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강 녹취록 - 1장 나는 믿습니다.(3)

사도신경해설 조회 수 3170 추천 수 0 2009.04.05 00:16:58

사도신경 해설 제5강-나는 믿습니다.(03)

안녕하세요?

오늘 판넨베르그 사도신경해설 5번째 시간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대목은 사도신경의 첫 부분입니다. 사도신경을 크게 나누면 세 항목이죠. 하나님, 성자 예수, 성령. 성령에는 교회와 사죄 이런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각각의 내용에 이 세 아티클, 세 항목에 그 내용을 각각 ‘나는 믿습니다’는 그러한 말이 앞에 나오거든요. 여기서 인제 ‘내가 믿습니다.’하는 것이 무슨 뜻인가 그거를 판넨베르크가 여기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간단한 이야기인데요. 그것을 자꾸만 복잡하게 만든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하는 것, 그것이 믿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한 것인가 아니면 믿음의 대상에 대한 철저한 신뢰인가? 그런 것들을 확실하게 구분을 하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의 오류 가능성이 있죠.

하나는 어떤 실제적인 삶에서 무기력하게 나타나는 것이죠. 우리 신앙이 우리의 삶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이 작동되는 그런 것에 머무를 수가 있습니다. 주로 지성적이라고 할까요? 좀 합리적인 사람들, 또 조금 더 나가면 약간 냉소적인 그러한 사람들이 이러한 신앙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기독교적인 믿음, 신앙 그거하고 바로 앞서 말씀드린 대로 실제로 자기가 살아가는 삶하고는 대개 관계가 없습니다. 관계가 없다고 하는 말은 정확한 표현은 아니고 믿음의 능력이 없다고 봐야죠. 바울이 예기한 대로 복음은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에 있다고 하는데요. 능력이라고 하는 것은 안 되는 것을 억지로 만드는 어떤 요술방망이라든지 그러한 방식이 아니라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표현을 빌리자면 ‘존재의 용기(The Courage To be)’뭐 이런 것에 가깝습니다. 존재는 생명 안에 들어가는 거니까요. 그런 용기를 얻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이거는 여러 가지로 또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건데요. 그러니까 이렇게 봐야지요.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하게 믿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는 거죠. 그 이외의 것들, 소위 말해서 피조물들, 인간이 만든 것들, 인간이 생산해 놓은 것들, 그런 것들이 오히려 우리의 삶을 자극하고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도록 동기유발을 해줄 때가 많습니다. 어쩌면 실제적으로 우리를 솔직하게 내 놓으면 그런 것들이 훨씬 더 많을걸요.

제가 목사인데요. 그 목회행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목사가 교회 일에 너무 빠져버리는 거죠. 그것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이야기를 하기는 하는데 실제로는 자기 욕망일 가능성이 아주 많습니다. 그 일을 자꾸만 해야 되는 거죠. 흔한 이야기로 alcoholic이 있듯이 Workaholic도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목사가 교회 일에 중독이 되어 버리는데요. 그런 사람들은 아 우리 목사 잘 한다. 열심히 일한다. 칭찬을 하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거든요. 빈둥빈둥 노는 거 보다야 그렇게 일하는 모습이 좋을지도 모르겠지요. 그리고 목사 스스로도 자부심을 느낍니다. 보통 교회 일을 놓고 의논할 때에 목사의 생각과 반대되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나오면 목사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너희들 말이지 목사만큼 교회 일에 대해서 염려하냐? 목사는 24시간 교회 일에 매여 있고 그것을 생각하는데 그러면 목사가 생각하는 것이 옳지 않냐?" 이런 식으로 밀어붙이거든요. 거의 일 년 내도록 목사들이 교회 일에 매여 있습니다. 안식년이라고 해서 6년 일하고 1년 쉬는 이런 제도, 이런 것들을 아마 목사들에게 주어도 저희가 그거를 아마 제가 그거를 감당하지 못할 거예요. 일을 하던 사람은, 그런 방식을 젖어 버린 사람은 쉬는 것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우리의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지만 존재의 용기 삶의 어떤 능력으로 나타나는 이런 것들이 없는 거죠.

그리고 또 하나는 일종의 열광주의 같은 걸 겁니다. 앞서 예기한 앞서 말한 그 믿음, 그 잘못된 오용, 남용, 왜곡된 믿음은 실제 삶에서 능력으로 나타나지 않는 거라고 그랬는데요. 이 두 번째는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모든 사람들을 거기 구겨 넣으니까요. 아침서부터 밤새도록 계속 성경 읽고 교회 나가고 여전도회 남전도회 조직하고 계속 순모임하고 요즈음은 교회에 목장 같은 것들이 있더라고요. 그런 거 해야 되지요? 계속 거기에 묶여 살기는 하는데 그게 열광주의적인, 열광주의라고 하는 것은 뜨거운 믿음으로 나타나고 있기는 있는데 거기에는 일단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이 개입될 수 없는 거구요. 되지 않고요. 그러니까 믿어야 할 대상, 당연히 아주 중요한 대상에 대해서는 점점 생각을 하지 않고 믿고 있는 자기에게 몰두하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그 사람들은 믿습니다. 믿습니다. 자기암시 비슷하게 하지요. 기도할 때마다 믿음 없음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굳게 믿습니다. 이렇게 합니다. 부흥회나 그런데 서도 이런 것들을 세뇌시키듯이 반복 강화하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전혀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무엇에 매달리듯이 그렇게 하고 결국은 그렇게 믿고 있는 자기가 아주 가상하게 생각되는, 기특하게 생각되는 그러한 어떤 믿음현상, 이것을 우리는 열광주의라고 이야기 할 수 있어요. 이러한 거죠. 두 가지다 왜곡되어 있습니다.

