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강 녹취록 - 1장 나는 믿습니다(4)

사도신경해설 조회 수 2886 추천 수 0 2009.04.05 00:18:36

사도신경 해설 제6강

안녕하세요?

오 늘 판넨베르크의 사도신경 해설 여섯번째 시간입니다. 우리는 지금 계속해서 사도신경을 구성하고 있는 세 가지 아티클에 대한 사도신경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라고 할까요? 그걸 지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내가 믿습니다라고 하는 내용이 무얼 이야기하고 이야기하고 있는가 하는 거죠. 우리들은 주로 일반적으로 신앙생활에서 믿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이 과도해요. 반면에 우리가 믿고 있다고 하는 그 대상인 하나님에 대한 설명은 많이 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는데 믿는 사람들의 종교적인 호기심 관심 주로 그런 것들에 주로 집중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놓고 본다면 한국교회 신앙의 토대가 하나님 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에게 기울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Anthropology죠. 인간에 대한 관심, 인간이니까 인간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을 우리가 뭐라고 할 수 없죠. 당연히 그럴 수 있어요. 그런데 말입니다.

기독교 신학계 2천년 역사속에서 인간에 대해 관심을 많이 가졌던 때를 가리켜서 우리는 자유신학이라고 합니다. 19세기 유럽신학과 신앙, 그들의 영성 그런 것들은 거의가 사람에 대한 관심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겠죠. 관심이라고 하는 말을 딱 끊어서 말하기는 쉽지 않는데 그것도 스펙트럼이 상당히 많기 때문에요. 그리고 19세기만 아니라 20세기에도 그런 것들이 조금 색깔을 달리하고 있지만 그래도 인간론적인 면이 많이 있어서요. 19세기만이라고 말하기도 조금 힘듭니다. 예를 들자면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도 대개 사람에 대한 관심이라고 할 수 있겠죠. 사실 이 말도 정확한 것은 아닌데 제가 큰 방향을 말하려다 보니까 일단 그렇게 뭉뚱그려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20세기 중반, 세계 신학 흐름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으로 제시되었던 그 민중신학, 그 정체신학, 여성신학도 그렇고요. 또 그런 것하고는 다른 신학교,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신학도 사실은 인간론적이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상당히 정통적이고 보수적이고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처럼 포즈를 취하기는 하는데 실질적으로는 굉장히 인간적이다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거의 모든 교회의 돌아가는 메커니즘이라고 할까요. 내부적인 메커니즘도 그렇고요. 외부적인 거도 그렇구요. 그런 것들이 거의 다 사람에게 머물러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도신경을 이야기할 때도 내가 믿습니다라고 할때 믿고 있는 자기 자신 심리적인 고것에 너무 관심이 많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혼자 기도할 때도 믿습니다 믿습니다 그런 말들을 많이 하잖습니까.

이 판넨베르크는 사도신경 첫 번 해석의 첫 번 항목으로 믿는다는 것이 뭐냐를 여러가지 관점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마친 다음 단락부터 보겠습니다. 먼저 여러분 강의안, 책이나 그런 것을 보면 가능하겠죠. 5쪽입니다.

신앙은 대상 없이 가능하지 않다. 거기서 부터 입니다. 이건 제가 앞서 이야기한 것 하고 연관되는 거죠. 하지만 한국교회에서는 대상 없이도 신앙이 가능한 것 같습니다. 믿고 있는 그 청중들의 종교적 열성, 그런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교회 공동체가 가능하다고 하는 거죠. 이건 예배하고도 연관되는데요. 제가 예전 예배를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강조하기는 하지만 쉽지는 않은 건데요. 쉽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계속 우리가 꾸준하게 끌고 나가야 되고요. 바로 이거죠.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겁니다.

