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강 녹취록 - 1장 나는 믿습니다(6)

사도신경해설 조회 수 2827 추천 수 0 2009.04.05 00: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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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강 -나는 믿습니다(06)

안녕하세요.

사 도신경해설 오늘은 8강이 되겠습니다. 제가 갖고 있는 책 22쪽 중간 패러그래프부터 시작합니다. 텍스트를 좀 읽어보겠습니다. 지난번에 했던 것 다시 요약할 필요 없겠지요. 거기서 그래도 하나 핵심만 집고 넘어가죠. 기독교 신앙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사도신경을 우리가 이야기할 때 중요한건 이것이 현대 지성인들에게 조금 혼란을 야기시키기 때문에, 예를 들자면 동정녀 탄생, 하나님 우편, 재림, 심판 이런 것들이 그렇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이런 것에 대한 언급을 회피하고 예수님의 사랑만 전하는 방식으로 기독교를 말하려고 하는 이러한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는 거죠. 그러니까 기독교 신앙이 뿌리를 두고 있는 거시담론, 그거를 놓치면 기독교 자체가 혼란스러워지는 거죠. 혼란스러워지기도 하고, 기독교가 훼손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선택의, 두 가지 길에 선택이 우리들에게 있는 거죠. 하나는 현대인들이 아주 편안하게 받을 수 있는 그러한 쪽으로만 접근하자는 거고 또 하나는 힘들더라도 기독교 신앙의 중심을 놓치지 말자. 거시담론, 사도신경의 근본적인 사태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그 이야기입니다.

제가 왜 이 야기를 들어가려다 말고 멈칫하고 다시 뒤돌아가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했는지는 아시겠죠? 이거는 바로 우리가 사도신경 해설을 공부하는 근본적인 목표이기도 하구요. 또 오늘 한국 기독교의 진면목을 이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한국교회 신앙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어느 소설의 제목처럼 이러한 방식으로, 낭만적인 차원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랑의 교회가 대표적인 건데요. 거기도 그렇고 온누리 교회도 그렇고요. 대개 지성적이면서 중산층을 대상으로 하는 교회, 소망교회도 마찬가지구요. 그런 교회들은 이런 휴머니즘에 근거한 기독교 신앙 안으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본인들은 그렇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의 케리그마에 머물러 있다 이야기를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거의 그런 설교나 교회 가는 방향 같은 것들이 단적인 예로 Eschatology 가 없잖아요. 종말론이 없잖아요. 창조론이 약하잖아요. 기껏해야 생태, 자연보호운동벌이는 것 아껴 쓰고 절약하고 그런 이야기하잖아요. 창조론적 이야기 못하잖아요. 예수의 승천 이런 것들, 이런 것들도 신화적인 표상으로만 접근하지 그것의 중심으로 뚫고 들어가는 그러한 일들이 없잖습니까? 네 이런 것들은 말하자면 포퓰리즘, 신앙의 포퓰리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영향을 받은 우리 한국의 대중교회들이 다 그렇고요. 말씀드린 미국, 우리의 족보로 따지자면 우리의 선배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의 복음주의 교회들이, 사실 복음주의라고 하는 말도 왜곡되고 있습니다만 어쨌든 편의상 그렇게 부치겠습니다. 그 교회들이 다 그렇습니다. 특별히 오스틴, 이러한 분들은 더 그렇고요. 거의 기독교의 중심적인 신앙은 다 빼버렸습니다. 네. 어떤 사태인지 여러분들이 아시겠죠. 그런 문제를 지적하면서 도대체 기독교 신앙을 갖는다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질문하면서 판넨베르크가 우리를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텍스트를 보겠습니다.

