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강 녹취록 - 1장 나는 믿습니다(2)

사도신경해설 조회 수 3303 추천 수 1 2009.04.05 00:08:22

제4강 녹취록-나는 믿습니다(02)

안녕하세요.

오늘 우리는 사도신경 해설을 4번째 시간을 맞았습니다. 오늘부터는 조금 더 진도를 빨리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3회 때부터 본격적으로 이 판넨베르크의 책을 시작했습니다. 지난번에는 그 내용 전체, 직접적인 내용이라기보다도 내용은 내용인데 판넨베르크가 이 앞부분에서 사도신경이 이 교회사적으로 어떤 배경에서 형성되었는가를 짤막하게 묘사한 그 내용을 보았어요. 그게 주로 로마교회의 세례문답에서 연유되었다 하는 거죠. 이게 초기 기독교 로마교회를 중심으로 돼서 사실 전체 교회에 연관이 되고요. 아주 중요한 그 신조문인데 동방교회에서는 그것보다는 니케아신조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그랬습니다. 이게 조금씩, 전체적으로 보면 두 가지 신조가 기독교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거죠. 사도신조, 사도신경 신조와 니케아 신조 두 가지는 서로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기본 구조는 똑같습니다. 지난번에 제가 니케아신조를, 샘터교회에서 매월 한 달에 한 번씩 하는 성찬예식 때에 외우는 읽는 니케아 신조를 읽었는데요. 구조 자체는 똑같은데 조금 더 신학적으로 세밀하게 규정이라고 할까?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그걸 지난번에는 했구요.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판넨베르크가 이야기하는 사도신경에 대한 해명안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게 여기는 “나는 믿습니다”라고 한 게 뭐냐 하는 거죠. 사도신경 첫 번이 그렇게 시작하죠. “Ich glaube” “나는 믿습니다.”라고 하는 게 무어냐 하는 거죠? 이 믿음에 대해서는 제가 다른 글에서도 여러 번 썼습니다. 한국교회에는 이 믿음이라는 것이 아주 중요한 신앙의 내용이 되겠습니다. 물론 중요한 게 당연한 거죠. 특별히 로마 가톨릭 교회와 약간의 차이를 두고서 우리가 그것을 강조하는데요. 그건 마틴 루터가 얘기하는, 마틴 루터가 제기한 세 가지 신학적 슬로건 중에 하나가 바로 이것 “솔라 피데”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직 믿음이다. 믿음이다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다 이러한 점을 개신교가 오랫동안 강조해왔기 때문에 한국교회에서 특별히 이 믿음이라는 것이 크게 강조되고 있습니다. 당연히 필요한 이야기예요. 그러나 문제는 “믿음 만능론” 같은 것들은 그리 건강한 것은 아닙니다. 믿기만 하면 모든 것이 될 것 같은 그러한 생각이 이게 신앙적이라고 할 수 없는 건데 그게 어쨌든 우리 안에는 중요한 요소로 들어오게 됐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차츰 이야기 하면서 좀 정리를 하겠습니다. 그걸 미리 정리를 하는 뜻으로 한마디 짚고 넘어간 간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믿음이라고 할 때 믿는 사람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니 그게 똑같은 말 아니냐 그렇게 생각하시는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믿느냐 하는 그게 중요한 거죠. 누구냐가 중요한 거죠. 누구냐. 물론 하나님이고 성삼위일체 하나님 예수 그리도 성령이구요 사도신조의 뒷부분에 나오는 여섯 가지를 포함한다면 사죄와 교회까지 포함하는 건데요. 이러한 내용이 어떤 것이냐를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믿고 있는 자기 자신을 중요하게 생각할 수 있는 위험성이 거기 있다는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 만능론”이 자칫하면 내용이 어떻든 간에 무조건 믿기만 하면 되는 것 같은 그런 상태로 좀 오용, 왜곡될 수가 있습니다. 가장 전형적인 예가 사이비 이단들이거든요. 통일교라든지 최근에 불거진 신천지라든지 심지어는 JMS 이런 교도들도 믿음을 강요하거든요. 사실 어떻게 보면 사이비 이단 소종파로 갈수록 믿음 자체로만 보면 더 강합니다.

우리 기독교 정통 기독교에서는 믿음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믿음의 대상이 되는 하나님이 더 중요한 것이고 그 하나님이 누구냐 하는 것을 잘 이해하는 것 이게 중요한 거죠. 사실 그래서 우리가 믿고 따라야 될 우리 삶의 토대를 두게 될 그 하나님을 누구냐를 알기만 하면 사실은 당연하게 믿게 되는 거거든요. 믿을 만하면 사실 믿게 되는 거지요. 이건 다른 일상에서도 비슷할 것입니다. 억지로 우리가 누구를 사랑할 수 없잖아요. 사랑할 만한 사람이 나타나면 사랑하게 되잖아요. 젊은 사람들에게나, 뭐 다른 일반적인 사람들도 마찬가집니다만 그렇습니다. 책도 읽을 만한 내용이 되면 읽거든요 억지로 읽지는 못합니다.