성삼위일체 하나님에게만 온전히 영광을 돌린다 고하는 예배, 이게 우리가 집중하기 힘들어서요. 대개 삼위일체 하나님을 조금 내버려두고 관심이 없다기 보다도 관심을 가지려도 이게 새로워지지 않으니 관심을 가질 수가 없는 거예요.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죠. 하나님은 늘 딱 고렇게 결정된 어떤 분으로 모셔져 있습니다. 마치 불교 법당에 불상이 딱 있는 것처럼 말이죠. 하나님, 예수님, 성령 이런 분들도 거의 그렇게 아주 결정된 어떤 존재로 있어서 신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걸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지도자들은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서 청중들을 향해서 하나님을 믿게 하는 것, 거기에 몰두하면 되는 거거든요. 예배에 있어서도 성삼위 일체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어떤 종교적 상징사건속으로 들어가지는 않고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하는 자기, 사람의 대한 관심으로 집중하는 거예요. 이거는 사람들이 집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는 거는 안 보이는 거구요. 막연하게 되는 거구요. 아니면 이미 다 아는 것으로 되어 있고요. 그래서 관심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새로워져야 관심을 갖는 거거든요. 아무리 처음에 예수님 영접했다고 하더라도 뜨거운 열정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예수의 사건, 그의 재림, 그의 의가 우리에게 전달된다고 하는 사건들, 그의 부활들 이런 것들이 우리 신앙의 연조가 깊어지면서 더불어서 더 풍요롭고 심화되어야 하는데 그게 없으면 결국 예수님에 대한 생각이 표리화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영접이라고 하는 이게 그러니까 이에 그런 대로 돌아가고 싶어 하잖아요. 첫사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는 건가요? 그게 불가능한 것은 아시죠. 부부가 같이 이렇게 사는데 매일 처음 만났을 때 마음 갖고 살지는 못하잖아요. 그래서 이벤트를 할 수는 있겠지만 순간에 그것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삶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같이 더불어서 가면서 그렇게 인간에 대한 이해를, 삶을 같이 사는 거죠. 그런 거지. 그렇게 뜨거운 열정, 눈에 뭔가 쓰인 것처럼 그 사람에게만 매몰되는 그런 것은 불가능하죠.

한국에서는 예수님을 믿는 것을 그러한 방식으로 하려고 해요. 복고주의이죠. 그러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겁니다. 되지 않으려는 것을 자꾸만 하려고 하는 거죠. 본인들도 그게 안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을 거예요. 이런 저런 여러 가지 방식을 통해서 그것을 확인하려고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예배드릴 때 하나님께 집중할 수 없으니까 대신 손을 들고 찬양하고 있는 자기 자신에게 몰입하는 거죠. 그리고 그렇게 몰입된 옆 사람에게 자극을 받는 거죠. 여러 가지 시청각 교재 이런 것을 통해서 그러한 종교적 충격, 자극 그러한 것이 옛날에 예수를 영접했던 그런 경험과 연결될 수 있고 그런 방식으로 열린 예배가 진행되고 있는데 그런 모든 것들이 제가 보기에는 그런 인간론입니다. 이거 오해하지 마십시오. Anthropology가 기독교 신앙에서 무의미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을 이해하는 것으로 끝나야 되는 것이지. 그것이 하나님의 자리를 오히려 독차지 하는 그러한 데까지 나갈 우려가 사실은 많이 있거든요. 이게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서도 이게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느냐 대안은 뭐냐 라든지 이런 저런 것에 대해선 조금 조심스럽기 까지 합니다. 그게 쉽지 않는 문제니까요.

이거 하나는 이야기해야 되겠군요. 제가 말이 조금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제자리에 맴돌고 있네요. 이거를 말씀 드리려고 하는 겁니다. 너무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것에 대해 관심을 좀 꺼라 제발, 확인하려고 그러지 말아라. 믿음이 중요한 것이긴 한건데요. 그러나 믿음은 믿어야 할 대상을 알면 저절로 믿게 되는 겁니다. 지금 우리는 믿는 그런 것에만 빠져 있어갖고 정말 그게 허전하죠. 그리고 지치게 되죠. 네. 예배와 연결시켜서 말하다가 제가 옆으로 많이 나갔군요. 핵심적인 두 가지만 말씀드리죠. 앞서 말한 것과 연결시켜서요.

자기가 믿고 있다고 하는 것에 거기에 너무 비중을 두지 말라. 자기를 좀 내버려둬라. 그렇게 하고 대신 예배드릴 때에 예전중심으로 나가자. 그게 좀 맨송맨송한 것 같기도 하고 또 조금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그건 하나의 연극과 같은 것이지 영성이 살아나는 예배는 아니다. 그렇게 말하기도 하는데 그건 착각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감정을 절제하고 종교적 상징속에 들어감으로서 성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거구요. 비록 당장 자극적이고 뜨겁고 확신에 차고 그런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깊은 여정에 도달 할 수 있습니다 그걸 어떤 것하고 또 연관시켜서 말씀드릴까요?

신자들이 신앙이 깊어지는데 두 가지 설명이 이렇습니다. 부흥회를 통해서 막 뜨겁게 만드는 방법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가르치는 방식이 있을 텐데요. 부흥회가서 뜨겁게 되는 것은 정말 즉시 즉시 효과가 나니까 담배도 끊고 술도 끊고 도박도 끊고 뭔가 새로워지는 것 같습니다.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토대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토대가 자기이기 때문에 대부분 그것은 한계가 들어납니다. 하나님의 말씀, 신학적으로 깊이 들어가면 늦는 것 같다고 하더라도 길게 갈 수 있고 그게 바로 신앙의 깊이로 들어가는 길이 아닌가 싶습니다. 본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신앙은 대상 없이 가능하지 않다. 잘 생각하십시오.

