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강 녹취록 - 1장 나는 믿습니다(7)

사도신경해설 조회 수 3055 추천 수 0 2009.04.05 00:24:01

판넨베르그의 사도신경 해설 제9강 - 나는 믿습니다(07)


안녕하세요.


판 넨베르그의 사도신경해서 오늘 제9강이 되겠습니다. 지난 8강 마지막 부분에서 일반 평신도 지도자들, 혹은 지성인들도 신학적인 질문과 그 판단하는 그런 것들이 그 개인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기독교 신앙 전반에서 절실하게 필요한 때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뒤 이어지는 부분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책 25쪽, 중간 패러그래프부터 시작합니다.

바로 그 짚은 고 대목에 이어서 나오는 거예요. 신앙이 그 기본적인 진리론에 근거해서 유지된다고 해서 진리론, 이거는 내가 이미 완전하게 진리를 소유했다. 독점했다. 확보했다고 하는 차원이 아니라 진리 자체 속으로 들어가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그 내용들을 독단적으로가 아니라 진리의 차원에서, 진리의 차원으로 올려놓는 거죠. 이러한 차원에서는 기독교가 자기가 옳다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설득하는 거죠. 왜 옳은지에 대한 진리론적 근거들을 부단히 확보해야만 그것이 가능합니다.

‘이렇게 기본적인 진리론에 근거해서 기독교 신앙이 유지된다고 해서’ 왜 이런지는 앞에서 판넨베르그가 많이 이야기했고 제가 설명을 했기 때문에 다시 또 말할 필요가 없겠죠. 그런 것이 없으면 진리론에 근거한 노력들, 그러한 분석, 그러한 해석, 그러한 판단이 없다면 기독교의 진리는 유지될 수 없다고 하는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일종의 실증적 학문과 연결되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여기서 ‘실증적 학문’은 정확한 번역은 아닙니다. 제가 이 부분을 조금 읽다가 와 닿지 않아서 원서를 찾아 봤거든요. 그랬더니 고 대목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실증적 학문과 연결되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요 부분 말이죠. 실증적 학문이라고 번역했는데 제 딴에는 번역할 때 그게 맞지 않느냐 했는데 그게 정확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런데 여기서는 그거보다는 어떤 분명한 앎의 자리라는 뜻이에요. 그 독일어가 말하고 있는 의미자체는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신앙이 기본적인 진리론에 근거해서 유지된다고 해서,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주 구체적인 아주 분명한 앎의 자리들과 꼭 연결되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인 거죠. ‘기독교의 창조론이 반드시 현대의 유전공학이라고 하는 아주 구체적인 앎의 자리들하고 꼭 연결되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생물학적 유전공학이라고 하는 그것으로 완전히 보장받아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하고 직결되어 있어야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버한 것이다.

‘신앙이 기초하고 있는 역사연구의 결과는 역사 문제에 해당하는 의미의 인식이나 마찬가지로 항상 거듭해서 변화된다.’ 변화되어 왔다. 우리 신앙이 근거하고 있는, 기초하고 있는 역사 연구, 역사라고 하면 그 안에는 정치 경제 이러한 역사만이 아니라 과학도 역사거든요. 문학, 문명, 과학 이러한 모든, 그러한 연구의 결과가, 이런 것들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결과가 변화되어 왔다. 토마스 쿤의 이론에 따르면 패러다임 쉬프트에 해당된다고 하겠죠. 아무리 구체적인 학문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영원불변 고정된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그건 패러다임이 바뀌게 되면 모든 여태까지의 생각들이 다 바뀔 수밖에 없는 거죠. 참 신기하죠. 이런 것들은 철학이나 인문학이나 종교 그러한 쪽에 좀 정신적인 부분만 그럴 것 같은데. 이런 것들은 해석에 따라서 달라지니까요. 아주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학문인 과학도 역시 비슷하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거는 고정되어 있지 않죠. 이러한 문제들이요. 역사적인 문제들, 과학의 문제, 그런 것들이 의미나 그런 것이 더불어서 같이 결과가 늘 변화되고 있는데 이러한 것들은 기본적으로 모든 인간지식의 잠정성에 놓여있다. 안다고 한다는 것에 대한 잠정성을 전제하고 있는 거예요. 잠정성이라고 하는 것이 뭘까요. 낱말 뜻이야 모를 리야 있겠습니까? 패러그래프 끝나는 부분에 각주를 달았습니다. 고 부분을 보겠습니다. 잠정성요.

