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강 녹취록 - 2장 하나님을(1)

사도신경해설 조회 수 3352 추천 수 0 2009.04.05 00:26:42

판넨베르그의 사도신경 해설 제10강 - 하나님을

오늘은 인제 새로운 장입니다. 제2장입니다. 하나님을 이라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신경을 구성하고 있는 세 항목 중에서 첫 번이라고 할 수 있겠죠. 1장은 항목이 아니라 믿음의 문제를 다뤄준 거예요. 믿음이 뭐냐 그러한 문제였습니다. 고 믿음에 대해서 제가 하나 인용하려고 했었는데 금방 다른 거 작업을 하다가 갑자기 녹화를 하는 바람에 조금 정신이 없네요. 같은 판넨베르크의 책입니다. 인간학이라고 책 하는 제2권에 나와 있는 이야기입니다. 인간, 인간론이요. 인간론은 어떻게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건강하게 찾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일반 생물학이나 또 심층심리학, 철학 등등의 주변의 학문들과 같이 대화를 하면서 신학적인 대답을 찾아가는 그러한 연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를 제가 길게 뭐 길게 말씀드리지 않겠고요. 판넨베르크가 여러 학자들의 이야기를 쭉 검토를 하면서 그들은 결국 일반 인문학자, 생물학자들의 이해는 결국 자기의식에 근거해서 말을 하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자기의식? 자의식이라고 하는 거죠. 심층심리에 대한 문제라든지 자아에 대한 정체성이라든지 그런 것들이 결국은 다 자기가 어떻게 그런 것들을 의식하는가 하는 관점인데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중요하기도 하고 자의식에 근거해서 충분하게 그러한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더 근원적으로 우리가 살펴야 할 부분이 종교적 차원이라고 하는 겁니다. 종교적 차원의 핵심은 신뢰의 문제요예요.

제가 왜 이 잠간 책을 인용하려고 하는가 하면 제가 1장에 다룬 문제가 believe라고 하는 그 문제였기 때문에 인간에게도 중요하다고 하는 점을 참고삼아서 보충하려고 하는 겁니다. 이 기본이슈에 영어로는 basic trust라고 되어 있고요. 독일어로는 확인해보지 못했습니다. 손타멘탈레 베타우웬. 기본적인 신뢰 이런 거죠. 그러니까 우리의 자아정체성, 인격이라고 할 수 있고요. 그것이 때로 분열되잖아요. 그렇지 않고 통전성을 얻으려면 거기에는 기본적인 basic trust 그게 필요하다고 하는 겁니다. 그게 유아기 때는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된다고 그래요. 그 어머니를 향해서 전적인 신뢰를 주는 거거든요. 그것은 거의 종교적인 차원이라고 합니다. 네 거기서 점점 나와야 되는 거죠. 그 어머니에 대한 신뢰로부터 시간이 지나면서 정상적으로 발달하게 되면 결국은 주변의 다른 세계로 눈이 뜨여지게 되고 동료관계, 또 형제들 관계 그런 쪽으로 신뢰관계가 확장되어야 되고요. 궁극적으로는 이제 하나님에 대한 신뢰라고 할 수 있는 거죠. 그런 것들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게 되면 거기서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 신앙의 왜곡, 미성숙한 그러한 신앙에 이르게 되는 그 어떤 과정에서 기초적인 신뢰, 전적인 신뢰 이런 것들이 오해될 일이 벌어진다. 왜곡된다. 고 부분을 한번 읽으려고 합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독립을 향한 어린이의 계속적인 발달이 기본신뢰의 획득에 달려있다. 이러한 기본 신뢰가 건강한 인격의 발달에 중요하다고 하는 이 논제는 세계의 모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거나 그러한 모순에서 회피하는 나르시스트적인 소망의 전능과 혼동되지는 말아야 한다. 소망의 전능, 여기서 두 단어로 연결되어 있는데요. 그 앞에 형용사가 들어가 있어요. 나르시스트적인, 소망의 전능, 나르시스테 알막트 데어뷘세 이렇게 독일어로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다 이루어진다고 하는 자기연민적 그러한 희망에 떨어지는거죠. 그게 이제 기초신뢰가 아니다라고 하는 거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신앙인 것처럼 우리들에게 왜곡되는 경우가 제법 있는거죠.