신뢰행위 안에서 인간은 완전히 말 그대로 자신을 신뢰하며 자신이 만든 사물이나 인간과 견고한 관계를 누린다. 일반적인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는 이로써 그가 신뢰하는 것의 확실성에 의존하게 된다. 따라서 인간은 신뢰 없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그에게 실제로 확실하게 나타나는 것을 의지하고 있다. 이사야의 경우에 이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었고, 세 번씩이나 “나는 믿습니다.”라고 로마식의 세례고백을 표명한 초대 기독교인들의 경우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의 아들을 땅에 보내신, 그리고 영을 통해서 그를 믿는 자들에게 현재하는 하나님이었다. 그렇죠.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을 좀 다른 방식으로 설명했는데 똑 같은 하나님이시죠. 하나님이 확실성의 토대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의 사랑을 인간에게 알리신 영원한 하나님은 인간이 무조건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흔들림 없는 토대를 인간에게 제공했다. 우리가 잘 알고 있고 그렇게 믿고 있는 사실입니다.

이 하나님은 우리가 다루고 있는 사물이나 인간처럼 매우 명증하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여기서 또 문제가 있는 거죠. 어려움이 있는 거죠. 명증하게 실증적으로 오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꾸만 사람들이 실증적인 것을 찾을려고 하구요. 그게 또 우상숭배 일수도 있기도 하구요. 열린예배로 나가기도 하구요. 인간론적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 우리 삶의 토대인, 생명의 토대인, 우리의 모든 전체 존재를 걸어둘만한 확실성인 하나님이 이렇게 명증하지 않다는데 있습니다. 이 사실은 지금 현대 신학에서만 깨닫게 된 게 결코 아니다. 이미 요한복음서에서 이르기를, “일찍이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1:18)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 요한복음서 기자는 이 문장을 통해서 만약에 죽어야 할 인간이 하나님의 존엄 앞에 마주서게 된다면 죽게 될 것이라고 하는 구약성서 증언의 근본에 도달해보고자 한 것이다. 그렇죠.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다. 지금 살아 이 땅에 있는 한, 살아 있는 한 우리는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 이것은 곧 구약성서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에게 자기 전체 존재가 드러나면 죽는다 이런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죠. 구약성서 출애굽기 33장 20절에 보면 모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찾아볼께요.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다가 십계명과 율법을 받구요. 그동안 금송아지를 만드는 것 때문에 내려와서 돌판도 깨지고 야단법석 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는데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를 하는데요. 하나님을 보여주십시오.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죠. 이 모세가 자기 민족을 끌고 가기가 힘이 부쳤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 자꾸만 모습을 보여 달라고 하는 거죠. 하나님이 모세에게 그러마하는 장면입니다. 20절에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얼굴만은 보지 못한다. 나를 보고 사는 사람이 없다. 네. 하나님이 지나갈 때 손바닥으로 가리리라 하구요. 손바닥을 떼면, 하나님이 그의 얼굴을 가린다고 하는 것, 손바닥을 하나님 펴주시면 하나님의 얼굴은 보지 못하고 뒷모습만 본다, 하나님을 본다면 죽는다는 사상이 구약에 있는 거죠. 사사기 6장 22절, 13:22절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사기 6장 22절은 기드온 전승에 나오는 이야기네 출애굽기 모세 전승과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13절 22절은 삼손 전승인데 아버지 어머니가 삼손을 낳게 된다는 천사의 고지 그거를 받고 벌어지는 이야기들입니다. 천사 하나님을 보았으니 우리가 죽겠구나 그러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죠. 하나님을 요한복음은 본자가 없다고 하고 구약성서는 본 자는 죽는다고 이야기하죠.