* 인간 지식의 잠정성(Vorläufigkeit)이라는 말은 세계 개방성과 연관된 개념으로서, 모든 인간 지식이라는 것이 확고부동하거나 절대불변이지 않다는 뜻이다. 예컨대 뉴턴의 기계론적 물리학이 2백 년 동안 유럽의 세계관을 지배하고 있었지만 아인슈타인이나 하이젠베르크 등에 의한 현대물리학의 등장으로 인해서 그 한계가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그 어떤 인간지식이나 이론이라고 하더라도 한시적일 뿐이다.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달라진다는 거예요. 틀 자체가. 관점 자체가 달라진다고 하는 겁니다. 이것은 타학문만이 아니라 사실은 신학에도 동일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신학도 역시 끊임없이 진리론적 바탕에서 자신을 규명해나가는 작업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것들이 다 인간 인식 지식의 잠정성에 근거한 겁니다. 이거를 이렇게 비교하면 어떨까요? 정확한 비교인지는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이 세계가 우리의 눈에는 구별되잖아요. 나무가 있고 토끼가 있고 푸른색이 있고 붉은 색이 있구요. 이런 모든 사물들이 우리들에게 구분되어 들어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뭔가를 안다고 생각하고 있죠. 고양이에게는 이 세계가 어떻게 보일까요? 고양이에게 살아있는 생명체하고 죽어 있는 거하고 차이가 구별될까요? 고양이에게는 낙엽이 굴러가는 거하고 아니면 병아리가 걸어가는 것의 두 차이를 모를 겁니다. 그냥 움직인다는 것을 느끼고 있을 뿐이지. 하나는 살아있는 생명체고 하나는 그냥 사물이라고 하는 그 차이를 알 수가 없죠. 그리고 나무가... 그러한 이 세계를 그렇게 받아들이는 겁니다. 직관적으로 받아들이.. 직관적이라기 보다도 그냥 그렇게 있는 것으로 보일 뿐이지. 그 세계가 구별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세세하게 다 구분하구요. 식물만 하더라도 꽃과 나무가 다른 것을 알고 나무 중에서도 여러가지, 소나무 자작나무 미루나무 등등 여러가지 나무들을 다 구분해서 볼 수 있거든요. 어떤 쪽이 더 이 세상을 정확하게 보는 건가요? 고양이가 보는 것이 정확하겠습니까? 아니면 우리 사람들이 보는 게 정확하겠습니까? 두말하면 잔소리죠. 사람들이 더 정확하게 본다고 말 할 수 있죠. 그건 아마 사실에 가까울 겁니다. 그건 또 무조건 옳은 것은 아니죠. 고양이는 우리가 포착하지 못하는 어떠한 다른 세계를 보는 그런 것이 있습니다. 그들의 어떤 패러다임이라고 할까요. 그들이 우리가 못보는 그러한 관점으로 세계를 볼 수 있는 겁니다.

물론 이 말씀이 고양이가 세계를 보는 거나 우리가 보는 거나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려는 것은 아니고요. 우리가 지금 오감으로 확인하고 있는, 혹은 우리가 지성으로 인식하고 있는 그러한 세계가 그렇게 궁극적이거나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그런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고양이가 그냥 병아리하고 낙엽을 비슷한 거로 인식하듯이 우리는 어쩌면 지금 그런 방식으로 세계를 보고 있는지도 모르죠. 더 앞으로 나가게 되면 아마 이 세계는 생각했던 것보다 전혀 다른 세계가 올지도 모릅니다. 이 세계가 그냥 간단한 상식으로만 보더라도 이건 옳은 이야기입니다. 전기, 전파 이런 것들을 옛날에는 몰랐잖아요.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이용을 하고 손으로 만들 수 없지만 있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러한 우리가 모르는 어떤 것들이 여기서 움직이고 있는지 모르죠. 그거는 왜 우리가 모르는가? 그런 것을 알만큼 우리의 인식, 우리의 지식 이런 것들이 앞으로 나가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그 영, 성령이 앞으로 더 우리들에게 가깝게 느껴질 때가 올지도 모르죠. 그게 정확한 비유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있는 지식의 잠정성으로 인해서 이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 대답들이 이런 것들이 다 바뀌고 있습니다. 지금은 잘 실감하지 못할거예요. 100년전에 비해서 지금 달라졌지만 크게 달라진 것이 없기 때문에. 그런데 그것을 만년, 십만 년 백만 년 단위로 끊어보세요. 백만 년전하고 지금의 세계, 세계 인간을 중심으로 볼 때 백만 년전 인류의 조상들이 세계를 아는 그 방식하고. 아마 백만 년 전까지 갈 필요가 있나요? 성서, 구약성서시대, 신약성서도 마찬가지고. 그 시대, 아주 조금만 올라가더라도 하늘과 땅, 지하 우주가 3층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했잖아요. 그건 미숙해서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 당시는 그것이 첨단 물리학이었어요. 첨단이었어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에 비해서 아주 작은 것이지만 그 당시로서는 최첨단이었고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도 시간이 지나가면 우리가 지금 2천 년 전의 그 사람들의 세계관을 미숙하다고 생각하듯이 그렇게 아마 우리 후손들도 우리를 그렇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네. 이런 것들이 도대체 신앙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이건 직접적인 영향이 있습니다. 부활, 하나님의 나라, 종말, 심판 이런 것들이 사실 이러한 궁극적 모든 생명의 세계가 드러날 종말론적 시각이 연결된다고 하는 것인데요. 이런 것이 없이 우리가 어떻게 부활 생명에 대한 희망을 유지하겠습니까?