성숙하고 성장한 인간은 그러한 모순들을 처리하고 다루는 법을 배우는 중에 그런 모순들을 극복해야 된다. 인간 삶의 현실에서 빚어지는 많은 모순들이 있잖아요. 그걸 피하는 거죠. 그 방식으로 가지 말고, 그건 나르시스적인거구요. 그것과 투쟁하는 가운데서 그것을 극복해야 된다는 것이죠. 그게 이제 기초 신뢰, 기본적인 신뢰, 전적인 신뢰, 근본적인 신뢰에서 건강하게 성장한 사람들의 삶의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러한 세계의 모순에서 아주 쉽게 벗어나 버려서, 종교적인 차원으로 쉽게 벗어나서 공상적인 소망의 전능, 요기서 다시 한 번 그 단어를 쓰고 있어요. 앞에서는 나르시스트적인 소망의 전능, 두 번째는 공상적인 소망의 전능, 이거는 곧 소망으로 모든 것들을 이루어지는 환상의 세계로 가는 거죠. 어린 소녀들의 망상 같은 것 있죠. 혼자서 일종의 백일몽과 같은 겁니다. 혼자 공주가 되었다 그러한 그러나 마음대로 이루어지는 그런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망상과 현실이 혼동되는 거죠. 그렇게 도피하게 되면 프로이트가 말한 대로 현실에 대해 유아기적인 태도로 대하게 되는 퇴행이라고 봐야 되고 이것은 곧 기본적 신뢰와 직접적으로 대립하는 도착증상 이런 것으로 보아야 된다.

예. 여기서 이제 인간의 정상적이 발달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기본 신뢰, 이게 필수적으로 요구된다고 하는 건데 이것이 자칫하면 자기애적인, 망상적인, 유아기적인, 유아적인 소원성취에 매몰되어 버리는 그러한 신앙과 혼동될 염려가 있다는 겁니다. 이걸 조심해야 됩니다. 조심이라고 하기보다 그러한 혼란에 빠지지 말아라 하는 거죠. 제가 오늘 왜 이걸 다시 한 번 읽었느냐 하면 이게 한국교회의 신앙의 멘탈리티를 그대로 대변해 주고 있 때문에 그렇습니다. 울고불고 완전히 야단법석인데 그거는 완전히 소녀취향인거죠. 그렇게 하면 다 카타르시스 된 것 같지만 그것은 결국 자기연민이라서 이 세계의 모순 가득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거예요. 그거는 기독교와 성서가 이야기하는 기본신뢰, 하나님을 향한 그런 기본신뢰하고도 거리가 멀다 잘못된 거다. 퇴행이다. 도착이다 그러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겁니다. 그러한 신앙이 오늘날 한국에서는 귀한 신앙이 되니까 참 안타깝습니다.

1장에서는 신뢰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했고요. 이제는 정식으로 세 가지 항목, 하나님, 예수님, 성령 중 첫 번 항목으로 들어갑니다. 첫 번째 항목이 몇 번에 나누어져 있죠. 순서를 다시 한 번 보면요. 아 두 번 으로 나누어져 있군요. 지금부터 보게 될 2장, 하나님을 3장에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이렇게 두 번, 두 장에 걸쳐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항목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되겠고 그 다음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항목은 많이 나누어져 있습니다. 주로 인제 그게 중심으로 다루어져 있네요.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외아들 우리 주, 성령잉태, 동정녀 마리아, 고난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고 지옥으로 내려가고 부활, 죽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항목이 제일 많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인데 주로 사도신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을 제일 많이 다루고 있습니다. 제2장에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하나님인데요. 독일어로는 전치사를 썼어요. 안. 곧. 그걸 왜 썼는지에 대한지에 대한 이유는 뒤에 나올 때에 구체적으로 설명하겠습니다. 제목을 하나님을 했어요. 그냥 목적격 처럼 생각되잖아요. 그냥 하나님을. 이잖아요. 전치사가 들어갔다는 것이 뉘앙스가 있어 제가 한번 잠깐 짚은 겁니다. 네 본문을 보겠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거의 모든 기독교인들은 당연히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생각했다. 당연하게 생각한 거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 이러한 아버지상, 그리고 하늘에 대한 상, 이런 것들이 당연한 것처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지. 이렇게 받아들인 것이지. 사람들은 이 신앙 첫 항목이 뭔가 기독교 신앙의 특별한 것이라고 하는 것을,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을 놓치고 있죠. 그걸 느끼지 못한 거죠. 그걸 지나가 버리고 만 것이죠. 그것이 한두 가지겠어요. 지금 그러니까 판넨베르크는 그 특별한 것이 무엇이냐 이야기하려는 것이죠. 그냥 우리는 그러한 특별한 것들을 다 놓치고 그냥 당연하지, 그렇지 이렇게 지나갑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을 다시 반복해서 미안합니다. 요러한 부분들이 정말 많습니다. 질문이 없는 거예요. 질문이 없다고 하는 것은 그 세계를 전혀 모른다는 뜻도 됩니다. 악순환이지요. 모르기 때문에 질문하지 않고 질문하지 않으면 뭐가 중요한 것인지 모를 뿐만 아니라 그 대답도 찾을 수 없는 겁니다. 요런 점에서도 보면 없는 자의 것을 빼앗아서 있는 자에게 많이 줘라 복음서의 비유가 나오잖아요. 달란트의 비유도 그렇고 뭐 비슷한 이야기는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공부나 하나님 인식, 영성의 심화 이런 부분에 있어서도 그쪽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더 열리게 되고요. 아니면 들어가지 않거나 거기에 게으른 사람들에게는 있는 것마저도 자꾸만 닫히는 것 같아요. 이거 뭐 틀림없습니다. 음악 하는 사람들도 똑 같이 그렇게 느끼잖아요. 유행가 가수 같은 사람 들들도 예민한 사람은 하루만 노래 부르지 않아도 음정이나 목소리가 차이가 난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그냥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밋밋하게 생각하고 지나가 버리고 그게 왜 특별한 내용인지를 몰랐다 하는 거죠.