우리가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전혀 차원을 달리하기 때문에 .그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될까요. 제가 판넨베르크를 공부했으니까 그 사람이 설명하는 방식으로 말씀을 드릴게요. 하나님이 역사 전체로 자신을 게시하시는 분이라고 하는 겁니다. 창조와 종말까지. 전체의 하나님, 쉽게 말하자면 전체. 그런데 인간은 전체로 사는 것이 아니라 순간에만 살잖아요. 70년 80년, 지구가 한 90억년 정도 그것이 기간이 유지되는데 지금 45억년이 지났다고 하죠. 그런 정도 시간, 하나님의 영원성은 정확하지만 그런 것만 놓고 본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7,80년이라고 하는 것은 이 전체 역사를 이해하기는 턱없이 부족한 거예요. 이 시간 전체를 우리가 도저히 직면할 수 가 없는 거죠. 시간적으로 볼 때도 그렇고 우리는 이 속에, 이 세상에 들어와 버렸기 때문에 밖에 차원을 볼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그 전체에 관계된 분이잖아요. 창조론에서도 보면 무로부터 창조를 말하는데요. 하나님은 무와 창조세계 전체를 아우르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하나님을 늘 사물이 있는 것처럼 나무가 강이 있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만 하나님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개념에 하나님의 표상에 가까이 가기 힘듭니다. 네. 그러한 하나님, 전체로서의 하나님, 하나님을 우리가 마주할 수 없는 거죠.

반면에 인간이 볼 수 있는 것이란 오직 신뢰의 근거와 토대일 뿐이다. 하나님을 전체적으로 못 보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어떤 근거와 토대를 우리는 볼 수 있다.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보는 거는 아니구요. 우리가 사물이나 인간을 의지하는 곳에서 신뢰는 아직 유출되지 않은 그 무엇을 지향한다. 이로부터 증명되는 사실은 모든 신뢰의 현실성이라고 하는 것이 이미 가시적이고 파악될 수 있는, 혹은 생산될 수 있는 그것에만 놓여 있는 게 아니라고 하는 점이다.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인데요. 요 부분이 참 중요한데요. 다시 한 번 고 부분을 읽겠습니다. 모든 신뢰의 현실성이라고 하는 것이. 현실성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참된 것, 진리, 정말 있어야 되는 그것, 그렇게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모든 신뢰의 현실성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인 거죠. 하는 것이 이미 가시적이고 파악될 수 있는 혹은 생산될 수 있는 그것에만 놓여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아직 미래에 있는 것도 오지 않았잖아요. 우리가 사건이나 사물을 확인하고 파악할 수 있는 것은 과거나 현재 것이란 말입니다. 나타났다 없어지고 나타났다 없어지곤 했습니다. 인간의 선조 조상인 유인원들도 인간과 비슷한 많은 인간과 비슷한 종류들이 세상에 살다가 없어지곤 했습니다. 네안데르탈인, 북경인 이런 여러 종류의 유인원들이 있잖아요. 바로 지금 여기 지구에 살고 있는 인간의 조상이 누구일까요? 그런 것처럼 아직 미래의서 우리들에게 오지 않는 것들이 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중의 한 부분에 살고 있을 뿐이죠.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그 원천은, 이게 플라톤의 이데아론하고 연관되는데 어쩐지 모르겠지만, 그 원천들은 그렇게 가시적인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 그런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정말 확실한, 현실적인 것입니다.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는 현존의 개방성 안에서 신뢰는 항상 불가시적인, 그리고 마음대로 처리될 수 없는 현실성에 근거해 있다. 터해 있다. 여기서 더 설명할 것은 없죠. 그러므로 신뢰는 결코 실망을 주지 않게 되며, 또한 신뢰와 신앙은 항상 의심으로 이끌리기도 하고 위협받기도 한다. 신앙과 회의는 무언가 서로 상관없는 게 아니라 회의는 신앙과 신뢰를 늘 쫓아다니는 그림자다. 네. 그렇게 신앙 혹은 신뢰의 대상이 중요하다고 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요. 우리에게는 지금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가시적인 것, 그런 것에 불과한 것인데 그런데 그러한 모든 것들은 아직 그러게 나타나지 않은 어떤 것을 지양한다. 말 표현이 조금 정확하지 않는 말이네요. 제가 말하려고 하는 어떤 방향은 있기는 있는데 거기에 조금 집중이 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집중이 되지 않는 데는 두 가지가 있죠. 하나는 내가 잘 모른다는 것이 하나가 있고 또 하나는 너무 생각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그 이야기를 전해야 우리 시청자들에게 정확하게 전달될까 머리속으로 생각하다가 그 이야기의 흐름을 놓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제 전반적으로는 여러분들이 이해를 하시겠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 모든 신뢰의 근거인데 하나님을 지금 볼 수는 없구요. 그렇게 볼 수 있는 토대들만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 어떤 자연을 본다거나 예를 들자면 그런겁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서 내가 찬기운을 느낀다거나 내가 생기를 느낀다거나 절망적인 사태에 있었는데 성령의 도움으로 희망으로 돌아선다거나 이러한 근거들이 있기는 하나 보이는 것은 아닌 거예요. 보이지는 않지만 어떤 더 절대적으로 확실한 현실적인 그런 것들로 향해서 이 모든 것들이 가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혹시 도우미 될까 몰라서 물리학에 대한 오전 신문에서 잠깐 본 이야기를 드릴게요. 지금 우리 태양계 이런 것 많이 이야기하잖아요. 그런데 거기에 이 우주 세계 전체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에 대해서 물리학자들이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지금 끈 이론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그 끈은 코크 가장 작은 입자, 소립자중에서도요. 거의 너무 작아서 어떻게 증명할 수도 없는 그러한 입자인데 그런데 끈은 그거보다 더 작은 거라고 합니다. 그거는 도저히 관측이 불가능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물리학자들이 예측을 하는 거예요. 그 끈 이론에 근거해서 이 세계를 설명할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무슨 말씀인가 하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의 물리학을 우리 신앙과 연관하여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직접 보지 못하고 만난 사람도 없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누구다 이야기할 수 없지만 그러나 간접적으로 부분적으로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근거들이 여기에 있는 거예요. 그러나 모든 것이 다 드러나지 않고 우리가 근거하고 있는 것들이 그쪽을 향해서 간다고 할까요? 아니면 그곳으로 부터 온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거죠. 그것이 하나님 인거죠. 여기까지만 나가겠습니다.