과연 그러니까 '기독교적인 믿음이 무엇이냐?' 에 대해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문제지요. 정말 중요한 문제지요. 이거하고 직접 연관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언뜻 생각이 나서 말씀드리려고 그럽니다. 불교에서도 요러한 부분들이 있더라고요. 그것을 믿음이라고 표현을 해야 될지, 아니면 자기 각성이라고 예기해야 될지. 아니면 수련이라고 예기해야 될지는 잘 모르겠는데 어떤 궁극적인 차원에서는 이러한 기독교적인 믿음의 상태하고 비슷한 어떤 것들이 있습니다. 당연하겠죠. 종교라는 것은 믿음을 빼놓고는 가능하지 않으니까요.

음 요거에요. 스님들이 여름하고 겨울에 각각 세 달씩 하안거와 동안거를 한다고 하잖아요? 모든 스님들이 다 하는 거는 아닐꺼고 주로 선승들이 할 텐데요. 좌선이지요. 그런 것들이 전문적으로 출가한 스님들만 아니라 일반 불교인들을 대상으로도 많이 이렇게 들어와 있다고 합니다. 서울 시내에 있는 조계사에도 정기적으로 그러한 참선훈련 프로그램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을 가르치는 선생들의 말을 잠깐 들어 보니까 재미있더라고요. 아주 짤막하게 제가 들었습니다. 이런 예기에요. 손가락을 이렇게 하면서 손가락이 왜 움직이냐? 이렇게 묻는 거죠. 손가락이 스스로 움직이는 거냐? 내 마음이 하는 거냐? 뭐냐? 이렇게 물으면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다. 이거는 '움직임'이라는 어떤 다른 것이 있다. 그게 뭐냐? 거기에 집중해라 그 예기지요. 그게 인제 화두입니다. ‘이 뭐꼬?’ 라고 하는 거거든요. 근데 더 재미있는 거는요. ‘이 뭐꼬?’ 에서 그 답을 딱 찾았다고 안심하면 이미 틀렸다는 겁니다. 답이 없다는 거예요. ‘이 뭐꼬?’ 라고 하는 화두를 붙들고 있는데 그거는 결코 잡혀지지 않는 그 무엇이라고 합니다. 결국 이 참선, 좌선, 도를 닦는 것, 용맹정진 이렇게 하는 거는 어떤 답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궁극적 질문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거라고 그래요. 그 상태, 그게 곧 도(道)인 거죠. 도는 잡을 수 없는 거죠.

예. 그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들이 말하고 있는 잡히지 않는, 그리고 계속 나가야 될 그 대상, 하나님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규정(規定)할 수 없잖아요. 우리가 가까이가면 갈수록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 거구요. 우리가 아는 것만큼 하나님을 더 모르는 세계가 있는 거고요. 그래서 구약성서는 하나님을 본 자는 죽는다. 그렇게까지 이야기하잖아요. 이게 불교가 예기하는 믿음의 단계죠. 말하자면 이렇게 비유적으로 설명하더라고요. 만길 우물 속으로 떨어진 사람의 상태. 그 사람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 우물에서 빠져나갈 것 한 가지만 생각하게 된다는 거죠. 일념인거죠. 한쪽으로만 집중하는 거죠. 화두를 그렇게 잡고 있어야 된다. 만길 우물 속에서는 빠져나올 수는 없잖아요 그러나 빠져나오려고 전력투구하는 그거라고 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그런 상태에 들어 간 사람은 몇날 며칠이고 꼿꼿하게 앉아서 며칠 몇 날이라도 먹지도 않고 배설하지도 않고 아마 그렇게 지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시간이 멈춰진 무념무상(無念無想)인가요? 제가 불교를 잘 모르는데 들은풍월로 한 마디 한 겁니다. 들으면서 기독교가 예기하는 믿음의 상태하고 어떤 면에서는 상당히 상통하는 그런 게 있다는 것을 느꼈기에 말씀드리는 겁니다. 우리가 믿음이라고 할 때 그냥 그것은 낭만적인 것도 아니고 그것을 통해서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요. 자기를 성취하는 것도 아니고요. 절대적인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들어가게 되는 거거든요. 불교가 예기하는 화두(話頭)속으로 들어가는 것 하고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도신경에 세 번 연달아 반복되고 있는 I believe 라고 하는 그 문장, 두 단어로 된 고 이야기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강의안 책으로는 몇 쪽이지는 모르겠습니다. 아직까지 제가 책을 받지 못했어요. 패러그래프만 나눈다면 다섯 번째 패러그래프 차례군요. 네 번째 패러그래프와 다섯 번째 패러그래프 사이에 제가 각주로 달은 게 있지요. ‘개방된 세계와 고정된 상태’ 고것까지 지난주에 이야기 했습니다.