‘이러한 잠정성의 결과가 가변적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신앙은 그 신앙의 출발점이기도 하며 그 신앙의 기초를 포함하고 있는 역사에 대한’ 역사, 사회학적, 고고학적, 물리학적, 자연과학적, 이런 모든 역사에 대해 ‘신학적 확증과 연구를 게을리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거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거죠. 잠정적이지만 ‘각각의 역사와 그 특성 및 그 의미의 효과에 대한 연구는’ 역사 하나 하나 역사라고 할 때는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물리학, 과학까지 포함한 전반적인 흐름을 말합니다. ‘각기 정신적 상황의 형태가 전체적으로 시간적 한계 안에 있을 경우에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식하게 한다.’ 요거 문장이 직역되었죠. 그래서 잘 들어오지 않죠.

약간 목이 탁하네요. 아. 이유가 있군요. 제가 오늘 오후에 강의가 있어서 강의했고 마이크에 대고 좀 떠들었고 그리고 또 초저녁에 시편강해 이거를 또 녹화를 했고요. 세 번째예요. 연달아 세 번 강의를 하는 바람에 약간 목이 피곤한 것 같습니다. 이때 따뜻한 차를 준비해놓고 해야 하는데 못했네요. 시간을 제가 좀 아끼려고 하다 보니 그랬습니다. 내일 목요일 날 주로 했는데 내일 샘터교회 옮기는데 새로 마련한 그곳을 탐방하기로 했거든요. 시간이 조금 모자랄 것 같아서 오늘 하려고 좀 서두른 것 같습니다.

네 이러한 문제들, 다시 한 번 그 문장을 보면요. ‘각각의 역사와 그 특성 및 그 의미의 효과에 대한 연구는 각기 정신적 상황의 형태가 전체적으로 시간적 한계 안에 있을 경우에’ 이게 직역이에요. 그러니까 그 연구가 정신적 상황, 인간이 어떤 것을 보고 판단하는 것, 정신적인 그러한 작용이잖아요. 그러한 형태를 얻게 되는데 시간의 한계 안에 있는 거잖아요. 그 안에서만 우리가 생각할 수 있잖아요. 오늘 갑자기 500년 전 사람이 지금과 같은 컴퓨터 이러한 세계를 내다보고 했겠어요. 아니거든요. 사람은 그 시간 안에 있습니다. 앞에 있었던 패러다임에 근거해서 오늘을 분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경우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이 중요하다 하는 겁니다. 인식할 수 있다 세 가지입니다. 첫째, ‘전승된 신앙 양식이 공허한지 아닌지’ 이런 것들을 인식하게 되는 거죠. 역사에 대한 신학적 확증과 연구를 통해서 이런 것을 보는 거구요. 두 번째는 ‘그 양식이 완전히 시간적으로 제한을 받는데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기초가 있는지 없는지’ 잠정적이지만 그러나 실질적인 기초가 있는 지 없는지. 그리고 세 번째는 ‘그리고 이로써 각기 무조건적인 신뢰의 근거가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 아닌지.’ 무조건적인 신뢰, 기독교 신앙이 도달해야할 마지막 단계, 최종적인 단계이겠죠. 무조건 적인 거거든요. 결국은요. 무조건적인데 이르기 전까지 그것이 믿을만한 것이 아닌가? 역사적으로 검토하고 분석하고 판단해야 하는 겁니다. 신뢰근거가 정말 이게 자유로와질수 있는지 느끼는지, 이게 무슨 뜻일까요? 신뢰의 근거가 어디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뜻이겠죠.

쭈욱 나가보겠습니다. ‘이 신뢰 안에서 신앙은 의지할 대상과 관계를 갖는다. 구원사건과 관계된다고 해서 신앙의 대상에 대한 지식이 생기는 건 아니다. 그것은 다만 신앙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왜냐하면 신앙 행위 가운데서만 나는 내가 신뢰하고 있는 현실성에 나를 고착시키려고, 묶어두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뢰 행위에서 신앙은 자신의 고유한 거점을 초월하게 되며’ 이런 신앙행위에서 자기가 놓여 있는 자리를 초월하는, 정용섭이 그러한 신뢰, 신앙 행위에 들어가게 되면, 전적인 그러한 신뢰죠. 그렇게 되면 목사라고 하는 거점들, 내 허물이니 조건들 이러한 것들을 초월하게 되고요. ‘신앙의 출발점이라 할 그 대상에 대한 지식의 특별한 형태를 포기하고’ 그 대상은 하나님이죠. 특별한 형태라고 하는 것은 무얼까요? 신앙의 형태를 고집하는 그런 것들이죠. 기도를 하루에 몇 번 한다든지 바리새인들이 하는 방식에 말이죠. 그건 형태들인데 거기에 집착하는 것들을 포기하고 ‘신앙이 의지하는 진리에 대한 새롭고 보다 바람직한 인식을 향해 개방된다.’ 네. 여기까지가 주로 판넨베르크가 말하려고 했었던 이히 글라오베라고 하는 나는 믿습니다라는 이 문장에 들어있는 신학적 의미들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결론적으로 혹은 요약하고 정리하면서, 사도신경의 형식들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인제 정리되었으니까요. 그 형식들을 어떻게 되냐? 어떻게 된다기 보다 오늘과 다른 세계관에서 형성된 사도신경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어떠해야 되느냐 그걸 지금 예기하고 있습니다.