사도신경의 진술이 근대주의 의식에 빠져있는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부분적으로 몹시 불편하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근대주의 의식, 설명할 필요가 없죠? 근대주의 중에, 뭐라고 할까요? 계몽주의적인 가치관, 그리고 역사 실증주의, 자연과학 만능주의 이러한 것들이요. 이러한 근대주의의 정신에 하나의 교회가 완전히 정 반대로 깡그리 무시하는 반응도 보이는데 이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판넨베르크가 지적하고 있는 요 대목에서만 본다면 사도신경의 내용들이 그러한 계몽적이고 합리적이고 역사 실증주의적인 그러한 현대적 사유방식에 젖어있는 사람들에게는 부분적으로 불편하게 다가올지 모른다. 이러한 일련의 진술이, 사도신경이 말하고 있는 진술들이죠. ‘여러 가지 곤란한 문제들을 파생시키고 있다는 점도 논란의 여지가 없다.’ 도대체 예수가 부활승천,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다고 하는 것이 정말 오늘 정상적인 우주과학을 가진 사람들에게 씨가 먹힐만한 그런 이야기가 되겠는 가죠? 곤란한 문제죠. ‘이러한 진술이 담고 있는 내용으로부터 근거가 불확실한 신앙 행위로 퇴행(退行)하거나’, 퇴행, 요걸 잘 보시기 바랍니다. 밑줄치고 두고 두고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퇴행하거나 아니면 그 진술의 진리를 방치해 두는 것도 별로 의미 있는 일은 아니다.’ 이러한 근대주의의 도전 앞에서 사실상 기독교가 퇴행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앞에서 말씀드린 또 하나의 극단적인 반응이거든요. 그러니까 코페르니쿠스 이전의 우주관을 그대로 유지하려고 하는 사람들. 네 지금도 지구 6천년설 주장하는 사람들 있잖습니까? 이 퇴행이거든요. 이 퇴행적인 것이 한국 교회에서 주류로 활동하고 있다고 하는 게 정말 어처구니없는 것뿐만 아니라 21세기 한국교회 미래를 볼 때 불행한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아니면 그냥 그대로 방치해두는 거죠. 네 그것에 대한 해석도 없이 내버려두는 것, 별로 의미있는 일이 아니다.

‘더 구나 이런 진술들이 핵심적으로 말하는 것은 바로 현재적 신앙의 기초와 내용이기 때문에 이런 태도는 의미 있는 일이 아니다.’ 이런 태도로 두 가지 이야기했죠? 불확실한 신앙행위로 퇴행하거나, 무조건 신앙만능주의, 무조건 믿습니다는 식으로 떨어져 버리거나 그러한 갈등관계 이러한 것들을 방치해 버리는 이러한 것들은 바른 태도가 아니다. 왜냐하면 사도신경이 진술하는 그 내용은 바로 오늘 우리들에게 살아있는 신앙의 내용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이걸 연결시킬 수 없으면 문제가 벌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신경에 있는 고대인들의 표상이 지닌 그러한 신앙의 내용들, 교리들, 그런 것들이 고대인들이 그것으로가 아니라 형식은 빌렸지만 오늘 똑같이 기독교 신앙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현안이 실질적인 신앙의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라고 할 수 있는 거죠.

‘이와 마찬가지로 사도신경에 진술된 내용이 의심스럽다고 하더라도, 겉으로는 의심스럽게 보이기는 하지만 무조건 믿어보겠다고 결심한다고 해서 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신앙의 결단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와 그를 통해서 계시되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착상하고 있는 실질(實質)’, 리얼리티죠 ‘의 진리를 확실히 보증하는지, 혹은 이 신앙이 그 실질의 내용들과 아무 상관없이 독립되어 있는지 이 두 문제는 전혀 다른 차원에 속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결국 같은 결과에 이른다.’ 참 말이 조금 비비 꼬이는 것 같죠. 번역이 되어서 그렇기도 하구요. 문장을 제가 끊어서 번역 하는 것이 좋았을 텐데 그걸 제가 그대로 따라가느라고 우리말로는 확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복잡한 말은 아니죠.

다시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신앙의 결단이’, 신앙의 결단, 믿습니다. 예수 영접하는 그런 어떤 것들 예기하죠. 실존적인 상태로 들어가는 그런 것들 이야기하죠. 현재적인 신앙태도죠. 예수 부활했냐 아니냐 재림하냐 아니냐 하는 것은 둘째 치고 지금 바로 내가 그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결단, 요거에만 집중해도 된다는 그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결단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와 그를 통해서 계시되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착상하고 있는 실질(實質)의 진리를 확실히 보증하는지’, 네. 우리 신앙의 결단이 예수 그리스도에 이른 사건에 이르는 내용들이, 말이 좀 쉽지 않네요. 그리스도 예수 사건이 바로 그 진리를 확실하게 보장하고 있는지 아닌지. 다시 한 번 정리해야하겠습니다. 예수를 믿는 기독교 신앙에 들어오겠다는 결단에 있는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 연관되어 있는 어떤 그 실질들, 리얼리티 이런 것들에 진리, 그런 것들을 듣고자 함이 아닌지. 이러한 문제. 고런 차원하구요. 이 신앙이 실질적인 내용과 아무런 상관없이 독립되어 있는지? 같은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무슨 뜻이냐? 아무래도 설명이 좀 필요한데. 네 이런 거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그 신앙의 계기, 신앙의 상태 고거는 그것만으로 귀의(歸依)할 수 있는 거예요. 적극적인 신뢰, 어떤 조건이 아니라, 그러니까 손에 딱 잡아져서가 아니라 희망에 근거해서, 종말론적인 희망에 근거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이 결단, 신앙적 결단, 이 문제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것이에요. 그런 것이 따로 있고 이미 이런 신앙적 결단이 우리 신앙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과 연관되어 있는 현실성의 진리를 확보하고 있는지 아닌지 요 두 문제는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하는 겁니다. 조금 더 나가보지요. 이. 자꾸 말이 뱅뱅 도는데요. 진도 나가는 것이 낫겠습니다. 다른 차원의 문제지만 결국 같은 것으로 이르게 된다.