오늘은 '신뢰의 문제'. '신앙과 신뢰'의 문제를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신앙과 신뢰의 문제 고것도 제가 각주를 달기는 했는데요. 독일어로 신앙은 Glauben(글라오벤) 독일어는 동사하고 명사하고 거의 같이 쓸 데가 많이 있습니다. 물론 명사와 동사가 구분되어 있기는 해요. 명사가 동사로 변하지는 않는데 동사의 원형을 씀으로써 그것이 그게 그냥 명사로 가리킬 때도 있습니다. Glauben(글라오벤)이라고 하는 동사로는 믿습니다. Glaube 하면 1인칭 어미가 붙어서 Ich glaube 이렇게 하는데요. 원형으로 써서 신앙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신앙과 또 하나는 신뢰, Vertrauen(페어트라우엔) 이것도 동사를 명사로 쓴 겁니다. Vertrauen 원형이죠. 이 두 가지가 비슷한 거죠. 거의 똑같다고도 볼 수 있는데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신뢰의 Vertrauen 이것은 어떤 근거가 있어서 그 대상이나 어떤 사태를 믿고 거기에 자기가 의존하는 거죠. Glauben은 그런 것을 밑바탕에 두면서 더 전적으로 자기 전체를 거기에다 맡기는 그런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을까요? 주식투자 같은 거죠. 요즘 세계공황 비슷하게 일어나는데요. 주식투자를 예로 들면은요. 주식을 잘 하는 사람은 자기가 투자할 때 이게 될 거라는 신뢰를 하잖아요? 계산에 딱 나오니까요. 그게 신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하고는 좀 다른 거지요. 그것은 신앙, 믿을 수는 없는 거지요. 신앙할 수는 없는 거지요.

신앙은 오히려 이런 거지요. 유아가 어머니의 가슴에 안겨서 자기 존재전체를 완전하게 맡기는 것, 하나가 되는 상태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신앙이 더 본질적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신뢰가 없이는 신앙이 가능하지 않거든요. 어린아이라고 할지라도 어머니 품과 향기 살 냄새나 어떤 느낌. 그런 거로 어머니에게 안전하다고 하는 것을 느끼거든요. 어린아이들이 낯을 탄다고 하는 것은 바로 거기 있습니다. 낯서니까 가서 안기지 못하는 겁니다. 결국은 이 어린아이도 어머니에게 거의 신앙과 같은 상태에 들어가게 되는 것은 신뢰가 그 밑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네. 요 두 가지를 지금 죽 설명을 해요. 오늘 우리가 일정을 다 하지는 못할 겁니다. 요 두 차이와 기독교 신앙의 근본이 뭐냐? 주로 조금 나가게 되면 신뢰문제를 많이 이야기하더라고요. 이 두 가지는 어쨌든 그러나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정도로 여러분들이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텍스트를 좀 보시죠.

