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강 녹취록 - 1장 나는 믿습니다(1)

사도신경해설 조회 수 4172 추천 수 0 2009.04.05 00:07:13

사도신경 해설 3강 - 나는 믿습니다(1)

안녕하세요. 오늘 사도신경 공부 세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부터 실제적으로 사도신경 해설의 본문 안으로 들어가겠어요. 지난번 두 번은 서론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우선은 오늘부터 시작하는 이 본문 해설이 14장으로 나누어져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겠습니다. 차례죠. 1장부터 14장까지인데 거기에 각장마다 사도신경의 작은 소주제를 달았습니다. 1장은 나는 믿습니다. 이게 거의 사도신경의 주제와 같습니다. 영어로 I believe 이렇게 쭉 시작하죠. 독일어로 Ich glaube. 뒤에 나오는 것들을 나는 믿는다는 형식을 가지고 있는데 본문에 보면 우리가 읽을 내용에도 나오고 있지만 세 번 반복한고 그래요. Ich glaube 퉁퉁퉁퉁 Ich glaube 뭐. Ich glaube 뭐. 세 번 뭐를 믿는다고 하는 형식이 고대교회의 중요한 신앙고백의 이루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도대체 믿는다고 하는 것이 뭐냐 하는 거죠. 믿는 내용은 뒤에 나올 거구요. 믿음이라고 하는 사실이 뭐냐 하는 거죠. 보통 우리는 믿는다고 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강조를 두고 있는데 실제로 사도신경이 그걸 말하는지 아닌지 그런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부터는 구체적인 그 믿음의 대상이 나오는데 크게 보면 삼위일체라고 그랬죠. 2장에서는 하나님을 3장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아버지를, 4장은 기독론으로 넘어가서요 예수 그리스도를, 5장 하나님의 외아들, 우리의 주를, 6장은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아주 예민한 주제로군요). 7장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묻히셨으며, 8장은 지옥에 내려가시고 9장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다시 살아난다는 것과 하늘에 오르사가 하나로 표현되었어요. 이것이 우연하게 된 것이 아니라 신학적 의미에 따라서 구분되는 겁니다. 10장은 전능하신 아버지인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다시 오실 것을. 내가 믿습니다는 뒤에 나오는 믿음의 내용들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10장에 나와 있습니다. 11장은 삼위일체 하나님에서 세 번째 항목,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 12장은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인 (기독교적인) 교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13장은 죄를 용서하여 주시는 것과 14장은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

네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4장까지 있는데 오늘 우리는 나는 믿습니다 앞부분 시간이 되는데까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책을 직접 좀 보시죠. 이렇게 시작합니다.

고대 교회 시대인 2세기 이래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도적인 의미의 신앙 고백적 언어나 그 전(前)형식을 언급하는 사람이라면, 즉 “나는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이라면 원칙적으로 세례 교육을 거친 자라고 할 수 있다.

이게 첫 문장입니다. 오늘 제가 이 문장을 원서와 비교해보니까 의미가 잘못 전달되었더라고요. 보세요. 고대 교회 시대인 2세기 이래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되면 그 과정을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시간을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그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도적인 의미로 신앙고백하는 이러한 것들을 말하는 사람은(전반적으로 원서를 좀 봐야 되겠는데요.) 사도신경의 이런 단어로 이러한 말들로, 사도신경의 이러한 형식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을 해야 되겠죠. 이건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의미가 조금 착오가 있을까봐 말씀드렸습니다. 사도신경에 나와 있는 말들로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들은, 그런데 그 사람들은 특히 고대교회 시대 2세기 이후로 이렇게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냐 하는 건데요. 말하자면 나는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원칙적으로 세례를 준비하기 위한 강의를 이미 마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러한 사도신경을 나는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2세기 이후로 고대 교회에서 세례를 받기위한 사전교육을, 준비교육을 마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사도신경이런 것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사도신경 하나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비슷하게 여러가지들이요. 그리고 사도신경으로 발전하기 이전에 여러가지 문서들을 포함하구요. 전체적인 사도신경과 같은, 사도신경의 모든 문서들은 근본적으로 세례를 받기위한 준비교육의 한 단계라고 할 수 있을까요? 하여튼 세례를 받기위한 교육에 속한거다. 말하자면 사도신경과 세례는 밀착되어 있다. 그런거죠.