‘왜냐하면 신앙의 확신이 어디서든지 그가 신뢰할 수 있는 내용 보다는 신앙하는 자와 그의 신앙적 결단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신앙은 더 이상 근거가 될 수 없는 맹목적 결단으로 비약됨으로써 결국 자기구원*을 이루는 업적으로 떨어지게 된다.’ 그게 인제..... 그 신뢰할 수 있는 내용, 예수 그리스도안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구원사건이라고 하는 이러한 것은 접어놓게 되고 신앙하는 사람의 그 실존적 결단, 여기에만 근거하게 된다고 한다면 결국 신앙은 더 이상 토대가 될 수 있지 못하고 맹목적 결단으로 올라가 버리게 되고 그것은 곧 자기 구원을 이룬 업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신앙하는 자기에게 집중 하는거죠. 그렇게 되면 결국 자꾸 믿는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게 되는 거죠. 그렇게 되면 결국 그 믿음마저도 업적이 되는 거죠. 자기구원인거죠. 자기 확신에 빠지게 되는거죠. 이런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 지 여러분들이 잘 아실 겁니다. 자기구원이라고 하는 고 단어를 제가 각주를 좀 달았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무조건 믿으라거나 무조건 순종하라는 요구는 그 믿음이나 순종의 내용이 세상을 창조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의 길을 제공했으며 성령으로 현재하는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기껏해야 자기 확신이고, 결국에는 자기구원에 불과하다.


‘신앙은 맹목적신뢰가 아니라’ 요게.. 신앙은 어떤 사람에게서 있어서 맹목적인 것인데요. 요 표현이 좀 어렵네요. 실질적인 어떤 것을 갖고 믿을 수는 없는 거거든요.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을 다 걸고 불가시적 현실성에 근거해서 내 운명을 거는 그런 차원을 강조하게 된다면 맹목적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신앙의 단계까지 이르는 그 과정에서는 당연히 그 신앙의 대상이 되는 그것이 정말 확실한가에 대한 판단, 이해, 그런 것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이죠. 그런 것이 없게 되면 자꾸만 믿는 자기, 그리고 결단이라고 하는 고 순간, 거기만 머물기 때문에 결국은 자기구원에만 떨어지는 것이죠.

신앙은 맹목적 신뢰가 아니라 구원의 리얼리티, 그리고 그 현실성과 연결되어 있을 때 빛을 발한다 하겠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신앙을 오늘의 세계, 그리고 그 현실성과 전혀 무관한 개인의 실존 차원에 가두어두거나, 혹은 교회조직이나 그 확장으로만 강요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그 원래적 전통으로부터 소외되는 길이라 할 수 있다.

역자주로 달은 겁니다. 다시 올라가서요. 판넨베르크의 글을 보겠습니다.