대개 지식인들도 하나님을 하늘에 있다고 하는 생각에 동조하고 있었다. 반면에 기독교적으로 전승된 신앙고백에 혼란한 문제점들은, 그러니까 앞에 있는 것들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거구요. 뭐 그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그냥 일반적인 것을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있고 기독교인들이나 혹은 기독교 지성인들도 그런 것에 대해 크게 문제의식이나 질문이나 거기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하는 것은 그냥 지나가 버리고 그들에게 곤란한 문제점이 무엇이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아들이겠느냐하는 그러한 문제들, 그의 기적적인 출생, 동정녀 탄생, 그리고 죽은 자로 부터의 부활,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는 지성인들이 받아들이기 곤란한 부분이라는 입장을 취하는 거죠. 이해하시겠죠.

이 두 가지가. 판넨베르크의 분석이 틀리지 않습니다. 지식인들도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라는 것이라는 것을 그것을 아주 정확하게는 몰라도 당연하지 그렇지 그렇게 받아들이는 반면에 예수에 관계된 몇몇 문제들,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조금 어떻게 해야 되는지 이해하기 곤란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 거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예수가 가르쳤던 하나님에 대한 순박한 믿음을 방해하는 첨가물로 인식되었다. 예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바로 그 앞에서 나온 기적적인 출생 죽은 자의 부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이러한 것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방해하는 것으로 인식된 거죠. 역주 달아놓은 것을 보겠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이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Christusglaube)은 예수의 기독론적인 지평을 말하는데, 판넨베르그는 여기서 기독교 신앙을 단순히 인간 예수에게만 집중시키고 있는 현대신학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즉 예수만 강조되고 그리스도가 약화되는 현상을 말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기독론은 ‘위로부터’라고 하는 특색을 지닌다. 아 요거는 조금 논란이 될 만한 이야기인데요. 보통 판넨베르그의 신학은 아래로부터의 신학이라고 하거든요. 그리스도론은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식론적 차원에서 그리스도론을 전개해 나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이성 이런 것들을 중요하게 생각하잖아요. 자연적 인식 이런 것들도 강조하기 때문에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이라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한 관점에서는 아래로부터가 맞는데 오늘 저는 여기서 말한 위로부터라고 말한 이 말은 예수에 대한 휴머니즘적인 접근보다도 그 예수에게 있었던 특별한 신성들, 하나님과의 관계들, 이런 쪽에 포커스를 맞춘다고 하는 그러한 이렇게 표현한 것뿐입니다. 거기서 오해가 없으시길 바래요. 그가, 판넨베르크가 예수의 부활을 기독교 신앙의 초석으로 여기는 것도 그의 이러한 신학적 오리엔테이션에 기초한 당연한 귀결이다. 그에 의하면 예수에 대한 신앙도 역시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근거해야만 된다.

이러한 흐름들이 쭉 있었어요. 이러한 흐름들이란 것을 다시 반복하면, 정리하면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는 것이라고 하는 이러한 차원들, 이런 것들을 아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예수에게 있었던 특별한 기적적인 출생이나 부활이나 이런 것들은 받아들이기 곤란한 이러한 흐름들이 있었는데 오늘 날에는 현대에 와서는 상황이 거꾸로 악화되었습니다. 반대로 되었다고 하는 거죠. ‘오늘날 상황은 악화되었다. 세상에서 하나님이 거할 자리는 더 이상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죠. 좀 전까지는, 이 항목, 장의 시작이겠죠.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런 거예요.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당연히 받아들여졌는데 이제는 거꾸로 상황이 전도된 거죠. 상황이 전도된, 거꾸로 된 거예요. 하나님이 거할 자리는 더 이상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렇게 자꾸만 생각이 바뀌는 거는 현대의 어떤 물리학, 자연과학의 변화가 있겠고요. 현실성에 대한 이해가 다르기 때문에 벌어지는 그러한 결과일수도 있습니다. 계속 보겠습니다.