여기에 뭐 회의라는 말이 나왔잖아요. 그것은 가시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real하기는 하지만 visible 하지는 않는 거예요. 그거 이해하시겠죠. 고 세계로 들어가지 않으면 하나님 세계를 이야기하기 힘듭니다. 그러니까 무조건 믿어라하는 것도 안 되는 거죠. 그러니까 그 invisible, visible 하지는 않는데 real한 그러한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한 하나님에 대해서는 늘 회의가 따라올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길이 없으니까, 끈을 물리학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는 그것을 설정해야지만 물리의 세계가 해명된다는 논리와 비슷한 거죠. 여기서 중요한 점은 참된 신뢰라고 하는 것이 신뢰하는 자가 자기의 신뢰를 어디에 터하며 근거하며 어떤 방향을 잡아야하는가라는 문제와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현대신학에서는 인간의 신뢰행위가 단순히 참되다고 여기는 것과 대립되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진리론적 분쟁, 이런 것하고 믿음이라는 것과는 상관없다 이렇게 말한 적이 많이 있는거죠. 이건 아마 판넨베르크가 볼트만의 실존주의 철학이나 칼 바르트의 말씀실증주의 철학에 대한 한계를 지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세계 자연과학, 이 세계의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참되다고 여기는 거거든요. 이런 문제하고 신앙하고 별로 관계가 없다. 그렇게 현대신학에서 많이 이야기해줍니다. 바르트 불트만 이런 사람들이 다 그랬습니다. 현대신학에서는 인간의 신뢰 행위가 단순히 참되다고 여기는 것*과 자주 대립되었다. 신앙은 실제로 신앙의 핵심을 신뢰 안에 둔다는 말은 옳다. 반면에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고 여기는 것은 신앙이 아니다. 단순히 이론적으로 따지고 들어서 이해하는 것을 신앙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거는 인제 바르트와 불트만의 이런 쪽의 입장을 일단 이해한다고 하는 겁니다. 신앙하는 그 사람이 중요하다고 하는 고 입장이거든요. 그런데 그거는 옳은 거죠. 그냥 신앙이 논쟁으로 싸우고 논리적으로 맞는 논리 실증주의 뭐 이런 거는 아니기 때문에 철저하게 자기의 삶의 전체를 던지는 그러한 삶의 태도라고 하는 점에서 이들의 말씀 실증주의 신앙, 이런 점들은 기본적으로 옳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논란의 소지가 없지 않은, 즉 동정녀 탄생과 예수의 부활이나 승천과 같이 다른 이들이 믿기 어려운 성서의 정보, 그러한 보도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신앙이라고 할 수도 없다. 교리적인 것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런 것을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힘들지 않느냐? 그런 거죠. 여기서 판넨베르크가 이 복음들을 부정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교리적으로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만을 신앙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해 갖고는 기독교 신앙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안에서 보편적 진리로 설 근거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우선적으로 예수와 그에 의해 계시된 하나님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만이 명실상부하게 신앙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다. 그건 옳은 이야기죠. 그러나 이러한 신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부활 사건, 그분에 대한 신뢰 이런 것들을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 신뢰, 참되다고 간주하는 태도를 포함하고 있다. 이 말을 제가 직역을 해서 그렇습니다. 이런 태도는 신뢰와 분리될 수 없으며 이것 없이 신뢰가 유지될 수도 없다. 참되다고 간주하는 태도. 무슨 말일까요. 그건 제가 각주를 달았습니다. 읽어보겠습니다. 이렇습니다.