‘자기 자신을 피안(彼岸)에 토대를 두지 못한 신앙은, 즉 그가 의지하고 있는 궁극적인 것에서 벗어난 신앙은 고유한 자기(Ich)’, Ich라고 했는데 이것을 조금 더 엄격하게 이 단어를 구분하면 자아예요. 자기라고 하면 보통 ... 이라고 하거든요. ‘자기에게 사로잡혀 있게 되어 실행능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 문장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자기 자신을 피안에 토대를 두지 못한 신앙’, 그러니까 믿고 있는 자신에 매몰되어 있는 신앙을 예기하는 거죠. 신앙은 자기를 초월해 있는 하나님에 근거를 두는 건데요. 그런데 요건 구분하셔야 됩니다. 내가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예기를 하지만 그것을 잘 구분하셔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무조건 믿는다고 하는 거거든요. 맨 날 똑 같은 단계에 머물러 있어갖고 그 하나님이 무엇을 행하시는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어떻게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을 실행하시는지 어떻게 종말에 일어난 생명의 선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일어나는지 어떻게 예수가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하나지만 격이 다른 바로 그 성자로서의 하나님이심에 대한 그냥 우리가 우리 전체 실존과 운명을 맡길만한 대상이라고 하는 확신, 그런 것이 없이 그냥 믿습니다 이러한 단계에 머물러 있는 거는 그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솔직하게 말하면 자기 자신을 믿는 거예요. 믿고 있는 자기 자신이 신통한 거예요. 그런데서는 결코 초월적인 신앙이 나올 수 없습니다. 자기 피안, 자기 너머 서에 있는 활동하고 있는 하나님에게 내 영혼을 일치시키는 거잖아요. 맡기는 거잖아요. 그런 하나님의 그 구원행위와 성취 이런 것들은 늘 새롭게 우리를 끌어가는 그러한 힘으로 경험되어야하는데 그런 것이 없다 말이죠. 그렇게는 자기를 초월할 수 없고 하나님의 나라가 그냥 말로만 있는, 능력이 없는 거죠. 고거 구분하시겠죠. 사람들은 자기가 신앙하는 계기에 머물러 있기를 좋아합니다. 그게 재미있는 거예요. 내가 옛날 보다 믿음이 더 있어졌다. 옛날보다 헌금을 많이 하게 되어졌다. 확신이 많아졌다. 그런데 머물러 있는 거예요. 작은 차이인데 결정적인 차이라고 볼 수 있어요.

옆으로 나가는 이야기인데요. 요즈음 감리교회 감독회장 선출에 있어서 감리교회가 분란가운데 빠지고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제가 말씀드리지 않겠어요. 김선도, 김홍도, 김국도, 3형제 목사가 있는데 위의 두 형제가 다 감독회장이었습니다. 감독회장은 각 지역 회장들을 총괄하는, 실질적으로 감리교회의 수장이거든요. 일반적으로 다른 교단들은 총회장이 1년입니다. 이 감리교회감독 회장은 4년인가 그래요. 권한이 막강합니다. 두 형들은 다 했어요. 김선도., 김홍도요. 세 번째 김국도 목사가 나왔는데요. 이게 사회법에 문제가 걸려서 법원에서 자격이 없다고 심사가 나온 것 같습니다. 대신 고수철 목사가 득표는 적게 했는데 이 사람이 되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서로 자기가 감독회장이라고 다투고 있죠. 김국도목사측에서는 교회일은 사회법으로 하면 안된다. 교회법에 따라서 해야 된다하면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들이 가능할까. 참 그게 신기하게 느껴집니다. 제가 그 위치에 가면 똑 같이 그렇게 할까 하는 그러한 생각도 없는 것은 아닌데요. 글쎄요. 우리가 그 입장에 가보지 않고서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만 아주 모양이, 모양이 아주 나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평생 동안 신자들에게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정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그 부활에 온전히 희망을 두고 살라고 그리고 이 땅의 삶보다는 이 세상 끝나고 영원한 생명이 주는 것에 모든 것을 걸고 살라고 가르치고 설교한 목사들이 누가 감독회장 해야 되는 것 때문에 지금 교단이 총체적으로 욕을 먹는 것, 그런 것을 둘째 치고 자기들의 입지만 확보하기 위해서 그야말로 이전투구를 하고 있거든요. 여기에 김 아무개 도 목사 삼형제가 감리교회 실권을 잡고 그런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김홍도 목사에 얽힌 이야기들도 많이 있었죠.


결국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하는 대상을 핑계 삼아, 맹목적으로 믿고 있는 자기에 대한 호기심과 신뢰가 많은거죠. 그러한 상태에서는 결국 자기 초월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믿으면 믿을수록 자기가 중요하게 되니까요. 아시겠죠? 이런 거는 아무리 속일래도 속일수가 없습니다. 네. 이런 경우에는 실행능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자기에게 사로잡혀서죠. 기독교 신앙이 신뢰하고 있는 하나님의 현실성은, 리클리카이트 고테스 Reality of God. 하나님의 현실성은, 하나님의 정말 하나님의 되심, 하나님의 진리인 것, 사도신경이 가리키고 있는,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기독교 신앙이 이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는, 소위 그러한 ‘사실들’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니다. ‘사실들’은 독일어로 타트작이거든요. 타트작, 두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타트’는 행위, ‘작’은 사안,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고 사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실제적으로 일어난 어떤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탓작. 정말 실질적인것, 탓작, 실제 일어난 것들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실제로 일어난 이것들, 이 사건들, 이 탓작, 이런 것이 뭐냐 이런 것들을 해명할 수 있어야 된다는 거죠. 그리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영성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는 그런 탓작, 이런 사실들로 들어가지 않고 맹목적으로 믿고 있는 자기의 믿음에 포커스를 맞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왜 일어나는가? 일단 탓작의 내용을 잘 모른다고 하는 것이 첫 번째 이유이고 또 하나는 청중들이 그러한 사실들 보다는 기독교 안에서 벌어진,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나는 거시담론들, 탓작의 사실들 말이죠. 이런 것들 보다는 자기에 대한 관심이 많은 거죠. 자아죠.