‘신학자들마저도 벌써 하나님의 죽음에 대해서 말한다.’ 하나님은 곤란한 거예요. 예수에게만 집중하면 되는거예요. ‘기독교 전승에 놓여있는 유일하게 확실한 거점은 사랑을 선포한 인간 예수*인 것처럼 보인다.’ 사랑을 선포한 인간예수, 이게 기독교 신앙의 모든 것으로 점점 자리를 잡게 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미국에 있는 하나의 신학운동인 예수 세미나가 하나 대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까지 예수에 대해서 너무 그리스도론적으로 접근해서 신앙적인 차원이죠. 고양된 예수, 그러한 신앙 고백된 예수에 집중했는데 그러지 말고 정말 나사렛에서 활동한 예수로 돌아가자 그러한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민중 신학 이런 것도 사실 역사적 예수에 어떤 중심을 놓는 거구요. 해방신학역시 그러수 있고 현대신학들이 상당히 많이 그런 흐름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여성신학도 그렇다고 볼 수 있겠고요. 사랑을 선포한 인간예수로 만족하는, 그걸로 충분한 그쪽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신현대신학적인 운동이겠습니다. 그것에 대한 역주를 제가 이렇게 달았습니다.

*많은 지성적 기독교인들은 기독교 신앙의 근거를 예수의 휴머니티에서 찾으려고 한다. 구약의 하나님,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로서의 하나님은 더 이상 현대인들에게 실질적으로 다가오지 않고, 하늘에 올라가봤다. 하늘에 아무도 없더라. 하여튼 이렇게 비슷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예수에 근거한 사랑의 실천만이 신앙의 유일한 터전으로 자리하는 경향이 있다. 그건 제가 설명을 했습니다. 60년대의 해방신학, 흑인신학, 여성신학, 정치신학 등이 그것이다. 고걸 딱 이게 무조건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경향이 좀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흐름속에 있는 신학들을 제가 좀 나열한 겁니다. 결국 신(神)죽음의 신학에까지 이르게 된다. 신은 죽어도 아무 상관없는거예요. 왜냐하면 예수가 선포한 사랑만 있기만 하면 되니까 휴머니즘의 극대화문제니까 하나님은 없어도 된다. 사신신학에까지 가능한 겁니다. 반면에 판넨베르크는 초대 교부들의 변증적인 하나님 이해를 기독교 신앙의 토대로 삼고자 한다.

오늘의 상황을 판넨베르크가 지금 설명한 겁니다. 여기에 동의하시나요? 그걸 오늘 우리들의 경우에는 어떻게 연결이 될까요. 우리 한국교회하구요요. 두 가지로 좀 연결할 수 있군요. 하나는 가장 단적으로는 오늘 중산층, 도시, 지성적 교회가 강조하고 있는 복지목회, 복지선교 이러한 프로그램들이 이런 흐름과 연결될 수가 있을 겁니다. 그렇다고 봐야죠. 그리고 또 하나는 예수님에 대한 실존적 만남의 경험, 예수님 영접했다는 그러한 차원들이죠. 두 가지가 조금 다르긴 한데 결국 연결되는 거예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실존적 신앙의 개인구원적인 차원이죠. 어쨌든 여기서도 예수 그리스도가 핵심인 겁니다. Christocentrism 그리스도 센트리시즘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거고 앞서 말씀드린 것은 예수가 전한 하나님 나라의 복지적 차원, 교회가 베풀고 가난한 사람을 어떻게 돕고 그러한 것입니다. 이것도 역시 역사적 예수에 핵심을 둔다고 볼 수 있는 거죠. 그게 당연한 게 아니냐 옳은 게 아니냐 여러분들이 그렇게 생각하실 겁니다.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겁니다. 예수만 독단적으로 떼어놓고 우리나라가 신앙이 지나치게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이거든요. 그게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속에서 자기의 정체성이 가능한 거예요. 그래서 삼위일체론 이것은 늘 긴장감을 놓치지 말아야 됩니다. 이게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주라고 하는 믿음을 갖는 것은 좋지만 그러나 그것이 그것으로 끝나면 안 되는 거죠. 아니 더 근원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이 드러나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날 하나님의 자리는 점점 축소되고 있다고 하는 현실을 우리가 볼 수 있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예수에 대한 신앙으로 대체하려는 신학자들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아무리 진지하게 생각해보았자 그런 노력에는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대담한 결론을 내린 것 같다. 아무리 찾아봐야 하나님은 없다. 하나님은 결국 무신론적인 논증의 싸움판으로 이전투구식으로 그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지 결국은 결론은 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예수 신앙은 충분하다는 입장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유를 지켜내는 작업은 승부를 내다보기 힘든 무모한 싸움처럼 보일 수 있으며, 그 사유를 포기하는 신학자들은 다만 세계관적인 바닥짐*을 내팽개치는 것처럼 보인다.’ 직역이라서요. ‘세계관적 바닥짐’ 역주를 달아 놓은 것을 좀 보실까요.