판넨베르크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곧 그 신앙의 대상이 참되다는 인식(Fürwahrhalten-휘어바할텐)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이 왜 참된 존재인가를 판단해야만 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기독교는 그 신앙의 대상이 진리라는, 더구나 보편적인 진리라는 사실을 보편적 해석학에 근거해서 부단히 설명해 나가야 한다.

여러분들이 다 이해하셨으면 제가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됩니다. 혹시라도 조금 미진한 부분이 있을까 싶어서 이렇게 좀 예로 설명해 볼까요. 예라기 보다 직접적인거죠. 예수님의 부활을 그냥 받아들인다는 그런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도대체 그 예수에게 일어났었던 유일회적인 궁극적 생명인 이 부활이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의 삶에서 말하는 생명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에 대한 보편적 근거들을 확보해야만 한다. 그 이야기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시겠죠. 예수님이 부활하셨으니까 나도 부활할 줄 믿습니다. 부활은 내 생명이 새로 주어지는 것이고 그러한 식으로 죽은 자로부터 3일만에 예수를 살리신 하나님에게 나의 운명을 맡긴다. 이런 신뢰 옳습니다. 그거는 우리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고요.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서 되겠느냐 하는 것이죠. 도대체 거기서 말하는 부활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물학적이고 물리학적이고 인문적인 그걸 근거들이 필요하지 않느냐 그래서 그것이 정말 참되다고 하는 판단이 서야 하지 않는거냐 하는거죠. 휘어바할텐, 참되다고 인정하는 것 생각하는 것, 네 그렇죠. 네 그다음.

보다 정확하게 고찰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참됨에 대한 인식(휘어바할텐)이 세 지평에서 믿음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현존 세계 안에 있는 가시적인 근거가 그것이다. 인간의 신뢰는 바로 그 근거에 기초하고 있다. 이것은 특히 사도신경의 두 번째 항목이 거론하고 있는 예수의 역사적 사건, 그리고 첫째 항목과 연관되어 있는 창조의 세계다. 기독교의 가르침이 참되다고 하는 그 사실을 세 가지 지평에서 믿음과 연결시켜야 된다는 말입니다. 요거는 상당히 중요한 대목인데요.

첫번째가 현존 세계안에 있는 가시적인 근거입니다. 그 뒤에 설명했듯이 역사와 세계입니다. 구체적으로 예수의 역사적 사건과 하나님 창조의 세계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첫 번째 항목으로 나온, 두 가지 항목으로 나눠집니다. 역사적 사건, 창조의 세계만 일단 말한다면 아까 이야기한 물리학 또 생물학 고고학 이런 차원에서만 말한다 하더라도 기독교가 말하는 그 내용들이 참되어야 된다고 하는 겁니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시겠죠. 우리가 과연 그렇게 생각하고 있느냐 질문해보세요.

예컨대 창조과학회가 우리나라에서는 큰 힘을 발휘하고 있어요. 이거 참 코미디 같습니다. 우리 현실이 왜 이런지 모르겠어요. 세계 기독교 흐름에서 창조과학회라고 하는 것은 거의 미미합니다. 있어봐야 거의 인정하지 않는 극단적인 근본주의자들만 그것을 하거든요. 성서 축자영감설을 믿는 사람들을 아주 일부분입니다. 그런데 세계적으로 보면 일부에서 속한 그러한 사람들이 한국 교회에서는 아주 주류가 되어 버렸으니까 이게 참 우스운 모습입니다. 창조과학회의 사람들이 지구의 나이를 6천년으로 봐요. 생각해보십시오. 만약에 그런 것들을, 계속 그런 것들 주장하게 된다면 기독교 교리가 얼마나 유치하게 되는지요. 이 세계에 있는 생물학자 물리학자들로부터 완전히 왕따 당할 수밖에 없거든요. 왜 이러한 일종의 자충수를 두느냐 하는 것이죠.

이건 그러니까 판넨베르크가 이야기하는 우리의 믿음이 참되다고 하는 사실을 창조의 세계에 근거해서 말해야 된다고 하는 이 요구에 반대되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역사적 사건은 그냥 지나가겠습니다. 그거는 역사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창조 세계와 비슷하니까 그만두죠.

둘째, 신뢰는 이러한 근거에 근거해서 신뢰가 실제로 관계되어 있는 불가시적 현실성을 기대한다. 그것을 추구해야 된다. 이 불가시적 현실성은 각각의 근거에서 인식된다. 사도신경에서 이 문제는 바로 하나님의 현실성이며, 신적인 존엄의 정당성을 위해서 고양된 하나님 아들의 현실성이고, 교회의 삶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비밀이 충만한 심층적 차원으로 역사하는 성령의 현실성이다. 첫 번째 지평은 역사와 창조세계라 그랬어요. 두 번째 지평은 불가시적 현실성입니다. 이 불가시성 현실성, 보이지 않지만 확실한 어떤 것, 이런 것들이 사도신경에서는 세 가지 항목으로 나옵니다.