제가 똑같은 얘기를 반복하는 것 같은데요. 그 “믿는 게 뭐냐” 하는 문제를 오늘 이야기 합니다. 특별히 판넨베르크는 여기서 “믿음과 신뢰” 요거 두 가지를 좀 구분하면서 기독교 신앙에 핵심 속으로 들어갈려고 합니다. 사도신경의 첫 번 문장이라고 할까요. 그렇죠. “나는 믿습니다.” 이렇게 시작하니까요. 고것이 말하려고 하는 맥락 속으로 들어가야 되겠습니다.

텍스트를 보겠습니다. 어딘지 찾으셨죠? 이 강의 들으실 때는 꼭 이 텍스트 이거를 복사하든지 아니면 책을 갖고 있든지 그렇게 하면서 보시기 바랍니다. 일단 저는 오늘 책은 없구요. 이번 한 달 동안에 책이 없게 생겼어요. 누굴 빌려주었습니다. 저도 출력을 해서 지금 제가 보고 있습니다. “나는 믿습니다. 제 1장 “나는 믿습니다.” 첫 번 패러그래프는 지난주에 했어요. 거기에 각주로 사신에 대해서 설명을 했습니다. 거기까지 했어요.

오늘은 그 다음 두 번째 패러그래프입니다.

세례, 신앙, 그리고 신앙고백은 사도직의 근원이라는 하는 점에서 같은 짝을 이루고 있다. 다른 설명이 필요 없겠죠. 세례, 신앙, 신앙고백. 세 가지. 사도신경이 신앙고백 이예요. 그건 신앙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고. 이것은 기본적으로 세례 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나온 문서, 하나의 형식, 신앙 형식이라고 하는 점에서 연관되는 것이고요. 이거는 사도직의 문제인거죠. 예수님의 제자로서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 혹은 사도가 됐다는 사실이 뭐냐 그리스도와 하나가 됐다는 것이 뭐냐 그러한 차원에서 이 세 가지는 다 서로 통하는 이야기입니다. 각각 세 항목에서 방법적으로 “나는 믿습니다.” 천명한다고 하는 것은, 요 세 항목은 세례신앙, 신앙고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난주에 우리가 확인했듯이 아버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과 사죄와 교회, 세 번입니다. 세 번에 걸쳐서 “나는 믿습니다” 이렇게 천명하는 건데요. 이것은 고백하는 자가 아버지며 아들인 그리고 영인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하는 것을 의미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이죠. 아버지로서의 하나님, 아들로서의 하나님, 영으로서의 하나님입니다. 삼위일체는 앞으로도 또 나오게 될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들 일반 신자들에게 잘 정리가 되지 않아서 그냥 아주 관념적인 교리, 신학자들만 뭐 이야기 하는 것에 불과한 그런 것으로 이해될 때가 많습니다. 근데 삼위일체가 전혀 그렇지가 않고요. 이거는 우리 신앙을, 혹은 우리의 영성을 이제 풍요롭게 하는데 기독교 이천년 역사와 이렇게 맞닿게 하구요. 기독교 신앙의 영성의 역사성을 갖게 하구요. 그리고 오늘에도 계속적으로 우리 신앙이 오늘 현실의 삶에 기독교적으로 바르게 적응할 수 있도록, 혹은 거기에 대항할 수 있도록, 아니면 거기에 변증법적으로 반응할 수 있도록 어떤 힘을 제공해 주는 기독교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 가 여기서 두 가지를 말씀드린 거예요. 삼위일체가 우리 기독교 영성에 어떤 역할을 하느냐하는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두 가지 역할을 한다고 그랬습니다. 그게 뭔가 여러분들! 방금 제가 이야기했는데 머릿속에 정리가 됐어요? 제가 이게 신학교라고 하면 신학생들한테 그렇게 얘기할 겁니다. “요~ 두 가지 주제로 중간고사 혹은 기말고사, 논술시험을 친다.” 이것에 대해서 연구를 해 와라 하는 거죠. 삼위일체가 우리 기독교 신자들의 신앙 혹은 영성에 대해 어떤 역할을 하는지 두 가지 관점에서 풀어서 쓰라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거죠. 두 가지는 이와 같습니다.

첫째, 오늘 우리 기독교 신앙을 이천년 기독교 역사와 연결시킨다 하는 겁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니케아신조와 니케아회의와 콘스탄티노플공회, 뭐 그런 가장 중요한 기독교 교리가 형성된 4세기에 완성된 교리거든요. 그러나 고 4세기만이 아니라 그 이전서부터 그러한 논쟁은 계속되어 왔습니다. 터툴리안 그러한 교부들에 의해서 계속된 문제구요. 그러니깐 기독교 교리라고 하는 것은 어느 한 순간에 어떤 위대한 천재가 탁 머리를 굴러서 딱 만들어 낸 게 아니라 수십 년 동안 수백 년 동안 이게 사유되고 이게 녹아지고 논쟁하고 그런 과정에서 천천히 무르익어서 어느 때에 결정적으로 종교회의를 통해서 신학적으로 결정하는 거예요. 이건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근데 이게 기독교 교리만이 아니라 사실은 그게 성서와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거거든요. 사실은 교리는 성서안에서 나왔다고 보니까요 교리는 성서와 다 서로 주고받는 이야기입니다. 지난주에 말씀 드렸듯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 사도신경적인 신앙고백이, 그리스도 신앙고백을 중심으로 해서 그런 것들이 사실은 복음서 기자들에게도 직간접적으로 연결, 연관된다고 했죠. 서로 그렇게 되는 거예요. 성서도 그렇게 그러니까 천천히 천천히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어떤 사상들이 무르익고, 그것이 이 중간 중간 어떤 위대한 성서 기자들 혹은 영성가들에 의해서 실제적인 에 어떤 틀이 갖게 되고, 그것이 어떤 순간 이르러서 일종의 “카이로스”라고 할 수 있죠. 그때가 돼서 일종의 하나의 교리로 에 아니면 하나의 문서로 작성되게 되는 겁니다.