사실상 삶의 실천이라 할 신앙은 신뢰*와 같은 의미다. 이해하시겠죠. 삶의 실천, 생명의 실천, 우리말로는 그냥 삶 하는데 생명이거든요. 우리의 삶이 생명이죠. 그것에 Praxis 생명의 실천, 신앙은 생명을 구체적으로 실현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신뢰와 같은 의미입니다. 신뢰는 기독교적 신앙고백의 주변에 이르게 되는, 기독교 신앙에 이르게 되는, 그 가까이에 이르게 되는, 신앙자체는 아니에요. 그러나 그 가까이에 이르게 하는, 각기 인간적 삶을 기초하는 순간적 행위에 속한다. 우리 인간의 삶의 근거, 기초를 만들어가는 순간적 행위에 속한다. 그러나 영이 호흡할 수 있는 자리를 제공하는 것은 신앙뿐이다. 영적인 문제, 영, 우리 영이 살아서 움직이게 하는 것은 신뢰가 아니라 신앙뿐이다. 인간은 자신이 활동하는 특정한 주변관계들에 대한, 자신이 상호 소통하는 사물의 신실성에 대한, 그리고 특히 자신이 함께 살아가야 할 인간에 대한 포괄적인 신뢰에 근거해서 일상적인 삶을 영위한다. 이건 제가 더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인간적인 신뢰가 이루어지기도 하구요. 또 신호등 앞에서 빨간불, 노란 불, 파란 불 이것을 우리가 신뢰 포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에 거기서 운전을 과감하게 하여 사거리를 통과하거나 또 서야 되거나 그러지 않습니까? 네 그런 것을 이야기하는 거죠. 우리의 삶 자체가 그렇게 운영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곳에서 인간이 그런 신뢰를 발견하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신뢰가 깨어지기도 하죠. 인간은 여러 곳에서 신뢰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지만, 오늘의 사회 불신이 많으니까요. 그런 거 없이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외 없이, 혹은 모든 곳에서 신뢰가 발생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일방적인 원리에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패러그래프. 중간에 있는 각주는 제가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신앙(Glauben)과 신뢰(Vertrauen)를 엄밀하게 구별하기란 쉽지 않다. 신앙한다는 것은 어떤 실증적인 근거가 없이도 절대적으로 믿는 것이라고 한다면, 신뢰한다는 것은 어떤 근거에 터해서 믿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앙하지만 그렇다고 신뢰 없이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신학은 신앙의 지평, 영이 호흡하는 신앙의 지평에 이르기 위한 신뢰의 근거를 확보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하나님을 믿을 만하니까, 즉 믿을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믿게 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뢰로만은 충분하지 않다. 판넨베르그의 설명에 따르면 신앙만이 영적인 지평을 제공하며 신뢰를 넘어서까지 발생한다. 영적인 지평이라는 말을 여러분은 어떻게 들으시나요? 기독교 신자들이 툭하면 영성, 영적이야 그렇게 말들 하지요. 또 할 말이 없으면 영적으로 생각해야 돼. 기도하면 영적인 사람이 될 수가 있어 그런 이야기를 하지요. 이렇게 저렇게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는데요. 허나 핵심적으로는 생명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영적이라는 것은 생명 지향적이라고 예기할 수 있죠. 왜냐하면 그 영, 성령은 바로 생명의 영이기 때문이기에 그렇습니다. 나중에 또 기회가 있으면 이야기하도록 하지요. 신앙만이 우리 영적인 지평, 생명의 근본에 대해서 그 근본에 들어갈 수 있도록, 만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고 신뢰를 넘어서까지 발생한다. 그다음 패러그래프 보겠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에 필요로 하는 신뢰는 특정한 관계, 즉 사물이나 사람들에게만 연관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어 불특정한 것에까지 이르도록 추구되며 수행된다. 우리가 얼마나 간절히 삶의 한 요소로서 이런 불특정한 확신을 요구하고 있는지는 특별히 이런 확신의 생생한 호흡이 궁해진 침체의 순간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무슨 말인지 전달이 되죠? 네. 불특정한 확신을 요구하고 있다고 하는데요. 네 이런 거죠. 좋은 남편이 있다. 혹은 아내가 있다. 자식이 있다. 집이 있다. 통장이 있고 노후 연금 잘 들어가 있고 이런 것들이 다 우리의 삶을 확실하게 만들어주는 신뢰의 요소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보장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간이 결코 안정감, 만족감, 여기에 도달하지 못하구요. 그것 말고 어떤 그런 여기는 불특정한 확신이라고 했는데 뭔가 말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요구한다고 합니다. 그런 경험 여러분들 하시잖아요.

목사에게도 똑 같습니다. 목회 성공하는데 있어서 목사는 늘 교회를 키우고 그러한데 매진을 하니까 그런 게 잘 되면 만족할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저는 개인적으로 목회에 성공해본 경험이 없어서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될지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거는 뭐 그렇게 되어보지 않아도 뻔 하게 다 나오는 답입니다. 사림이 원래 영적인 존재라서 영적인 만족이 없으면 그런 구체적인 확신, 그러한 것만 갖고는 구체적인 토대만 갖고는 만족할 수 없어요. 판넨베르크가 지금 그것을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보통 때는 잘 그런 걸 느끼지 못하다가도 어떤 절망이 찾아올 때, 실질적으로 사업이 망한다거나 신체적적으로 질병이 든다거나 이렇게 되면 모든 것이 허물어지잖아요. 이렇게 되면 더욱더 불특정 확신 이런 것들을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모든 의심과 붕괴를 밀어내고 살아가는 경우에 유지되는 고유한 확신은 거듭해서 살아난다. 여러 가지 일들이 자기가 원했던 것들이 망가져도 그래도 그러한 의심과 붕괴 이런 것들을 밀어낼 수 있다면 고유한 확신은 살아난다. 가난해도 병이 들어도 우리의 생명의 토대들이 확실해질 수 있다. 그런 이야기 같애요.

이처럼 모든 조건적인 신뢰를 뛰어넘어 우리의 생명이 발생되는 깊고 무조건적인 신뢰가 존재한다. 무조건적인 신뢰. 이것이 신앙이라고 할 수 있는 거죠. 신뢰와 신앙이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서로 또 같은 이야기기도 하구요. 거기에 형용사 무조건 적인, 독일어로 운베딩트 Unbedingt 이런 형용사이겠죠. 무조건적인 신뢰가 존재한다. 조건적인 신뢰하고 무조건 신뢰가 이렇게 두개가 비교되고 있습니다. 이건 뭐 가장 기초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에 제가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데요. 혹시라도 또 여러분들 중 확 와 닿지 않는 분들을 위해서 설명을 드렸고, 또 이런 것을 잘 안다고 하더라도 제가 조금 더 정확하게 설명을 하면 그거를 계기로 해서 다른 문장도 확 들어올 수 있습니다. 참 묘한 것 같아요. 어떤 깨달음의 세계에 들어간다고 하는 것이 한꺼번에 되지 않고 조금씩 조금씩 문을 열고 미로를 가듯이 가야 되는데 거기에 문을 여는 작업 요게 정말 힘든데 이것이 우연하게 우리들에게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반복해서 읽더라도 꽉 막혀 있던 것들이 어느 한단어가 풀림으로서 그 다음 것들을 쭈욱, 좋은 뜻으로 도미노 현상이죠. 따다닥닥 치고 나가는 일들이 벌어지니까 참 재미있는 것 같아요.