당신은 전능한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믿습니까? 당신은 우리의 구세주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믿습니까? 당신은 성령과 거룩한 교회와 사죄를 믿습니까? 이렇게 세 번에 걸쳐서 “나는 믿습니다.”라고 대답해야만했다.

네 삼위일체 하나님이죠. 아버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 성령과 연관된 교회와 사죄 이런 것을 믿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믿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했다. 이런 사람, 세례받을 때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들, 그러한 교육을 받은 사람, 이런 사람들은 신앙고백에 근거해서 신앙고백의 세 부분과 연결되는 삼위일체하나님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네 여기서 다 연결되는군요. 사도신경, 세례, 삼위일체 하나님 이게 다 초기 기독교의 신앙생활에서 핵심적인 기능을 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거예요.

우리가 삼위일체에 대해서 여기서 또 다시 깊숙하게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나중에 조금씩 조금씩 이야기가 나올때 좀더 할텐데요. 기왕 말이 나왔으니까 잠간만 짚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유대인들의 하나님은 무소부지하시고 전지전능하신, 초월적인 그러한 하나님이시죠. 그러한 유대인의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주로 인제 구약에서 설명되고 있는 그러한 하나님, 그거는 역사 초월적인 하나님의 성격을 같습니다. 그야말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전능자 하나님, 창조자 하나님. 그러니까 그 하나님은 우리와 전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도 그분에게 갈 수 없는 그러한 분이라고 할 수 있죠.

성자 예수님, 이분을 또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여기서 하나님은 역사 초월이 아니라 역사 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역사라는 말을 좀 기억해 주십시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삶의 과정들이 다 역사인데요. 아버지 하나님으로서 그 분은 그러한 역사를 창조한 거죠. 이 세계를 창조한 거죠. 그는 피조물이 아니기 때문에 그는 역사와 이 세계를 초월해 있다고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목수 나사렛 예수, 요셉의 아들이구요. 우리와 똑같은 방식으로 이 세상을 사셨구요. 그런 면에서 예수는 철저하게 역사에 내재하신 분이십니다. 그 이 역사초월의 하나님과 역사 내재의 하나님이 기독교 하나님이해의 새로운 차원이 된거죠.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점에서 유대인들에게는 이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기독교 공동체를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적인 그러한 속성과 한계를 가진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는다고 하는 사실이 용납되지 않는 거죠. 그건 뭐 그들이 역사 초월적인 하나님에게만 완전히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게 두 가지 요소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역사초월하고 아들은 역사 내재가 이게 다 하나가 된다는 점입니다. 본질적으로는 초월적인 하나님과 내재적인 하나님이 하나인데요. 호모 오시오스homoousios 라고 하죠. 동일한 본질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페르조나(Persona), 위격에서는 구별이 된다는 것이 삼위일체의 특징이거든요. 페르조나, 오시오스 이것과의 어떤 차이냐 이걸 따라가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구요. 그건 우리의 인식이죠. 우리의 인식, 우리의 생각하는 것이 조금 어떠한 다른 관점들을 필요로 하는 것이구요. 그러니까 이런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가 사실은 우리와 똑같이 퍼스날리티 페르조나 이런 점에서는 우리와 똑같은 그러한 한계들을 가지고 있어요. 그 한계를 여전히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본질에서는 하나님과 동일하다고 하는 이 모순, 혹은 딜레마라고 할까 그것을 우리가 따라갈 수 있어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유대인에게는 그것이 용납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거든요. 초기 기독교인들은 고 맥락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과 똑같은 한계를 가진 또 그러한 삶을 살았는데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동일했다. 이게 무조건 말로만 그래서는 어떻게 보면 말장난 일 수도 있는데요. 요한복음 같은데 보면 예수님이 창조시때부터 있었던, 원초적인 로고스로서 말씀이 아니고서는 창조된 것이 없다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역사안에서 있었던 분이 역사를 뛰어 넘는거죠. 선재적인 존재가 되고 있는겁니다. 그렇게 되면 초월자가 되는 것이죠. 말하자면. 그걸 어떻게 초기 기독교인들이 이해하게 되었을까? 질문이 가능합니다. 분명히 그가 이 땅에서 우리와 똑같이 먹고 마시고 배설하고 십자가에 죽고 한계를 갖고 살았는데 그가 존재론적으로 하나님과 동일한 위치에 도달했다고 하는 건데요. 물론 그게 핵심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에서 초대기독교인들이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되었고 또 그러게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네 여기에는 미묘한 긴장이 있는거예요. 분명 현실에서는 우리와 같은 역사한계를 갖고 사셨는데 그러한 분이 부활을 통해서 역사를 넘어서는 선재적 존재가 되었다고 하는 그러한 사실입니다. 제가 똑같은 말을 계속하는 것 같은데 고 정도에서 멈추죠. 더 들어가면 복잡할 것 같네요.