부활신앙만 해도 그렇습니다. 이게 구약성서에는 별로 없다고 하는 것 아시죠. 사후의 삶에 대해서 구약성서는 별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죽음은 거의 다 이 “게헨나” 혹은 “스올”이라고 하는 땅의 어둠침침한 곳에 가서 떨어져서 있을 뿐이지 어떤 그 우리가 지금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부활의 새로운 세계, 밝고 귀하고 영생이 있고 그러한 세계는 구약성서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젠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갔을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 그러니까 그러한 영성가 예언자들이라고 하겠죠. 그들에 의해서 이제 부활사상이 싹이 트게 되는 거예요. 이게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느냐 것은 아주 당연한 어떤 역사의 과정에서 나오게 되는 겁니다.

이런 거죠.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예루살렘 성전과 해서 꾸준하게 그렇게 하나님이 백성으로 살아갔는데 이 모양이 왜 이렇게 됐냐? 왜 자기들이 바벨론 포로로 와 잡혀서 이렇게 사냐? 그러한 문제의식을 갖게 되고요. 같은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왜 이 땅에서는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늘 좋은 일만 일어나는 건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거나 악한 사람들에게 더 좋은 일들이 일어날 때가 왜 이렇게 많은가? 하는 그런 질문을 갖게 된 겁니다. 하나님의 정의로움이 대체 뭐냐 이런 것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되는 거죠. 다 그게 신정론에 문제라고 할 수 있겠죠. 어떻게 보면 이 신정론 문제는 신․구약성서의 전체 핵심적인 주제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달리신 사건도 신정론적인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거든요. 왜 그 의로운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 나라에 온전히 몰입해서 살았던 그 예수가 가장 저주스러운 십자가의 처형을 당할 수밖에 없을까? 왜 의로운 자의 고난이란 문제들말구요.

바벨론 문제로 다시 돌아가서 그 시대 그 사람들이 얻은 대답은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라고 하는 것은 이 땅 위의 삶만으로 다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죽은 다음에 새로운 세계에서, 어떤 이스라엘의 묵시문학으로 “에온”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New “에온”이죠. 새로운 “에온”에 그때에 그들이 하나님과 하나 되는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간다. 그때 하나님의 정의가 아주 구체적으로 실현된다. 그렇게 믿게 된 거죠. 그러니까 부활사상의 단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쭈욱 몇 백 년 동안 넘어오면서 초기 기독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아주 구체적인 형태를 얻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성서도 그렇게 역사와 더불어서 어떤 그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발전시켜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발전이라는 것이 단순히 진화론적인 혹은 역사학적인 그런 발전, 기계적인 어떤 발전을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고요. 또 하나님이 그런 방식으로 계시하신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 하나님의 계시에 바르게 Response 한 민족이 이스라엘이라고 할 수 있고 한쪽으로는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참여한 초기 기독교 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역사 안에서 하나님의 계시사건, 그것에 대한 인간들의 반응, 이런 것들이 일어났다. 그래서 성서가 형성되고 기독교 교리도 만들어졌다. 그런 점에서 오늘 우리가 2천년 기독교 역사와 계속 소통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아니면 그 역사가 없으면 지금도 없으니까요.

예를 들자면 최첨단 유전과학을 공부한다고 해서 생물학 과학 기초과학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잖아요. 헬라철학자들이 연구한 것, 거기는 의학과 철학이 일치되었으니까요. 헬라사람들의 그들의 철학을 지금도 공부하잖아요. 아주 2천 5백전, 2천 년 전의 학문을 공부하는 것은 그게 다 연결되기 때문에 그렇거든요. 조금씩 패러다임이 바뀌어 가고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조금씩 조금씩 변형이라기보다도 심화되고 있지만 그러나 결국은 다 연결되는 겁니다. 역사를 우리가 소홀이 다루지 말아야 됩니다.