하나님의 현실성, 보이지 않죠. 보이지 않는 것은 불확실하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본다고 하는 그 차원을 넘어선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현실성이고 고양된 하나님의 아들의 현실성, 그것은 역사적 예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구요. 그건 첫 번째 지평, 역사적 예수의 사건이구요. 여기서 삼위일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불가시적 현실성이라는 점에서 하나님은 당연히 불가시적 현실성에 맞는 것이고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의 불가시적 현실성이라고 하는 것은 고양된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합니다.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그분 말이죠. 고양된, 이미 은폐된 생명의 세계로 옮겨간, 종말론적인 그러한 생명의 세계에 들어간 종말에 완성될, 구체화된 하나님나라에 가신 예수의 하나님 아들의 현실성.

세 번째는 성령의 현실성입니다. 이게 어떻게 설명했느냐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비밀이 충만한, 비밀이 가득한 심층적 차원에서 역사하는 생명의 현실성이라는 것이라는 그것을 봐야 하는 것이죠. 비밀이 충만한 심층적 차원에서 활동하신다. 성만찬 같은 것들이 그런것이죠.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예배드리는 것들이 바로 그러한 것이죠. 겉으로 보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거기에 우리가 모르는 방식의 심층의 차원에서 성령이 활동하신다고 하는거죠. 아. 그거는 그냥 듣기 좋아라 해서 그런 말하는 것이 아니냐 아마 여러분들이 그런 정도로 생각한다면 성령의 현실성을 여러분들이 잘 모르는 겁니다. 지금 우리는 그러한 차원으로 들어가지 않고 이 성령을 자꾸만 가시적으로만 삼을려고 하는거죠. 방언을 한다거나 예를 들자면 성령 충만함을 받아서 가슴이 뜨거워진다거나 심지어는 그러한 방식으로 돈을 많이 번다거나 이런쪽으로만 나가는 데 그건 생명이 충만한 심층적인 차원이 아니잖아요. 그거는 그냥 자본주의 물질주의 그런 이 세상의 이데올로기가 추구하는 것들입니다. 그건 즉각 즉각 효과를 내야 되거든요. 그게 없으면 그들은 견디지 못합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지금 초조하잖아요. 효과를 내야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이것 저것 터드리게 되죠. 정치가들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정치 냉소주의자는 아닌데요. 우리에게는 민주적이고 어떤 역사발전에 대한 경험들이 일천해서 아직까지 정치적인 차원에서 성숙한 모습들이 나타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지역갈등도 심하구요. 등등.

우리 기독교 교회는 그러한 방식이 아니라 비밀 충만한 심층적 차원에서 영이 활동한다고 하는 그거를 아주 뚜렷하게 인식하고 살아야 한다는 거죠. 그게 안보이니까 우리는 허둥대기도 하구요. 같이 효과내는 것을 따라가기도 하구요 천박한 실용주의에 빠져들고요. 그러나 여러분 여기서 착각하지는 마십시오. 기독교 신앙이 그냥 뜬 구름 잡는 식이다. 그건 전혀 아닙니다. 추상적인 관념적이다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이거는 아주 현실적인 겁니다. 현실, 리얼리티, 현실적인데 그것을 불가시적 현실로 이해하는 거예요. 아까 제가 끈 이론을 이야기했죠. 물리학에서도 그러한 방식이 아니면 이 물리의 해명의 세계를 해명할 수 없어서 그렇게 나가고 있는데 이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고 있는 우리들이 그러한 즉효약과 같은 어떤 그러한 신앙의 요술방망이를 요구한다면 우리는 비밀 충만한 심층적 차원에서 활동하는 성령을 이해하지 못하는 겁니다. 아주 확실하지만 그러나 전혀 다른 방법으로 우리의 생명을 끌어가시는 힘, 그 능력에 우리가 사로잡혀야 되는 거예요. 제 말이 전달되었나요? 이게 두 번째였어요.

셋째, 신뢰는 의지할만한 것에 대한 확신을 기대하는 것과 관련된다. 사도신경에서 이것은 죄의 용서, 죽은 자의 부활, 그리고 영생에 해당된다. 이러한 세 가지 차원에서 우리 신앙이 말하는 내용은 이런 것들이 정말 참되고 믿을만하다 참되다 그렇게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 특징을 아시겠죠. 조금 더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첫 번째 지평은 과거라고 할 수 있어요. 말하자면 예수의 역사적 사건 이미 일어났어요. 세계. 이미 이렇게 직면해 있어요. 과거와 현재까지 있는데요.