일단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과 본질에서는 하나라고 하는, 그것이 부활을 통해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그런 것들을 경험하게 되고 인식하게 되고요. 그러나 그것은 종말론적으로 확실하게 증명될 그러한 사건입니다. 아직까지 그것이 완벽하게 증명되었다고 볼 수 없는거죠. 그렇다면 세계 사람들이 예수를 믿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죠. 모든 것들이 종말론적으로 열려져 있는데 그때 가서야 모든 것이 확실하게 드러날 겁니다. 기독교인들이 그런 신앙으로 예수가 그리스도이고 하나님이고 진리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우주론적인 보편적인 사실에서 증명할 책임이 있는 거죠. 그러니까 페르조나, 오시오스 본질적으로 잘 구분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아이덴티티, 정체성을 증명해나가야 합니다. 그게 과연 가능할까요? 아닐까요? 예수는 우리의 믿음의 대상으로만 믿습니다. 그런 정도로만 알고 말아야 될까요? 우리가 일반 신자들이라면 그렇게 머물러도 되지만 지도자들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기독교 신앙의 깊은 세계로 들어가기를 원하는 평신도들이라고 한다면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성에 대한 신적인 본질과 인간적인 역사 한계성, 이런 것들, 이러한 긴장속에서 나타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를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야될 겁니다. 그쪽으로 나가야 되겠죠. 예 그게 두 하나님이구요.

예수 그리스도도 역사 안에서 존재했다가 사라지셨잖아요. 지금은 없잖아요. 사도신경에 나와 있듯이 승천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고 하구요. 사도신경에 따르면 나중에 다시 오신다 이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하는 방식이 영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게 성령으로서의 하나님인거죠. 이 성령도 본질적으로는 하나님과 동일한 분입니다. 이 삼위일체 그러니까 역사초월적인 무소불위한, 전능한, 그러한 하나님이라고 하는 부분과 역사 내재한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한 부분과 그 성령이라고 하는 부분, 이 세부분이 구분되지마는 페르조나, 격으로서는 구분되지만 그러나 본질적으로 하나라고 하는 이러한 하나님 이해가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네. 그러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조금 더 나가겠습니다.

이 신앙고백의 原형식(오리지날한 형식)은 로마 기독교 공동체에서 실시되던 세례고백이었다. 세례받기 위한 고백문, 믿습니까? 믿습니다. 그러고 나서 세례를 받는건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질문과 답변 형식을 취했다. 3세기 이래로 그것은 세례를 집례하기 위해 만들어진 문서형식으로 발전했다. 주고받는 질문에서 하나의 문서형식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이 고백문이 초대교회 시대의 유일한 세례고백문은 아니었다. 어떤 특별한 지역 공동체에서 세례고백으로 사용된 비슷한 고백형식이 여럿 있었다. 로마만 그 당시의 기독교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여러군데. 알렉산드리아, 안디옥학파도 있었구요. 각각 세례고백문들이 있었습니다. 로마만 이런 것들이 있었던 것이죠. 이런 양식들은 2세기 때부터 전승된 것들이었다. 더구나 1세기부터 몇몇 고백양식을 갖춘 단편들이 보존되었는데, 이것들이 인용되어 신약성서에 포함되었다. 재미있는 표현들이지요. 1세기 그러니까 기독교가 시작되던 그 시대입니다. 그때에 이런 고백양식을 가진 단편들이 있었어요. 이것이 가이사랴 빌립보 여행에서 베드로가 주님을 향해서 한 신앙고백과 같은 것들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런 고백들이 초기 기독교안에 형성되었는데 그것이 복음서안에 인용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복음서가 있기 때문에 교회가 시작한게 아니라 교회가 먼저 있었기 때문에 복음서가 나온 거예요.