화두(話頭) 이야기 한 번 더 하겠습니다. 가르치는 선생이야기가 기억나서 그래요. 그 화두 좌선하는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오래하느냐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하잖아요. 짧아도 그게 되는 사람이 있고 아무리 용을 서도 안 되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 게 우리 기독교 신앙과 책읽기와 영적인 세계에 들어가는 그런 거하고 여기도 마찬가지로 적용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이 동영상을 듣는 분들이 각양각색(各樣各色)이구요. 제가 어느 정도 기준에 따라서 강의를 해야 될 지는 정하기가 힘이 듭니다. 때에 따라서는 너무 뻔한 이야기를 할 수 있고 또 어떤 때는 너무 이론적인 이야기일 수도 있고, 너무 쉬울 수도 있고 너무 어려울 수도 있고 그런데요. 그런 것을 제가 딱 기준을 잡을 수 없으니까 때에 따라서 적당히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이처럼 모든 조건적인 신뢰를 뛰어넘어 그런 것이 다 허물어져도 우리의 생명이 발생되는 깊고 무조건적인 신뢰가 존재한다. 우리는 모든 무조건적인 신뢰를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는 주변관계들, 사물들, 그리고 인간들과 연계시키고 있다. 역시 이러한 무조건적인 신뢰는, 여기서 지금 일반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죠. 무조건 적인 신뢰는. 그러니까 우리가 일단 땅을 걸어가면서도 여기는 어떻게 보면 무조건 신뢰가 있는 거죠. 지구가 헛돈다 땅이 꺼진다 그런 염려하지 않잖아요. 일종의 무조건 신뢰라고 할 수 있는데모든 개방성과 불확실성에 직면해 있는 모든 인간에게 걸려있는 그 무언가의 문제이다. Unbedingt Vertrauen. 무조건 신뢰, 이게 있어야 가능한데요. 땅위를 걸어가면서 땅이 꺼질까 걱정하면 살아날 수가 없는 문제. 무조건 신뢰 조건적인 신뢰가 조금 섞여서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개방성(開放性)과 불확실성(不確實性). 개방성은 열려져 있다고 하는 뜻인데 닫히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결정되지 않았다고 애기하면 되겠죠. 역사(歷史)가 개방되어 있다. 종말론적(終末論的)으로 열려져 있다. 이게 어느쪽으로 나갈 지 모른다. 그런 뜻이고요. 불확실성, 이게 연관되는 겁니다. 주식도 불확실하고 대한민국도 불확실하고 생태마저도 불확실하고요. 어쩌면 지구자체도 불확실하다고 할 수 있겠죠.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여기에 우리가 직면해 있잖아요. 사람들은 그거를 외면하려고 자꾸만 하고 있지요. 사실은. 직면하면 불안하니까. 그렇게 되면 결국 열광주의로 들어가게 되구요. 외면한다고 한다고 해서 완전히 떨쳐 버릴 수 있느냐? 그럴 수 없다고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열광주의가 그렇게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결국은. 순간적으로는 다 망각해버리니까 괜찮은 것 같아요. 아편을 취하는 것처럼 어느 순간에서는 기분이 좋아서 다 잊어 버리구요. 그런 상태에 있을 수도 있지만 완전히 떨쳐 버릴 수는 없습니다. 개방성과 불확실성과 이런 것들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벗어났다면 도사가 되었다든지 도사들도 좀 있을 수도 있을 거예요. 아니면 정신병원에 갈 사람이라든지. 그렇지 않다면 직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데에 살고 있는 인간은 결국은 무조건 적인 신뢰, 이것을 요구할 수밖에 없는 거죠. 그거하고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 어떤 인간이나 일에 집중한다고 하는 것을 말한다. 요건 무슨 뜻이죠. 무슨 연관이 잘 안되네요. 접어두고요. 일에 집중한다는 것은 일에서 무조건 적인 어떤 것을 얻으려고 한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아주 갓난아이일 때 근원적 신뢰는 부모와 묶인다. 후에 부모로부터 벗어나서 건강한 인간형성의 기본조건들과 연관된다. 그렇죠. 일반적인 삶의 조건 아래서 대개의 사람들은 그들의 삶을 지탱해주는 신뢰가 도대체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지에 대해 별로 생각하지 않고 있다가, 신뢰의 근거가 흔들리거나 이로써 삶의 능력이 위험에 빠지게 될 때 그것을 인식하게 된다. 사람들은 막연하게 그냥 어떤 것들을 무조건적으로 신뢰하고 삽니다. 그냥 자기 생명이 유지될 거라고 이렇게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죠. 별로 그 근원이 어디인지에 생각하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불치병의 진단을 받는다거나 앞서 이야기한대로 사업이 잘못되거나, 이혼하게 된다거나, 이런 큰 충격에 빠지게 될 때 자기의 존재근거를 근본적으로 의심하게 되는 겁니다. 네 그 다음 패러그래프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뢰를 궁극적으로 어디에 토대하고 있는가? 우리 마음의 궁극적인 목표가 어디에 달려있는 것일까? 이것은 인간이 만날 수 있는 궁극적인 질문이다. 그렇죠. 50년이나 넉넉잡고 50년만 있으면 우리 모두가 다 재나 흙이 되어버리고 마는데, 그리고 시간이라고 하는 것이 아침 이슬이 물방울이 햇빛이 금세 말라버리는 것과 같은 시간인데, 그래도 우리가 이렇게 뭔가를 신뢰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어디에 근거가 있는가 하는 거죠. 바로 앞서 판넨베르크가 지적했듯이 사람들이 그것을 형체로 의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물론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하는데요. 물론 그걸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지금 그런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데요.