‘사도신경 양식들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 기초를 요약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 기초는 신앙의 실제적 내용을 형성하고 있는 바의 그것이다. 그 양식들은 거의 모든 점에서 더 이상 오늘의 언어일 수 없는 그들 시대의 언어로 이 작업을 펼친다. 따라서 이 사도신경을 단순히 재인용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렇죠.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동정녀 탄생을 믿습니다. 이런 것을 이용하는 것만으로는 사도신경의 어떤 신앙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못된다. ‘오히려 오늘의 언어로 표현하기 위해 묻고 생각하고 검증하는 심화과정이 필요하다. 이것은 오늘 고대 교회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당연히 그렇죠. ‘오늘의 기독교인은 이 과정에서 항상 같은 결과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신학자들도 다 제각 이야기하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고대교회의 신앙고백을 자신의 고유한 언어로 진술할 수 있어야만, 해야만 되는 게 아닐까?’ 기독교 신자라고 한다면 그렇게 해야 되는 게 아닌가?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 뒤에 설명합니다.

‘이런 진술의 가능성은 신앙 고백적 진술이 한정적인 형식을 통해서 결정적으로 의도하고 있는 바와 얼마나 책임적으로 일치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이러한 의도의 언어적, 그리고 사상적 표현은 오늘날 더 이상 동일한 사실을 우리가 우리 나름대로 인식하려는 표현일 수는 없다. 대개의 현대 기독교인들은 사도신경의 몇몇 단어들을 원래 있는 그대로 명확하게 표현하지 않는다.’ 그런 것은 별로 좋은 게 아니라는 거죠. ‘그렇지만 우리는 개인적인 진실을 훼손하지 않고’ 신앙양심 혹은 진리론적 토대들을 허물지 않으면서 ‘예배가 드려지는 동안 함께 신앙고백을 아뢸 수 있다. 우리가 진술 형식에 대한 모든 비판에도 불구하고’ 사도신경의 진술형식이 아주 고대적이니까 그것에 대한 비판이 많이 있을 수 있잖아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형식에 비판이 ‘역시 이러한 진술의 의도를 확증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왜 사도신경의 전승에 참여한 이들이 그런 방식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의도가 무엇인가 우리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지금 신앙양심이나 진리론적 우리의 정직성을 훼손시키지 않으면서도 사도신경, 고대인들의 신앙형식인 사도신경을 예배시간에 함께 고백할 수 있다하는 거죠.