세계관적 바닥짐(der weltanschauliche Ballast): 바닥짐이라고 하는 것은 배의 중심을 잡기 위해서 밑에 무거운 것을 밑에 달잖아요. 화물선 같은 것은 물을 채운다고 합니다. 균형을 잡는 거죠. 세계관적 균형을 잡는 것은 이란 기독교가 세계관적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필요로 했던 하나님에 대한 사유를 말한다. 하늘에는 하나님이 있어야 한다는 당연한 세계관의 중심을 잡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이제 더 이상 이런 세계관이 필요 없는, 하나님이 하늘에 있어야 될 필요가 없는, 거기 있을 수가 없는 성숙한 시대가 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는 생각을 포기하고, 이거는 정말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인 요소에 하나인데 그거는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고 하는 생각으로 세계관적 중심을 잡는 일로서는 이제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는 거치장스러운 것이 되어서 그러한 성숙한 시대가 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포기하고 단순히 예수의 복음, 즉 사랑의 실천과 휴머니티의 확장에 집중해야한다는 현대 신학의 주장이 있는 거죠. 이것을 판넨베르크는 비판하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는 판넨베르크의 신앙이 상당히 정통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게 근본주의적이고 문자적인 수구적인 차원에서의 정통이 아니라 교부 신학적인 기독교 중심을 잡아내는 그런점에서 정통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은 아주 중요하다고 봅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것을 놓치고 시대정신에 따라서 계속 우리를 변모시켜 나가야 된다면 과연 기독교가 어떻게 될까요? 결국은 일종의 혼합주의로 떨어져 버린다거나 아니면 기독교와는 전혀 다른 변질된 그런 사이비적인 데로 나갈 수 있게 되는 거죠. 일종의 포퓰리즘이라고 할 수 있어요. 시대가 요구하는 것에 계속 부응해가는 그러한 신학의 흐름으로 우리가 빠져들 수 있습니다. 무조건 수구적으로 옛날 것을 지키는 것이 좋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기독교 신학이 처음 시작할 때부터 붙들고 있었던 그것의 근본을 일단 알아야 되잖아요. 그것을 놓치면서, 그것을 모르면서, 모르니까 그런 것 다 포기해 버리려고 하는 거예요. 삼위일체론 같은 것도 이게 오늘 현대신학에서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정말 신학을 아는 사람들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는데 그냥 신학자연하면 실제 기독교 신학의 중심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은 삼위일체론 이런 것들이 헬라철학의 부산물이라고 보고 이런 것들은 오늘날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죠. 자기가 모른다고 하는 사실을 만천하에 공포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겠어요.

만약 신학에서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제거함으로써 기독교 신학이 인간 실존과의 그 어떤 관계를 획득할 수 있다면, 근대 세계에서 어려운 처지에 빠진 기독교의 상황이 완화되지 않겠는가? 현대신학의 어떤 사람들의 요구가 그렇다고 하는거죠. 어리석게 하나님은 하늘에 있는 거라고 이야기하지 말고 접어두고 그런 것 포기하고 그냥 인간실존의, 고통당하고 이러한 휴머니즘이 필요한 이러한 관점으로 접근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가 처한 이 어려운 상황을 뚫고 나갈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느냐 하는 겁니다. 아낌없이 베푸는 사랑에 대한 예수의 사신, 복음선포, 보트샤프트, 예수의 복음선포 이것은 광범위한 차원에서 한 하나님이라는 표상에 의존적이지 않을 수는 없겠는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라고 하는 그러한 사도신경의 하나님 표상과는 상관없이 아낌없는 사랑에 대한 예수의 복음 선포 이런 것이 좀 중심으로 자리잡을 수 있지 않겠는가? 이래야 되지 않겠는가? 그러한 요구가 오늘날 현대신학의 일부에서 주장되고 있다고 하는겁니다. 그리고 예수가 그렇게 몸소 사셨던 베푸는 사랑은 기독교 복음 선포의 고유한 뿌리가 아닌가? 이것만이 복음이 아닌가? 사랑선포가. 이런 이야기 많이 듣잖아요.