오늘 우리는 그런 것들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지금 여기서 here and now 아주 실존적인 여기서 내가 예수 믿고 영접하고 용서받았다는 기쁨과 평화를 누리며 살면 된다. 대단히 실존적인 신앙을 가지게 되는 거죠. 네 결국은 실존적인거죠. 어떤 것들이라도 자기가 생각하고 받아들이고 하나님과의 만남 안으로 들어가야 된다는 점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런 실존만으로 떨어지면 그러면 우리는 방향을 모르는 거죠. 지금 우리가 논길을 가는데 요 앞에만 들여다보고 가게 된다면 제자리에서 뱅뱅도는 것 아니겠어요. 아니면 엉뚱한 길로 가는 것처럼 말이죠. 기독교 신앙도 사실은 이와 같습니다. 사이비 이단들이 처음부터 그렇게 잘못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들의 형태가 그와 같습니다. 아주 실질적인 거예요. 아주 현재적인 거예요. 지금 청중들이 무엇을 요구하는가에 대해서 최대한으로 반응하는 거죠. 그게 또 잘 맞아 떨어지니까 그쪽으로 계속 가게 되구요. 그게 박옥수, 김기동, 신천지 이런 쪽의 결과를 낳게 됩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제가 실존적인 신앙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아니구요.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전체 기독교의 역사의 흐름과 맥을 나누어야 된다. 그런 것이 없이 단절된 상태에서는 우리 신앙의 방향이 구부러질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신앙을 우리가 반복적으로 재회상하고 다시 검토하고 그러한 영적 힘 안으로 들어간다면, 그게 이제 예배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인데요. 그런 과정을 통해서 이루는 기독교 2천년 역사화 호흡할 수 있는 거죠.

그게 하나였고 또 하나는 현대 삶이 요구하는 것에 대해서 기독교적으로 적절하게 반응할 수 있는 있는 혹은 대안이나 혹은 대항을 제시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 그거였습니다. 요거는 제가 그렇게 방향만 이야기하고 그만 이야기하겠습니다. 더 많은 논제들이 필요하니까요. 그냥 한마디만 집는다면 이렇습니다. 21세기 첨단 물리과학시대에 기독교가 어떻게 대화하겠냐? 그들에게 기독교적인 신앙을 해명하고 변증하느냐? 하는 그런 문제 말입니다. 어떻게 해야 되나요? 그러니까 빅뱅이라든지 장이론이라든지 초끈이론이라든 지 등등 그러한 이론들이 점점 규명되는 시대에 우리가 말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그들에게 해명할 수 있느냐 하는 거죠. 이게 판넨베르크도 머리말에서 아마 그 예기를 썼을 겁니다. 세 가지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방향 중에 하나가 바로 이런 거였죠. 현실성, 현대인들의 현실성에 맞도록 이야기를 하겠다. 현대인들이 이해하는 현실성과의 관련속에서 이 사도신경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를 설명하겠다는 이러한 대목들입니다. 제가 빅뱅이나 장이론 이런 것들을 하나님의, 창조의 하나님 아버지로서. 고걸 접어두고. 제가 자꾸만 이야기가 분산되는데요. 장이론 이런 것들이 성령론 차원에서 얼마든지 해명이 가능하거든요. 성령 삼위 일체, 영과 영, 프뉴마, 영, 거룩한 영, 인격적인 존재인 영, 그걸 어떻게 이해해야 될까요? 우리들이 앞으로 계속 생각해야 될 문제이구요. 뒤에 강의 오늘 거기까지 하겠습니다만 열려져 있는 그러한 개방 세계로서의 영, 그런 것들에 대한 이해가 많이 필요한 것이거든요. 제가 다른 것을 생각하다가 깜박했습니다. 말씀드려야 될 내용을요.

삼위일체라고 하는 것이 단순히 고대인들에게 혹은 신학자들에게만 필요했었던 교리가 아니라 오늘 우리 한 기독교인이 자기의 영성을 공유하고 풍요롭게 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기독교 가르침의 핵심이다.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삼위일체를 우리가 이해하고 접근하느냐 하는 것들이 요게 하루 이틀에 되지 않거든요. 일종의 개념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런데 그게 여러분에게 점점 넓어지고 명료해지면 여러분들의 신앙이 훨씬 다이나믹해질 겁니다.

“나는 믿습니다.”라고 천명한다는 것은 고백하는 자가 아버지이며 아들인, 그리고 영인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써 그는 세례의 축제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고대 교회에서 이러한 축제형식은 신앙 고백적으로 연결되어있는 마귀에 대한 세 번의 거절로 나타난다. 고대 교회에서 마귀에 대한 거절을 세 번 어떻게 했는지 제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 아들, 영, 이 세 위격에 대해서는 나는 믿습니다. 이렇게 말을 하고 마귀에 대해서 세 번 거절하는 이게 예수님의 광야에서 시험받은 것과 연관되는 걸까요? 그건 제가 충분하게 조사를 하지 못했습니다. 어쨌든 세 번씩 연결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피세례자는 자신의 고백에 근거해서 세례를 통하여 부활하신 예수에게 맡겨지도록 삼위일체의 하나님에게 맡겨졌다. 양여되었다. 그 예수는 아버지와 하나가 된 바로 그 분이다. 아주 기초적인 기독교 신앙 내용인데 중요한 게 다 여기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들어있습니다. 기초를 우리가 놓칠 경우가 많이 있거든요.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고백을 함으로서 사도신경적인 그러한 신앙과 고백을 함으로서 세례를 받고 그래서 이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맡겨지도록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양여되었다. 우리가 완전히 그분에게 맡겨진 거죠. 던져진 거죠. 네. 이 말도 우리 스스로의 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다고는 칭의론하고도 연관되는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례와 신앙고백과 그리고 뭐 뒤에 나가면 성만찬도 연관되는 건데요. 이런 것을 우리가 정확하게 이해한다면 그렇게 되면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고 우리 영성이 더 풍요로워 질 수 있습니다. 물론 여러분들이 아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는 것인데 그게 추상적으로 아는 것하고 실질적으로 깨우쳐서 아는 것하고 다른 건데요. 세례를 받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맡겨졌다고 하는 이것을 그냥 공식으로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이런 것을 더 이해하려면 예수의 부활, 예수의 사건, 종말론적인 생명의 영이 이런 것들이 다 같이 들어와야지만 세례를 통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맡겨졌다고 하는, 그 예수는 부활하신 분이니까요. 그 사실에 일치할 수가 있겠죠.