아무래도 여기서 다른 것을 잠간 인용을 해야 되겠습니다. 조그만 요 에세이집인데요. 요거를 제가 어저께 댓글을 달면서 소개한 책인데요. 다비아에 댓글을 달면서요. 겨울 부채. 진종불교의 한 승려였던 키요자와 반시(1863-1909)는 40세에 타계한 진종불교에 속한 승려였는데, 그의 짧은 일곱편의 글을 편집한 하세다 노부오 불교학자가 편집해서 낸 그 일본어로 된 책을 이현주 목사가 번역해서 내용들 글씨체도 보세요. 자기가 직접 쓴겁니다. 펜으로 써서 냈습니다. 인쇄하지도 않고 펜으로 써서 냈습니다. 내용도 얼마되지 안 되어요. 글씨도 손으로 쓰니까 한쪽에 많이 들어가지도 않고요. 짧은 에세이 일곱편 실었구요. 여기에 이것을 편집한 하네다 노부오가 머리말을 썼습니다. 머리말을 조금 읽어볼게요. 여기에 자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자아가 불교에서만 중요한 게 아니라 기독교에서도 중요합니다. 자기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근거니까요? 도대체 내가 누구인가? 자기. 나. 이거를 인제 서양, 유럽철학이나 아니면 인간론 이런데서는 자기와 자아를 구분합니다. 자기는 self이구요. 자아 I 는 독일어로 이히라고 하는데요. 이 자기는 주변으로부터 주변 사람들에게 의해서 인식하는 나를 가르킵니다. 교회 가서는 신자들이 나를 목사로 알아주니까 그게 자기에요. 그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교회가 아니라 일반 다른데 아무도 나를 모르는 데로 가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목사로 인정하지 않잖아요. 거기에는 목사로서의 자기는 없는 거죠. 자아는 어떤 근원적인 거죠. 그러한 주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원천적인 그런 자기정체성이라고 합니다. 네. 여기에 이 사람이 머릿글로 쓴 한 부분을 읽어보겠습니다. 읽어볼까요. 말까요. 너무 길게 읽지 말고 한 군데만 읽어야 되겠네요. 짧은 부분 줄여서 읽겠습니다.

