미 확실하게 암시된 바 있다. 1964년에 출판된 졸저 <기독론 개요>에서 필자는 당시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를 배척한 것은 예수의 율법비판에 따른 결과라고 했으며, 예수의 부활은 역으로 율법이 불의한 것으로 판명되었다는 의미이며, 또한 그렇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유대교가 끝장났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결론을 내렸었다. 필자는 오늘 이것을 그 당시에는 불가피했던 결과라는 점에서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그때 내린 이 결론은 독일 프로테스탄티즘에서 널리 받아들여졌던 생각으로서 율법종교와 유대교의 동일시를 전제했다. 그 이후로 필자는 이 둘 사이를 구별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이제 필자는 유대인들의 신앙에서 볼 때도 유대 역사의 하나님은 율법을 뛰어넘는 분이라고 생각한다. 이럴 때만 유대적 현상으로서 예수의 등장이 이해될 수 있다. 이 인식이 기독교와 유대교의 대립적 관계를 극복하게 만드는 광범위한 공동 기초를 받아들임으로써 분명히 기독교인과 유대인 사이의 대화를 훨씬 개방적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마지막에 이렇게 썼네요. 강의원고를 여러 독자들이 읽을 수 있는 책으로 출판하도록 용기를 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나의 아내에게 먼저 감사한다. 1972년 정월 뮌헨에서 볼파르트 판넨베르크

1972년 정월에 이 머릿말을 썼군요. 강의는 그 전에 몇 번 한 거고요. 오래 됐습니다. 36년 전이구요. 뮌헨, 아름다운 곳입니다. 독일에서도 잘사는 곳으로 이름이 나 있고요. 어 자동차 회사가 있는데 유명한 자동차 회사, 세계적으로 명품인 자동차 회사입니다. 더 유명한 것은 맥주 옥토버페스트가 있습니다. 막걸리처럼, 이 맥주가 독일에서는 정말 수백 가지 종류인데 특색이 다 있거든요. 쾰른 맥주는 아주 맑습니다. 투명하죠. 그런데 이 유명한 뮌헨맥주는 붉어요. 걸쭉하다고 할까 아주 특색이 있습니다. 저도 오래전에 마시고 와서 그 느낌은 잘 모르겠어요. 그냥 색깔만 기억납니다. 우리는 이렇게 36년 전에 머리말을 쓴 그리고 그 전 몇 해에 걸쳐서 마인쯔와 뮌헨 대학의 신학대학생들에게 강의한 판넨베르크의 사도신경을 같이 읽고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여기서 마치구요 이 녹화 세 번째는 내일 다시 하겠습니다. 그때는 본론으로 들어가겠네요. 고맙습니다. 경청해 주셔서, 시청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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