이런 점에서 보면 있어서 로마가톨릭교회하고 개신교 사이에 교회론 논쟁은 서로가 일리가 있는 겁니다. 마틴 루터가 제의한 3가지 신앙 논제중 하나가 솔라 스크립투라예요. 오직 성서뿐이다. 그러한 뜻인데 그것은 그 당시 로마가톨릭교회가 신앙생활을, 평신도들을 규정할 수 있는 기준을 성서와 더불어서 교회라고 보았습니다. 성서가 뭐라고 이야기하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교회가 뭐라고 하느냐 그 교회를 거슬러 올라가면 교황이라고 할 수 있겠죠. 어쨌든 교회, 이 두 가지가 다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규정하는 기준으로 작동되고 있었습니다. 마틴 루터는 이러한 로마가톨릭교회의 신앙생활에 대해서 고발하면서 교회는 아니고 솔라 스크립트라 오직 성서뿐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로마가톨릭교회가 주장하는 것은, 그 사이에 신학 논쟁이 계속될 수 있는 건데요. 로마가톨릭교회 주장도 일리가 있는 겁니다. 바로 여기서 지적한 고 맥락입니다. 복음서 신약성서가 먼저 있었던 것이 아니라 교회가 먼저 있었다고 하는 것이죠. 이 성서가 배태된 곳도 교회 공동체고 그리고 수많은 그 당시 문서들을 캐노나이제이션한 것, 경전화한 것, 27권으로 정한 것도 결국 교회가 했다는 점도 성서만이 아니라 교회권위를 신자들의 삶을 끌어갈 수 있는 기준이라고 말하는 로마가톨릭교회의 주장이 무조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개신교인들이 잘못알고 로마가톨릭교회는 성서가 아니라 교회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잘못이죠.

이러한 로마가톨릭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개신교는 또 다른 주장을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성서보다 먼저 있었지만, 두 가지 관점에서 말할 수 있는데 원래 말씀은 이렇게 성서로 되기 전에도 교회가 있기 전에 먼저 있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이런 것들은 교회가 있기 전에 있었던 거죠. 또 하나는 이미 성서가 형성된 다음에는 결정된 다음에는 교회권위보다는 성서가 더 결정적인 권위로 인정받아야 된다고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적으로 역사적으로 잘못된 일을 많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은 서로 옥신각신할 수 있는데 여기서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재미있는 초기기독교 상황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초기 기독교안에서 생긴 기본적인 단편적인 신앙고백들이 복음서 안에 인용이 되어서 들어갔다. 그러니까 서로 영향을 준 것이죠. 교회에서 나온 신앙고백이 복음서에 영향을 주고 복음서에 형성된 것은 복음서가 교회를 끌어가는 또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작용도 하구요. 이것이 역사의 힘이랄까요? 역사의 변증법적인 작용이 아닐까요? 언어와 사실들, 어떠한 사건과 사건이 언어가 되고 언어가 다시 사건들을 규정하고 끌어가는 힘이 된다고 하는 겁니다. 그게 역사의 어떤 힘이라고 할 수 있죠. 어떻게 예를 들면 될까요? 예를 들건 없죠. 네. 루터의 여러가지 신학적인 슬로건과 그의 문서들, 95개 조항의 부텐베르그 성당에서 있었던 대자보의 내용들 이런 것들은 다 마틴 루터가 처한 상황에서 나온 하나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러한 신학적 훈련, 성찰속에서 로마가톨릭 교회의 문제를 그러한 방식으로 정리를 해서 제시를 한거거든요. 그렇게 된다면 그것이 하나의 기준이 되어서 교회를 끌어가는 힘이 된다는 것이죠. 여기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면 문제가 되겠죠. 더 보겠습니다.