‘오늘날 사도신경은 니케아 신조와 마찬가지로 수세기의 변화를 통해서 정착된, 그리고 신앙이해의 많은 차이점을 극복하는 기독교의 일치를 뜻하고 있다.’ 요거는 정말 중요한 거예요. 사도신조와 니케아 신조 이 두 가지는 그냥 며칠사이에 뚝딱하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수세기동안에 신학적인 작업, 그리고 구체적인 교회공동체 안에서의 신앙경험들, 이런 것들 통해서 정착된 것이기 때문에 이런 것이 바로 그래서 기독교 일치에서 굉장히 중요한 토대가 된다고 하는 것이죠. ‘우리가 신앙고백을 드리기 때문에 모든 기독교인들과 하나가 되는 것이지, 우리의 개인적인 증언만을 외친다고 해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주일공동예배에 사도신경을 통해서 드리는 고백은 필요불가결한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습니다. 주여 주시옵소서 하는 거라든지 신앙간증을 한다든지 이렇게 자기 신앙체험을 강조하는 것만으로 우리가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이거는 굉장히 중요한 요소입니다. 특히 한국처럼 신앙의 개인주의가 범람하고 있는 교회정서에서는 역사적인 신앙고백인 사도신조와 니케아신조에 대한 강조는 아무리 많이 해도 과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신앙 고백적 진술의 의도를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물론 이것이 가능한지 어떤지 분명하게 검토해 볼 필요는 있다. 따라서 니케아 신조나 사도신경의 해석, 연구, 그리고 검토는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해당된다.’ 그 안으로 깊이 들어가서, 깊다는 표현을 잊어버렸습니다만 분명하게 알아야 되니까요. 사도신경이 형성된 그 삶의 자리 역사적 배경, 거기 있었던 초대기독교인들의 신앙적 투쟁들, 여기에는 이단논쟁까지 다 포함됩니다. 그런 것들 속으로 들어가서 사도신경을 해석하고 연구하고 검토하는 것은 모두에게 정말 중요한 요소다 하는 겁니다. ‘신앙고백을 구성하고 있는’ 구성이라고 하는 이거는 빼놓으면 안된다고 하는 뜻입니다. 구성적요소하면 아주 본질적이라고 하는 뜻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신앙고백을 구성하고 있는 기독교 전승의 진술에 대한 회의가 많으면 많을수록 이런 작업을 더욱 활발하게 펼쳐야 된다. 사도신경의 내용에 대해 갖게 되는 이런저런 어두운 불쾌감을 값싸게 해소시켜버리려고 해서는 안 된다.’ 참 중요한 지적이죠. 사도신경에 나와 있는 그러한 내용에 대해서 뭔가 불쾌한 생각한, 느낌들, 찜찜하다고 좀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현대의 지성적 사유로 볼 때 어긋나 보이는 부분들이 적지 않기 때문에 이거를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는 당혹감이 현대 지성 기독교인들에게 분명히 있는 겁니다. 몇 번 언급한 동정녀 탄생, 하늘 승천, 부활도 그럴 수 있고요. 재림 심판, 사실 사도신경에 있는 내용 전체가 다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우리는 너무 익숙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일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는 일반 지성인이 사도신경을 읽게 되면 이질적으로 느끼게 될 겁니다. 그러한 찜찜하지만 그런 것들을 가자기 해소시켜버리려고 해서는 안된다. 믿음 이런 것은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그냥 믿어야지 믿음으로 해결해야지. 이러한 방식 말이죠. 이 믿음 만능주의를 빨리 극복해야 됩니다. 믿음은 지금 말씀드린 믿음만능주의라고 할 때 1원론적인 문제는 여기서 제1장에서 이야기하는 신학논의 차원이 아니라 믿어야 할 대상에 대한 참된 신뢰 근거들을 확보하면서 무조건 적인 신뢰에 들어가는 그런 차원은 아닙니다. 믿습니다라는 이러한 구호에 얽힌 신앙에 대한 태도라고 하는 것은 자기에 대한 관심입니다. 제가 몇 번 말씀드렸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길게 말씀드리기 않겠습니다. 어떻게 할 수 없는 딜레마 이런 것들을 간단하게 믿고 있는 자기에 대한 관심으로 쉽게 해결해버리려고 하는 거, 아주 값싸게 해결해 버리려고 하는 거죠. 이러한 신앙적인 태도들이 우리들에게 얼마나 많은지 여러분들이 잘 알겁니다. 조금 생각하기에 골치 아프면 이건 믿음으로 해야지 믿습니다라고 해야지 자꾸만 생각하지 마라 이런 게 아주 교회에서는 아주 자연스러운 것으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이게 미래를 향해서 가는 걸까요? 이런 것들을 통해서 기독교의 건강성이 회복될 수 있을까요? 기독교 진리의 보편성을 사람들에게 증거할 수 있을까요? 안된다는 거죠.

‘즉 예배 시에 사도신경을 사용하지 않고 유별난 양식들, 소위 시류에 편승한 양식들로 대체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불쾌감을 갑자기 해소시켜버리면 안된다고 하는 말을 한국교회의 예를 들면서 믿음 일원론에 빠지게 되는 위험을 지적했는데 판넨베르크는 고 부분보다는 조금 신학적인 문제를 지적하고 있군요. 그러니까 사도신경에 있는 그런 것들을 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신앙고백을 만드는 거예요. 이런 교회들이 많이 있죠. 사도신경 안하고 자기교회 신앙고백을 만들어서 하는 겁니다. 이런 교회들은 주로 진보적이고 운동권 비슷한 교회들입니다. 상당히 경솔한 게 아닌가 싶어요. 물론 그분들의 생각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신앙은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의 현장에서 나오는 고백이어야지 2천 년 전의 그 고백은 죽은거다라는 거죠. 남북통일의 문제라든지 양성 평등의 문제라든지 비정규직 문제라든지 이런 것들을 오늘 신앙고백의 내용으로 끌어들여서 예배시간에 신앙고백 해야 되지 않느냐 하는 겁니다. 아마 그러한 제가 몇몇 교회 기억이 납니다만 교회 이름을 밝히고 싶지 않고요. 그러한 새로운 양식의 신앙고백을 만드는 신학적 태도의 위험성을 지적하고 있는 겁니다. 똑 운동권은 아니더라고 하더라도. 네 제 이 말을 오해하지 마세요. 어떻게 보면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우리 모두는 다 운동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운동이니까요. 움직이는 변화, 힘이니까요.