오늘날 이처럼 기독교 내부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에 반대하는 그런 것들을 거추장스럽게 생각하는 질문들이 제기된다. 하나님에 대한 사유, 그 생각 그런 것들은 여기 오늘의 상황에서 거추장스러운 세계관적 껍질로서 간주된다. 이 껍질은 기독교적 사랑에 대한 사유를 담지하고 있지만 오늘날 벗어버려야 할 그 무엇을 가리킨다. 상황이 지금 그런 거죠. 이게 좀 진보적인 입장에 있는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들은 현재적으로 고통당하는 민중과의 아주 실제적인 삶의 일치, 이런 것을 복음의 가장 우선적인 요소라고 이야기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바로 제가 앞에서 이야기한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경륜적 삼위일체, 내적 삼위일체 이런 것들이 뭐 말라비틀어진 거냐? 그냥 관념적인 이야기하지 말고 대추회 나가서 투쟁해야 되고 어떤 것 해야 되고. 여러분 그런 것이 무의미하다로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100%사랑에만 전적으로 매달리는 그러한 요구들이 조금 진보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많이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가 그렇게 간단한 것은 아니다. 예수를 기독교적인 눈으로 바라보는 데 아주 익숙해진 사람만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예수와 그의 사랑의 사신으로 대체할 생각을 한다. 요게 번역이 좀 매끄럽지 않군요. 그러니까 예수를 기독교적인 눈으로 바라보는 데 익숙해진 사람, 기독교적인 눈이라고 보다도 오히려 그리스도론적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예수는 우리의 구원자라고 하는 이런 원칙이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것으로 너무 익숙해진 사람들, 그러니까 그 이외는 안 보이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이런 분들을 굉장히 믿음이 좋은 것처럼 우리는 말하지 않습니까? 예수 일원론적인 생각이죠. 여기 딱 꽉 묶여 있어서 다른 것은 전혀 보이지 않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생각, 이건 조금 줄여나가고 모든 걸다 예수님과 사랑의 복음, 이런 것으로만 바꾸어 나가려고 하는 거죠. 제가 진도 나가지 않고 자꾸만 끊어서 죄송합니다. 이런 것들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런 거구요. 그리고 내용을 좀 천천히 나갈 필요도 있어서 그럽니다. 한국교회에 하나님에 대한 설교는 없잖아요. 다 예수님에 대한 설교만 하잖아요. 맨날 예수 믿는다는 이야기만 하구요. 하나님도 이야기하기는 하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 무로부터의 창조, 그분의 종말론적 완성, 그분의 계시, 그분의 통치, 그리고 예수의 부활은 사실은 예수 스스로 능력이 있어서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거든요. 예수의 부활도 사실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더 이해가 되는 거예요. 우리는 그렇지 않잖아요. 그냥 많은 한국의 신자들의 머리속에는 예수님이 무덤속에서 꽁꽁 묶여 있다가 세마포 입고 있다가 툴툴 털어버리고 부욱 능력있게 살아 바깥으로 나온 것처럼 생각을 할 겁니다. 그게 아니거든요. 거기에는 하나님의 창조능력, 종말론적 생명의 능력이 개입하는 거거든요. 우리들이 너무 그리스도 일원론적인 생각에 꽉 묶여 있어갖고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에 대한, 생명의 신비에 대한 눈이 딱 닫혀 버린 것입니다. 그건 없어도 돼. 예수 믿고 내가 딱 매달려서 천국 가면 돼. 이러한 정도로 우리가 신앙생활하고 있는 거죠. 이러한 패러다임에 쌓여 있는 거죠. 하나님에 대한 사유는 점점 축소되는 거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뭔지는 아마 제가 더 설명하지 않을 텐데 눈치는 채셨죠? 그거는 무조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 행위속으로 들어가는 거거든요. 이 세계 물리 생물, 고고학 이 모든 것들이 다 사실은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검토이기 때문에 그런 것들과의 대화가 끊이지 말아야 되죠.