로마의 세례고백, 특히 오늘의 사도신경에서 볼 수 있는 최종 형태는 그 당시 기독교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가장 오래된 신앙고백양식이 절대 아니다. 이 고백문은 원문 상으로 볼 때 예수의 제자들이 직접 구성했다는 의미에서 사도적인 고백은 아니다. 사도신경은 예수의 사도들이 직접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사도적인 고백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그렇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그것은 사도적일 수 있다. 사도들에게 연원되는 사신*을 총괄적으로 적절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사도적이다. 사도신경의 성격을 두가지로 정의했습니다. 역사적으로 볼때는 이것은 사도적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직접 작성한 문서들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다른 각도로 보면 이것이 사도들의 사신, 사도들이 처음 선포했던 복음과 연결된다고 하는 점에서 사도신경은 사도적이다 하는 것입니다. 재미있죠. 사도신경의 정체성을 두 가지 양면적으로 본겁니다.

오늘 우리는 중요한 것을 공부한 거예요. 이런 것들이 우리의 신학적 사유를 증가시키는 심화시키는 공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전에 사도신경이라고 하면 사도들이 한 것인가부다 역사적으로 연결되는 가부다 그런 정도로 끝냈는데 조금 더 이것을 정확하게 이해하잖아요. 그러니까 역사적인 차원에서 보면 아니지만 그러나 또 이게 사도들의 복음선포와 연결된다고 하는 점에서 사도적이다. 고렇게 표현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다른 것에도 많이 적용될 수 있구요. 이런 방식으로 우리가 어떤 그 이러한 문서들을 규정해나고 공부해나가다 보면 우리가 또 신학적 능력이 생겨서 다른 것까지도 그렇게 분석할 수 있습니다. 두 가지 다 우리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한 가지 보충 설명해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사신하고 별표시를 했죠. 별 표시는 아니고 정확하게 무슨 표시인가요? 제가 눈송이 표시를 하였죠. 눈송이는 여섯개 맞나요. 여섯개 꽃모양인데요. 눈송이 표시를 했어요. 사신. 기독교가 뭐꼬라고 하는 방에서 이야기했는지 모르겠는데요. 패러그래프 끝난 부분에 보면 사신이라고 하는 단어에 주를 달았습니다. 읽어보겠습니다.

*사신(使信, Botschaft) 사신. 보낼사(使)입니까? 대사할때 사자죠. 믿을 신(信). 요런 단어는 조합되었는데 일반 사전에는 나오지 않는 단어입니다. 독일어 보드샤트. 사도들의 보드샤트 이 단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명, 메시지, 혹은 복음 자체를 가리킨다. 일반적 의미로는 사환의 일이나 사명, 통지, 보고, 사절이다. 우리에게 별로 익숙한 단어는 아니지만 앞으로 여러 번 등장하게 되니, 잘 기억해두어야 한다. 복음 사신, 복음이라고만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복음은 에방겔리온이란 단어가 따로 있거든요. 예수 그리스도의 케리그마를 복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신학사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유대교의 율법과 대비되는 새로운 의로움에 대한 이해, 이거를 복음이라고 합니다. 율법과 복음, 복음과 율법 대립되는 것인데요.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죠. 근본적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이 사실은 복음은 아니죠. 복음을 선포하는 거예요. 복음과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다른것이죠. 사도는 복음을 전하는 거죠. 그런 점에서 이 단어를 번역할 만한 그런 단어를 찾기가 힘이 듭니다. 그렇지 않으면 복음선포 이렇게 해야 하는데 이것은 조금 어색하기도 하구요. 사신은 앞으로 다른 단어로 바꾸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그런 것으로 아시고 진도를 나가겠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로마 공동체의 세례고백은 상당히 넓은 지역에서 받아들여졌는데 로마 자체가 정치적으로 패권을 잡고 있어서 로마에 있는 교회이 세례고백이 당연히 많은 지역에 영향을 끼쳤겠죠. 특히 서유럽 지역에서 그랬다. 칼 대제는 全카롤링 왕조의 제국에서 예배 때 사용된 본문을 보강하도록 명령했으며, 9세기에는 이 본문형식이 로마 교회에서 확실하게 받아들여졌다. 종교개혁자들은 사도신경을 신앙적 근거로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서 이것은 니케아와 아다나시우스 신조와 더불어서 종교개혁 교회의 고백문으로 자리 잡았다. 니케아 신조도 있고 아다나시우스 신조도 따로 있는거예요. 아다나시우스 신죠. 니케아는 종교회의죠. 325년에 열린 회의에서 나온 신앙고백론이 니케아신조고 아다나시우스는 니케아 회의때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신학자중에서 한 사람입니다. 아리우스하고 논쟁한 거거든요. 아리우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은 하나님과 다르다. 페테로 호시우스 본질이 다르다. 아다나시우스는 본질이 동일하다. 이런 발언을 했습니다. 아직까지 삼위일체가 정리되지 않는 상태였기 때문에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한거예요. 그때 만약에 아다나시우스의 입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면 아리우스의 입장이 채택될 수도 있었어요. 이때 비록 아다나시우스이 입장이 채택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완전히 결정된 것은 아닙니다. 그 뒤로도 계속해서 논쟁이 되었어요. 시간이 한참 흘러서 아리우스의 이질론은 완전히 배격되게 되죠. 그러니까 이런 말이 됩니다.