이런 것은 우리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질문이다. 다음은 루터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우리 마음의 신앙과 신뢰는 두 가지, 즉 신과 우상을 만든다.” 십계명의 첫 계명을 의미하는 이 문장은 아직도 생동적인 루터의 말이다. 신앙과 신뢰가 좋은 쪽으로 가면 신, 잘못되면 우상, 종이한 장 차이인 거죠. 여기서 우리의 마음이 실제로 의존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치우치거나 집착하는 것과는 분명히 구별된다. 말하자면 그것은 우리에게 가장 높은 곳을 가리킨다. 신앙은 집착은 아니거든요. 자칫하면 그렇게 될 염려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때에 따라서 신뢰하거나 신뢰하지 않는 우리의 의식화된 결정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가변적인 그러한 것은 아니다. 취미 생활하듯 좋을 때는 막 거기에 빠지지만 또 그게 시들해지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무조건적으로 누구를 신뢰하는가? 라는 질문은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숨겨진 채로 남겨져 있다. 무슨 뜻인가요? 그것은 여전히 그 질문은 비밀이다 뜻이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기준에서만 자신을 알고 있다. 이 기준 안에서 우리는 분명히 우리의 삶이 신뢰하고자하는 것에 거하고 있다. 이 신뢰는 절대적으로 실행된다. 결국 신뢰하는 쪽으로 나가게 된다는 말이겠죠.

제가 이렇게 판넨베르그의 책을 주석(註釋)해나가고 있습니다. 마치 성서를 주석해나가듯이 판넨베르그의 책을 주석해가고 있어요. 제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거나 또 오해한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혹시 제 강의를 다시 듣고도 녹취로 나온다고 하니까 그것을 보는 중에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잘못 말한 부분이 있다면 나중이라도 말씀해 주십시오. 그다음 파래그래프입니다.

우리가 반복적으로 방황하는 삶의 상황 속에서 일종의 정체성, 아이덴티티(Identity)를 획득한다면, 즉 우리 스스로 의지대로 행할 수 있다면 삶을 견인(牽引)하고 있는 확신의 개방성과 모호성은 분명히 밝혀질 것이며 또한 결정될 것이다. 무엇인지 알려질 것이다. 자신의 경험지평을 확대하고 해명함으로써 성숙해가는 사람들은 어디서 신뢰하고 어디서 말아야 할는지에 대해 확실하게 인식할 것이다. 이런 신뢰에 대한 결단들이 교정될 수도 있다. 이런 결단들 속에서 삶을 떠받치고 있는 신뢰가 새로운, 또한 실질적인 확실성을 획득하게 된다. 이것과 관련되는 것은 인간이 신뢰하는 대상을 근원적으로 신뢰해야한다는 점인데, 이 근원적(根源的) 신뢰라고 하는 것은 사실 불확실하다. 근원적인 신뢰가 이루어질 때 모든 것이 확실하게 결집된다. 이것은 신뢰하고 있는 것에 대한 확실성을 말한다. 신뢰는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것을 뜻한다. 눈에 두드러진 기만과 공허한 겉모습에 자신을 맡기는 사람은 버림받는다. 참된 생명의 절대적인 힘에게 자기를 맡겨야만 거기서 참된 신뢰가 가능하다 그런 건데요. 조금 더 나가보겠습니다. 왜냐하면 미래에 밝히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 인제 이게 우상인거죠. 기만과 공허한 겉모습에 자기를 맡기는 사람들은 버림을 받는다. 미래에 그것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 기만적인 것인지 드러나기 때문이다고 하는거죠.