우리가 다른 인간에게서와 마찬가지로 한 인간으로서의 예수와 관계를 갖게 될 때 왜 우리는 여전히 예수를 믿어야만 하는가? 이러한 문제들이 지금 여기에 들어있다고 하는 겁니다. 예수에 대한 믿음은 그 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현재에 대한 확신에 달려있다. 그게 중요하다고 하는거예요. 다시 한 번 그 문장을 읽겠습니다. 여러분 밑줄을 쳐놓으세요. 예수에 대한 믿음은 그 분 안에 있는, 그 분 안에서 활동하는 하나님의 현재에 대한 확신에 달려있다. 하나님의 현재,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현재, 게겐 바르트 고테스라고 되어 있을겁니다. 게겐 바르트 현재라고 하는, 하나님의 현재 행위,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파루시아 이런 것들이죠. 예수와 함께 하는 하나님의 현재만이 예수 사건의 보편타당성을 담보한다. 베푸는 사랑이라고 하는 사상, 이러한 가르침은 그것 스스로 수행될 수 없다. 이건 참 중요한 대목이니까 잘 생각하십시오. 보겠습니다. 우리는 100% 사랑이라고 하는 것에 미혹될 경우가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고걸 잘 생각하셔야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예수의 사유, 예수의 생각을 전제하지 않으면 이웃과 원수 사랑이라는 사신(使信, Botschaft) 복음선포는 인간을 극단적으로 초긴장 상태로 이끌고 갈 뿐이다. 이것 정말 중요한 지적이죠. 사랑, 이웃사랑이라고 하는 그것에만 매달려 있으면 사랑을 할 수 없거든요. 그것을 강요받으면 그게 하나님의 현재라고 하는 어떤 사건하고 연결되지 않고 독단되게 따로 떨어져서 그것만 강조하게 되면 그러면 우리는 신경증적인 초긴장상태로 빠질 수밖에 없는 거죠. 불안한 거죠. 이런 게 한국 교회 신자들에게 얼마나 많이 나타나는지 모릅니다. 이런 점에서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사랑에 대한 사상을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요구라고 비판했다. 이러한 심층심리학자 철학자들이 참 정확하게 보고 있어요. 그들이 기독교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지만 그러나 우리들은 그들에게 감사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들이 교회현상에 나타나 있는 잘못된 현상을 정확하게 진단해 주기 때문에 그런거죠. “이렇게 넘쳐나는 사랑의 인플레이션은 그 가치를 저하시킬 뿐이지 그 절박성을 극복할 수는 없다.” 프로이트가 그렇게 말했나 보네요. 인용한 부분입니다. 사랑, 사랑 자꾸만 교회 안에서 자꾸만 이야기하는데 그거만 이야기하면 그건 문제가 많게 되는 겁니다. 아. 예수님 사랑, 사랑을 받아서 사랑의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도취되는 거는 자기감정일 수 있구요. 자기 속임수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느 때 누구를 사랑해야 되겠다는 마음이 우러나오게 되죠. 그 자체를 부정할 수 없는 거구요. 그러나 이게 교회 안에서 지나치게 사랑이라고 하는 이 말들이 아주 독립적으로 독단적으로 과잉 생산되면 정말 필요할 때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죠. 언어유희에 빠질수 있는 거죠. 그렇죠? 동의하시죠. 교회안에서 맨날 사랑 타령하지만 기독교인이 일반 사람들보다 실질적으로 사랑의 절박성 그것을 이해하고 있고 또 그 안에 들어갔다고 말할 수 없잖아요. 똑 같죠. 큰 차이도 없죠.