기독교의 교리라고 하는 것은 어느 한순간에 뚝딱하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주제나 그 교리의 중요성을 따라서 약간 차이를 두고 있는데 어떤 것은 삼위일체, 기도문,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한 이런 문제들은 오랫동안 수백년동안 논쟁을 통해서 결정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도 이 교리를 우리가 두 가지 관점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방금 제가 말씀드린, 아까 우리가 공부한 대로, 사도신경이 사도적인 역사직을 실질적으로 갖고 있지 않지만 간접적으로 사도들의 복음선포와 연결된다고 하는 점에서 사도적이다. 이 두 가지 점을 봤다고 하는 것처럼 교리도 이렇게 두 가지 관점이 필요합니다. 결정되는 과정이 있다고 하는 점에서 말이죠. 그게 뭐냐고 하면 교리라고 하는 것은 제가 고고를 지금 다 정리를 해갖고 말씀을 드려야 할 텐데 갑자기 생각이 나서 정리가 되지 않는 것 같은데요. 그래도 좀 말씀드릴게요. 이게 정확하게 맞는지 안 맞는지 말씀을 드릴 수가 없는데. 말이 나와서 말씀드려야 되겠습니다. 교리에 대한, 교리의 정체성에 대한 입장인거죠. 일단 이겁니다. 기독교 교리, 가장 중심적, 핵심적 교리 이런 것들은 누가 기도를 많이 한다. 열심히 기도를 해서 뭔가 깨달았다 그런 차원하고는 좀 다르다고 하는 겁니다. 이건 신학 논쟁인거예요. 신학논쟁. 이건 아주 치열한 논쟁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이런 치열한 신학적 논쟁을 한다고 하는 것은 보통 우리 한국교회에서 나오듯이, 볼 수 있는 현상이듯이 그냥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그러한 것이 아니라 진리가 가진 푯대를 가진 사람이 이기는 것입니다. 승리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교리라고 하는 것은 진리논쟁의 결과물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간접적으로 어떤 교권 같은 것들이 영향을 미치긴 했습니다만은 그러나 기독교 교권은 결국은 진리 따라 온 과정을 통해서 된 것에요. 일시적으로는 교권이 진리 아닌 것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만 이렇게 긴 과정을 보면은 결국은 진리논쟁이거든요. 기독교 교리가 그렇게 막무가내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진리논쟁이라는 것을 꼭 아셔야 되구요. 여기서 진리라는 것은 방금 말씀드린 대로 누가 목소리가 크냐 누가 기도를 많이했냐 그런 차원도 아니고 말 그대로 진리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는건데 이건 참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이 교회 안에서만 참이 아니라 보편적인 참인거죠. 보편적인 진리인거죠.