네 그건 그렇고 그런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라고 하는 것이 맞지 않다. 이것은 남성 중심의 신앙고백이다 이렇게 생각해서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 어머니를 내가 믿사오며 더 나아가서 하나님 아버지 형제자매를 믿사오며, 하나님을 꼭 아버지상으로 하지 말고 형제나 누이 이미지 까지 함축해야한다는 그러한 입장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시류에 편승한 양식들로 대체하면 안된다. 이 양식들은 아무리 잘된 경우라고 하더라도 개개 기독교인들이 전체 기독교 공동체에 가담할 수 있는 고대 고백 형식들을 실질적으로 담아낼 수 없다. 신앙의 내용은, 사도신경이 담고 있는 신앙의 내용은 말을 바꾼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기독교 신앙의 실질에 대한 설명과 이해가 필요하다. 사도신경을 해석해 주는 것이 필요하지 오늘의 필요에 맞는 말로 바꾸는 것이 그렇게 급한 것은 아니다. 여기서 기독교 신앙의 실질이라고 하는 것은 고대 신앙고백의 형식에 표현되어 있다. 사도신경 안에 그 Reality가 있는 거예요. 기독교 신앙의 정말 참된 알짜, 알맹이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놓친 채 고대인들의 표현양식인 가부장적인 요소들을 극복한다는 차원에서 우리의 언어로 그냥 바꾸어 버린다고 한다면 그것은 결국은 빈대를 잡기위해서 초가삼간을 태운다거나 그런 경우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것이 불확실하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형식화, 사도신경의 형식화된 신앙고백을 거절하는 것은 야만스러운 태도다. 신학적으로 경솔하다. 특별히 신앙전승을 해명하기 위해서 교육받고 부름 받은 성직자라고 한다면 이와 같은 논란에 빠져들지 말아야 된다. 성직자의 의무는 전승된 신앙의 공적 표현을 해명하는 것뿐이다. 우스꽝스럽다고 비난받는 일이라 하더라도 그러한 의무를 거절하는 것은 분명히 무책임할 뿐이다. 오늘날 널리 퍼져있는 신앙고백의 공식적 표현에 대한 몰이해는 그것의 폐지가 아니라 그것의 해설을 필요로 한다. 그렇죠. 지금 한국교회에서 기독교 신앙이 현대화되고 대중화되고 조금 그게 더 나아가서 대중주의에 빠져있고 하는 이런 모습들은 여러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이분들은 오늘 여기 판넨베르크가 이 책에서 지적하고 있는 전승된 신앙의 공적표현을 해명하지 않는 거죠. 왜 그런 일들이 벌어질까요? 그건 그분들이 나빠서가 아닙니다. 의도가 나빠서가 아니고 생각이 짧아서 그런 것도 아니고요. 글쎄요. 그 이유를 어디서 찾아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무슨 말씀을 드리는지 아시겠지요? 기독교 신앙의 그 전승들이 설교에서도 그렇고 예전적 예배에서도 그렇고요. 그런 것들이 해명되는 것은 전혀 없이 청중들의 종교적 감수성에만 어필하려는 이러한 신앙적 태도들을 가리킵니다.

왜 그렇게 되는가 그런 이유에 대한 질문이지요. 그건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그 이유야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요. 신학교육으로부터 시작해서 한국교회의 기본적인 풍토 등등 여러 가지 많은 문제들 그리고 현대사회의 그러한 실용주의적 가치관 이런 것들이 종합적으로 연결되어 있을 텐데요. 그런 것들을 다 묶어서 하나를 말하라고 한다면 그분들이 기독교 신앙의 전승들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하는 거죠. 이 전승이라고 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이 이어져 내려왔다는 겁니다. 쭉 승계되는 건데요. 거기에 많은 변화와 발전, 변증법적인 작용들이 있어서 그러한 어려움들 유혹들 한계들 불안들 이런 것들을 다 극복하고 그러한 투쟁의 결과로서 신앙고백문, 신조, 역사적 진술들을 형식화한 것이거든요. 거기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영적인 땀이 다 묻어 있는 것들입니다. 이렇게 한 두 마디로 그냥 “그렇다”하고 지나갈 정도로 가벼운 것이 아니라 역사의 무게가 속속들이 들어있는 거죠. 그게 뭐냐 하는 것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에 더 이상 그것에 대해서 말할 거리가 없는 거예요.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는 말이 뭐를 이야기하는지 재림과 심판 이런 것들이 진리론적인 차원에서 무엇인지 하는 것들을 세계 우주관 이런 것들과 연관해서 말하는 것들인데 이 신앙고백이 말이지요. 그런데 그게 도대체 어떻게 돼서 그렇게 되었는지 전혀 알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그러한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말하자면 재미가 없는 거죠. 재미가 없을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제가 자주 예로 드는 그 바둑 기보를 보더라도 프로 9단이 놓은 바둑의 기보는 아마추어들이 바둑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아무리 들여다봐도 모르고 모르면 재미가 없게 되거든요. 하여튼 재미가 없는 상태에서 재미를 찾아야 하는데 그 재미라고 하는 것이 대중주의(Populism)인거죠. 그래서 세련된 아주 현대적 감각의 예배, 열린 예배라고 해서 그런 것과 오늘날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원하는 종교적 욕망에 대한 반대급부 그것에 대한 눈높이를 맞춘다고 할 수 있겠지요.