우상의 속성이 그렇습니다. 바알을 섬기지 말라. 가나안땅에 토착신이라고 할 수 있는 바알은 상당히 매력적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대로 그런 유목생활을 하던 히브리인들과는 달리 한곳에 정착해서 농경생활을 하던 가나안 인들의 신이거든요. 이 정착한 농경생활이라고 하는 것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농사가 잘돼서 풍년이 들고 그리고 자식들을 많이 낳는 겁니다. 요즘말로 하면 생산력증강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런 것이죠. 많이 생산해서 소비하고 즐겁게 사는 것, 이런 것을 가나안 농경문화를 꽃피웠던 토착민들이 추구했던 삶의 목표였거든요. 바알은 그것에 걸맞은 신이었어요. 그래서 농경 축제 같은 것을 많이 벌었어요. 추수하고 술 만들고 떡 만들고요. 그리고 먹고 마시고 취하고. 그리고 그다음에는 자유로운 성적인 유희 그런 것들이 있고요. 그런 것들이 다 자녀 생산하고 연관된 문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이 유대인들, 히브리인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이죠. 가나안 여인들도 자기 몸단장을 많이 하기 때문에 처음 40년 동안 광야 생활하다가 가나안에 들어간 히브리남자들이 멋져보였겠습니까? 그리고 또 가나안 남자들이 또한 매력적인 사람으로 어필했겠죠. 그래서 예언자들은 가나안 사람들하고 상종도 하지 말라. 결혼도 하지 말라. 아무것도 하지 말라. 이렇게 극단적으로 거부를 하게 했습니다. 그러한 가나안땅의 농사와 자녀생산, 이런 것들이 확실하지 않다고 하는 것이 결국 드러난다고 하는 겁니다. 이게 조금 복잡합니다. 복잡하다고 하기보다도 우리가 조금 생각해야 돼야 될 어떤 것들이 있는 거예요. 그걸 전제하지 않는다면 제가 지금 설명한 바알을 중심으로 한 우상숭배란 말은 그냥 말장난에 떨어질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실은 자녀를 많이 낳고 먹을 것을 안전하게 지키고 이런 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해를 했잖아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에게 받은 약속, 자녀들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 이 땅을 줄 것이다. 땅과 자녀에 대한 약속이었단 말입니다. 이건 분명 가나안의 바알 숭배자들과 조금 다른 것 같아도 내용을 들어가면 비슷할 가능성이 있는 거죠. 지금도 많은 기독교 신앙이 거의 이러한 기복적이고 출세 지향적이고 복지중심적인 이런 기독교 신앙을 채워가려고 하는 것하고 사실은 구약이 아브라함이 받는 약속이나, 바알 우상숭배의 그러한 내용들이나 어떻게 보면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큰 차이가 있거든요. 유대인들이 생존해야 된다는 것은 이거는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이걸 빼놓고는 종교도 뭐도 다 성립하지 않으니까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이라는 것은 생존에 대한 약속이거든요.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가나안 민족들의 풍요 이데올로기하고는 차이가 있는 거죠. 그 두 차이. 일용할 양식을 준다고 하는 것, 만나를 제공한다고 하는 것은 최소한 생존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인거죠. 그거는 우리 신앙에 있어서도 핵심적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다음에 이것이 바알의 풍요 이념하고 자칫하면 뒤섞여 버릴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이죠.

또 하나 중요한 점은 가나안족은 그렇게 풍요를 주기 때문에 바알을 섬기는 거예요.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거예요.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이 그렇게 풍요롭게 해주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라 정반대죠.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생존을 하나님이 보존해 주신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생존의 위기에 빠지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버릴 수가 없는 거죠. 이 두 가지. 생존의 만족하고 완전히 하나님의 절대성에 집중하는 그러한 예언자적 이스라엘 전통이 있고 또 그들 중에서도 바알적인 영향을 받아서 풍요 이념으로 떨어진 사람들이 많이 있었죠. 이스라엘의 왕들은 대개 많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우상들을 섬겼거든요. 이스라엘 민족이 그렇게 순수하지 못했습니다. 두 가지 투쟁이죠. 부르그만의 예언자적 상상력인가 정확한 책제목은 모르겠습니다. 부르그만, 성서학자가 쓴 거기에 보면 유대의 이스라엘의 역사가 두 세력의 투쟁이라고 그래요 하나는 예언자고 하나는 왕, 왕권과 예언전통의 투쟁,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겁니다.