신앙고백과 세례와의 연관이 오늘 우리의 의식구조에서 더 이상 전제조건이 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믿습니다.” 이러한 문장에 담겨있는 두 단어의 의미와 무게를 정당하게 측정하기 위해서는 그 연관을 기억해야만 한다. 두 단어는 I believe 이걸 예기하는 거죠. 세 번 “나는 믿습니다.”라고 고백할 때 오늘의 기독교인들에게도 역시 중요한 것은 아버지며, 아들이며, 그리고 성령이신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이다. 네. 삼위일체 하나님이시지요. 창조주 아버지,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생명의 영인 성령 말입니다. 지난번에 성육신에 대해 이야기를 잠깐 한 것 같은데, 초월적이고도 전능한 하나님의 표상과 역사안에 내재해서 우리와 똑같은 육체적인 삶을 살았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오늘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영, 힘으로 동양식으로 말하자면 어떤 기(氣)로 활동하는 성령. 이 성령이 본질적으로 하나라고 하는 이 사실을 우리가 삼위일체에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기본구도구요. 그런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믿는다고 하는 것은 상당히 역동적인 문제인거죠. 역동적인 거죠. 창조의 아버지 하나님. 그 분도 아직 우리에게 완전히 알려지지 않았지만요. 하나님. 역사에 우리와 똑같이 살았던 예수, 거기서 우리는 친근, 하나로 느끼잖아요. 창조의 능력은 아버지시고 우리 인식을 뛰어넘는, 일종의 절대타자로서의 하나님, 예수는 우리와 똑같은 성육신된 육신을 가진, 몸을 가진 하나님, 그리고 지금 우리가 모르지만 우리가 숨을 쉴 때나 아니면 포도를 영글게 하거나 남녀가 만나서 생명을 잉태하게 하거나 이런 모두 생명의 근원으로 작용하는 어떤 힘들, 이런 것이 하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시겠어요? 그게 어떻게 하나냐? 그게 인제 삼위일체의 신비입니다. 그게 왜 하나냐? 그 신비라고 하는 것은 언젠가 말씀드렸다시피 막연하고 모호하다는 것이 아니라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확실한 어떤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거든요. 알려지지 않았다기보다도 우리가 실증적으로 확인하는 것이 아닌 그런 확실한 어떤 사건 세계 그런 것들을 가리킵니다. 그러한 삼위일체의 능력 혹은 신비를 아는 것이 기독교 신앙에서 정말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에서 신앙이 현대인들에게 여전히 바르게 받아들여지고 실행될 수 있을까? 오늘날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고대 기독교 사회에 딸린 교리적 부스러기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어떻게 우리는 믿음의 현실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이 표현을 인식할 수 있는가? 우리 스스로 완전한 신뢰심으로 이런 현실성을 의지할 수 있다는 관점에 근거해서 말이다. 정말 우리가 그렇게 믿을 수 있는 그러한 현실성으로 삼위일체를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듯이 하나님에 대한 밋밋한 언급은 분명히 심각한 문제다. 그렇죠. 아주 건조하죠. 혹은 그러니까 너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데 그러냐? 이야기 하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관심은 없는 거예요. 자기에 대한 관심입니다. 그 차이를 아시겠죠. 제가 그것을 너무 많이 강조했기 때문에 여러분의 머리에, 여러분의 귀에 인이 박힐 정도일겁니다. 그런데 그게 중요하기 때문에 제가 자꾸만 잔소리처럼 반복을 하는 건데요. 신자들, 기독교 신자들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 없습니다. 그냥 축복해준다. 내가 죽은 다음에 나를 하늘나라 가게 해준다. 그런 정도지. 하나님의 삼위일체 존재신비, 이거 말을 그렇게 붙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하나님에 대해서는 아주 뻔한 뒷방 늙은이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표현이 정확하겠네요.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뒷방 늙은이입니다. 제가 어떤 글에 하나님의 망각이라고 표현했는데 하나님이라고 하는 낱말은 있는데 하나님의 현실들이 우리들에게는 공식으로 딱 굳어져 있어 갖고 더 이상 거기에 대해 관심이 없는, 그러한 상태라고 하는 거죠.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생각이 너무 거기에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런 문제는 요즘 큐티, 다비아 성서묵상에 이슈가 좀 있죠. 하나는 하나님 제자들의 두려움, 하나님의 절대타자 낯 섬, 이런 경험들이 우리들에게 별로 없어서 밋밋한데요. 판넨베르크도 이런 것을 굉장히 심각한 문제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삼위일체론적인 신앙 형식이 실제로는 그 신앙과 대립적으로 진행되는 우리의 세상살이와 그 표현에 적절한 것인가? 지금은 우리가 삼위일체론적 신앙으로 살지는, 이 세상이 그것과 상관없이 굴러가고 있지 않습니까? 오히려 성령, 성령의 하나님 그게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오늘 현대 사회에 어느 정도나 어필이 되겠습니까? 그냥 모든게 다 경제 메커니즘으로 돌아가고 있는데요. 다시 또 봅니다.