사도신경에 있는 그러한 내용들을 해설하는 것이 오늘날 지도자들에게 필요한 거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교회의 신앙고백적 진술에 대한 해석과 논의는 특별한 주목을 받아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기독교 공동체는 다시 한 번 의미심장한 공동체로 경험될 것이며 또한 신앙고백이 주일 공동예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증거하게 될 것이다. 의미심장한 공동체로 경험된다. 사도신경, 이것을 바르게 해석하고 그 세계 안으로 우리들이 뛰어들게 된다면, 쉬운 말로 바꾸자면 영성의 깊이로 들어가는 건데요. 그렇게 되면 그 공동체가 그야말로 의미심장한 공동체로 경험되고 우리 스스로 경험이 되고요. 그렇게 경험된 사람의 신앙생활이 꾸려지게 된다면 당연히 바깥에도 그렇게 비추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존재론적 소금의 맛을 유지하기만 하면 당연히 그런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는 거거든요.

오늘 우리 한국교회가 의미심장한 공동체로 자리 잡고 있는지에 대해서 교회지도자들은 아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죠. 그렇지 않은 것 한 두 지 이야기 할 필요가 없겠지요? 그것은 총체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 아시죠. 며칠 전에 제가 다비아 사랑채에 프레시안에 있는 글을 링크해서 올린 적이 있습니다. ‘혀’ 라고 하는 소설을 중심으로 한 공방이었어요. 공은 있고 방은 별로 없더군요. 조경란 소설가가 자기 입장을 이야기해야 하는데 그냥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몇 몇 소설가 신예 작가에 해당되는 주기란 소설가와 김곰치라고 하는 반론 소설을 쓰는, 르포도 많이 쓰고요. 그 분의 책을 한두 권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살아있는 글들을 쓰시더라고요. 그러나 중앙무대가 아니라 부산인가 어딘가 변방에 물러있는 그런 사람이에요. 그분도 글을 썼고, 어느 독자가 글을 썼고 마지막으로 실천문학의 대표이신 김영현! 그분이 글이 올라 있는 것을 제가 링크를 했는데, 꼭 읽어보시라고 했는데 읽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작가 정신을 이야기 하거든요. 그런 것들은 이제 다 실종됐다. 이 마지막에 글을 쓰신 실천문학의 대표인 그 분의 글이 참 좋았다고 봐요. 정곡을 정확하게 짚은 것 같습니다. 이것은 표절의 문제가 아니라 기성 문단에 있는 문단을 중심으로 한 상업주의 그것에 근거한 자기들끼리 어떤 권력을 장악하고자하는 카르텔 문학권력구조, 권력의 카르텔 이런 것과 작가정신이 그래도 살아있는 비주류와의 투쟁이다. 비슷하게 그렇게 이야기 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한국교회하고 맥락이 닿는다. 그런 예기를 거기에 잠간 비추었거든요. 그렇죠. 종교권력이 어떤지 그게 그냥 혼자만 그렇게 무대포로 나가는 게 아니라 어떤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어요. 그쪽에 있는 분들끼리 서로 공유하는 거예요.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님은 사랑의 교회에 와서 새벽교회 특별한 집회에 설교하고 사랑의 교회 오정현 목자님은 그 교회에 가고 또 다른 몇 몇 교회들 끼리 이렇게 하면서 교회 전체 방향을 쥐어틀고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것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고 한국교회의 방향을 짚어 주어야 할 신학교 교수님들도 그 카르텔 속에 들어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게 신학대학 이사들, 주로 대형교회 목사들이 하고 있으니까 그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신학교수직을 유지하기 힘들거든요. 이런 문제들은 참! 그러니까 이거는 한국교회의 개혁이라고 할까 이런 것들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사실은 요원하다고 봅니다. 자체적인 자정능력이라고 하는 것들 이런 것들은 제가 보기에 구조적으로 불가능 하게 되어 있습니다. 누가 하겠어요?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다 힘이 없습니다. 교권이 없어요. 그래서 아무리 떠들어도 말을 듣지 않습니다. 반향이 없어요. 제가 설교 비평책에 썼지요. 그게 일정부분 영향을 미쳤는데 그것은 아주 특이한 경우,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여기 이런 하양에서 살고 있는 저의 글을 누가 읽겠어요? 하여튼 좋게 보면 이게 하나님의 뜻이라고도 할 수 있고 우연한 것들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요. 신학적이면서 역사의식도 있고 교회근본을 잘 유지하는 이러한 대구성서아카데미란 운동이 온라인에서 상당한 동력을 얻고 있어요. 이런 거는 제가 보기에는 가능하지 않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이 결과가 앞으로 흐지부지될 수도 있을 텐데요. 가능하면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좋겠고요. 가능하면 탄력을 받아서 흩어져 있던 변혁세력들, 소외당한 사람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그러한 통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그래도 생각이 있고 기독교 중심문제를 생각하려 하고 영성의 본질로 들어가려고 하고 신학의 메인 스트림 안에 있는 한국교회, 대중교회들은 다 신학의 메인 스트림은 아닙니다. 그거는 다 미국으로 흘러간 부흥사 중심의 가벼운 복음주의이기 때문에 이것은 결코 세계의 복음의 중심은 결코 아닙니다. 이런 분들이 이런 운동이 이런 신학이 일종에 지류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 신학성향이 한국교회를 꽉 지배하고 있어서 신학의 중심을 알고 영성의 본질로 들어가려고 하고 하나님나라를 향해서 개방되어 있는 이러한 사람들이 소위 말해서 신학적 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이 현실이 너무 척박하기 때문에 일종에 패배주의에 빠져있습니다. “해도 안 돼” 그거죠. 그러니까 상황이 더 실망스러운 겁니다. 그렇게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개중에 좀 보여야 되는데 안보이고 있거든요. 신학대학 교수들이 입 다물고 있잖아요. 한국교회를 움직이는 사람들이 신학대학교 교수들이 아니잖아요? 한국에 문제가 있을 때 신학대학교의 권위 있는 교수들이 몇 마디하면 그것을 한국교회들이 귀담아 듣고 방향을 잡고 나가고 그래야 건강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게 아니라 부흥강사 비슷한 사람들이 한국교회를 쥐락펴락하고 그 사람들의 말로 인해서 다 되고 있단 말이에요. 그리고 신학대학교들이 다 보수화되고 장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신을 비롯해서 거의 모든 신학대학교들이 감신도 그렇고 한신은 좀 나을지 모르지만 한신도 뭐 그런거 많지요? 아무리 떠든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요. 무조건 개혁하자고 떠든다고 해서 되겠습니까? 기독교 중심 안에 들어가서 해야 되는데….