다시 한 번 이 이야기 들어가기 전에 절대적인 것을 말씀드리고 하다 보니 그걸 정리를 해야 되겠네요. 풍요로운 삶, 이런 것은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미래에 가면 그것이 공허하다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고 하는 것입니다. 절대자, 고 절대자 우리가 무조건 신뢰해야 될 우리의 삶의 확실성을 담보할 수 있는 대상을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것은 차이가 뻔한 이야기 같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의 세계에서 사람들이 그것을 혼돈하고 있어요. 이 풍요 이데올로기 이런 것들이 얼마나 취약하냐 하는 것은 그런 몇 가지로 나눠서 설명할 수 있는데 일단 가장 일상적인 것으로 본다면 우리가 그것을 성취하는 것을 만족할 수 있느냐 절대 그렇지 않는거예요. 그러니까 그것 스스로 절대적이지 않다고 하는 거죠. 그리고 또 지금 조금 아까 이야기한대로 대공황이 지금 막 되는 것 같은 움직임인데 이러한 자본이라고 하는 것은 어느 순식간에 없어질 수 있는 거거든요. 우리가 지금 풍요의 극치를 달리고 있습니다. 지구라고 하는데 에서 이렇게 많이 쓰고 살아도 되는 것인지 이건 좀 불안한 건데요. 너무 많이 지금 우리가 잘 살고 있고. 총체적으로 조금 더 가난해지더라도 같이 공평하게 가난해지면 좋을 것 같아요. 그래야지 우리가 살고 우리 후손들도 살 수 있는데 우리는 지금 이명박 정권 들어서고 난 다음부터는 더 그런 부분들이 약화되고 빈부의 격차가 좀 더 심해지더라도 일단 경제를 더 살리자 이런 식으로 나가고 있거든요. 어느 순간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조금 더 우주론적으로 본다면 빙하기가 찾아온다면 결국은 북쪽에 남쪽에 지금은 빙하기가 찾아 온다기 보다는 오히려 온난화 쪽으로 나가고 있기는 해요. 온난화 하는 것도 문제이긴 한데 빙하기가 찾아온다고 하는 것은 분명하거든요. 북극과 남극의 얼음이 점점 더 중간 적도부분으로 내려와서 어느 때인가 적도 부분만 생명체가 가능한 지구가 될 겁니다. 그러면 풍요는 완전히 꿈을 꿀 수 없는 거죠. 인류가 멸망하지 망하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거의 대다수가 죽게 되고 일부만 살아남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바알중심의 풍요이데올로기라는 것은 절대적이지 않다고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만이 절대자인데요. 하나님이라고 하는 말도 우리들에게 상투적으로 들려지는 것이 그게 문제예요. 제가 강의를 하면서도 늘 단어 때문에 자꾸만 망설여집니다. 이 말을 쓰면 또 이미 기존 적으로 알고 있는 그런 것하고 똑 같이 생각할 터인데 과연 이게 내 말의 흐름이 잘 전달되지 않을거다는 그러한 약간 불편한 생각이 있습니다. 아까 예기한 영성도 그렇고 하나님도 그렇고요. 하나님 축복도 그렇고요. 그런 이야기할 때는 또 다른 차원을 전제하고 깔고 하는 건데 기존의 교회에서 들었던 분들은 이러한 차이를 잘 모르고 받아들일 것 같아서 좀 그렇습니다. 그건 어쩔 수 없죠. 나가보죠.

미래에 가서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사야 예언자는 유대의 아하스 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요거도 예언자와 왕권의 투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는 대목이군요. “너희가 믿음 안에서 굳게 서지 못한다면, 너희는 절대로 굳게 서지 못한다!”(사 7:9).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신뢰가 없이는 결코 절대서지 못한다. 그의 말은 다음과 같은 뜻이다. 요동하지 않는 영원자 안에서,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에게서 견고하게 서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에게서 영속적인 것을 소유하지 못한다. 당연하죠. 계속 허전하죠. 불안하죠. 악순환이죠. 결국은 자극적인 것을 찾아가게 되죠. 왜냐하면 영원한 하나님을 벗어난 모든 것은 사라지게 됩니다. 우리는 물론이고 지구까지 포함한 모든 것들이 사라지죠. 궁극적이고 무조건적인 신뢰를 결코 획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원한 하나님을 벗어나게 되면 궁극적이고 무조건적인 신뢰를 획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참 중요한 이야기죠. 이러한 신학자들의 말들을 들어보면 참 위대한 영성가다. 정말 확신하게 됩니다. 아주 이 세계와 인간과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정확하게 뚫어주고 있는 거거든요. 이러한 신학자들의 말들을 우리가 자주 접하고 또 배우고 해야만 우리 신앙이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그래서 점점 형해(形骸)화되지 않고 역동적으로 새로워 질 수 있는 건데요. 안타깝게도 한국교회는 신학 무용론이 지배하고 있어서 우리 신앙이 활성화되는 것은 참 요원(遙遠)하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냥 청중들을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는 그러한 선동가들만 힘을 발휘하는 교회 형태라고 한다면 그건 결코 바람직한 것은 아니죠. 네. 고 문장만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을 벗어난 모든 것은(여기서 영원하다는 것도 상투적(常套的)으로 생각하게 되면 곤란한데요.) 사라지게 되며, (하나님안에서 견고하게 서지 못한 사람들을 예기하는 겁니다.) 궁극적이고 무조건적인 신뢰를 결코 획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천천히 더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오늘 강의 마치겠습니다.


[레벨:12]삼송

2011.03.15 18:56:10
*.109.42.2

생존에 대한 만족이라는 말씀이 일본의 지진을 보면서 왜 하나님을 지금 내가 신뢰해야 되는가? 라는 저 자신의  질문에 대한 해답을 발견하는 것 같습니다.  저도 생존에 만족하고 하나님의 절대성에 늘  신뢰를 보낼수 있는 신앙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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