그러면, 사람이 어떻게 자기로부터, 자아라고 해도 좋고요. 자기, 자아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까? 대답은 이것이다. 자기 부정을 통해서이다. 그러나 불교는 자기 부정이 실천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한다. 왜냐하면 자아가 부정에 항거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자아는 자아를 부정하지 못한다. 그렇죠. 내가 나를 부정하지 못하잖아요. 이건 본능적으로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직 법(Dharma)만이, 불교 용어로 다르마라고 합니다. Dharma 즉 무상의 진리, 다르마는 무상의 진리라고 그래요. 우리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 성령만이 자아를 부정하고 우리를 해방시킬 수 있다고 불교는 가르친다. 법, 다르마, 무상의 진리, 변하지 않는 진리 이것은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 있는 무엇의 형태를 취하여, 성령처럼, 우리의 자아에 도전하고 그것을 무너뜨린다. 법도 스승의 모습을 취하기도 하고, 가르침, 또는 경험의 모습을 취하기도 한다. 그 모습이야 어떠하든지 간에, 우리의 자아와 법 사이의 충돌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그것들은 또한 필요 불가결하니,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참 본질을 통찰하게 되고 그리하여 고(苦)에서 해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 불교가 이야기하는 것도 자아로부터의, 자아를 부정하는 거예요. 인간이 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자아가 너무 강하기 때문에요. 자기 집착이죠. 말하자면. 고(苦)로부터의 해방은 결국 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하는 다르마라고 하는. 기독교하고 아주 본질적인 인간이해는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불교가 고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말한다면 기독교는 죄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말하잖아요. 이 사람들도 자아로부터 자아를 극복하기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잖습니까? 우리 기독교도 사실은 스스로도 그런 것을 불가능하다고 보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신다고 하는 그러한 영적인 단계로 들어가게 되어 있는데요. 이 사람들은 다르마, 무상의 진리 이런 것의 참조를 통해서 결국은 자아가 극복된다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자아, 판넨베르크의 이 책에서도 자아에 사로잡혀서 신앙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것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 삼위일체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구원의 사실, 탓작, 사실들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믿고 있는 자신에만 관심을 갖게 될때 결국 자기 구원에 몰두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하나님의 신성을 드러내는 특색이나 하나님이 계시되는 예수 역사의 사건에 사도신경의 진술이 정확하게 들어맞는지 아닌지는 또 하나의 다른 질문이다. 이것에 대한 답변은 신앙고백의 개개 진술을 얼마나 심층적으로 이해하고 검증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속한다.’ 신앙고백의 진술을 이해하고 검증하려는 노력은 이러한 회의를 통해서, 사도신경의 내용이 정말 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딱 부합하는 거냐? 정말 옳은 거냐? 아니냐? 하는 것을 예기합니다. 그러니까 사도신경은 고대 로마교회의 세례고백문에 기초하고 있다고 볼 때에 그러한 지역적인 한계도 있을 거고 우리입장에서 보면 2000년 전이라는 역사적 시간적 간격도 있고 해서 과연 사도신경의 진술들이 실질적인 하나님의 사건, 구원사건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그러한 구원론적 사건에 실질적으로 부합하느냐 아니냐 는 의심이나 질문을 할 수 있는거죠. 반복된 용어 말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다고 하는 이러한 사도신경의 진술들이 정말 역사적인 예수에게 일어난 바로 그 사건이냐? 아니냐? 그러한 의심을 할 수 있잖아요. 실질적으로는 그렇지 않았지만 로마교회신자들이 자기들의 방식으로 그렇게만 진술한 게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당연히 나오는 회의다. 그렇게 의심할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다시 한 번 그 문장을 읽겠습니다. ‘신앙고백의 진술을 이해하고 검증하려는 노력은 이러한 회의를 통해서 그저 외관상으로만 전혀 상관없는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항상 다소간 발작적이었던 신앙적 결단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의미와 그 문제점들을 타당성 있게 하고, 또한 그 의미를 철두철미 찾아보려는 유일한 길이다.’ 네. 전달이 되었죠. 사도신경의 진술들을 철두철미하게 파악하려는 그러한 신학적 노력들은 이런 문제들이 생각이 골치 아프니까 무조건적인 그러한 신앙의 차원으로 떨어지는 것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기독교 신앙이 왜 타당성이 있는 지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유일한 길이다.’ 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제 설명이 충분하지 않으면 동영상 강의 메뉴에 들어가셔서 댓글을 달아주세요. 제가 이 강의를 하면서 어떤 때는 지나치게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것을 많이 설명하느라 진도가 나가지 않을 수도 있고요. 또 어떤 때는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한데 너무 나간다’ 그럴수도 있고요. 그런 균형을 찾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제가 되는대로 느낌대로 진도를 나가기는 할 텐데 혹시라도 충분하지 않거나 미진한 부분이 있으면 댓글을 달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 다음을 보겠습니다. 쪽수가 넘어가서 24쪽이군요. ‘무엇보다도 신앙고백적 진술이 진리론적인 판단에서 결정적인 답변을 발견할 수 있는지 아닌지에 대한 질문이 우선적이다. 예수에 의해 선포된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했는지, 예수가 죽은 자로부터 부활했는지, 그를 따르는 신자들을 죽음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시킬는지’, 종말론적으로요. ‘그리고 성령과 더불어 무슨 일을 할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 누가 최종적으로 답변할 수 있겠는가? 누가 이런 모든 문제들을 실질적으로, 실제적으로 해결해 낼 수 있겠는가?’ 어마어마한 질문이니까요. 우주의 시작과 완성이니까요? 아이구야! 무슨 신앙생활이 그런 것을 하냐? 무슨 철학자나 우리 물리학자들이 할 이야기지 우리야 지금 예수 잘 믿고 사랑 실천하고 도덕성 회복하고 교회 부흥시키고 선교사 파송하고 그렇게 오손 도손 살면 되지 않느냐!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있는데 그게 이제 자기구원에 떨어지는 길이지요. 그러면 모두가 다 신학자가 되어야 하는가? 그런 것하고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신학자가 아니더라도 이 궁극적인 질문을 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최소한도 생각하는 동물이라고 한다면 말이지요. 내가 어디서 왔는지! 우주가 어떻게 될는지! 죽음이후가 무엇인지! 생명이 이렇게 무상(無常)하게 지나가고 있는데 참된, 무상하지 않는 생명이 도대체 무언가에 대해서 얼마나 궁금하겠어요. 그건 공부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다 갖고 있는 질문입니다. ‘여기에 관계된 사안의 크기가 얼마나 까마득한지 측정해낼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기독교 신앙이 어떤 기초를 갖고 있는지 확인해보려는 이는 이 신앙고백의 고대형식이 말하는 세계에 충분하게 깊숙이 들어가서 그것의 실질적 기초에 접근하고, 그 형식들이 그저 단순히 공허한 게 아니라 우리의 실제적 삶, 생명과 친근한 실질적인 내용을 가리킨다는 확신을 갖게 될 것이다.’ 네. 그렇죠. ‘특히 이 문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기독교의 이런 실질적 내용을 다른 방식으로 형식화해야 할 오늘의 이 시점에서 더욱 중차대하다.’ 다른 방식으로 형식화해야 된다고 하는 것은 그런 것을 요청받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현대과학, 현대철학, 현대 물리학 이런데서 사도신경의 고대적 세계관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니까 새로운 형식으로 신앙고백을 해야 하지 않느냐 그러한 요청들인 거죠. 그런 직면해있단 말이지요. 민중신학이나 또는 여성신학이 그런 작업을 많이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 어머니라고 한다거나 그건 작은 부분입니다만 형식을 바꿔나가야 한다는 그러한 요청들에 우리가 직면해 있기 때문에 그 신앙을 진술하고 있는 사도신경의 실질적인 내용을 우리가 충분하게 파악하지 않으면 우리는 방향을 놓치게 되는 거죠. 새롭게 형식을 만들자 새롭게 신앙고백을 만들자 사도신경이 아니라 우리들에게 맞는 고백을 하자. 민중과 함께하는 뭐 이런 식으로 신앙고백을 새롭게 짜자. 그런 식의 이야기들이 솔깃하게 들릴 수 있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초기 기독교 신앙의 뿌리로 돌아가는 작업은 아주 지금 오늘 우리들에게도 시급한 문제다. 그러한 기초를 알고 있어야 형식을 새롭게 하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그거는 기초에서 기초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가지 않을 수 있는 거죠.