그래서 그 당시 헬라철학이 진리를 판단하는 중요한 준거고 작동하고 있었거든요. 헬라철학의 영향을 사실은 많이 받았습니다. 그 철학에 완전히 의존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에 그것이 해석학적 방법이었었구요. 그 당시에 진리를 나타내는 인식론적인 근거였기도 했기 때문에 그런 영향을 많이 받아서 기독교의 진리를 드러내려고 했습니다. 2000년동안 계속 그렇게 됐어요.

참고적으로 오늘날도 마찬가지 입니다. 21세기에 이러한 중요한 진리를 나타내는 통로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자연과학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점점 더 그렇게 될텐데요. 기독교가 자연과학의 차원에서도 진리논쟁에서 밀리지 않을 그런 준비를 해야 됩니다. 이게 기독교 교리라고 하는 것이 이미 전부터 탁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던져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고통에 의해서 계시를 받았다 이런 차원하고는 다른 겁니다. 이 진리논쟁 자체가 계시가 들어나는 과정이거든요. 그러한 차원들을 우리가 잘 알아야만 기독교 진리가 뭐냐 하는 것도 알 수 있는 거죠. 근데 그게 하나의 관점이구요.

또 하나는 교리가 형성된 그 배경이 치열한 신학적 논쟁의 결과였다. 그것을 말하는 과정에서 교리의 정체성에 대한 두 가지 성격을 지금 집는 겁니다. 하나는 그 교리가 진리논쟁가운데서 나왔다는 사실이었구요 또하나는 던져진 것이 아니라 역사안에서 살아난 것이다. 그러한 차원이었습니다. 네 그러한 점을 우리가 좀 봐야되구요, 또 하나는 이런 교리가 형성된 것이 역사 안에서 나왔기 때문에 이것이 결국은 아직까지 끝난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계속될 수 밖에 없다. 계속 가야된다. 그 예기 입니다. 계속간다는 것은 일종의 개방론적이다 라고 예기할 수 있고요. 종말론적이다 라고도 예기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예기는 그 정도로 마쳐야겠네요. 길게 끌기도 그러하고 교리의 성격인 두가지 성격을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는 이것이 치열한 진리논쟁중에서 나온 것이다. 지금도 우리는 진리논쟁가운데 있다. 이러한 교리는 끝난 것이아니라 종말론적으로 계속나가야 한다. 이것이 진지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역사에 중심에서 나온 우리들의 책임이면서 거기에 참여한 사람들의 책임에서 나온 것이면서 동시에 아직까지는 끝나지 않은 모든 것이 결정된 종말까지 열려 있는 그러한 어떤 것이다.

중요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제가 열을 올렸나요? 예 그런데요 니케와 아다니시우스신조와 더불어서 고백문으로 잡았습니다. 그런데 동방정교에서는 이 사도신경이 같은 차원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동방정교에서는 소피아성당을 중심으로 해서 동방교회의 역사적 흐름 그런 것을 여러분들이 아시기를 바라고요. "기독교가 뭐꼬?" 에서 한 번 그것을 잘 짚었던 것을 압니다. 로마가톨릭과 대별되는 또 하나의 교회인 동방정교. 그리고 우리 개신교가 기독교의 삼대종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Roman Catholic, Orthodox Church, Protestant 세가지 입니다. 이 동방정교에서는 사도신경을 그렇게 보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 사람들은 제1차 공의회인 325년 니케아신조를 가장 권위있는 고백문으로 받아들였다. 1차 공의회가 325년이고요 381년이 제 2차 콘스탄티노플이고요 3차, 4차 이렇게 쭉 나갑니다. 중요한 기독교의 중요한 논제들을 다루고 있는 보편회입니다. 그런데 이 동방교회에서는 325년의 니케야 신조를 그냥 받아들인 겁니다. 왜 그랬겠어요? 사도신경은 주로 자기들하고 대립하고 있는 로마교회의 신앙고백이기 때문에 당연히 호감이 떨어지겠죠. 신학적으로도 그렇고 실질적으로도 자기들이 다른 교회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겠습니까? 니케아신조는 381년 콘스탄니노플 회의에서 다시 보충되어서 받아들여졌습니다. 니케아신조는 기독교계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보급된 기독교신앙의 공식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신경이 그렇다면 니케아신조하고 상관이 없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니케아회의 자체가 로마가톨릭이 아니라 로마교회의 가장 강력한 하나의 학파라고 할수 있는 아니면 중요한 기독교의 한 축이었기 때문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니케아에 의해서 활동을 많이 했거든요. 그런점에서 사도신조하고 니케아신조는 사실은 구별되긴 하지만은 다르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판넨베르크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사도적 니케아신조. 이런 것들이 기독교계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진 기독교 신앙의 공식화라고 할수있습니다. 사도신조와 니케아신조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근본적으로 다를 게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형식에서 차이가 있는데요. 저희 샘터교회에서 매월 첫 주일마다 성찬식을 하면서 사도신조를 안하고 니케아신조로 고백을 합니다. 주보에 글을 싣는데요 조금만 읽겠습니다. 사도신조부터 이렇게 풀어서 설명했습니다. 신학적으로 표현을 엄격하게 한 거죠