제 말이 좀 다른 데로 많이 갔네요. 말씀드리려고 하는 핵심은 그겁니다. 그러니까 의식 있고 기독교의 중심과 본질을 추구하려 했었던 사람들이 지금 패배의식에 혹은 냉소주의까지 이르는 그러한데 빠져 있어서 참 어둡다. 이 상황에 근데 이 대구성서 아카데미 운동이 그것이 유일하다 제가 보기에는 그런 것처럼 보입니다. 지금 그래도 대중적인 어떤 정당성을 조금씩 확보해 가고 있잖아요. 바라기는 제가 앞으로 몇 년 동안 이런 운동을 하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최선을 좀 다해 보고요, 온라인과 오프라인 또 서울과 대구에 있는 이러한 교회가 된다 하는 것을 한국교회와 한국사회에 좀 보여주면 어떨까요? 이것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패배주의에 빠져있는 우리 하나님나라를 위한 숨어 있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한 하나의 상징적 사건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신학에 근거해서 영성적이고 역사진보적인 그러한 공동체도 대중적인 힘으로 활동할 수 있다고 하는 그게 가능하다고 하는 그거를 좀 우리가 살려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당연히 그 방향으로 가야 되는데 된다고 보는데 당연한 이야기를 한 거겠죠? 근데 현실적으로 그게 어떠냐 하는 게 좀 그래서 그렇습니다. 여기 우리 동영상 시청자가 되시는 분들 중에서도 그러한 관계되는 분들 있으면 같이 힘을 합쳐서 좀 해보도록 합시다. 기독교 공동체가 의심심장한 공동체로 경험되도록 우리 스스로 그래야 하지요. 그거 없으면 뭐 하러 이거 합니까? 시간 낭비고 돈 낭비고 말이죠? 이런 시간에 여행이나 다니고 다른 거 하는게 더 신나지 않겠어요? 그러나 기독교 공동체만이 제공할 수 있는 정말 의미심장한 그 어떤 영적인 차원들을 우리가 확보해 내야 되지 않겠어요?

마지막 문장입니다. 즉 주일공동체가 주일에 모이는 공동체가 그 시간적 한계를 극복하여 그들 신앙의 본질적인 내용에서 전체 기독교와 연대해 있다는 점을 말했다. 예 우리 샘터교회가 여기 경산군 진령읍 이 아파트에서 소수가 모여서 예배를 드리지만 그러나 저는 그리고 우리 신자들은 그렇게 소외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예배를 통해서 이미 2천 년 전 제자공동체, 예루살렘공동체, 카타콤공동체 그리고 2천년 동안 내려왔던 모든 기독교 전통 그리고 현재에 있는 온 세계의 기독교 다 연대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죠. 다만 우리가 지역적으로 시간적으로 떨어져 있을 뿐이지 우리가 사도신경과 예전과 복음과 성령의 활동에 철저하게 연대해 있으므로 가장 심층적인 생명사건에서 하나를 이루고 있는 그 안에 다 각각 참여하고 있는 모든 기독교 공동체와 연대해 있다 그런 점에서 뿌듯하게 행복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예 이런데서 핵심은 우리가 공부하는 이 관점에서 말씀드린다면 사도신경이라고 하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수백 년 동안 치열한 신학적 논쟁을 통해서 형성한 이 사도신경의 내용을 해설하고 그것이 오늘 우리들이 삶과 일치하는데 우리가 노력하는 것 여기에 달려 있겠지요. 경청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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