‘만약 이러한 확신이 전승된 신앙고백형식의 내용을 포괄적으로 다루게 된다면, 비록 이런 확신이 결코 한 번도 완전하게 회의로부터 벗어난 적이 없을지라도 신앙은 그 확신의 근거가 확실하다는 증거를 내보일 수 있다.’ 이런 사람, 어떤 사람 이예요? 기독교 신앙의 토대로 들어가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실제적으로 노력하는 사람이죠. ‘그런 사람은 그에게 실재하는 근거가 진리라는 점을 예상할 수 있다. 비록 그가 그 진리를 완전히 통찰해내지 못하고, 또한 진리가 회의로 인해서 의심으로 인해서 또 다른 근거에서 그를 혼란스럽게 할지라도 말이다.’ 그렇죠. 우리는 죽기 전에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니까 결국은 완전한 진리를 통찰해 내지 못하는 거죠. 그리고 계속해서 그런 의심스러운 것들이 들어온다고 해도 그래도 기독교적인 확신, 기독교의 가르침을 통해서 진리의 확신을, 진리의 확신에 도달할 수 있는 겁니다. 네. ‘이러한 사실들을 전제하는 진리를 믿고 있는 자가 자신의 신앙에 근거해서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그는 진리를 신앙적 결단을 통해서 보증할 수 없다. 아무리 믿는다고 큰 소리쳐도 그걸로 진리를 보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천동설과 지동설은 이런 것들은 내가 믿습니다라고 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오히려 그는 그에 의해서 전제된 진리를 항상 거듭해서 확인해야만 한다. 최소한 그는 이러한 확인이 가능하며 기독교회의 어느 곳에선가 역시 이러한 확인이 일어난다는, 즉 완전한 공평무사함과 성실함 가운데서 일어난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어야만 한다. 기독교가 진리의 영이 성령과 함께 하기 때문에 비록 지금 우리들에게 불안과 의심 이런 것들이 다가온다고 하더라도 결국 그런 기독교적인 확신 이런 것들이 일어난다.’ 이것은 우리가 단지 믿는다고 하는 자신의 결단, 자신의 신앙적 결단에 머무르지 않고 진리론적 토대를 확보하는 길인 거죠. ‘이것은 신학행위이기 때문에 방법론적인 긴장을 수반한다. 신학이 이런 과업을 정당하게 준수해나갈 때만 모든 대립적인 해석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사신의 신뢰성이 획득될 수 있다.’ 기독교 사신, 앞서도 말씀드렸다시피 ‘보드샤프트’라고 하는 독일어인데요. 우리말로 번역할 말이 딱히 없습니다. 곤란해서요. 사신이라고 했는데요. ‘복음선포’ 또는 ‘복음선포의 내용’ 이렇게 이야기 하면 됩니다. 복음이라고 하는 말하고는 조금 다른 거거든요. 에방겔리온, 유앙겔리온은 아니니까요. ‘기독교 복음선포의 신뢰성이 획득될 수 있다.’ 서로 신학적 입장이 다르더라도 가능하단 말이지요. 바르트의 말씀의 신학이나 판넨베르크의 역사신학이나 불트만의 과정신학이나 해석학적인 방법이 차이가 난다고 하더라도 이런 과업, 기독교의 근본을 찾아가려고 하는 그러한 것을 놓치지 않는다면 기독교가 전하는 복음의 신뢰성이 회복된다.