현재의 삶에 내재한 모든 것이 억압적인데도 불구하고 미래에 대한 신뢰가 신앙적으로 표현될 수 있을까? 설명할 필요도 없이 분명하죠. 고건 우리가 경험하는 삶은 억압적입니다. 교육도 그렇고 정치도 그렇고 거의 모든 삶들이 그냥 사회 구조라고 할까 이런 것들이 구조도 그렇고 우리의 의식도 그렇고 억압을 받고 있는 거죠. 진정한 해방 자유, 적절한 표현, 여기에 맞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없다고 봐야죠. 계속 투쟁적이고 말이죠. 근데 이러한 상태에서요. 작은 것으로다 민감하게 이해타산 속에 빠져들고요. 종교들 사이에서도 종교끼리도 그러한 일들이 있고요. 그런 점에서 개신교회가 좀 더 부끄럽기도 합니다. 거기로 들어가면 시간만 잡아먹으니까 그만 두겠습니다.

그냥 이름만 내걸면 이렇습니다. 군 대체 복무 입법 지금 많이 되가다가 이명박 정부 들어가서 처음부터 다시 검토하겠다 이런 쪽으로 나가고 있단 말입니다. 여호와의 증인 이 사람들이 종교적 양심으로 군대 가지 않겠다는 이런 문제들, 이런 것에 대해서 대체 복무할 수 있도록 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24개월 군대 가지 않고 30개월이나 40개월 양로원이나 복지 이런데 가서 더 힘들게 봉사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당연한 거거든요. 필요한 건데 개신교가 이걸 반대하고 있다고 하는 건데요. 특별히 한기총에서 그런 일들을 하고 있는데요. 그러니까 우리 사람들이 정말 창조의 하나님 십자가 처형당하셨지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구원자. 생명의 심층에서 우리를 이끌어 가는 그 영을 믿고 있는 우리의 신앙이 정말 오늘의 삶에 그대로 맞느냐 이거죠. 전혀 그렇지 않게 살면서 이 세상이 돌아가는 메커니즘 우리가 거기에 들어가 있는, 우리 자신을 포함에서 이 모든 것들은 우리의 기독교 신앙과 거리가 먼 것같이 있는데 이러한 상태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 할 수 있겠느냐 하는 거죠.

기독교 신앙이 어떤 그 현실성을 담보해낼 수 있는가 하는 거죠. 이게 이원론적으로 구분되는 거죠. 자꾸만. 그냥 기독교 예수 믿는 것은 그냥 복 받고 마음 편하고 위로받고 그렇게 하는 것이다. 세상살이는 그냥 다른 방식으로 하는 거다. 이렇게 이중적인, 이원론적이라고 할까요. 그런 것이 기독교인들에게 많이 있잖아요. 그렇게 되면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합니다. 분열현상이고 이율배반적이고 말이죠. 상당히 불안하고 그런 것들이 우리 기독교 신자들에게 많이 나타납니다.