이게 왜 그럴까요? 사실 예수의 사랑윤리는 그 사랑이 우선 모든 인간들에게 원래적으로 주어진, 일종의 신적인 현실성으로서 이해되어야지, 신적인 현실성으로 이해되어야지. 그게 아니라 인간에 의해 현실화되어야 할 요구로 이해된다면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요청이 될 수밖에 없다. 자꾸 노력을 해갖고 사랑을 성취해야 될 거라고 생각해야 된다면 아예 감당할 수 없는 것에 강요를 받게 되는 거죠. 지탱되는 거죠. 율법적인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그것이 말 그대로 현실적이어야만 한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이 실제로 상호간에 호의적이어야만 할 것이다. 번역이 좀 뉘앙스가 죽은 것 같죠. 좀 더 나가겠습니다. 이를 위해서 사람들이 반드시 예수에게 와야 할 필요가 전혀 없다. 소크라테스나 공자와 같은 인류의 다른 위대한 선생이나 모범자에게 오는 것과 결코 다르지 않다. 예. 사랑이라고 하는 거를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의 현재 예수에게 있었던 그것과 깊이 연관되지 않게 된다면 여기 읽은 대로 소크라테스나 공자나 부처나 이런 인류 위대한 선생에게 가는 것과 차이 하나도 없다. 차이가 없다고 그렇게 보네요. 그러나 원래는 차이, 다른 거죠. 뭐가 다른가요? 그게 바로 하나님,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 고백한 사도신경을 중심으로 하는 초기 기독교와 유대 구약성서와 연관된 공동체의 고유한 신앙의 토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가 보여준 이웃 사랑이 하나님에 대한 그의 이해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은 그저 역사적으로 주목받을 만한 것이 아니다. 역사적인 관점으로만 아니라 오히려 그 안에 뿌리가 놓여 있다. 예수는 완전하고 철저하게 현재 세계의 절박한 변화를 기대하는 가운데서 살았다. 이 변화를 통해서 하나님은 그의 통치와 그의 나라를 끌어올리고자 했다. 예수의 경우에 도래하는 예수님의 하나님 사상, 하나님 이해의 뿌리를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의 경우에 도래하는 하나님,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 가까이 온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는 곧 하나님인데요. 하나님은 만사를 규정하는 현실성*이다. 역주를 달았습니다.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하나님은 만사를 규정하는 현실성(die alles bestimmende Wirklichkeit)이다.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아직 완료되지 않은 만물은 종말론적으로 존재하는 미래의 하나님에 의해서 그 운명이 결정된다는 점에서 하나님에게 의존적일 수밖에 없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에 대한 기독론적 신앙에 근거하고 있지만, 동시에 만물을 규정하는 현실성, 요 만물을 규정하는 현실성이라는 것도 많이 좀 생각이 필요한데요. 하나님을 왜 그렇게 부르냐? 좀 못마땅하다. 거룩하고 무소불위한 그런 분이지. 만물을 규정하는 현실성, 철학적인 표현이 아니냐? 여러분들이 그런데 대해서 그렇게 과민반응을 일으키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미 모세가 호렙산에서 이름을 하나님에게 물었을 때 나는 나다 이렇게 대답하셨잖아요. 이름을 가르쳐 주시지 않으셨다는 겁니다. 나는 나다. 철학적인 그러한 표현이지 아니겠습니까? 만물을 규정한 현실성으로 규정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에 대한 기독론적인 신앙에 근거하고 있지만 동시에 만물을 규정하는 현실성, 하나님 안에서 그 내용이 채워져야 하기 때문에 결국 보편사적 지평에서 자신의 진리성을 드러내야 한다. 일원론적인 차원에서 머물지 말고요.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과의 관계에, 변증법적인, 삼위일체론적인 그러한 긴장감을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되는거죠. 긴장감이라고 하는 말이 정확한 표현은 아닙니다. 기독론 일원론적인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론 적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그분안에 활동하시는 하나님 현재에 대한 믿음이다.

하나님의 미래가 보여주는 강력한 불빛 안에서 예수는 자신의 현재를 보았다.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고 생각했으며, 세상을 두렵고 떨게 할 재판관에게서 직접 보냄을 받음으로써 모든 이들을 통치하는 하나님의 구원에 깃든 사랑을 인식했다.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심판자 모든 것들을 결정하는 심판자의 부름을 받은 그리고 거기에 일치한, 그러한 인식이라고 할까요? 그러한 사유라고 할까요? 그런 것이 예수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다가오는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해야할 자신의 고유한 사명이 예수에게는 사랑에 대한 증거였다. 사랑만 뚝 떼어놓고 보면 안된다는 거죠. 그냥 하나님의 나라, 임박한 하나님나라의 요청의 관계성 속에서 가능한 겁니다. 왜냐하면 이런 선포는 죄인으로 하여금 적시에 회심을 불러일으키며, 이로써 결정적인 순간에 도래하는 나라를 승계할 가능성이 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네 고 마지막 부분은 여러분들이 더 생각해 보십시오. 이야기할 것이 좀 있기는 있는 것 같은데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오늘 하나님에 대한 항목으로 들어온 거거든요. 여러분들이 느끼셨는지 모르지만 기독교 신앙이 단순하게 예수 믿고 아 내가 죄 용서 받고 그걸 영접한 기쁨으로 살고 그리고 죽어서 천당간다는 그러한 차원에 머물러 있지 않다고 하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틀렸다는 말은 아니고요. 하나님, 성령, 이러한 삼위일체론적인 그러한 관점에서 예수에 대한 신앙이 더 깊어져야 된다고 하는 겁니다. 연결, 예수와 하나님은 다르죠. 다르면서도 본질적으로 하나가 된 어떤 그 깊이, 영적인 깊이, 어떤 틈, 틈이면서 일치되는 그 어떤 것들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제가 말로 설명할 수가 정말 어렵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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