두 번째는 불가시적 현실성이예요. 실존적인 차원에서 현재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확실하게 활동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현재 그렇게 할 수 있는 거죠. 아까 성령을 이야기할 때 말씀드린 비밀이 가득한 심층적 차원에서 영이 활동하는, 현재적으로 활동하는 그러한 차원이라고 할 수 있어요.

세 번째로 미래와 연결되요. 희망이죠. 기대하는 거죠. 아직까지 우리에게 확실히 오지 않았어요. 그러나 올 거라고 하는, 우리가 올 거라고 하는 것만이 아닌 거기에 와야 되는 건데. 그런 것도 분명히 포함되고 있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이것도 현재적인 모습도 있군요. 그러나 미래적인 것의 현재적인 입장이구요. 우리가 우리의 신앙이 믿을만하다고 신뢰할만하다고 기대되는 것, 그렇게 우리가 희망하는 것, 그렇게 기다릴 수 있는 것, 그것인데요. 그것이 사도신경에서는 죄의 용서, 죽은 자의 부활, 영생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아직 우리에게 오지 않았어요. 미래라고 하는 것은 옳은 이야기군요. 판넨베르크가 이것을 미래라고 하지 않지만 그런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죄의 용서, 아직 용서 받지 못했습니다. 용서 받았지만 그게 완성되지는 못했습니다. 완전히 우리가 죄의 용서를 받았다면 구원받아야 되는 것이고 죄의 경향성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야 되는데 여전히 우리는 그것을 안고 살거든요. 우리는 임시적으로 계속 죄의 열매를 맺지만 그러나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임시로 죄 없다로 인정하는 것 뿐이거든요. 여러분 여러분이 완전히 의인이 되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전히 우리는 죄인이고 같이 안고 있는거죠. 두 가지 이율배반적인 실존을 우리가 안고 있는 거예요. 죄의 용서 아직 이루어 진거는 아니고 그건 우리의 기대입니다. 죄가 완전히 용서받은 그 상태는 어떤 걸까요. 얼마나 환희로는 것일까요? 생각해 보십시오. 죄의 경향성이 전혀 없는 상태를 여러분이 상상할 수 있어요? 그때를 우리가 기다리잖아요. 죽은 자의 부활, 그거는 더더구나 미래, 희망이자 그러한 생명입니다. 영생도 마찬가지죠.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같이 이야기한 대목도 중요하군요. 이 글라오베라고 하는 문장 그게 무엇을 도대체 이야기하려고 하는가 계속해서 판넨베르크가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기독교 신앙이 그냥 전적으로 내가 신뢰한다고 하는 무조건적인 그러한 신뢰라고 하는 것은 옳은 거예요. 이모저모 따져갖고 요령피우고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불교도 좋고 기독교도 좋지만 이것을 선택한다. 그 차원은 아닙니다.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라고 하는 것을 전제하지 않으면 이건 기독교는 성립하지 않으니까요. 종교다원이라고하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불가능한 이론입니다. 이건 신앙이라고 할때는 절대적인 거거든요. 이건 옳은 거지만 그러나 그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정말 우리가 참되다고 인정하는 것을 배제하는 건 아니라고 하는 거죠. 네. 고 맥락을 이해하시겠죠. 고 두 가지가 구별되는 것을 이해하시겠어요? 아시겠어요? 아실 겁니다. 참되다고 인정하는 것은 이거는 보편적 해석학이죠. 기독교의 보편성을 유지하는 거죠. 예. 그렇게 이야기해야 되겠군요. 전적인 신뢰 이런 것은 기독교의 독특성을 이야기한다면 참되다고 인정하는 것은 기독교의 보편성. 그렇게 얼추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보편적 해석학을 이런 것을 배제하고 무조건 믿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을 판넨베르크가 이야기했습니다.

참되다라고 인정하는 보편적 해석학의 세 가지 지평이 있는데 설명한 그대로 입니다. 역사적 예수 사건과 창조세계, 여기서 참되다고 기독교 신앙이 인정받아야 된다. 두 번째 불가시적현실성, 삼위일체론적인 불가시적 현실성, 세 번째는 우리가 우리의 삶을 던져도 될만큼 던져도 되는 것에 대해 기대하는것, 죄의 용서, 죽은 자의 부활, 영생 이러한 세 차원에서 참되다고 인정받을 수 있어야 된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기독교 신앙을 변증해 가야할 책임이 있겠죠.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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