개방된 세계를 지향하는 것이지 고정된 상태*를 지향하는 것이 아닌 그런 신뢰가 말이다. 네? 무슨 말이예요? 이 신뢰. 트라우엔이라고 하는 독일어. 참된 신뢰,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참된 신뢰 이런 것들이 어떤 것을 향하느냐 하면 개방된 세계. 고정된 상태가 아닌 개방된 세계를 지향하는 그러한 신뢰가 오늘 이 억압적인 이 현실 속에서 신앙적으로 표현될 수 있을까 하는 거죠. 그런데 이것을 쉽게 말하면 기독교 신앙이 그냥 허울 좋은 뭐라고 할까요? 죽었느냐 살았느냐 그게 정말 생생하게 우리의 삶, 사회, 국가, 세계 안에서 살아있는 것으로 전달될 수 있느냐 이해될 수 있냐 아니면 그냥 껍데기만 남아 있는 형해화 되버린 그러한 송장과 같은 그런 것에 불과하냐 하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에서 판넨베르크가 지금 우리 기독교인이 살고 있는 세계인데 그 세계가 개방된 세계를 향해, 되는 그런 신뢰를 예기하는 것이죠. 그냥 열광주의적이고 자격지심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기독교 세계를 만들겠다 그러한 세계가 아니라 개방된 세계예요. 개방된 세계와 고착된, 고정된 세계라고 하는 것은 우리 기독교 종말론적 신앙에서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우리들은, 기독교 신앙은 이 세계를 보는데 이 세계 안에 있는데 그리고 그 신앙은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그런 관점이잖습니까? 이런 것들을 열리게 본다는 거예요. 말이 표현이 적당하지 않네요. 개방된 세계를 내다보는 것입니다. 이 말은 그러니까 종말론적으로 이 세계가 어떻게 될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는 예기인거예요. 역사 결정론과 기독교 역사관은 다릅니다. 이게 아주 미묘한데요. 기독교 신자들은 오히려 기독교 역사 결정론에 떨어질 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섭리를 말하는데 섭리신앙하고 역사결정론과는 다른 건데요. 이게 모양이 비슷해서 우리가 착각을 하는 거죠. 이 세계가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결정되지 않은 것으로 보는 세계관, 그래서 우리 개방된 세계, 종말론적인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묵시문학적인 표현으로 여러분이 실감있게 들으라고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현재는 나무와 저기 밑에 소나무들이 있는데요. 소나무와 노루 옆에서 뛰는 노루, 노루는 안보입니다. 노루가 이렇게 달라요. 그러나 어쩌면, 이렇게 식물과 동물이 다르지요. 어쩌면 미래의 세계에는 식물과 동물의 중간쯤 되는 그런 생명체가 나올 가능성도 완전히 부정될 수 없는 거죠. 이 개방된 세계관이라고 하는 것에 말씀드리는 거예요. 종말론적인 역사관을 말씀드리는 거예요. 묵시문학이 말하는 세계라고 할 수 있는 거죠. 우리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그러한 세계로 가고 있다. 그러한, 이거는 역사에 대해서 무책임한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거예요. 어느 쪽으로 되던 간에, 아 말 표현이 적당하지 않는데. 고정되어 있다.

아 이런거죠. 착한 사람들끼리 잘 해야돼. 예수님의 비유, 가르침에 다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수능시험 잘 본 학생들은 서울 대학에서부터 차례로 쭈욱 가야 돼. 이런 것들이 고정된 세계입니다. 그런데 꼴찌가 첫째가 된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수능시험을 봐서 꼴찌서부터 서울대학교 보낸다. 그러한 사회시스템이 된다. 그런 것은 우리 고정된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인데 개방된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얼마든지 가능한 세계입니다. 그렇게 된다고 해서 세계가 불행해지는 것은 아니잖아요. 우리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님, 세계 창조하고 구원하시고 그리고 생명으로 끌어가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개방된 세계안에서 사는 우리들이 믿고 있다고 하면서 우리들이 현재 살아가는 모습은 고착된 세계관에 머물러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말을 자꾸만 여러 가지로 번거로웠는데요. 핵심적으로 말씀드리는 말씀은 바로 그겁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하는 게 뭐냐 하는 거죠. 막연하게 옥황상제를 믿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열심히 일했으면 칭찬해주고 복 받고 하는 그러한 것을 믿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런 방식으로 한다면 굳이 성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을 필요는 없어요. 그건 그냥 산신령을 믿어도 되고 심지어는 예쁜 수석, 수석 좋아하는 사람들, 신앙처럼 하는데 수석 하나 책상하나에 올려놓고 매일 거기에 절하고 매일 그렇게 살아도 얼마든지 편하게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은 그러한 게 아니라는 거죠. 돌이나 산신령이 아니라 어떤 인격자를 믿는, 그게 바로 인간과 똑같이 생각한다고 해서 인격자가 아니라 그 분의 고유한 방식으로 세계를 통치하고 구원하고 계획하고 종말론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바로 그 분을 믿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신앙, 그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신뢰 믿는다고 하는 것은 그 하나님이 누구냐를 담아내는 것, 그걸 안고 있는 거예요. 다는 아닌데 모르니까 아무래도요. 그러니까 그 분이 우리에게 더 계시할거라고 하는 희망까지 포함한 믿음입니다. 그런 그러니까 참 이건 우주론적이고 종말론적이고 계시론적이고 그런거 죠. 계시론적이란 말도 사실은 좀 여러분들이 신학적으로 훈련이 되지 않았다면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와 닿지 않을 거예요. 계시론 연관되는 문제도 여러 가지로 생각할 것이 많이 있으니까요.