우린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사오니 이는 아버지시여 전능자시며 하늘과 땅 그리고 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이시나이다. 오직 한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영원전에 성부께 나시며 하나님으로부터 나신 하나님이시요 빛으로부터 나신 빛이시요 참 하나님으로부터 나신 참 하나님으로서 창조되지 않고 나시며 성부와 일체시며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며 우리 인간을 위하여 우리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참 하나님이 되시며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못 박히시며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시며 성경대로 사흘만에 부활하셨으며 하늘에 오르사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시다가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영광중에 다시 오실것이며 그의 나라는 끝이 없을것이나이다.

기왕 나온 김에 다 읽어야 겠네요. 얼마 안 남았습니다.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신 성령을 믿사오니, 성령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네요.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신 성령을 믿사오니 이는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시며 필리오께(filioque: and from Son)의 문제인데요. 동방정교는 filioque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했는데 여기에는 filioque가 들어가 있어요. 니케아신조를 동방정교를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한다면 요거는 조금 약간 신학적으로 차이가 있네요. 제가 한 달에 한 번씩 읽으면서도 그 차이를 확인하지 못했었는데 그렇습니다. filioque 문제가 성령이 성자로부터 나오냐 아니면 아들로부터도 오냐 로마가톨릭교회와 우리는 아들로부터도 포함되는데 동방교회는 그거를 거부했거든요 여기 니케아신조에는 그것이 들어가 있네요. filioque가 들어가 있네요. 여기서 제가 뭘 착각하고 있는지 아니면 동방교회가 자체 스스로 모순된 행동을 하고 있는건지, 그렇지는 않을텐데 아니면 제가 어디서 받아쓴 이 니케아신조가 동방교회에서 쓰는 니케아신조와 좀 차이가 있는지 제가 확인해 보지 못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중에서 세번째 성령이 해당되는 부분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시며 성부와 성자로더불어 경배의 영광을 받으시며 예언자를 통하여 말씀하셨나이다. 성령도 하나님으로 이렇게 표현되는 거죠. 마지막으로 거룩하고 우주적이며 사도적인 하나의 교회를 믿으며 교회의 본질이 4가지 그대로 나오고 있습니다. 거룩하며 거룩성. 우주적이고 보편성 사도적인 사도성, 하나의 교회 단일성. 이러한 교회를 믿으며. 이 신조라는 것을 여러분 우습게 볼게 아닙니다. 그 당시 기독교 신앙의 엑기스를 그대로 담은 것입니다. 죄를 사하는 하나의 세례를 믿으며 죽은 이들의 부활과 후세의 영광을 기다리나이다. 아멘.

동방교회가 니케아신조를 외우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요. 시간이 거의 다 됐습니다. 1시간 채우기에는 조금 남았습니다마는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오늘 조금 긴 한 패라그라프를 공부했습니다 '나는 믿습니다'의 첫번 패러그라프였습니다. 제가 이것 저것 두서없이 여러말씀을 드렸는데 여러분들에게 어떻게 전달됐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여기서 중요한것 정리한다면 사도신조가, 오늘의 결론(핵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도신조가 사도들로부터 시작된것은 아니지만 사도들이 전한 복음 선포와 연결된다고 하는 점에서 사도적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봐도 좋다.

예 고맙습니다. 수고하셨구요.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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