‘또 하나는 왜냐하면 신앙이 믿을만하게 보여야만 이 신앙이 자유롭게 숨 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분위기가 오늘날에는 결여되어 있다. 안타깝게도 그런 분위기는 상실되어 간다.’ 무슨 분위기가요? 기독교 신앙이 믿을 만하게 보이는 그런 분위기가 줄어들고 있는 거죠. 무슨 뜻인지 이해하시겠지요. 교회라고 하는 울타리로 숨어드는 거죠. 유럽으로 말하자면 지금 판넨베르크가 이 책에 쓴 그때 당시를 보자면 이 세계에 중심에 대해서 말할 근거가 하나도 없는, 뒷방 늙은이 취급, 존경은 받지만 그러나 현실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마라. 이런 정도로 취급을 받는 점점 신뢰성이 상실되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요. 자연과학의 목소리가 더 커지고요. 그런 상태에서 교회가 할 말이 얼마나 있겠어요. 유럽도 그런데요. 우리나라는 점점 심각하죠. 안티 기독교 사이트가 그렇게 광범위하게 활약하고 있다고 하는 현실에서 본다고 하더라도 우리 기독교의 신뢰성은 땅에 떨어지고 있는 실정인 것 같습니다. 그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것 같아요. 이 신뢰성 상실의 속도를 어떻게 늦출 수 있을 것인가? 반전시키기는 빠른 시간 내에는 불가능하고요. 이걸 우리의 숙명으로, 우리가 받아들여야할 운명으로 전제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속도만 어떻게 늦추냐! 하는건데 그러려면 준비를 해야 하겠지요. 그런데 준비도 되지 않고요. 우리 인문학적 성경읽기, 다비아 운동이 이런 점에서는 기독교도 신뢰할 만하다 그런 근거들을 찾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전문적인 신학자가 아닌 사람이 가능한대로 광범위하게 신앙적인 질문을 제기하고 나름대로 판단하는 일은 다른 그 어떤 시대보다도 훨씬 절실하게 요청된다.’ 무슨 말이냐 하면 신학자가 말하면 세상에서는 귀를 안 기울여요. 그렇기 때문에 신학자가 아닌 평신도 기독교인이 이러한 기독교 신앙의 근본에 대해서 광범위하게 질문하고 나름대로 판단하면 즉 그러하나 토대에서 그 사람이 사회에 활동을 하게 되면 기독교가 신뢰할만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거죠. 그러한 판사, 그러한 물리학자, 그러한 사회학자, 고고학자, 이런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면 기독교 신앙이 믿을 만한 것으로 사람들에게 드러날 수 있는 거예요. 그런 것이 아주 절실하게 요청된다. 지금 우리가 판넨베르크가 전반적으로 어떤 쪽으로 이야기하려고 하는지는 이해되시겠지요. 저도 이 분의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편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독특한 차원을 전제하면서도 기독교 신앙의 보편적 진리성을 확보해야 된다고 하는 그러한 요청이지요.

고맙습니다.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다음 기회에 또 뵙겠습니다.

</meta></meta>

[레벨:8]流水不爭先

2019.01.27 12:40:14
*.172.97.215

목사님

여행중 사진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즐거웠습니다


글 중간 중간에 "탓작" 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뜻이 무엇인지 읽다가 질문드려봅니다


즐거운 주일 되십시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19.01.27 21:53:46
*.182.156.135

"탓작"으로 표기된 단어는

독일어 'Tatsache'입니다.

'탓자헤'라고 발음합니다.

그 의미는 '사실'인데,

영어로 fact와 비슷합니다.

10년 전의 이런 글도 찾아서 읽으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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