어쨌든 제가 다 설명하지 않고 지나가겠습니다. 제 공부 중에서 우리 같이 공부하면서 신학적 용어들이 들어올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을 겁니다. 당장 들어오지 않더라도 별로 걱정하지 마세요. 한 20%만 알아들어도 좋습니다. 그 어떤 전문적인 용어라고 하는 것은 하루 이틀에 우리들에게 익숙하기 때문이 아니라 시간이 걸리고요. 그리고 자꾸만 말을 듣다보면, 전반적인 흐름을 알고 있으면 고 컨텍스트 속에서 단어들의 의미들이 확 살아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고건 낱말의 뜻이 아니라 살아있는 개념들이기 때문에 그냥 신학사전을 보고서 알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강의를 들으시면서 그러한 단어들이 낯설더라도 염려하지 말고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임없이 우리가 유지한다고 하는 그러한 삶의 태도를 그 안에 안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기독교 신앙, 믿는다고 하는 이 말은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말한 대로 깨어 있어야 되는 거죠. 깨어 있다고 하는 어떤 것이 나에게 이익이 되느냐 않느냐 내가 하루에 몇 시간 기도했느냐 아니냐 그런데 깨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말을 거는 그러한 하나님, 삼위일체로서 이 세계를 통치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에게 우리의 영적인 촉수를 열고 있는데 깨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 신앙은 믿습니다. 믿습니다 믿음없는 그 상태를, 고거로 들어가는 것이라기보다도 성삼위일체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잘 공부하고 우리의 생각의 폭을 넓히는 그러한 것들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꼭 그러한 것이 아닌데 일부분을 말하다 보니까 강조된 것 같습니다.

그러한 신뢰이구요. 고정된 상태가 아니고 개방된 세계, 오늘 공부한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라고 할 수 있을 거에요. 개방된 세계, 그런 차원에서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습니다. 오늘 다비아 성서묵상에 부활이후에 우리가 어떻게 될지 전혀 우리는 모른다는 말이 있었는데요. 우리는 세계가 어떻게 변한다고 하더라도 그런 것에 대해서 두려워 할 건 없겠죠. 부활의 상태에 대해서는 우리가, 좀 비약해서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시냇물이 될 수 있겠고요. 지금 보면 우리는 내가 유지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잖아요. 내가 없어지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잖아요. 자기 집중이 너무 강해서 우리가 내가 아닌 다른 무엇이 된다는 것에 대해 너무 크게 공포심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을 넘어 서야 될 거예요. 네 거기까지만요.

그러한 신뢰가 필요한데요. 삼위일체 하나님, 개방된 세계를 지향하는 그러한 우리 신앙인들의 하나님에 대한 신뢰, 어떻게 이런 신앙이 사도적 신앙고백의 형식에서 재발견될 수 있는가 하는 거죠. 벌써 1600년전, 1700년전에 더 1800년전 이전에 형성되었던 고대기독교의 신앙고백이 열린 세계를 지향하는 20세기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을 또 오늘 현실에서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는 그 통로가 될 수 있느냐 하는 거죠. 가능하겠어요? 안하겠어요? 사람들은 판넨베르크가, 이미 이야기했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은 고대인들이 생각했던 교리적 부스러기 그런 것들, 그래서 하나님이 밋밋해져 버린 천편일률이 되어 버린, 맨 날 염불을 외우듯이 그렇게 하니까 결국은 새로워 지지 않는 새롭게 와 닿지 않는, 그러한 신앙에 머물러 있다고 하는 겁니다. 어떻게 우리는 사도신경의 이러한 구도 안에서 열려진 세계를 향한 우리의 신앙이 참된 생명의 신앙적 현실성을 확보할 수 있을까 이러한 것입니다.

개방된 세계라고 하는 것에 제가 각주를 좀 달았어요. 고거만 읽는 것으로 오늘 공부를 마치겠습니다.

개방된 세계와 고정된 상태라는 대조적 개념은 신학의 보편사적 해석학을 설정하고 있는 판넨베르크 사상의 중요한 출발점이다. 모든 세계의 현상과 실체들은 현재 고정불변하는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종말을 향해서 열려져 있다는, 즉 변하고 움직인다는 시각이다. 우리는 이 세상을 향한 단순한 직관만으로도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사물은 변하고 움직인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계절 변화와, 그 사계절의 과정에 따른 식물의 변화가 있으며,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도 역시 어린 상태에서 어미로 자라고 결국 죽는 변화를 거친다. 뿐만 아니라 우주도 역시 변화와 움직임의 과정 속에 있다. 이처럼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미래를 향해 변화되고 사라지고 있는 셈이다. 이런 개방된 세계 가운데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산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적합한 현실성을 찾아가는 게 바로 신학의 핵심 주제라 할 수 있다.

변화라고 하는 것이 단순히 봄여름 가을 겨울의 계절 변화 이러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이 궁극적 변화는 아니죠. 올 가을이 왔는데 작년에 왔고 내년에도 가을이 온다고 하는 똑같은 것이 반복된다고 생각하고 있으면 이거는 개방된 세계하고는 좀 다른 겁니다. 그건 이것마저도 변하는 거죠. 사계절마저도 변하는 거죠. 이제 북극과 남극의 얼음이 다 녹으면 이 기후변화가 오게 될 것이고 지구의 기울기가 조금 달라지면 모든 게 다 변화될 것입니다. 이러한 세계 안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데요. 여기서 2천년에 가까운, 그전에 만들어진 사도신경으로 우리가 신앙을 고백하며 산다고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런 것들을 계속 판넨베르크가 질문하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오늘 여기에서 마치겠습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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